전두환 정권 시절 '신군부'에 의한 대표적 공안사건인 '학림사건' 피해자들이 31년 만에 대법원에서 무죄 확정 판결을 받았다.
'학림(學林)'은 전국민주학생연맹(전민학련)이 첫 모임을 한 서울 대학로 학림다방에서 유래했으며, 당시 경찰은 '숲(林)에서 무성한 학생운동 조직을 일망타진했다'는 뜻으로 이 용어를 사용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번 대법원 판결로 이태복(62) 전 보건복지부 장관과 민병두(54) 민주통합당 의원, 최경환(53) 김대중평화센터 공보실장, 최규엽(59) 새세상연구소장, 엄주웅(54) 방송통신심의위원회 상임위원 등 사건 피해자 24명이 억울한 누명을 풀 수 있게 됐다.
김대중 정부에서 보건복지부장관을 지낸 이태복 전 장관 등은 1981년 6월 민주운동과 노동3권 보장, 최저임금제 도입 등을 목적으로 전국민주학생연맹(전민학련)과 전국민주노동자연맹(전민노련)을 결성해 활동했다는 이유로 당시 내무부 치안본부 수사관들에 의해 불법 연행됐다.
대공분실에 끌려간 이들은 19~44일간 불법 감금된 채 수사관들로부터 잠 안 재우기, 주먹ㆍ워커발ㆍ각목 등에 의한 전신 구타, 발바닥 때리기, 특히 물고문, 전기고문, 관절뽑기 등 형언할 수 없는 끔찍한 고문과 가혹행위를 당하며 거짓자백을 강요당했다.
검찰은 경찰조사를 토대로 이들을 상대로 피의자신문조서를 작성했는데, 검찰 수사에서도 고문을 했던 수사관들이 계속 수사에 참여해 이들은 임의성 없는 심리상태가 계속돼 경찰에서와 동일한 내용의 자백을 하게 됐다.
결국 당시 서울지검은 이들 중 26명을 국가보안법 등 혐의로 기소했고, 법원은 이들에 대해 최고 무기징역 등 중형을 선고했다.
이들은 당시 재판 과정에서 "불법연행을 당해 장기간 불법구금 상태에서 수사를 받았고, 수사 과정에서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저지를 수 없는 온갖 잔인한 고문과 가혹행위를 당했으며, 이런 불법수사를 통해 사건이 조작됐다"고 호소했으나 재판부는 받아들이지 않고 모두 유죄를 선고했다.
하지만 '전민학련'은 폭력혁명이나 사회주의 혁명을 목표로 한 것이 아니었으며, 당시 정부의 비민주성을 사회에 호소하고 촉구함으로써 20년 동안 학생운동이 내걸어 온 학원의 민주화와 사회의 민주화를 목적으로 했던 순수한 학생운동 단체였다. 때문에 폭력혁명을 위한 준비는 고사하고 하다못해 시위를 격화시키기 위한 유인물이나 화염병조차 준비하려는 의도조차 가지고 있지 않았다.
'전민노련'도 우리 사회의 근대화 과정에서 중요한 문제로 대두된 노동문제, 특히 생존권적 기본권, 저임금문제, 장시간 노동문제 등의 점진적인 해결을 그 목표로 한 것이지, 공산주의 사회를 찬양하거나 실현하기 위한 반국가단체가 아니었다.
이후 진실ㆍ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는 이태복 등의 신청에 따라 진실규명을 한 결과 2009년 6월 "치안본부 수사관들이 이들을 영장 없이 연행해 불법 감금한 채 고문과 가혹행위를 통해 진술을 강요했고, 검찰이 경찰에서의 자백내용에 따라 법원에 기소해 중형을 선고받게 한 인권침해 사건"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이에 과거사정리위원회는 "국가는 경찰이 수사과정에서 이들에 대한 불법구금과 고문, 가혹행위를 한 점, 검찰이 경찰의 불법행위를 밝히지 않고 수사하지 않은 점 등에 대해 피해자들에게 사과하고 화해를 이루는 적절한 조치가 필요하다. 국가는 위법한 확정 판결에 대해 피해자의 피해와 명예를 회복시키기 위해 재심 조치를 취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권고했다.
법원은 이태복 전 장관 등 24명의 재심 청구를 받아들였고, 재심을 맡은 서울고법 제5형사부(재판장 안영진 부장판사)는 2010년 12월 국가보안법과 계엄법 위반에 대해 무죄를 선고하고, 집시법 위반 혐의에 대해 면소 판결했다.
재판부는 "이른바 '전민학련ㆍ전민노련', '학림' 사건으로 불리는 이 사건은 12ㆍ12 군사반란과 계엄령 및 5ㆍ18 광주민주화운동의 무력진압을 통해 집권한 내란주동자 전두환 등 신군부세력이 자신들의 권력기반의 안정을 기하고 국민들의 저항의지를 꺾으려고 하던 중, 국가보안법을 악용해 민주화운동세력인 피고인들에 의한 정당한 학생운동과 노동운동을 불법강제연행, 장기간의 불법구금, 고문, 협박 등의 불법수단을 사용함으로써 반국가단체로 조작하고, 좌익용공세력으로 둔갑시킨 것"이라고 밝혔다.
이어 "그 후 전두환 정권은 이후에도 국가보안법을 악용해 민주화운동 세력을 광범위하게 탄압해 이 사건 이후에도 아람회 사건(1981년 7월), 부림 사건(1981년 9월), 오송회 사건(1982년 11월) 등이 연이어 발생하게 됐다"고 덧붙였다.
재판부는 "피고인들은 경찰에서의 자백은 폭행ㆍ협박ㆍ고문ㆍ회유에 의한 것이라고 검찰에서 주장했고, 원심 및 재심대상 항소심 법정에서도 경찰 및 검찰에서의 자백은 폭행ㆍ협박ㆍ고문ㆍ회유로 인한 상태에서 허위로 자백한 것이라고 경위를 자세하게 주장하면서 공소사실을 부인했다"며 "그러나 법원은 피고인들이 수사기관에서 폭행ㆍ협박ㆍ고문을 당했다는 점에 대한 특별한 증거조사도 하지 않은 채 허위 자백을 기초로 피고인들에 대해 무기징역 등의 중형을 선고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이에 우리 재판부는 과거 권위주의 시대에 국가가 범한 과오에 대해, 그리고 피고인들의 작은 신음에도 귀기울여야 할 책무를 다하지 못한 과거 재판부의 과오에 대해 용서를 구한다"고 고개를 숙였다.
대법원 제1부(주심 이인복 대법관)도 국가보안법, 계엄법 위반 등의 혐의로 기소돼 7년4개월간 복역한 이태복 전 장관 등 24명에 대한 재심사건 상고심에서 무죄 및 면소 판결을 내린 원심을 확정했다고 15일 밝혔다.
재판부는 "피고인이 수사기관에서 고문 등 가혹행위로 인해 임의성 없는 자백을 하고 그 후 검사 조사단계에서도 임의성 없는 심리상태가 계속돼 동일한 내용의 자백을 했다면 검사의 조사단계에서 고문 등 자백의 강요행위가 없었다고 해도 검사 앞에서의 자백도 임의성 없는 자백이라고 봐야 한다"고 밝혔다.
이어 "원심이 검사 작성의 피고인들에 대한 피의자신문조서가 임의성 없는 자백에 해당해 증거능력을 부정하고, 나머지 증거들만으로는 공소사실을 인정하기 부족하다는 이유로 무죄를 선고한 것은 정당하다"고 판시했다.
또 계엄법 위반과 관련해서도 "1979년 12월12일 군사반란 및 1980년 5월18일 광주민주화항쟁을 전후해 이른바 '신군부'에 의해 행해진 일련의 행위는 내란죄로서 헌정질서 파괴 범죄에 해당한다"며 "피고인들이 그런 헌정질서 파괴 범행을 저지하거나 반대함으로써 헌법의 존립과 헌정질서를 수호하기 위한 정당한 행위로 범죄가 되지 않는다며 무죄를 선고한 원심은 정당하다"고 판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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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가장 중심적인 배후 조자는 지금도 떵떵 거리고 잘사는데 .....하긴 29만원밖에 없다니까
죄를 안묻는거예요 못묻는거예요
저보다 불쌍 하네요 제가 아무리 힘들어도 그보다는 많을테니까요
아주 잘 된일입니다.
세월이 흘러서 역사가 되어가는 시점에서라도 무죄가 선고 되었다는 것은
정의와 진실은 반드시 승리 할 수 있다는 것을 확인 시켜주는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