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17일 [연중 제33주일]
마르코 13,24-32
종말의 법칙: 죽음의 법칙을 알면 생존 법칙도 보인다
오늘 복음은 세상의 종말에 대한, 적어도 이스라엘의 종말에 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죽음은 생각하기 싫은 주제입니다.
그러나 죽음을 묵상할수록 더 오래 살 수 있는 생존의 방법을 터득하게 됨을 알아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멸망의 징조를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 무렵 큰 환난에 뒤이어 해는 어두워지고 달은 빛을 내지 않으며 별들은 하늘에서 떨어지고
하늘의 세력들은 흔들릴 것이다.”
우선 세상의 한때 잘 나갔다가 망하게 된 여러 사례들을 살펴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그들에게서도 분명 태양과 달, 별이 빛을 잃는 일이 일어났을 것입니다.
먼저 한때 휴대전화 분야의 글로벌 리더였던 노키아 제국의 멸망을 살펴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노키아는 자신의 명성과 기술에 안주하여 새롭게 개발되는 애플과 구글의
터치스크린 시스템을 거부하였습니다.
잠깐이었지만, 더는 그 기술을 따라잡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유명한 코닥의 멸망을 살펴볼까요? 코닥은 세계 카메라 필름의 대부분을 장악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디지털카메라를 발명하게 되었습니다. 디지털카메라는 결국 자기 이익을 갉아 먹는 결과를 초래할 것임으로 그 기술을 묻어버렸습니다.
다른 회사들에서 디지털카메라를 발명하고
실용화하였을 때 그들을 따라잡기에는 역부족이었습니다.
반면 삼성 이건희 회장이 1993년 프랑크푸르트에서 자사 제품을 사주는 고객들에게 불량품을 내놓는 게 부끄럽지도 않으냐고 호통을 치며, “아내와 자식 빼고 다 바꿔라!”라고 한 일이 있었습니다.
1995년 삼성 휴대폰에 심각한 결함이 발견된다는 말을 듣고는 이건희 회장은 공장에서 휴대폰, 텔레비전, 팩스기 등 불량품을 모두 폐기하라고 명령했습니다.
추정 가치 약 500억 원(당시 약 5,000만 달러)에 해당하는 자신들이 만든 상품이 불타 없어지는
모습을 본 삼성 직원들의 마음은 어땠을까요? 자기 이익만이 아닌 고객을 감동하게 하려는 마음을 회복했을 것입니다.
고 이병철 삼성 창업자는 이런 말들을 했습니다.
“경영 합리화로 잉여를 많이 올려 궁극적으로 국가에 봉사하는 것이 기업인의 본분이며 사회적 의무다.”(1976년 언론기고)
자기 이익을 우선시하면 그 상품을 사용하는 사람의 이익은 잊히게 됩니다.
그러면 구매자들로부터 외면당하고 그러면 망하게 됩니다.
모든 성공한 사람들은 처음의 관심은 고객들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나약함으로 차차 자기 이익 먼저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면 망하는 것입니다.
우리나라도 홍익인간, 곧 널리 사람을 이롭게 하라는 이념으로 생겼습니다.
이것이 잊힐 때는 망하게 됩니다.
그래서 그 계명을 기억하게 할 필요가 있습니다.
자기 이익을 조금은 희생하면서 본래의 정신을 회복하게 해야 합니다.
이것을 ‘예배’라고 합니다.
이건희 회장은 자신도 모르게 아버지의 계명을 위해 예배를 드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다시 살려면 규칙적인 화형식을 해야 합니다.
사람은 망각의 동물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셋째 날에 땅에서 나무들이 자라게 하셨습니다.
그 나무들이 인간이라고 생각해 봅시다.
인간이 멸망하지 않으려면 자신이 하느님과 이웃을 위한 존재임을 되새겨야 합니다.
이것을 위해 하느님께서는 해와 달과 별을 만드셨습니다.
해는 하루, 달은 한 달, 별은 1년 주기로 돌아옵니다.
이 규칙적인 예배와 기도가 우리를 살리는 유일한 길입니다.
성경에는 하루, 한 달, 1년 주기로 규칙적인 예배 규정을 수없이 나열하고 있습니다.
이 예배가 무시되는 날 종말입니다.
이것이 해는 어두워지고 달은 빛을 잃으며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는 일입니다.
대전 ‘성심당’을 모델로 삼읍시다.
창업자 임길순 씨는 “평생 어려운 이웃을 위해 살겠다.”라는 정신으로 ‘성심’(예수님 마음)으로 가게명을 지었습니다.
여기서도 화형식이 있었습니다.
사업 확장을 위해 무리하게 빚을 냈다가 공장에 불이 난 것입니다.
이때부터 다시 마음을 다잡고 후손들은 창업자의 홍익인간의 마음으로 시작하여 5개의 매장으로 순이익이 3,400개 대기업 파리바게뜨를 넘어섰습니다.
지금도 그분들은 성당에 나와 기도하며 하느님과 창업자의 정신을 되새기고 있습니다.
사용자가 만든 물품이 제 역할을 하지 않으면 괜히 그것에 에너지를 쓰지 않기 위해 그것을 파기합니다.
제 역할 수행을 위해 우리의 태양과 달과 별빛이 흐려지지 않도록 합시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11월17일 [연중 제33주일]
복음: 마르 13,24-32
걷다 보면 발이 더러워지기 마련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에게는 유달리 목에 걸린 가시 같은 존재, 아픈 손가락 같은 존재들이 많습니다.
바로 작고 가난한 이들입니다.
어쩔 수 없이 고향을 등진 난민들, 이주민들, 재소자들, 환자들, 노인들, 가난한 사람들...
이런 분들을 따뜻하게 품어 안고 동반하려는 교황님의 의지가 대단합니다.
교황님께서는 가난한 이들을 총애하시는 당신의 의지를 만천하에 드러내셨는데, 그것을 바로 오늘, 연중 제33주일을 세계 가난한 이의 날로 정한 것입니다.
교황님께서 2015년 미국을 방문하셨을 때 기억이 생생합니다.
미국 의회 연설에서 강대국의 횡포를 신랄하게 지적하셨습니다.
야만적인 자본주의, 고삐 풀린 자본주의의 횡포로 인한 부의 불균형에 대한 개선을 강하게 촉구하셨습니다.
그런 와중에도 미국 상하원들은 마음 속으로 큰 기대를 하고 있었습니다.
아마 연설이 끝나고 교황님과 함께 하는 만찬이 준비되지 않을까?
식사 후에는 교황님과 찍은 인생샷 사진 한 장 건질 수 있지 않을까?
그러나 교황님은 연설이 끝난 후 점심 약속이 있다면서 서둘러 자리를 떴습니다.
대체 어떤 사람과 점심 약속이 되었을까?
대통령? 아니면 미국 주교단? 모두 아니었습니다.
교황님께서는 성 패트릭 성당으로 자리를 옮겨 300여명의 노숙자들과 함께 간소한 점심식사를 나누었습니다.
자신이 작은 이들의 사목자요 동반자임을 만천하에 드러내셨습니다.
함께 식사를 나눈 노숙자들을 만나 이렇게 위로했습니다.
“여러분, 힘내십시오. 저도 이민자 가족입니다. 어떤 어려움에도 낙담하지 마십시오.
그리고는 또 다른 곳으로 장소를 옮기셨는데, 그곳은 교도소였습니다.
거기서 재소자들과 만나 시간을 보내시면서 이렇게 격려하셨습니다.
“걷다 보면 발이 더러워지기 마련입니다.
이곳에 머무시는 동안 더러워진 발을 깨끗하게 잘 씻기 바랍니다.”
이혼 후 재혼한 가정과 그 자녀들에 대한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사목적 배려에 대해
노골적으로 반기를 드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교황님은 단호하게 직진하십니다.
“실수와 죄악은 단죄돼야 하지만, 잘못을 저지르는 사람은 이해받고 사랑받아야 합니다.
하느님의 자비를 바탕으로 현대 가정의 실제 삶과 현실을 고려해야 합니다.
그들의 잘못을 단죄하기보다는, 이혼으로 고통을 겪고 있는 가정들을 위해서 교회가 무엇을 해줄 수 있을 것인가 고민합시다.”
“우리 교회는 야전병원입니다.
그 안에서 성체는 완전해진 자들에 대한 포상이 아니라 병자들을 위한 치료약입니다.”
오늘 우리 한국 교회는 가난한 이들을 향한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우선적 선택과 극진한 사랑을 얼마나 본받고자 노력하고 있는지 진지하게 성찰해보는 하루가 되면 좋겠습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연중 제33주일 강론>
(2024. 11. 17.)(마르 13,24-32)
<실감나지 않아도, ‘이제 곧’ 이루어진다고 믿어야 합니다.>
“그 무렵 환난에 뒤이어 해는 어두워지고 달은 빛을 내지 않으며 별들은 하늘에서 떨어지고 하늘의 세력들은 흔들릴 것이다.
그때에 ‘사람의 아들이’ 큰 권능과 영광을 떨치며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사람들이 볼 것이다.
그때에 사람의 아들은 천사들을 보내어, 자기가 선택한 이들을 땅 끝에서 하늘 끝까지 사방에서 모을 것이다.
너희는 무화과나무를 보고 그 비유를 깨달아라. 어느덧 가지가 부드러워지고 잎이 돋으면 여름이 가까이 온 줄 알게 된다.
이와 같이 너희도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보거든, 사람의 아들이 문 가까이 온 줄 알아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세대가 지나기 전에 이 모든 일이 일어날 것이다.
하늘과 땅은 사라질지라도 내 말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 날과 그 시간은 아무도 모른다.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아버지만 아신다(마르 13,24-32).”
1) 종말은, ‘우주 전체’를 대상으로 하는 사건입니다.
또 최후의 심판은 ‘모든 사람’을 대상으로 하는 일입니다.
24절과 25절의 ‘해, 달, 별들, 하늘의 세력들’에 관한 묘사는, 종말의 모습을 나타내는 단순한 묘사가 아니라, 우주 전체가 종말을 맞이한다는 것을 나타내는 묘사입니다.
<지구를 떠나서 다른 별로 간다고 해도 종말을 피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또 ‘모든 사람’을 대상으로 해서 심판이 이루어지기 때문에, ‘남의 일’이 아니라 ‘나의 일’입니다.
하느님은 그리스도교 신앙인들만의 하느님이 아니라 ‘모든 사람’의 하느님입니다.
신앙과 종교가 달라도, 또는 종교가 없어도, 무신론자라고 해도, 종말과 최후의 심판을 피할 수는 없습니다.
“사람들이 볼 것이다.”는 “모든 사람이 볼 것이다.”입니다.
이 말씀은, ‘모든 사람’이 재림하신 예수님께서 집행하시는 심판을 받게 된다는 뜻입니다.
‘자기가 선택한 이들’은 ‘구원받을 자격을 얻은 이들’입니다.
<예수님께서 미리 선택해 놓으셨다는 뜻이 아닙니다.>
“땅 끝에서 하늘 끝까지 사방에서 모을 것이다.”는
“한 사람도 빠짐없이 모두 구원할 것이다.”입니다.
<억울하게 누락되는 경우는 없다는 뜻입니다.>
2) 여기서 ‘여름’은 ‘추수철’을 뜻하고, ‘추수’는 ‘최후의 심판’을 상징합니다.
‘가까이 왔다.’는 ‘이미 시작되었다.’입니다.
따라서 ‘여름이 가까이 왔다.’는 말은, 종말과 최후의 심판이 이미 시작되었다는 뜻입니다.
“사람의 아들이 문 가까이 온 줄 알아라.” 라는 말씀은, 당신의 재림이 ‘곧’ 이루어진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셨을 때, 그때가 종말의 하느님 나라가 시작된 때라는 것이 우리 교회의 믿음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복음 선포는 ‘종말 선포’이기도 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첫 복음 선포는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입니다(마르 1,15).
이 선포는, 종말의 하느님 나라가 시작되었으니
‘지금’ 회개하고 당신을 믿으라는 선포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회개를 선포할 때, “도끼가 이미 나무뿌리에 닿아 있다.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는 모두 찍혀서
불 속에 던져진다(마태 3,10).” 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은 심판이 ‘이미’ 시작되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일흔두 제자를 파견하실 때, “어떤 고을에 들어가든지 너희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한길에 나가 말하여라.
‘여러분의 고을에서 우리 발에 묻은 먼지까지
여러분에게 털어버리고 갑니다.
그러나 이것만은 알아 두십시오.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날에는 소돔이 그 고을보다 견디기 쉬울
것이다(루카 10,11-12).”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3) 우리는 모두 ‘종말의 하느님 나라’ 라는 목적지까지 가는 기차에 탄 사람들입니다.
종점이 분명히 정해져 있기 때문에, 기차가 출발할 때 이미 종말이 시작된 것입니다.
그런데 그곳에 도착하기까지 시간이 얼마나 걸리는지, 남아 있는 시간이 얼마나 되는지
아무도 모른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예수님께서 계속 강조하시는 것은 ‘이제 곧’입니다.
곧 도착하니까 기차에서 내릴 준비를 하고 있으라는 것이 종말에 관한 말씀들의 뜻입니다.
<나중으로 미루지 말고 ‘지금’ 대비하라는 것입니다.>
“이 세대가 지나기 전에 이 모든 일이 일어날 것이다.” 라는 말씀에서 ‘이 세대’가 어떤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인지 확실하지 않은데, 어떻든 지금 강조되고 있는 것은 아무도 종말과 심판을 피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하늘과 땅은 사라질지라도 내 말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라는 말씀은, 종말과 재림과 심판은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것을 강조하신 말씀입니다.
4) “그러나 그 날과 그 시간은 아무도 모른다.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아버지만 아신다.” 라는 말씀은, 종말의 날과 시간을 정하는 것은 ‘아버지 하느님’만의 권한이라는 뜻이기도 하고, 그 날과 그 시간을 미리 계산하려고 하지 말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삼위일체 안에서 아버지와 예수님은 하나이기 때문에, 아버지께서 알고 계시는 것은 모두 예수님도 알고 계십니다.
따라서 “아들도 모르고 아버지만 아신다.” 라는 말씀은, “아들은 말할 수 없고, 그것을 선포하는 것은 아버지께서 직접 하실 일이다.”로 해석됩니다.
<그 날과 그 시간이 언제인지 결정하고, 또 그것을 사람들에게 말하는 것은 아버지께서 당신만의 권한으로 직접 하신다는 것입니다.>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