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꽃의 묵시록 / 마종기
1
일 년 만에 사도 요한이
깊은 바위 동굴에서 나온다.
에게 해협의 파트모스 돌섬.
햇살은 예년같이 따뜻하다.
너무 늙어 앞이 잘 보이지 않는다.
받아놓은 빗물을 한 잔 마시고
서로 사랑하라고 손을 흔든다.
예수가 죽은 지도 오래되었는데
돌길을 천천히 걸어가면서
흩날리는 저 백발은 무슨 뜻인가.
2
요한이 풍랑의 목선에 띄워 보낸
일곱 교회에 보낸 편지가 도착했다.
오랜 바닷길을 흘러온 말의 그림자.
벌칙과 순서와 가설에 찢겨진 채
사랑과 고통의 진심이 잘 보이지 않는다.
파도 높은 수평선도 잘 보이지 않는다.
3
신약의 묵시록을 썼다는 요한의 동굴,
물 한 잔 돌상 위에 얹어놓은 채
희랍 정교의 젊은 신부가 졸고 앉았다.
검고 긴 모자를 눌러쓴 해맑은 얼굴에
어려운 꿈의 幻視가 간단하게 그려 있다.
돌층계 수십 개 딛고 굴 밖으로 나오니
섬에 사는 바람이 얼굴을 씻어주고
흔적으로 모여 있는 들꽃들이 몰려와
서로 사랑하라고 목소리 죽여 속삭인다.
파도 소리 때문에 꼭 누구의 말이었는지
내 두 다리 떨게 하던 그 목소리의 무늬.
진하고 뜨거운 들꽃만 흔들리고 있었다.
- 마종기,『새들의 꿈에서는 나무 냄새가 난다』(문학과지성사, 2002)
카페 게시글
진달래詩선
들꽃의 묵시록 / 마종기
씨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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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10.16 04: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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