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남주 金南柱 (1926~1994)】 "「시는 투쟁을 호소하는 나팔소리이다」"
1945년 10월 16일 전라남도 해남군 삼산면 봉학리 535번지에서 아버지 김봉수와 어머니 문일님 사이에서 3남 3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고향 해남군에서 삼화국민학교, 해남중학교를 졸업하고 광주시로 올라왔다. 1964년 광주제일고등학교에 입학했으나 학교에 적응하지 못해 이듬해 자퇴했고, 1969년 대학교 입학자격 검정고시에 합격한 뒤 전남대학교 문리과대학 영어영문학과에 입학했다.
1972년 유신 헌법이 선포되자 이강(李綱) 등과 전국 최초로 반(反)유신, 반(反)파쇼 지하신문인 《함성》을 제작했다. 《함성》지는 주로 유신독재에 대한 고발을 주제로 다뤘고 후에는 전국적으로 신문을 확산시키고자 《고발》로 명칭을 바꾸기도 했다. 이로 인해 1973년에 반공법 위반으로 구속되어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는다. 8개월 만에 출소했지만, 이 사건으로 전남대학교에서 제적당한다.
출소 후 해남군으로 낙향하여 잠시 농업에 종사하는 중에 《창작과 비평》지에 《진혼가》, 《잿더미》 등 7편의 시를 발표했으며, 1975년에는 광주시로 다시 올라와 사회과학서점인 '카프카'를 개설했다. 1978년에 상경하여 남조선민족해방전선준비위원회(약칭 남민전)에 가입, 활동하다가 1979년 서울에서 체포되어 구속됐다. 이듬해에 이 사건으로 광주교도소에 수감되었다.
징역 15년형을 선고받아 1979년부터 광주교도소에서 복역 중에 첫 시집인 《진혼가》, 《나의 칼 나의 피》, 《조국은 하나다》, 《아침 저녁으로 읽기 위하여》 같은 굵직한 시집을 출간했으며 시집들은 교도관에게 부탁했다. 시집은 주로 우유갑이나 심지어 낙엽에 손톱이나 이쑤시개, 날카로운 도구들로 꾹꾹 눌러 썼으며, 교도관이 시인의 아내에게 전달했다. 이렇게 옥중에서 쓴 그의 첫 시집이 《진혼가》로 1984년에 출간됐으며, 문학계에서 큰 파장이 있었다.
이후 광주교도소에서 전주교도소로 이감되었고, 1988년 12월 21일 형집행정지로 9년 3개월 만에 석방되었다. 그러나 1994년 2월 13일 새벽 2시 45분에 서울특별시 종로구 평동 서울 고려병원(現 강북삼성병원) 지병인 췌장암으로 사망했다. 사후 유해는 광주광역시 북구 망월동 국립 5.18 민주묘지에 안장되었다
이 벽은
나라 안팎의 자본가들이
그들의 재산 그들의 특권을 지키기 위해
쌓아 올린 벽이다.
놈들로 하여금
놈들의 손톱으로 하여금
철근과 콘크리트로 무장한
이 벽을 허물게 하라
「불씨 하나가 광야를 태우리라」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