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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 아버지의 꿈을 향해 |
1. 정조 : 내향(I)-직관(N)-사고(T)-실천(J)형 ‘전략가’(INTJ)
정조는 밖에 나가서 움직이기보다는 가만히 앉아서 독서를 즐겼으며, 지적이고 자신감이 넘쳤다. 그는 말을 할 때는 거침이 없고 다변가이지만, 얼굴표정이나 언어로 감정을 쉽게 표현하지 않았다. 정조의 이런 성격특성은 2009년 초에 공개된 심환지에게 보낸 비밀편지에서 여실히 드러났다. 이 편지들에서 정조는 당대의 유명인사들에게 욕설이나 비속어를 섞어가면서 간담이 서늘해지는 혹평을 했다. 예를 들면 최측근인 노론계 서영보를 ‘호로자식[胡種子]’, 노론 영수 심환지를 ‘생각 없는 늙은이’, 젊은 학자인 김매순을 ‘젖비린내 나고 미처 사람 꼴을 갖추지 못한 놈’, 일부 유생들을 ‘오장에 숨이 반도 차지 않았고 (……) 도처에 동전 구린내를 풍겨 사람들이 모두 코를 막는다’고 비판했다. 이런 정조의 신랄한 인물비평을 두고 어떤 이들은 그가 다혈질이라고 주장하는데, 이는 잘못이다. 보통 ‘다혈질’이라는 말은 감정기복이 심하거나 분노를 주체하지 못하는 사람을 지칭하는 것이다. 그러나 정조는 감정기복이 크지 않았고 분노감정도 매우 잘 통제했으므로 다혈질이라 할 수 없다. 단지 그는 마음속에 한이 많은 사고형(T)이므로 언어나 글을 통해 표현되는 타인에 대한 평이 일반인들에 비해 상당히 냉정하고 신랄했을 뿐이다. 곧 그는 타인의 기분에 민감한 감정형(F)처럼 남들에 대한 비판을 우회적으로 완곡하게 하는 스타일이 아니었다. 정조와 똑같은 성격(전략가INTJ)인 율곡 이이도 인물평이나 비판에서는 매우 가혹했다는 점을 고려해보면, 정조가 사적인 편지에서 사람들을 신랄하게 비판한 것이 성격특성과 관련됨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또한 정조는 통찰력이 있고 개방적이며 미래지향적이어서 유교국가 조선의 왕이면서 유교 외에 불교나 도교도 긍정적인 측면이 있다고 평가했으며, 심지어 사교로 배척하던 천주교에 대해서도 관대했다. 객관적 법칙이나 기준에 따라 사고하는 유형으로 공정함, 정의 등에 민감했고, 원대하면서도 치밀한 계획과 목표를 세우고 그것을 반드시 실천했다. 사회과학, 자연과학, 이공계 학문을 선호하여 자연과학 특히 공학에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었으며, 이는 배다리나 수원화성 축조 등에서 십분 활용되었다. 원리원칙을 고수하고 양보나 타협을 모르는 유형으로 자기 자신에 대한 요구도 많고 그 기준도 매우 높으며 완벽주의를 지향했다. ‘전략가’(INTJ)의 장점을 두루 갖춘 정조는 낡은 조선을 대대적으로 개혁할 백년대계와 과감한 개혁정책을 수립하고, 숱한 반대와 극단적인 고난 속에서도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 죽는 순간까지 강철 같은 의지로 개혁을 밀고 나갔다. |
아버지인 영조에 의해 그 아들인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사망한 전대미문의 참혹한 사건이 벌어진 지 14년이 흘렀다. 이 기나긴 세월 동안 사도세자의 아들 정조는 아버지를 죽인 노론 세력의 매서운 눈초리 속에서 살얼음판 위를 걷는 듯한 하루하루를 보내왔다. 그는 할아버지인 영조와, 아버지의 복수를 우려하는 노론 세력의 눈 밖에 날까 봐 초인적 인내심으로 입과 몸을 단속하며 이날을 기다려왔다. 그리하여 정조는 우여곡절 끝에 왕위에 오르게 되었고 마침내 1776년 3월 10일인 오늘, 그 즉위식이 열렸다. 공식적인 즉위식을 마치자 정조는 어두워지는 저녁 무렵 대신들을 소집했다. 신하들은 새로 왕이 된 정조가 도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하기에 관례를 깨면서까지 자신들을 불러들였는지 무척이나 궁금했다. 모두 촉각을 곤두세우며 정조의 입을 바라보았다. 정조는 엄숙한 표정을 지으며 깊은 생각에 잠겼다가 서서히 입을 열었다. 그의 첫 마디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아!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다.”(『정조실록』 즉위년 3월 10일) 사도세자를 죽이는 데 앞장선 노론이 대다수인 신하들은 그만 충격에 빠져 입을 다물지 못했다. 14년 동안 쥐 죽은 듯이 지내온 정조의 입에서 감히 ‘사도세자의 아들'이라는 말이 나올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정치적 적대자들이자 아버지의 원수들이 실권을 장악하고 있던 조정에서 그는 왜 왕이 되자마자 그토록 금기하던 아버지 ‘사도세자'의 아들임을 공개적으로 천명했을까. 정조에게 아버지 사도세자의 죽음은 아무리 긴 세월이 흐르고 흘러도 절대로 잊을 수 없는, 또 잊어서도 안 되는 운명적인 기억이었다. 후에 그는 “수십 년 동안 지극한 슬픔이 가슴속에 맺혀 있다”면서 한시도 아버지를 잊은 적이 없음을 애절하게 토로했다. 그렇다. 그가 열한 살이 되던 해에 발생한 비극적인 아버지의 죽음은 정조의 인생을 결정지었다. 그 사건 이후 정조에게 다른 삶은 허락되지 않았으며, 그 자신 또한 다른 삶을 원하지 않았다. 그랬기에 정조는 왕위에 오르자 위험을 무릅쓰고 자신이 사도세자의 아들임을 천명한 것이다. 정조는 훌륭한 부모 밑에서 생애 초기와 유년기를 보냈기에 심리적 건강성을 가질 수 있었다. 안정된 정서, 뛰어난 감정통제 능력, 세상에 대한 신뢰감, 최소화된 분노감정, 자기반성 능력 등이 그것이다. 비록 열한 살에 아버지를 잃었으나 이러한 심리적 건강성은 ‘전략가'(INTJ : 내향, 직관, 사고, 실천)*라는 그의 성격특성과 결합되어 극단적으로 불리한 환경에서도 백성을 위하는 개혁적인 사상을 받아들이고 개혁정치를 줄기차게 밀어붙일 수 있게 해주었다. 그러나 그로서도 도저히 넘어설 수 없는 벽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어머니였다. 정조의 어머니인 혜경궁 홍씨는 어린 시절의 정조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훌륭한 양육자였지만 청소년기를 넘어서면서부터는 그에게 커다란 심리적 상처를 안겨주게 된다. 왜냐하면 그녀는 나라나 백성이 아니라 자신의 가족만을 위하는 이기주의자, 가족주의자였기 때문이다. 중년기에 이른 정조의 인생은 개혁을 반대하는 수구보수세력과 반성을 거부한 채 아들에게 등을 돌려버린 어머니의 협공을 받아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온갖 어려움과 맞서 싸우며 사회적으로는 조선의 새로운 개국을 향해 그리고 개인적으로는 아버지를 뜨겁게 포옹할 그날을 위해 정조는 하루도 쉬지 않고 나아갔다. | |
화성행차 때 정조는 가난한 화성 주민들에게 쌀을 나누어주었다. 전 인구 중 10분의 1 정도가 그 혜택을 받았으니 이는 결코 겉치레를 위한 형식적인 행사가 아니었다. 이때 정조는 가난한 백성들에게 쌀과 소금을 나눠주는 데 그치지 않고 죽을 만들어 먹이라고 명했다. 그리고 네 곳에서 구호물자를 나눠주었는데, 그중 한 곳인 신풍루에는 정조가 직접 나가 행사를 주관했다. 만면에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백성들에게 쌀과 소금, 죽을 나누어주는 정경을 지켜보던 정조는 선전관宣傳官에게 자신이 직접 죽이 어떤지 보겠다며 “죽 한 그릇을 가지고 오라”고 했다. 혹시 백성들에게 함량 미달이거나 차가운 죽을 먹게 할까 봐 염려했기 때문일 것이다. 죽을 시식해본 정조는 자리를 뜨며 신하에게 이렇게 지시했다.
경은 이곳에 남아 사민(홀아비, 과부, 고아, 독자)이 와서 기다리면 일일이 죽을 먹일 것이며, 혹시 뒤늦게 오는 자가 있더라도 냉죽을 먹이지 않도록 하라. 직접 챙겨서 소홀함이 없게 하라. 우리는 언제가 되어야 정조 같은 이를 다시 보게 될까? 오늘날의 한국은 그야말로 정조 같은 인물이 간절히 필요하지 않은가. 그가 너무 일찍 죽었기에 역사는 그가 만들려고 한 모두 부유하며, 모두 행복하고 화목한 아름다운 나라를 알지 못한다. 그러나 최선을 다해 살다 간 사람에게 값없는 허무한 죽음이란 있을 수 없다. 우리가 매일매일 걸어가고 있는 이 땅 위를 200여 년 전에 정조 같은 인물들이 밟고 다녔음을 되새겨보는 것만으로도 가슴 뿌듯하지 않은가. 정조라는 왕과 함께 해본 경험이 있었던 백성들이기에 그들은 동학농민전쟁으로, 항일독립운동으로 일어설 수 있었다. 그리고 또 그 누군가가 있었기에 4·19혁명과 5·18광주항쟁, 6·10민중항쟁과 오늘의 촛불항쟁이 가능했을 것이다. 의롭게 죽은 아버지 사도세자가 정조에게 무한한 개혁의지를 주었듯이, 개혁군주 정조는 오늘날의 우리에게 미래에 대한 희망을 심어준다. 우리 모두 정조가 꿈꾼 것과 똑같은 것을 간직한다면 그 희망은 현실이 될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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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영 저『심리학자, 정조의 마음을 분석하다』中- | |
첫댓글 사도세자를 죽인 것은 노론이 아니라 영조 자신입니다.
그렇군요. 새삼스럽게 잘 읽고 갑니다. 언젠가 어느 기사에서 정조가 다혈질이란 글을 읽었는데, 좀 갸우뚱~했었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