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송 문천재 묘제 손 진 담
경주손씨 석종회가 발행한 정유년 달력, 마지막 달의 첫날은 음력으로 10월 14일이다. 하단의 문중 행사표를 보니 시월 보름날은 청송 문천재 묘제일이다. 올해도 어김없이 참석을 하기위하여 차를 몰고 영하의 날씨에 대전 집을 나섰다. 보은, 상주를 거쳐 새로 난 고속도로로 영천 고향 마을에 도달하니 오후가 되었다. 추석 성묘 후 다시 양지 갓 선영을 찾았다. 이곳은 입향조(8대조) 이하 선조들을 대부분 모신 곳으로 남계공파(일명 추곡파)의 성지이지만 정작 남계선조의 묘소는 청송 문천재 뒷산에 있다.
고향 땅에서 이장(里長)하는 집안 동생과 함께 한 시간 남짓 달려 청송군 현서면 문천리에 도착하니 산골 마을에 해그늘이 드리워지고 있었다. 노귀재 터널이 생겨 영천과 청송은 엄청 교통이 원활해졌다. 지난 날 걸어서 다닐 때는 이틀이 걸렸다고 하니 격세지감을 느낀다. 문천재사에 들어서니 미리 와 있던 경주 손씨 생원공파 문사 위원회 대표이신 손범진 문장(門長)과 손천호 종친회장, 총무 유사와 판공 유사가 반겨주었다. 문천재는 평소 관리인이 거주하고 있어서인지 주변 정리가 잘 되어 있었으며, 대청마루에는 영천 시장에서 구입한 재사용품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위로부터 생원공, 장사랑, 단소(壇所)와 끝으로 도사공에 이르기까지 모두 구위(九位)를 모셔야하기에 장보기도 만만치 않다.
몇 년 전만해도 묘사 전날 문천재에 모여 밤늦게까지 총회도 열고 제사 준비를 했지만, 교통이 발달된다가 한정된 잠자리가 불편해서인지, 제사 준비 필수 요원만 오게 된다고 임원들이 아쉬워했다. 다음날 아침에 많이 모이길 기대하면서 저녁 식사 후 각종 장부 정리와 묘제 분정(分定)을 하였다. 문장께서 지난해에는 나에게 독축(讀祝)을 권하더니, 올해는 집례를 해보겠느냐며 홀기(笏記)를 읽어 보란다. 홀기란 제례행사시 필요한 절차를 조목조목 적어 둔 것으로, 집례가 창홀(唱笏)하면 알자(謁子)가 찬인(贊引; 도우미)에게 지시하여 제례를 원활하게 하는 기록지이다. 집안 소 제사 시에는 홀기 없이 알아서 진행을 하지만, 큰 제사 시에는 격식이 필요해서인지, 창홀과 독축을 중요시 하여왔다. 내일은 경주 양동의 종가 집 일가들과 의성 김문(金門)도 참석하는 큰 묘제로서, 일종의 행사 사회를 맡으라니 신경이 제법 쓰였다. 이제까지는 주로 문장(전 성균관 유도회 사무국장)께서 낭낭한 목소리로 여러 제관들을 사로잡아, 인근에서 창홀을 잘 한다고 소문이 난 터였다. 게다가 창홀은 독축과 달리 판소리처럼 리듬을 타야 한다니, 보통 부담이 가는 게 아니었다. 집사들의 행동을 지시하고 호흡을 맞춰나가는 것은 많은 경험을 필요로 하는 것 같았다.
‘獻官及諸祭官序立(헌관 급 제제관 서립); 헌관과 여러 제관께서는 제자리에 서주십시오’를 시작으로 참신례, 강신례, 초헌례. 아헌례, 종헌례, 사신례를 끝낸 이후, ‘以次出執事者撤饌禮畢(이차출 집사자 철찬 예필); 이상으로 제례를 모두 마쳤습니다. 집사는 철상을 하시오‘로 창홀이 끝을 낸다. 한자의 음과 뜻도 익혀야 하지만 단어를 띄어 가면서 고저장단을 넣어 큰소리로 외치는 것이 어려웠다. 문장에게 한 시간 정도 배우고 소리를 따라해 봐도 신통치가 않아서인지 꿈속에서도 창홀 장면이 나타났다. 잠을 자는 둥 마는 둥 깨어서 별채 화장실을 다녀오니, 싸늘한 밤하늘에 둥근 달빛과 함께 수많은 별빛이 엄청나게 쏟아지고 있었다.
묘제 당일 새벽 마당에는 살얼음이 보였으나, 해가 떠오르자 포근한 날씨로 바뀌었다. 아침을 마치고 나니 경주, 대구, 군위, 포항 각지에서 제관들이 몰려들어 갑자기 30여 명이 되었다. 인근 동네의 의성 김씨 두 분도 맑은 술과 어포를 가지고 찾아왔다. 오늘 행사의 초헌관은 종손 손대익 어른이다. 항렬은 조카뻘이지만 연세가 80에 가까웠다. 대구에 살다 보니 자주 산소를 찾지는 못하나 10월 묘제에는 비중이 크다.
생원공은 태조 대왕과 친구인 감찰공(휘 등)의 손자이며, 세종 조 집현전 교리로 훈민정음 창제에 참여하신 병조참의 계성군(휘 사성)의 삼남 중 막내로 태어나, 문과 급제한 두 형을 이어서 대과를 준비하던 중, 연로한 부모를 모시고자 외가인 청송군 안덕면 문거리로 오게 된 것이 입신양명의 길을 포기한 계기가 되었다. 백형(휘 욱)은 1467년 이시애 난을 평정코자 출정했다가 아깝게도 돌아가시고, 중형(휘 소)도 이어 종사관으로 출정, 난을 평정하고 적개공신 2등으로 책봉되었다.
아헌례는 경주 양동마을에서 온 일가 대표가 잔을 올렸다. 형을 대신하여 희생 봉사한 생원공을 위하여, 큰 집 조카인 우제 경절공(휘 중돈)이 감사의 표시로 대청가옥을 사비로 지어주었다고 한다. 종헌례는 의성김씨의 대표가 예를 올렸다. 의성김씨 도곡공파 중시조(정국공신 김한경)는 생원공의 둘째 사위로서, 장인이 점지해준 묏자리를 이어받아 집안이 융성해지니, 감사의 표시로 김 씨 후손들은 수백 년을 빠짐없이 해마다 묘제에 참석한다고 한다. 한 계단 높은 곳에 서서 홀기를 불러대는 집례는 금방 안정을 찾았으며 가끔 멋있는 리듬도 넣어 보았다.
생원공의 묘제가 끝나고 바로 아래에 있는 장사랑(휘 세돈) 묘사 전에 음복례가 있었는데, 그 자리에서 문장 어른이 청주 한 잔을 따라 주시면서 “ 처음 해 보는 초보 집례로서 홀기를 잘 불렀다”면서 격려해 주었다. 청주 한 잔이 들어가고 칭찬을 받으니 더 잘 할 것 같았다. 그 다음부터는 창홀이 전과 동이다. 장사랑은 일남 3녀 중 독자로서 부모님을 극진히 봉양하였으며, 종형 경절공과 매부인 도곡공이 출세하여 승승장구하던 시절에 초야에 묻혀 고고하게 살아가셨다. 아들 셋에 손자 여덟을 두었으니 자식 농사는 잘 지은 것 같다. 오늘 모인 지역별 지파는 바로 이 팔 종반으로 크게 나눠진다. 산소 두 곳(二位)를 마치고 나니 정오가 다 되어서 다른 능선으로 옮겨갔다. 제수를 실은 경운기를 재실 관리인이 열심히 몰고 따라왔다.
다른 능선에 있는 단소에는 장사랑의 장남과 차남의 내외를 모시고 있으며 제단 비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 있다.
<첨지중추부사인 월성 손공은 휘(諱)가 휘(暉), 자는 숙장으로 계성군의 증손자이며 배는 평산 신 씨이다. 충순위인 월성 손공은 휘가 희(曦)요, 자는 경장으로 계성군의 증손자이며 배는 유인 월성 김 씨이다. 이상 사위(四位)는 여러 차례의 전쟁을 격으면서 수호를 정중하게 하지 못하여 서차가 어렵게 되었다. 이런 연유로 지금 제단을 모으고 표석을 설치하여 신성한 금역으로 다듬어 해마다 네 분의 제사를 함께 엄숙히 모시게 되었으니, 이곳을 오르내리시는 혼령께서 어찌 기뻐하지 않으시랴. 상서로운 복은 광활할 것이며, 하늘의 도움은 오래도록 함께하리라. 이 대략의 전말을 기록하여 새기게 되었다. 후손 수은이 기록하고 썼다(後孫 秀殷 謹記幷書)>
오랜만에 아버님의 친필이 쓰인 비석을 보니 감회가 새로웠다. 서예가이신 양동의 일가 한 분은 홀기를 자세히 보더니 ‘제단의 비석 글씨와 홀기의 글씨체가 같은 분이 쓴 것’이라며 명필이라고 해서 한편 기분이 좋았다. 그러나 내가 들고 읽었던 홀기가 아버님이 반백 년 전에 손수 마련하신 것을 이제야 알았으니 불효막급이다.
마지막으로 임란 창의하시고 1492년 경주성 전투에서 장렬하게 돌아가신 ‘증 의빈부 도사 남계 손공지묘’에 모두 모여 묘제를 지내고 기념 촬영도 하였다. 이곳에서 충순희(휘 희)의 3남으로 태어나셨으나 평소에 영천 출신 포은 정몽주의 정절을 사모하던 차, 부모님 사후에 영천으로 이사를 하셨다. 평소 경학에 힘쓰며 곤궁함을 참아내시던 남계공(휘 응현)은 임진란을 맞이하여 나라와 가문을 위하여 팔공산 회명에 참가하시고, 영천성 복성전투 등에 혁혁한 공을 세우시고 이어서 경주성 일차 전투에 참전하셨으나, 그만 29세의 나이로 장렬하게 돌아가셨다. 전투가 끝난 후 동생(휘 응창)과 어린 아들(휘 위)은 강변에서 이미 부패한 시신을 수습할 수 없어 남겨진 옷을 가지고 청송으로 돌아와 혼을 불러 이 자리에 장례를 치렀다고 한다. 조정에서는 초유사 김성일의 장계로 알려지고 조정에서는 공적을 기리기 위해 ‘봉훈랑 의빈부도사’에 추증하였다. 군인도 아닌 포의 신분의 의병으로 목숨을 초계같이 버리신 12대조의 영전에 모두 경건하게 재배를 하였다. ‘임란창의 정신문화 선양회, 남계공선생 후원회장’과 ‘경주손씨 남계공파 종중 총무’를 맡은 자로서 더욱 깊은 애착과 책임감을 느꼈다.
유명한 청송 사과 향이 물씬 나는 과수원을 지나면서 석종회장과 다시 악수를 했다. 석종회 회장(손무익)은 자신의 증조부(호 옥암) 묘갈명을 써준 재전공을 ‘영천. 경주지역에서 최고의 문장가요 석필가로 알고 있다’면서 오늘에야 “아재가 재전공 할아버지의 아들임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면서 한번 더 친근감을 표시했다. 지난날 파보 발간, 문천재 중건 등등 문중 일로 동분서주하시던 선친의 열정을 고이 간직하고 아버님이 손수 쓰신 홀기를 오래오래 보관하고 멋지게 창홀하고 싶다.
2017.1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