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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지식.책.문화.인물 스크랩 [책과 이야기] 삼국유사의 사학사적 의의
시사랑사람들 추천 0 조회 75 08.01.24 00:34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삼국유사의 사학사적 의의

 

이 기 백

 

 

 

        1. 머리말


     모든 역사적 사실들이 그러하긴 하지만,  특히 사학서의 경우에는 그것이 지니는 역사적 의의와 현대적 의의는 크게 다르다. 가령 저술 당시에 있어서는 굉장히 중요한 의미를 지니던 것이라도 현대에는 이렇다 할 가치를 지니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그런 가 하면 이와 정반대 되는 경우도 또한 있는 것이다. 물론 저술 당시와 마찬가지로 오 늘에도 중요한 것들이 있기는 하지만, 그것은 그리 흔하지 않다.  또 단일한 역사서에 있어서도 저술 당시에 중요시되던 측면이 현대에는 도리어 무가치하게 여겨지고, 오히 려 그때에는 별로 대수롭지 않던 측면이 도리어 현대에서 높게 평가되기도 한다. 이러 한 점을 분명히 가려서 생각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강조해 말하자면 그러한 사고방법은 역사학의 생명이다. 그런데 이러한 역사적 사고방식을 역사가들 자신이 무 시하고 양자를 뒤범벅해서 사람들을 혼란 속에  몰아넣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 못된다.

 

필자는 이점을 분명히 가려서 삼국유사에 대한 이해에 접근하도록 노력해 볼까 한다.

 

     그리고 삼국유사를 보는 관점은 여러 각도에서 가능한 것은 물론이다. 그러나 필 자는 이를 주로 역사학의  입장에서 보려고 한다.  따라서 위에서 말한 역사적 의의나 현대적 의의는 곧 사학사에 있어서는 역사적 의의요 현대적 의의가 된다. 이러한 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삼국유사가 지니는 사서로서의 성격부터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2. 史書로서의 삼국유사


     삼국유사를 이해하기 위하여는 먼저 삼국사기와 비교해 보는것이 하나의 좋은 방 법이다. 이 두 사서는 150년 가량의 간격을 두고 저술된 우리나라 고대사에 관한 사서 의 쌍벽이라고 할 수 있는 책이기 때문이다.

 

     우선 삼국사기가 왕명을 받들고 김부식 이하 10여명의 편찬위원들이 편찬한 정사 였던 데 대해서, 삼국유사는 일연이라는 개인이 편찬한 사찬서(私撰書)였다. 이 점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체재를 성격이 매우 다른 것으로 만들었다. 즉 삼국사기는 중 국에 있어서 정사를 편찬하는 표준적 체재인 기전체를 취하게 하였으나, 삼국유사는  저자의 관심의 각도에 따라서 자유로이 주제를 선택할 여지가 더 많이 허락되는 체재 를 갖추게 된 것이다. 삼국유사의 체재를 무어라 불러야 좋은 것인지를 필자는 잘 모 르지만, 그것이 저자 개인의 관심을 최대한으로 나타낼 수 있는 극히 자유로운 형식의 사서류 인것만은 분명하다. 이것이 우선 삼국유사가 지니는 첫째 특징이다.

 

     삼국유사의 편목(篇目)중에는 중국의 양,당,송 3고승전의 체재를 방불케 하는 것 들이 있다. 이에 근거해서 삼국유사가 중국의 3고승전의 체재를 따른 것으로 보는 견 해가 있다. 일연이 중국의 3고승전에서 편목을 취해온 대목이 있는 것은 분명하다. 그 러나 탑상(塔像)과 같은 편목은 중국 고승전에는 없다. 게다가 불교관계가 아닌 史話 를 편집해 놓은 편목이 王曆과 杞異의 둘이 있으며, 그 분량은 전체의 반이나 된다.

 

그러므로 삼국유사가 중국의 고승전들의 체재를 기본으로 하고, 역경(譯經)같은 편목 이 빠지기 때문에 10科의 수를 채우기 위하여 왕력이나 기이를 첨가했을 것으로 보는 견해는 따르기 힘들다. 삼국유사는 일반사화나 불교사화를 가리지 않고, 저자 일연의 관심이 가는 사화들을 수집하여 이를 적절히 분류 편집하였다고 보아서 좋을 것이다.

 

      물론 삼국사기도 일정한 목적 밑에 기사를 선택하고 이에 대한 편찬자들의 해석 을 가미시키고 있기는 하다. 그러나 정사로서의 성격상 왕실 중심, 통치자 중심의 사 료가 주된 편집 대상이 되었다. 삼국사기에서 민중관계 사료를 찾아보기가 힘든 것은 그 때문이다. 이에 대해서 삼국유사는 그러한 제약을 벗어날 수 있었다. 따라서 귀족 이나 민중이나 간에 일연은 아무런 제약 없이 관심의 대상이 된 사료들을 수집하여 수 록하였다. 이 점에서도 삼국유사는 삼국사기에 비하여 주제나 사료의 선정이 훨씬 자 유로웠다고 볼 수 있다.

 

     둘째로, 삼국유사는 삼국사기와는 달리 인용된 사료와 저자의 의견과를 구분하여 서술하는 방법을 취하고 있다. 삼국사기는 극히 적은 분량인 사론을 뺀다면 어디까지 가 사료이고 어디부터가 편찬자의 의견인지를 분간하기가 어려운 서술방법을 취하였다.

 

원칙적으로 삼국사기가 기존사료의 편찬인 것임은 분명하지만, 때로 필요에 따라서 본 문의 서술 자체를 편찬자의 목적에 맞추어 수정가필(修正可筆)하고 있다. 이것은 해동 고승전이나 역옹패설에서도 마찬가지여서 당시의 일반적인 경향이었다.

 

     이에 대해서 삼국유사는 그와는 다른 독특한 서술방법을 취하고 있다. 가령 기이 편의 첫 조목인 고조선조를 보면, 그것은 다음과 같은 위서(魏書), 고기(古記),구당서 배구전(裵矩傳)의 세 인용문으로 되어있다.

 


     (1) 위서에 이르기를 "지금부터 2천년전에 단군왕검이 있어서 도를 아사달에 세 우고......"

     (2) 고기에 이르기를 "옛적에 환인의 서자 환웅이........." (3) 당 배구전에 이르기를 "고려는 본래 고죽국인데........"

 

     즉 고조선조를 구성하는 (1),(2),(3)의 세 부분은 곧 세 인용문이다. 일연은 자 신의 의견을 협주(挾註)로 기입하여 인용문과는 구별하여 서술하고 있기 때문에, 이  양자를 혼동할 가능성은 없다.

 

     이러한 원칙은 대개 관철되고 있다. 그러나 때로 일연은 자기의 의견을 본문 속 에서 말하는 경우도 나타난다. 그것이 협주로써 만족 할 수 없는 중요한 문제인 경우 에 특히 그러하다. 이러 때에도 일연은 그것이 자기의 의견이라는 것을 밝혀두곤 했다.

 

그 하나의 예를 권 3 흥법편의 아도기라조에서 찾아볼 수 있다.


     (1) 신라본기 제 4에 이르기를 "제 19 눌지왕 때에 사문 묵호자가 고려로부터 일 선군에 이르렀는데 군인 모례가 집안에 굴실(堀室)을 만들고 안치하였다..." (2) 아도본비를 살피건대, 이르기를 "아도는 고려인이다. 어머니는 고도령인데." (3) 이에 의하건대 본기와 본비의 이설이 서로 어긋나서 같지 않음이 이와 같다.

     (4) 일찌기 이를 시론하건대 양,당의 이승전(二僧傳)및 삼본국사가 모두 고루려, 백제 2국의 불교의 시작을 실었는데....

     (5) 또 원위(후위)의 석담시전을 살피건대 이르기를 "始는 관중인인데 출가한 이 후 많은 이적(異迹)이 있었다......."

     (6) 논의하여 말하건대 담시는 대원 말에 해동에 와서 의회 초기에 관중으로 돌 아갔은즉 여기에 머물기 10여년 이었으니 어찌 동사에 기록이 없겟는가...

     (7) 찬하여 이르기를......


     이에 의하면 (1)은 삼국사기 신라본기로부터의 인용이고, (2)는 지금은 망실된 아도본비의 인용이다. 그리고 이어 (3)에서 위의 두  기록이 맞지 않는다는 것을 말하 고 있는데, 이것은 분명히 일연의 의견이다. 그러므로 여기서부터 일연은 자기의 견해 를 피력하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이 단순한 차이의 지적보다도 (4)이하는 바로 일연 이 신라 불교 초전(初傳)의 인물과 시대에 대한 자기의 견해를 나타낸 당당한 고증이 고, 그 결론은 현대의 역사가들을 놀라게 할 정도의 명쾌한 탁설(卓說)이다. 이어 일 연은 석담시전을 인용하고(5), 또 그 내용에 대해서 자기의 의견을 말하고 있다.(6) 마지막 찬(讚)(7)은 역시 일연의 것으로 생각된다. 이같이 자기의 의견을 말할 때에 그는 항상 <상시론지><議曰> 등으로 분명히 자기의 의견임을 밝히고 있다. 따라서 삼 국유사의 편찬은 전거(典據)를 밝혀서 인용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거기에 자기의 의견을 첨가하는 형식을 취하였다고 할 수가 있다.

 

     다만 유감인 것은 본문의 인용문 중에는 전혀 출처를 밝히지 않은 것들도 상당히 있다는 것이다. 위에서 언급한 일연의 편찬방침과 어긋나는 이러한 대목들이 상당히 있다는 것을 근거로 위의 원칙이 처음부터 일연에 의해서 세워진 것이 아니라고 할 사 람이 있을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것은 필시 당시에는 거의 출처를 밝힐 필요가 없 을 정도로 자명한 것이고, 따라서 너무 자주 출처를 밝혀야 한느 번거로움을 피한 때 문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삼국유사를 저술하는 데 이러한 방식을 취한 결과 일연은 자연히 많은 사료를 수 집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이것이 삼국유사의 세째 특징이다. 그가 수집한 사료들 중에 는 감산사조상기 같은 금석문이 있다. 그 협주에 "글은 그 뜻이 분명히 않으나 단지 고문을 보존할 뿐이다."라고 한 것을 보면, 남이 베껴놓은 조상기를 다시 베낀 느낌도 있기는 하지만 아마 그가 직접 조사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그가 직접 각처의 유적을 답사한 관찰기가 나오는 것으로도 짐작이 간다. 가령 일연이 경주 황룡사지에 있었다는 가섭불연좌석에 대하여,

 

     일찌기 한번 보았는데, 돌의 높이가 5,6척이나 되었고, 둘레는 겨우 세발이었다.

   우뚝히 섰는데 위는 편편하였다.(권 3 탑상)


라고 기술하였다. 그러므로 불국사에서 그리 멀지 않은 감산사에도 그는 직접 가 보았 을 것으로 생각된다.

 

     또 고문서도 있다. 그 가장 대표적인 것으로 고려 경종때 경순왕 김부에 대한 책 상부고(冊尙父誥)를 들 수 있다.(권2 기이편, 김부대왕조) 이 책상부고는 원문을 처음 부터 끝의 서명부분에 이르기까지 완전히 베껴놓았으며, 서명을 한 것과 안한 것 또 관직만 있고 이름이 없는 경우까지도 밝혀놓고 있다.비록 이 고문서 자체는 다시 대할 길이 없겠지만 이 인용만으로써도 훌륭한 고문서 자료가 될 것임이 분명하다. 이러한 고문서 중에는 많은 사지(寺誌)들이 포함되며, 그 밖에 도전장(都田帳)같은 관청의 공 문서도 있다.

 

     일연이 삼국유사에 향전(鄕傳)과 같은 민간 전승기록을 전하여준 것은 특기할 만 한 일이다. 이 향전은 바로 민중의 견해를 말하여주는 것으로 생각되기 때문이다. 예 컨대 법흥왕이 이차돈을 사형에 처한 것을 흔히는 법흥왕의 위신을 손상하지 않은 방 향에서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향전은,

     촉이 왕명이라 하여 공사를 일으켜 절을 세울 뜻을 전하였는데, 군신이 와서 간 하였으므로 왕은 이에 촉에게 책임지어 노하고 왕명을 거짓 전햇다는 이유로 처형하였 다.(권3, 흥법)


고했다. 이를 보면 마치 법흥왕이 이차돈에게 배신한 것 같은 느낌을 풍겨주고 있다.

이것은 향전이 아니고는 찾아볼 수 없는 면이고, 또 아마 이것이 진실이었을 것이다.

 

     요컨대 일연은 현대 역사가들의 사료수집을 연상시키는 노력을 하고 있다. 이러 한 노력은 물론 자기의 논거를 굳게 뒷받침해 주려고 한 데서 나온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이러한 노력은 짧은 기간에 쉽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며 따라서 삼국유사의 저술을 위하여 오랜 동안 많은 노력을 기울였음을 말하여 준다. 일연은 여러 사료를 널리  수집하여 그들 사료 사이에 개재되는 차이점을 가리고 나아가서 자기의 고증을 첨가함으로 해서 역사적 사실을 정확하게 파악하려는 태도를 취하고 있다.          

 

 


        3. 역사적 위치


     위에서 지적한 바와 같은 삼국유사의 특색은 저자 일연이 어떤 강한 목적의식을 갖고 이를 저술하였다는 것을 말하여주는 것이 아닐까한다. 일연은 자기가 하고 싶은 이야기의 주제를 스스로 선택하였다. 그리고 선택된 주제에 대한 자기의 의견을 전거 에 의하여 뒷받침하려고 하였다. 요컨대 그는 간절히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었던 것이 다. <유사(遺史)>라는 겸손한 책제(冊題)로 인하여 이를 한낱 한가한 여업(餘業)의 성 과로서 생각한다면 이는 잘못이다. 적어도 삼국유사의 저술에 필요한 사료를 수집하는 데 소요되었을 때 노력만도 적은 일이 아니었을 것임은, 그런 작업을 해본 사람이면  누구나 쉽게 알 수 있는 일이라고 믿는다.

 

     그러면 이 같은 노력의 결과로 이루어진 삼국유사를 통하여 저자가 하고 싶은 이 야기는 무엇이었을까. 이 점은 삼국유사가 다루고 있는 주제의 성격을 통해서 짐작할  수 있다. 삼국유사는 삼국사기가 합리적인 사실들을 주로 다루고 있는 데 대해서 비합 리적인 사실을 주로 다루고 있다. 물론 삼국유사에도 역사적 사실에 대한 합리적 서술 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주된 관심은 초인간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 사실들에 놓 여있었다. 가령 태종무열왕에 관한 대목에서,

 

     왕이 하루에 쌀 3말과 꿩 9마리를 먹더니, 경신년에 백제를 멸한 뒤에는 점심을 그만두고 단지 조석뿐이었는데, 그러나 계산함ㄴ 하루에 쌀 6말, 술 6말, 꿩 10 마리였다.(권 1 기이편)


는 기록을 남겨놓고 있는 따위이다. 더욱 재미있는 경우는 김유신에 관한 기사이다.

 

삼국사기에는 김유신의 전기가 무려 3권에 걸쳐 있고, 그 대부분이 통일을 위한 전쟁 기사로 메워져 있는 데 대해서, 삼국유사에는 다만 가족관계와 출생에 대한것, 삼산여 신과의 관계, 재매부인과 송화방에 대한 이야기, 홍무대왕 추봉과 그의 무덤의 소재만 이 기록되고 있다. 그리고 실제 분량의 대부분을 삼신여신과의 이야기를 기록하는데 소비하고 있다.

 

     이 점을 일연 자신은 신이(神異)를 기록한다고 하였다. 이는 일연의 다음과 같은 말로써 알 수 있다.


     그런즉 삼국의 시조가 모두 신이로부터 출발하고 있는 것이 무엇이 괴이하겠는가.

    그 신이가 제편의 처음에 실린 까닭은 그 뜻이 여기에 있다.(권 1 기이)

 

     이에 의하면 기이라는 편명은 <신이를 기록한다>는 뜻인 것임이 분명하게 된다.

그러나 비단 기이편만이 아니라 "삼국유사" 전체가 바로 이러한 방침 아래 저술되었던 것이다.

 

     삼국유사는  왕력,기이,흥법,탑상,의해,신주,감통,피은,효선의 9편으로 되어있다.

 

이를 크게 분류하여 보면 연표인 왕력과, 역사적인 신이사를 적은 기이와,그 밖의 불 교 관계 기사를 실은 7편과로 3대분할 수가 있다. 만일 왕력이 원래 독립된 1서이던 것이 삼국유사의 일편으로 첨가된 것에 지나지 않는다면, 결국 두번째와 세번째의 둘 로 양대분되는 셈이다. 그런데 기이편과 같이 그 내용에 대한 풀이를 저자 스스로가 해주지는 않고 있지만, 종교적인 신앙을 북돋아주기를 바라고 잇는 불교 관계 기사 들도 바로 신이의 기록 그것인 것이다. 이차돈은 스스로 목숨을 버리고 순교함으로써 여러 기적을 낳게 하여 불교를 공인하게 하였다. 혜숙이 죽어서 촌인들이 이현 동쪽에 장사를 하였는데, 고개 서쪽으로부터 오던 사람이 도중에 혜숙과 만나 대화를 나누었 다. 또 욱면이라는 여비(女婢)는 신앙의 힘에 희하여 산 육신의 몸으로 지붕을 뚫고 하늘을 날아 서방정토로 왕생하였다. 김대성은 자기집 용전을 법회에 보시함으로써 가 난한 집으로부터 재상가에 전생(轉生)할 수가 있었다. 이러한 이야기들로 가득차 있는 세번째 부분이 곧 신이의 기록이라고 한다 하더라도 이것은 결코 지나친 표현일 수가 없다.

 

     이렇게 보면 결국 삼국유사 전체가 신이의 기록이라는 이야기가 된다. 이것은 삼 국유사의 기사 내용이 지니는 가장 큰 특징이다. 그리고 신이란 바로 비합리적인 사실 들을 말한다. 따라서 삼국유사는 비합리주의를 정면으로 표방하고 나선 역사서였다고 하겠다. 그러면 일연이 이렇게 신이만을 적고자 한 의도는 도대체 어디에 있었던 것일까.

 

     그것은 유교의 합리주의 사관에 대한 비판의 뜻이 있었다고 믿는다. 고려후기에 접어들면 유교의 도덕적 합리주의 사관이 풍미하게 된다. 그리고 이 사관은 특히 관찬 사서(官撰史書)를 중심으로 지배적인 풍조를 이루게 되었다. 이러한 풍조에 대항하고 나선 것이 삼국유사 였던 것이다. 일연이 유교의 합리주의에 비판적 이었던 것은 그가,

 

     대체로 옛날 성인이 예악으로 나라를 일으키고 인의로 교(敎)를 베푸는 데 있어 서 괴력난신(怪力亂神)은 말하지 않는 바였다. 그러나 제왕이 장차 일어나려 함 에 있어서는 부명을 받고 도록를 받아 반드시 남과 다른 점이 있었다. 그런 후에 야 능히 대변(大變)을 타고 대기(大器)를 쥐어 대업을 이룰 수 있었다.


라고 하여, 괴력난신을 말하지 않는 데 대해 비판적인 것으로써 알 수가 있다. 다 아 는 바와 같이 괴력난신을 말하지 않는다는 것은 논어에 나오는 공자의 말이며, 이 정 신은 후대의 유교에 일관된 정신이었다.

     이 동일한 입장은 효선편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여기서 일연은 현실적으로 효할 뿐만 아니라 신앙면에서 선하기도 해야, 즉 효선쌍미해야 내세에 가서도 효할 수 있는 것이 되며, 그럼으로써 가장 지극한 효를 실천할 수 있는 것이라고 설하고 있다. 그러 므로 진정사가 가난한 홀어머니를 버리고 입산하였다 하더라도 그것은 불효가 아니었 다. 진정산느 의상에게 부탁하여 화엄경을 강하게 함으로써 그 어머니를 천상계에 전 생하게 하였던 것이다. 이 같은 불교적 입장은 분명히 유교의 현세주의 합리주의에 비 판적이라고 할 밖에 없다. 이 같은 입장이 앞서 지적한 두 가지 주제로 나타났던 것이다.

 

     첫째 주제인 일반적인 역사적 신이에 대한 기록은 요컨대 한국 고대사를 자주적 인 입장에서 새로이 이해해보려는 노력이었다고 생각된다. 그에 의하면 한국의 역사 는 중국이 아닌 천(天)과 직결되는 것이었다. 고조선의 시조인 단군왕검이 천상에 계 신 환인의 손자였다든가, 신라 호국삼보의 하나인 옥대는 천사가 주었다든가, 또 통일 신라의 평화의 상징인 만파식적이 문무왕의 변신인 해룡과 김유신의 후신인 천신이 합 심하여 만들어준 것이었다든가 한데에서 이러한 사실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일연은 한국사의 기원에 대하여 고조선-> 위만조선->마한으로 이어지는 체계를 세움으로써, 그것이 오랜 역사적 전통을 지니고 있고 또 신이한 것임을 자랑스 러이 기술하였다. 원의 정치적 간섭이 불가피했던 당시의 현실을 생각할 때에, 이것은 민족적 자주의식의 표현이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둘째 주제인 불교적 신이에 대한 서술은 요컨대 신앙의 옹호를 위한 것이었다.

 

불교 관계 기록은 우선 양적으로도 전체의 반을 넘는 분량을 차지하고 있으며, 뿐만 아니라 질적으로도 비교적 잘 정리된 불교문화사인 것이다. 흥법편은 일종의 불교 미 술자료집이며, 의해편은 고승전이며, 신주편은 밀교사이며, 감통편은 신앙상의 기적기 이며, 피은편은 신앙과 사회의 문제에 대한, 효선편은 신앙과 가정과의 문제에 대한 기록들이다. 이를 통하여 나타내려고 한 것은 모두  현실세계의 논리로서는 설명이 불 가능한 신앙의 세계였던 것이다. 그리고 이 신앙의 세계는 석가불 이전의 가섭불과도 연결되고, 혹은 또 미래불인 미륵불과도 연결되는 세계였다.

 

     이같이 신이의 설화로써 합리주의에 대항하기 위하여는, 그러한 설화들이 틀림없 는 역사적 사실이라는 증거를 제시할 필요가 있었다. 삼국유사의 서술이 전거를 중요 시한 가장 큰 이유는 여기에 있었다고 생각한다.

 

     삼국유사의 세계는 그러므로 신화와 전설의 세계이며, 신앙의 세계였다. 이 세계 는 당시의 사학계가 이루어놓은 합리주의에의 접근이라는 전진적인 자세와는 다른 복 고적인 것이었다. 사학사적인 관점에서 볼때에 위에서 제시한 바와 같은 성격을 지닌 삼국유사의 위치는 이같이 규정지을 수 있을 것으로 믿는다.

 

 


        4. 현대적 의의


     삼국유사가 사서로서 지니는 여러가지 측면들을 검토해본 결과, 그가 지니는 역사적인 위치를 대세에 역행하는 복고적인 것으로 규정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것은 삼국유사가 지니는 현대적 의의까지가 덜하다는 뜻은 아니다. 아니 오히려 그와는 반 대인 것이다. 그러면 삼국유사가 현대 한국사학에서 지니는 의의는 무엇인가. 이는 다 음의 세 가지 점으로 요약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첫째는 삼국유사가 지니는 사료적 가치가 높다는 것이다. 이것은 특히 전거를 밝 혀주었음으로 해서 그러하다. 전거를 제시한 인용문은 일연이 이를 자의로 변경하고 있지 않다는 점도 주목할 만한 일이다. 그러므로 삼국사기와는 달리 소박한 표현들이 그대로 남아서 전존하게 되었으며, 이것은 오늘날 고대사를 연구하는 데 무한한 가치 를 제공해주고 있다. 더구나 인용된 많은 원전들이 남아 있지 않는 오늘에 있어서 특 히 그러하다.

 

     다만 일연은 반드시 원사료의 전문을 충실히 인용하는 방법을 스고 있지를 않다.

 

가령 "감산사조상기"는 원문의 몇분의 1에 지나지 않는다. 게다가 오독(誤讀)으로 인 한 많은 잘못이 있다. 또 고조선조에 인용된 구당서 배구전의 글도 완전히 문장이 일 치하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이유로 해서 인용문의 자구의 변탈(變脫)에 별로 개의치 않음이 삼국사기와 취재표준이 다르다고 보기도 한다.  분명히 일련의 인용문에는 자 구의 탈락과 변개가 있다. 그러나 그것은 불필요하다고 생각한 탈락이거나 오독이나 필사의 잘못에 의한 것이지, 내용의 변개는 아니었다. 따라서 같은 내용의 기사가 삼 국사기와 삼국유사에  다 나올때 삼국유사가 흔히 원사료의 본 모습을 더많이 전해주 는 것이 보통이다. 그리고 삼국유사 이전의 원사료명의 제시는 그 사료적 가치를 크게 더해주는 것이다.

 

     둘째로는 유교의 더덕적 합리주의 사관에 대한 비판적 태도이다. 이것은 근대사 학도 마찬가지로 짊어지고 있던 과제였다. 근대사학은 정치적 측면에서뿐 아니라 사회 적 경제적 및 문화적인 넓은 관점에서 역사를 바라보려고 하였다. 그리고 그것은 도덕 적인 정치사관의 극복을 전제로 한 것이었다. 이러한 점에서 폭넓은 문화사적 측면을 제시해준 삼국유사는 특히 문화사가들에 의해서 높이 평가될 수 밖에 없었다. 가령 위 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삼국유사에는 풍부한 신화의 세계, 민속의 세계가 전개되고 있다.

 

삼국유사를 읽고 있노라면 마치 한국 원시문화의 숲을 헤쳐가는 듯한 기분을 누구 나 맛보게 된다. 단군신화를 비롯한 이들 신화와 민속의 세계는 근대사학의 보고와 같 이 비치었음은 당연한 일이다. 삼국유사에서는 또 문학적 측면이 중하게 다루어지고  있다. 무엇보다도 삼국사기에는 단 한편도 수록되어 있지 않는 향가가 10여편이나 수 록되어 있다는 사실이 이를 증명하고 있다. 삼국유사가 불교문화사로서 독자적 지위를 갖고 있음은 이미 지적한 바였다. 그러므로 도덕의 선악과 정치의 흥망과를 직결시켜 생각하는 좁은 안목의 도덕적 합리주의 사관에 대한 비판이란 점에서 삼국유사와 근대 사학은 궤를 같이하는 것이고, 따라서 삼국유사는 근대사학에서 높이 평가되었다.

 

     세째로는 삼국유사가 민족적 자주성을 강조하고 있다는 점이다. 위에서 지적한  바와 같은 한국의 고유문화에 대한 존중은 곧 그것이 민족적 자주성의 표시였다. 더구 나 우리나라 역사의 시발점을 고조선에 두고, 단군왕검의 건국신화를 적음으로써 한국 의 역사가 天과 연결되는 독자적인 것임을 나타내었다. 그리고 이러한 입장에서 위씨 조선,마한을 거쳐 삼국으로 연결되는 민족사 발전의 체계를 세우려고 하였다. 그런데 근대에 민족적인 자각이 커가면서, 배외적인 경향을 띤 중국 중심의 사관에 대한 비판 은 필수적인 것이었다. 이러한 점도 근대사학과 삼국유사는 궤를 같이 하고 있으며,  따라서 근대사학에서 삼국유사가 높이 평가되게 되었다.

 

     삼국유사에 대한 이와 같은 근대사학의 평가는 충분히 납득이 가는 일이다. 그러 나 이와 같은 평가에도 제약이 있다는 점을 잊을 수는 없다. 우선 사료적 가치는 그것 이 애초에 사료집으로 편찬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일연이 전혀 예기치 못했던 일에 속 한다. 만일 원사료들이 망실되지 않고 남아 있다고 한다면, 사료적 가치에 대한 문제 는 거론되지 않을 성질의 것이다. 가령 감산사의 두 조상명(造像銘)은 실물이 남아 있 어서 훨씬 자세하고 정확한 원문을 읽을 수 있기 때문에 약기(略記)되었을 뿐만 아니 라 잘못된 판독조차 섞여 있는 삼국유사의 인용문은 무가치한 것이 되었다. 또 도덕적 합리주의 사관에 대한 비판이란 점에서 삼국유사와 근대사학이 궤를 같이하지만, 그렇 다고 삼국유사에서 제시된 신이사관(神異史觀)이 오늘날에도 그대로 통용될 수가 없다 는 것도 자명한 일이다.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신이에 대한 합리적 해석을 새로이 시도 해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다른 반면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현대사학에서 삼국유사가  지니는 의의를 올바로 인식하기가 힘들 것이다.

 

 


        5. 끝맺는 말


     필자는 위에서 주로 사학사적인 관점에서 삼국유사를 생각하여 보았다. 보는 사 람의 현재적 입장이라는 절대적 기준에 비추어서 삼국유사를 평가하는 것에 필자는 비 판적이었다. 그 결과 삼국유사가 지니는 역사적 의의와 현대적 의의를 구분하여 고찰 하게 되었다. 본고의 제 3장과 제 4장이 각기 이에 해당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접근방법이 역사가가 취해야 할 올바른 방법이라고 믿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방법이 역사가들에 의해서조차 종종 이해되지 못하고 있는 사실을 발견한다는 것은 실로 서글픈 일이다.

 

     이러한 이해를 위하여는 사살에 대한 객관적 인식이 필요하다. 이 경우에는 삼국 유사의 사서로서의 성격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필요하다. 이를 위한 작업이 본고의 제 2장에 해당한다. 이에 더하여 사학사의 조류에 대한 인식이 필요한데, 이는 제 3장과 제 4장에서 각기 언급되었다.

 

     이러한 작업의 결과, 삼국유사가 사학사에서 지니는 역사적 위치가 전진적이기보 다는 복고적이었지만 현대에서 지니는 의의는 도리어 크다는 결론에 도달하였다. 이떻 든 삼국유사도 그것이 하나의 역사적 소산이요 또 현재에도 그 생염이 살아 있는 하나 의 사서인 만큼, 그 긍정적인 면이나 부정적인 면이 아울러 학문적으로 정리되어야 할 것으로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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