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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제자로서 치러야 하는 대가
누가복음 14:25~35
오늘 본문 말씀은 주님께 사람들이 몰려들어 큰 성황을 이루었던 상황에서 주님께서 자기를 따르는 무리를 향하여 돌이켜 가르치신 교훈입니다. 아무리 많은 사람들이 주님을 따른다 해도 그 중에서 오직 대가를 지불하는 사람만이 주님의 진정한 제자가 될 수 있다고 가르치신 것입니다. 당시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르고 있었지만 사실 세상적인 욕심들을 가지고 따르는 자들도 많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여기서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다 희생할 각오를 해야만 예수님을 따를 수 있다는 엄중한 경고를 여기서 주셨습니다.
그래서 먼저 예수님은 자기를 따르다가 중도에 포기한 실패한 제자의 본보기로 다음 두 가지의 비유를 제시하였습니다. 하나는 짓다가 만 망대입니다. 포도원을 지키는 망대거나 성읍을 지키는 망대건 간에 망대를 짓는 것은 많은 재물과 시간과 일꾼이 필요한 작업입니다. 이 망대를 세우기 위하여 돌이나 벽돌 등을 사고 일꾼들을 모으고 임금을 지불하고 몇 개월 또는 몇 년을 끈기있게 공사를 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망대를 짓다가 도중에 예산 부족, 숙련 일꾼의 부족, 긴 우기의 날씨나 주변의 정치적 상황의 변화나 주인의 건강이 급속히 악화되는 불상사가 발생하여 더 이상 망대를 지을 수 없게 되는 일이 발생합니다. 망대를 짓기 전에 마땅히 그 포도원 주인이나 성읍의 성주나 경비대장은 이런 저런 변수들을 충분히 고려해서 충분히 준비를 하고 자금을 마련하고 망대 건축에 경험많은 일꾼들을 많이 수배하고 혹시 모를 우기의 폭우 등을 인한 공사 지연에 따른 비용 가중 등을 고려한 충분한 비용을 고려하고 건축 시기 등을 주의깊게 살펴 공사 착수를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공사를 시작했는데, 예상했던 어려움들이 하나 둘씩 생겨나는 것입니다. 약속했던 벽돌 공장이 망하여 다른 데서 구입하는 벽돌 값이 오르고, 숙련된 일꾼들이 다른 데로 빠져나가 일이 더디어지고 날씨마저 극심한 우기를 만나고 나라가 전쟁에 휩싸여 젊은이들이 전쟁터로 나가게 되어서 일꾼들을 모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갑작스럽게 일을 추진하던 포도원 주인은 스트레스를 받아서 시름 시름 앓아 누워버렸습니다. 그래서 결국 공사가 중단되었고 짓다만 망대는 비에 젖었고 모아 둔 벽돌과 건축자재들은 도둑들이 와서 밤마다 훔쳐갔습니다. 결국 포도원 망대나 성읍의 성벽에 지으려던 망대는 짓다가 만 채 몇 년을 지난 뒤에도 그대로 방치된 흉물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렇듯 짓다가 만 망대가 주님의 제대로 따르다가 중도에 포기한 사람의 예입니다.
또 한 가지 예로서 예수님은 준비 없는 전쟁에 나섰다가 결국 패배하고 만 왕을 들고 있습니다. 인접한 두 나라 사이에 자존심이 걸린 문제 때문에 서로 간에 시비가 붙었습니다. 조공을 바치던 나라에서 조공을 바치지 않겠다고 말하였습니다. 사신을 모욕하여 돌려 보냈습니다. 가만 두지 않겠다고 협박을 담은 상대방 왕의 포악한 편지를 담은 편지를 받았습니다. 이에 격분한 왕이 상대방 국가에 전쟁을 선포하고 군대를 이끌고 직접 응징하기 위하여 출정했습니다. 상대방 국가의 왕도 발끈하여 군대를 일으켜 마주 내려오게 됩니다. 두 군대가 마주 대하게 되면 이제 필연코 두 왕 중 하나는 완전히 패배를 당하고 양측 군대도 심각한 타격을 당하고 많이 죽을 것이 뻔합니다. 두 나라는 심각한 타격을 입고 주저앉을 것이요 그 두 나라 곁에 있는 또 다른 나라에게 융성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제공할 것입니다.
실제로 우리 나라에 왜적이 국가적으로 쳐들어왔던 일본의 침략에 우리나라와 명나라가 힘을 합쳐서 조선 땅에서 재력과 군인들이 힘을 쏟는 동안 간도 지역에 있던 여진족 곧 만주족들이 일어나 큰 힘을 발휘하기 시작하더니 후금이라는 나라를 세우고 명나라를 압박하여 승리하고 명나라의 우군인 조선을 침략하는 병자호란을 일으켜 엄청난 피해를 주었습니다. 인조는 힘도 없는데 청나라와 맞서다가 침략을 당하여 왕궁에서 도망쳐 나와 광주산성에 갇혔습니다. 그리고 얼마 있다가 청나라 왕 태종 앞에서 나와서 세 번이나 머리를 대고 절하고 자기 머리로 땅을 때리는 굴욕을 당하였습니다. 그리고 청나라는 곧장 쇠약해가는 중국의 명나라를 쳐들어가서 명을 굴복시키고 중국 전토를 점령하여 청나라를 세워 몇 백년을 이어오다가 서양 열강이 물밀 듯이 닥치는 19세기 말까지 존속하였습니다. 일본과 조선과 명나라가 전쟁통에 국력이 약화된 사이에 변방의 나라 만주족이 일어나 청나라를 세우고 명나라를 무너뜨리는 역사의 이변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래서 나라간의 전쟁을 선포하고 싸우는 것은 매우 조심스런 계산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전쟁을 시작하였으나 이길 가능성이 없다면 아예 시작을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끝까지 싸워야 할 이유와 명분이 있다면 무슨 대가를 지불하고서라도 그 일을 포기하지 말고 계속해야 합니다.
어제 3.1 절 행사를 티비로 보았는데, 정치권에 대한 간절한 바람이 있었는지 시종일관 그 어느 국가 행사보다 주의깊게 시청하였습니다. 그리고 우리 선현들이 1919년 보여준 그 자랑스러운 삼일절 독립선언문과 대한독립만세운동에 담은 우리 민족의 염원과 결연한 행동에 대하여 깊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우리의 선현들은 그 엄혹하고 무력한 상황 속에서도 우리의 바람을 무저항으로 표현하기를 결단하였고 지도자들이 먼저 감옥갈 것을 결단하며 서로 연합하였습니다. 그들은 서명하는 것이 감옥가는 순서라고 하면서 그 선언서에 자기 이름을 엄숙하게 서명하였습니다. 자기를 버리고 희생함으로써 강력한 군대와 포악한 힘을 가진 일본 제국주의자들 앞에 맨손을 가지고 저항하였습니다. 그리고 감옥에 갔습니다. 고문을 당했습니다. 해외 곧 만주와 연해주와 중국과 미국와 유럽 각처에서 미약한 총칼을 준비해 가지고 계속하여 싸웠습니다. 그 덕분에 우리가 해방을 맞이하여 오늘날 우리가 자유와 평화와 영광과 평화를 누리고 있습니다. 나라를 지키는 일은 어떤 대가를 지불하고서라도 포기하지 않고 계속 싸워가야 하는 것입니다. 중간에 포기할 싸움을 싸워야 할 싸움이 있는가 하면 끝까지 계속 싸워야 할 싸움이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의 길은 마치 망대를 짓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비용 때문에 도중에 포기할 거라면 차라리 시작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망대를 완공하기까지 들 수많은 비용을 미리 계산하고 그것을 다 지불할 것을 생각하고 시작해야 합니다. 이처럼 예수님을 따르겠다는 사람 역시 이 길에 수많은 인적, 물적, 정신적 비용들이 지불될 것을 계산하고 주님을 따라나서야 하는 것입니다.
또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가 된다는 것은 전쟁과도 같습니다. 승리하겠다는 각오와 크나큰 손실과 목숨까지도 바쳐서라도 반드시 내가 지켜내야 할 자유와 후손의 행복과 생명이 있기에 끝까지 전쟁을 수행해야겠다는 각오와 결기가 가져야 합니다. 만약 그렇게 승리할 계산이 서지 않고 죽더라도 지켜내야 할 분명한 가치와 정당성이 확보되어 각오가 분명히 서 있지 않다면, 어떻게 해서던지 전쟁을 시작하지 말고 혹 시작했더라도 사신을 보내어 화친을 청하고, 전쟁 도중이라도 조속히 휴전 협정을 체결해야 할 것입니다.
이처럼 주님을 따르는 것은 전쟁터에 나가는 왕과 그를 따르는 군인들과 같은 것입니다. 자기네보다 훨씬 더 많은 병력의 군사들과 월등한 무기들을 가지고 쳐들어오는 다른 나라 왕과 그 군대와 맞서 싸우려고 전쟁터에 나가는 왕과 그 군인들처럼, 주님을 따르는 신앙의 길에서 수많은 시련과 거친 역경이 있습니다. 이 시련과 도전과 맞서서 주님을 따르는 제자의 길을 끝까지 가는 것은 전쟁터에서 자기의 목숨과 그의 모든 것을 내놓을 각오를 가지고 출정하는 군인처럼 비장한 일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주님의 제자는 자기 전 존재를 내놓아야만 주님을 끝까지 따라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 말씀 누가복음 14장 33절에서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너희 중에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이것이 오늘 본문 말씀에서 주님께서 강조하는 가르침입니다. 그 수많은 군중들을 향하여 돌이켜 바라보시고, 나를 온전히 따르려거든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고 엄숙히 선언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치러야 할 대가들은 어떤 것인가요? 주님의 제자로 살기 위하여 치러할 대가가 무엇인가를 함께 나눔으로써 주님의 제자로서 우리가 어떠한 자세로 살아야 할 것인지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로, 신앙 때문에 찾아오는 가족과 지인들과의 결별과 갈등을 감수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오늘 본문 말씀에서 그 청중들에게 맨 처음 말씀하셨던 바이기도 합니다. 25절, 26절에서 이르기를
“수많은 무리와 함께 갈새 예수께서 돌이키사 이르시되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
라고 하였습니다. 자기의 부모와 아내와 자식과 형제 자매와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도 주님을 믿고 따르는 신앙의 길에서 포기해야 한다면 기꺼이 그 각오를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부모와 형제와 자녀, 친구, 동료들까지도 우리가 주님을 믿고 따르는 신앙의 길을 방해하며 따르지 못하도록 강제할 때에 기꺼이 포기할 줄 아는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의 설교 초기부터 이르신 말씀이 예수님 자신은 화평을 주러 오지 않고 칼을 주러 왔다는 역설적인 말씀을 선포하신 바 있습니다. 마태복음 10:34 이하의 말씀에 보면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버지와, 딸이 그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며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마태복음 10:34~39)
그렇습니다. 주님을 따르는 신앙의 길, 주님과 함께 인생을 살아가야 하는 제자의 길에는 인간관계의 희생이 반드시 따릅니다. 친밀하고 따뜻하게 날 조건없이 사랑하신 부모님과 갈등이 생기고 친밀했던 형제 자매와 갈라서야 하고 심지어 아내와 남편과 사랑하는 자녀들과도 다투고 마음이 갈라서고 한 마음이 될 수 없는 깊은 골이 생기기도 합니다. 흉허물 없던 절친한 친구들과 헤어지게 되고 동료와 사이가 멀어지게 됩니다. 주님을 따르는 제자의 길은 이처럼 좁은 길이요 험한 길이요 감정적으로 외로운 길입니다. 이 대가를 지불할 각오를 가져야 합니다. 이 대가를 기꺼이 지불할 자만이 능히 주님의 제자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둘째로, 자기 인생의 주도권을 주님께 넘겨드려야 하는 대가를 치러야 합니다.
주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자기 인생의 주인 자리를 주님께 내어드리는 결단입니다. 주님을 자기의 주인으로 모신 자는 하나님의 영원하신 작정하신 뜻 가운데 자신이 세상에 보내졌고 자기의 삶이 하나님의 영광과 그의 계획 가운데 진행되어야 가장 복된 삶이라는 것을 받아들인 자입니다. 에베소서 1장과 2장에서 사도 바울이 밝힌 바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표현을 여기서 잠시 인용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에베소서 1:5,6)
“모든 일을 그의 뜻의 결정대로 일하시는 이의 계획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에베소서 1:11)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에베소서 2:10)
이 말씀 속에서 우리가 알 수 있듯이, 하나님의 백성 된 우리는 창세 전부터 하나님께서 자기 자녀로 예정하셨고, 하나님 뜻 가운데 그의 결정된 계획을 따라 우리가 부르심을 받아 이 땅에서 살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살면서 행해야 할 일들 이것을 사명이라고도 하고 에베소서 2:10 말씀에서 사도 바울이 언급한 대로, 그것이 ‘선한 일’이라고도 합니다. 이 사명, 선한 일 역시 하나님께서 전에 다 예비하셔서 우리로 그 가운데 행하도록 이끌어가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의 길은 우리가 결정하는 우리의 뜻대로나 혹은 환경이나 상황에 의하여 수동적으로 결정되어진 바대로 혹은 우연의 법칙에 따라서 정해지고 이끌려져 온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과거나 우리의 현재나 미래는 우리의 창조자시며 우리의 구속자이신 우리 하나님, 우리 구주 예수님, 우리 성령님의 만세 전의 예비하심과 작정된 뜻에 따라 진행되어 왔고 앞으로도 그러할 것입니다.
우리 구주 예수님은 우리의 과거도 아시고 현재도 아시고 장래 일도 다 알고 계십니다. 그래서 사도 베드로에게 잡하시기 전날 밤에 이렇게 말씀하셨지 않습니까?
“내가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올 수 없으나 후에는 따라오리라”(요한복음 14:36)
베드로가 이르기를
“주여, 내가 지금은 어찌하여 따라갈 수 없나이까 주를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리겠나이다”
하였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네가 나를 위하여 네 목숨을 버리겠느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요한복음 13:38)
그리고 그 말씀대로 그 날 밤 새벽녘에 대제사장 집 뜰에서 베드로는 닭이 두 번 울기 전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그 집 종들에게 말했습니다. 다시 주님은 부활하신 후에 갈릴리 바다 해변에서 베드로에게 그의 미래에 대하여 이런 말씀도 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요한복음 21:18)
이 요한복음의 말씀을 기록한 사도 요한은 그 복음서를 썼을 당시 이미 나이가 90세가 넘은 나이였기 때문에 사도 베드로의 순교를 이미 알고 있는 상태였습니다. 그래서 부활의 주님께서 베드로의 나이 30대 중반 정도 되는 나이였을 때 이 말씀을 베드로에게 해주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주후 64년의 로마의 대화재 박해 때 베드로가 체포를 당하여 그 해나 그 다음 해에 순교했습니다. 그러므로 사도 요한은 부활하신 주님이 하신 이 예언이 성취된 것을 기억하고서 이 예언 말씀을 이렇게 또렷하게 기록한 것입니다. 이 모든 말씀을 볼진대, 예수님을 따르는 그의 제자들인 우리의 삶도 주님께서 이미 다 알고 계심은 명확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의 제자로서 우리 삶에 대한 주님의 주권을 받아들이고 우리 삶의 주인이신 주님께 우리 삶을 온전히 맡겨드려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개인적으로 아무리 원하고 간절히 바라는 바가 있다하더라도 하나님께서 허락하시고 우리를 이끌어가야 우리가 그 길을 가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에 장래의 계획이 아무리 분명하고 구체적으로 서 있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정하신 뜻이 아니라면 절대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늘 우리의 삶의 주인이신 주님께 주권을 내어드리고 그의 인도하심을 늘 구하고 그가 작정하신 바대로 우리 삶이 이루어지도록 순종의 기도를 늘 드려야 하겠습니다. 젊은이들의 직장, 결혼, 이사 등 모든 것들을 항상 주님께 맡기십시오. 우리의 자녀들의 미래도 주님께 늘 다 맡기고 인도해주실 것을 믿고 기도하며 평안히 맡기십시오. 우리 삶은 우리가 주인이 아닙니다. 우리 인생은 주님께서 우리에게 선물로 주신 그 인생의 청지기일 뿐입니다. 주인이신 주님께서 그의 뜻대로, 작정하신 계획대로 그의 선한 일을 아름답게 펼쳐나가도록 늘 기도하며 순종하며 성령께 도움을 청하면서 기쁨으로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제자로서 우리가 지불해야 하는 대가입니다.
셋째로, 우리의 삶의 목적, 가치관, 방식들도 주님의 가르침에 맞추는 대가를 지불해야 합니다.
주님의 제자는 삶의 우선 순위가 믿기 이전과 같을 수 없습니다. 세상에서 성공하여 자기 이름을 드러내고 사람들로부터 대접받으면서 떵떵거리며 살아가는 삶은 주님의 제자와는 거리가 먼 일입니다. 주님의 제자는 자기 이름의 영광 대신에 자기를 구속하여 생명을 바친 그리스도의 이름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 삶이 목적이 됩니다. 나의 성공이 삶의 목적이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가 힘있게 세워져가고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삶의 목적인 사명이 온전히 이루어져감으로써 우리 삶을 통하여 하나님의 계획이 성취되어가는 것이 진정한 성공이 됩니다. 삶의 목적도 내가 사람들에게 섬김을 받고 사람들 위에 으뜸이 되고 칭찬받는 것, 사람들에게 부러움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에게 섬기는 삶을 살라고 하시고 친히 섬김의 삶을 살다 가신 주님을 본받아 낮은 자리에서 섬기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 주님의 제자의 삶의 방식인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제자의 삶은 손해보고 미련하고 매력없게 보입니다. 하지만 주님께서 그렇게 예루살렘의 골고다에 세워진 그 험한 십자가로 향한 길을 가셨듯이 우리도 주님이 보여주신 삶의 방향을 받아들이기를 늘 결단하는 삶을 계속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참으로 우리는 주님의 제자로서 자기의 인생관, 세계관, 삶의 방식들을 주님의 가르침과 그가 보이신 삶의 모범을 따라 살도록 자신을 온전히 내려놓는 대가를 지불해야 합니다. 그것이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제자로서 치러야 할 대가입니다.
넷째로, 신앙의 압박과 시험에 맞서 기꺼이 내 목숨까지 바칠 각오를 해야 합니다.
주님의 제자가 되는 길에는 가족과의 갈등과 경제적인 손해도 감수해야 하는 정도가 아니라 우리의 목숨까지 내놓아야 할 각오를 해야 합니다.
최근에 마다가스카르라는 저 아프리카 동부에 있는 큰 섬 나라에서 의료 선교를 하시다가 세상을 떠난 두 분의 선교사님이 있습니다. 지난 2월 말에 그 가난한 나라의 한적한 농촌에서 침술을 가지고 전도하며 농촌 돕기를 위하여 한국의 경운기들을 보내면서 돕던 나이 88세의 선교사님과 그의 사위가 강도떼에게 피습당하여 돈을 빼앗기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주님께서 순종하여 선교하려고 그 먼 땅에 가서 가난한 원주님들을 돕다가 그렇게 돌아가셨는데 그들의 삶은 세상적인 성공과는 너무 거리가 먼 길이었지만 그들이 살아간 그 길은 주님의 제자로서 걸어간 진정한 성공과 영생의 길이라 할 것입니다. 그들이 그 고령의 나이에 그 아프리카 가난한 오지에 갈 때에 풍토병등의 질병과 경제적 공격을 받을 것만 예상한 것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장인과 사위 되신 두 분 선교사님은 그 가난하고 어두운 오지에서 돈을 노리고 공격당할 일들도 충분히 예상하셨을 것이 분명합니다. 상당히 개명화된 저 필리핀에 가시는 선교사님들조차 항상 선교사님들을 노리는 강도들 때문에 생명의 위협을 많이 느끼곤 하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필리핀보다 훨씬 오지인 마다가스카르 섬에서 선교를 계획했을 때에 그 두 분은 이미 자기 목숨에 대하여 내려놓았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이 보내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주의 제자는 신앙과 사명을 위하여 기꺼이 자기 목숨을 내놓는 사람들입니다. 성경 속에 수많은 믿음의 선배들이 그러한 순교적 신앙의 길을 걸어왔습니다. 엘리야 시대에 아합 왕과 악독한 그 아내 이세벨의 박해를 피하여 궁내대신 오바댜가 굴속에 숨은 여호와의 종 백명에게 떡과 물을 갖다 날랐으며, 그 외에도 숨은 7천 명의 진실한 신자들이 그 엄혹한 시대에도 이세벨이 강요하는 바알 우상 앞에 무릎을 꿇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알아주셨습니다. 후일 다니엘은 그 이방 나라 바벨론과 페르시아 시대에 왕 외에 다른 신에게 무엇을 구하면 사자굴에 던져넣는다는 말을 듣고도 목숨을 내놓고 여호와 하나님께 기도하였고, 다니엘의 세 친구도 우상 앞에 절하지 않으면 풀무 불에 던져넣는다는 말을 듣고도 기꺼이 우상에 절하기를 거절하고 풀무 불에 들어갔습니다. 그 후 알렉산더 대왕의 측근들이 세운 시리아 왕국 때에도 안티오코스 에피파네스 왕의 무지막지한 핍박을 당하는 와중에도 기꺼이 목숨을 내걸로 저항하며 믿음을 지킨 유대인들이 있었습니다. 로마 제국의 황제들로부터 무수한 박해를 받으면서 황제 숭배의 강요 앞에서, 끝까지 우리 구주 예수님만 우리의 주님이라고 고백하면서 믿음을 지키기 위하여 화형을 당하며 감옥에 갇히며 사자밥이 되기를 마다 않으며 어엿한 집과 안락한 삶을 버리고 로마의 공동묘지 밑에 지하 굴로 들어가 몇 세대가 믿음으로 버티다가 그 지하 묘소에 묻혔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일제 때에 대부분의 교회가 신사참배의 요구에 굴복하며 신사참배는 그냥 국민예절이라 치부하면서 일본의 황실이 섬기는 천조대신 곧 태양신에게 절하라는 요구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러나 주기철, 최권능, 이기선, 한상동, 손양원 등 수많은 주의 종들과 적지 않은 성도들이 옥사를 각오로 반대 운동을 했습니다. 결국 그들은 대부분 감옥에서 고문을 받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학교 선생이었던 안이숙 선생도 신사 참배 요구를 받자 거절하고 은신하는 생활을 하다가 일본 제국 의회에 가서 하나님의 심판을 전하려는 뜻을 품고 박관준 장로님과 그 아들과 함께 일본에 숨어 들어가서 일본 의회 현장에 들어가 전단지를 뿌리면서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에호바 가미사마노 다이시메이다(나는 여호와 하나님의 사명자이다)!”
그들이 뿌린 전단지에는 일본의 신사참배 강요에 항거하며 이렇게 강압적인 요구를 행하면 하나님께서 심판하실 것을 경고하였습니다. 그 두 사람은 목숨을 내 걸고 이 일을 했으니, 결국 박관준 장로님은 고생 끝에 해방의 해인 1945년에 고생 끝에 돌아가셨고 안이숙 여사도 평안 감옥에 오래 동안 갇혀 있다가 해방의 그 해 8월 18일 사형 집행일 전 전날 밤 17일 밤 11시에 감옥에서 나오는 기적을 경험했습니다. 그는 감옥 가기 전에 이미 순교를 각오하였으니, 그는 해방되어 나온 후에 쓴 그의 책 ‘죽으면 죽으리라’라는 책 서문 첫 문장에
“나는 자격 부족으로 실격된 순교자다.”
라고 썼습니다. 이는 늘 순교를 꿈꾸었던 안이숙 여사로서 아쉬움을 담은 고백입니다. 안이숙 여사가 그 얼마나 간절하게 박해의 그 어두운 시대에 주님을 위하여 순교하기를 간절히 바라고 또 준비했는지에 대한 기록은 그 책에 잘 나와 있습니다. 그 박해의 시대에 기꺼이 죽기를 각오하였던 수많은 믿음의 종들 덕분에, 일제가 강요한 신사 참배의 강압 아래 무릎을 꿇었던 한국교회의 부끄러운 역사 속에서도 그나마 우리가 신앙의 자긍심을 잃지 않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이렇듯 엄혹한 대가가 지불되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 아무 것도 대가를 지불함 없이 이 땅에서 내 마음대로 살고, 잘 먹고 잘 살고 늘 행복하고 원하는 것 다 누리고 죽어서까지 너무나 행복한 저 천국까지도 차지하겠다는 안일한 마음을 가지고는 주님의 제자가 될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 경고하셨습니다.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마태복음 22:14)
“너희의 인내로 너희 영혼을 얻으리라”(누가복음 21:19)
주님의 제자가 되어 그와 동행하며 그의 사역을 이루어가며 장차 주님과 함께 영광을 나눌 자들은 주님이 말씀하셨듯이, 치러야 할 비용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기꺼이 이 대가를 지불하여 우리 신앙의 망대를 완성합시다. 우리 앞에 놓여진 진리와 구원의 전쟁에서 도망치지 말고 불굴의 용기를 가지고 치열하게 싸워 승리합시다. 우리 모두 목숨까지도 내놓고 우리 신앙을 잘 지킵시다. 주님의 가르침에 온전히 순종하기로 결단합시다. 그리하여 우리가 주님 앞에 섰을 때 우리가 치른 대가와 우리가 치른 신앙의 싸움에서 얻은 상처들로 인하여 장차 주님으로부터 영광스러운 칭찬과 상급을 다 받아 누리는 주님의 제자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