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새벽녘,
창밖에 세워 둔 차동차 위로 쏟아지는 요란한 빗소리에 잠이 깨었다.
한참을 뒤척이다가 머리맡에 읽다가 접어둔 책을 집어들어 얼마를 읽었을까 책을 떨구고 다시 잠이 들었던 모양,
늦잠을 자고 말았다.
아직도 비는 쉼없이 쏟아지고 오늘, 정원일을 하기로 했던 계획을 바꿔서 어항 청소를 했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12시 15분이 넘고 있었다.
마음이 급해졌다.
오늘은 아르헨티나와 벨기에의 8강전이 낮 1시부터 시작된다고 알고 있기 때문이다.
세상이 다아 알다시피 이 나라의 축구 사랑은 유별난 것이여서 슈퍼가 문을 닫기전인 1시 이전에 시장을 봐야했다.
더구나 8강전이 아닌가.
부지런히 차를 몰고 도매상에 갔더니 모두들 전에 없는 분위기로 손님들이나 일하는 손길들 모두 조용한 가운데 바쁘게 움직였다.
친구인 주인여자 카르멘은 이 나라의 국기 색깔인 흰색과 하늘색이 바둑판처럼 무늬진 스카프를 목수건처럼
두르고 있었고 야채칸 담당 쟈넷은 중학생 아들이 꼭 쓰고 일을 하라고 했다며 역시 이 나라의 국기색으로 된 티셔츠와
높다란 모자를 쓰고는 밝게 활짝 웃고 있었다.
벌써부터 마음속 응원으로 상기된 표정의 쟈넷은 작은 국기를 달걀판 위에 꽂아두고는 바쁘게 손님들의 야채들을 저울에
달아주고 있었다.
커피 사탕 한알을 건네는 내게 물었다.
" 넌 어느 나라가 이길것 같으냐 ?"
" por supuesto que argentina! (물론, 아르헨티나가 이길꺼야 !)
나의 대답에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하던 일을 계속했다.
돌아오는 길,
한적해진 길거리에는 몇대의 자동차들만이 유난히 바쁘게 달려가고 있었다.
모두들 끼리끼리 TV앞에 모여 앉아 가슴을 졸이며 응원을 하고 있을터였다.
어느새 1시, 이미 축구가 시작되고 있었기 떄문이다.
집으로 돌아와서 사온 물건들을 정리하고는 나 역시 홀에 있는 TV를 켜고 그 앞에 앉았다.
어느새 아르헨티나가 한골을 넣어 스코어는 1:0 이였고 중계방송을 하는 아나운서의 숨가프게 빠른 말소리는
흥분으로 인해 톤은 더욱 높아지고 있었다.
나는 그 어느때보다 편안한 마음으로 경기를 보았다.
아마 2002년 한일 월드컵 때인것 같다.
대부분의 남자들이 그렇듯 남편 역시 젊었을때는 공깨나 찼던 사람이라 축구 사랑이 남달랐었다.
월드컵이 시작되기도 전에 이미 어디서 구해 왔는지 축구 대진표와 경기 시간이 프린트 된 종이를 늘 여닫는 문에다가 붙혀 놓았다.
또한, 중요한 경기에는 매직으로 색까지 입혀서 표를 해 두고는 월드컵의 시작을 마치 아이들 소풍날 기다리듯 기다렸다.
그렇게 시작 된 월드컵은 남편에겐 더 할수 없는 즐거움을 주었다.
함께 볼 일을 보러 나가면 으례 현지인들과 축구 얘기로 입씨름을 하느라 곁에서 기다리는 나를 잊은듯 했고 서로가 응원하고
이길것으로 예상하는 나라를 걸고 내기를 하자고 큰소리를 쳐서 나의 잔소리를 듣곤 했었다..
월드컵이 치뤄지는 동안, 매일매일을 축구보는 재미에 빠져서 하루가 어떻게 가는지 모르는 남편을 따라 나도 덩달아
들뜬 마음으로 지나간것 같았다.
더구나 우리나라가 4강에까지 올랐던 월드컵이 아니였나.
식사 시간이면 매일 진행되는 경기의 관전평을 진지하게 내게 얘기해 주느라 국이며 찌게가 식어서 다시 데워줘야 했고
현지인 친구들을 초대해서 함께 TV를 보며 응원하기도 했었다.
특히, 관심이 가는 경기가 시작 되기전에는 미리 TV를 크게 켜 놓고 탁자에는 와인병과 잔, 그리고 안주까지 준비해서는
나를 불러 곁에 앉혔다.
나는 축구팬이 아니라 오로지 국가대표 팬에 지나지 않아서 다른 나라의 경기에는 스코어 외엔 사실 별 관심이 없었다.
그럼에도 내가 곁에 없으면 자기도 TV를 꺼겠노라고 으름장을 놓는 바람에 관심 없는 내색을 감추고 그의 흥을 깨지 않기 위해
이것저것 물어보며 함께 앉아서 보곤 했다.
그러나 집중해서 보노라면 어깨 너머로 보고 들은 나의 얕은 축구 지식으로 나도 모르게 TV를 향해 훈수를 두게 되고
그런 나를 보며 놀란 표정으로 그가 말하곤 했다.
"오~호오 ~~ 당신이 감독을 해도 되겠다 !"
그렇게 들뜨고 즐거운 <축구축제>가 끝나고 나서는 몹시도 아쉬운듯 말했다.
" 아~ 이제 무슨재미로 살지?"
얼마 전, 도매상에 갔더니 친하게 지내는 종업원이 물었다.
한국은 어떨것 같으냐?
우리나라가 16강에 들것 같으냐고 묻는것이었다.
나는 우리나라의 경기력이 아닌 나의 <바람>을 단호하고도 자신있는 어조로 말해줬다.
" 당연하지!"
그러나 우리의 16강 탈락이 확정되고 그 다음날에 만난 그 친구는 엄지손까락을 밑으로 내리면서 말했다.
"너네 나라 참, 안됐다!"
나 역시 몹시 안타까운 표정을 지으며 그들의 제스쳐를 흉내내어 두 팔을 펴고 어깨를 으쓱하며 속말을 했다.
"(안타깝지만 어쩔수 없는 일이지, 뭐!)
스포츠가 오직 축구 하나뿐인양, 축구만 하면 온 나라가 들썩이게 열광하는 이 나라에 살면서 가끔은 뜬구름 같은 생각을 하곤한다.
우리나라가 결승까지 진출해서 아르헨티나와 맞붙는 그런 상상을 ....
그러면 나도 그들 앞에서 침을 튀기며 나의 짧은 축구지식을 총동원해서 선수 한명 한명의 이름을 거론해 가며 그들의 장단점과
누구의 철통같은 수비 능력을 .... 누구의 골결정력과 대단한 개인기를 .... 어쩌고 저쩌고 열을 올리며 얘기하면서
축구 잘 하는것이 곧 그 나라의 경제력이나 되는듯이 얘기하는 이 나라 사람들에게 콧대 한번 으~쓱 세울수도 있을텐데 ......
에~고 ! ~~ ~
우리나라에는 언제쯤 메시를 능가하는 세기의 축구 선수가 나오려나 ? ~~~
생각해 보면 절대 나오지 말란 법은 없지 않을까 싶다.
전용 피겨장 하나없는 피겨의 불모지에서 피겨의 여왕, 우리의 김 연아가 나왔으니 말이다.
다행히 전반 이과인의 한 골을 잘 지켜 아르헨티나가 이기고 24년만에 4강에 진출했다.(이렇게 오랜만에 4강진출인지 몰랐었다)
경기가 끝나자 잦아든 빗속을 달리며 승리를 자축하는 크랙숀소리가 잠시 요란하게 들리고 어디선가 폭죽 터트리는 소리도 들렸다.
정말, 다행이다.
이곳 역시 불경기에 국가 디폴드니 뭐니 해서 하루가 다르게 오르는 물가에 모두들 지치고 기운이 빠져있는데
축구만이라도 이겨서 기운을 북돋아 준다면 그 얼마나 기쁘고 축하할 일이겠는가.
이제 준결승과 결승만이 남았다.
축구에 무관심한 편인 나도 이 나라에 생업의 터전을 두고 살고 있기에 이 나라의 우승을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 하고 있다.
Vamonos Argentina !!
vamonos Argentina !!
( 파이팅! 아르헨티나여!)
- 발.코.니.-
첫댓글 그 곳으로 건너가신지 얼마나 되셨는지 모르지만 교과서적인 반듯한 글내용과 맞춤법 오자 탈자 띄어쓰기 실력이 탁월하심을 느꼈습니다.
8 년전쯤 남미여행중 아르헨티나에 들렀을때 어느 레스토랑에서 정열적으로 땅고를 추는 남녀 무희들을 보고 넋이 나갈만큼 황홀해 했던 기억이 있답니다. 특히나 나이가 지긋한 아코디온 연주자 두 사람이 다리를 모으고 얌전한 자세로 연주하던 '라콤빠리시타'는 지금도 그 장면이 생생. 정말 멋진 밤이었지요. 저도 지난밤 벨기에와 아르헨티나 축구경기를 보면서 '메시'의 동작을 열심히 언제 한 골 넣으려나? 기대를 했는데..
이 곳을 여행 한 경험이 있으신 분이시군요.
반갑습니다.
제가 이민 온지도 어느 새 25년이나 된것 같네요.
제가 사는 이 곳은 저 외에는 단 한명의 한인도 없는 곳이랍니다.
그래서 제게는 컴과 책이 친구가 되어 항상 가까이 하고 살고 있지요.
칭찬 .... 고맙습니다.
발코니님 방가 방가 합니다 역시 비가 많이 오네요 축구에 대해서 자세히 써주셔군요 안타갑습니다 우리의 축구
음악방 쥐띠방에 대한민국
잔짜자잔 현민씨노래 노라노 노래 신나게 올려건만...
지난번 모기습격사건 기억하고 있는데 ㅎ ㅎ 그후론 습격은 안당하셔는지?
늘 건강 하세요
도은님, 안녕하세요?
반갑네요.
한국에도 비가 왔나봐요.
여기도 오늘 하루종일 태풍이 와서 아주 굉장했답니다.
덕분에 모기들이 몽땅 날려 갔을것 같네요.
그리고 저녁마다 계피랑 생강, 그리고 귤 껍질을 다려서 차로 마시니 온 집안에 계피향으로 가득해서
절로 벌레 퇴치가 되는것 같더라구요.
잊지 않고 관심가져 주셔서 정말 감사 드려요.
즐겁고 행복한 한주가 되시길 바랍니다.
반갑습니다.우리아들도 지금 아르헨티나 에서 근무하고 있어요 몇년가 파견근무지만 그곳 이야기를 자주 듣곤하지요.
축구 시합이 있으면 상점문을 닫는데 당연시 되었다고 하더니 그렇군요
저 역시 반갑네요.
아무래도 가족중에 누군가가 이곳에 산다면 더 가깝게 느껴 지겠지요?
적지 않은 세월동안 이 나라에서 살아보니 롤러코스트같은 이 나라 경제문제도 우리같은 이민자에겐
기회가 되는 경우가 많더군요.
아드님께서도 이곳에 대한 아름다운 추억을 가지고 무사히 근무 마치기를 바랍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