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文金生員(문김생원)
文:글 문, 金:성 김, 生:날 생, 員:관원 원.
어의: 문 생원과 김 생원, 즉 평범한 사람이란 뜻으로, 조선 영조 때 몸가짐과 집안관리를 잘했던 한 선비의 고
사에서 유래했다. 자기 신분이 드러나지 않게 처신하거나 가명을 쓰는 경우를 이른다.
문헌: 대동기문(大東奇聞)
조선 21대 영조(英祖. 1694~1775) 때 자기의 성(姓), 문(文)자에다 어머니의 성, 김(金)자를 넣어서 문김생원(文金生員)으로 행세하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용모가 못생기고 집안이 몹시 가난하였는데, 그의 여조카는 용모가 잘생겨서 내명부 종4품(從四品)의 숙원(淑媛) 품계를 받았다. 그 바람에 가문 전체가 혜택을 입어 벼락부자에 벼락감투를 쓰게 되었고, 숙원의 아우 문성국(文聖國)은 상궁을 돌보는 소감(小監)이 되었다.
성국은 무식한 데다가 사람이 교활하여 주색과 사치를 좋아했다. 외출할 때는 화려한 마차를 타고 다니며 권세를 뽐내고, 집안에서는 하인을 수십 명씩 거느렸으며, 문전에 드나드는 사람이 저자를 이루고, 무뢰한 식객들이 우글우글하였다.
그러나 숙원의 백부(伯父) 문김생원은 숙원이 벼슬자리를 만들어 주어도 결코 응하지 않았다. 특히 조카 성국이 보내오는 돈이나 물건은 일체 받아들이지 않을뿐더러 아예 거래를 끊고 지냈다. 그리고 아내에게는 성국은 집안을 망칠 위험한 인물이니 조심하라고 주의를 주었다.
“성국이란 놈이 저 모양인데 그 권세가 얼마나 가겠소. 졸부귀불상(猝富貴不詳)이란 말대로 벼락부귀는 얼마 못가는 법이오. 한번 뒤집히는 날에는 멸문지화(滅門之禍)를 당할 것이니 처신을 조심해서 하고, 나는 아예 1년에 한 차례씩만 집에 올 것이니 그리 아시오.”
이렇게 말하고는 대지팡이에 짚신을 신고 명산대찰(名山大刹)을 찾아 정처 없이 떠나 버렸다. 그리고 본성을 감추고 김씨로 행세하며 섣달 그믐 캄캄한 밤에야 한 번씩 집에 들러 성묘를 하고, 처자를 만났다.
몇 해 후, 아니나 다를까 숙원 동생 성국이 모반의 죄를 범해 사사(賜死)를 당하고, 그에 따라 문씨(文氏) 일문(一門)도 멸망했다. 그러나 문김생원의 집안만은 화를 면하게 되었다. 그가 일찍이 어머니의 성까지 넣어서 행동을 조심한 것은 선견지명(先見之明)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임종대 편저 한국고사성어에서)
文德之略(문덕지략)
文:글 문, 德큰 덕, 之:어조사 지, 略:꾀 략.
어의: 문덕의 지략이라는 말로, 조그만 힘으로 엄청난 큰 힘을 깨뜨린 을지문덕의 고사에서 유래했다. 지략이
뛰어난 사람을 비유하는 말이다.
문헌: 삼국사기 열전 제4
을지문덕(乙支文德)은 고구려 영양왕(嬰陽王) 때 사람으로 그의 가계보는 자세한 내용이 전해지지 않고 있다. 다만 그는 자질이 침착하고 날쌔며 지략과 술수가 뛰어났고, 글을 잘 알고, 잘 지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서기 612년, 수(隋)나라 양제(煬帝)가 우문술(宇文述)과 우중문(于仲文)에게 고구려를 치게 했다. 그러자 을지문덕은 실태를 파악하기 위하여 적의 진영에 들어가 거짓으로 항복했다.
우문술과 우중문은 고구려의 왕이나 을지문덕이 찾아오거든 잡아두라는 황제의 밀지를 받고 을지문덕을 억류시키려 했으나 상서우승(尙書右丞.상서도성에 속한 관리) 유사룡(劉士龍)이 항복하기 위해 온 적장을 억류하는 것은 도리가 아니라고 굳이 말리므로 그냥 돌아가게 했다. 그러나 곧바로 후회하고 사람을 보내 더 의논할 일이 있으니 다시 오라고 했으나 을지문덕은 속지 않았다.
을지문덕을 놓친 우문술운 식량이 떨어졌으므로 회군하려 했으나 정예부대로 추격하면 성과를 이룰 것이라는 우문중의 주장에 따라 압록강을 건너 추격했다.
을지문덕은 수나라 군사가 굶주리고 있음을 알고 그들을 지치게 하고자 싸움마다 패하는 척하니, 우문술은 하루 동안에 일곱 번을 싸워 모두 이겼다. 그러자 여러 번 이긴 것을 믿고 마침내 살수(살수.청천강)를 건너 평양성에서 30리 되는 지점에까지 좇아오니 을지문덕이 우중문에게 우롱하는 시를 지어 보냈다.
神策究天文(신책구천문) 그대의 신묘한 계책은 천문을 꿰뚫었고
妙算窮地理(묘산궁지리) 기묘한 계산은 지리를 통달했도다.
戰勝功旣高(전승공기고) 싸움마다 이겨 공이 높아졌으니
知足願云止(지족원운지) 그것으로 만족하고 그만 그침이 어떠한가?
을지문덕은 사자를 보내어 거짓으로 항복하며 말했다.
“군사를 돌려 돌아가면 왕을 모시고 행재소(行在所.황제나 왕이 행차할 때 머무는 임시 거소)로 찾아가겠다.”
우문술은 군사들이 지쳐있어 더 싸울 수 없다고 생각하고 을지문덕의 항복을 핑계 삼아 돌아가기 위해 살수를 반쯤 건넜을 때 을지문덕이 후미를 공격하니 한꺼번에 걷잡을 수 없이 무너졌다. 그들이 돌아가는데 걸린 시간은 하루 낮 하룻밤 동안이었고, 그 거리는 450리였다. 또 처음 요하를 건넜을 때에는 아홉 개 부대의 군대가 30만 5000명이었는데, 요동성으로 되돌아간 자는 겨우 2700명이었다. 고구려가 그 많은 군사를 거의 다 섬멸할 수 있었던 것은 을지문덕의 지략 때문이었다.
(임종대 편저 한국고사성어에서)
文宣衣民(문선의민)
文:글 문, 宣:베풀 선, 衣:옷 의, 民:백성 민.
어의: 문씨가 백성들에게 옷을 입히다. 즉 고려 문익점이 원나라에서 목화씨를 가져와 보급시킴으로써 백성들
이 따뜻하게 지내게 해준 것을 말한다. 여러 사람을 위하여 최선을 다한다는 뜻으로 쓰인다.
문헌: 조선고금명현전(朝鮮古今名賢傳)
고려 말기의 학자 문익점(文益漸.1329~1398)의 자는 일신(日新)이고, 호는 삼우당(三憂堂)이며, 시호는 충선(忠宣)이다. 그가 서장관(書狀官)이 되어 사신 이공수(李公遂)를 따라 원(元)나라에 갔을 때였다. 그곳에는 고려의 왕족 덕흥군(德興君)이 있었는데 그는 원나라가 고려를 쳐들어오자 최유(崔濡)와 더불어 원나라에 협조했다. 원나라의 왕이 문익점에게도 그 덕흥군을 따르라고 명했으나 듣지 아니하므로 교지(交趾. 월남의 북부 하노이 지방)에 삼 년간 유배를 보냈다.
문익점은 그곳 유배지에서 사람들이 목화를 재배하여 옷을 지어 입는 것을 보고, 그것을 본국에 가져가 국민의 의생활에 도움을 주고자 했으나 반출이 금지된 탓으로 뜻을 이룰 수 없었다. 그래서 고심 끝에 목화씨 세 개를 붓대롱(筆管.필관) 속에 숨겨서 몰래 가져왔다.
그러고는 그의 장인 정천익(鄭天益)과 함께 고향 경남 산청에서 밭에 뿌렸으나 재배법을 몰라 겨우 한 개만 싹을 틔울 수 있었다. 그래서 각고의 노력으로 번식을 거듭했다. 계속해서 목화로 솜 타는 법과 실을 뽑는 방법, 그리고 베짜는 것까지 개발하니 마침내 온 나라 방방곡곡의 백성들이 따뜻한 무명으로 옷을 만들어 입을 수 있게 되었다.
제7대 세조(世祖) 때 그의 사당이 세워졌으며, 만인을 따뜻하게 입힌 공로로 충선공(忠宣公) 시호도 받았다.
이황(李滉), 송시열(宋時烈), 이이(李珥) 등 여러 사람이 그를 찬양한 글을 지었다.
神農敎民耕(신농교민경) 옛적에 신농이 백성들에게 논밭 갈기를 가르쳤고
后稷敎民稼(후직교민가) 후직이 백성들에게 모심기를 가르쳤는데
忠宣衣我民(충선의아민) 문 충선공은 만백성들에게 무명옷을 입혀주었으니
豐功倍前昔(풍공배전석) 그 충성한 공은 옛적의 그것보다 갑절이나 되도다.
(임종대 편저 한국고사성어에서)
勿言我死(물언아사)
勿:말 물, 言:말씀 언, 我:나 아, 死:죽을 사.
어의: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 즉 어떤 사실이 상대에게 알려지면 자신이 불리해지므로 그 사실을 숨기고자
할 때에 쓴다.
문헌: 선조실록(先祖實錄), 고금청담(古今淸談)
민족의 성웅(聖雄) 이순신(李舜臣)은 본관이 덕수(德水)이고, 자는 여해(汝諧)이며, 시호는 충무(忠武)이다. 그는 무과에 급제하여 국가의 문서와 장부를 담당하고 말과 가마에 대한 일을 맡는 사복시주부(司僕寺主簿)를 거쳐 종4품 조산보만호(造山堡萬戶)와 정읍현감 등을 두루 거쳤다.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이 그의 용감함과 재능을 알고 조정에 천거하여 전라좌도 수군절도사(全羅左道 水軍節度使)가 되었다.
당시 조야에서는 왜란에 대비하지 않았는데, 장군만은 거북선을 만들고 군비 확충에 힘을 다했다. 마침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거북선으로 옥포에서 적선 30여 척을 격파한 것을 비롯하여, 사천에서 13척을, 당포에서20여 척을, 당항포에서 100여 척을, 한산도에서 70여 척을, 부산 앞바다에서 100여 척을 격침시키는 등 남해안 일대의 적군을 거의 소탕했다.
그의 능력을 높이 평가한 선조는 이순신을 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로 승진시켰다. 그러자 상급자였던 원균(元均)이 그의 휘하에 들어가게 된 데 대하여 반감을 품고 그를 모함했다. 그로 인하여 서울로 압송되어 사형선고까지 받게 되었다. 그러나 다행히 정탁(鄭琢)의 변호와 그간의 전공이 참작되어 사면을 받고, 권율(權慄)의 휘하에서 백의종군(白衣從軍. 벼슬없이 군대를 따라 싸움)하였다.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원균이 배를 몰고 나가 싸웠으나 참패하고 말았다. 그러자 이순신은 다시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어 원균이 싸우다가 남긴 13척의 배와 빈약한 병력으로 명량해전에서 적선 133척과 싸워 31척을 격파했다. 그의 전략이 뛰어났음을 또다시 입증한 것이다. 또 명나라 원병과 합세하여, 노량 앞바다에서 철수하는 왜선 500여척과 싸워 200척을 불 태웠다. 그때 불행하게도 적의 총알에 가슴을 맞았다. 그러자 그는 병사들의 사기가 떨어질 것을 염려하여 이렇게 말했다.
“지금은 싸움이 위급한 상태다. 그러니 나의 죽음을 병사들에게 말하지 말라.”
당부를 마치자마자 숨을 거두니 조카 이완(弛緩)이 그의 유언대로 장군의 전사 사실을 숨기고 여전히 용맹하게 싸워 많은 전과를 거두었다. 이순신 장군은 4형제 중 셋째였는데 첫째가 희신(羲臣), 둘째가 요신(堯臣), 셋째가 순신(舜臣), 넷째가 우신(禹臣)이었다. 이는 고대 중국 황제들의 이름을 따온 것이었다. 또 장군은 차를 좋아하여 아들과 조카들 이름까지도 모두 초두艸변을 붙여지었다.
문장에도 능하여 시조와 <난중일기> 같은 좋은 글도 많이 남겼다.
(임종대 편저 한국고사성어에서)
勿謂母過(물위모과)
勿:말 물, 謂:이를 위, 母:어미 모, 過:허물 과.
어의: 어머니의 허물을 말하니 차마 듣지 못하겠다는 말로, 상대편이 자기의 의사와 맞지 않는 말을 할 때를 비
유하여 쓴다.
문헌: 대동기문(大東奇聞)
조선 11대 중종(中宗) 때 성리학자 조헌(趙憲.1544~1592)은 백천 사람으로 호는 중봉(重峯), 시호는 문열(文烈)이며, 율곡 이이의 학문을 이어받았다. 그는 효성이 지극하여 부모님을 모시고자 외직을 자청, 보은현감을 지냈다.
다섯 살 때 여러 아이들과 정자에서 천자문을 읽고 있는데 벼슬아치들이 떠들썩하게 지나가자 모든 아이들이 책을 덮고 구경하였으나 유독 조헌만이 홀로 책 읽기를 계속했다. 이를 본 훈장이 기특하게 여기고 그 까닭을 묻자 그가 대답했다.
“책을 읽을 때는 오로지 마음을 모아 책 읽는 데에만 집중하라는 아버지의 말씀대로 한 것입니다.”
그는 어릴 때부터 이렇게 부모님에 대한 공경이 남달랐다.
선조 때 일본 사신이 와 명나라를 치고자 길을 빌려 달라고, 즉 가도공명(假途攻明)을 요청했다. 옥천에서 이 소식을 들은 그는 일본 사신을 차단할 것과, 왜란에 대비하여야 한다고 상소를 올렸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러자 그는 자신의 얼굴이 피투성이가 되도록 머리를 돌기둥에 쳤다.
이듬해에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자 옥천에서 의병 1700명을 규합하고, 승장 영규(靈圭)가 이끄는 승병과 합세하여 청주(淸州)를 수복했다. 또 금산에서 전라도로 향하는 왜적을 맞아 영규와 아들 완기(完基) 등 의병 700명과 함께 싸웠으나 중과부적으로 모두 장렬히 전사하였다. 후세 사람들은 그들을 기리는 칠백의총(七百義塚)을 만들어 숭앙하고 있다.
그는 어릴 때 어머니를 여의고 계모에게서 자랐다.
한 번은 외가에 가서 외할머니를 뵈었더니 외할머니가 등을 쓰다듬으며 말씀하셨다.
“어린 네가 계모에게서 학대를 받는다 하니 마음이 아프구나!”
그 말을 들은 조헌은 한동안 외가에 가는 발길을 끊었다. 그리고 오랜만에 외가에 가니 외할머니가 물었다.
“그동안 어찌하여 나에게 오지 아니했느냐?”
“어머니의 잘못을 말씀하시니 차마 듣기 거북하여 그랬습니다.”
그 후 할머니는 다시는 그에게 계모의 허물을 말하지 않았다. 그는 계모한테도 효심이 이와 같았다.
그가 세상을 떠난 후 나라에서는 영의정(領議政)을 추중하고, 옥천에 표충사(表忠祠)를 지어 제사를 지내게 했다.
(임종대 편저 한국고사성어에서)
美菊佳客(미국가객)
美:아름다울 미, 菊:국화 국, 佳:아름다울 가, 客:손 객.
어의: 아름다운 국화가 좋은 손님이다. 즉 국화의 아름다움을 손님에 비유하여 예찬하는 말이다.
문헌: 대동기문(大東奇聞)
신용개(申用漑.1463~1519)는 조선 제11대 중종(中宗) 때 문신으로 신숙주(申叔舟)의 손자다 본관(本貫)은 고령이고, 호는 이요정(二樂亭)으로 성종(成宗) 때 좌의정을 지냈으며, 시호는 문경공(文景公)이다.
김종직의 문하였던 그는 술을 무척 좋아해서 한 번 술을 미시기 시작하면 만취가 되어야 그만두었다.
그는 유난히 국화꽃을 탐하여 해마다 여덟 개의 화분에 국화를 심어 길렀는데 가을이 되면 꽃이 만개하여 아름다웠다.
하루는 그가 식구들에게 일렀다.
“오늘 아주 귀한 손님이 오실 터이니 술과 안주를 장만해 놓도록 하여라.”
하여 온 집안이 요란스럽게 음식을 차려 놓고 해가 저물도록 손님을 기다렸다. 그러나 손님은 오지 않았다. 부인이 이상히 여겨 어찌 된 일이냐고 물으니 그가 말했다.
“달이 떠서 달빛이 집안까지 곱게 비추고, 국화꽃 향기가 가득하니 이것이 귀한 손님이 아니오.”
그러고는 여덟 화분의 국화꽃과 어우러져 술을 나누었다.
그가 성종(成宗)을 4년간이나 모셔 깊은 신임을 얻고, 무오사화(戊午士禍) 때 투옥되었다가 곧 석방되어 직제학과 도승지를 지낸 것도 그만큼 신임이 두터웠기 때문이었다.
그는 호가 이요정(二樂亭)이었듯이 늘 두 가지의 즐거움을 안고 산 사람이었다.
(임종대 편저 한국고사성어에서)
美溢到去(미일도거)
美:아름다울 미, 溢:넘칠 일, 到:이를 도, 去:버릴(갈) 거.
어의: 너무 아름다우면 쫓겨난다는 말, 재상 이덕형이 그의 애인이 죄가 없는데도 지나치게 영리하고 아름다웠기
때문에 사랑에 빠져 나라의 일을 그르칠까봐 쫓아낸 고사에서 유래했다.
문헌: 해동야사(海東野史)
조선 선조(宣祖) 때 문신 이덕형(李德馨.1561~1613)은 본관이 경기도 광주(廣州)이고, 호는 한음(漢陰)이며, 시호는 문익(文翼)이다.
그가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라는 중임을 맡았을 때,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나라의 존망이 너무 위급하여 잠시도 대궐을 떠날 틈이 없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대궐 문밖에 소실(小室)을 두고, 거기에서 숙식을 했다.
몹시 무더운 어느 날, 그가 상감과 긴히 의논할 일이 있어서 밤늦게야 소실의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는 목이 말라 물을 달라고 할 기운도 없어 입만 벌리고 손을 내밀었다. 소실은 미리 제호탕(醍醐湯.더위를 풀어주고 목마른 것을 그치게 하는 탕약)을 준비해 두었다가 그에게 건넸다. 그러나 그는 탕약을 달게 받아 마시지 않고 소실을 빤히 쳐다보면서 말했다.
“나는 이제 그대와 헤어져야 하겠소. 그러니 나를 기다리지 말고 마음대로 살 곳을 찾아가시오.”
말을 마친 한음은 뒤돌아보지도 않고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버렸다. 소실은 갑자기 소박을 당한 까닭을 알지 못하고 밤새워 울었다. 그리고 다음날, 그와 가장 친한 이항복(李恒福)을 찾아가 자초지종을 이야기했다. 이항복도 역시 의아해하면서 한음을 쫓아가 물었다.
“그토록 아끼고 사랑하는 소실이 아무런 죄가 없는데도 차버린 까닭이 무엇인가?”
한음은 의미심장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그 사람이 죄가 있어서가 아니네. 내가 지난번 상감과 국사를 의논하고 늦게 돌아와 목이 몹시 말라 말도 못하고 손을 내민 적이 있었다네. 그때 그 사람이 미리 제호탕을 준비해 두었다가 내어 주었어. 처음 그 여자를 만났을 때 그 영리하고 총명함이 나로 하여금 사랑에 빠지게 했었거든. 그런데 그날 물사발을 받고 보니 사랑스런 마음이 더욱 깊어지지 뭐야. 그런데 다시 생각해 보니 왜란으로 온 나라가 혼란지경인데 소실에게만 빠져 있다면 나라의 중책을 맡고 있는 나로서 어디 가당찮은 일인가? 소실의 사랑스러움은 나를 미혹에 빠지게 만들고 그러다보면 국사를 그르치게 될 것이 분명하지 않겠는가 그래서 국사에 전념하고자 취한 행동이라네.”
자초지종을 듣고 있던 이항복이 말했다.
“공은 참으로 충성스러운 신하요, 대장부라야 할 수 있는 일을 했군! 나로서는 도저히 미치지 못할 일이네.”
(임종대 편저 한국고사성어에서)
未八當三(미팔당삼)
未:아닐 미, 八:어덟 팔, 當:마땅 당, 三:석 삼.
어의: 여덟이 아니라 셋으로도 충분하다. 즉 어떤 일을 해결하는 데에는 그 중심이 되는 부분만 해결되면 나머지는 저절
로 풀린다는 뜻이다.
문헌: 대한계년사(大韓季年史)
개화기(開花期)의 정치가이자 선각자였던 월남(月南) 이상재(李商在.1850~1927)는 본관이 한산(韓山)이고, 희택(羲宅)의 아들이다. 1867년 과거에 응시했으나 낙방하였는데 이장직(李長稙)의 소개로 박정양(朴定陽)을 알게 되어 그 인연으로 신사유람단의 한 사람으로 일본에 다녀오면서 홍영식(洪英植)과 사귀었다. 홍영식이 우정국총관(郵政局總管)이 되자 이상재는 우정국 주사가 되었다. 그 후, 갑신정변의 실패로 낙향해 있다가 박정양이 주미 한국대사관 공사로 부임하자 이상재는 일등서기관으로 동참하게 되었다.
그는 미국에 있는 동안 양복을 일체 입지 않고 사모관대와 조복을 통상복으로 입고 어디든지 거리낌 없이 드나들었다. 한국의 고유한 풍습이 널리 알려지기를 바라는 의도에서였다.
어느 날, 그가 사모관대를 쓰고 조복에 나막신을 신은 채 공원을 산책하노라니 어린아이들이 그를 에워싸고 도포자락을 잡아끄는가 하면 돌팔매질을 하고, 손가락질을 하며 놀렸다. 그러나 그는 웃는 낯으로 그들을 대했다. 그런데 그 광경을 보고 있던 다른 사람들이 경찰에 신고하여 아이들이 모두 붙들려가게 되었다.
그 사실을 신문의 기사를 읽고 난 뒤에야 알게 된 이상재는 경찰서장을 찾아가 천진난만한 어린아이들이 생전 처음 보는 외국 풍속의 복장을 보고 호기심으로 그랬을 뿐, 악의가 있어 그런 것이 아니니 방명해 주라고 청했다. 이에 경찰들도 그의 인격에 감동하여 아이들을 풀어주었다.
이처럼 월남의 고매한 인품이 알려지자 한국에 대한 인식이 미국의 상하의원에서 두루 새롭게 알려지게 되었다.
그러자 청국 사신들은 우리나라를 자기들의 속국인 것처럼 대하여 오다가 한국의 외교관들이 오히려 자기들보다 우대를 받는 것을 보고 시기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끝내 그것이 빌미가 되어 박정양과 이상재는 귀국을 해야 했다.
고국으로 돌아온 이상재는 학부(學部)의 학무국장을 거쳐 의정부 총무국장이 되었다.
당시 국내에서는 백동전(白銅錢)을 남발하여 경제가 도탄에 빠지고, 삼남지방에서는 동학란(東學亂)이 일어나 민심이 흉흉했다. 그런 가운데 조정에서는 이미 폐지했던 전운사(轉運司)를 복구하고자 고종(高宗)의 윤허까지 받아냈다. 그러나 이상재는 그 일이 잘못된 것이라 판단하고 집행하지 않았다. 이에 고종은 처음에는 왜 바로 집행하지 않느냐고 대노(大怒)하였으나 이내 그 일이 잘못된 것임을 깨닫고 중지하게 했다.
한때 임금의 명을 거역하여 죽음을 각오해야 했던 이상재는 살아난 것을 기뻐하기보다는 뒤늦게나마 고종이 현명한 판단을 내려준 데 대하여 어린애처럼 좋아했다.
그리고 얼마 있다가 일본에 병탄을 당하는 치욕스런 일이 일어났다.
그 후,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이등박문)와 이완용(李完用), 송병준(宋秉畯) 등이 합석한 한 만찬자리에 공교롭게 함께하게 되었다. 그 자리에서 이상재가 이완용과 송병준을 보고 불쑥 말했다.
“대감들은 동경(東京)에 가서 사시지요.”
두 사람이 어리둥절해서 말을 받았다.
“영감, 별안간 그게 무슨 말이요?”
이상재가 다시 싸늘하게 쏘아보며 말했다.
“대감들은 나라를 망하게 하는 데는 천재들이 아니요? 그러나 당신들이 동경에 가 있게 되면 이번에는 일본이 망하게 될 것이니 하는 말이외다.”
그러자 좌중은 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지며 모두들 사색이 되었다. 일본 총독 이토 히로부미도 있는 자리에서 월남이 아니고는 감히 못할 소리였다. 이처럼 뼈 있는 말을 거침없이 내쏘는 이상재의 대담성은 훗날 총리가 된 김홍집(金弘集)과 정사를 토의하는 자리에서도 여지없이 나타났다.
팔도감사(八道監司) 김홍집이 말했다.
“작금 탐관오리가 우글우글해서 백성들이 살 수가 없으니 여덟 놈만 목을 베면 될 텐데…….”
이에 이상재가 맞받아서 말했다.
“여덟 사람이 아니라 세 놈만 없애도 되겠지요.”
김홍집은 되로 주고 말로 받은 셈이었다. 이 말은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다는 뜻이었는데, 이런 이상재의 기지(機智)는 곳곳에서 드러났다.
한번은 일본을 시찰하고 돌아온 이상재에게 소감을 묻자 짧게 대답했다.
“동양에서 제일 큰 병기창을 보니 대포와 총검이 산처럼 쌓여 있어 일본이 강국인 것은 틀림없었소. 그런데 성경 말씀에 칼로 일어서는 자는 칼로 망한다고 하였으니 그것이 걱정이오.”
이는 일본이 망할 것을 예언한 말이기도 했다.
이상재는 1927년, 78세로 해방을 보지 못한 채 일제의 암울한 비구름 속으로 사라져갔다.
(임종대 편저 한국고사성어에서)
民草之亂(민초지란)
民:백성 민, 草:풀 초, 之:어조사 지, 亂:어지러울 란.
어의: 풀뿌리 백성들의 난리라는 말로, 조선 말기에 홍경래가 주축이 되어 평안도 지방에서 일어났던 민란에서 유래했다.
힘없는 사람들 일지라도 뭉치면 무서운 위력을 발휘한다는 뜻으로 쓰인다.
문헌: 관서신미록(關西辛未錄)
조선의 마지막 왕 제23대 순조(純祖) 때 민중 반란을 일으킨 홍경래(洪景來.1771~1812)는 평안도 용강(龍岡)에서 태어났다. 그는 외숙 유학권(柳學權)에게서 글을 배웠는데 총명한데다가 언변도 뛰어났다. 또 그는 열아홉 살에 사마시(司馬試)에 응시했다가 낙방을 했다. 그리고 얼마 후 자기보다 실력이 모자라는 양반집 자식들은 모두 급제했음을 알게 되어 분노하지 않을 수 없었다. 거기다가 서북인(西北人)은 문무(文武)를 막론하고 고관(高官)에는 등용시키지 않는 지역차별이 있다는 것을 알고부터는 더욱 강하게 불만을 품게 되었다.
이때부터 홍경래는 정처 없이 8도를 돌아다니며 민심을 살폈다. 그 결과 평안도 출신들은 안동 김씨들에게 배척당하고 있어 나라에 불만을 가진 사람이 많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박천(博川)의 청용사(靑龍寺)에서 명문가의 서자 우군칙(禹君則)과 의기투합하여 반란을 일으키기로 모의했다.
그는 만주의 마적단 정시수(鄭始守)와 가산군(嘉山郡)에서 제일가는 부자이면서 무과에 급제한 이희저(李禧著), 병법에 밝은 진사 김창시(金昌始), 태천(泰川)의 김사용(金士用)과 개천의 소문난 장사 홍총각(洪總角) 등 30여 명의 동지들을 모았다. 그들은 한결같이 과거 제도를 비롯 권문세가의 부패와 흉흉한 민심을 토로하고 있었다. 특히 남양 홍씨가 조정에 들어오면서 그들에 대한 불평이 높았다.
홍경래는 금광 채굴을 구실로 유민(流民) 장정들을 끌어모은 후, 기회를 보다가 제일 먼저 가산군(嘉山郡)을 습격, 군수 정저(鄭著)와 그의 아버지를 죽이고, 엿새 만에 여덟 고을을 손에 넣었다.
반란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지자 홍경래는 스스로 평서대원사(平西大元師)라 칭하고 김사용(金士用)을 부원사로, 김창시(金昌始)를 참모로, 박성간(朴聖幹)을 병참장으로 임명하여 조직을 확고히 하는 한편, 점령지에서는 창고를 열어 백성들에게 곡식을 나누어주는 등 민심 수습에도 노력했다. 그리하여 가산, 곽산(郭山), 정주(定州), 선천(宣川), 용천(龍川) 등지까지 점령했다. 조정에서는 많은 현상금을 걸고 홍경래를 체포하라고 독려했다.
홍경래는 남으로 내려가는 제일의 관문인 안주(安州)를 공격하기 위하여 박천의 송림리(松林里)로 집결하였다.
한편, 안주성(安州城)을 지키던 이해우(李海愚)와 조종영(趙鍾永)은 홍경래의 난 소식을 듣고 군사를 둘로 나누어 홍경래가 있는 송림을 좌우에서 습격했다.
그때 부상을 당해 거동이 불편했던 홍경래는 그들을 당해내지 못하고 정주성으로 도망가 성문을 굳게 닫고 홍총각(洪總角) 등 다른 장수의 지원군이 도착하기만을 기다렸다. 그러나 겨울이 가고 봄이 오도록 그들은 오지 않고 성안에서는 식량마저 동이 났다.
그때 관군 이요헌(李堯憲)이 화약으로 성벽을 폭파하고 물밀 듯이 들이닥쳤다.
끼니도 제대로 못하고 지칠 대로 지친 홍경래의 반군들은 진격해 들어오는 관군을 막아낼 수가 없었다.
최후가 닥쳤음을 안 홍경래는 관군에게 외쳤다.
“여기 홍경래가 나간다. 나를 잡아 상금을 타거라.”
관군들은 그에게 활을 쏘아대 벌집을 만들어 버렸다.
홍경래의 난은 부패한 조선 말기의 혼탁한 정치 상황을 말해주는 사건이었다.
(임종대 편저 한국고사성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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