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덕산(道德山 325m)-용암산(聳巖山, 546.9m)
산행일 : ‘14. 12. 27(토) 소재지 : 전남 화순군 한천면과 춘양면의 경계 산행코스 : 논재갈림길→용암사→도덕산갈림길↔도덕산 왕복→금호산성→칠형제바위→용암산→510봉→불암사→임도→논재갈림길(산행시간: 3시간20분) 같이한 산악회 : 청마산악회
특색 : 용암산(聳巖山)의 이름은 흔히 쓰는 ‘용 용(龍)’자가 아닌 ‘솟을 용(聳)’자를 쓴다. ‘높이 우뚝 솟았다’는 의미다. 사실 용암산의 높이는 547m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왜 높이 우뚝 솟았다는 뜻의 이름을 붙였을까? 이는 용암산이 주변의 다른 산들보다 조금 더 높은 것 외에도 울퉁불퉁한 근육질의 바위로 이루어진 정상이 유난히도 우뚝 솟아 보였다는 의미였을 것이다. 산이 바위로 이루어진데다 인근에서 가장 높기 때문에 조망(眺望)이 뛰어나며, 거기에다 바위산의 특징대로 볼거리가 많고 짜릿한 스릴(thrill)까지 즐길 수 있으니 한번쯤은 꼭 찾아볼만한 산이다. 이러난 장점이 입소문을 탔는지 오지(奧地)의 산임에도 불구하고 꽤 많은 산꾼들이 찾아들고 있다고 한다.
▼ 산행들머리는 논재갈림길(화순군 한천면 한계리 763-3) 호남고속도로 동광주 I.C에서 내려와 ‘제2순환로’를 따르다가 ‘지원교차로(동구 용산동)에서 빠져나오면 22번 국도와 만나게 된다. 22번 국도를 따라 화순읍까지 온 후 이번에는 국도 29호선으로 옮겨 보성방면으로 달리다가 모산교차로(화순군 한천면 모산리)에서 좌회전 822번 지방도를 따르면 조금 후에 한천면 소재지인 한계리에 이르게 된다. 한계리로 들어가기 바로 직전 ’용암사 진입로 표지석‘을 따라 우회전하여 들어가면 얼마 지나지 않아 용암사로 들어가는 삼거리인 ’논재갈림길‘에 이르게 된다. 이곳이 오늘 산행의 들머리이다.
▼ 버스에서 내려 왼편에 보이는 임도(林道)를 따라 들어가면서 산행이 시작된다. 들머리에 ‘용암산장 금오암’이라고 쓰인 입간판(立看板)을 이정표 삼아 진행하면 될 것이다. 사실 용암사의 앞에는 주차장이 마련되어 있다. 그러나 진입로가 좁은 탓에 대형버스는 진입이 불가능하다. 어쩔 수 없이 걸어갈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하지만 진입로 확장공사가 한창인 것으로 보아 용암사 앞에서 산행을 시작할 날도 멀지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임도를 따라 얼마간 걸으면 길가에 현 위치를 용암사로 적어 놓은 이정표(정상 2.3Km/ 한천면)와 산행안내도가 보인다. 잠시 멈춰 서서 오늘 걷게 될 코스를 살펴보지만 안타깝게도 지도(地圖)가 낡은 탓에 알아보기가 쉽지 않다. 이정표에서 조금만 더 걸으면 그러니까 들머리에서 15분 남짓 걸으면 용암사의 주차장(이정표 : 정상 2.2Km/ 한천면)을 지나 절의 경내(境內)로 들어서게 된다.
▼ 용암사(聳巖寺)의 마당에 들어서면 왼편에 요사(寮舍), 그리고 오른편엔 오지(奧地)의 절 치고는 제법 큰 대웅전(大雄殿)이 보인다. 대웅전의 뒤편에서 살포시 고개를 내밀고 있는 것은 아마 산신각(山神閣)일 것이다. 용암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소속의 사찰로 1890년 조정기에 의해 창건되었다.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폐사(廢寺)된 금오사(金鰲寺) 터에 절을 지었다고 하지만 조선시대 사료에서는 금오사에 대한 기록을 찾아볼 수 없으니 근거가 없는 주장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1890년에 처음 창건한 것으로 보면 옳을 것이다. 절의 역사는 비록 일천하지만 조계종 원로위원을 지낸 천운(天雲)스님과 백양사 주지를 역임한 암도(岩度)스님 등이 이곳에서 수행(修行)·정진(精進)하였을 정도로 뛰어난 참선도량(參禪道場)으로 알려져 있다. 현재 대웅전, 삼성각, 종루, 요사채 등의 전각(殿閣)들이 있으나 역사가 오래되지 않은 탓에 문화재(文化財)로는 분류되지 않는다.
▼ 등산로는 절 마당의 한가운데를 지나면 만나게 되는 샘의 뒤에서 열린다. 지금 눈앞에 보이는 저 샘이 한천(寒泉)이라는 마을의 이름을 낳게 한 찬샘(源水泉, 寒泉)이 아닐까 싶다. 기록에 의하면 용암산의 산자락에 있었다는 찬샘이라는 샘의 이름을 따서 마을 이름을 찬샘골 또는 냉정리(冷井里)라 부르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리고 찬샘을 한자로 표기하는 과정에서 한천(寒泉)이라는 지명으로 둔갑을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 샘터 뒤의 돌계단을 올라서면서 본격적인 산행이 시작된다. 철망(鐵網)을 왼편에 끼고 난 산길은 의외로 편하다. 부드러운 흙길에다 경사(傾斜)까지도 완만(緩慢)하기 때문이다. 철망이 끝나고도 이러한 산길의 특징은 변함이 없다. 그리고 17분 정도 후에는 능선안부에 있는 삼거리(이정표 : 정상 1.5Km/ 용암사 0.7Km)에 올라서게 된다. 이곳에서 용암산 정상은 오른편 방향으로 진행해야 한다. 오늘 오르게 될 또 하나의 산인 도덕산으로 가려면 왼편으로 가야 하는 것은 물론이다. 그러나 자신이 오르는 산들의 숫자를 세려는 사람들이 아니라면 구태여 도덕산을 다녀올 필요는 없을 것으로 생각된다. 볼거리나 특징, 거기다 특별한 내력조차 없는 봉우리이므로 오르는 것 자체가 무의미하기 때문이다.
▼ ‘능선안부 삼거리’의 이정표 근처에 서있는 세 사람이 오늘 산행의 스케치(sketch)용 사진 모델(model)이다. 아! 깜박 잊고 있을 뻔했다. 왜 모델의 숫자가 갑자기 늘어났는지를 말이다. 오늘 산행지는 광주 인근에 있는 화순이다. 그래서 광주에 살고 있는 여동생 내외에게 산행일정을 알렸더니 일부러 시간을 내어 이곳까지 찾아와 주었다. 고등학교에서 교편생활을 하다가 일찌감치 혼탁한 속세(俗世)을 훌훌 털어버린 그네들을 난 좋아한다. 그리고 그들만의 여유로운 삶을 한껏 즐기고 있음을 늘상 부러워했다. 이런 이들과 함께 하는 산행이라면 산세(山勢)가 좋고 나쁘고 간에 행복한 산행이 될게 뻔하다. 그렇다면 오늘 산행의 부제(副題)는 ‘행복한 산행’으로 정해보자.
▼ 우리 일행은 왼편에 있는 도덕산으로 향한다. 비록 산의 숫자를 세려는 것은 아니지만 산행기의 내용을 조금 더 충실하게 꾸며보기 위해서이다. 안부삼거리에서 도덕산으로 향하는 길은 의외로 또렷하다. 2~3분쯤 걸었을까 길도 보이지 않는 오른편의 능선을 치고 내려오는 일행들이 보인다. 왼편으로 난 또렷한 길은 도덕산 정상으로 연결되지 않는단다. 그길로 가더라도 정상으로 올라가려면 길이 아닌 곳을 헤치고 나가야한다며, 아예 여기서부터 능선을 치고 올라가라는 것이다.
▼ 길이 보이지 않는 능선, 그러니까 잡목(雜木)과 가시넝쿨들만 가득한 능선을 3~4분 정도 치고 오르면 도덕산 정상이다. 도덕산이란 이름을 가진 산들은 전국에 꽤나 많은 편이다. 그리고 그 산들은 하나같이 전형적인 흙산이라는 동일한 특징들을 갖고 있다. 아마 ‘도덕(道德)이라는 산의 이름과 무관(無關)하지 않을 것이다. 이곳 도덕산 역시 전형적인 흙산이다. 밋밋한 봉우리인 정상은 온통 잡목들이 점령하고 있는 탓에 조그만 공터조차 만들어내지 못하고 있다. 정상에는 정상표지석은 물론이고 이정표나 삼각점 등 이곳이 정상임을 알려주는 그 어떤 표식(標式)도 찾아볼 수 없다. 다만 오늘 산행을 함께 하고 있는 한현우선생이 조금 전에 매달아 놓은 ‘정상표시 코팅(coating)지’만이 이곳이 정상임을 알려주고 있을 따름이다. 이곳 도덕산이 6,316번째로 오른 산이라는 한현우선생은 내가 평소에 존경하는 산꾼 중의 한명이다. 그 정도로 많은 산을 올랐음에도 결코 자만하지 않고 지금도 일주일에 4~5일은 산을 찾는 다는 그의 열정이 부럽고, 그가 매달아 가고 있는 정상표시지에 적힌 산봉우리의 이름들이 하나도 허투루 적은 것이 없음이 존경스러운 것이다.
▼ 다시 삼거리로 되돌아와 이번에는 오른편, 그러니까 용암산 정상 방향으로 진행한다. 오른쪽 능선도 도덕산 방향과 마찬가지로 처음에는 경사(傾斜)가 거의 없이 시작된다. 그러나 그 편안함은 얼마가지 못한다. 서서히 가팔라지기 시작하던 산길이 오래지 않아 부담스러울 정도로 가파르게 변해버린 것이다. 그 가파름에 시달리던 산길은 왔다갔다 갈지(之)자를 만들면서 서서히 고도(高度)를 높여간다. 그러나 그것 가지고도 안심이 안 되었던 모양이다. 길가에 로프를 연결해 놓아 오르는 사람들이 부여잡고 오를 수 있도록 해 놓은 것을 보면 말이다.
▼ 안부삼거리를 출발해서 15분 조금 못되면 능선(이정표 : 정상 0.9Km, 산성 0.4Km/ 용암사 1.3Km)이 갑자기 널따란 분지(盆地)형태로 변하면서 경사(傾斜) 또한 평탄해진다. 등산로 주변에 보이는 나지막한 봉분(封墳)은 아마 누군가의 묘(墓)인 모양이다. 이후 산길은 잠시 숨을 고르고 있는 듯 순하게 이어진다. 그러나 묘역을 지나면서 능선에는 굵직한 바위들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그것도 눈요깃거리가 될 정도로 기괴(奇怪)하게 생긴 바위들이다.
▼ 오르면 오를수록 주변 바위들의 크기가 커질 뿐만 아니라 그 기세(氣勢) 또한 날카롭고 거칠어진다. 서서히 굵어지던 능선의 바위들이 언제부턴가 십여 길 높이의 암릉으로 변해있다. 첫 번째로 만나게 되는 바위등성이이다. 이 암릉은 마치 크나큰 성벽(城璧)을 닮았다. 길게 이어지는 암릉의 양쪽 옆이 바위절벽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또한 등성이의 위가 울퉁불퉁한데다 험하기까지 해서 사람들은 지나다닐 수가 없다. 산길을 어김없이 바위벼랑 아래로 우회(迂廻) 시키고 있는 이유이다. 그러나 꼭 우회만 시키는 것은 아니다. 가끔 바위 위로 올라설 수도 있는데, 올라서는 곳마다 전망대(展望臺)의 역할을 톡톡히 한다. 바위 위에 서면 금전저수지와 그 너머의 능주 시가지가 한눈에 잘 들어온다.
▼ 묘역을 출발한지 10분 쯤 지나면 ‘능선삼거리’라는 공식적인 이름을 갖고 있는 이정표(금오산선 0.2Km, 정상 0.7Km/ 전망대)를 만나게 된다. 이곳에서 오른편으로 진행하면 공식적으로 인정된 첫 번째 전망대가 나온다. 전망대에 서면 도덕산에서 용암산으로 이어지는 능선을 가운데에 놓고, 왼편에는 금전저수지와 능주 들녘이 널따랗게 펼쳐진다. 그리고 오른편에는 검설산과 태악산, 노인봉등이 자못 웅장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그 뒤에서 살짝 고개를 내밀고 있는 산들은 모후산과 백아산이 아닐까 싶다.
▼ 다시 능선삼거리로 되돌아와 이번에는 왼편으로 방향을 틀어 정상으로 향한다. 그리고 잠시 후에는 허물어진 돌담을 만나게 된다. 길가에 세워진 이정표(정상 0.5Km/ 용암사 1.7Km)를 보니 금오산성의 터(金鰲山城址 : 전남도문화재자료 제118호)인 모양이다. 옛날에야 성곽(城郭)의 길이가 1Km도 더 되었다지만 지금은 약 100여m 정도의 허물어진 성터가 전부라니 말이다. 이곳이 두 번째로 만나게 되는 바위등성이이다. 이곳의 특색은 널찍한 평지(平地)를 한가운데에 두고 양편에 바위들이 성벽처럼 둘러쳐져 있다는 것이다. 물론 그 바깥쪽은 바위절벽이다. 이러한 자연(自然)조건 때문에 이곳에다 산성(山城)을 구축했었나보다. 바위와 바위 사이의 빈 공간은 인공의 성벽(城壁)을 쌓아가면서 말이다. 금오산성의 역사적 유래는 정확하지 않다. 전해지는 문헌(文獻)들의 내용이 단편적이기 때문이다. 다만 오래전부터 이 성을 ‘몽골 성지(城址)’라고도 불러오는 것으로 보아 고려 때 몽고의 침입 당시 축조(築造)한 것이 아닌가 한다. 그 후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 때 다시 수축하였다고 하며, 군량(軍糧)을 쌓아 놓고 훈련하거나 기우소(祈雨所)를 설치하여 기우제(祈雨祭)를 지내기도 했던 곳이라고 전하기도 한다. 성의 규모는 둘레 3,515척(약 1,065m)에 높이는 9척 5촌(약 2.8m)이며(1923년 편찬 능주읍지 참조), 자연 암벽과 작은 계곡을 이용하여 축조한 포곡식산성(包谷式山城 : 계곡을 내부에 두고 능선을 따라 쌓는 방식)으로서 내부 활동 공간이 넓지 못한 약점이 있지만 성을 방어하는 데 유리한 조건을 갖추고 있다. 성벽(城壁)은 안쪽으로 경사(傾斜)를 이루면서 쌓았으며 큰 돌 사이에 작은 돌을 끼워 넣은 형식이다. 자연지형을 최대한 활용해 동벽(東壁)은 암벽(巖壁), 남벽(南壁)은 능선과 가파른 절벽, 서벽(西壁)은 나지막한 봉우리에서 계곡으로 내려가는 능선을 따라 축조했다. 그러나 등산로로 이용되는 바람에 훼손이 심한 상태다. 참고로 능주읍지에 따르면 성 안에는 백여 명을 수용할 수 있는 암혈과 용천(龍泉) 및 우단(雩壇)이라는 기우제를 지내던 단(壇)이 있었다고 한다.
▼ 정상으로 가는 길에 간간이 나타나는 전망바위에서는 조망을 즐기기도 하고, 길가에 놓아둔 벤치(bench)에서는 잠시 숨을 고르면서 한껏 여유를 부려본다. 오늘은 모처럼 여동생 내외와 함께 하는 산행이기 때문이다.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면서 걷다보면 진행방향에 거대한 바위능선이 나타난다. 용암산의 명물인 칠형제바위이다. 용암산은 바위봉우리들이 마치 계단처럼 나뉘어가며 형성되어 있다는 것이 다른 산들과의 다른 점이다. 바위등성이가 한참을 이어지다가 잠시 흙길로 변한다. 그리고 얼마 후에는 또 다시 험상궂은 바위등성이, 이렇게 반복을 거듭하면서 서서히 고도(高度)를 높여가는 것이다. 그 세 번째가 바로 눈앞에 펼쳐지고 있는 칠형제바위이다. 첫 번째는 아까 지나왔던 ‘성곽을 닮았던 지역’이고 조금 전의 ‘금오산성 터’는 그 두 번째이다. 그리고 조금 후 ‘둥그스름한 바위봉우리’인 네 번째 바위등성이를 지나면 만나게 되는 용암산 정상은 다섯 번째 암봉이다. 반대방향에 있는 510m봉까지 합칠 경우 바위등성이의 숫자는 여섯 개로 늘어난다.
▼ 칠형제바위의 위용에 감탄하다 왼편으로 돌아 바위 위로 오른다. 칠형제바위란 가장 큰 바위봉을 맏이로 차차 낮아지는 일곱 개의 기둥 비슷한 바위봉들을 일컫는다. 이 거대한 바위들이 골짜기 아래의 용암사를 향하고 있다고 하는데, 암릉의 끄트머리에 있어야할 용암사는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맏이의 위로 올라서면 바위기둥 사이로 금전저수지와 능주들녘이 내려다보이고, 오른편에는 모후산 등 화순의 높고 낮은 산군(山群)들이 도열해 있다. 바위의 생김새도 볼만할뿐더러 조망(眺望)까지 뛰어나니 그야말로 눈이 호사(豪奢)를 누린다.
▼ 칠형제바위를 지나면 만나게 되는 네 번째 바위등성이는 철사다리를 타고 올라야만 한다. 이 봉우리는 비록 둥그스름한 외형(外形)을 지녔지만 봉우리의 양 옆은 수십 길의 낭떠러지로 이루어졌으니 조심해야 할 일이다. 바위봉에 올라서면 진행방향 저만큼에 용암산 정상이 나타난다. 그 생김새는 이곳 네 번째 등성이와 비슷하나 그 규모는 더 크고 우람하다. 그래서 정상이 아니겠는가. 올라가는 길가를 쇠(鐵)로 만든 난간(欄干)으로 막아놓은 것은 왼편에 보이는 까마득한 바위벼랑을 조심하라는 의미일 것이다.
▼ 네 번째 등성이에서 조금 더 올라가면 드디어 용암산 정상이다. 칠형제바위에서 12분 남짓, 그리고 용암사에서는 1시간30분 정도가 걸렸다. 10평이 채 안 되는 좁다란 정상에는 정상표지석과 이정표(불암사 1.8Km/ 용암사 2.2Km) 말고도 무인산불감시탑까지 들어 앉아있어 그렇지 않아도 좁은 정상을 가뜩이나 더 비좁게 만들고 있다. 거기다 하나 더 가관인 것은 텐트까지 쳐져있다는 것이다. 산의 정상은 공공(公共)의 성격이 강한 장소이다. 산을 오르는 사람들이 사진을 찍거나 잠시 멈추어 서서 주변 경관을 감상하는 장소로 이용되기 때문이다. 그런 장소를 자신들만의 공간으로 만들어버린 저런 몰지각한 사람들을 과연 우리는 어떤 시선(視線)으로 바라봐야 옳을까? 따뜻한 시선이 아닐 것은 결코 나만이 아닐 것이다. 참고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능성현편 산천조를 보면 용암산은 금오산(金鰲山)으로 나와 있다. 예전에 산 위에 있던 샘에서 하늘로 올라가려던 금자라가 나왔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그러나 실제론 울퉁불퉁한 바위봉우리의 형상이 자라를 닮아서 붙여진 이름이 아니었을까 싶다.
▼ 바위로 이루어진 정상에서의 조망(眺望)은 더없이 광활하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남서쪽에 우뚝 솟은 510m봉이다. 낙락장송(落落長松)을 머리에 얹고 있는 거대한 바위봉우리가 마치 동양화(東洋畵)에서 본 듯한 풍경으로 나타난다. 아마 이곳 용암산에서 가장 빼어난 풍광(風光)이 아닐까 싶다. 그 오른편에는 능주의 들녘이 널따랗게 펼쳐진다. 그리고 반대방향으로 고개를 돌릴라치면 저 멀리 무등산이 내다보이고, 동쪽에는 모후산과 조계산이 조망된다. 날씨가 좋은 날에는 월출산까지 볼 수 있다고 하나 오늘은 그저 눈대중으로만 짚어볼 따름이다.
▼ 불암사로 방향, 그러니까 남서쪽 방향의 능선으로 내려서면서 하산이 시작된다. 정상에 세워진 이정표를 보고도 짐작이 가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고개를 한바퀴 빙 둘러보고 나서 가장 잘생긴 바위봉우리가 있는 방향으로 내려서면 된다. 내려가는 길은 무척 가파르다. 안전로프에 의지해서 내려서면 두 개의 봉우리로 이루어진 510m봉의 첫 번째 바위봉우리가 나온다. 바위봉 방향을 난간(欄干)으로 막아 놓았지만 이를 무시하고 그냥 넘어가 보자. 바위벼랑이 아찔할 정도로 높지만 조금만 주의하면 그다지 어렵지 않게 오를 수 있기 때문이다. 잠깐의 위험부담은 그 보답으로 큰 즐거움을 선사한다. 잘생긴 바위봉우리인 510m봉이 적나라하게 선을 보이는 것이다. 높디높은 바위벼랑 위에서 마치 곡예(曲藝)를 하듯 매달려 있는 소나무들, 이를 바라보는 눈이 호사(豪奢)를 누리는 순간이다.
▼ 암봉에서 올려다본 용암산 정상, 사방이 바위벼랑으로 이루어졌다. 다만 조금 경사(傾斜)가 누그러진 방향으로 산길이 나있다고 보면 된다.
▼ 암봉에서 맞은편 510m봉 방향의 바위벼랑을 내려다본다. 조금 위험하긴 해도 그동안의 경험으로 보아 내려갈 정도는 된다. 그러나 난 아까 넘어왔던 난간 쪽으로 발길을 돌리고 만다. 안전시설도 없는 저런 루트(route)로 내려가다 만일 집사람의 눈에 띄기라도 할 경우에는 큰 다툼으로 번질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요즘 부쩍 안전에 신경을 쓰고 있는 집사람에 대한 나의 작은 배려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암봉을 우회(迂廻)시키는 길도 만만치만은 않다. 곳곳에 안전로프가 매달려 있고, 그 로프에 의지해야만 내려갈 수 있다면 이해가 쉬울 것이다. 우회로를 내려서면 산길은 철다리를 통해 510m봉과 연결된다.
▼ 510m봉 역시 우회로를 이용한다. 선답자(先踏者)들의 기록에는 이 봉우리를 올랐다고 적혀있지만 아무리 보아도 올라가는 길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510m봉이 바위봉우리인 탓에 우회로(迂廻路) 또한 거의 바윗길 수준이다. 안전로프에 매달려 조심스럽게 내려가는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 내리막길은 제법 길게 이어진다.
▼ 한참을 앞서가고 있는 동생 내외를 고함쳐 불러 세운다. 준비해온 막걸리로 목이나 축이자며 말이다. 막걸리는 단 한 병, 그러나 그 속에 닮긴 정(情)은 결코 적지가 않다. 무슨 이야긴가 하면 비록 술의 양(量)은 적지만 잔이 오가며 주고받는 정담(情談)은 무궁무진하다는 이야기이다. 동생 내외가 준비해온 모시떡과 과일을 안주삼아 마시는 막걸리, 거기에다 삶의 진솔(眞率)한 이야기까지 곁들이니 이보다 더한 행복이 없다. 이게 바로 삶이요 인생인 것이다.
▼ 가파른 내리막길을 한참 내려가다 보면 특이한 묘역(墓域)을 만나게 된다. 한 평도 채 되지 않을 것 같은 비좁은 바위틈에다 묘(墓)를 써 놓은 것이다. ‘의성 김씨’의 후손들이 쓴 묘인데, 이 또한 언젠가 책에서 본적이 있는 ‘의지의 한국인’이 아닐까 싶다. 참 지도(地圖)에 보면 이곳으로 내려오는 길에 갈림길이 나뉘는 것으로 나와 있다. 그러나 내 눈에는 띄지 않았다. 아마 선두대장이 깔아놓은 방향표시지만 보며 진행하다 보니 그냥 지나쳐버렸던 모양이다.
▼ 내려가는 길은 무척 가파르다. 길가에 안전로프를 매어 놓았을 정도이니 미루어 짐작이 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잠시 후면 기분 좋은 풍광(風光)이 나타나니 너무 서운해 할 필요는 없다. 조금만 더 내려가면 만나게 되는 녹차나무 군락(群落)이 바로 그것이다. 어른의 허리춤에 차오를까말까 할 정도의 자연산 녹차나무들이 온 계곡을 뒤덮고 있는데, 산길은 그 푸르름의 한가운데로 나있다. 이런 길은 생각만 해도 즐겁다. ‘오빠 봄에 다시 내려오세요.’ 봄에 다시 내려와 우전차(雨前茶 : 양력 4월 20∼21일, 즉 곡우 직전에 차 잎을 따서 만든 차)라도 만들어 보잔다. 동생 내외가 살고 있는 전원주택의 뒷동산에도 자연산 녹차나무들이 지천이라면서 말이다.
▼ 녹차길이 끝나면 계곡을 건너게 되고, 이어서 조금 후에는 임도(林道)에 내려서게 된다. 정상에서 50분 정도의 거리이며 실제 산행은 이곳에서 끝을 맺는다고 보면 된다. 이곳에서 버스가 기다리고 있는 논재갈림길까지는 임도로 연결되기 때문이다. 날머리에 세워진 산행안내도를 보고 논재삼거리로 나가는 길을 찾아보지만 지도(地圖)에는 나와 있지 않다. 등산로를 정비하느라 심혈을 쏟아 부은 화순군청의 노력에 찬물을 끼얹는 아쉬운 점이다.
▼ 임도에 내려서면 일단 오른편으로 방향을 틀어야 한다. 오른편에 불암사가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임도를 따라 3~4분만 올라가면 사방이 기암괴석(奇巖怪石)으로 둘러 쳐진 아늑한 곳에 들어앉은 불암사(佛岩寺)의 절 마당에 들어서게 된다. 불암사는 ‘대한불교조계종’ 대각회 소속의 사찰로서 원래의 이름은 용암사(聳巖寺)이며, ‘화순군사(和順郡史)’에 따르면 877년(신라 헌강왕 3) 도선국사(道詵國師)가 창건했다고 한다. 도선국사가 이곳을 지나다가 여덟 폭의 병풍처럼 바위에 둘러싸여 있고, 앞산에는 관음성상(觀音聖像)이 상주(常住)하는 듯한 터에다 절을 세웠는데, 법당 뒤 오른편에만 바위가 없는 것을 애석해하자 하룻밤 사이에 땅속에서 큰 바위가 솟아올랐다는 것이다. 그래서 절의 이름을 용암사라 하였단다. 현재 사찰의 역사는 1987년에 주지였던 현산(玄山)이 빈터로 남아있던 옛 용암사(聳巖寺) 터에 법당과 요사를 새로 지으면서 부터이다. 절의 이름을 용암사라 하지 않고 불암사라고 한 것은 1890년에 조정기가 이웃에다 용암사라는 절을 이미 창건하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현재 대웅전과 약사전, 삼성각, 요사채 등의 전각들이 있으나 이곳도 용암사와 마찬가지로 보유 문화재는 없다. 참고로 용암사에 대한 기록은 화순읍지 외에도 여지도서(輿地圖書)와 호남읍지(湖南邑誌)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 불암사를 둘러보고 내려오다 보면 정상어림이 바위로 이루어진 봉우리 하나가 맞은편에 나타난다. 바로 이 절의 이름을 낳게 했을 거라 추측되는 불암(佛巖) 즉 부처바위란다. 그러나 모든 사물(事物)은 보는 사람들에 따라 각기 다르게 나타나는 법이다. 그 바위를 보고 난 집사람과 여동생이 틀림없는 임산부(姙産婦)라고 자신 있게 말하는 것이 그 증거일 것이다.
▼ 산행날머리는 논재갈림길(원점회귀) 불암사에서부터 날머리까지는 임도로 연결된다. 시멘트로 포장된 임도를 따라 내려가면 잠시(5분 정도) 후 임도는 두 갈래로 나뉜다. 이곳에서는 오른편에 보이는 비포장 임도를 따른다. 곧장 포장임도를 따를 경우에는 우봉리를 거쳐 춘양면소재지에 이르게 되기 때문이다. 비포장 임도는 지루할 정도로 오래 계속된다. 그리고 특별한 볼거리도 없다. 중간에 논재로 추정되는 고갯마루를 넘어설 때 잠깐 나타나는 용암산 정상의 암릉이 그나마 위안을 줄 따름이다. 고갯마루를 내려서면 느닷없이 ‘금오산성’이라고 쓰여 있는 커다란 빗돌이 나타난다. 뜬금없이 나타난 금오산성을 보고 놀라는 사람들도 많을 것이다. 그러나 가까이 다가가보면 조그마한 글씨로 ‘흑염소, 장어구이’라고 적힌 것을 볼 수 있다. 바로 음식점이었던 것이다. 헛웃음을 치며 걷다보면 잠시 후에는 아침에 산행을 시작했던 논재갈림길에 이르게 되면서 오늘 산행(약 8.5㎞)이 끝을 맺는다. 불암사에서 40분, 산행을 시작한지는 3시간30분이 지났다. 막걸리를 마시느라 중간에 쉰 시간을 감안할 경우 3시간20분이 조금 못 걸린 셈이다.
▼ 용암산 산행을 끝내고 운주사로 옮겨서 경내(境內) 투어(tour)를 시작한다. 물론 걸어갈 수 있는 거리가 아니므로 운주사까지는 버스를 이용했다. 절의 입구에 들어서니 돈(성인기준 3천원)을 받고 있다. 문화재관람료란다. 운주사를 이미 2번을 찾았던 기억이 있다. 그 마지막은 1980년대 후반, 그때만 해도 사찰(寺刹)의 규모는 보잘 것이 없었고, 돌탑과 돌부처들만 어지럽게 널려있었다. 물론 입장료는 받지 않았었다. 그런데 지금은 입장료를 받는다. 그것도 3천원이나 말이다. 운주사(雲住寺)는 ‘대한불교조계종’ 소속의 사찰로서 도선(道詵)이 창건했다. 그러나 이와 더불어 운주(雲住)가 세웠다는 설(說)이나 마고할미가 세웠다는 설도 전해지고 있으니 참고할 일이다. 임진왜란 때 법당과 석불, 석탑 등이 많이 훼손되어 폐사(廢寺)로 남아 있다가 1918년에 박윤동(朴潤東)과 김여수(金汝水)를 비롯한 16명의 시주들이 중건(重建)하였다. 운주사에는 담장이 따로 없다. 완만한 골짜기 안에 그저 돌탑과 돌부처들만이 즐비하다.
▼ 일주문을 지나자마자 수많은 돌탑과 돌부처들이 중생들을 맞는다. 운주사는 운주사라는 절의 이름보다는 천불천탑(千佛千塔)으로 더 널리 알려진 사찰(寺刹)이다. 지금은 비록 석탑(石塔) 12기(基)와 석불(石佛) 70좌만 남아 있을 뿐이나,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1,000개의 석불과 석탑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을 정도로 수많은 석탑과 석불이 존재했었다는 것이다. 1942년까지만 해도 석불 213좌와 석탑 30기가 있었다고 하니, 이런 소중한 유산을 보존하지 못한 우리 자신을 부끄러워해야 할 일이다. 아무튼 이곳의 석불들은 10m 이상의 거구에서부터 수십cm의 소불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며 매우 투박하고 사실적이며 친숙한 모습이 특징이다. 이러한 가치를 인정받아 1980년 6월에는 절 주변이 문화재 보호구역으로 지정된바 있다. 그리고 입구의 **)구층석탑을 시작으로 오층석탑과 칠층석탑, 그리고 원형다층석탑 등, 크기도 모양도 다양한 탑(塔)들이 골짜기 한가운데를 따라 줄지어 서 있다. 물론 이곳 골짜기뿐만이 아니다. 시간을 내어 양쪽 산등성이라도 걸어볼라치면 능선에 드문드문 서 있는 돌탑들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아무튼 크고 작고, 서거나 앉은 불상(佛像)들은 골짜기 바닥에 있기도 하고 양쪽으로 이어진 바위벽에 무리무리 기대어 있거나 산등성이 곳곳에 흩어져 이끼를 입고 있기도 하다. 때로는 머리만 남거나 몸통만 남기도 했으며, 대웅전 뒤편 구석에서 무릎 아래 자잘한 자갈탑들을 거느리고 있기도 하다. (**) 구층석탑(九層石塔, 보물 796호), 넓은 자연석을 놓아 이를 하층 지대석(地臺石) 겸 기단석(基壇石)으로 삼고, 그 위에 상층기단 받침을 3단으로 새긴 다음, 상층기단 겸 탑신(塔身)을 올려놓아 9층까지 이루었다. 위층 기단의 가운데 돌은 4장의 널돌로 짜였고, 네 모서리마다 기둥모양을 새긴 뒤 다시 면 가운데에 기둥모양을 굵게 새겨 면을 둘로 나누어 놓았다. 옥개석의 밑면에 받침을 생략하였거나 각 면에 새긴 조각의 특징 등 탑의 조성 수법으로 보아, 고려시대의 석탑으로 추정된다.
▼ 석불감쌍배불좌상(보물 797호), 골짜기 중심부에는 팔작지붕에 용마루와 치미(?尾, 들보의 양단에 있는 새의 꼬리 내지는 물고기 형상을 한 장식)가 모각된 돌집 안에 석불(石佛) 두 기가 등을 맞대고 앉아 있다. 남향한 불상은 결가부좌(結跏趺坐)하고 오른손을 배에 댔고 북향한 불상은 옷 속에서 두 손을 모아 지권인(智拳印)을 취한 것으로 여겨진다. 고려 시대의 지방화된 불상양식이다. 참고로 지권인이란 두 손으로 각각 금강권(金剛拳)을 만들고, 왼 손의 집게손가락을 펴서 오른 주먹 속에 넣고, 오른손의 엄지손가락과 왼손의 집게손가락을 마주 대는 것을 말한다. 이렇게 하는 것은 오른손은 불계(佛界)를 표하고, 왼손은 중생계(衆生界)를 표한 것이므로 이 결인(結印)으로써 중생과 부처가 둘이 아니고, 어리석음과 깨달음이 하나라고 하는 깊은 뜻을 나타내는 것이다. 배불좌상의 뒤편에 보이는 밥그릇을 쌓아 놓은 것 같은 탑은 **)원형다층석탑이다. (**) 원형다층석탑(圓形多層石塔, 보물 798호), 높이 5.71m의 석탑으로 마치 둥그런 밥그릇을 쌓아 놓은 것 같은 특이한 외형을 지니고 있다. 기단(基壇)은 2단의 둥근 바닥돌에 높직한 10각의 기단면석(基壇 面石)을 짜올리고 그 위로 16장의 연꽃잎을 장식한 돌이 올려진 형태이다. 탑신(塔身)은 몸돌과 지붕돌이 모두 원형이고, 층마다 몸돌 측면에 2줄의 선이 돌려져 있다. 기단갑석(基壇 甲石)의 윗면이 편평하고 옆면이 둥근데 비하여, 탑신의 지붕돌은 아래가 편평하고 윗면이 둥근데, 일반적인 석탑의 형태를 따르지 않은 고려시대 각 지방에 나타났던 특이한 양식으로 보인다.
▼ 운주사를 도선국사((道詵國師)가 세웠다는 설은 풍수비보설(風水裨補說)을 근거로 한다. 도선이 우리나라의 지형을 배의 형상으로 보고, 배가 안정되기 위해서는 선복(船腹)에 무게가 실려야 하므로 선복에 해당하는 이곳에 천불천탑을 세웠다는 것이다. 이에 못지않게 널리 퍼져 있는 설이 미륵신앙(彌勒信仰)과 관련된 것들이다. 주로 운주사 부처들의 파격적이고 민중적인 이미지에서 뒷받침을 얻은 것들로, 이곳을 반란을 일으킨 노비와 천민들이 미륵이 도래하는 용화세계(龍華世界 : 미륵불의 정토)를 기원하며 신분해방운동을 일으켰던 일종의 해방구로 추정하고 그들의 염원으로 천불천탑이 이루어졌다고 보는 것이다. 특히 운주사를 유명하게 하는 데 크게 기여한 황석영의 소설 ‘장길산’은 천불천탑과 ‘와불’ 얘기로 말미를 장식함으로써 운주사를 일약 미륵신앙의 성지(聖地)로 부상시켰다. 그러나 운주사는 고려 시대에 창건된 절이고 장길산은 조선 숙종 때의 이야기이니 그저 소설에서나 가능한 픽션(fiction)일 따름이다.
▼ 수많은 불상(佛像)들의 정점은 대웅전 왼편 산등성이에 누워있는 두 기(基)의 와불(臥佛)이다. 각각 비로자나불좌상과 석가여래불입상인 이 ‘와불’들은 실제로는 와불이 아니라 미처 일으켜 세우지 못한 부처들이다. 그리고 이들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는 날 새로운 세상이 열린다는 이야기를 간직하고 있다. 한국의 현대문학을 대표하는 작가 황석영의 ‘장길산’에서 민초(民草)들이 그렇게도 일어나기를 염원했던 그 부처님이 바로 우리 눈앞에 누워있는 것이다.
에필로그(epilogue), 산행이 끝나면서 동생 내외와도 헤어진다. 아쉽다. 그러나 회자정리(會者定離)라고 이런 게 바로 인생인데 어쩔 수 없는 일이 아니겠는가. 자꾸만 화순에서 손꼽는 음식인 ‘염소탕’을 먹고 가라고 하지만 서울에서 내려온 산꾼들과 함께 움직여야 하는 우리 부부에겐 그럴만한 시간적 여유가 없다. 산악회에서 준비한 음식을 먹고 난 후에는 근처에 있는 운주사에 들렀다가 서울로 돌아가야 하는 것이다. 아쉬운 마음으로 돌아서는데 여동생이 보따리 하나를 건네준다. 부부가 함께 수확한 은행과 대추란다. 지난번에는 말린 호박 등의 밭작물이었는데, 이번에는 건과(乾果)이다. 스스럼없이 받아 들고 본다. 주고받는 정(情), 이것 또한 삶의 또 한 방식일 것이기 때문이다. |
출처: 가을하늘네 뜨락 원문보기 글쓴이: 가을하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