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림시장과 '쪽방' 골목
80년대 공단 호황 노동자 몰려 한때 '장림의 남포동' 명성
움직임이 멈춘 시간처럼 고요하다.
마치 물속을 걷는 것 같다.
그러다 갑작스레 뒷덜미를 찬바람이 '탁'하고 치고 간다.
개발시절 '쪽방'이라 불리던 10평짜리 건물이 줄지어 서 있는 좁디좁은 골목.
그 사이로 초겨울의 장림시장은 을씨년스레 서 있었다.
장림시장.
1970년대 한창 신평·장림공단조성과 함께 집 없는 주민을 장림의 '허허벌판'으로 이주시키면서 형성된 시장.
그러다 80년대 공단이 호황을 맞으면서 수많은 젊은 노동자들이 아름다운 꿈들을 간직하고 흘러들어왔던 곳.
한때는 남포동이 부럽지 않다고 하여 장포동(장림의 남포동)이라 불릴 만큼 장림시장 부근은 풍족함으로
넘쳐났던 곳이다.
퇴근시간이면 술집은 앉을 자리가 없었고,곳곳에서 노랫가락소리가 넘쳐흘렀다.
열악한 노동환경 속에서도 젊은 그들만의 문화와 낭만이 있었고,그들만의 꿈꾸던 세상이 존재했던 곳이었다.
공단이 커지자 장림시장 위쪽으로는 공장의 젊은 아가씨들을 대상으로 쪽방골목이 형성되었다.
원래 정부로부터 땅 10평씩 분양받은 이주민들이 자신이 살던 스레이트집을 5층 건물로 새로 지어
세를 주기 시작했는데,이것이 장림시장의 그 유명한 '쪽방골목'인 것이다.
이곳에서 젊은 여성노동자들은 3~4명이 같이 칼잠을 자며 생활을 했던 것이다.
건물건물마다 틈이 없을 정도로 바짝 붙어 지어진 이 쪽방골목이,그래도 한때는
방 빠지기를 기다려야 할 정도로 인기가 있었다.
공장이 가깝고 '장포동'의 중심지이자 장림시장을 바로 밑에 두고 있는 지리적 이유에서였다.
그 시절 공장의 아가씨들은 시장의 목로주점에 삼삼오오 모여앉아,주인아주머니가 남들 눈을 피해
콜라 잔에 섞어준 소주를 마시며,힘든 노동의 시간을 내려놓곤 했다.
그리고는 10평짜리 쪽방에 노곤한 하루를 누이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전봇대마다 "셋방", "전세" 벽보가 덕지덕지 붙어 겨울바람에 펄럭이고 있을 뿐
세월의 단호함을 이기지 못한 채 속수무책이다.
지팡이를 짚고 앞서가는 노인의 인생역정을 보는 것 같아 얼른 고개를 돌린다.
그 시절 흥청대던 시장의 목로주점에 들어선다.
전형적인 70년대식 주점이 대여섯 집 동그마니 앉아있다.
점심 무렵인데도 아직 문을 열지 못한 곳이 몇 곳 된다.
그 시절의 여유로움은 그 어디에도 없다.
한창 영업을 준비하던 목로주점에 앉았다.
그 시절 인기 메뉴였다는 순대와 소주를 한 잔 시킨다.
의자에 앉으니 한기가 든다.
진열대를 겸한 시멘트 탁자에 무릎이 닿아 꼭 낀다.
이 차가운 곳에서 그들은 서로의 무릎으로 온기를 얻으며 사랑을 나누었던 것일까?
괜히 가슴이 아리다. 조금 있으니 진열해 놓은 음식에 설설 김이 오른다.
그래도 추운 가슴은 좀 채 온기가 옮겨 붙지 않는다.
시멘트 탁자를 가만히 쓰다듬어 본다.
혹시 그들의 손때가 세월의 두께만큼 따뜻한 온기로 묻어날까?….
그러나 손끝에는 겨울바람 한 자락만 휙 스쳐 지나간다.
아, 그들은 없구나! 이미 이곳을 떠난 철새들처럼 날아들 갔구나.
사랑을 그리다 메마른 장림천 따라 흘러흘러 갔구나,
무심한 세월에 떠밀려 온다간다 인사한번 나누지 못하고 그렇게 사라져 갔구나….
언뜻 술에 취한 이의 고함소리에 고개를 든다.
이른 시간 술을 먹어야 했던 이유는 알 수 없지만,이곳의 무거운 삶이
그 사람의 두 어깨에 가득 올라앉아 있는 것 같아 안타깝다.
그에게 늙은 여인 하나가 다가가 따뜻한 커피를 권한다.
그리고 다독인다.
하염없이 등을 쓰다듬는다.
'아직은 괜찮지 않느냐고,그리고 내일이 있지 않느냐고…'
그제서야 내 몸에도 온기가 따스하게 오른다.
시린 무릎과 등마저 따습고 따습다. 겨울바람 하나가 그들 옆으로 슬쩍 피해간다.
그러자 갑자기 앞에 놓인 순대와 한 잔 소주가 맛깔스러워진다.
최원준·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