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에 대하여 귀로만 들어 왔던 이 몸, 이제는 제 눈이 당신을 뵈었습니다." (5)
욥기42장 5절은 하느님의 계시 말씀을 직접 들은 욥의 진한 감동을 잘 드러내고 있다. 욥은 과거에 가졌던 불완전하고 관념적인 하느님께 대한 지식이 아니라, 경험적이고 훨씬 정확한 하느님께 대한 지식을 가진 데 대해 감사의 심정을 말하고 있다.
'당신에 대하여 귀로만 들어왔던 이 몸' 에 해당하는 '레셰마으 오젠 셰마으티카' (leshemah ozen shemahthika)는 직역하면 '내가 귀의 들음으로 당신을 들었습니다' (By the hearing of the ear I heard Thee)이다.
여기서 '귀로만'에 해당하는 '오젠'(ozen)이 사용된 것은 자신이 지금까지 하느님을 직접 체험한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말을 통해서만 들어왔음을 강조적으로 나타내기 위해서이다.
이것은 욥이 지금까지 조상들의 전통과 종교적 교훈, 그리고 친구들의 말, 신학적 이론을 통해서만, 하느님께 대하여 알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다시말해 지금까지 욥이 알고 있었던 하느님은 어떤 '매개체'를 통하여 아는 하느님이었고, 어떤 매개체를 통해 인식된 욥의 하느님께 대한 믿음은 불완전하고 관념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욥은 이제는 그 어떤 매개체없이 직접적으로 하느님을 대면하고 있다.
여기서 시간적 의미를 나타내 주는 '이제는' 에 해당하는 '웨앗타'(weatha)는 문자적으로 '그러나, 지금은' 이라는 뜻이다.
이것은 욥이 과거 하느님을 알고 경험했던 방법과 현재 하느님을 알고 체험하는 방법이 현저하게 다르다는 것을 강조하는 말이다.
이것을 구체적으로 나타내 주는 것이 '제 눈이 당신을 뵈었습니다' 라는 표현이다. 이에 해당하는 '에니 라아테카'(eni taatheka)는 '주시하다', '생각하다', '분별하다', '경험하다' 라는 뜻의 동사 '라아'(raah)와 '눈'을 뜻하는 명사 '아인'(ain) 이 결합된 표현이다.
따라서 직역하면 '제 눈으로 당신을 분별하다. 제 눈으로 당신을 경험하다' 가 된다.
그러므로 본절의 '귀'와 '눈'이 각각 의미하는 것은 욥에게 있어서 하느님께 대한 '간접적인 체험'과 '직접적인 체험'이다.
사실 욥이 어떤 매개체없이 직접 하느님을 보고 대면한 것은 그가 엄청난 고난과 시련 속에서 간절하게 열망했던 원의(욥기 19,27)가 실현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내가 기꺼이 뵙고자 하는 분, 내 눈은 다른 이가 아니라 바로 그분을 보리라. 속에서 내 간장이 녹아 내리는구나.'(욥기19,27)
그리고 하느님께 대한 이러한 직접적 체험은 그동안 욥에게 있었던 하느님께 대한 여러가지 부정적 의식들과 의구심들을 깨끗하게 털어버리고, 새롭게 하느님과의 관계를 정립하도록 하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욥이 이렇듯 하느님을 직접 대면함으로써, 하느님과의 관계를 새롭게 정립할 수 있었던 것은 하느님께서 당신의 창조물을 소재로 하여 끊임없이 욥에게 말씀하셨던 질문 공세와 설득이 있었기 때문이다.
욥기 38장~41장에서 전개된 욥을 향한 하느님의 그 많은 물음과 권면의 말씀들은 마침내 욥으로 하여금 하느님의 절대 주권을 인정하게 했을 뿐 아니라, 그에 의해 창조된 인간은 오직 하느님의 주권과 그 섭리에 절대 순명하는 일만이 요구된다는 사실을 절감하게 하였다.
즉 하느님의 이러한 선언적 말씀은 욥에게 정확한 신(神)지식과 함께 근본적인 인식의 변화를 가져다 준 것이다.
'그래서 저 자신을 부끄럽게 여기며 먼지와 잿더미에 앉아 참회합니다.' (6)
욥기 42장 2절은 욥이 하느님의 섭리와 절대 주권에 대한 새로워진 믿음을 고백하는 내용이었다.
욥기 42장 3절은 욥이 무지한 말로 하느님의 뜻을 가리우고, 교만하게도 인간으로서는 알 수 없는 하느님의 행하심에 대해 함부로 말했음을 고백하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욥기 42장 4~5절은 하느님의 계시를 직접들은 감동에 대한 고백과 하느님의 계속적인 교훈을 요청하는 내용이었다.
이러한 내용에 이어지는 욥기 42장 6절은 욥의 진심어린 회개를 다루고 있다.
하느님께 대한 욥의 직접적인 체험은 그로 하여금 온전히 자신을 부정하는 '회개'의 자리에 이르게 했던 것이다.
여기서 '제 자신을 부끄럽게 여기며' 라는 의미로 번역된 '에므아쓰'(emas)의 원형 '마아쓰'(maas)는 '멸시하다', '가볍게 여기다', '거절하다'(이사7,15; 잠언15,22) 라는 뜻이다.
이렇게 자기 스스로를 멸시하고 거절한다는 욥의 말은 그가 지난 날 하느님의 기준이 아닌 자신의 기준에 근거를 두고 행동한 모든 일을 혐오하듯이 깊이 반성하고, 그것에서 벗어나려는 굳은 의지를 가졌음을 보여준다.
이것은 하느님을 만난 사람이 경험하는 자아 부정(자기 부인)이다.
그리고 이러한 '자아 부정'은 곧바로 철저하게 하느님께로 돌아가는 '회개'로 이어지고 있다. 여기서 '먼지와 재'는 '비탄과 신음', '회개'를 나타내는 상징적 표현이다.
그리고 직설적 어법이 사용된 '참회합니다'에 해당하는 '웨니하므티'(wenihamthi) 의 원형 '나함'(naham)은 문자적으로 '슬퍼하다', '애통하다' 라는 뜻이며, '마음을 바꾸다','의견을 뒤집다' 라는 뜻으로도 사용된다(탈출32,12; 예레18,8; 아모7,3.6).
원문으로 볼 때, 이 단어에는 과거에 대하여 크게 슬퍼하고 애통해 한다는 의미와 더불어 자신의 생각과 마음의 태도를 완전히 바꾸는 철저한 각성과 변화에 대한 결단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욥이 회개한 내용은 무엇인가?
그것은 욥의 친구들이 도식적 인과응보의 틀을 가지고 지적하는, 특정한 행위와 관련된 구체적 범죄가 아니다. 욥기 31장 전반에 걸쳐 욥 스스로 단호하게 부정했던 사회적, 도덕적 윤리적 범죄가 아니다.
그것은 우선, 고난에 처한 욥이 지금까지 하느님 대전에 취한 태도를 들 수 있다.
과거에 욥은 의인이 고통받고 악인이 잘 되는 현실적 모순 상황과 관련해서 하느님의 정의(공의)에 대해 의문을 품고 있었고, 이유를 알 수 없는 자신의 고난에 대해 해명해 달라고 하느님께 항변하기도 했다.
인간적 입장으로는 지극히 자연스런 것이지만, 욥이 한 가지 간과한 것이 있다.
그것은 욥이 하느님께 그 자신의 고난과 이유를 물으며 항변하기 이전에, 피조물로서 절대적 주권을 가지신 하느님 대전에 절대 순명하는 자세를 가져야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욥은 절대자이신 하느님 대전에 자신이 당하는 고난의 이유를 알 수 없다는 이유로, 이에 대해 항변하고 원망한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그의 죄의 유무를 가리시거나 고난의 원인이 무엇인지를 언급하지 않으시고, 다만 당신의 절대 주권과 위대하고 섬세한 섭리에 대해 선언하시고 열거하시며, 욥으로 하여금 사람이란 초월자요 창조주이신 하느님 대전에서 자신의 유한한 사고로 그분의 무한한 섭리를 판단하기 전에 그분의 절대 주권을 인정하고, 그저 거기에 순명해야 함을 교훈하신 것이다.
다음으로 욥이 참회했던 것은 욥 자신이 행해 온 의로운 행위에 대해 그 스스로 집착했던 것을 들 수 있다.
욥은 하느님을 대면하기 전 자신의 도덕성과 의로운 삶을 상당히 가치있는 것으로 평가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그는 친구들과의 변론에서 자신이 심지어 하느님 대전에서도 지금까지의 행실에 대해 당당히 변론한 것이라고까지 말했다.
이러한 사실은 그의 변론 전반에 나타나고 있는데, 가장 대표적인 것이 그의 변론 말미의 윤리적 삶에 대한 회상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욥기 31장 한 장 전체에 걸쳐 계속되는 욥의 회상은 과거 자신의 삶에 대한 솔직한 부분이며 고백이지만, 지나치게 자기식의 의(義)(Self-righteousness; Self-justification)를 강조한 것으로 들려질 소지가 충분히 있다.
욥의 윤리적 삶에 대한 회상은 그가 극심한 고난을 당할만큼 자신이 직접적으로 특정한 죄를 범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 내뱉은 말이었지만, 그것에 근거해서 하느님 대전에 자신의 의로움을 증거하겠다고까지 한 것은 교만이 아니라고 할 수 없다(욥기9,34.35; 13,3 ; 31,35).
결국 욥은 하느님과 대면한 후, 하느님의 무한한 섭리를 인간의 제한된 이성과 지식으로 함부로 판단한 자신의 태도가 얼마나 그릇된 것이며, 자신이 내세웠던 도덕적, 윤리적 삶이 하느님 대전에 얼마나 무가치한 것인지를 확고하게 인식할 수 있었던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