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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119. 묵상글 ( 연중 제2주간 목요일. - 지금은 염불을 할 때입니다 .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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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119. 연중 제2주간 목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지금은 염불을 할 때입니다
“소문은 발 없이 천리를 간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소문은 퍼지는 과정에서 불어나게 마련입니다. 예수님에 관한 소문이 널리 퍼져서 수많은 사람이 몰려들었습니다. 그야말로 예수님의 인기가 대단하였습니다. 스스로 당신을 소문내서가 아니라 사람들이 알렸습니다.
그러나 일반 서민들로부터 많은 지지와 호응을 받았고 당시 유다의 지도자층에 속한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 그리고 헤로데 사람들에게는 완강히 거부되었습니다. 심지어 악의를 품은 사람들은 예수님을 없애버릴 방법을 모의하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한적한 호숫가로 물러가셨습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여러 지역에서 모여들었습니다. 그야말로 ‘꿀이 있으면 벌 나비가 모여드는 법’입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타실 거룻배 한 척을 마련하라고 제자들에게 이르셨습니다. 이제 군중과 일정한 거리를 두신 것입니다. 악령들은 예수님의 정체를 알아보고서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 이십니다” 하고 소리 질렀지만, 일반 사람들은 자신들의 병 치유만을 바라며 몰려들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자기 욕심 때문에 예수님의 정체를 볼 수가 없었습니다. 염불에는 관심이 없고 잿밥에만 관심이 있으니 예수님의 진면목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거룻배를 통하여 새로운 각도에서 바라볼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주셨습니다. 그러면서도 거룻배를 준비하는 몫은 당신을 추종하는 제자들에게 맡김으로써 그들과의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셨습니다.
인기가 좋을 때 한발 물러서지 않으면 인기에 빠져 자기의 정체성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원하는 대로 따라가게 되며 자기의 본래의 모습은 어디 가고 껍데기만 화려하게 됩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는 거룻배를 준비시킬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것이 아버지의 뜻 안에 머무는 방법이었습니다. 인기란 믿을 수 없고, 믿어서도 안 됩니다. 인기에 편승하면 그것은 자살 행위와 같습니다. 사실 인기가 결코 성공은 아닙니다. 따라서 한발 물러설 필요가 있습니다. 자기 정체성을 지키는 것은 깨어있는 사람이라야 가능합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십시오.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마르3,12).하는 신앙고백이 사람들의 입에서 나와야 할 터인데 악령에게서 먼저 나왔으니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그래서 “그들에게 당신을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라고 엄하게 이르셨습니다”(마르3,12). 사람들이 눈을 떠 당신을 제대로 알아볼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다른 방법이 없었습니다. 악령은 자신이 보호받기 위해서 아부를 하고, 사람들은 자기 안에 갇혀 볼 것을 제대로 보지 못했습니다.
우리의 주님은 능력의 주님이십니다. 그러나 욕심을 부리면 그분이 보이지 않고 은총의 열매에 매달리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욕심을 버림으로써 은총의 열매보다도 언제나 은총을 베풀어주실 주님을 제대로 만나야 하겠습니다. 지금은 잿밥에서 눈을 돌려 염불을 할 때입니다. 군중을 모으는 것, 신자 수를 늘리는 것도 중요하지만 내적으로 채워져서 주님의 뜻을 알아듣고 또 그대로 행하는 것이 필요한 때입니다. 향기가 있으면 사람이 모이게 됩니다. 행하는 곳에 주님의 능력이 드러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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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119. 연중 제2주간 목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내가 주님께 가는 이유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호숫가로 물러가셨다.
그러자 갈릴래아에서 큰 무리가 따라왔다.”
오늘 주님과 제자들은 호숫가로 물러가시는데
사람들은 그 주님께 몰려가는 형국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주님과 제자들은 왜 물러가시고
물러가시는 그 주님께 사람들은 왜 몰려가는지 자연 생각게 됩니다.
주님께 몰려가는 사람들의 짓은 요즘 문제시하는 스토커의 짓이 아닐까요?
사람들을 피해 가시는데 굳이 거기까지 주님을 쫓아가 괴롭히니 말입니다.
복음을 보면 주님과 제자들은 사람들을 피해 외딴곳으로 자주 가십니다.
오천 명을 먹이실 것도 실은 제자들이 복음을 선포하고 돌아와 쉬러 갔는데
그 외딴곳까지 사람들이 몰려와 쉬지도 못하고 가르치시고 치유해주신 끝에
굶주린 그들을 먹이신 사건이 아닙니까?
그런데 이런 행위가 사람들에게는 당연히 스토커의 짓이 되겠지만
그러나 주님께는 스토커의 행위가 아닙니다.
스토커가 되는 것은 스토커의 행위에 달린 것 같지만
실은 그 짓을 어떻게 받아들이냐 받아들이는 사람에 달리기 때문입니다.
싫다고 하는데도 들이대면 스토커가 되는 것이기에
내가 싫다고 하지 않으면 그는 스토커가 아니 되겠지요.
사랑하는 엄마에게 껌딱지처럼 들러붙는 아기는 스토커가 아니듯
주님께서는 당신이 쉬시려고 하다가도 사람들이 몰려오면
즉시 쉼의 Mode(상태)에서 사랑 Mode로 전환됩니다.
이것이 사랑 충만한 사람의 신기함입니다.
사랑이 바닥나 충전하러 간 사람은 그러지 못하지만
사랑이 충만한 사람은 즉시 사랑 상태로 Mode 전환이 가능합니다.
이런 주님을 보면서 저는 자주 사랑이 고갈되고 그래서
저를 찾는 사람을 스토커로 만드는 저의 사랑에 대해 반성하고
다른 한편 주님의 사랑으로 충만하도록 충전해야겠다 다짐하지만 자주 실패합니다.
다시 말해서 고갈되면 즉시 주님께 달려가지 않아 실패하기도 하고,
혹 주님께 가더라도 주님 사랑 안에 진득하니 푹 잠겨서 있지 않고
이내 딴짓을 하는 겁니다.
적합한 예일지 모르지만,
목욕탕에 가 뜨거운 물에 몸을 푹 잠그고 있지 못하고,
이내 때를 닦는다든지 손톱을 깎는다든지 하여 피로를 풀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사랑 충전에서 저의 실패 그러니까 저의 딴짓이란
주님께로 가서는 직전의 일들을 생각한다든지,
앞일을 생각하며 걱정하거나 계획을 세운다든지 그런 짓을 하기도 하지만
가장 대표적인 실패는 관상 기도를 하지 않고 청원 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하느님 사랑 안에 머물러 있겠다고 하고는 즉시 청원 기도를 하는 거지요.
오늘 주님께 몰려든 사람들 대부분이 병자들인 것과 같다고나 할까요?
그래서 오늘 저도 제가 주님께 가는 이유를 성찰합니다.
나의 병 때문에만 주님께 가는 나는 아닌지,
또는 나의 병이 아니라 이웃의 병 때문에 갈지라도
주님 사랑 때문에 가지 않고 병 때문에만 가는 나는 아닌지 돌아보는 오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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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119. 연중 제2주간 목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당신을 알리지 말라고 엄하게 이르곤 하셨다.”(마르 3,12)
예수님께서 하신 일들을 전해들은 이들이 온 유다뿐만 아니라 주변의 여러 곳에서 몰려왔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들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십니다. 그들이 치유를 받고자 몰려왔지만, 예수님의 참 모습을 알지는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정작 악령들은 예수님을 보기만 하면, “당신은 하느님의 아들이십니다.”(마르 3,11)라고 외쳐댑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엄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라.”(마르 3,12 참조)
사실, <마르코복음> 곳곳에서 예수님께서는 마귀들에게 뿐만 아니라, 치유 받은 이들과 제자들에게도 함구령을 내리시며 당신의 신원을 장막으로 가리십니다.
왜 일까요? 당신이 메시아임을 세상에 드높이 선포해야 함이 마땅할 터인데도, 오히려 당신의 신원을 꼭꼭 감추십니다. 심지어는 당신의 가르침마저도 “보고 또 보아도 알아보지 못하고 듣고 또 들어도 깨닫지 못하여 저들이 돌아와 용서받는 일이 없게 하려는 것이다.”(마르 4,12)라고 말씀하십니다. 사실, 야훼 하느님께서도 파라오를 마음이 완고하게 하셨고, 이사야 예언자를 통해서는 “백성의 마음을 무디게 하고~ 돌아와 치유되는 일이 없게 하여라.”(이사 6,10)라고도 하셨습니다.
대체 왜 이처럼 알리지 못하게 할까요? 그것은 ‘때’가 아닌 까닭이었습니다. 곧 당신의 참된 모습이 드러날 때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눈이 가려져 있어, 아직 예수님의 진면목(참된 모습)을 볼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마르코 복음>은 “하느님의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마르 1,1)이라는 말로 시작되지만,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진실한 신앙으로 고백하고 있는 곳은 엄밀한 의미에서 딱 한 군데 밖에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바로 ‘그때 그곳’에서 비로소 예수님께서 함구령을 내린 그 신원이 밝혀질 것입니다.
‘그 때’가 언제인가?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매달리신 때’ 입니다. 그때, 마침내 십자가 아래에서 백인대장은 “참으로 이 사람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셨다.”(마르 15,39) 라고 고백합니다.
그렇습니다. 이처럼, ‘십자가’를 관상할 때라야 신앙의 눈이 열리고, 비로소 당신을 참되게 알아볼 수 있게 됩니다. 십자가에서 성전을 가리고 있던 휘장이 찢어지면서, 그 비밀의 신비가 드러납니다. 곧 성전을 가리고 있던 휘장이 찢어지듯, 우리 자신이 만들어 놓은 우상의 하느님이 부서지고서야, 비로소 예수님의 진면목(참된 모습)이 드러납니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을 보고서야 그분이 하느님의 아드님이라는 사실을 알게 될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이 미사 중에, 그분의 찢어진 살과 피를 마시며, 그 사랑 안에서 하느님의 아드님 우리 주님을 관상할 수 있는 은총을 구합시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당신을 알리지 말라고 엄하게 이르곤 하셨다.”(마르 3,12)
주님!
저의 무지를 깨우쳐주소서.
당신의 참된 모습을 알아볼 수 있는 신앙의 눈을 열어주소서.
완고함의 장막을 부수고 진정한 믿음으로 살게 하소서.
십자가에서 드러내신 당신의 신비를 따라 살며
당신 십자가에 저를 매달고 사랑으로 살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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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119. 연중 제2주간 목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아름답다.’라는 말을 많이 합니다. 중국어로는 '미(美)'라고 합니다. 미는 양(羊)과 대(大)의 합성어입니다. ‘큰 양이 맛있다.’라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미라는 말에는 맛이라는 말이 어울리기도 합니다. 영어로는 ‘Beauty'라고 합니다. 영어의 아름다움은 그 어원이 사람의 이름에 있다고 합니다. 그중에서도 여성의 이름이라고 합니다. 영어에서 아름다움은 여성의 외모와 관련이 있습니다. 우리말의 ‘아름답다.’는 아름과 답다의 합성어입니다. 아름은 ‘나’라는 의미가 있다고 합니다. 답다는 사물의 본질을 뜻하는 말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말의 아름답다는 자신의 성품이 그대로 드러나는 것이라고 합니다. 아름다움의 기준이 ‘맛’이나 ‘멋’이 아니라 아름다움의 기준은 ‘품격’입니다. 자신의 고유한 품격을 드러낼 때 세상의 모든 것들은 아름다운 것입니다. ‘난향천리 덕향만리’라는 말이 있습니다. 사람의 고유한 품격은 덕으로 드러납니다. 덕의 아름다움은 만리까지 전해지는 것입니다. 측은지심을 가진 사람, 수오지심을 가진 사람, 사양지심을 가진 사람, 시비지심을 가진 사람은 아름다운 사람입니다.
사제가 아름답다는 것은 그의 외모나 언변이 출중해서가 아닙니다. 사제의 아름다움은 그가 입은 제의에서 나오는 것도 아닙니다. 사제가 아름답다면 사제가 사제의 직분을 충실히 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병자를 고쳐주고, 마귀를 쫓아내라는 사명을 주셨습니다. 사제의 아름다움은 복음을 전하는데서 시작됩니다. 병자를 고쳐주는데서 시작됩니다. 마귀를 쫓아내는데서 시작됩니다. 베드로는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나는 금도 없고, 은도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야기합니다. 일어나십시오.” 예수님을 배반했지만 회개의 눈물을 흘렸던 베드로는 아름다운 사제입니다. 바오로는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는 내 생의 전부입니다. 이제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십니다.” 교회를 박해했지만 회개했던 바오로는 아름다운 사제입니다. 우리나라에도 아름다운 사제들이 있습니다. 순교로 신앙을 증거했던 김대건 안드레아 성인, 땀의 순교로 신앙을 증거했던 최양업 토마스 사제는 아름다운 사제입니다.
신자가 아름답다는 것은 그의 명예, 권력, 재물이 크기 때문이 아닙니다. 신자의 아름다움은 신앙생활의 연륜에서 나오는 것도 아닙니다. 신자가 아름답다면 신자의 직분을 충실히 살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보면 아름다운 신앙인을 볼 수 있습니다.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온 아들은 아름답습니다. 재산의 반을 나누어 가난한 이들에게 주고, 빚진 것이 있다면 네 배로 갚겠다고 했던 자캐오는 아름답습니다. 강도당한 사람을 치료해 주고 여관으로 데려갔던 사마리아 사람은 아름답습니다. 뜨거운 믿음을 보여주었던 백인대장은 아름답습니다.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바르고 예수님의 발을 씻어 드린 여인은 아름답습니다. 우리나라에도 아름다운 신앙인들이 있습니다. 오늘날 꽃동네의 시작이 되었던 최귀동 할아버지는 아름다운 신앙인입니다. 한센인들의 치료해준 강대건 원장님은 아름다운 신앙인입니다. 요셉의원을 시작한 선우경식 원장님도 아름다운 신앙인입니다. 교회가 아름다운 것은 화려한 건물 때문이 아닙니다. 교회가 아름다운 것은 성직자들과 수도자들이 있기 때문이 아닙니다. 교회가 아름다운 것은 밤하늘의 별처럼 아름다운 신앙인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독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율법은 약점을 지닌 사람들을 대사제로 세우지만, 율법 다음에 이루어진 맹세의 그 말씀은 영원히 완전하게 되신 아드님을 대사제로 세웁니다.” 그렇습니다. 교회의 아름다움은 십자가에서 피를 흘려 당신 자신을 바치신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교회의 아름다움은 죽으셨지만 다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에서 부활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아름다움을 원하신다면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실천하면 됩니다. 그런 아름다움이 모인 곳이 교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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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119. 연중 제2주간 목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극장에 간 지가 거의 8~9년 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요즘은 어떤지 잘 모르겠지만, 영화 상영 전에 먼저 나왔던 영상이 떠올려집니다. 대한 뉴스? 아닙니다. 광고? 이것도 역시 아닙니다. 그 영상은 지금도 계속하고 있다고 하더군요. 바로 ‘화재 시 대피요령’입니다. 현재 있는 곳이 어디인지, 이곳의 비상구는 어디에 있는지, 만약 불이 난다면 어디로 대피해야 하는지를 설명해줍니다.
8~9년 전, 그래도 영화를 종종 봤을 때 계속 나왔던 ‘화재 시 대피요령’이었습니다. 그러나 솔직히 이 대피요령 영상을 주의 깊게 보지 않았습니다. 영화 시작 전이라고 생각하면서, 옆에 앉은 사람들과 잡담하는 데 더 집중했었습니다. 하긴 극장에 온 것은 ‘화재 시 대피요령’을 보려는 것이 아니라, 영화를 보러온 것이니까요. 그러나 종종 안전사고로 인해서 인명 피해를 보는 것을 보면서, 이러한 ‘화재 시 대피요령’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게 됩니다.
이 세상을 살면서, 삶의 방향을 제대로 잡으면서 살아야 한다고 하지요. 삶의 방향을 제대로 잡은 사람만이 후회를 줄이면서 기쁘게 지금을 살 수 있기에 중요합니다. 그래서 순간의 만족을 위한 것이 아니라, 삶의 방향을 향해 흔들리지 않고 나아가는 삶이 중요한 것입니다. 하지만 많은 이가 순간의 만족만을 찾으면서 삶의 방향을 제대로 잡지 못하고 있습니다. 어디로 가야 할지 갈팡질팡하면서 힘든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순간의 만족만을 위한 것이 절대로 아니었습니다. 그보다는 우리 모두 구원을 얻어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 바로 삶의 방향을 제대로 잡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를 방해하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바로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향해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하고 소리 질렀습니다. 이 말이 거짓일까요? 아닙니다. 분명한 진리이고 정답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함구령을 내리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마귀 들린 사람의 말을 누가 믿을까요? 그들이 거짓 없는 진실을 말하고 있어도, 마귀 들린 사람이라고 판정을 내리는 순간에 그의 모든 말은 믿을 수 없게 됩니다. 따라서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지 못하도록, 자신의 더러운 입을 통해 예수님께 대한 진실만을 내뱉었던 것이지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제시하는 방향을 향해 나아가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것이었습니다.
순간의 만족이 아닌, 삶의 방향을 찾는 데 더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마귀의 유혹에서 벗어나 오롯이 주님만을 바라보며 살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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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물주인이 깨진 유리창을 그대로 방치하면 이 건물이 무법천지로 변한다. 곧 깨진 유리창처럼 사소한 것들은 사실은 치명적인 위험을 초래한다(마이클 레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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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119. 연중 제2주간 목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하느님 중심의 삶
-산(山)처럼-
이런저런 단상들로 강론을 시작합니다. 잠깨어 ‘자비의 집’ 숙소 문밖을 나서면 맨먼저 눈들어 바라보는 불암산과 북두칠성입니다. 불암산 기슭에 위치한 제 사랑하는 요셉수도원입니다. 제 침실 창밖에는 불암산 정상이, 식당 창밖에는 불암산 기슭이, 집무실 창밖에는 불암산 봉우리의 동생 같은 ‘애기봉’이 보입니다.
하느님 중심의 정주의 삶을 상징하는 늘 거기 그 자리의 산이요, 이 불암산을 배경한 요셉수도원입니다. 오래 전에 써 놓은, 지금도 여전히 좋아하는 짧은 세 편의 시가 생각납니다. 시공을 초월하여 늘 새롭게 느껴지는, 시작詩作의 가장 많은 소재가 된 불암산입니다.
-1.“산처럼
머물러 살면
푸른 하늘
흰구름
빛나는 별들
아름다운
하느님
배경이 되어 주신다”-1997.8.11.
-2.“산은
다투지 않는다
서로
등을 기대거나
바라보면서
늘 거기
그 자리에 평화롭고 고요히
머물러 있다”-1997.10.4.
-3.“밖으로는 산
천년만년
임기다리는 산
안으로는 강
천년만년
임향해 흐르는 강”-1998.1.27.
우리가 사랑하는 예수님은 움직이는 중심, 정주의 산같은 분이십니다. 얼마전 남편의 강력한 권유로 피정을 하고 떠난 자매와의 면담고백상담시 들은 말이 생생합니다.
“아, 여기 수도원은 진짜로 가득차 있어요. 텅빈 배밭같은데, 또 성전에 들어와도 주변 모두도 진짜로 가득차 있고, 주변의 겨울 환경 색깔도 수수하고 순수하기가 진짜입니다.”
이어지는 이 자매가 남기고 간 편지글의 일부입니다.
-“자고 일어 났더니 나무 가지마다 구슬이 가득 걸려 있더군요. 밤새 비가 와서 맺힌 것입니다. 구슬, 눈물, 저런 아픔이 있기에 나무가 더 반짝이고 아름다운 것이 아닐까. 수도원은 고요하고 배나무는 말이 없고 새들은 지저귀고 시간은 충만한데 도대체 무엇으로 가득한가, 무엇으로 가득한가, 무엇으로 가득한가, 도대체 가득할 것이 하나도 없는데, 왜 가득한가 생각했답니다.
아직은 모르겠지만 조금 길이 보입니다. 그 길을 천천히 따라가 보겠습니다. 모든 일을 하느님께 묻고, 두려워하지 않으려 노력하겠습니다. 불순한 피정자에게도 기회를 주신 주님께 영광드리옵니다. 고맙습니다. 2023.1.15. Agnes”-
나뭇가지에 달린 빗방울을 구슬로 눈물로 본 감성이 참 신선합니다. 더불어 언젠가 가을 이른아침 풀잎마다 맺힌 이슬방울들을 보며 쓴 ‘별꿈’이란 자작시와 자주 산책때 부르는 ‘아침이슬’ 노래중 참 곱고 아름다운 대목이 생각납니다.
4.“풀잎들 밤새 별꿈 꾸며 뒤척이더니
아침 풀잎마다 맺힌 영롱한 별무리 이슬방울들”-2000.10.1.
“긴밤 지새우고 풀잎마다 맺힌
진주보다 더 고운 아침이슬처럼,
내 맘에 설움이 알알이 맺힐 때,
아침동산에 올라 작은미소를 배운다.”
텅빈 허무가 아닌 텅빈 충만의 하느님 사랑을 체험한 피정 자매님 같습니다. 참으로 우리 삶의 중심이신 주님과 할 때 이런 충만한 기쁨, 순수한 기쁨에 행복 체험입니다. 오늘 복음은 명실공히 예수님 활약상을 요약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움직이는 중심이 되시어 당신께 가까이 오는 모든 이들의 병을 고쳐주시고 더러운 영들을 쫓아내십니다. 더러운 영들은 그분을 보면 엎드려 소리쳐 고백합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참으로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예수님과 함께 할 때 최상, 최고로 보호되는 우리삶임을 깨닫습니다. 여기 복음 장면에서 주목할 사실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늘 사람들과 함께 하되 때로 외딴곳을 꼭 찾으셨고 늘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셨다는 것이니 몇 대목을 소개합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호숫가로 물러가셨다.’
적절한 때 조용히 뒤로 물러가는 것도 분별의 지혜입니다.
‘큰 무리가 그분께 몰려왔다. 예수님께서는 군중이 당신을 밀쳐 대는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하시려고 거룻배 한 척을 마련하라고 제자에게 이르셨다.’
열광하는 대중을 얼마나 경계하셨는지 깨닫습니다. 사실 호산나 노래하며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열렬히 환호하던 똑같은 이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으라 외쳤고 죽였습니다. 민심은 천심이라 하는데 이런 민심도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 더러운 영들에게 당신을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라고 엄하게 이르곤 하셨다.’
예수님은 결코 대중의 인기에 현혹됨이 없이 늘 이들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셨습니다. 마침 예전에 썼던 ‘사랑은’이란 시도 생각납니다.
-5.“사랑은
하느님 안에서
제자리를 지켜내는
거리를 견뎌내는 고독의 능력이다
지켜냄과 견뎌냄의 고독중에
순화되는 사랑
깊어지는 사랑
하나되는 사랑이다”-1997.3.
바로 예수님이 그러하셨습니다. 이렇게 한결같이 하느님 중심의 삶에 항구하셨기에, 늘 이탈의 초연한 삶에 초월과 내재, 관상과 활동의 삶을 동시에 사시며 늘 마르지 않는 구원의 샘이 되실 수 있었습니다. 얼마전 읽은 두 글귀가 생각납니다.
“환경이 사람을 만든다 한다. 그러나 환경을 통해 그가 누구인지 드러난다.”
“남보다 더 잘하려고 고민하지 마라. ‘지금의 나’보다 잘하려고 애쓰는 게 더 중요하다.”
그러고 보니 요즘 참 많이 강조한 하느님 중심의 삶입니다. 선택과 훈련, 습관의 강조입니다. 참으로 어리석게도 타고난 것들, 주어진 것들에 마음 뺏기는 유혹에 빠지지 말고, 날마다 용감히 지혜롭게 참 좋은 주님을 선택하여, 즉 주님의 기쁨을, 감사를, 행복을, 평화를 선택하고 훈련하여 습관화함으로 날로 주님을 닮아가자는 것입니다.
절로 주변 환경은 변화되고 나는 부단한 자아초월로 주님을 닮아갈 것입니다. 이렇게 하느님 중심의 삶에 충실할 때 주변 환경의 영향을 최소화할 수 있고 비교로 인한 열등감이나 우월감에서 해방되어 비로소 자유로울 수 있을 것이니 이 또한 주님의 놀라운 은총의 선물입니다. 바로 오늘 히브리서는 이런 주님을 영원한 대사제 예수님으로 고백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통하여 하느님께 나아가는 사람들을 언제나 구원하실 수 있습니다. 그분께서는 늘 살아 계시어 우리를 위하여 빌어 주십니다. 거룩하시고 순수하시고 순결하시고 죄인들과 떨어져 계시며 하늘보다 더 높으신 분이 되신 대사제 예수님이십니다. 그분은 하늘에 계신 존엄하신 분의 어좌 오른쪽에 앉으시어, 사람이 아니라 주님께서 세우신 성소와 참성막에서 직무를 수행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 삶의 중심이신 우리의 영원한 대사제이자 초월과 내재의 주님과 사랑의 일치가 깊어지면서 날로 자유로워지는 우리들입니다. 바로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한결같이 하느님 중심의 정주의 산처럼 살게 하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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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119. 연중 제2주간 목요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호숫가로 물러가셨다. 그러자 갈릴래아에서 큰 무리가 따라왔다. 또 유다와 예루살렘, 이두매아와 요르단 건너편, 그리고 티로와 시돈 근처에서도 그분께서 하시는 일을 전해 듣고 큰 무리가 그분께 몰려왔다. 예수님께서는 군중이 당신을 밀쳐 대는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하시려고, 당신께서 타실 거룻배 한 척을 마련하라고 제자들에게 이르셨다. 그분께서 많은 사람의 병을 고쳐 주셨으므로, 병고에 시달리는 이들은 누구나 그분에게 손을 대려고 밀려들었기 때문이다. 또 더러운 영들은 그분을 보기만 하면 그 앞에 엎드려,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하고 소리 질렀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당신을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라고 엄하게 이르곤 하셨다.(마르 3,7-12)
찬미 예수님
만약 우리가 사는 이 시대에 손을 대면 모든 병을 낫게 하는 사람이 있다면 어떻게 될까요? 그 사람의 인기를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요? 걸어서, 차를 타고, 기차나 배나 비행기를 타고, 전 세계에서 사람들은 몰려들 것입니다. 왜냐하면 손만 대면 나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손만 대면 고통에서 해방될 수 있고, 죽음의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여러분 자신을 위해, 사랑하는 가족을 위해 우리는 기꺼이 기적의 손을 찾아 여행을 떠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병의 고통과 죽음의 두려움을 해방하시는 분도 우리 주님이십니다만 그것이 다가 아니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 대신 더러운 영들이 고백하고 있습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라고….
고통에서, 두려움에서 해방하시는 분, 또한 아버지 하느님께 언제나 의탁하시는 분, 겸손과 온유로 모두를 대하시는 분, 하느님께서 맡겨주신 구원의 길, 용서의 길을 묵묵히 걸어가시는 분, 이 모든 것이 주님께서 우리에게 보여 주신 모습입니다. 하느님의 아드님으로서 말입니다.
주님, 당신께서는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아멘
인내는 나를 참아내는 것이다.
우리는 누구나 나름의 방식으로 사랑하며 살아갑니다. 누군가를 사랑하고 헌신하기에 그 안에서 하루를 살아갈 힘을 얻습니다. 그런데 가끔 우리 사랑의 결과가 우리가 원하지 않는 결과로 나타날 때가 있습니다. 즉 사랑한다고 했는데 결과는 다툼이고, 멀어짐일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무엇이 잘못되었을까요? 왜 그런 결과가 나와서 우리를 아프게 하고 무기력하게 만들까요?
모든 사랑에는 예의가 있어야 합니다. 예의가 없는 사랑은 독선적인 사랑일지 모릅니다. 배려하지 않는 사랑은 자칫 사랑의 탈을 쓴 폭력이 되어버립니다.
즉 사랑에는 자신을 참아내는 인내가 필요합니다. 내가 원하는 방향이 아닌 사랑의 대상이 원하는 방향으로 내 사랑이 움직여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인내의 모습 중 하나는 나를 참아내는 것입니다. 내가 원하는 것을 참아내고 상대가 원하는 방향으로 사랑해야 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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