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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상의 노래
시편 6 : 1 - 10
구약 시편에는 회개의 시가 일곱 편 있습니다. 시편 6편, 32편 38편, 51편, 102편, 130편 그리고 145편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시편이 바로 회개의 시 가운데 하나입니다. 혹 어떤 이는 이 시는 다윗의 시가 아니라는 분도 있지마는 표제에 기록한 대로 다윗이 쓴 시라는 것을 대부분의 학자들이 인정하고 있습니다.
지난 두 시간에 걸쳐서 우리는 다윗이 그 아들 압살롬의 반역 때문에 얼마나 어려움을 겪고 있는 가에 대해 생각했습니다. 하룻밤을 하나님의 보호하심 속에서 무사히 지나게 된 것을 감사하며 아침에 노래를 불렀습니다. 하루 종일 위험한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실제로 능력의 팔로 붙들어 주심을 생생하게 체험하면서 저녁 잠자리에 들기 전에 감격의 노래를 불렀습니다.
사실 다윗으로 말하면 언제 어떠한 처지에 이르게 될는지 알 수 없는 위태로운 시점에 놓여 있었습니다. 그래서 시편 3편이 아침의 노래 혹은 기도라고 하고 시편 4편을 저녁의 노래 또는 기도라고 한다면 오늘 읽은 시편 6편은 밤중에 침상에서 부른 노래요 기도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다윗은 육신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지난날에 범한 죄를 기억했습니다. 여러분이 기억하시는 대로 다윗은 왕이 된 후에 궁궐에서 한가하게 낮잠을 자고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지붕 위에 올라가 온 예루살렘 성을 살펴보았습니다. 아마 마음 가운데 교만한 생각이 들어 왔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런 때에 우연히 어떤 여자가 목욕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아마 밖에서 했던 모양입니다. 다윗은 그것을 보는 순간 불같이 일어나는 정욕을 이기지 못해서 그 여자를 궁으로 데려오라고 한 후 욕을 보이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그 여자는 다른 여자가 아니고 다윗의 가장 충성된 신하 가운데 하나인 헷 사람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였습니다. 후에 들어니 밧세바가 임신했었다고 합니다. 물론 그때 우리아는 일선에 나가서 집에 들어올 수도 없는 때였습니다. 그러니까 다윗이 자기의 죄를 어떻게 해서라도 감출 생각을 하고 우리아를 전장에서 불러오라고 하였습니다. 우리아는 그때 암몬 사람과 싸우기 위해서 전장에 나가 있을 때였습니다.
우리아를 불러다가 그 동안 전장에 나가서 수고를 많이 하였으니 집에 가서 평안히 자라고 분부했습니다. 그런데 우리아는 얼마나 충성된 사람인지 “지금 내 모든 상관들과 내 모든 전우들이 들판 천막에서 밤잠을 자지 못하고 대적과 싸우고 있는데 제가 무엇이기에 내 집에 돌아가서 평안히 잠잘 수가 있겠습니까? 제가 이처럼 왕명으로 예루살렘에 돌아오기는 하였지마는 절대로 그렇게 할 수는 없습니다. 제가 기왕 돌아왔으니 왕궁의 어느 모퉁이 방에서 오늘 저녁을 지내고 전장으로 다시 돌아가겠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이렇게 우리아는 왕의 명령이요 시시이지마는 자기 집에 가서 자라고 하는 것을 사양했습니다. 그렇게 되니까 결국 다윗의 계교가 맞지를 않았습니다. 다윗이 자기의 지은 죄를 감추려고 하는 생각 가운데서 한 일이 뜻대로 되지를 않았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더 큰 죄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이스라엘 군대를 총지휘하던 야전군 사령관인 요압 장군에게 우리아를 통해서 편지를 써 보냈습니다. 그 내용은 우리아로 하여금 다음날 암몬 사람과 싸울 때 최전선에 내보내서 암몬 사람에게 죽게 만들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충복 우리아는 자기를 죽이라는 내용의 편지인지도 알지 못하고 그저 충성되게 그 편지를 요압 장군에게 전했습니다. 요압 장군이 다윗의 지시대로 했습니다. 결국 생각대로 우리아는 이튿날 암몬 사람에게 죽었습니다. 전사했습니다. 우리아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자 다윗은 밧세바를 불러서 자기의 아내로 삼았습니다. 이 일이 있은 얼마 후에 하나님의 사람 나단이 다윗 왕을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나단 선지가 아주 유명한 비유 하나를 말했습니다. 내용이 이렇습니다.
“어느 동리에 큰 부자 한 사람이 살고 또 가난한 사람이 살았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그 부잣집에 어떤 손님이 왔습니다. 물론 이 부잣집에는 소도 많고, 염소도 많고, 양도 많고, 재산도 많았습니다. 그런데 이 부자가 자기 집의 많은 양, 많은 소는 아깝다고 그냥 두고, 가난한 집에 아무 것도 없고 그저 조그만 암양 한 마리가 있는데 자녀처럼 사랑하는 양인데 아니, 이 가난한 집의 양을 빼앗아다가 잡아서 자기 집에 온 손님을 대접하였습니다.”
이 말을 듣고 있던 다윗이 벌떡 일어나면서 “아니, 세상에 그런 놈은 마땅히 죽여야 되느니라!” 다윗은 나단 선지가 말하는 본 뜻을 알지 못하고 본래 정의감이 강한 사람이라 흥분이 되어서 말했습니다.
그때 하나님의 사람 나단이 정색을 하고 손가락으로 다윗을 가리키면서 “당신이 바로 그 사람이오. 하나님께서 당신을 사랑해서 본래 베들레헴 목동으로 있던 것을 일으켜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왕의 지위에 올려놓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부귀를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많은 처첩을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영화도 주셨습니다. 당신이 무엇을 더 원하면 더 주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무엇이 부족해서 당신의 충복 중의 하나인 우리아의 아내를 빼앗아서 당신의 아내로 삼았습니까? 당신께서 이런 죄를 지었기 때문에 앞으로 당신 집에 칼이 영영히 끊어지지 아니할 것이요, 당신은 은밀한 가운데 다른 여자를 모욕했지만 당신의 처첩은 백주에 다른 사람에게 모욕을 받을 때가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아이는 죽을 것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참으로 엄청난 말입니다. 따지고 보면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일개의 선지자가 왕에게 이런 책망을 어떻게 하겠습니까? 다윗의 말 한 마디면 나단의 목은 찾을 수도 없이 달아나고 말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 보세요. 다윗 왕이 나단 선지의 말을 들을 때 그 얼굴빛이 캄캄해지면서 “아, 과연 제가 죄를 범했습니다” 나단 앞에 꼬꾸라져서 죄를 고백했습니다. 다윗이 회개한 시는 51편에 있습니다. 그가 얼마나 통회하면서 자기의 죄를 자복하였나 하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죄를 회개하는 것을 보고 나서 나단 선지가 하는 말이 “당신이 이렇게 죄를 회개하니 죽을 것을 하나님이 면해 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다른 벌은 그냥 당신의 집에 올 것입니다”고 했습니다.
사실 가만히 보면 그 후에 꼭 그대로 되었습니다. 다윗의 아들이 많이 있는데 그 가운데 암논이라고 하는 아들이 있었습니다. 딸도 많은데 그 가운데 다말이라고 하는 딸이 하나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같지만 어머니는 다릅니다. 이 암논이라는 젊은 사람이 자기 이복 여동생 되는 다말이라고 하는 여자에 대해서 짐승같은 마음을 품고 결국 그 누이동생에게 욕을 보였습니다.
가정에 이렇게 패륜의 일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그 다말이라고 하는 여자는 다윗의 다른 아들 압살롬의 동복 누이동생입니다. 압살롬이 자기 누이동생이 그와 같은 모욕을 당했다는 말을 듣고 마음 가운데 독한 마음을 품고 있다가 얼마 후에 무슨 연회를 베풀고 여러 왕자들과 고관들을 청해서 대접하는 체하다가 무사를 시켜서 암논을 암살해 버렸습니다. 한 아들이 한 딸에 대해서 패륜의 일을 저질렀고, 한 아들이 또 다른 아들을 죽였습니다. 다윗의 집에 칼이 떠나지를 아니했습니다. 압살롬은 암논을 죽인 후에 멀리 도망쳤습니다.
얼마 후에 압살롬은 다윗은 용서를 받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습니다. 돌아와서는 압살롬이 또 다른 음모를 꾸몄습니다. 반란을 음모했습니다. 자기가 왕이라고 선포한 다음에 자기 무리를 거느리고 예루살렘을 향해서 자기 아버지를 치려고 쫓아왔습니다. 갑자기 그리고 뜻밖에 변을 당한 다윗은 예루살렘을 떠나서 멀리 도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얼마나 치욕적인 일이었습니까? 얼마나 망신스러운 일이었습니까? 그러나 다윗은 그가 범한 죄를 생각하면서 죄의 값으로 알고 원망하지 아니하고 겸손히 하나님께 기도드렸습니다.
여러분, 다윗같이 어려서부터 신앙이 독실했고 그처럼 고귀한 성품을 가진 사람이 어떻게 그러한 파렴치한 죄를 범할 수가 있었겠습니까? 얼른 생각해 보면 참 생각조차도 하기가 어려운 일입니다. 약한 것이 육신입니다. 그러므로 “스스로 섰다고 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 성경이 경고하여 주고 있습니다. 아무리 신앙이 좋다고 하고 아무리 고귀한 성격의 소유자라고 하지마는 누구에게나 약점이 있습니다. 조심하지 아니하면 언제든지 악한 사탄은 우리의 약점을 통해서 사람을 넘어뜨리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히브리서에 보면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리라”고 했습니다. 누구나 자신의 약점을 스스로 깨닫고 조심하지 아니하면 다윗의 전철을 밟을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언제 시험에 듭니까?
다윗이 원수와 싸울 때, 분주하게 동분서주할 때 이런 시험이 온 것이 아닙니다. 대체로 원수를 다 정복하고, 이제는 다윗 자신이 정장에 나갈 필요가 없고, 자기의 부하가 모든 일을 다 잘합니다. 암몬과의 전쟁이 있긴 하지만 요압 장군이 대신 잘 싸워 줍니다. 자기는 예루살렘 성에서 한가하게 낮잠을 자고 침대에서 저녁 때 일어납니다.
시험이란 한가한 때 들어옵니다.
그러므로 한가한 분들 조심해야 합니다. 죄 지으면 반드시 벌이 있습니다.
다윗은 심한 고통 중에서 하나님께 호소했습니다.
1절, “여호와여 주의 분으로 나를 견책하지 마옵시며 주의 진노로 나를 징계하지 마옵소서”
다윗은 하나님의 징계를 아주 면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분노로써 징계함을 면하기를 원했습니다. 우리가 당연히 받은 형벌, 다시 말하면 죄의 값으로 당연히 받을 벌이라고 생각하는 자세는 회개를 낳게 합니다.
욥기 5장 17절 이하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볼지어다 하나님께 징계 받는 자에게는 복이 있나니 그런즉 너는 전능자의 경책을 업신여기지 말지니라 하나님은 아프게 하시다가 싸매시며 상하게 하시다가 그 손으로 고치시나니 여섯 가지 환난에서 너를 구원하시며 일곱 가지 환난이라도 그 재앙이 네게 미치지 않게 하시며...” 하였습니다.
잠언 3장 11-12절에 “내 아들아 여호와의 징계를 경히 여기지 말라 그 꾸지람을 싫어하지 말라 대저 여호와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기를 마치 아비가 그 기뻐하는 아들을 징계함같이 하시느니라” 하였습니다.
시편 94편 12절에도 “여호와여 주의 징벌을 당하여 주의 법으로 교훈하심을 받는 자가 복이 있나니” 하였습니다. 요한 계시록 3장 19절에도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며 징계하노니” 했습니다.
히브리서 12장 5-13절 말씀을 읽어보세요. “내 아들아 주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며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니라 하였으니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비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참 아들이 아니니라 또 우리 육체의 아버지가 우리를 징계하여도 공경하였거든 하물며 모든 영의 아버지께 더욱 복종하여 살려 하지 않겠느냐 저희는 잠시 자기의 뜻대로 우리를 징계하였거니와 오직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거룩하심에 참예케 하시느니라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단한 자에게는 의의 평강이 열매를 맺나니” 하였습니다.
왜 이런 교훈을 했을까요?
사람이 징계를 받을 때 잘못을 범하기 쉽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징계를 경히 여기거나 싫어하지 말아야 합니다. 히브리서에서는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어려움을 당할 때에 낙심하지 않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징계에 대한 올바른 자세는 ‘아버지의 사랑의 징계’로 알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소망이 있습니다.
에가드(Egard)라는 분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하나님의 진노는 사탄의 애무와 사랑보다 오히려 낫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살리시려고 징계하시고 사탄은 우리를 죽게 하려고 애무합니다.” 어떤 이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하나님의 징벌을 피하려는 사람은 자기가 하나님의 양자가 되었는지 의심함직 합니다.”
사실 사랑이 없는 사람에겐 징계하지 아니합니다. 징계 받는 사람보다 징계하는 사람이 더 아픈 일이기 때문입니다. 자식이 잘못을 범했을 때 부모는 자식이 잘되라고 채찍을 듭니다. 그러나 부모의 마음은 매를 맞는 자식보다 더 아픕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징계를 어떻게 받을까요?
징계를 받을 때 하나님을 더 가까이하셔야 합니다.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고 하였습니다. 징계를 받을 때 두 가지 반응이 있습니다. 하나는 멀리 도망가는 사람입니다. 다른 하나는 가까이 나오는 사람입니다. 징계를 받을 때일수록 하나님을 더 가까이 하는 사람이 복이 있습니다.
시골에서 키질을 해 보면 알곡과 쭉정이를 분간 할 수 있습니다. 얼른 보기에는 구별하기 어려우나 키질을 해서 까불면 알곡은 키질하는 사람의 가슴 쪽으로 모여들고 쭉정이는 훨훨 날아가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보통 때는 신자들도 구분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한 번 어려움을 겪어 보면 참 신자와 거짓 신자의 구별이 나타납니다.
다윗은 하나님이 주시는 징계를 달게 받았습니다. “내가 죽어 마땅한 사람인데” 하면서 고통을 견딥니다.
2절 말씀을 보십시다. “여호와여 내가 수척하였사오니 긍휼히 여기소서 여호와여 나의 뼈가 떨리오니 나를 고치소서”
그는 당하는 어려움으로 인해 몸이 쇠약해졌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무한한 은총을 부여해 달라고 하는 기도입니다. ‘뼈가 떨리오니’, 뼈는 체력의 근원인데 이것이 떨린다는 말은 정신적인 고통이 육신에까지 미쳐 쇠약하게 된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이 시인은 ‘나를 고치소서’하고 부르짖습니다.
예레미야 17장 14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여호와여 주는 나의 찬송이시오니 나를 고치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낫겠나이다 나를 구원하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구원을 얻으리이다” 하였습니다.
3절, “나의 영혼도 심히 떨리나이다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그의 육신적인 고통은 영혼의 전율을 가져왔습니다. 육신의 고통이 있을 때에 죄를 자복할 수 있는 것은 성령의 선물입니다. 그래서 야고보 5장 15절, 16절에 보면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저를 일으키시리라 혹시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사하심을 얻으리라 이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하며 병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많으니라” 고 했습니다.
병이 나는 것이 곧 징계는 아닙니다. 그러나 병이 났을 때 자신의 죄를 회개하는 기회로 삼을 때 병에서도 건짐 받을 뿐더러 죄의 용서를 받고 은혜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 다윗은 4절에 더욱 새로운 정신으로 하나님께 간구합니다.
“여호와여 돌아와 나의 영혼을 건지시며 주의 인자하심을 인하여 나를 구원하소서”
성도가 어려움을 받을 때 가만히 생각하면 하나님이 멀리 떠나시고 숨으시는 것 같은 고통입니다. 우리의 몸이 쇠약해지는 것, 생활의 고통으로 어려움을 겪는 것은 참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나에게서 떠났다면 이 이상의 슬픔이 있을 수 없고 이 이상의 절망이 또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래서 다윗은 소리칩니다. 여호와여, 돌아오소서!
모세도 시편 90편 13절에서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여호와여 돌아오소서 언제까지니이까? 주의 종들을 긍휼히 여기소서” 하였습니다. 하나님이여, 돌아와 나의 영혼을 건지시옵소서. 이제 내가 죽게 되었나이다. 하나님은 인자하신 분이 아니십니까? 내 영혼이 수척하고, 곤비하여 죽게 되었사오니 나를 건져 주시옵소서 간절히 매달려 기도하는 모습을 엿볼 수 있습니다.
5절, “사망 중에서 주를 기억함이 없사오니 음부에서 주께 감사할 자 누구리이까?”
이 말씀은 영혼 불멸과 위반되는 말씀이 아닙니다. 사망은 음부를 뜻할 것입니다. 주님께서 내 모든 죄를 용서하지 아니하시면 나는 음부에 갈 것입니다 하는 말입니다.
6절에 “내가 탄신함으로 곤핍하여 밤마다 눈물로 내 침상에 띄우며 내 요를 적시나이다” 했습니다.
그러니까 다윗이 안으로는 죄로 인한 영적인 고통을 당하고 밖으로는 원수들의 박해로 인한 곤경 속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고난 속에서도 오히려 주님을 기억하고 소망의 기쁨을 마음에 가집니다. 이것이 믿지 않는 사람과 다른 점입니다. “내가 탄식함으로 곤핍하여” 했는데 이것은 마치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고통스러운 기도를 드릴 때의 모습과도 같습니다. 고통의 극도를 말합니다. ‘밤마다’라는 말은 애통이 계속되는 것을 말합니다. 눈물로 침상을 띄웠다고 했습니다. 죄를 슬퍼했습니다. 눈물로 요를 적셨다고 했습니다.
7절에 “내 눈이 근심을 인하여 쇠하며 내 모든 대적을 인하여 어두웠나이다” 했습니다. 눈이 쇠해질 정도로 건강에 지장을 가져왔습니다.
다윗은 이런 슬픔의 함정에서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이렇게 기도하는 중에 그는 확신을 얻게 되었고 하나님의 응답을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승리의 개가를 부릅니다.
8절에 “행악하는 너희는 다 나를 떠나라 여호와께서 내 곡성을 들으셨도다” 하였습니다.
징계로 인한 고난은 회개하라는 채찍과도 같은 것이었습니다. 죄를 회개하기만 하면 그 고난은 어느덧 자취를 감추고 맙니다. “행악하는 자들아 다 나를 떠나가라 여호와께서 내 곡성을 들으셨도다”
하나님께 눈물로 드리는 기도는 하늘로부터 위로와 능력을 받을 수 있습니다. 더구나 하나님께서 그의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심을 재확인합니다.
본문 9절에 “여호와께서 내 간구를 들으셨음이여 여호와께서 내 기도를 받으시리로다” 하였습니다. 이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또한 이 얼마나 담대한 일입니까? 그리고 무슨 일이든지 신념을 가지고 일할 수 있는 근거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왜요? 내 간구를 들으셨고 또 앞으로도 받으실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요한 1서 5장 14-15절에 “그를 향하여 우리의 가진 바 담대한 것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 우리가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들으시는 줄을 안 즉 우리가 그에게 구한 그것을 얻은 줄을 또한 아느니라” 하였습니다. 이 얼마나 신념에 찬 담대한 말씀입니까? 여러분도 이와 같은 신념을 가지고 기도하십니까?
마르틴 루터는 어려운 일을 당했을 때마다 밀실에 들어가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기도가 끝나고 나오면서 부르짖기를 “우리가 정복했다. 우리가 정복했다”고 했다고 합니다. 기도로 승리할 때 우리 마음에는 평화와 기쁨이 임하고 원수 마귀는 실패하고 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마지막 절(10절)에 “내 모든 원수가 부끄러움을 당하고 심히 떨림이여 홀연히 부끄러워 물러가리로다” 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징계를 받을 때 원망하지 맙시다. 다윗은 환난의 때에 하나님을 원망하지 아니하고 자신의 죄를 회개하며 눈물로 깊은 기도를 하였습니다 원망은 불신앙입니다.
민수기 14장에 보면 가나안 땅에 들어가 정탐하고 온 사람의 곤란한 보고를 들은 이스라엘 온 회중이 “다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며 온 회중이 그들에게 말하기를 우리가 애굽 땅에서 죽었거나 이 광야에서 죽었더면 좋았을 것을 어찌하여 여호와가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칼에 망하게 하려 하는고 우리 처자가 사로 잡힐 터이니 애굽으로 돌아가는 것이 낫지 아니하냐?” 원망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편지하면서 이스라엘 민족의 출애굽 역사를 전감으로 삼아 “저희 중에서 어떤 이들이 원망하다가 멸망시키는 자에게 멸망하였나니 너희는 저와 같이 원망하지 말라”(고전 10:10)고 경고하였습니다. 원망하지 말라. 이것은 소극적인 태도이기 때문입니다.
적극적으로 하나님께 회개의 기도를 드려야 합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눈물을 보시고 기도를 들으십니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함을 받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중에 감당하기 어려운 일을 당하시는 분 계십니까? 두려워하거나 낙심하거나 원망하지 맙시다. 하나님께 매달려 기도하십시다. 이 어려움을 통하여 오히려 큰 축복의 기회가 되게 하실 줄 믿습니다.
도움의 비밀
(시 6:1-10)
: 도움의 비밀은 회개하며 긍휼하심을 구하는데 있다.
찬송 383장/
시편 6편은 시편에 나오는 참회시 중 하나로 자신에게 닥친 고난이 자신의 범죄함에서 비롯된 것임을 깨닫고 하나님의 용서와 자비를 구하는 내용입니다.
2절 3절 6절 7절에 나오듯 얼마나 다윗이 수척할 만큼, 눈이 쇠할 만큼 눈물로 하나님 앞에 회개했는가를 봅니다. 그 결과 8절과 9절에 나오듯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들으셨음을 보며, 10절에서는 죄로 인한 모든 환난도 해결해 주실 것을 확신하고 있습니다.
본문이 말씀하는 도움의 비밀은 무엇일까요? 4절에 "주의 사랑하심을 인하여 나를 구원하소서"한 것처럼 하나님 앞에 회개하며 긍휼을 구하는 것입니다. 약2:13에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 하였습니다. 심판까지도 이깁니다. 그만큼 긍휼을 베풀고 또 긍휼을 구하는 것이 귀한 일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무슨 잘못이 있느냐 그러지 말고 긍휼히 여기시기를 기뻐하시는 하나님 앞에 겸손히 엎드려 회개하며 긍휼하심을 구하십시다. 이것이 모든 환란을 돌이키는 가장 귀한 지혜입니다.
한국강해설교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