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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심 2023년 7월 번개산행 안내
- 청주淸州 상당산성上黨山城 트레킹 –
□ 일 시: 2023년 07월 08일(둘土)
□ 행선지: 청주시, 상당산성/흥국사
□ 만나는 곳/시간: 서울 남부터미널/07:50, 북청주 터미널/10:00
□ 일 정: (사정에 따라 일부 일정은 조정될 수도 있음)
10:00 북청주 출발
10:45 상당산성 남문 도착(버스 862-2, 871/105, 105-1)
11:00 트레킹 출발
~ (4.1km/남문 주차장~산성 일주)
12:30 트레킹 완료
12:30 점심식사(산성 토속음식마을)
13:30 상당산성 버스 정류장
14:00 흥덕사행 버스 탑승
14:20 흥덕사 도착
~ (흥덕사 사지/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
~ (청주 고인쇄박물관과 근현대인쇄전시관)
16:00 북청주 터미널행 버스 탑승
16:15 북청주 터미널 도착
16:30 저녁식사
18:00 서울행 버스 탑승
19:50 서울 남부터미널 도착(해산)
□ 여행루트
□ 상당산성 트레킹 코스
□ 회 비: 2만원(가족 동일/교통비 각자 부담)
□ 준비물: 음료수, 행동 간식과 당일 산행에 적합한 복장
□ 뒤풀이: 일정 참조
※ 인터넷 또는 전화 등으로 참여의사 표명바랍니다.
☞ 문의 및 연락처 도우미 한창희 010-3260-0901, 산행대장 강성철 010-2647-4989
□ 참고사항
1.상당산성: 사적 제212호/1970.10.01 지정/조선시대
상당산성(上黨山城)소재지: 충북 청주시 상당구 산성동 산28-1
- 상당산 계곡을 둘러 돌로 쌓아 만든 산성으로 백제 때부터 이미 이곳에 토성이 있었던 것으로 짐작되는 곳이다. 『삼국사기』에는 통일신라 초기에 김유신의 셋째 아들이 서원술성을 쌓았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때 쌓여진 것이 아닌가 추측되기도 한다. 상당이란 이름은 백제 때 청주목을 상당현이라 부르던 것에서 유래한 것이다.
지금의 성은 임진왜란 때에 일부 고쳤으며 숙종 42년(1716)에 돌성으로 다시 쌓은 것이다. 성벽은 네모나게 다듬은 화강암으로 쌓았으며, 비교적 잘 남아있으나 성벽 위에 낮게 쌓은 담(여장)은 전혀 남아있지 않다. 성 안에 5개의 연못과 3개의 사찰, 관청건물, 창고 등이 있었는데, 현재는 문과 치성이 남아있다. 정상에 오르면 서쪽으로 청주·청원 시내가 한 눈에 내려다보여 서쪽 방어를 위해 쌓여진 곳이었음을 알 수 있다.
- 이 산성은 청주에서 동쪽으로 7.5km에 청주와 청원군의 경계를 이루는 상당산(옛 이름 상령산, 해발 491.2m)위에 쌓인 석성으로서 그 성제(城制)가 훌륭하여 1970년 10월 1일 사적 제212호로 지정 보호되고 있다. 삼국시대 백제의 상당현에서 유래된 이름인 듯하며 둘레가 4.2㎞, 높이 34m, 면적 54,700평의 거대한 포곡식 석축산성이다.
- 1718년(숙종 14년)의 축성기록에 '인고지석축(因古址石築)', '인상당기지 개석축(因上黨基址 改石築)' '인고지개축(因古址改築)', '인구개축(仍舊改築)' 등의 기사가 있어 '古址', '上黨基址', '舊址'가 토성이었으며, 이 토성자리에 1716년 돌로 고쳐 쌓았다고 짐작된다.
- 옛 기록에 의하면, 상당산성은 청주 동쪽 6km의 율봉역 북산에 있는데, 옛「상당기지」에 '조선 숙종 42년 병사 유성추가 개석축(改石築)하였다'라고 이 성의 규모에 대해 적고 있다. 즉, 그 둘레가 2,425장(丈) 2,910보(步) 7,273 7,275척(尺)에 높이 3장(丈) 8 9척(尺) 3보(步), 첩(堞)이 1,176타(타)이고 치성(雉城)이 3처(處)가 있으나 옹성(甕城)과 곡성(曲城)은 없다. 동문루는 1층에 수문과 암문이 있고, 서문루는 1층이며, 남문은 홍예 1층이다. 동문은 진동문(鎭東門), 서문은 미호문인데 북쪽은 산세가 매우 급하여 당초부터 문을 내지 않았으며, 성안에 4개의 연못과 구룡남악의 두개의 사찰 이외에 하개의 암자(청심암)가 있었다.
- 「조선보물고적조사자료」에 의하면 '상당산성이라 칭함. 청주읍의 동쪽 방향 약1리에 있음. 토축 산성으로서 주위가 약 천칠백간(千七百間) 높이가 평균 오간(五間) 대개 완전함.「文化遺蹟總覽」上 에는 '백제시대 축조되었다는 설도 있고 신라 명장 김유신 장군의 父인 김사현 장군이 7년만에 완축, 상당산성이라 부르고 있다고도 전하며 현 청주를 상당현이라고도 하였다. 조선 숙종 42년 개축에 착수, 숙종 46년에 완공했으며, 화강암 석축성으로 동서남북 4개문과 장대(將臺) 및 연못이 있다. 이 성은 북일면 국동리 및 청주시 율량동, 명암동, 산성동 경계에 있는 성지로서 청주시내에서 우암산 능선으로 연결되어 서로의 거리가 7.5km에 위치한다. 남문내에 구룡사사적비(九龍寺事蹟碑) 1기가 있으며 1971년도에 남문에 홍예문과 성곽을 보수하였다'고 하였다.
- 이 산성의 지세와 기능은 상당산의 8부능선에서 시작하여, 성안의 골짜기(이곳에 중요시설인 운주헌, 관아사, 군기고, 동 서창 등이 있었고, 지금 민가 45호가 있다)를 감싸고 있는 서쪽의 연맥(連脈)과 동쪽 지맥(支脈)의 등성이를 타고 사행하다가 남동의 수구를 향하여 꺾여서 합쳐져 있다.
상당산성 주변의 지세를 살펴보면, 북동쪽으로 인경산, 구녀산, 좌구산 등이 반거(磻居)해 있고, 남쪽으로는 이에 이어진 산맥이 안부(鞍部)를 형성했다가 다시 융기하여 거질대산봉수, 선도산, 선두산 등이 연결되어 서쪽에 해당되는 청주시 명암동, 율량동 및 청원군 북일면 국동리, 주성리 등과는 250 310m의 표고차를 보여 험하고 가파르나, 산맥의 동쪽인 청원군 낭성면 갈산리, 현암리, 산성리 1구 등과는 거의 비슷한 표고인 낮은 언덕과 평지로 연결되어 있어서 언뜻 보아 이 산성이 서쪽에 강하고 동쪽에 약하다는 인상을 받게 한다.
성안의 서문이나 산꼭대기 또는 서장대(西將臺)나 남서치(南西雉) 위에서 사방을 바라보면, 서쪽으로는 우암산으로 가리워진 중심부를 제외한 청주시와 남 북부 및 미호천, 증평평야까지가 바라 보이나, 동쪽으로는 성 주변의 300 - 1,000m가 보일 뿐이어서, 이 산성이 동쪽(신라쪽)에 대비한 축성이 아니라, 오히려 서쪽(백제쪽)에 대비한 축성이라고 보는 것이 온당할 것 같은데, 이 점은 '국가성상당 소이수서구야(國家城上黨 所以修西寇也)'의 기록에도 나온다.
성밖의 산세가 가장 험하고 가파른 북벽은 자연지세만으로도 바깥쪽이 험하여 방비에 큰 문제가 없는 곳이어서 당초부터 문도 만들지 않았으며, 서 남 동벽보다 축성에 힘을 덜 기울였던 듯 성의 높이가 낮으며, 4개의 봉우리에 포루 4개소를 두었다. 서쪽의 산세도 북쪽만큼 험하고 가파른데 성 높이가 4벽 중 가장 높고 잘 다듬어져 있으며 서문 바깥쪽에 외곡성(外曲城)과 용도(甬道)가 있고 서장대와 포루 3곳이 배치돼 있다.
동벽은 이 벽과 평행하는 산능선이 800m 앞에 있어 그 방어에 문제가 되는데도 1개소의 암문(暗門)과 동문 및 포루(鋪樓) 3곳 만이 있어 평범하다.
남벽은 가장 낮은 곳인 수구(水口)가 이곳에 있고 정문인 공남문에 옹성(甕城)과 적대가 없으며, 남문 부근의 성벽에 곡성(谷城)이 없는 취약점을 보강하기 위해 수문(水門), 장대(將臺), 치성(雉城) 3곳, 포루(鋪樓) 4곳, 남문 안에 용도(甬道) 등을 마련하여 정문으로 육박해 오는 적의 예봉을 분쇄할 대비를 갖추었다.
둘레 4,2km의 크고 넓은 성벽을 수호하기 위해서는 많은 병력이 소요되며, 1,176타에도 5,880명의 군사가 있어야 하는데, 상당산성 소속은 우후(虞候)와 983명의 장졸뿐이어서 이를 보강하기 위해 성 안의 남서쪽 계곡에 남악, 구룡의 두 절의 세워서 승군(僧軍)이 머물러 지키게 한 점도 주목해야 할 것이다.
지금의 상당산성은 청주의 방위를 대비하기 위해, 또한 주로 서구(西寇)의 침략을 대비하기 위해 그 뒷산에 해당하는 상당산에 쌓아져서 청주읍성에서는 농성(籠城)이 불가능할 경우, 읍성의 관민이 이곳에 입보(入保), 수성(守成)하여 장기전의 태세를 갖추던 요충일 뿐 아니라, 이곳은 항시 관방중지(關防重地), 삼남형요(三南衝要), 삼로요형(三路要衝)으로 주목되었다.
- 청주는 신라에 의한 삼국통일 후 신라의 확정된 새로운 영토에 대한 행정구역의 재편성 과정에서, 685년(신문왕 5년) 남원소경과 함께 서원소경이 설치되고, 4년 후인 689년 서원경성이 축조되었으며, 다시 7년 후인 676년 서원경으로 옮겼는데, 그 이전에 김유신의 세째 아들 삼광(三光)을 따라 구근(仇近)이 서원술성을 쌓았다. 이에 따라 왕경의 제도를 축소한 면모를 갖추게 되었으니, 상당산성 남문 밖의 뽕나무 밭에서 수습된 명문(銘文)기와 조각 중 '사탁부소장지일(沙啄部屬將池馹)'로 판독되는 것들이 있어, 이곳이 청주의 역사에서 밝힐 큰 과제 중 서원경성의 치소(治所)로 추정하는 견해가 설득력이 있으며, 이는 계속 적극적인 자료의 출현과 면밀한 조사연구가 기대된다. 1481년에 완성된 「동국여지승람」에 '고상당성 재표봉역북산 석축 주 칠천칠백칠십삼 척…금폐(古上黨山城 在票峯驛北山 石築 周七千七百十三尺…今廢)'라는 기사가 있는 것으로 보아 이 때에 이미 석축의 고상당성으로서 조선 초에 시축된 것이 아니라 그 이전에 축조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1596년 윤형의 장계에 병사 원균이 상당산성을 축성할 때 심했던 부역의 폐단과 그 대책을 진언하고 있는데, 이것이 토축인지 수축인지가 분명하지 않다. 이 성의 개축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은 알 수 없지만, 개축이 시작된 이듬해, 즉 1717년 호서지방을 돌아본 공조판서 조태채의 上言에 의하면, 임진왜란 중에 수축된 이후 이 때만해도 성벽이 잘 보존되었던 듯하다.
대체적인 성역이 끝난 1년 후인 1720년 구룡, 남악의 두 절과 동암문이 축조되었고, 1728년에 이인좌의 난이 끝나고 나서, 오히려 그 정치적 군사적 중요성이 크게 인식되어 1729년 예조 참판 윤유의 진언에 따라, 1731년 우후가 병사 김중려의 명에 따라 운주헌을 중수하고 표루(標樓) 5개소를 세웠으며, 장마로 붕괴된 남문과 체성에 대한 보수공사를 시작하여 1732년 봄에 끝냈는데, 이 때 12월에는 전 충청감사 신방의 계언에 따라「상당산성 수성절목」이 작성되었다.
1947년 3 5월말까지 대 소의 두 연못을 파고 수문과 초루를 세우고, 성 안의 전답에 둔전을 설치하여 세금을 거두어 성첩 보수에 쓰도록 하였다. 또, 여력으로 군향고(軍餉庫) 승군향고(僧軍餉庫) 군기고(軍器庫)의 3고(庫)와 향고(餉庫)의 좌기청 문서방, 대문 등 총 74칸을 새로 짓고 아울러 전에 있던 군향고, 운주헌, 사정(射亭), 군관청, 수문직가(守門直家) 71칸 반을 중수하여 도합 여러 공해(公解) 145칸 반을 만들거나 수리하기에 이르렀다. 이후 여러 차례의 수축이 이루어졌고 지금의 형태는 광복 후에 이루어진 것이다.
출처http://kin.naver.com/qna/detail.nhn?d1id
2 청주 흥덕사지(淸州 興德寺址)
충청북도 청주시에 있는 통일신라시대와 고려시대에 걸쳐 존재했던 절의 터이다. 1986년 5월 7일 대한민국의 사적 제315호로 지정되었다.
흥덕사는 그 동안 문헌상으로만 ‘청주목외(淸州牧外) 흥덕사’라 전하고, 그 위치는 확인되지 않았었다. 1984년 한국토지개발공사가 운천동에 택지를 조성하면서 한 이름없는 절터가 발견되었다. 1985년 청주대학교 주관하에 발굴조사가 시작되었다. 조사 결과 금당터·서회랑터·강당터·부속건물들이 있던 건물터가 확인되었고, ‘서원부 흥덕사(西原府興德寺)’라고 새겨진 금구(禁口) 조각과 ‘황통 10년(皇統十年)… 흥덕사(興德寺)’라 새겨진 청동불발(靑銅佛鉢) 뚜껑이 나와 흥덕사임이 확인되었다. ‘대중 3년명(大中 3年銘)’이라 새겨진 기와가 출토되어 849년(문성왕 11)에 이미 이곳에 불사가 이루어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유물로는 토제품인 기와·전(塡)·치미편(鴟尾片)·방추차(紡錘車)·민무늬토기편[無文土器片] 등과 청동 제품인 금구(禁口)·소종(小鐘)·금강저(金剛杵)·향로(香爐)·수반(水盤) 등이 출토되었다. 유물들로 보아 늦어도 9세기에 지어져서 15세기에 폐사된 것으로 추정된다. 1377년에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본 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白雲和尙抄錄佛祖直指心體要節)을 인쇄한 곳이다. 1985년 발굴 당시 주춧돌만 남아있던 금당을 1991년에 80.05m2 규모로 복원하였다. 부지 안에 청주고인쇄박물관과 근현대인쇄전시관이 있다.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직지』와 우리나라 인쇄술에 대해 구경하기 좋은 곳이다.
3. 직지심체요절(直指心體要節) 또는 직지(直指, JIKJI)라고 부르기도 한다. 1372년 (공민왕 21)에 백운화상 경한이 임제종 18대 법손 석옥청공(石屋淸珙) 화상(和尙)으로부터 받아 온 《불조직지심체요절》을 증보하여 상·하 2권으로 엮은 것이다.[1] 백운화상이 입적하고 3년 뒤인 1377년(우왕 3년)에 청주 흥덕사(興德寺)에서 금속활자로 찍어 낸 것이 초인본(初印本)이다.[2] 이는 현존하는 금속활자로 인쇄된 책 중 가장 오래된 것이다.[3] 금속활자본은 현재 하권만이 전해지고,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고간본(古刊本)으로는 1378년 백운화상이 입적한 여주 취암사(鷲巖寺)에서 간행한 목판본이 있다. 목판본은 1992년 4월 20일 보물 제1132호로 지정되었고, 현재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과 국립중앙도서관에 상하권 1책이 각각 소장되어 있다.
4 .흥덕사 용두사지철당간: 국보 제41호/1962.12.20 지정/고려시대
충북 청주시 상당구 남문로2가 48-19
절에 행사가 있을 때, 그 입구에는 당이라는 깃발을 달아두는데, 이 깃발을 달아두는 장대를 당간이라 하며, 이를 양쪽에서 지탱해 주는 두 돌기둥을 당간지주라 한다.
당간이 서 있는 청주시 상당구 남문로는 예전에 용두사라는 절이 자리잡고 있던 곳이다. 용두사는 고려 광종 13년(962)에 창건되었으나 고려말의 잦은 전쟁과 난으로 인해 폐허가 되었고, 절이 있던 터는 청주시내의 가장 번화한 거리로 변하였다.
사진
청주 흥덕사지
清州古印刷博物館
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白雲和尙抄錄佛祖直指心體要節)
공 심 산 우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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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부터미널: 김융기, 김주형, 김지순, 이규백, 이영섭, 한창희 등 6명
현지 참여: 강성철, 양효성 부부(산성 남문), 정대섭 부부(산성 남문), 이승완 부부(흥덕사) 등 7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