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239
9월5일 [연중 제23주간 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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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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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kfZSWcdhJC8 (조승현 베드로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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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여러분의 죄를 사해주십사고 하느님께 손을 뻗으십시오. 손을 내밀어 뻗으면 고침받습니다!>
유다인들은 그야말로 철두철미하게, 글자 한자 한자에 온 신경을 집중하며 율법, 특히 안식일법을 준수했습니다. 그들이 그토록 자랑하고 자부심을 지니는 안식일 법규는 주로 ‘~하라!’가 아니라 ‘~해서는 안된다!’는 식으로 나열되고 있습니다.
안식일 법에 따르면, 안식일에 해서는 안되는 39가지 세칙들을 제시하면서, 이를 어길 경우 사형에 처하기까지 했습니다.
‘장로들의 전승’에 따르면 안식일에 해서는 안될 대표적인 노동 행위는 탈곡 작업이었습니다. 또한 응급환자가 아니고서는 병자에 대한 치료 행위도 엄하게 금지되고 있었습니다. 아파도 안식일을 피해 아파야 하니, 참으로 야박하고 비인간적인 안식일 법이었습니다.
그런데 혜성처럼 나타난 민족의 영도자, 세상 사람들의 주목을 한 몸에 받고 계시는 예수님께서 기회 닿을 때 마다, 자신들이 목숨처럼 소중히 여기는 안식일 법을 보란듯이 침해하고 파기하니, 유다인들의 느꼈던 좌절감과 분노는 하늘을 찔렀습니다. 자연스레 예수님을 못잡아 먹어 안달이 난 것입니다.
오늘도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한 회당에서 설교를 마치신 다음, 오른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고쳐주십니다.
아니나다를까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매의 눈으로 예수님의 일거수일투족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존경과 흠모의 시선이 아니라 여차하면 고발할 구실을 찾으려고, 어떻게 하면 그분을 올가미에 옭아맬 수 있을까 고민고민하며, 시선을 집중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의 사악한 마음을 즉시 파악하신 예수님께서는 유다 지도자들, 율법 학자들에게 정면으로 도전장을 던지십니다. 그 말씀이 참으로 기가 막힙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골이 잔뜩 났지만, 말문이 막혀 어찌할 바를 모르고 허둥댑니다.
“내가 너희에게 묻겠다.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남을 해치는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루카 복음 6장 8~9절)
이 흥미로운 장면에서는 새포도주이자 메시아로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의 권위와 낡은 부대로서 형식과 허울만 남은 율법의 준수가 대결구도를 이룹니다. 놀랍게도 예수님께서는 판정승이 아니라, 1라운드 KO승을 거두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과감하게도 낡고 고리타분한 과거의 안식일 법을 과감히 파기하십니다. 대신 인간성 회복을 위한 새로운 안식일 법을 제시하십니다. 허술하고 약점 많은 과거의 안식일 법을 보완하고 완성하신 것입니다.
원래 유다인들에게 안식일은 손가락 하나 꼼짝 하지 않고 휴식을 취하는 날이 아니었습니다. 물론 안식일은 쉬는 날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하느님의 업적과 자비에 감사하고 기뻐하며 선행을 하는 날이기도 했습니다. 축제의 날이고 잔치를 벌이는 날이었습니다.
그런데 세월이 흐르면서 그런 안식일의 의미가 아주 소극적인 형태로 희석되고 변질되어 버린 것입니다.
안식일은 생명을 누리는 날, 자신이 하느님의 도움으로 한 주간 동안 행한 일에 기뻐하는 날, 사랑이신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날입니다. 이런 안식일에 고통받고 있는 환자를 치료하는 행위는 더 없이 마땅하고 옳은 일이었던 것입니다.
“여러분은 주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손을 뻗어라.’ 성한 손을 가졌다고 생각하는 이들은 그 손이 탐욕과 불경으로 오그라들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
자주 손을 뻗으십시오. 구걸하는 가난한 사람에게 손을 뻗으십시오. 이웃을 돕고, 과부를 보호하고, 불의하게 모욕당하는 이가 해를 입지 않도록 빼내주기 위해 손을 뻗으십시오.
여러분의 죄를 사해주십사고 하느님께 손을 뻗으십시오. 손을 내밀어 뻗으면 고침받습니다. 예로보암은 우상을 숭배했다가 손이 굳었지만, 하느님께 간청하자 다시 펴졌습니다.”(암부로시우스 교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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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그들은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병을 고쳐 주시는지 지켜보고 있었다."
<죽이는 시선, 살리는 시선>
김학배 안젤로 신부님은 평화방송 강의에서 한 장애인 변호사 이야기를 해 주셨습니다. 장애인이시지만 그 장애를 딛고 당당한 법조인이 되어 살아가고 계신 분입니다. 신부님은 그 분을 초청해 강의를 들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분은 하느님은 믿으시지만 성당은 나오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그 분이 사법고시를 준비 중일 때 명동성당을 힘겹게 오르락내리락 하며 합격하게 해 달라고 기도를 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한 아이가 성당으로 올라가면서 쩔뚝거리며 힘겹게 오르는 자신을 보고는 함께 오르고 있는 엄마에게 이렇게 물어보았습니다.
“엄마, 저 사람은 왜 저렇게 된 거야?” 어머니는 그 사람이 듣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자녀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도 엄마 말 안 듣고, 하느님 안 믿으면 저렇게 돼!”
이 말을 듣고는 그분은 그만 다리에 힘이 풀려 바닥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고 합니다. 그리고는 그런 사람들이 다니는 성당 미사에 나갈 자신감이 없어진 것입니다.
옛날 제나라 때의 일입니다. 백주대낮에 어떤 사람이 금은방에 들어와서 금을 훔쳐 달아나다가 즉각 포졸에게 붙잡혔습니다. 포졸은 그를 끌고 가며 말했습니다. “사람이 그렇게 많이 보고 있는데 금을 훔치다니 네가 제정신이냐?” 그는 대답했습니다.
“取金之時, 不見人, 徒見金”, 즉 “금을 잡을 때는 사람은 보이지 않고 다만 금만 보일 뿐이었습니다” 이렇게 사람이 무엇에 눈이 멀면 그것 외에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법입니다. 또는 이런 말도 있습니다. “사슴을 쫓는 자는 산을 보지 않는다.”
인간의 눈은 이렇게 마음이 원하는 것만을 집중해서 보게 되고 그래서 전체적인 것을 볼 수 없기 때문에 올바른 판단을 내릴 수 없게 됩니다. 그런 시선이 자신뿐만 아니라 남도 죽이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무언가에 지나치게 집착하는 것을 가리켜 무엇에 ‘눈이 멀었다’고 표현하는데 아주 적절한 표현입니다. 그래서 백주대낮에 금을 훔치는 일도 발생하는 것입니다.
오늘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이 이런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오로지 예수님께 해를 끼칠 생각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남을 해치는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라는 질문을 하지만 그들은 그 질문에 관심이 없습니다. 무엇이 옳고 그르든 중요하지 않고, 무조건 예수님께서 병을 고쳐서 안식을 법을 어기기만을 바라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목적은 금도 아니고, 사슴도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목적은 나자렛 예수의 죽음이었습니다. 일단 그런 마음을 품으면 그 목적이 달성되기 전까지는 아무 것도 볼 수 없게 됩니다.
그러나 이 장님들과는 다르게 예수님은 손이 오그라든 사람의 마음까지 오그라들게 하시지 않습니다. 그 따듯한 시선으로 당당히 사람들 가운데 나설 수 있게 하십니다. “일어나 가운데 서라.”
왜 부끄러워하고 두려워하느냐며 “괜찮다, 괜찮아!”라는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사랑하는 눈빛이 바로 예수님의 눈빛이었습니다. 움츠린 사람을 당당하게 세상 가운데 서게 하는 그 눈빛, 우리에겐 그런 눈빛이 필요한 것입니다.
고등학교 2학년 때로 기억됩니다. 교생 실습을 나온 여자 선생님이 예뻐서 다들 난리였습니다. 지나가면 서로 쓸데없는 질문을 해서 대화를 나누어보려고 경쟁을 할 정도였습니다. 그런 와중에 저도 무언가를 물어보고 싶었지만 굳이 물어볼 것이 없었습니다. 제 옆을 지나갈 때 질문이 있다고 불러 세웠습니다. 왜 그런 질문을 했는지 모르겠지만 이렇게 털어놓았습니다.
“저는 삼형제 중 막내라 여자와 이야기 한 적도 없고 쑥스러워서 좋아하는 사람이 있어도 말을 못 걸어요.”
그 선생님은 이렇게 대답해 주었습니다. “학생이 우리나라 어떤 여자를 꼬셔도 넘어올 거예요. 내 말을 믿어요.”
저는 농담인 줄 알았지만 그 때 들었던 그 말이 살아오면서 얼마나 큰 힘을 주었는지 모릅니다. 그때부터 여자 앞에서 주눅 들어 말을 못 하던 것들이 조금씩 풀려나갔던 것 같습니다.
사람에겐 두 가지 시선이 있는 것 같습니다. 죽이는 시선과 살리는 시선, 오그라들게 하는 시선과 펴게 하는 시선이 바로 그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시선으로 이웃을 바라보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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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의료보험에 가입했습니다. 치과에도 다녀왔고, 내과에도 다녀왔습니다. 의료보험이 없을 때는 큰 부담이었습니다. 의료보험이 있으니 치과에서도 내과에서도 부담 없이 진료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내과에서는 위내시경, 장내시경도 하자고 했습니다. 내년에 한국에 휴가가면 하겠다고 했습니다. 평소에는 잘 모르고 지내는데 병원엘가면 몸의 상태를 알 수 있습니다. 치과에서는 잇몸이 약하다고 이야기합니다. 잇몸이 약한 것을 알고는 있지만 특별한 방법이 없기에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내과에서는 혈압이 높다고 하고, 콜레스트롤도 있다고 합니다. 그것도 특별한 방법이 없기에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아직까지 큰 이상이 없는 것을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병을 치료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병이 생기지 않도록 면역력을 키우는 것이 중요합니다. 규칙적인 식사, 적당한 운동, 긍정적인 생각, 나눔과 봉사는 우리 몸과 마음의 면역력을 키워주는 백신이라고 생각합니다.
교구장님께서 사제들에게 편지를 보냈습니다. 멀리 미국에 있지만 교구를 사랑하시고, 사제들을 사랑하시는 교구장님의 마음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교구장님은 사제들의 의견을 경청하셨고, 먼저 시급한 것들을 시행하겠다고 하였습니다. 직분을 떠나서 사제들이 서로 존중하고, 배려하면 좋겠다고 하였습니다. 주임신부, 부주임 신부, 보좌 신부는 직책이 다를 뿐이지 모두가 하느님의 부름을 받은 성직자이기에 서로 존중하고 배려하면 좋겠다고 하였습니다. 같은 마음으로 수도자들과도 서로 존중하고 배려하면 좋겠다고 하였습니다. 줄어들고 있는 성소자들을 생각해서 신학생 양성에 관심을 가지면 좋겠다고 하였습니다. 신학생들은 사제들의 삶을 보고 성소를 결정한다고 하였습니다. 성직자국을 신설하겠다고 하였습니다. 교구에 기도사제들을 두겠다고 하였습니다. 타교구 공소에 사제를 파견하겠다고 하였습니다. 협력사제 제도도 시행하겠다고 하였습니다. 여러 모임을 신설하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런 토론의 장에서 사제들의 의견을 경청하겠다고 하였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이 교구장님과 함께 하시기를 기도합니다.
교황님께서는 ‘시노드’를 통해서 지역교회의 현안과 의견을 경청하겠다고 하셨습니다. 어쩌면 그만큼 지금 교회가 당면한 문제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지금 교회의 상황이 어렵기 때문입니다. ‘사제 독신 문제, 여성 사제 문제, 성 소수자 문제, 교구장 임기제 문제, 안락사 문제, 낙태 문제’ 들이 있습니다. 교회의 법은 이런 문제에 대해서는 아직까지는 문을 열고 있지 않습니다. 성공회, 개신교, 원불교와 같이 다른 종교에서는 이런 문제들에 문을 열고 개방하고 있습니다. 사제의 결혼을 허용해도, 여성에게 성직자의 문을 개방해도, 성 소수자들에게 성직의 기회를 주어도, 교구장의 임기를 정해도, 안락사와 낙태를 허용해도 그것으로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으로 인해 갈등과 분열이 커지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소비와 자본 그리고 물질이 안개처럼 우리 주위에 가득하기 때문입니다. 자연을 파괴하고 환경을 오염시켜도, 인간의 양심과 영혼을 녹슬게 해도 우리는 무관심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묵은 누룩을 깨끗이 치우고 새 반죽이 되십시오. 여러분은 누룩 없는 빵입니다. 우리의 파스카 양이신 그리스도께서 희생되셨기 때문입니다. 묵은 누룩, 곧 악의와 사악이라는 누룩이 아니라, 순결과 진실이라는 누룩 없는 빵을 가지고 축제를 지냅시다.” 새 반죽은 제도와 법을 바꾸는 것이 아닙니다. 새 반죽은 순결과 진실입니다. 하느님의 뜻과 의로움을 위해서 십자가를 지고 가는 것입니다. 베네딕토 성인이 했던 것처럼, 프란치스코 성인이 했던 것처럼 우리 시대에는 영성이 더 필요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필요한 영성을 이렇게 말씀합니다. “내가 너희에게 묻겠다.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남을 해치는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 영성은 하느님의 의로움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거룩함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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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카 6,6-11: 손이 오그라든 병자의 치유
예수님은 항상 인간이 현재보다 더 자유롭고 사람답게 살 수 있도록 해주시는 것을 우선으로 하신다. 예수님은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 앞에 두고 날카로운 질문을 던지신다.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남을 해치는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9절) 이는 사람을 제도라는 법에 묶어놓으려고 하는 그들을 공박하시는 말씀이다.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하느님의 참뜻을 행하기보다는 인간적인 규례를 중요시하는 사람들이었다.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은 관례와 규칙보다 사람의 생명을 돕는 일과 사람에게 선행을 베푸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예수께서 안식일에 기적을 행하신 것은 그들을 자비와 동정으로 이끌기 위해서였다.
예수님의 질문은 저들의 어리석음을 드러내는 지혜로운 질문이다. 만일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치 않고, 생명을 구하는 일이 법에 금지되어 있다고 대답한다면, 그들은 스스로 율법을 비난하는 자들이 된다. “어찌하여 내가 안식일에 한 사람의 온몸을 건강하게 만들어준 것을 가지고 나에게 화를 내느냐?”(요한 7,23) 그분은 아담이 금지된 열매를 따기 위해 내밀었던 손(창세 3,6)을 선행의 건강한 힘으로 회복시켜주셨다. 범죄를 저질러 마비된 손이 선행으로 치유되었다. 우리도 주님께 우리의 오그라든 손을 뻗게 해 달라고 청하여야 한다.
“손을 뻗어라.”(10절) 손을 뻗는다는 것은 탐욕과 불경으로 오그라든 손을 편다는 것이다. 이제는 손을 뻗어야 한다. 구걸하는 가난한 사람에게 손을 뻗고, 이웃을 돕고 어려운 사람들을 돕고, 불의하게 모욕당하는 사람이 해를 입지 않도록 손을 뻗어야 한다. 우리의 죄를 사해 주십사고 하느님께 손을 뻗어야 한다.(이사 1,15.17 참조) 손을 내밀어 뻗으면 치유를 받는다. 손을 뻗는다는 것은, 옳은 일을 행하고 선을 실천하는 것이다. 제도와 규칙에 앞서 이것이 진정으로 사람을 위하는 일인가, 괴롭히는 일인가를 먼저 생각해야 할 것이다. 여기에서 참으로 하느님의 사랑이 나올 것이며 그 사랑이 이웃에게로 전해진다. 내가 율법주의자가 될 때, 지금 오늘을 사는 나도 그분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우리 안에서 그분이 현존하시는 것을 방해하고 죽이는 내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잘못을 우리는 범하지 않도록 하여야 한다. 인간의 존엄성, 즉 하느님의 모습임을 항상 기억하며 이웃을 대하는 우리가 되도록 노력하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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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무엇이 합당하냐?>
“다른 안식일에 예수님께서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셨는데, 그곳에 오른손이 오그라든 사람이 있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을 고발할 구실을 찾으려고, 그분께서 안식일에 병을 고쳐 주시는지 지켜보고 있었다.”(루카 6,6-7)
아마도 이 이야기에 나오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을 ‘안식일 규정을 무시하는 이단자’로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고발할 구실을 찾으려고’라는 말은, 고발하는 것은 이미 결정되어 있었고 구체적인 죄목을 찾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안식일을 지키는 것은 유대인들에게는 목숨보다 더 중요한 일이었고, 그들의 정체성과 관련된 일이기도 했습니다. (안식일을 지키면 유대인이고, 안 지키면 유대인이 아니라는 것, 유대인이 아니라면 공동체에서 추방해야 하고, 유대인이면서도 안식일을 안 지키면 죽일 수밖에 없다는 것, 바로 그것이 그들의 머릿속에 깊이 박혀 있는 신념이었습니다.) ‘고발할 구실을 찾으려고’라는 말은,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일부러’ 장애인을 데리고 왔다는 것을 나타내기도 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장애인을 고칠 수 있는 ‘권능’을 가지고 계신다는 것에 대해서는 의심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또 그들은 예수님이 병자나 장애인을 보면 그냥 지나치지 않고 고쳐 주는 ‘자비로우신 분’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의 권능과 자비에는 관심 두지 않았고, 안식일에는 어떤 일도 해서는 안 된다는 규정만을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손이 오그라든 사람에게, ‘일어나 가운데에 서라.’ 하고 이르셨다. 그가 일어나 서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너희에게 묻겠다.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남을 해치는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루카 6,8-9)
여기서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라는 말은, 뜻으로는 ‘그들의 생각을 아셨지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당신을 고발할 구실을, 사실상 당신을 ‘죽일 구실’을 찾는다는 것을 아셨지만, 그들이 파 놓은 함정으로 들어가십니다. (이 이야기만 놓고 보면, 장애자 한 명을 고쳐 주려고 당신의 목숨을 내놓으셨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바로 그것이 ‘예수님의 자비’입니다.)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남을 해치는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라는 질문의 답은, 당연히 “좋은 일을 하는 것과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다.”입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도 그렇게 생각했을까? 뒤의 13장을 보면, 회당장이 군중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일하는 날이 엿새나 있습니다. 그러니 그 엿새 동안에 와서 치료를 받으십시오. 안식일에는 안 됩니다.”(루카 13,14)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좋은 일(선행)’과 ‘목숨을 구하는 일’은 당연히 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그러나 ‘안식일에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자들이었습니다. 십계명을 보면, 안식일에는 “어떤 일도 해서는 안 된다.”라는 말이 있긴 합니다.(탈출 20,10; 신명 5,14)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그 ‘어떤 일’을 ‘모든 일’로 해석했는데, 예수님께서는 병자와 장애자를 고쳐 주는 일과 같은 선행과 사랑은 그 ‘일’에 포함되지 않는다고 가르치십니다.
여기서 ‘합당하냐?’라는 질문은, “하느님의 뜻에 합당하냐?”라는 질문이고, “안식일을 어떻게 지키는 것이 하느님의 뜻이냐?”라는 뜻입니다. 지금 예수님의 말씀은, “안식일은 아무것도 안 하는 날이 아니라, 좋은 일과 목숨을 구하는 일을 해야 하는 날이다.”라는 가르침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안식일에 선행과 사랑을 실천해도 된다.”가 아니라, “안식일에는 선행과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입니다.> 이 가르침을 기준으로 하면, 예수님은 안식일을 지키시는 분이고,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안식일을 안 지키는 자들입니다. <계명들과 율법들에 들어 있는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 또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알아서 그대로 실천하는 것, 그것이 ‘율법의 완성’인데(마태 5,17), ‘하느님의 뜻’ 가운데에서 첫 번째는 ‘사랑’입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라고 말합니다(로마 13,10).>
예수님의 말씀에는 “좋은 일을 하지 않는 것은 남을 해치는 일을 하는 것과 같고, 목숨을 구하는 일을 하지 않는 것은 죽이는 것과 같다.”라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하느님의 뜻에 합당한 일을 하지 않는 것은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 나오는 사제와 레위인의 경우에, 그들은 강도당해서 죽어가는 사람을 보았으면서도 아무것도 안 하고 그냥 지나가 버렸는데(루카 10,31-32), 아무것도 안 한 그것이 ‘큰 죄’가 됩니다. 죽어가는 사람을 보고서도 그 사람을 살리는 일을 하지 않은 것은 죽이는 일을 한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그처럼 안식일이라는 이유로 아무것도 안 하는 것은, 즉 선행 실천과 사랑 실천을 안 하는 것은, ‘큰 죄’를 짓는 일이 됩니다.
<안식일 대신에 주일을 지키는 그리스도교 신앙인들 경우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바라시는 것이 무엇인지,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먼저 생각해야 하고, 그 뜻을 그대로 실행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주일을 지키는 것을 의무로만 생각하고 사랑 없이 억지로 지키는 것, 무엇이든 이유만 생기면 그 의무를 면제받으려고 하는 것, 우리는 그런 모습들을 반성해야 합니다. ‘사랑 없는 의무 수행’은 강제노동일 뿐이고, 멍에일 뿐입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주신 멍에가 아니라, 어리석은 사람들이 스스로 불러온 멍에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강제노동을 시키려고 오신 분도 아니고, 멍에를 주려고 오신 분도 아닙니다. 신앙생활은 사랑과 기쁨이 가득한 생활입니다. (그런 생활이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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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대구대교구 강수원 베드로 신부님]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 사이에 일어난 단식 논쟁(루카 5,33-39 참조)은 안식일 논쟁으로 이어집니다. 유다인들의 구전 율법 미쉬나는 ‘사람의 생명이 위태로운 모든 경우는 안식일 법에 우선한다.’라고 가르치는데, 이는 시대가 지나면서 유다인들도 율법의 예외적 적용의 필요성을 점차 깊이 인식하였음을 보여 줍니다. 그러나 예수님과 논쟁을 벌였던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의 경우, 그들의 의도는 처음부터 악하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고발할 구실”만을 찾을 뿐, 안식일에도 구덩이에 빠진 양을 끌어낼 수 있었던 당시의 통념마저 거슬러(마태 12,11 참조), 정작 장애를 지닌 동족의 고통은 외면하였기 때문입니다.
마르코는 이때 예수님께서 “노기를 띠시고 그들을 둘러보셨다.”(마르 3,5)라고 전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의 참의미를 인습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통하여 밝히셨습니다. 안식일이 ‘좋은 일을 하는 날’이며 ‘목숨을 구하는 날’이라 하신 것은, 안식일의 진정한 의미가 아무것도 하지 않는 데 있지 않고, 창조의 일곱째 날로서 하느님께서 ‘완성이라는 일을 하신 날’이며(“하시던 일을 이렛날에 다 이루셨다”[창세 2,2].) 당신 백성을 ‘억압에서 해방시키신 날’임을 기억하고(신명 5,15 참조) 그 뜻을 실천하는 데에 있기 때문입니다.
“손을 뻗어라.”라는 주님의 말씀이, 편협한 마음과 잔뜩 오그라든 손으로 때때로 누군가를 가리켰던 나에게 하시는 말씀으로 들려옵니다. ‘묵은 누룩을 깨끗이 치우고 순결과 진실이라는 누룩 없이 구워 낸 새 빵이 되어’(제1독서 참조) 하느님께 자신을 봉헌하는 새 삶을 시작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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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대교구 허인 베네딕도 신부님]
오늘 예수님께서는 오른손이 오그라든 한 사람을 고쳐주셨습니다. 그런데 하필 안식일에 병을 고쳐주심으로써, 논란을 불러옵니다.
손이 오그라든 사람! 죽을병에 걸린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니 꼭 안식일에 고쳐주실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그 이유를 잘 알고 있습니다. 안식일의 근본의미를 일깨워주시기 위해섭니다.
바리사이나 율법학자들이 얼마나 잘못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지를 지적하기 위해섭니다. 이런 예수님의 의도를 잘 아는 우리가, 지금 또 다른 바리사이로, 또 다른 율법학자로 살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자문을 해봅니다.
예수님은 죽을병에 걸린 것도 아닌데, 왜 이 사람을 안식일에 고쳐주셨을까? 그 상징적인 의미는 무엇일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손은 인간에게 가장 기본적이고 중요한 표현 도굽니다. 손으로 애틋하게 만질 수 있고, 접촉할 수 있고, 다른 사람과 악수를 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손을 써서 어떤 형상을 만들어 낼 수도 있고, 창조할 수도 있습니다. 그 손이 오그라들었다는 것은, 그 사람이 위축되어 있고, 다른 사람과 접촉을 두려워하는, 자기 안에 갇혀 있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모든 일이 소극적으로 되고, 자기를 잘 드러내지 않으며, 그래서 뒤에 숨어서 불만을 터트리기에 십상입니다.
나병 환자처럼 공동체로부터 완전히 분리되어 있지는 않지만, 이 사람도, 함께 사는 데 어려움이 있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치유 목적은 바로 모든 사람이 함께 어울려 살아가도록 하기 위해섭니다.
오른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치유해주심으로써, 공동체의 아웃사이더로 사는 사람을, 공동체의 중심으로, 공동체의 완전한 일원으로 불러들이신 것입니다.
이 사람을 치유해주기 위해서, 예수님께서는 먼저, 그를 사람들 가운데로 나서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손을 펴라’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위축되어서 뒤에 숨어만 있지 말고, 당당하게 사람들 가운데로 나서라, 그리고 자신을 표현하라. 그리고 세상 사람들과 함께 살아라.’하는 말씀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이렇듯 예수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자녀로, 하느님의 백성으로, 함께 이웃으로 형제로 살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런 예수님을 믿는,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아직도 끼리끼리만 뭉치는 것은 아닌지요? 우리 레지오, 우리 단체, 우리본당만 챙기는 것은 아니겠지요? 주일미사 의무만 지키면서 뒤로 물러나 불평불만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니겠지요? 또 다른, 오른손이 오그라든 사람들이 우리 자신은 아니겠지요?
나는 지금 어떤 모습으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오른손이 오그라든 사람이 바로 내 자신의 모습은 아닌지 우리의 모습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찾는 이유는,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이유는 자유롭게 살기 위해섭니다. 건강하게 살기 위해섭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멀쩡하던 손이 점점 더 오그라든다면 우리의 모습이 너무 비참하겠지요.
예수님께서는 오른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고쳐 주시기 전에 먼저 “일어나 가운데로 나와 서라.”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왜 그 자리에서 고쳐주시지 않고, 가운데로 불러내셨을까요? 그 의미를 다함께 생각해보셨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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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오창열 사도요한 신부님]
<주님의 날>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오른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치유’하신 내용을 들려주고 있다. 때는 안식일이었고, 유다인의 회당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그리고 거기에는 예수님이 안식일의 율법을 어기기만 하면 고발하려고 지켜보고 있는 사람들,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있었다.
회당 앞자리에는 ‘명예의 자리’가 있으며, 거기에는 산헤드린 대표가 앉아 있다. 그는 사람들을 잘못 인도하는 사람들을 취급하는 임무를 가지고 있었다. 말하자면, 예수님의 행동을 자세히 조사하기 위하여 그곳에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오른손이 오그라든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 어떤 질병으로 인해서 한쪽 손을 못 쓰게 된 사람이었다.
히브리 복음에 보면, 그의 직업은 석공이었고, 그래서 그의 생계가 손과 팔에 달려 있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 날은 안식일이었다.
안식일에는 노동이 금지되어 있었다. 병을 고치는 것도 노동이었다. 의학적인 배려는 사람의 생명이 위험했을 때에만 받을 수 있었다.
즉 대개의 상처는 악화되는 것만 방지하고 좋아지게 할 수는 없었다. 이런 사실을 전제하고 보면, ‘한쪽 손이 오그라든 사람’은 생명에는 지장이 없는 사람이다.
예수님은 그를 불러 세운다. 그리고 불순한 의도로 고발하려고 지켜보고 서 있던 사람들에게 질문하신다.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남을 해치는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
안식일이라고 해서 선을 행하지 않으면 곧 악을 행하는 일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예수님은 이 지혜의 말씀으로 누구나 선한 일이 옳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드셨다. 그러고 나서, 치유해 주신다.
특이한 것은, 이 병자가 예수님께 병을 고쳐 달라고 간청하지도 않았고, 또 예수님께 어떠한 신앙고백도 하지 않았는데 예수님께서 먼저 나서서 치유해 주셨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안식일이든 어떤 날이든 간에, 상황에 구애받지 않으시고, 또 세상 사람들의 눈치에도 아랑곳없이 자신에게 불리한 결과가 예상되더라도 선을 베푸신다.
그리고 이런 일로 인해서 예수님은 아주 어려운 처지에 몰리게 되고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어떻게 예수님을 처리해야 할 지 서로 의논하게 된다(6,11).
예수님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서 있다.”고 하셨다. 안식일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모든 일을 중단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 감사드리고 하느님 안에서의 휴식으로써 하느님과 일치하는 데 그 가치가 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선한 일을 행하고 하느님의 뜻에 보다 맞갖은 생활로 ‘주님의 날’인 주일의 시간을 성화시켜 나가도록 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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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성풍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때를 안다는 것, 때를 맞춘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해야 할 때 하지 않았기에, 또는 하지 말아야 할 때 했기 때문에 어려움을 겪게 되는 경우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단순히 시간의 흐름 속에서 때를 맞추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때가 근본적으로 하느님의 뜻에 맞는 것인가는 더 중요한 일입니다.
오늘 예수께서는 오른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고쳐주십니다. 그런데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예수께서 안식일에 병을 고쳐주시기만 하면 고발하려고 지켜보고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사람을 위해 마련된 안식일 정신보다는 안식일 법을 지켜야 한다는 사실만이 중요하게 여겨졌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예수께서는 율법의 정신, 안식일의 정신을 일깨워주십니다.
오른손이 오그라든 사람이 치유 받아야 할 사람이 아니라, 마음이 오그라든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치유를 받아야 할 처지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를 수 있는 열린 마음을 지닐 수 있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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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기쁜 날에>
루카 6,6-11 (안식일에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고치시다)
안식일에 예수님께서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셨는데, 그곳에 오른손이 오그라든 사람이 있었다.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을 고발할 구실을 찾으려고, 그분께서 안식일에 병을 고쳐 주시는지 지켜보고 있었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손이 오그라든 사람에게, “일어나 가운데에 서라.” 하고 이르셨다. 그가 일어나 서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너희에게 묻겠다.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남을 해치는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 그러고 나서 그들을 모두 둘러보시고는 그 사람에게, “손을 뻗어라.” 하고 말씀하셨다. 그가 그렇게 하자 그 손이 다시 성하여졌다. 그들은 골이 잔뜩 나서 예수님을 어떻게 할까 서로 의논하였다.
<기쁜 날에>
기쁜 날에
기뻐해야 하는 날에
기뻐해야만 하는 날에
기쁠 수 없는 사람은
슬플 수밖에
슬퍼할 수밖에 없는 사람은
더욱더 슬플 수밖에
기쁜 날에는
기뻐해야 하는 날에는
기뻐해야만 하는 날에는
기쁠 수 없는 사람은
함께 기쁠 수 있게
슬퍼할 수밖에 없는 사람은
더욱더 함께 기쁠 수 있게
기쁨을 다그치지 말고
오롯이 기쁨이 되어주는 것
기쁜 날이
모든 이에게
기쁜 날이 될 수 되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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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굽은 마음을 퍼라>
예수님께서는 손이 오그라든 사람에게 “손을 뻗어라” 하시며 당신의 능력을 통해서 오그라든 손을 이전처럼 성하게 하셨습니다.(루카6,10) 손을 뻗는 것은 다른 사람에게 무엇인가 주는 행위이기도 하고, 다른 사람이 주는 것을 받는 행위이기도 합니다. 손을 뻗어 서로의 관계를 형성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손이 오그라든 사람이 손을 편다는 것은 본인뿐 아니라 모두가 기뻐해야 할 일입니다. 그런 기쁨이라면 더 많이 누리고 싶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하느님을 생각하는 안식일의 본질적 의미보다는 규정과 규율에만 얽매여 있던 율법학자와 바리사이들이 그 사람들입니다(루카6,7).
그들은 마음이 오그라들어서 예수님의 활동을 방해하고 마침내는 어떻게 하면 예수님을 죽일 수 있을 것인지 의논하였습니다. 그들은 마음이 오그라든 자신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손뿐만 아니라 마음도 고치시는 분입니다.
자신의 바람이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골을 부리는 것은 어리석습니다. 손이 오그라든 것은 마음이 오그라든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 마음을 점검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날마다 놀림감이 되어 조롱거리가 되어도(예레15,10) 뼛속에 가두어둔 주 하느님의 말씀이 심장 속에서 불처럼 타올라(예레20,9) 아버지의 뜻을 따라, 가실 길을 가셨습니다.
혹시라도 사촌이 땅을 사서 배가 아픈 것은 아닌지? 내가 만들어 놓은 하느님 상 때문에 다른 어느 것도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은 아닌지? 주님께서 우리에게 새 마음을 넣어주며 새 기운을 불어넣어 주시길 청합니다.
‘돌처럼 굳은 마음을 도려내고 살처럼 부드러운 마음’을 넣어주시길 희망합니다.(에제36,26) 그리하여 안식일은 물리적으로 쉬는 것보다 하느님 앞에서, 하느님 안에서, 하느님과 함께 더불어 향유하는 것이라는ㅇ깨우침을 얻길 바랍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말씀하십니다. “십계명은 지켜야 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와의 만남을 위한 것이어야 합니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부정적인 시각을 가진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어떤 일에서든 트집을 잡으려고 합니다.
그는 무엇인가 꼬인 사람입니다. 얽힌 것을 풀면 좋으련만 바른 것도 그릇 것으로 보니 그 사람은 불행합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장터에 앉아 서로 부르며 이렇게 말하는 아이들과 같다. 우리가 피리를 불어 주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울지 않았다.”(루카7,32) "움직여야 할 때 움직이고 멈추어야 할 때 멈추어야 하는 것이 삶이고. 움직여야 할 때 움직이지 않고 멈추어야 할 때 멈추지 않는 것이 죽음이다."(이현주)
그러므로 우리는 살아 있어야 합니다. 하느님의 판단과 사람의 판단에 있어서 어느 판단을 따라야 할까요?ㅇ당연히 하느님의 판단입니다. 하느님의 나라에서 우선시 되는 것은 하느님이시고 동시에 사람입니다.
사사건건 부정적인 태도를 보이며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어제도 있었고, 오늘도 여전히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은 부정적인 상황 속에서도 긍정을 찾아내는 삶입니다.ㅇ긍정의 주 하느님을 생각하십시오!
행동은 마음 안에 있는 것이 밖으로 나오는 것입니다. 따라서 마음을 잘 가꾸어야 합니다. 무엇이든 주님의 눈으로 볼 수 있는 마음 자세를 굳건히 하여 참 신앙인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불평으로 세상을 더럽히는 사람은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프란치스코) 손을 뻗어 주님의 손을 꼭 잡기 바랍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마음을 다하여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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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하느님으로부터 사랑받고 있지 못하다고 말씀하시는 분을 종종 봅니다. 이에 사람들은 “믿음이 부족해서 그렇다.”라고 말합니다. 믿음의 부족으로 하느님의 사랑을 깨닫지 못한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하느님의 사랑을 느끼지 못하는 진짜 이유가 믿음이 없어서일까요? 그보다는 나 자신이 하느님을 사랑하고 있지 않기 때문은 아닐까 싶습니다. 이 이해를 위해, 사람들 간의 사랑을 한번 생각해 보았으면 합니다. 내가 받는 사랑의 크기에 따라서 기쁨의 강도가 바뀔까요? 그보다는 나의 사랑을 받은 사람이 기뻐하는 모습을 보면서, 자신의 기쁨이 더 커졌던 기억이 클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나의 사랑에 하느님께서 기뻐하실 것에 크게 기뻐하는 우리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랑이란 받는 것이 먼저가 아니었습니다. 늘 주는 것이 먼저였고, 이런 사랑을 통해 우리는 큰 기쁨과 행복을 깨닫게 됩니다.
그런데 주는 것이 아닌, 받는 것이 먼저라고 생각하게 되면 여기서 사랑의 결핍이 나타나고, 형식적인 사랑의 실천만을 입으로 말하게 됩니다. 그래서 어떻게든 주는 사랑에 집중하고, 이 사랑 안에서 기쁨과 행복을 충만하게 누리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오늘의 논쟁은 율법을 지키는 것이 우선이냐 사람에게 사랑을 전하는 것이 우선이냐 하는 문제입니다. 유다인에게 율법은 그 어느 것보다도 귀했습니다. 그래서 율법을 어기느니 차라리 죽는 것이 더 낫다고 했습니다. 이러다 보니 율법이 곧 하느님이 되었습니다.
성경 외경인 ‘나자렛인들의 복음서’라는 책에는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오른손이 오그라든 사람이 나옵니다. 그는 오른손으로 밥벌이하는 장인이었습니다. 이 오른손이 가족의 밥줄일 정도로 중요했습니다. 그런데도 율법이 중요하다는 이유로 고쳐줘서는 안 된다는 것이지요. 병자를 앞에 놓고 치유의 합법성 문제를 따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가장 강조하시는 것은 사랑이었고, 하느님께서 전해주신 율법 역시 그 사랑에 기초해야 했습니다. 율법은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고 따라서 법 중의 법은 사람의 생명을 보호하는 법이 됩니다. 그런데 알맹이는 빼고 법조문 글자에만 집착하면서 사랑을 완전히 잊어버린 것입니다.
형식적인 사랑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또 자신이 받을 사랑에만 집중해서도 안 됩니다. 그 모든 것을 다 지워버리고, 자신이 주는 사랑만을 남길 수 있어야 합니다. 그때 하느님의 사랑이 보이면서, 하느님의 사랑을 충만히 받게 됨도 깨닫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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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우리 공동체는?>
적은 누룩이 온 반죽을 부풀린다는 것을 모릅니까? 묵은 누룩을 깨끗이 치우고 새 반죽이 되십시오.
오늘 바오로 사도는 코린토 교회를 크게 꾸짖습니다. 이교인들도 저지르지 않는 불륜을 코린토 교회 구성원 중의 하나가 저질렀는데 그를 회개시키지도, 제거하지도 않고 그대로 두고 있다는 꾸짖음입니다.
저는 이 얘기를 묵상하면서 공동체의 역동에 대해 생각해봤습니다.
제가 소신학생이었을 때 저희는 학급 회의를 통해 무감독 시험을 하기로 했는데, 신학생이라면 감독이 있건 없건 정직해야 하지 않느냐는 생각에서였지요. 대단한 자부심에서 비롯된 것이었고 그래서 이 결정은 자랑스러운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한동안 잘 지키다가 얼마 지나서부터 부정행위를 하는 친구들이 생겨났고 그래서 그것을 놓고 저희는 다시 학급 회의를 하게 되었는데 저희는 괴로웠지만 그 친구들이 신학교를 떠나는 것으로 결정하였고, 그들은 신부가 되지 못했지요.
지금 생각하면 다음서부터는 그러지 말라고 한 번은 기회를 주는 쪽으로 했으면 좋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들지만, 아무튼, 그때는 저희가 그렇게 결정했는데 오늘 코린토 교회의 문제를 생각하면 저희는 아주 훌륭한 결정을 한 것입니다.
왜냐면 우리가 잘 알다시피 사과 하나가 썩었는데 그것을 그대로 놔두면 차츰 전체가 썩기 때문입니다.
한 상자 안에 있지 않으면 문제없습니다. 그러나 한 상자 안에 있으면 문제입니다.
우리의 공동체가 그렇습니다. 공동체 안의 악행은 한 사람의 악행이 아닙니다.
공동체 안의 악행이 개인의 악행이 아닌 것은 악행의 전염력 때문이기도 하지만 다른 하나는 공동체가 그것을 용인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악행의 전염력을 오늘 서간에서는 누룩으로 비유합니다. 누룩은 아무리 작아도 전체를 부풀게 하기에 그 누룩은 그것을 제거하지 않고 용인하는 한 공동체를 급속히 병들게 합니다.
그런데 누룩은 악행의 누룩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성인에게서 성인이 난다는 말이 있듯이 거룩한 누룩도 있잖습니까?
저는 성녀 클라라 공동체를 생각할 때마다 이 점을 생각게 됩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이 있었기에 클라라가 성인이 된 측면도 있지만 프란치스코와 만나기 전에 클라라의 가정은 이미 거룩한 공동체였습니다.
그래서 클라라에 이어 동생 둘이 다 수녀원에 입회하였고 나중에 어머니마저 입회하였으며 자매들 모두 성인 또는 복녀가 되었지요.
공동체의 의미가 바로 이것입니다. 공동체는 더불어 사는 공동체인데 ‘더불어’라는 말이 아마 ‘더 불다’ 또는 ‘더 불어나다’의 준말일 것입니다.
작은 불씨 하나로는 꺼지기 쉽고 아무런 빛이 되지 못하지만 작은 불씨들이 하나둘 모이면 몇 년 전 광화문 촛불처럼 엄청난 불이 됩니다.
불이 불을 붙이고, 서로의 불이 꺼지지 않게 하고, 서로의 불이 활활 타오르게 하고, 하나의 불로 밝힐 수 없는 어둠을 밝힐 수 있게 합니다.
지금 하고 있는 협동조합을 통해서도 저는 이런 체험을 합니다. 저 혼자라면 열정을 유지하기도 힘들었을 것이고 타오르지도 않았을 겁니다.
그런데 저와 함께하는 분들이 있어서 저는 다행이고 행복합니다. 계속해서 새로운 분들이 어떻게든 함께하겠다고 하시고, 그만큼 이 협동조합에서 하는 좋은 일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우리의 공동체는 어떤 공동체인지 돌아보는 오늘이 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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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주님과 일치의 여정중인 우리들>
-그리스도 중심의 삶-
“주님, 당신의 정의로 저를 이끄소서.”(시편5,9ㄴ)
요즘처럼 공동의 집인 지구의 자연이 고맙고 사랑스럽게 여겨지긴 처음입니다. 하나뿐인 내 인생 아끼고 돌보듯 하나 뿐인 이웃 하나하나의 인생을, 하나뿐인 공동의 집인 지구의 자연을 아끼고 돌봐야 할 것입니다. 9월1일부터 10월4일 아시시 성 프란치스코 축일까지의 창조시기에 바치는 매끝기도후 기도문이 시작부터 참 정겹습니다.
“만물의 창조주이신 주님, 주님 사랑의 친교에서 주님 말씀이 나시어, 주님께 찬미의 노래를 부르는 생명의 교향악을 만드셨나이다.”
풀벌레 찬미 노래와 더불어 익어가는 열매들의 요즘 가을 시기에 참 적절한 기도문입니다. 때 되니 하늘에 별들을 달 듯 싼 배봉지안의 배들도 수확의 날이 가까워져 곧 하느님의 별들을 따듯 배들을 따게 될 것이고, 밤송이들도 벌써 벌어져 밤알도 떨어지고 있으며 대추 열매들도 뚜렷한 윤곽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창조주 주님의 침묵중에 묵묵히 일하시는 모습이 놀랍고 고맙습니다. 제 유일한 선의의 경쟁 대상은 이런 주님이십니다.
“밤마다
가을 풀벌레 찬미 노래 들으며
둥글게 익어가는
가을 열매 형제들
청초하게 피어나는
달맞이꽃 자매들
반갑다, 고맙다
사랑스럽다.”-2022.9.4.
어제 써놓은 ‘찬미 관상의 형제자매들’이란 시입니다. 그래서 오늘 저절로 떠오른 강론 제목은 “주님과 일치의 여정-그리스도 중심의 삶-”입니다. 참으로 그리스도 중심의 삶과 더불어 날로 주님을 닮아가는 주님과 일치의 여정을 살아가는 우리 믿는 이들입니다. 회개한 성인은 있어도 부패한 성인은 없다며 다윗과 솔로몬을 비교한 교황님 말씀을 잊지 못합니다.
부패를 방지하기 위한 부단한 회개요 이를 위한 우리의 파스카 양이신 그리스도의 중심의 삶에 더욱 박차를 가하는 것입니다. 부패인생을 발효인생으로 바꾸는 성령의 누룩, 그리스도 은총의 누룩입니다. 제1독서의 후반부 말씀이 적절한 도움이 됩니다.
“묵은 누룩을 깨끗이 치우고 새 반죽이 되십시오. 여러분은 누룩 없는 빵입니다. 우리의 빠스카 양이신 그리스도께서 희생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묵은 누룩이 아니라, 순결과 진실이라는 누룩없는 빵을 가지고 축제를 지냅시다.”
그리스도와 중심의 삶과 더불어 주님과 일치의 여정에 충실할 때 비로소 순결과 진실이라는 누룩없는 빵이 되어 이 거룩한 미사축제를 지낼 수 있습니다. 참으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회개와 더불어 부패를 막아주며 변질變質이나 변절變節됨이 없이 한결같이 순결과 진실의 누룩 없는 빵으로 살게 하십니다.
바로 이런 그리스도 예수님의 진면목이 오늘 복음에서 잘 드러납니다. 예수님은 그대로 살아 계신 하느님의 현현顯現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 하느님을 만나며 예수님을 통해 하느님과의 일치도 날로 깊어집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지식은 차고 넘쳤겠지만 주님을 통찰하는 지혜는 전무한 정말 무지한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을 고발할 구실을 찾으려고 안식일에 병을 고쳐 주시는지 지켜봅니다.
사랑이 절대적이라면, 율법은 상대적입니다. 분별의 잣대는 사랑이요, 사랑은 율법의 완성입니다. 안식일법의 잣대가 아닌 사랑의 잣대로 보면 저절로 답이 나옵니다. 예수님께서는 손이 오그라든 사람에게, “일어나 가운데에 서라.”하고 이르십니다. 흡사 이 거룩한 미사시간, 마음이 오그라든 우리를 향해 하시는 말씀 같습니다.
“일어나 가운데에서 서라.”
오늘 화두처럼 간직하고 사시기 바랍니다. 넘어지는 것이 죄가 아니라 자포자기 절망으로 일어나지 않는 것이 정말 큰 죄입니다. 넘어지면 곧장 일어나 삶의 한복판, 중심 자리에 서서 다시 주님을 바라 보며 사는 것입니다. 이어 용기있고 지혜로운 주님의 단도직입單刀直入의 질문이 이들을 침묵시킵니다. 주님의 질문 안에 이미 답이 있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묻겠다.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남을 해치는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
안실일법 잣대가 아닌 무엇이 좋고 목숨을 구하는 일인지 사랑의 잣대로 하면 답은 너무나 자명합니다. 그리스도 예수님은 안식일의 주인입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예수님 안에서, 예수님과 함께 일하시는 하느님이십니다. 과연 예수님은 어떻게 처신하셨겠는가? 가 생각하면 정답은 저절로 나옵니다.
그러니 그리스도 중심의 삶과 더불어 주님과 일치의 여정이 우리 삶의 모두임을 깨닫습니다. 날로 주님과의 일치가 깊어질 때 분별의 지혜는 더욱 빛을 발할 것입니다. 무지와 허무의 어둠에 대한 유일한 답은 파스카의 그리스도 예수님뿐임을 깨닫습니다.
“손을 뻗어라.”
주위의 무지한 이들을 둘러보시고는 손이 오그라든 장애인에게 말씀하시자 그 손이 성하게 됩니다. 그대로 이 거룩한 미사시간, 흡사 오그라든 마음의 우리를 향한 말씀처럼 들립니다. 오그라든 손을 뻗듯이 오그라든 마음을 활짝 펴라는 말씀입니다.
악의 저항은 참으로 집요합니다. 이 무지한 적대자들은 골이 잔뜩 나서 예수님을 어떻게 할까 서로 의논합니다. 무지의 악에 포로된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입니다. 주님은 이들의 반응에 개의치 않고 진리와 사랑, 생명의 길을 가십니다.
동방영성에서 얼마나 많이 강조된 무지의 악, 무지의 죄, 무지의 병인지요! 참으로 이에 대한 유일한 답은 파스카의 그리스도 예수님뿐임을 깨닫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님 중심의 삶과 더불어 날로 깊어지는 주님과 일치의 여정이 무지와 허무에 대한 유일한 해법임을 깨닫습니다. 날마다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주님과의 일치가 날로 깊어지는 우리들입니다.
“주님께 피신하는 우리들 모두 즐거워하며,
영원토록 환호하리이다.
주님 이름을 사랑하는 우리들, 주님이 감싸시니,
우리는 주님 안에서 기뻐하리이다.
하느님, 주님께서는 우리 의인에게 복주시며
사랑으로 방패 삼아 감싸 주시나이다.”(시편5,12-13).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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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그들은 골이 잔뜩 나서 예수님을 어떻게 할까 서로 의논하였다."(루카6,11)
이 의논의 결과가 바로 '십자가 죽음'입니다. 예수님과 늘 대립각을 세우면서 폭풍전야와 같은 긴장 관계를 만들어 나갔던 바리사이들이나 율법 학자들과 같은 당시 기득권자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면서 씌운 죄목은 '율법 파괴죄'와 '신성모독죄'입니다
예수님을 구세주로 메시아로 받아들이지 않았던 그들에게 예수님은 늘 눈엣가시였고, 자기들 기득권을 유지하는데 걸림돌이었습니다. 그들에게 예수님은 태풍과도 같은 존재였습니다. 그들 삶의 근본과 틀을 흔들어 놓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눈엣가시요 걸림돌인 예수님을 어떻게 없애버릴까 늘 기회를 엿보고 있었고, 그 기회의 결과가 바로 '십자가 죽음'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묻겠다.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남을 해치는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루카6,9)
우리의 구원을 위해 좋은 일을 많이 하시고, 우리의 목숨을 구하시기 위해 애쓰신 예수님을, 그들은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에이 나쁜 사람들!
혹시 나도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과 같은 나쁜 사람들은 아닌지??? 하느님의 나라 건설과 하느님 구원 사업에 적극 동참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나도 그렇게 하고 있지는 않은지??? 한 번 성찰해 봅시다!
오늘 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우리에게 권고합니다.
"묵은 누룩을 깨끗이 치우고 새 반죽이 되십시오. 여러분은 누룩 없는 빵입니다. 우리의 파스카 양이신 그리스도께서 희생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묵은 누룩, 곧 악의와 사악이라는 누룩이 아니라, 순결과 진실이라는 누룩 없는 빵을 가지고 축제를 지냅시다."(1코린5,7-8)
어제 종일 이곳 고성 배둔은 비도 바람도 없었던 폭풍전야와 같은 하루였습니다. 오늘 밤부터 내일 오후까지 큰 고비가 될 것 같습니다. 지혜를 모아 태풍에 잘 대비하도록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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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QN1MaKeMSs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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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손을 뻗어라."(루카 6, 10)
들꽃 또한
들꽃들끼리
어우러지며
하늘을 향해
꽃잎을 펼칩니다.
자연의
모든 것들은
이와같이
뻗어나가고
펼쳐나갑니다.
마주잡아야 할
손이 있지만
아프게
오그라들어 편하게
잡을 수 없는 우리의
현실입니다.
오그라들었기에
아픈 이를
일으켜 세울 수도
없습니다.
우리의 손이
서로의 손이
오그라들었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오그라든
우리의 손을 펴서
주님께로 뻗어
나가는 체험입니다.
마주잡은
주님과 함께
빛 안에서
걸어나가는 변화입니다.
마음이 따뜻해지는
하늘의 시간은
마음을 펴서
주님을 향하는
기도입니다.
닫히고 열리는
모든 것이
우리의 마음
우리의 손에서
시작됩니다.
오그라든
손을 펴서
주님께 기도하고
주님을 찬미합시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삶이란 어우러지며
펼쳐나가고
뻗어나가는
지금 여기임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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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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