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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상의구주이신예수그리스도
요한일서 4:14-21
14 아버지가 아들을 세상의 구주로 보내신 것을 우리가 보았고 또 증언하노니
15 누구든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시인하면 하나님이 그의 안에 거하시고 그도 하나님 안에 거하느니라
16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의 안에 거하시느니라
17 이로써 사랑이 우리에게 온전히 이루어진 것은 우리로 심판 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하려 함이니 주께서 그러하심과 같이 우리도 이 세상에서 그러하니라
18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19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20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
21 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나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지니라
우리가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사실 우리의 믿음은 만일 하나님의 증거가 없다면 허상이 될 것입니다. 그 이유는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은 어떠한 종류이든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인간이란 존재는 신이 아니기에 서로 의존할 수 밖에 없고 따라서 뭔가를 믿지 않고서는 이 세상을 살 수 없도록 되어 있습니다.
믿지 않고서 어떻게 차를 사며, 믿지 않고서 어떻게 음식을 사서 먹으며, 믿지 않고서 건물 속에 어떻게 들어가며, 믿지 않고서 어떻게 돈 거래를 할 수 있습니까? 분명히 사람은 반드시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과학을 믿든 이성을 믿든 자신의 감정을 믿든, 아니면 자기 자신을 믿든 뭔가를 믿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믿을 때 너무나 축복된 것은 우리의 믿음을 향하여 하나님께서 친히 증거해 주신다는 사실입니다. 더 놀라운 사실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믿음 외에는 하나님께서 신원하여 주시는 다른 믿음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어떻게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의 믿음을 신원하여 주십니까? 제가 신학을 할 때, 2학년째 되던 해 깊은 고민 속에서 길을 잃은 적이 있었습니다. 그 당시 중동 전쟁이 심한 때였는데, 이슬람 교도들이 자동차에 폭탄을 싣고 이스라엘 군대를 향해 전진하며 순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그들은 ‘알라’라고 외치며 차 안의 폭탄과 함께 터지면서 생명을 잃었습니다.
저는 그 장면을 보면서 이슬람 교도들도 그들이 믿는 바에 생명 걸고 순교하는데 우리 기독교인들의 순교와 무엇이 다른 것일까? 가톨릭 신부들도 한국에 처음 들어올 때 많은 순교자가 있었는데 개신교의 순교자와 무엇이 다를까? 자신들이 믿는 바에 대해 생명을 던지며 그들의 믿음을 증거하는데 내가 기독교 진리를 외치며 죽더라도 어떻게 그들의 믿음은 틀리고 나의 믿음은 옳다고 주장할 수 있는 것일까?
나는 성경이 하나님의 계시라고 믿지만, 이슬람은 코란을 하나님의 계시로 믿으니, 내가 성경을 하나님의 계시라고 믿는 그 믿음이 참이고 코란을 믿는 믿음은 그르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오랫동안 기도하며 고민하던 끝에 주께서 제게 답을 알려 주셨습니다. 그 대답은 두 가지로 확인할 수 있었는데, 하나는 예수님의 부활이고 다른 하나는 주께서 보내신 성령이 내 안에 계시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러면서 그때 붙든 성경 구절이 데살로니가전서 1장 5절이었습니다. 그 구절은 복음의 능력과 확신에 관한 구절이었습니다.
“이는 우리 복음이 너희에게 말로만 이른 것이 아니라 또한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임이라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를 위하여 어떤 사람이 된 것은 너희가 아는 바와 같으니라”(살전 1:5).
즉, 죄덩어리 인간을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능력과 성령의 큰 확신이 복음에 담겨 있고 그 복음을 믿는 믿음이 다른 종교의 믿음과 다르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그 후 요한일서를 통해 제가 가진 믿음은 주께서 주신 믿음으로서 그리스도 안에서 성삼위 하나님을 붙든 참되고 견고한 믿음임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
9 만일 우리가 사람들의 증언을 받을진대 하나님의 증거는 더욱 크도다 하나님의 증거는 이것이니 그의 아들에 대하여 증언하신 것이니라 /* 이는 십자가와 부활을 비롯한 주의 삶 가운데 나타난 많은 주 하나님의 기적들을 뜻합니다. */
10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자는 자기 안에 증거가 있고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나니 이는 하나님께서 그 아들에 대하여 증언하신 증거를 믿지 아니하였음이라
](요일 5:9-10)
이처럼 참된 기독교 신앙은 “하나님께서 그 아들에 대하여 역사 가운데 증언하신 증거”가 있고 나아가 믿는 신자들의 ‘내면에’ 성령으로 인한 증거가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잘 알다시피 하나님께서 세우신 사도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자신의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증언한 자들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믿음은 그들의 증언의 객관성에 서 있습니다. 이러한 부활의 증인으로는 동시에 예수님의 부활체를 본 사람이 500여명 이상이나 됩니다.
[
3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4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5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두 제자에게와
6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그 중에 지금까지 대다수는 살아 있고 어떤 사람은 잠들었으며
7 그 후에 야고보에게 보이셨으며 그 후에 모든 사도에게와
8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
9 나는 사도 중에 가장 작은 자라 나는 하나님의 교회를 박해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 받기를 감당하지 못할 자니라
](고전 15:3-9)
또한 베드로, 야고보, 요한 같은 경우는 친히 하늘로부터 나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
16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과 강림하심을 너희에게 알게 한 것이 교묘히 만든 이야기를 따른 것이 아니요 우리는 그의 크신 위엄을 친히 본 자라
17 지극히 큰 영광 중에서 이러한 소리가 그에게 나기를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실 때에 그가 하나님 아버지께 존귀와 영광을 받으셨느니라
18 이 소리는 우리가 그와 함께 거룩한 산에 있을 때에 하늘로부터 난 것을 들은 것이라
](벧후 1:16-18)
우리는 예수님의 삶과 사역 가운데 하나님이 하늘로부터 그분을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하며 인정한 사건도 알고 있고, 예수님도 자신이 친히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말씀하셨으며, 오병이어로 5천명을 먹이시는 사건, 바다 위를 걷는 사건, 죽은 자들을 살리는 사건 등을 통해 그분은 하나님의 아들이요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확인 받았습니다.
또한 주 예수께서 부활 승천하셔서 만유의 주와 그리스도가 되신 사실은 주께서 보내신 성령으로 인해 사도들이 나타낸 오직 하나님만이 행하실 수 있는 초자연적인 역사를 통해 입증되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처럼 불치의 병에 걸린 자들을 치유하였으며 놀라운 능력들을 행하였고, 심지어 죽은 자를 살리는 역사까지 나타냈습니다.
“사도의 표가 된 것은 내가 너희 가운데서 모든 참음과 표적과 기사와 능력을 행한 것이라”(고후 12:12).
“너희에게 성령을 주시고 너희 가운데서 능력을 행하시는 이의 일이 율법의 행위에서냐 혹은 듣고 믿음에서냐”(갈 3:5).
이처럼 사도들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자신들의 눈으로 직접 보고 3년간 친히 교제를 나누었으며, 아버지 하나님께서 그분의 아들을 세상에 구주로 보내신 것을 알았으며 그의 부활 및 승천까지 목격한 것입니다. 심지어 예루살렘에서 주께서 기다리라고 하신 성령을 기다리다가 역사 속에 들어오시는 성령의 임재를 보았습니다. 이에 그들은 그들이 직접 눈으로 보고 들은 것을 다 증언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역사 속에서 기독교는 가장 분명한 객관적 진리로서 무엇보다 십자가와 부활 사건은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역사적 사건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믿음은 객관적 진리에 서 있는 가장 안정하고 확실한 믿음입니다.
그리고 또 다른 증거는 내면의 증거입니다.
[
11 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
12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
](요일 5:11-12)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버림 받은 자니라”(고후 13:5).
“이는 물과 피로 임하신 이시니 곧 예수 그리스도시라 물로만 아니요 물과 피로 임하셨고 증언하는 이는 성령이시니 성령은 진리니라”(요일 5:6).
즉, 성경이 확실하게 증거하는 것은,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역사 가운데 표적과 기사와 능력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보증해 주셨고, 또한 우리 마음에 성령을 보내심으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믿음을 확증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 이후로 제 인생에서는 그리스도와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혼란스러운 적이 없었습니다. 오직 제 자신의 뿌리 깊은 죄악 됨과 어리석음이 문제였습니다.
하지만 데살로니가 1장 5절의 진술처럼 그리스도 예수님을 믿는 믿음은 놀라운 성령의 능력으로 나타납니다. 거룩함의 능력으로 나타나고 증언하는 능력으로 나타납니다. 죄를 이기는 삶의 변화로 나타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과 형제들을 사랑하는 성품으로 변화됩니다. 이런 변화를 볼 때 예수님은 영원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이 확실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본문에서 사도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증언합니다.
“아버지가 아들을 세상의 구주로 보내신 것을 우리가 보았고 또 증언하노라”(4:14).
‘구주’가 무엇입니까? 구주는 신약에서만 쓰이는 단어인데 오직 그리스도와 하나님께만 쓰이고 있습니다. 구약에서는 구원자 또는 구속자라는 단어가 하나님께 사용됩니다. 세상에서는 구세주라는 용어를 사용하기도 합니다.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눅 2:11).
사마리아 성의 주민들이 말합니다.
“그 여자에게 말하되 이제 우리가 믿는 것은 네 말로 인함이 아니니 이는 우리가 친히 듣고 그가 참으로 세상의 구주신 줄 앎이라 하였더라”(요 4:42).
베드로와 사도들이 불신하는 산헤드린 공회 앞에서 선포합니다.
[
30 너희가 나무에 달아 죽인 예수를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살리시고
31 이스라엘에게 회개함과 죄 사함을 주시려고 그를 오른손으로 높이사 임금(왕)과 구주로 삼으셨느니라
32 우리는이일에증인이요하나님이자기에게순종하는사람들에게주신성령도그러하니라
](행 5:30-32)
복음을 대항하다가 부활하신 영광의 주를 만나 변화된 바울이 선언합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대로 이 사람(이새의 아들 다윗)의 후손에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구주를 세우셨으니 곧 예수라”(행 13:23).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 됨과 같음이니 그가 바로 몸의 구주시니라”(엡 5:23).
[
10 이제는 우리 구주 그리스도 예수의 나타나심으로 말미암아 나타났으니 그는 사망을 폐하시고 복음으로써 생명과 썩지 아니할 것을 드러내신지라
11 내가 이 복음을 위하여 선포자와 사도와 교사로 세우심을 입었노라
](딤후 1:10-11)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며 사도인 시몬 베드로는 우리 하나님과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힘입어 동일하게 보배로운 믿음을 우리와 함께 받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라”(벧후 1:1).
아무튼 구주는 동사 (소조), 즉 구원하는 행위를 하는 인격체를 말합니다. 구원한다는 것은 “해를 당하지 않게 하다. 해로부터 구출하다. 고통과 고난에서 구출하다. 괴로움과 박해에서 구출하다. 안전한 곳에 두다. 병에서 낫다. 건강을 되찾다. 죄로부터 구출 받다. 구원을 얻다. 영벌과 영원한 죽음에서 벗어나다”라는 뜻입니다. 성경에서 구원이라는 개념은 죄와 세상과 사탄과 죄의 저주와 형벌로부터 벗어나서 의와 주 하나님과 복락과 영광 및 영원한 천국과 상급을 얻는 자리로 나아오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15절처럼, 만일 누구든지 “나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습니다”라고 마음으로부터 고백하면, 하나님은 그 사람 안에 거하시고 그는 하나님 안에 이미 거하는 것입니다. 그 사람은 구주 예수님으로 인하여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흑암의 권세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나라로 옮겨진 것입니다. 죄와 세상과 마귀의 권세에게 벗어나 자유인이 된 것입니다.
너무나 엄청난 사실은 사도 요한은 신자들이 이렇게 예수님을 결국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할 수 있는 이유는, 그들에게 하나님이 사랑이 임한 것임을 말합니다. 이는 그들은 하나님께서 영원 전부터 사랑하신 사랑의 대상이기에 하나님의 사랑이 그들에게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서 임하게 된 것입니다.
이에 사도 요한은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의 안에 거하시느니라”(요일 4:16)고 선포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를 무한히 사랑하셔서 우리 마음 속에 성령으로 오신 사랑의 하나님을 의지하며 감사하기 바랍니다. 또한 그리스도로 이 땅에서 오셔서 삶의 본을 보여주신 예수님을 따라 성령으로 살아가기 바랍니다. 그러할 때 복음의 세계가 우리에게 체험되면서 복음의 능력이 우리에게 나타나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 능력은 거룩함과 사랑의 능력입니다. 그렇습니다. 거룩한 사랑은 복음이 담고 있는 최고의 능력인 것입니다.
이제 17-18절을 보겠습니다.
“이로써 사랑이 우리에게 온전히 이루어진 것은 우리로 심판 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하려 함이니 주께서 그러하심과 같이 우리도 이 세상에서 그러하니라.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요일 4:17-18).
17-18절은 심판 날에 대하여 언급합니다. 이 시대에 현대인들이 가장 듣기 싫어하는 단어는 “죽음”, “지옥”, 그리고 “심판”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싫어하는 단어라 해도 모든 사람은 죽음을 당하며 반드시 하나님 앞에서 심판을 받게 된 것입니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라”(히 9:27).
최종 심판의 날은 예수님의 재림의 때입니다. 이때는 믿는 자든 믿지 않던 자든 다 부활하여 그리스도 앞에서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한편, 주의 심판의 성격을 보면, 각 개인이 행한 대로 심판을 받습니다.
[
31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32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구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구분하는 것 같이 하여
33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
34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으라
35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36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40 …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41 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원한 불에 들어가라
42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지 아니하였고
43 나그네되었을때에영접하지아니하였고헐벗었을때에옷입히지아니하였고병들었을때와옥에갇혔을때에돌보지아니하였느니라…
45 …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하시리니
46 그들은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하시니라
](마 25:31-36, 40-43, 45-46)
또한 요한 계시록 20장 11-15절을 보면 심판에 대한 묘사가 있습니다.
[
11 또 내가 크고 흰 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이를 보니 땅과 하늘이 그 앞에서 피하여 간 데 없더라
12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큰 자나 작은 자나 그 보좌 앞에 서 있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
13 바다가 그 가운데에서 죽은 자들을 내주고 또 사망과 음부도 그 가운데에서 죽은 자들을 내주매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
14 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져지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못이라
15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져지더라
](계 20:11-13, 15)
이 내용을 보면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다 불못에 던져집니다.
“무엇이든지 속된 것이나 가증한 일 또는 거짓말하는 자는 결코 그리로 들어가지 못하되 오직 어린 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만 들어가리라”(계 21:27).
하지만 사도 요한은 말합니다. 너희가 그리스도 안에 있고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그 사랑을 행한다면 심판과 형벌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고 말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기에 그날이 오더라도, 죽음이 오더라도 두려움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랑이 어떠한 줄 알기 때문입니다. 이에 우리가 사랑 안에 있으면 두려움이 사라지고 아가페의 온전한 하나님의 사랑을 알 때 우리는 더욱 담대하여집니다. 이는 두려움이란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형벌에 대한 두려움이기 때문입니다.
[
31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32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33 누가 능히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34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35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
38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39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롬 8:31-35, 38-39)
한편, 신자들도 그리스도의 심판을 받게 됩니다. 그런데 이 심판은 지옥과 천국 심판이 아니라 그들이 행한 대로 천국에서 상급과 면류관과 영광이 영원히 결정 나는 심판입니다.
[
9 그런즉 우리는 몸으로 있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되기를 힘쓰노라
10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게 되어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
](고후 5:9-10)
[
7 그런즉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뿐이니라
8 심는 이와 물 주는 이는 한가지이나 각각 자기가 일한 대로 자기의 상을 받으리라 …
11 이 닦아 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
12 만일 누구든지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이 터 위에 세우면
13 각 사람의 공적이 나타날 터인데 그 날이 공적을 밝히리니 이는 불로 나타내고 그 불이 각 사람의 공적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임이라
14 만일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운 공적이 그대로 있으면 상을 받고
15 누구든지 그 공적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 그러나 자신은 구원을 받되 불 가운데서 받은 것 같으리라
](고전 3:7-15)
이처럼 우리 주 예수님께는 우리에게 주실 상이 있으며, 이 땅에서 성도들이 행한 대로, 또한 그리스도를 닮은 만큼 비례하여, 상급과 영광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땅에 사는 동안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아는 우리는 우리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지옥 및 형벌 심판에서 벗어난 것을 알기에 두려움은 없으나, 그럼에도 우리가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어야 하는 이유는 그리스도를 얼굴과 얼굴로 대면하여 볼 때 우리의 삶을 평가 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때 우리가 이 세상을 사는 동안 예수님을 많이 닮아 있다면 주님을 만나 뵙고 주의 평가를 받는 그 날은 기대와 기쁨의 날이 될지언정 부끄러움의 날이 될 수 없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우리 주 예수님을 두려움과 부끄러움과 아쉬움이 없이 가장 반갑고 자신 있게 만날 수 있습니까?
그래서 사도 요한은 이미 요한일서 2장에서 말하였습니다.
[
28 자녀들아 이제 그의 안에 거하라 이는 주께서 나타내신 바 되면 그가 강림하실 때에 우리로 담대함을 얻어 그 앞에서 부끄럽지 않게 하려 함이라
29 너희가 그가 의로우신 줄을 알면 의를 행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줄을 알리라
](요일 2:18-29)
사랑하는 여러분!
그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의지하는 자는 두려울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 두려움이 엄습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사랑을 믿지 못하고 의심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주님 만나는 그날에 더욱 떳떳하고 자랑스럽기 위하여 우리는 주의 사랑에 거하며 의를 행하기를 힘써야 할 것입니다.
이제 본문의 마지막 단락을 보겠습니다. 19절부터 21절입니다.
[
19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20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
21 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나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지니라
](요일 4:19-21)
19절을 보면, 우리가 사랑함은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였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지금까지 요한은 약 스물 여덟 번에 걸쳐 서로 사랑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계명이 얼마나 중요하기에 이렇게 지치지 않고 사랑을 말하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바로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즉, 주의 자녀들은 사랑이신 하나님을 닮아야 하니 서로 사랑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꾸로 말하면, 우리의 가장 큰 죄성은 사랑을 하지 않는 이기심과 미움이기 때문에 그토록 우리 주님과 사도는 사랑하라고 외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이기심과 교만을 십자가에 못 박고 온 힘을 다해 사랑하기에 힘써야 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랑은 마음이며, 인격이며, 행위입니다. 특히 같은 믿음을 가진 형제들을 향하여 우리의 사랑은 맘껏 그 본질을 드러냅니다. 같은 믿음을 가진 형제를 향하여 우리의 마음이 사랑으로 동하면 형제를 향하여 선한 사랑의 행위를 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요한은 20절에서 말하길,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거짓말이라.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치 못하는 자는 보이지 않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고 한 것입니다.
요한의 논리에 의하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보다 형제 사랑이 더 쉽습니다. 사실 인간은 인간을 사랑하기가 더 쉽습니다. 반면 하나님을 사랑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심하게 착각하기를, 사람을 사랑하기는 어렵지만 하나님을 사랑하기는 쉽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착각은 자기 감상을 사랑으로 오인하기 때문에 생겨납니다.
잘 생각해 보기 바랍니다. 우리가 사람 사랑하길 좋아하는가 아니면 하나님 사랑하길 좋아하는가?
자, 기도를 예를 듭시다. 하나님과 대화를 나누는 것이 더 좋습니까? 아니면 사람들과 대화 나누는 것이 더 좋습니까? 친한 사람들과 한 시간 전화하는 것은 쉽습니다. 친구를 만나 서너 시간 대화를 나누는 것은 너무 쉽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과의 대화 시간인 기도는 어떠합니까? 한 시간 기도합니까? 아니 더 기도하고 싶어서 서너 시간 기도합니까? 어떤 것이 우리에게 더 자연스럽습니까?
우리는 세상 사람들의 소식을 알고 싶어서 다양한 뉴스를 읽고 책을 읽으며 얼마든지 무료하지 않게 시간을 보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알려주는 성경은 어떠합니까? 서너 시간 읽으면서 계속 지치지 않고 성경을 볼 수 있습니까?
사실 우리가 신앙이 있더라도 하나님이 원하시는 데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우리 죄인들에게 쉽지 않습니다. 눈에 보이는 형제마저 사랑하지 못하면서 어떻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습니까? 따라서 형제를 사랑치 않으면서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 그가 믿는 하나님은 살아계신 우리 하나님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 만든 우상일 가능성이 높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복음의 형제를 미워한다면 이는 거짓말쟁이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할 수 있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그리스도 안에서 맛보아야 가능합니다. 즉, 복음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성령으로 누려야 하나님의 사랑을 알 수 있고 그 후에야 비로서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요일 4:19).
그러므로 하나님을 사랑하려면 기도와 말씀을 방편으로 성령으로 충만해져야 가능합니다. 이때 사도 요한은 구체적인 제안을 하는데 그것은 바로 보이는 형제를 작은 일에서부터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성도를 작은 일부터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나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지니라”(요일 4:21).
사실 목회자처럼 하나님의 사랑을 행할 기회가 주어지는 소명은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목회를 성경대로 하면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표현으로 주의 양 떼를 사랑할 것이기에 하나님의 영광을 크게 높이며 주의 나라를 확장시키는데 귀하게 쓰이게 되는 것입니다. 즉, 목회는 결국 복음의 능력으로 하나님과 사람에게 사랑을 행하면서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코디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교회를 통해 코디들에게 소드원들을 사랑할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이는 소드원들을 사랑함이 곧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코디들, 운영위원들, 사역자들은 참으로 그리스도께 감사하며 주를 사랑하고픈 마음을 형제들에게, 교회의 지체들에게, 소드원들에게 나타내기 바랍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주를 사랑한다는 것은 말뿐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성도가 믿음과 소망 가운데 궁극적으로 이루어야 하는 것은 사랑입니다. 사랑은 믿음의 결과이며 목적입니다. 사랑은 소망의 성취입니다. 그러므로 형제를 사랑함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을 배우는 것이 신앙 생활입니다.
이에 성경은 하나님 사랑과 형제 사랑은 동전의 양면과 같다고 말합니다.
[
37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38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39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40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마 22:37-40)
우리는 자신에게 속아서는 안 됩니다. 교회 내에서 성도를 사랑할 수 없으면서 나는 지금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다고 착각하지 않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삶의 의욕은 마땅히 할 일이 없어서가 아니라 남을 위하여 사는 사랑의 마음이 없을 때 사라집니다. 이 말을 반대로 말하면, 그 어떠한 상황에서도 사랑의 대상이 생기면 삶의 의욕이 생긴다는 말씀입니다.
인생이란 사랑의 대상이 생긴 그 순간부터 풍성한 삶이 됩니다. 사랑은 남을 위해서 사는 것이며 그러한 삶을 하나님은 친히 사람이 되셔서 보여주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이 땅에서의 삶이고 무엇보다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 자기 생명과 보혈을 다 쏟으신 삶입니다. 이에 그리스도의 삶은 하나님의 사랑으로서 우리의 삶을 풍성하고 축복되고 보람되게 만든 것입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이런 사랑의 희생이 우리 하나님께도 가장 큰 기쁨과 만족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인간들에게 이러한 사랑의 마음이 없다면 이 세상을 다 소유한 사람이라도 그의 삶은 죽은 삶이요 허망한 삶이요 지긋지긋한 삶이 되는 것입니다. 사랑할 대상이 없는 삶, 사랑을 잃어 버린 삶처럼 비참한 삶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래서 삶의 의욕을 잃는 것입니다.
20년 동안이나 식물인간으로 보낸 소녀가 있었습니다.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소녀는 삶의 의욕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이 소녀가 10살 때, 친구에게 엽서를 보냈는데 그 친구가 답장을 보내게 되면서였습니다. 그 친구의 답장에, “네가 보낸 엽서로 인하여 나는 삶의 의미를 찾았단다”라는 감사의 답장이었습니다.
그 이후로 이 소녀는 장장 20년 동안 엽서를 쓰게 됩니다. 자기가 아는 사람에게도 엽서를 쓰고 모르는 사람에게도 연결만 되면 엽서를 썼습니다. 사랑의 엽서를 썼습니다. 답장이 점점 많아지고 이 소녀의 엽서로 삶의 의미와 희망을 찾는 사람이 많아졌습니다. 그래서 이 소녀는 할 일이 무궁무진하게 많아졌습니다.
결국 이 소녀는 유명해졌고 그녀를 찾아오는 사람이 끝도 없이 많았습니다. 그녀는 식물인간이었지만 삶의 의욕이 대단했습니다. 그녀의 장래식에는 눈물을 흘리며 구름 떼같이 달려온 손님들이 끝이 없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세상은 참 신기합니다. 우리 주변에는 언제나 사랑이 필요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을 나타내는 것은 진정 우리 주변의 모든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이고, 가장 큰 사랑의 선물은 그리스도 예수를 알려주는 복음과, 복음 안에서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까지 자라나도록 하는 복음의 비결을 전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와 함께 이 땅에서 필요한 것들을 전달하는 것 역시 사랑의 표현입니다. 그러나 궁극적인 사랑인 그리스도를 전하지 못한다면 그 어떤 선한 행위도 궁극적인 보람과 사랑으로 이어질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그분의 최고의 선물과 사랑인 그리스도를 받았으니 우리 역시 온 세상을 향해 그리스도를 선물로 나누어주어야 합니다. 그런 사랑이 우리의 인생 가운데 가장 가치 있고 의미 있는 일이랍니다. 그러므로 오늘도 그리스도의 사랑을 심기 위하여 전화 한 통의 사랑을 베풀 것이요, 위로의 이멜을 보낼 것이며, 그리스도의 사랑을 듬뿍 담은 멋진 선물과 카드를 보내기 바랍니다. 왜요? 그리스도의 사랑을 온전히 이루기 위하여 작은 사랑이라도 실천하기 위함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을 몸소 실천하는 복음적인 교회가 되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Copyright@스데반 황 목사, 그리스도의 보혈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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