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에라폴리스의 주교 파피아스
2세기 히에라폴리스의 주교 중, 파피아스가 살았다.
히에라폴리스는 거룩한 도시라는 뜻이며,
오늘날 터키의 한 산중에 위치하며, 작은 계곡 도시다.
기원전에는 키벨레 숭배가 있던 지역이나, 2세기 경에는 이미 교회들이 세워질 정도였다.
여러 여행객이 이곳을 지나다녔으며,
당시 이곳의 주교로 일찌감치 자리잡은 '파피아스'는 여행객들 중,
예루살렘이나 갈릴리에 살았던 사람들 중,
예수에 대해 들은 것이 있는 사람들 예수의 목격자들,
심지어 예수의 제자가 혹여나 지나가면 붙잡고
예수와 그의 공동체에 대해서 직접 물어보았다고 전해진다.
그가 쓴 책 중, 5권짜리로 이루어진
<주의 어록 해설, Expositions of the Sayings of the Lord>이 있다고 한다.
비록 그 책의 사본이 없지만,
여러 교부들의 인용을 통해서 그 책의 내용의 일부를 확인할 수 있다.
저 책에서 스스로를 인터뷰를 열심히 한 사람으로서 알리는 파피아스는,
바로 그 때문에 여러 교부들에게 인용이 되었기에,
그러한 인용들을 통해 우리는 파피아스에게 접근할 수 있다.
파피아스는 아마도 생물년도는 대략 60년에서 160년 사이로 여겨지지만, 정확하지 않다. 아마 그가 쓴 책은 약 100여년 정도에 쓰였을 것이며,
그렇다면 거의 요한복음의 기록 시기와도 비슷하다고 할 수 있으며,
예수의 제자는 믿기 힘들더라도, 예수의 목격자들이나,
예수의 제자의 목격자들 정도는 만났을 가능성은 분명히 존재한다.
우리는 파피아스를 인용하는 교부들을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2세기의 이레나이오스
4세기의 유세비우스
4세기의 아폴리나리오스
그 이후에도 몇몇 그를 인용하는 자들이 있지만,
'파피아스의 증언'을 다루기 위해 4세기까지만 국한해보자.
아래는 저 세 명의 교부들이 파피아스를 다루는 대목들이다.
첫 번째 이레나이오스가 자신의 책 <그노시스파 논박>(혹은 <이단 논박>)에서
파피아스는 '주의 어록'을 수집했는데, 그 내용이 다음과 같다.
이레나이오스가 파피아스로부터 취한 증언에 의하면,
주님의 제자인 요한을 '본' 장로들은
요한이 예수께서 다음과 같은 내용을 가르쳤다고 회상했다.
"포도나무가 자라서 각각 만 가지를, 모든 또 그 가지에서 작은 만 개의 가지가,
그리고 각 가지마다 만 개의 잎사귀가 있고,
모든 잎사귀마다 만 개의 포도송이가,
그리고 각 포도송이마다 만 개의 포도 알이 있고,
각각 포도 알갱이마다 스물 다섯 통의 포도주를 낼 것이다.
성도들 중 누군가 한 사람이 한 포도 한 송이를 따면,
다른 포도 한 송이가 말하기를, '내가 더 나으니 나를 취하라,
나를 통해 주를 높이라'고 할 것이다.
이와 동일하게, 각 밀 이삭은 만 개의 알갱이를 내며,
한 알갱이가 오킬로의 고운 밀가루를 만들어 낼 것이요,
나머지 다른 열매들과 씨와 풀도 그와 같이 풍성할 것이다.
이 음식들을 원하는 모든 피조물은 땅에서 그것들을 받을 것이요
서로 기뻐하고 연합하며 사람들에게 복종하고 또 온전히 순종할 것이다."
이레나이오스는 파피아스가 이 말을 증언으로 듣고 기록했다고 한다.
파피아스의 말이 사실일까?
만약 파피아스의 말이 사실이라면, 우리는 신약에 전혀 등장하지 않는
'주의 어록'을 하나 갖게 되는 셈이다.
하지만 사실 우리는 이 내용을 2세기 경의 <시리아어 바룩의 묵시록>에서 찾을 수 있다.
시리아 바룩의 묵시록 29장 5절은 다음과 같다.
"땅이 만 배의 열매를 낼 것이요, 모든 포도나무는 천 개의 가지를 갖고서,
각 가지는 천 송이를 낼 것이요,
각 송이는 천 개의 알을 가질 것이요, 각 알갱이마다 포도주 한 통을 내리라."
다른 한편으로, 유세비우스로 넘어가보자.
유세비우스는 <연대기>, <교회사>, <콘스탄티누스의 생애> 등으로 유명하다.
그는 자신의 <연대기>에서 이레나이오스가 앞서
파피아스와 그의 작품을 언급한 것을 알고 있음을 고지한다.
그리고 유세비우스는 파피아스의 책을 갖고 있었던 것 같으며,
최소한 그 내용을 <교회사>에서 요약해준다.
유세비우스에 의하면, 베드로, 야고보, 마태, 장로 요한, 아리스티온 등을 열거한다.
아리스티온은 신약에는 없지만, '장로 요한'이라는 자와 나란히 주의 제자들로 언급된다.
장로 요한과 아리스티온이 중요한 이유는
파피아스는 '주의 제자들'로 자처하는 장로 요한과 아리스티온에게
'직접' 말을 들었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한편, 그뿐이 아니다. 복음서와 사도행전에 나타나는 사도 빌립이 자신이 사는
'히에라폴리스'에 딸들과 함께 거주했으며,
파피아스 자신이 자신의 동료들과 더불어
'빌립의 딸들'로부터 직접 놀라운 일들을 들었다고 이야기해주었다고 주장한다.
그런 파피아스의 증언들을 토대로 주로 변증가들이나 보컴과 같은 자들에게서
인용되는 내용은, 마가가 베드로의 통역자였으며,
페트로가 전해주는 내용을 자의적으로 쓰고, 부주의한 기억상 등의 실수도 저질렀지만,
충실하게 아마도 예수에 관하여 썼으며, 마태는 히브리어로 복음서를 썼다는 것 등이다.
그런데, 이 이야기를 하기 전, 유세비우스는 파피아스가 기록되지도 않은 전승,
구세주(즉 예수)의 낯선 비유들과 가르침들, 심지어는 신화적인 내용들도 전하며
이상한 걸 가르친다며, '사도적 가르침들'을 오해했을 뿐만 아니라,
하는 내용을 들어보면 '이해력이 딸리는 사람'으로 보인다며 그를 신랄하게 비난한다.
끝으로 아폴리나리오스가 보존하는 '파피아스의 증언'을 살펴보자.
우리는 유다의 죽음에 관한 두 가지 증언을 신약에서 갖고 있다.
마태복음과 사도행전이다. 하나는 목매어 죽었다고 하며,
다른 하나는 사고로 넘어져서 내장이 터져 죽었다고 한다.
아폴리나리오스는 이 둘을 결합한다. 유다는 목을 맸으나,
산 상태에서 질식하기도 전에 목이 잘려버렸다. 머리는 굴러떨어졌고, 내장이 뿜어졌다.
자신은 '파피아스'의 책 제 4권에서 더욱 분명하게 설명되어 있다고 한다.
파피아스가 요한에게 들은 바, 그렇게 잘려진 머리와 몸뚱아리가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다. 눈꺼풀을 들여다 볼 수 없을 정도로 커졌다.
얼마나 커졌는지, 수레가 그곳을 지나갈 수 없을 정도였다. 그리고 그의 몸뚱아리 중에서도 성기도 흉측하게 훼손된 채로 부풀어 올랐고, 온 몸에서 벌레가 흘러 나왔다.
악취가 심하며, '지금까지도'(파피아스 시대를 감안하면 100년 정도) 여전히 그러하다고 한다.
이것이 아폴리나리오스가 전하는 파피아스의 증언이다.
나는 초기 출처에 국한하여 파피아스의 증언 세 가지를 정리해서 전달했다.
다음의 책에서 나머지 파피아스의 글들을 찾아볼 수 있다.
(예를 들면, 보수적인 학자 Monte A. Shanks: Papias and the New Testament에서는
약 스물 일곱 이상의 파피아스 인용 단락을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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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코 복음서 이야기 저자
마르코 복음서를 하나의 이야기로 읽어보기에 앞서 입문 형식으로 몇 가지 내용을 다루고자 합니다. 오늘은 그 첫 번째 시간으로 복음서의 저자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신약 성경 두 번째 책은 “마르코 복음서”, 정식 이름으로는 “마르코에 의한 복음서”(εὐαγγέλιον κατὰ Μαρκον)라고 불립니다.
이 명칭은 2세기에 교회가 그리스도교의 경전을 확정해야 하는 상황에서 붙여졌습니다.
복음서의 저자를 ‘마르코’라고 기록하게 된 결정적인 증언을 한 분은
히에라폴리스의 주교 파피아스(Papias, 60-130)였습니다.
“마르코는 페트로의 통역자가 되었고,
그가 기억한 주님의 말씀과 하신 일을 정확하게 기록하였다.
사실 그는 순서대로 적지 못했는데, 그가 주님의 말씀을 직접 듣지도 못했고
주님을 따르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중에, 내가 말한 것처럼 페트로를 따랐다.
페트로가 주님의 계시를 차례대로 만들지 않았지만,
마르코는 기억한 대로 요점을 적어가는 데 잘못한 것이 없었다”(에우세비우스, 『교회사』 3권 39). 교회는 전통적으로 파피아스 주교가 언급하는 마르코를 페트드로가 ‘아들’로 여겼고(페트로 알파 5,13), 파올로의 동반자였던 예루살렘의 유다계
크리스토인인 요한 마르코(행 12,12.25; 13,5.13; 15,37-39)로 이해하였다.
하지만 현대 성경학자들은 이러한 견해에 의문을 제기합니다.
그 이유는 페트로와 파올로와 친밀했던 요한 마르코가 집필했다고 보기에는
두 사도가 직접 증언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내용들이
다른 복음서들보다도 적게 나오기 때문입니다.
또한 마르코라는 이름은 헬라(그리스) 로마 시대에 아주 흔한 남자의 이름이었다.
오늘날 학계는 외부의 증언을 수집하기보다는
마르코 복음서 자체로부터 저자에 관한 정보찾기를 선호합니다.
마르코는 아람어나 히브리어가 등장할 경우
예외 없이 헬라(그리스어)로 번역한다(3,17: 5,41 등).
이로 미루어 볼 때 마르코 복음서 저자는 헬라어를 잘 구사하며
히브리어와 아람어를 헬라(그리스어)로 번역할 능력을 지녔던
유다계 출신으로 여겨진다.
또한 외국인에게는 생소할 법한 유다 풍습을 친절하게 설명하며(7,3-4; 14,12; 15,42)
외국인의 믿음을 표현하는 데에 특별한 관심(7,28; 15,39)이 있는 것으로 보아
팔레스티나를 떠나 해외에 살아가는 유다인 공동체 출신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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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코라고 하는 요한’(사도 12,12. 25)과 동일 인물로 요한은 유다식 이름이고,
마르코는 헬라식 이름이다.
그리고 사도들과 초대 교회 크리스토인들이 모여 집회를 가졌던
예루살렘 가정 교회의 집주인 마리아(Maria)가 그의 어머니다.
그는 또한 사도 성 바르나바의 사촌이며(콜로 4,10),
키프로스(Cyprus) 태생의 레위 사람이었다.
그는 예수가 체포되실 때 몸에 고운 삼베만을 두른 젊은이가 예수님을 따라가다가
붙들리게 되자, 삼베를 버리고 알몸으로 달아났던 인물이다(마르코14,51-52)
그는 사도 파울로(Paulus, 6월 29일)와 바르나바를 수행하여
안티오키아(Antiochia)로 갔고,
그다음에 바르나바와 함께 키프로스로 가서
그와 같이 성 바오로의 제1차 선교여행을 수행하였다(행 13,5).
그러나 팜필리아에서 파울로를 떠나 예루살렘으로 돌아왔다(행 13,13).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나 어쨌든 파울로와의 의견 대립 때문에
파울로의 제2차 선교여행에는 동행하지 않았다(행 15,36-40).
그 후 마르코는 바르나바와 함께 키프로스로 갔으나(행 15,39),
파울로로가 로마에서 감옥에 갇혔을 때는 그와 함께 갇혀 있었다(콜로 4,10).
그는 분명 사도 페트로의 제자였는데,
페트로는 그를 애정 깊게 ‘나의 제자(아들) 마르코’라고 언급하였다(페트로 알파 5,13).
또한 그는 신약성경에 여러 번 언급된 예루살렘 출신의
요한 마르코임이 분명하다(행 12,25).
교회 전승에 따르면 그는 사도 페트로에게 세례를 받고 크리스토인이 되었다.
그래서 사도행전에 보면 사도 페트로가 감옥에 갇혔다가 천사의 도움으로
기적적으로 풀려났을 때
“마르코라고 하는 요한의 어머니 마리아의 집으로 갔다”(행12,12)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만큼 마르코는 사도 페트로와 가까운 관계였다.
초대 교회 전승은
마르코가 사도 페트로의 대변인이자 통역관 역할을 한 것으로 보고 있다.
어쨌든 성 마르코는 60~70년 사이에 외국인 출신 크리스토인들을 위해
처음으로 예수 크리스토에 관한 복음서를 기술했는데
주로 사도 페트로의 가르침을 기초로 했다.
소아시아 지방 히에라폴리스의 파피아스주교는
마르코가 사도 페트로의 통역자로서
직접 예수의 말씀을 듣거나 따라다니지는 않았지만
자신이 전해 들은 내용을 정확하게 기록했다고 전해주었다.
그 외에도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Clemens, 150-215년)나
리옹의 이레네우스(Irenaeus)도 마르코를 사도 페트로의 통역관으로
페트로의 순교 이후 복음서를 썼다고 전하고 있다.
클레멘스의 증언이나 교회 전승에 의하면,
마르코는 페트로에 의해 이집트로 파견되어
그곳에 처음으로 복음을 전한 사람으로 알렉산드리아(Alexandria)에 교회를 세우고
초대 주교가 되었다고 한다.
그는 신자들과 함께 부활절 미사를 드리던 중
이교도들의 습격을 받아 붙잡혀
밧줄에 목이 묶인 채 거리를 끌려다니다가 순교했다고 전해진다.
이교도들이 마르코의 시신을 불태우려 하자 천둥과 번개가 쳤고,
그 틈에 신자들이 그의 시신을 수습해 인근 성당에 모셨다고 한다.
그 후 마르코의 유해는 828년 이탈리아 베네치아 상인들에 의해
알렉산드리아에서 베네치아(Venezia)로 옮겨졌다.
이를 기념해 베네치아 사람들은
성인의 이름을 딴 산마르코 대성당(Basilica di San Marco)을 짓고
그곳에 성인의 유해를 모셨다.
그 후 마르코 복음사가는 베네치아의 수호성인으로서 공경을 받고 있다.
그의 상징으로 날개 달린 사자가 주로 등장하는데,
이는 그의 복음서가 세례자 요한(Joannes)이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로 시작하자
예술적으로 그 소리를 포효하는 사자와 비교하면서 생겨났다.
날개는 에제키엘(Ezechiel) 예언자가 환시로 본
네 마리 생물을 복음사가들에 적용한 데서 유래하였다.
그 외에도 교회 미술에서 그는 책 또는 두루마리나 긴 펜을 들고 있는 모습으로
많이 표현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