헝가리 11 - 옛 수도 에스테레곰에 도착해서는 대성당을 찾아 구경하다!
2022년 5월 7일 부다페스트 뉴가티역 Budapest-Nyugati 에서 기차를 타고는 나기마로스 비셰그라드역
Nagymaros- Visegrad/Visegrád 에 도착해 배로 도나우강을 건너 비셰그라도 호텔 Hotel Visegrád
에 체크인후 옛 헝가리의 수도로 가톨릭의 성지라고 부르는 에스테레곰 에 가기 위해 880번 버스를 탑니다.
요금은 560포린트로 버스는 오른쪽에 도나우강 을 끼고 달려서 40분 만에 에스테레곰 Esztergom 에 도착해
대성당 으로 향하는 언덕길을 걸어 올라가노라니 오늘이 토요일인 탓에 마침 사이클링 대회가 있나 봅니다.
사이클링 대회 는 주로 청소년들이 참가하니 그 부모들이 응원차 나온 광경을 보는데...
마침 지금이 출발 시간인지 수백대의 자전거가 달려 내려가는 모습을 구경합니다.
대성당으로 들어가서 구경을 하는데 대성당 Szent Adalbert Foszekessegyhaz 은 오스만투르크
에 의해 파괴된 건물을 1869년에 신고전주의 양식으로 재건했으며..... 바티칸의
성베드로 성당을 모델 로 동부 유럽에서는 첫째이고 유럽 전체에서 3번째 가는 규모를 자랑합니다.
중앙 돔은 높이 122미터로 22개의 코린트식 기둥 이 떠받치며 그레고레티의 ‘승모승천’ 은 세계
최대의 크기이고..... 성당 봉한식은 프란츠 리스트 가 작곡한 미사곡이 연주됐다고 합니다.
바코치 예배당 Bakocz Kapolna 은 16세기에 건설됐으며 붉은 대리석 벽이 아름다운데 오스만투르크와 전투때
떼어낸 1,600개의 돌조각을 성당 재건과정에서 다시 붙였으며 헝가리의 유일한 르네상스 양식 이라고 합니다.
서기 1000년에 신성 로마 황제 오토 3세의 동의 아래 이슈트반 1세 가 로마 교황인 실베스테르 2세로
부터 대성당에서 대관식을 거치면서 헝가리왕 이 되었고 역대 아르파드 왕조의 왕들은 이 도시를
거점으로 삼았으며 대성당은 오스만 제국의 습격으로 한 번 파괴되었지만 19세기에 재건되었습니다.
1354년 이슬람 오스만 투르크가 바다를 건너 유럽을 침공해 아드리어노폴리스를 점령하고 1385년에
소피아, 1386년엔 니시를 함락시키자 1389년 세르비아 왕 라자르가 이끄는 세르비아, 불가리아,
왈라키아, 알바니아, 보스니아 연합군은 무라드가 이끄는 오스만 투르크군 이 격돌하니 코소보
전투 인데..... 투르크군이 대승을 거두고는 불가리아를 점령한후 1395년에는 헝가리를 공격해 옵니다.
훗날 신성 로마제국 황제 가 되는 헝가리왕 지기스문트가 십자군 을 이끌게 되는데...
헝가리, 베네치아, 신성로마제국, 프랑스, 왈라키아, 폴란드,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스위스, 튜튼 기사단, 제노바, 성 요한 기사단 등 12나라가 참가했지만
12개국 십자군 은 1396년 니코폴리스 전투 에서 오스만 투르크군에게 무릎을 꿇게 됩니다.
1453년에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점령해 동로마제국을 멸망 시킨 오스만 투르크 제국이 그리스와
불가리아, 세르비아와 크로아티아 등지로 세력을 확대할 때..... 헝가리 에서도 명군이
등장했으니..... 1458년 부터 1490년 까지 재위한 마차시 1세 로 헝가리의 왕통이
단절되자 유능한 지휘관이었던 후녀디 야노시의 아들이라는 이유로 왕관을 쓰게 된 인물입니다.
마차시는 나폴리왕국 공주를 왕비로 맞이하니 이탈리아를 제외하면 최초로 르네상스 문화 를 수용한 군주
가 되었으며, 검은 군대(Fekete sereg) 라 불리는 상비 용병대를 창설하는 한편 베오그라드를 비롯해
오스만 제국과 국경을 접한 헝가리 남부의 요새 들을 보강하는 등 오스만 제국 에 맞서 국방을 강화했습니다.
문화 부흥과 국방력 강화를 위해 국왕의 권한을 제도적으로 강화하더니 전제군주로 군림했으니, 헝가리는
전통적으로 지방 귀족들의 힘이 강력하고 왕권은 강하지 못했는데, 유독 마차시 1세는 왕권을
강화해 전제군주 가 되었고, 면세권을 비롯해 귀족들이 누려오던 특권 들을 모조리 폐지하기에 이르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귀족들은 '왕이 언제 죽나' 라고 벼르던중 마차시 1세가 적자를 남기지 못하고 서자
한명만을 남긴채 세상을 떠나니, 귀족들은 얼마전까지 전쟁중이던 보헤미아 왕 블라디슬라프
를 '울라슬로 2세' 로 옹립했는데..... 블라디슬라프는 마차시 1세의 전 왕인 라슬로 5세의
외조카이자 전전왕인 울라슬로 1세의 친조카였으며, 이웃나라 폴란드 왕국의 왕자 이기도 했습니다.
울라슬로 2세 는 무능한 왕으로 폴란드 국왕 카지미에시 4세의 장남에다가 보헤미아 왕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폴란드 왕위 계승권은 동생인 얀 1세에게 뺏겼고, 예스맨 이었던 그는 귀족들의
인심을 사기 위해 헝가리 왕령으로 되어 있던 토지들을 나누어주는가 하면 귀족들이
서류를 들고오면 무조건 서명 해 주니.... 헝가리는 전제 군주국에서 귀족들의 사유지로 전락 합니다.
울라슬로 2세는 51세의 늦은 나이에야 아들 '러요시 2세' 를 낳았기 때문에, 1516년에 왕위를
이었을때는 러요시 2세의 나이는 11세 에 불과했는데, 러요시 2세는 신성 로마제국 황제
이자 오스트리아 대공 막시밀리안 1세의 양자 가 되는가 하면, 그의 손녀 마리아와 결혼합니다.
누나인 안나는 막시밀리안 1세의 둘째 손자인 페르디난트와 결혼하는 등,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가의 영향 아래 들어갔는데, 1526년 8월 29일 모하치 전투 에서 오스만 투르크군에
대패하니 나라는 오스트리아령과 오스만 투르크령에 동헝가리 로 삼분되어 사실상 망하게 됩니다.
1529년 오스만 투르크 술레이만 대제 는 12만 대군으로 세르비아의 베오그라드와 헝가리 를 지나
오스트리아의 수도 빈을 포위 하는데...... 성이 견고한데다가 겨울 추위로 철수하게 됩니다.
1683년 카라 무스트파가 예니체리와 사파히 기병을 동원해 베오그라드를 함락한 후에, 헝가리왕
지기스문트 의 6천까지 휘하에 거느리고 다시 15만 대군으로 진격해서 오스트리아의 빈 을
포위하자 성벽이 튼튼한데다가 폴란드 3만과 독일 4만 기병대 가 후방을 기습하니 물러나는데
만약에 빈이 함락 되었다면 유럽 중부지방의 종교는 기독교가 아닌 이슬람교 가 되었을 것입니다?
성당에서 오래된 그림 을 보면서.... 문득 가톨릭의 총본산인 로마 교황청 을 생각 하다가 역사학자 임용한
씨의 칼럼 ‘임용한의 전쟁史’ 중 "로마의 몰락“ 을 떠올립니다. "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미켈란젤로
가 활약하던 시절에, 피렌체 는 인구 10만이 안 되는 도시였다. 당시의 인구 수준을 감안하면
작은 도시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해도 프랑스, 독일, 스페인의 왕 들과 맞설 수 있는 수준은 아니었다.”
“ 그래서 메디치가의 성공 은 더욱 놀랍다. 이 작은 도시의 금융가였던
메디치가는 여성으로는 프랑스의 왕비 카트린 을 배출하고,
남성으로는 교황 레오 10세 와 교황 클레멘스 7세 를 차례로 배출 했다.”
“그 당시에 로마 교황청의 교황 은 세속 군주를 겸해서 로마의 통치자 였다.
레오 10세 는 사람은 좋았지만 부잣집 귀공자 답게 현실 감각이
전혀 없었다. 그의 이복 동생인 클레멘스는 정반대로 대단한 수완가 였다.”
“그러나 막상 권좌에 오르자 교황 클레멘스의 현실감각은 모략과 술수 로
둔갑했다. 그것도 마키아벨리의 말 처럼 제대로 사용했으면
모르겠는데, 술수 그 자체가 취미 인 것처럼 종잡을 수 없게 일을 벌였다.”
“클레멘스 교황 은 큰일과 작은 일을 구분할 줄 몰라 일의 우선순위가 없고, 전략과
전술, 작전 을 구분할 줄 몰랐다. 대책 없이 일을 벌였고, 그러다가
위기가 닥치면 천부적인 모략과 술수로 빠져나왔다. 그 능력 하나만은 기가 막혔다.”
“클레멘스 교황 은 무모하게도 서로 전쟁을 벌이던 프랑스와 신성로마제국 을 조종
하겠다고 나섰다가 양측에서 분노 를 샀다. 결국 프랑스와 신성로마제국
의 군대가 차례로 이탈리아를 침공 했다. 최악의 사태는 1527년 5월에 벌어졌다.”
“배신과 이중 계약에 격노한 독일 카를 5세의 군대가 로마에 입성 했다 . 클레멘스 7세교황은 산탄젤로
성으로 도망 쳤지만, 카를의 군대는 로마를 철저히 약탈하고 부녀자들을 욕보이며 도시를 파괴
했다.", ” '로마의 악몽' 으로도 불리는 이 사태는 로마의 오랜 역사와 문화재, 르네상스의
유산을 초토화 시켰다. 그래도 클레멘스는 또 교묘하게 살아 남았다. 그러나 로마는 폐허가 되었다.”
“로마인들은 무엇을 위해 이런 일을 벌였냐고 묻는다. 몇가지 목적이 거론되고 있지만...
어느것 하나 이런 위험을 감수할 일 은 아니었다. 그가 증명한 것은 술수 정치의
참혹한 결말 뿐이었다. 이것도 역사의 교훈이라고 하기에는 피해가 너무나 어처구니 없다.”
란츠크네히트 Landsknecht 는 1487년 막시밀리안 1세가 스위스 용병대에 대항하기 위해 창설한 용병
으로 개신교도 들이 많았으니 독일에서 가톨릭측에게 탄압을 받아 증오심이 컸던지라 로마에 입성하자
사람을 죽이고 집집마다 침입해 약탈하고 부녀자를 욕보이는등 로마의 약탈(사코 디 로마) 로 불리웁니다.
예배당만 보자면 무료이지만 보물관이나 타워를 보자면 1000 포린트 하는 표를 끊어야
하는지라 표를 구입해서는 4명의 젊은이를 뒤따라 문을 열고 나가 계단
을 달팽이 처럼 뱅글뱅글 돌아 올라가는..... 돌계단을 수없이 올라 전망대 로 찾아갑니다.
여기 대성당 지붕에 전망대 는 도나우벤트에 흐르는 다뉴브강(도나우강) 과
시내 조망이 훌륭하며..... 수려한 풍경은 한폭의 그림 을 연상시킵니다.
도나우강과 시가지 조망을 하고는 내려와 보물관 Kincstar 을 찾아가는데 왕의 대관식때 사용한
15세기에 르네상스시대를 이끈 국왕 마차시 코르비누스 십자가 가 유명하다는데..... 표를
보이니 우리 티켓으로는 안되고 더 비싼 티켓 을 끊어야 한다네요? 나의홈 : cafe.daum.net/baikall
첫댓글 감사합니다
동서양을 불문하고 어느나라나
역사는 다 파란만장한가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