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사직(階司職)과 행수법(行守法)
계사직(階司職)
관직(官職)의 정식 명칭은 「계(階) 사(司) 직(職)」의 순서로 되어 있는데, 이를테면 영의정(領議政)일 경우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계(階))의정부(議政府)(사(司))영의정(領議政)(직(職))」이 된다.
계(階)는 곧 품계(品階)요, 사(司)는 소속 관청이며 직(職)은 직위를 가리킨다.
행수법(行守法)
그런데 「행수법(行守法)」이라는 것이 있어서 품계(品階)가 높으면서 관직이 낮은 경우(계고직비(階高職卑))에는 「행(行)」이라 하고, 반대로 품계(品階)는 낮은데 관직이 높을 경우(계비직고(階卑職高))에는 「수(守)」라 하여, 소속 관청의 명칭 앞에 「행(行)」또는 「수(守)」자를 붙이게 되어 있었다. 이를테면, 종1품인 숭록대부(崇祿大夫)의 품계(品階)를 가진 사람이 정2품직인 이조판서(吏曹判書)가 되면 「숭록대부행이조판서(崇祿大夫行吏曹判書)」라 하고, 반대로 종2품직인 가선대부(嘉善大夫)의 품계(品階)를 가진 사람이 정2품직인 대제학(大提學)이 되면 「가선대부수홍문관대제학(嘉善大夫守弘文館大提學)」이라 했다. 고려(高麗)시대의 인물에 「수태보(守太保)」니「수사공(守司空)」이니 하는 관직이 많은 것도 모두 같은 예(例)이다.
《요즘으로 치자면 중앙관청의 계장급(係長級)인 사무관(事務官)인 서기관(書記官)의 보직인 과장(課長) 자리에 임명되면「수(守)」, 그 반대의 경우면「행(行)」이 되는 셈이다》
검교(檢校)
또 고려말(高麗末)∼조선초(朝鮮初)의 인물에「검교문하시중(檢校門下侍中)」이니「검교정승(檢校政丞)」이니 하여「검교(檢校)」란 용어가 많이 눈에 띄는데 이는 실제의 직책은 맡지 않은 『임시직(臨時職) 또는 명예직(名譽職)』을 말한다.
시호법(諡號法)
또 종친(宗親)과 문(文)·무관(武官) 중에서 정2품 이상의 실직(實職)을 지낸 사람이 죽으면 시호(諡號)를 주었는데, 뒤에는 범위가 확대되어 제학(提學)이나 유현(儒賢)·절신(節臣)등은 정2품이 못 되어도 시호(諡號)를 주었다.
시호(諡號)를 정하는 절차는 해당자의 자손이나 관계자들이 죽은이의 행장(行狀)을 적은 시장(諡狀)을 예조(禮曹)에서 이를 심의한 뒤 봉상시(奉常寺)를 거쳐 홍문관(弘文館)에 보내어 시호(諡號)를 정하게 된다.
시호(諡號)를 정하는 법으로는「주공시법(周公諡法)」이니 「춘추시법(春秋諡法)」이니 하여 중국 고대 이래의 시법(諡法)이 많이 인용되었던 듯하다.
시호(諡號)에 사용된 글자는 문(文)·충(忠)·정(貞)·공(恭)·양(襄)·정(靖)·효(孝)·장(莊)·안(安)·경(景)·익(翼)·무(武)·경(敬) 등 120자인데, 한자 한자마다 정의(定義)가 있어서 생전의 행적(行蹟)에 알맞는 글자를 조합하여 두자로 만들고 시호(諡號)아래「공(公)」자를 붙이어 부른다.
시호(諡號)에 사용된 글자 중 대표적인 글자의 정의(定義)의 그 대표적(代表的)인 것을 간추려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文〕經天緯地 道德博聞 博學好文 勤學好問 博學多識 慈忠愛民 忠信愛人
剛柔相濟 愍民惠禮 修德來遠 施而中禮 修治班制
〔忠〕危身奉上 事君盡節 慮國忘家 推賢盡忠 廉方公正 險不避難 臨亂不忘國 臨患不忘國
〔貞〕淸白守節 淸白自守 直道不撓 不隱無屈 大慮克就
〔襄〕因事有功 有功征伐 甲胃有勞 地有德
〔靖〕寬樂令終 恭己安民 恭己鮮言 柔德安衆 仕不躁進 正容寡言
〔良〕溫良好樂 中心敬事 慈仁愛人
〔孝〕慈惠愛親 繼志成事 能養能恭 慈人愛人 五宗安之 秉德不回 大慮行節
協時榮亨
〔莊〕履正志和 嚴親臨民 武能持重 威而不猛 勝敵志强 致果殺賊 好勇致力
〔安〕好和不爭 寬柔和平 與人無兢 兆民寧賴
〔章〕出言有文 溫克令儀 法度大明 敬愼高明
〔平〕執事有制 有剛治紀 法度皆理
〔武〕折衝禦侮 克定禍亂 剛强以順 保大定功 威强敵德 刑民克服 陰僞寧眞
〔敬〕夙夜做戒 夙興恭事 令善典法 善合法度
〔惠〕柔質慈仁 柔質慈民 柔質安民 心性慈祥
〔剛〕守義不屈 强毅果敢 致果殺敵 追補前過 强而能斷
〔義〕先君後己 先公後己 見義能忠 行義能終 制事合義 取而不貧
〔度(탁)〕心能制義 制事合義 制事得義
시호(諡號)를 받는다는 것은 가장 영예로운 표창으로서 존중되어 족보(族譜)에는 물론 묘갈(墓喝) 같은 데에도 기입되었다. 따라서 어떤 시호(諡號)를 받느냐 하는 것은 그 자손과 일족(一族)의 명예에 관계되는 문제이므로 시호(諡號)의 글자를 둘러싸고 시비와 논란이 많았으며, 뒷날에 이르러 개시(改諡)를 요구하는 일도 많았다.
시호(諡號) 중에도 「문(文)」자와 「충(忠)」자가 들어간 시호(諡號)를 가장 존귀하게 여겼는데, 특히 숭문(崇文)주의로 인한 문반우위(文班優位)의 시대였던 만큼 「문(文)」자 시호(諡號)를 최고의 영예로 여겨 자손들이 이를 자랑으로 삼는 것이 당시의 통념이었다.
유현(儒賢)들의 시호(諡號)
한편 임금의 특별한 교시(敎示)가 있을 때는 자손의 시장(諡狀)을 기다리지 않고 홍문관(弘文館)과 봉상시(奉常寺)에서 직접 시호(諡號)를 의정(議定)했는데, 이는 퇴계(退溪) 이황(李滉)에게 「문순(文純)」이란 시호(諡號)를 내려준 데서 비롯했다.
정二품벼슬이 못 되었으면서 시호(諡號)를 추증받은 유현(儒賢)으로는 김굉필(金宏弼)(문경공(文敬公))·정여창(鄭汝昌)(문헌공(文獻公))·서경덕(徐敬德)(문강공(文康公))·조광조(趙光祖)(문정공(文正公))·김장생(金長生)(문원공(文元公))등이 있다.
무인(武人)의 시호(諡號)
무인(武人)의 시호(諡號)로는「충무(忠武)」가 가장 영예롭게 생각하며, 특히「충무공(忠武公)」하면 이순신(李舜臣) 장군의 대명사처럼 알려져 있지만, 그밖에도 조영무(趙英茂)·남흡(南恰)·용성군준(龍城君浚)·정충신(鄭忠信)·김시민(金時敏)·김응하(金應河)·이수일(李守一)·구인후(具仁厚) 등 충무공(忠武公)이 8명이나 있다.
행수법 [行守法]
중국은 당나라 이후에 사용하였고, 한국에서는 고려와 조선시대에 사용하였다. 조선에서는 1442년(세종 24) 처음으로 사용하고, 뒤에 가서 《경국대전》에 따라 법제화되었다.
이에 따르면, 모든 관직에는 그에 따르는 품계가 일정하게 정해져 있으나, 경우에 따라서 어떤 관직에는 그 관직 자체의 품계보다 더 높은 품계의 관원, 또는 반대로 더 낮은 품계의 관원을 임명할 수 있다.
그중 품계가 높은 사람을 낮은 관직에 임용하는 계고직비(階高職卑)의 경우를 ‘행(行)’, 반대로 품계가 낮은 사람을 높은 관직에 임용하는 계비직고(階卑職高)의 경우를 ‘수(守)’라 한다.
예를 들면, 정2품의 자헌대부(資憲大夫)가 종2품의 관직인 대사헌(大司憲)에 임용되면 자헌대부행사헌부대사헌(資憲大夫行司憲府大司憲)이라 하고,
반대로 종2품의 가정대부(嘉靖大夫)가 정2품 관직인 호조판서에 임용되면 가정대부수호조판서(嘉靖大夫守戶曹判書)라 하였다.
그러나 7품 이하의 관원이 2계(階) 이상의 높은 관직에 임용될 수 없고, 6품 이상의 관원이 3계 이상의 높은 관직에 임용될 수 없다고 규정하였다.
[출처] 계사직(階司職)과 행수법(行守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