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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재도약
2012년 12월 19일 대선,
<“대한민국이 나아갈 길을 국민의 마음속에서 찾을 것입니다.” “힘없는 사람에게 관대하고 힘 있는 사람에게 엄격한, 진실로 겸허한 대통령이 될 것입니다.”>
하지만 정치가 어디 만만한 것인가. 박근혜 당선 그리고 문재인의 낙선. ‘권력 의지가 없다.’는 비판은 꼬리표처럼 달라붙었다. ‘등이 떠밀려’ 어쩔 수 없이 정치를 시작했다는 인식이 강했기 때문이다. 2012년의 실패는 뼈아팠다.
문재인은 선거 이후 초연하고 담담한 얼굴로 모두 자신의 부족함 탓이라고 했다.
그는 “권력의지가 없어 보인다.” “유약해 보인다.”는 등등의 말을 들으며 대선 패배 후 1년여 동안 정치적 동안거를 한다. 각종 세미나나 행사에는 참여하였지만 유의미한 정치적 행보는 없었다. 그리고 문재인은 2013년 11월 29일 기자 간담회를 갖는다. 그는 예상과 달리 차기대선 출마의 뜻을 밝히는 데 거침이 없었고 또한 동시에 박근혜 대통령의 국정 운영을 정면으로 비판하며 박근혜 정권과의 허니문이 끝났음을 분명히 알렸다.
이는 분명히 이전의 문재인에게선 찾아볼 수 없는 모습이었다. 그러던 중 2014년 4월 16일, 문재인의 권력 의지를 강력히 뒤흔든 세월호 사건이 터진다. 늘 어디서나 꼿꼿하고 신사적인 모습만 보이던 문재인이 무너져 내렸다. 노무현의 죽음에도 눈시울만 불거질 뿐 잘 견디고 심지어 노무현의 장례식에서 정적 이명박에게도 고개를 숙이며 자신의 고고한 처세를 유지하던 그가 세월호의 죽음을 보고 부모가 죽은 듯이 울었다. 그때부터 문재인의 독기가 엿보였다고 사람들은 말한다.
무능한 정부, 잇따른 실책, 분노하는 여론. 문재인은 사건이 터지자 팽목항에 달려가 유가족들을 위로하고 유민아빠를 살리기 위해 10일간의 단식을 하기도 하고 청와대 앞에서 비를 맞으며 특별법 제정 촉구 시위에 나서기도 했다. 분명 과거와는 달라진 그였지만 그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던 차 2014년 12월 29일 문재인은 당 대표 선거에 나선다. 그의 연설에서는 이전과는 차원이 다른 절박함과 간절함이 느껴지기 시작한다. 독해지겠다. 흩어진 48%를 다시 모으겠다.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겠다. 다시는 1∼2%가 모자라 눈물을 흘리는 일이 없도록 하겠다.
“누가 총선 승리를 이끌 적임자입니까? 누가 정권교체를 가져올 최고의 적임자입니까? 여야를 통틀어 최고의 지지를 받는 저, 문재인이라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당 대표직은 분명히 독배였다. 당내의 권력을 틀어쥐게 되지만 총선을 승리시키지 못하면 당 대표로서 책임을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문재인의 정치 인생을 건 위험천만한 도박이었다. “당을 살리지 못한다면, 총선 승리 못 한다면, 제가 어떻게 대선 후보가 될 수 있겠습니까. 사즉생(死卽生), 죽기를 각오하고 나섰습니다.
하지만 쉽지 않은 게 정치다. 연이은 지방선거에서 모두 패배를 했다. 계파 갈등에서 비롯된 내부적인 당 파열은 계속되고 당장 그 다음 해에 있을 총선거가 암울했다. 가까스로 대표는 되었으나 당의 상황은 좋지 않았다. 문재인은 말 그대로 당 혁신을 위해, 내년 총선의 승리를 위해, 그리고 나아가 대선 승리를 위해 본인의 모든 정치 인생을 걸고 뛰어든 것이다. 대표당선 이후 문재인은 대권행보를 시작한다. 그는 국민적 갈등과 논란을 종식하고 과거의 공과를 분명히 인정하겠다고 천명한다.
문재인의 이러한 변신은 분명히 강렬한 권력의지의 산물이었을 것이다. 한 표라도 더 끌어 모아서 반드시 집권하여 세상을 바꾸어 보겠다는 강력한 집권 의지의 산물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문재인은 본격적으로 당의 체질 개선을 위한 당 개혁을 시작한다. 하지만 이내 반발에 부딪힌다. 박지원과 조경태는 공천권, 안철수는 대선후보, 김한길은 당권을 두고 문재인과 대립한다. 문재인은 야권분열을 막고자 백방으로 뛰어다니며 이들의 의견을 수용하고 화합하려 노력했으나 이들은 끝내 분란과 갈등만 거듭하다 대거 탈당해버린다.
그리고 2015년 12월 28일 새 정치 민주연합은 더불어민주당으로 당명을 바꾸고 문재인은 당 인재영입위원장을 겸하고 인재영입작업에 착수한다. 그리고 이는 곧 신의 한 수가 된다. 문재인의 활약으로 각계각층의 인재들이 영입됨으로써 거물 정치인들의 탈당으로 인한 당내 불안감을 안정시키고 뿐만 아니라 새로이 영입된 인재들의 높은 전문성과 참신함은 당의 이미지 쇄신에도 기여한다. 20대 총선에서 문재인은 전국 방방곡곡을 넘나드는 살인적인 스케줄을 소화하며 후보 단일화와 지원 유세를 도와 총선승리에 기여하였고 또한 문재인발 영입 인사들이 대거 당선되면서 당내 본인의 입지를 공고히 한다.
그리고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가 터진 후엔 역시나 전국순방을 돌며 각종 집회, 시위, 연설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고 국민과 소통하며 관심을 환기하고 민심을 끌어 모으는 데 앞장선다. 지금도 일부 사람들은 아직도 그에 대해 너무 유약하다고, 권력의지가 없어 보인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노 대통령의 서거 후 일련의 사건들은 문재인을 각성시켰고 문재인은 그 과정에서 그 누구보다 간절하고 절실하게 권력의지를 희구하였다고 할 수 있다. 이는 그가 쓴 책을 봐도 알 수 있다. 문 대통령은 2012년 총선 출마 전후로 중요한 정치적 행보가 있을 때마다 책을 냈다. 대담 형식도 있고, 단독 저술도 있다. 문 대통령이 저자로 이름을 올린 책을 통해 그의 국정 철학과 앞으로의 향방을 가늠해 볼 수 있다. 이는 바로 그에게는 학습서이며 지난 대선 패배에 대한 복기와도 같은 것이다. 그는 그렇게 준비해왔다.
청와대 재직시절 문재인의 별명은 노무현의 그림자였다고 한다. 그는 의견을 내 세우기보다는 노무현의 한 발 뒤에서 그저 묵묵히 노무현의 뜻을 따랐다. 그러나 노무현의 뒤에서 늘 엷은 미소를 걸치고 묵묵히 그의 뜻을 따르던 점잖은 비서실장은 이제 달라졌다. 지금은 거침없이 자신의 길을 나아가는 정치가 문재인이 있을 뿐이다. 돌이켜보면 ‘운명이다.’ 이 짧은 말은 엄청난 힘을 발휘했다. 힘이 되는 말 한마디에 사람의 인생이 달라지는 예를 많이 보게 된다. 선생님으로부터 칭찬받은 단 한마디의 말이 가슴에 새겨져 힘이 되었다는 사람이 많고 부모님의 해주신 힘이 되는 말 한마디, 주위의 관심 하나로 어려운 시기를 견디며 정진해 온 사람들 또한 많다. 이처럼 한마디의 말이 주는 위력은 한 사람의 인생에서 지표가 되곤 한다. 우주의 법칙은 자력과 같아서 어두운 마음을 지니고 있으면 어두운 기운이 몰려오고 밝은 마음을 지니고 긍정적이고 낙관적으로 살면 밝은 기운이 밀려와 우리의 삶을 밝게 비춘다. 밝은 삶과 어두운 삶은 자신의 마음이 밝은가 어두운가에 달려 있다. 문재인은 자신의 운명을 그렇게 자성하고 자각하며 일군 낙관론자가 아니었을까. 자신의 생각이 곧 자신의 운명임을 기억하라. 이는 비단 문대통령에만 해당하는 말은 아닐 테다.
13. 19대 대선 풍경
갑자기 치루 게 된 19대 대선, 이번 대선에서 달라진 풍경이 몇 가지가 있다. 첫 번째 특징은 누가 뭐라고 하건 '촛불대선'이라는 점이다. 장미꽃이 피는 계절이라고 '장미대선'이라고도 하지만 19대 대선은 엄연히 촛불시민혁명이 만들어낸 '촛불대선'이라 하는 게 더 우선적이며 맞는 표현이다. 예정대로라면 내년 2월에 19대 대통령이 취임해야 하지만 9개월여를 앞당겨 5월 10일 임기를 시작하게 된다. 연 인원 1700만 명에 이르는 촛불시민들이 국정을 농단하고 국민을 주인이 아닌 대상으로 전락시킨 박근혜 전 대통령의 탄핵을 이끌어 냈기 때문에 치러진 대선이기 때문이다. 이번 대선은 계벌로 보아 '장미대선'이었지만 앞으로는 3월 초순에 치러지게 되니 '매화대선'이 될 것이다.
두 번째 특징은 고질적인 지역구도가 무너지고 세대 간 차이가 두드러졌다는 점이다. 물론 지지율 1,2,3 위를 달리는 후보가 모두 부산 경남지역 출신이라는 점도 있겠지만 지역구도가 이슈로 주목받지 못했다. 일부 후보 진영에서는 막판에 지역문제를 계속 부각시키려고 애를 썼지만 성숙한 유권자들에게 먹혀들지 않았다. 지역구도가 무너진 대신 세대 간 차이는 확연해졌다. 여론조사에서는 2~30대에 이어서 40대와 50대까지 민주당 문재인 후보로 쏠림 현상이 두드러졌다. 반면에 60대 이상은 여전히 국정농단과 대통령 파면이라는 시국에도 불구하고 새누리 당을 이어받은 자유한국당 홍준표 후보에게 쏠리는 현상은 여전했다. 집안에서도 부모와 자식이 표가 갈리는 현상은 추론컨대 당분간 지속될 공산이 커졌다.
세 번째는 후보단일화가 없는 다당제 선거가 정착되는 모습을 보였다는 점이다. 17대 대선과 18대 대선은 사실상 양자구도로 흐르면서 '진보 대 보수', '보수 대 진보'라는 이분적인 편 가르기 식 투표성향을 보인반면 이번 선거에서는 15명이 출마해 13명이 완주 하는 대선이었다. 특히 1강 2중 2약의 후보가 단일화 과정을 거치지 않고 끝까지 완주하면서 후보와 당의 정책을 홍보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미 지난해 총선에서도 더불어 민주당이 1위 여당인 새 누리당이 2위 국민의 당 3위 정의당 4위를 차지하면서 다당제의 모습을 보인데 이어서 대선에서도 다당제의 기틀이 형성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다당제가 자리를 잡아간다면 지역구도는 점점 희석될 것이고 각 정당도 대화와 타협, 협치를 기본으로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네 번째는 SNS의 영향력이 어느 선거 때보다 커졌고 TV토론의 영향력이 결정적이었다는 점이다. 후보들은 지역유세나 기자회견 정책발표 등을 실시간으로 페이스북 방송 등을 통해서 적극적으로 알리면서 SNS를 주요 홍보수단으로 삼았다. 그동안 'TV 토론회'는 큰 실수만 안 하면 판세에는 지장이 없다는 인식이 강했다. 하지만 이번 대선에서는 토론 방식의 다변화로 후보의 발언이 지지율이나 정치적 움직임으로 직결되는 현상이 나타났다. 이게 다자구도이기 때문에 가능했던 구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 '가짜 뉴스'가 선거 전반을 지배했다 점도 빠뜨릴 수 없는 사실이다. 과거 선거에 주로 사용됐던 '흑색선전'(마타도어)이라는 표현은 거의 사용되지 않았지만, 출처가 불분명한 '정보지'(찌라시)와 일부 언론의 편향된 보도가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타고 퍼지자 이런 '가짜 뉴스'에 대응하기 위한 '팩트체크'(사실 확인) 기사가 독자들로부터 큰 주목을 받기도 했다.
투표에 대한 것도 종전과는 몇 가지 차이가 생겨났다. 가장 달라진 점은 투표 시간이 2시간 더 늘어났다는 것과 개정된 공직선거법에 따라 선거 당일 온라인 선거운동이 처음 허용된다. 이에 따라 이전 선거에서 논란이 됐던 이른바 ‘투표 인증샷’을 SNS 등에 올리는 행위가 가능해졌다. 과거 치러진 선거에서는 엄지를 들거나 ‘V(브이)’자를 그리는 등 손가락으로 특정 후보의 기호가 연상되는 인증 샷을 찍으면 공직선거법 위반이었다.
그러나 법이 개정되면서 일반 유권자들이 자신이 지지하는 후보의 기호를 손가락으로 표시한 채 인증샷을 찍는 행위가 가능해졌다. 예를 들면 엄지를 치켜들거나 V자와 오케이 표시를 하는 것 외에도 손가락으로 특정 숫자를 나타내도 된다는 얘기다. 또 자신이 지지하지 않는 후보의 벽보 앞에서 ‘X(엑스)’자 포즈를 취하고 사진을 찍는 것도 가능해졌다. 하지만 온라인에서만 가능하고 선거 당일 오프라인에서의 선거운동은 여전히 불가능하고 또한 투표용지와 기표소 내에서의 촬영 행위 등도 여전히 금지하고 있다.
달라진 선거풍경, 무엇보다도 이번 19대 대선에서 주목을 받은 것은 시간 총량 제 자유토론이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산하 중앙선거방송토론위원회는 19대 대선의 공식 TV토론회를 후보들이 서서 토론을 벌이는 스탠딩 방식으로 진행하기로 결정했다. 후보별 발언 시간의 총량(18분) 내에서 사회자 질문에 답하거나 다른 후보와 토론할 수 있는 ‘시간총량제 자유토론’이 도입된다. 스탠딩 토론은 기존 토론과 달리 원고를 외우거나 대본을 참고해 토론을 진행하기 어려운 만큼 후보들의 토론 실력과 정책 이해도에 따른 능력 차가 드러난다. 청중이 토론자의 제스처와 토론 자세도 자세히 관찰할 수 있어 인물 판단과 선택에 도움이 된다.
그러나 아무리 스탠딩 토론이라 해도 5명이나 나오는 다자구도 자유토론은 몰입도를 떨어뜨린다. 선거 기간 개시일 30일 전 5% 이상 지지율을 얻었거나 소속 의원이 5석 이상이거나 지난 대선·총선에서 3% 이상을 득표한 후보를 모두 초청하다 보니 5자 대결이 된 것이다. 국민은 당선 가능성이 높은 후보에 대해 자세히 알기를 원한다. 선관위 차원의 토론회가 다자구도일 수밖에 없다면 언론사 차원의 양자 끝장토론의 필요성이 강력하게 제기되는 이유다.
미국에서는 오래전부터 양자 스탠딩 토론을 해 왔다. 1960년 존 F 케네디와 리처드 닉슨의 TV토론이 없었다면 케네디는 대통령이 되지 못했을 것이라고 후대 사가들은 평가한다. 젊고 자신만만한 케네디와 피곤해 보이고 말도 더듬은 닉슨의 대결에서 미국인은 케네디를 선택했다. 두 사람의 나이 차는 겨우 네 살이었다. 이후 텔레비전은 가장 강력한 후보 검증 수단이 됐지만 우리나라처럼 지지율에 상관없이 토론에 나온 후보들이 똑같은 시간을 쓰는 TV토론은 분명히 한계가 있다. 미국은 지지율 15% 이상이거나 270명 이상의 선거인단을 구성한 후보로 자격을 제한해 자연스럽게 양자 토론이 된다.
당시 각 진영은 “문 전 대표는 안보관이 불안하며 최순실이 써준 거 읽는 박근혜 대통령이나 딴 사람이 써주는 거 읽는 문 전 대표나 다를 게 뭐가 있나.”하는 말이 대체적인 추세였다. 안철수 후보는 문재인 후보와의 둘만의 끝장 토론을 제시하기도 했다. 과연 평가는 어땠을까. 우선 평가자들은 모두 스탠딩 토론이 다소 한국 상황에 맞지 않는다는데 의견을 모았다. 이들은 해당 토론이 정책토의보다는 상대방 공격에 초점을 맞췄다고 지적했다.
당초 맥을 못 출 것이라는 예상을 깨고 문재인 후보는 집중공격을 받았지만 잘 방어했고 오히려 이미지 상승효과를 많이 본 것 같다고 분석했다. 평론가들은 문재인 후보만 얼굴이 계속 나왔고 기본적으로 인상이 선해서 이득이 많이 봤다는 것이다. 미국 35대 대통령 선거를 보면 그때 7천 만 명이 TV 토론을 봤는데 TV 토론 본 사람은 케네디가 잘했다고 했고, 라디오만 들은 사람은 닉슨이 더 잘 했다고 했다. 결국 TV는 이미지가 크게 작용하는데 그런 점에서 스탠딩 토론은 문재인 후보가 일방적으로 유리했다는 것이다.
대중들은 말하는 사람 그 자체를 보기 때문 그런 면에서 보면 문재인 후보는 이득이 많았던 셈이다. 실제로 스탠딩 토론 이후 지지율을 보면 문재인 청문회를 연상시키는 집중조명 효과인지 그의 지지율은 올라갔고 오히려 제일 손해를 본 사람은 무풍지대에서 두 시간을 무사히 보낸 제일 유리할 것으로 본 안철수 후보였다. 어쨌든 이번 스탠딩 토론은 차별성이 생각만큼 크게 부각된 것은 아니다. 그러기에 세세한 평가에 대해서는 제각각이었다. 사실 스탠딩 토론의 활성화는 지난 대통령의 무능에 기인한 바가 크다 아니 할 수 없다. 유권자들은 이래서는 안 되겠다는 자성이 강했으며 똑똑한 젊은이들의 참여가 높아진 것도 이번 선거의 큰 획이다. 한 시절 무관심으로 일관했던 젊은 층의 참여의식의 변모는 우리나라 민주 의식의 함양에서도 큰 진전이 아닐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