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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안전벨트
이사야 43:1-7
하나님의 평화가 말씀을 듣는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길 빈다.
오늘은 성령강림 후 열 번째 주일이다. 성령강림절기는 한 여름이다. 멀리 홀씨를 날리는 민들레의 절기이기도 하다.
2020 도쿄올림픽 경기를 보면서 여러 가지를 배운다. 예전에는 메달 빛깔을 따지던 시절이 있었는데 요즘 의식이 많이 바뀐 것을 느낀다. 어찌 금메달만 주인공일 수 있을까? 동메달은 물론 최선을 다하는 모든 선수에게 뜨거운 응원을 보낸다. 변화된 우리 사회의 모습에서 한결 너그러움을 느낀다.
그래도 아직 한-일전은 넘치는 승부욕을 양보할 수 없다. 어제 밤 여자배구는 참 아슬아슬 하였다. 같은 시간대에 열린 축구와 야구는 졌지만, 여자배구가 일본을 이기니 그리 아쉽지 않다. 크게 패한 한국축구에 대해서도 관대해졌을 것이다.
세상에 승승장구만 있을 수는 없다. 어제 뉴스에서 비춰준 여자육상 허들경기 영상이 오래 남았다. 허들 선수들이 일제히 출발선에서 달렸는데, 그 중 한 선수가 갑자기 첫 번째 허들(장애물) 앞에서 갑자기 섰다. 날쌔게 뛰어 넘는 다른 선수들의 뒤를 쳐다보며 허리를 움켜쥐었다. 갑작스런 허리 통증 때문에 단 한 개의 허들도 넘지 못하고 포기하였다. 하루에도 수백 번씩 연습하며 뛰어 넘었을 허들이었다.
그렇구나. 문지방 넘듯 가벼운 인생인 줄 알았는데, 때로는 버겁고, 또 멈추기도 한다. 인생의 안전벨트가 필요하다.
1)
지금 톨레레게는 이사야 예언서를 읽는 중이다. 예언자는 단순히 신의 말을 전달하는 메신저나, 장래를 내다보는 선견자들이 아니다. 예언자는 인간을 향해 하나님의 연민을 증언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 사람들이다. 때로 세상의 불의를 보고 호통을 친다. 때로 따듯한 눈으로 감싸준다. 이렇게 예언자가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신탁(神託)이라고 부른다. 하나님의 말씀을 맡아서 전달한다는 의미이다. 선지자가 전하는 신탁에는 공식문구를 사용한다.
“여호와께서 지금 말씀 하시느니라”(1).
구약에만 이러한 표현이 무려 400회 이상 등장한다.
나도 설교를 시작하면서 스스로 정한 공식멘트를 말한다.
“하나님의 평화가 말씀을 듣는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길 빈다.”
이것은 내 이야기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대신 전한다는 의미다. 그러니 함부로 말할 수 없다.
오늘 전하는 이사야 선지자의 말을 들어 보자.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지금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이가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1).
선지자는 하나님의 개입을 호소력 있게 전하기 위해 맨 처음 ‘두려워 말라’고 한다.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경외감(‘야레’)은 인간이 하나님을 대할 때 맨 처음 느끼는 감정이다. 두려움을 극복하는 최선의 방법은 피하는 것이 아니라, 더 적극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메신저들이 공통적으로 전하는 첫 마디는 늘 ‘두려워 말라’이다. 이어서 ‘하나님이 너와 함께 하신다’고 말한다. 하나님이 인간의 삶에 참여하시다니,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행여 인간이 놀랄까봐 미리 언질을 주는 것처럼 보인다. 운전에 앞서서 안전벨트를 매는 것과 같다. 이사야가 전하는 소식은 구원과 위로의 말씀이었다. 지금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하시고, 또 너희의 역사에 개입하셔서 구원하실 것이다. 안심하라, 두려워 말라!
사람들은 놀라서 묻는다. 지금 말씀하시는 그 하나님은 누구신가? 선지자가 대답한다.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 너를 지으신 이”(1)이시다. 이제 하나님은 자기 백성에게 찾아 오셔서 그 혹독한 포로생활, 비참한 종살이로부터 풀어주시며, 네 인생에 대해 책임을 져주신다.
이사야의 예언은 희망의 소식이었다. 바야흐로 새 시대가 전개될 것이다. 마치 하나님은 법적인 보호자가 되셔서 너의 아픔을 치유하고, 파괴된 네 삶을 회복 시켜주시겠다는 선언인 것이다. 한 마디로 ‘구원’이었다.
하나님은 친밀한 말로 위로하신다. 하나님은 더 이상 두려운 분도, 심판자도 아니다. 이제 너희에게 새 삶이 열릴 것이다.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1).
2)
이사야의 예언은 포로해방 소식이다. 귀향길은 기쁘지만, 위험도 클 것이다. 게다가 자녀가 많은 사람이나, 두고 가야할 재산이 많은 사람은 근심이 깊을 것이다. 그 가족과 재산 때문에 당장 귀국할 엄두를 내지 못할 수도 있다.
게다가 대부분 세대가 바뀌었다. 1세대는 대체로 죽었거나, 너무 늙었다. 자녀세대에게 고향에 대한 미련이 남아있을까? 우리나라 이산가족 현실과 비슷하다. 더군다나 고향에서 보장된 것은 없었다.
선지자를 통해 주신 것은 다만 약속뿐이다. 세상에서 약속을 어찌 다 믿을 수 있을까? 어디에도 보증수표는 없다. 그런데 선지자는 안심시키는 말로 달랜다. 하나님께서 그들과 동행하실 테니 돌아가라고 하신다.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하지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지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2).
나는 설교하는 역할을 맡은 목사로서 역사에 대해 관심이 많다. ‘역사의식, 시대정신, 희망의 관점, 종말론적 상상력’ 등을 자주 말한다. 성경을 잘 이해하려면 역사적 관점을 지녀야 한다. 성경적 역사관은 하나님의 구원사이다. 그 안에 민족 공동체이든, 한 가족 이야기든, 낱낱의 개인이 직면한 구체적 삶이 존재한다.
가장 자주 등장하는 역사인 선민 이스라엘의 경우를 보자. 그들은 여전히 이스라엘이란 국가와 유대인이란 민족과 유일신 종교인 유대교로 존재한다. 유목인 아브라함 가족으로부터 시작한 구약의 역사는 오늘까지 이어져 내려오면서 관전 포인트를 제공한다. 성경은 그저 흘러간 옛 이야기가 아니다. 그리스도인은 신약이란 새로운 약속에서 하나님의 역사를 바라보는 사람이다.
성경의 역사에서 가장 주요한 흐름은 출애굽이다. 구약과 신약을 통틀어 출애굽 신앙은 역사적 신앙고백의 주요한 뼈대를 이룬다. 지금도 출애굽 신앙은 모든 부자유, 불의, 억압, 인간이 맞이하고 있는 삶의 위기와 맞선다. 지금도 우상세력은 하나님의 뜻에 거슬러 반역과 배신, 불신과 파괴를 일삼는다. 하나님은 그런 바로로 대표되는 우상세력과 맞선 사람들과 함께 하신다.
첫 번째 출애굽은 모세가 히브리인들을 400년 동안 종살이 하던 땅 애굽에서 이끌어 낸 사건이다.
두 번째 출애굽은 70년 동안 포로 생활하던 유대인들을 바벨론으로부터 귀환시킨 사건이다.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네 자손을 동쪽에서부터 오게 하며 서쪽에서부터 너를 모을 것이며 내가 북쪽에게 이르기를 내놓으라 남쪽에게 이르기를 가두어 두지 말라 내 아들들을 먼 곳에서 이끌며 내 딸들을 땅 끝에서 오게 하며”(5-6).
역사적으로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모으신다는 약속’을 굳게 믿었다. 나중에 주후 70년, 로마가 예루살렘을 파괴한 후 그들은 디아스포라가 되어 동서남북 사방으로 흩어져 살았다. 그럼에도 대를 이어가면서 하나님이 자기 조상들에게 하신 약속을 기억하며 살았다.
그것이 시오니즘 운동이다. 1894년, 테오도르 헤르츨이란 유대인이 자기 민족을 각성시킴으로서 시작한 시오니즘 운동은 마침내 1948년 팔레스타인에 이스라엘이란 국가를 세웠다. 동서남북 사방에 흩어진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으로 몰려와 키브츠 운동을 전개하였다. 집단 정착 운동이었다. 키브츠라는 말은 “너를 모을 것이며”(5)라는 단어에서 나온 것이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구원사’란 역사적 관점은 단지 나를 읽는 독자를 뛰어넘어, 창조주 하나님을 고백함으로써 내 생애와 현실을 하나님의 역사에 참여하게 한다. 나로 하여금 하나님과 관계 속에서 지음 받은 존재로서 각성시키고, 새로운 삶을 살도록 이끄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참여시키는 일이다.
하나님을 모르던 나, 그리하여 삶의 목적을 잃은 채, 희망도 없이, 버림을 받고, 존재감을 상실했던 내가 하나님의 자녀요, 하나님의 백성으로 새로운 자격을 얻는다. “너는 내 것이라.” 그럼으로써 개인의 삶의 체험조차 하나님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다.
3)
사람들은 누구나 삶의 위기를 겪는다. 선지자 이사야는 이러한 위기를 물과 불로 비유한다. 물과 불은 이 세상의 위험한 것, 악한 것, 적대적인 것, 나를 괴롭히는 것, 죽음으로 몰아가는 ‘사망의 음침한 것’에 대한 상징이다.
그런 현실을 향해 선지자는 하나님의 신탁을 전한다. 놀라운 일은 하나님은 하나님의 자녀들을 자유롭게 하기 위해서라면 어떤 대가라도 치루시겠다고 약속하신다. 하찮은 존재를 기억하시고, 보배롭고 존귀한 자로 인정해 주신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하나님이 그들을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그 실패자들에게 먼저 손을 내미신다. 하나님이 그 목이 곧은 백성조차 사랑한다고 고백하신다.
“네가 내 눈에 보배롭고 존귀하며 내가 너를 사랑하였은즉 내가 네 대신 사람들을 내어 주며 백성들이 네 생명을 대신하리니”(4).
선지자 이사야가 거듭거듭 하나님의 창조와 손수 지으심을 강조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하나님은 내가 하나님의 피조물 됨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을 “너는 내 것이라” 부르시고, 사랑하신다. 이를 받아들이는 것이 신앙고백이다.
초대 교회부터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사람들에게 세례를 주었다. 세례는 하나님이 ‘너는 내 것’ 곧 양자(養子)로 삼으시는 의식이다. 하나님과 관계를 맺는 일이다.
물로 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새로운 생명에 참여하는 일이다. 여기에서 물은 죽음의 위협을 뜻한다. 세례는 물에 온 몸을 세 번 잠기었다가 반복하여 회생하는 경험이다. 말 그대로 침례이다. 죽음에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이사야의 메시지에는 장차 오실 메시야에 대한 놀라운 소식이 담겨있다. 모든 출애굽 사건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된다. 출애굽기의 유월절에는 어린양의 피흘림이 등장하고, 이사야의 바벨론 포로귀환 예언에는 ‘고난 받는 종의 노래’가 네 차례 등장한다.
어린양과 고난 받는 종은 다가올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만민의 구원소식이다. 출애굽 메시지는 유대인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그 시대를 초월하여 오늘 우리에게도 주시는 말씀이다. 지금 하나님의 통치를 인정하는 사람 모두에게 하나님은 약속하신다.
우리 그리스도교는 또 하나의 종교가 아니다. 종교라는 형식이 아닌 바로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통해 구원을 받는다는 메시지가 중요하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고, “너는 내 것이라”는 말을 받아들여 이제부터 하나님의 마음으로 사는 것, 이것이 신앙의 내용이다.
하나님과 관계를 트면 얼마나 큰 힘과 위로가 되는가? 하나님은 내 구원자(고엘)이시고, 법적 보호자가 되어 주신다. 나를 ‘하나님의 것’으로 삼으셨으니 얼마나 소중한가? 그러기에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하나님이 나를 알아주시듯, 나도 인간에 대해 애정과 신뢰와 희망의 관점을 지녀야 한다.
“내 이름으로 불려지는 모든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를 내가 지었고 그를 내가 만들었느니라”(7).
경산 하양무학로교회 조원경 목사님이 내게 편하게 부를만한 호(號)를 하나 지어 주었다. 평생 경상도 출신 퇴계 이황의 학맥을 자랑하였다. 전화를 걸어서 “가은 선생!”이라고 부른다. 나는 못 알아듣고 전화를 잘못 하신 것 아니냐고 반문한 적도 있다.
내 새 이름을 받아들이기까지 시간이 걸렸다. ‘가은’은 십자가 ‘가’(架)자와 은혜 ‘은’(恩)자다. 그 분의 설명이다. 십자가만 있으면 어떻게 살까? 은혜가 있어야 한다. 그렇다고 은혜만 고대하면 실망한다. 내 앞의 십자가를 피할지 말고 기꺼이 받아들일 용기가 필요하다. 그래서 ‘십자가와 은혜’ 두 글자를 합하였다고 한다.
우리는 자주 십자가 앞에 선다. 그런데 십자가를 두려워하지 말고 다가가면 마침내 주가 주시는 참된 기쁨이 있을 것이다. 내가 예배하는 하나님은 나를 부요하게 하고, 내 삶에 평화를 주시며, 날마다 은혜를 베푸실 것이다.
“내가 매일 십자가 앞에 더 가까이 가오니 구세주의 흘린 보배피로서 나를 정케하소서.”
이사야는 우리에게 물과 불의 상황에서도 하나님이 안전벨트를 마련해 주실 것을 약속하고 있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말아라. 네 현실에 대해 너무 좌절하지 말아라. 지금 네 앞에 허들이 높아 보이고, 영원해 보일지라도 결코 그렇지 않다. 그러니 네 미래를 믿고 도전하라! 하나님이 함께 하시니 물과 불도 두려워 말라!
성경의 역사관을 품어라. 하나님의 구원사 속에 내가 포함되어 있다. 그러니 내 인생의 출애굽을 계획하라. 하나님이 내 안전벨트가 되어 주신다.
하나님께서 나를 ‘하나님의 몫’으로 삼아 주셨으니, 언제나 주님의 십자가와 은혜를 함께 사모하는 삶을 살게 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