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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1년 강화도 해병대 총기난사 사건
▲강화도 해병대 총기사고 현장검증이 실시된 2011년 7월 19일 휠체어에 앉은 범인 김 상병이 생활관(내무반)에서 조사를 마친 뒤 수사관들과 이동하고 있다.
점심시간을 앞둔 4일 오전 11시 44분, 강
화군 길상면 선두 4리에 있는 모 해병부대. 해병대 김모(19) 상병이 생활관(내무반)
에서 돌연 K-2 소총을 꺼내 들어 난사(亂射)하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이승훈(25) 하사와 이승렬(20) 상병, 박치헌(21)상병
,권승혁(20) 이병이 쓰러졌다.
이때 총소리를 듣고 생활관 입구 쪽으로 달려간 권혁(19) 이병은 김 상병을 향해 몸을 날렸다. 발포로 달아오른 총신(銃身)을 왼손으로 움켜쥐었다. 이 상태로 권 이병은 김 상병을 내무반 밖으로 밀쳐냈고, 안에서 문을 잠갔다. 오른쪽 허벅지 안쪽과 바깥쪽에 2발의 총알을 맞았지만, 굴하지 않았다. 목숨을 건 권 이병의 이 행동으로 당시 내무반에 있던 10여명은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권 이병에게 저지당한 김 상병은 생활관 근처 격실로 갔다. 그는 이곳에서 수류탄을 터뜨려 자살을 기도했으나 미수에 그쳤다.
해병대 사령부 관계자는 “김 상병은 이날 오전 10시쯤 낮 경계 근무자가 교대할 때 소총을 보관하는 상황실에서 소총과 탄약
을 훔친 것으로 추정된다”고 밝혔다. 총기 및 실탄, 수류탄 관리 허점이 확인된 것이
다.
해병대 총기 사건 합동조사단의 조사 결과, 김 상병의 해안 소초에서 구타와 가혹행위, ‘기수열외’(해병대식 집단따돌림) 등 여러 건의 병영 부조리 사례를 적발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후 해병대 사령부 보통군사법원 심판부
는 13일 김모(20) 상병에게 사형을 선고
했다. 또 김 상병과 함께 범행을 공모하고 상관 살해를 방조한 혐의로 기소된 정모
(21) 이병에게는 징역 20년을 선고했다.
➡️2015년✦인도네시아 쓰나미 소년, 호날두 지원 등에 힘입어 포르투갈 유소년팀 입단
➡️2015년✦44년 5개월 최장기간 토크쇼 진행… 일본 만담가 가쓰라 기네스북 올라
➡️2005년✦우주탐사선 딥 임팩트호 발사체, 혜성 ‘템펠1’과 충돌 실험 성공
➡️ 2004년 '시베리아의 요정'
17세 마리아 샤라포바 윔블던 우승
➡️2004년✦한국 지휘자 정명훈-일본 나루히토 왕세자, ‘우정의 가교’ 음악회서 공동 연주
👉🏿 한국의 음악인 정명훈(鄭明勳)씨와 일본의 나루히토(德仁) 왕세자가 한 무대에서 함께 연주했다. 7월 4일 오후 6시30분 일본 도쿄 일본민예관(日本民藝館) 대전시관에서 열린 ‘일한(日韓)우호 특별기념 음악회’가 무대다.
정명훈씨는 피아노, 나루히토 왕세자는 비올라를 연주했다. 세계적 첼리스트 미샤 마이스키, 도쿄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악장인 아라이 에이지(바이올린)가 함께 참여, 넷이서 모차르트 ‘피아노 사중주 제1번’을 연주했다.
이 음악회는 2002년 정명훈씨가 제안해 성사됐다. 2000년부터 도쿄필하모닉 특별고문을 맡아 이 오케스트라를 지휘하고 있는 정명훈씨는 2002년 도쿄에서 오페라 ‘나비부인’을 지휘할 때 관람하러 온 나루히토 왕세자에게 함께 연주할 기회를 갖자고 제안했다.
그리고 2년 후 일본민예관측이 조선미술에 심취했던 예술평론가인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1889~1961)를 기려 ‘야나기 무네요시의 이조공예와의 만남 90주년 특별전’을 기획하자 때맞춰 정명훈씨측이 나루히토 왕세자측에 2년 전에 제안한 대로 함께 연주할 것을 요청해 성사된 것이다. 이 특별음악회는 일본민예관의 운영기금을 마련하는 자선음악회로 열렸다.
영국 찰스 왕세자가 첼로를 취미로 연주하는 것처럼 악기 하나쯤 취미삼아 익히는 왕실의 전통대로, 일본 나루히토 왕세자는 바이올린과 비올라를 배웠다.
나루히토 왕세자는 도쿄 가쿠슈인(學習院)대학 문학부 사학과 재학 중에도 대학 오케스트라에서 비올라 수석을 지냈고 지난 해에도 이 오케스트라에 참여, 드보르자크 교향곡을 연주했다. 지금도 그는 도쿄의 한 아마추어 오케스트라 재단이사장을 맡아 후원하는 등 음악에 애정을 쏟고 있다.
정씨의 매니지먼트사인 CMI의 정명근 사장은 “나루히토 왕세자는 한국에 깊은 애정을 가졌던 야나기씨의 한국 전통공예 수집품 특별전에서 자신이 한국을 대표하는음악인과 함께 연주하면 양국 우호의 정신을 더 잘 살릴 수 있다며 흔쾌히 초청에 응했다”고 말했다.
종교철학자 겸 예술평론가였던 야나기 무네요시는 1914년 조선 땅을 처음 밟아 조선백자와 민예품 등에 심취, 1924년 경복궁에 조선민족미술관을 세웠다. 이번 특별음악회가 열린 일본민예관도 야나기씨가 1936년 개관했다.
이날 음악회서 정명훈씨와 나루히토 왕세자의 연주는 후반부에 있었다. 전반부에선 정명훈씨와 미샤 마이스키 등이 독주와 이중주를 펼쳤다. 이날 음악회는 한국과 일본측 인사 100여명이 초대받았다.
정명훈
피아니스트이자 지휘자로, 한국을 대표하는 세계적인 음악가이다. 그의 누나인 정명화와 정경화 또한 각각 세계적인 첼리스트와 바이올리니스트이며, 피아니스트 정명훈을 포함한 세 남매가 ‘정 트리오’라는 이름으로 삼중주 연주 활동을 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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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m.terms.naver.com/entry.naver?docId=71898&cid=43667&categoryId=43667
➡️2002년✦중국 서기동수(西氣東輸) 대장정 착공
➡️2001년✦프랑스 문화재국, 3만년 전 동굴암각화 발견 발표
➡️2000년✦민주화운동 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 등에 관한 법률 시행령, 국무회의에서 의결
👉🏿 정부는 2000년 7월 4일 정부종합청사에서 김대중 대통령 주재로 국무회의를 열고, 민주화운동 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 등에 관한 법률 시행령안을 의결했다. 이에따라 정부는 8월부터 피해자 신고를 접수했으며 10월부터 보상을 실시했다.
이 시행령은 1969년 8월 7일(3선 개헌안 발의일) 이후 권위주의적 통치에 항거하다가 희생된 피해자와 유족에 대해 명예회복과 보상을 할 수 있는 방안을 규정하고 있다.
시행령의 핵심은 `민주화운동`의 뜻을 더욱 폭넓게 해석했다는 점이다. `직접 국가권력에 항거한 경우`뿐만 아니라 국가권력이 학교, 언론, 노동 등 사회 각 분야에서 발생한 민주화운동을 억압하는 과정에서 사용자 또는 고용주가 행한 폭력 등에 저항함으로써 결과적으로 국가권력의 통치에 항거한 사례까지 포함했다.
이에 따라 유신철폐나 대통령직선제 개헌투쟁처럼 직접 국가권력을 상대로 민주화운동을 벌인 사람은 물론, 민주화운동을 하다 해직된 교사, 교수와 언론인, 학사징계를 받은 대학생, 해고 근로자까지 민주화운동 관련자에 포함되게 됐다. 정부는 이들의 수가 1만7000명 정도 될 것으로 추산했다.
➡️2000년✦국어 로마자 표기법 16년 만에 개정
👉🏿 부산, 대구의 로마자 표기방식이 각각 PUSAN, TAEGU에서 BUSAN, DAEGU로 변경됐다.또 김포국제공항의 표기도 KIMPO에서 GIMPO로 바뀌었다. 박지원 문화관광부 장관은 초성 ㄱ, ㄷ, ㅂ, ㅈ의 로마자 표기 방식을 종전 k, t, b, ch에서 g, d, b, j로 바꾸고, 모음 ㅓ와 ㅡ,자음 ㅋ, ㅌ, ㅍ, ㅊ을 표기하는 데 사용하던 특수부호 반달표와 어깻점을 없애는 것 등을 골자로 하는 국어 로마자 표기법 개정안을 확정 발표했다.
이에따라 어두에 오던 무성음 ㄱ, ㄷ, ㅂ, ㅈ은 우리 언어감정에 맞게 유성자음으로 바뀌어 표기되며, 특수부호가 사라짐에 따라 모음 ㅓ와 ㅡ의 표기방식은 eo와 eu로, 자음 ㅋ, ㅌ, ㅍ, ㅊ은 k, t, p, ch로 바뀌었다. 그러나 그동안 써 온 인명과 회사명, 단체명은 종전대로 쓸 수 있도록 예외 규정을 두었으며, 인명의 성씨 부분은
추후 표기방식을 별도로 정하기로 했다.
이번 로마자 표기법 개정은 1984년 1월 13일 현행 표기법이 고시된 이후 16년 만이다. 새 표기법이 확정됨에 따라 2005년 12월 말까지 순차적으로 바꿔나가게 되며,
기존 교과성 등 출판물은 2002년 2월 말까지 바뀌게 된다.
로마자 표기법
우리말을 로마자로 표기하는 원칙을 정한 것이 국어의 로마자 표기법이다. 현행 ‘국어의 로마자 표기법’은 2000년에 새롭게 개정된 것이다. 표기의 기본 원칙에 의하면 ‘국어의 로마자 표기는 국어의 표준 발음법에 따라 적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표기 일람에는 자음과 모음을 적는 방법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가령 ‘ㅏ, ㅓ, ㅗ, ㅜ, ㅡ, ㅣ’를 각각 ‘a, eo, o, u, eu, i’로, ‘ㄱ, ㅈ, ㅅ, ㄴ, ㄹ’을 각각 ‘g/k, j, s, n, r/l’로 표기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그리고 음운 변화가 일어날 때 변화의 결과에 따라 표기하는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예컨대 ‘발음상 혼동의 우려가 있을 때에는 음절 사이에 붙임표(-)를 쓸 수 있다’라든지 ‘고유 명사는 첫 글자를 대문자로 적는다’라든지 ‘인명은 성과 이름의 순서로 띄어 쓴다. 이름은 붙여 쓰는 것을 원칙으로 하되 음절 사이에 붙임표(-)를 쓰는 것을 허용한다’ 등의
규정을 정해 놓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로마자 표기법 (Basic 고교생을 위한 국어 용어사전, 2006. 11. 5., 구인환)
https://m.terms.naver.com/entry.naver?docId=939245&cid=47319&categoryId=47319
➡️2000년✦조덕송 조선일보 전 논설주간 별세
👉🏿 조선일보 논설주간을 지낸 언론인 조덕송씨가 2000년 7월 4일 별세했다. 조씨는 일세를 풍미했던 명 사회부기자였으며, 청빈 언론인이었다.
1947년 기자생활에 입문, 1997년 전남일보 논설고문을 끝으로 물러날 때까지 50년 간 언론계에 몸담았던 평생 기자였다. ‘조대감’이란 애칭으로도 불렸던 그는 허름한 옷차림과 빗질 안한 머리에 굵고 검은 안경테가 트레이드 마크였으나, 언제나 예리한 시선으로 현대사의 구비구비를 증언했다.
그러나 그의 언론인 생활은 순탄치만은 않은 것이었다. 전남 순천 태생인 그는 일본 교토 리쓰메이칸 대학을 중퇴, 1947년 조선통신 기자로 언론계에 첫발을 디뎠다. 제주 4·3사건 관련자 총살 집행과정을 신랄하게 비판, 체포 대상에 오르기도 했으며, 그 후 다시 문학가동맹에 가입,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기도 했다.
6·25전쟁으로 풀려난 그는 국제신문·자유신문에서 일하다가 1960년 송지영 당시 조선일보 편집국장에 의해 조선일보 문화부장으로 발탁됐다. 그는 기획부장·사회부장·논설위원을 거쳐 1989년 3월 통한문제연구소장으로 조선일보를 떠날때까지 소년조선일보 속간, 주간조선 창간(1968년) 등의 굵직한 일을 했다.
언론 생활 중 그는 특히 교육문제에 깊은 관심을 가져 명 논설들을 남겼고, 1972년 남북적십자회담 때는 수석자문위원으로 평양을 수차례 다녀왔다. 1970년대 후반에야 처음으로 서울 답십리에 10평짜리 제 집을 가질 수 있었다. 언론 생활 반세기를 증언한 자서전 ‘대하드라마 - 머나먼 여로’ 등 많은 저서를 남겼다.
➡️1998년✦러시아 정부, 조성우 주러 참사관 추방, 한국정부 보복조치로 올레그 주한 참사관 맞추방
➡️1998년✦일본, 무인 화성탐사선 `플래닛-b` 발사
➡️1996년✦김수한 국회의장 피선
➡️1996년✦아랍계로 위장한 남파간첩 정수일(무하마드 깐수) 구속
➡️1989년✦한국과학기술원(KAIST)과 한국과학기술대학(KIT) 통합
➡️1987년✦프랑스 법정, ‘리용의 백정’ 클라우스 바비에게 종신형 선고
➡️1982년✦멕시코 새대통령에 미겔 데 라 마드리드 당선
➡️1981년✦한국, 소련에 직접교역 제의
➡️1981년✦전두환대통령, 프렘 태국수상 정상회담
➡️1981년✦쿠바 아바나 국제의회연맹(IPU) 총회에 한국 초청
➡️1980년✦첫 국산 남제주 화력발전소 준공
➡️1972년✦7.4남북공동성명 발표
👉🏿 남북간의 긴장완화와 통일문제에 관해 1972년 7월 4일 서울과 평양에서 동시발표한 성명으로 미국과 중공의 국교정상화를 계기로 종래의 대미의존적인 안보정책에서 탈피하고자 북한과의 관계개선을 모색한 결실이 7.4남북공동성명이다.
성명이 나오기까지 서울의 이후락 중앙정보부장과 평양의 김영주 조직지도부장이 각기 상대방을 방문(서울방문시에는 박성철 제2부수상이 대신 방문)해 회담을 진행했다.
그 내용은
1.외세에 의존하거나 외세의 간섭을 받지 않는 자주적 해결
2.돌발적 군사사고 방지, 상호간의 신속한 업무처리를 위한 서울과 평양간의 상설 직통전화 가설
3.남북적십자회담에 대한 적극 협조
4.상대방에 대한 중상비방, 무장도발 포기
5.남북간 다방면의 교류
6.남북조절위원회 구성 등이다.
7.4 남북공동성명
1971년 11월부터 72년 3월까지 남북한은 한국적십자사의 정홍진과 북한적십자사의 김덕현을 실무자로 하여 판문점에서 비밀접촉을 가졌다. 이 접촉의 성과를 바탕으로 72년 5월 초에는 이후락 중앙정보 부장의 평양방문과, 5월과 6월 사이 북한 노동당 조직지도부장 김영주를 대신한 박성철 제 2 부수상의 서울방문이 실현되어 남북한간의 정치적 의견 교환이 처음 이루어졌다.
6월 29일 이후락과 김영주는 그 동안의 회담내용에 합의, 서명하고, 7월 4일 마침내 서울과 평양에서 공동성명을 발표하게 되었다.
이 성명은 통일의 원칙으로,
- 외세(外勢)에 의존하거나 외세의 간섭을 받음이 없이 자주적으로 해결하여야 한다.
- 서로 상대방을 반대하는 무력행사에 의거하지 않고 평화적 방법으로 실현하여야 한다.
- 사상과 이념 및 제도의 차이를 초월하여 우선 하나의 민족으로서 민족적 대단결을 도모하여야 한다고 밝힘으로써 자주•평화•민족대단결의 3대원칙을 공식 천명하였다.
남북한이 분단 27년 만에 처음으로 합의한 당시의 3대 원칙은 이후 남북한간에 이뤄진 모든 접촉과 대화의 기본지침이 됐다.
이 밖에도 상호 중상•비방•무력도발 금지, 남북한간 제반 교류의 실시, 적십자회담 협조, 남북 직통전화 개설, 남북조절위원회의 구성과 운영, 합의사항의 성실한 이행 등으로 이루어졌다.
이 선언으로 남북조절위원회가 구성되는 등 분단 26년 만에 처음으로 남북대화의 통로가 마련됐다.
그러나 남한의 시월유신(72. 10. 17)과 북한의 사회주의헌법 채택(72. 12) 등에서 보이듯 통일논의를 자신의 권력기반 강화에 이용하려는 남북한 권력자들의 정치적 의도로 인해 그 빛을 잃게 되었고, 급기야 김대중납치사건(73년 8월)을 계기로 조절위원회마저 중단되었다.
91년 합의된 남북기본합의서 전문(前文)에도 3대 원칙이 언급되었으며 90년 9월 시작된
남북 고위급회담도 이 원칙에 따라 이뤄졌다.
네이버 지식백과] 7.4 남북공동성명 (시사상식사전, pmg 지식엔진연구소)
https://m.terms.naver.com/entry.naver?docId=65608&cid=43667&categoryId=43667
➡️1952년✦발췌개헌안 통과
➡️1950년✦미국군과 북한군, 오산서 첫 접전
➡️1946년✦필리핀, 미국으로부터 독립
➡️1945년✦미국 육군, 탄도요격미사일 개발 건의
➡️1934년✦퀴리 부인 사망
➡️1916년✦총독부, 고적조사위원회 설치
➡️1910년✦제2차 러일협약 조인
➡️ 1900년 재즈 음악인 루이 암스트롱 출생
➡️1831년✦제임스 먼로 미국 대통령 사망
➡️1826년✦미국 작곡가 포스터 출생
➡️1807년✦이탈리아 통일운동가 주제페 가리발디 출생
➡️1804년✦`주홍글씨`로 유명한 미국의 소설가 호손 출생
➡️1187년✦이슬람 살라딘, 하틴전투 승리
https://youtu.be/xsY6YxTJ8c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