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린 지친 거야. 멀고 낯설고 피곤했던 여행길과 여행하는 삶에 지친 거야. 돈을 벌려고 쓰는 글에 지쳤고, 사람에 지쳤고, 삶에 지쳤던 거지. 그래서 쉬고 싶었던 것 아닐까? 맞아. 첫사랑과도 같은 첫 여행지, 타이완은 ‘먼 길을 돌고 돌아온’ 내 등을 토닥토닥 두드려 주었지.
“괜찮아요. 그동안 잘 살아왔어요. 조금만 더 힘을 내세요.”
타이완은 그렇게 지친 나를 위로해 주었다. 사람들은 친절했고, 야시장의 열기는 후끈했으며, 한 끼의 음식은 황홀했다. 그리고 노천 온천에 몸을 담근 채 하늘을 바라보며 나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이것이야말로 삶을 행복하게 해 주는 보물들인데 이제야 보이다니.
그 후배도, 그리고 타이완을 좋아하는 많은 여행자들도 그렇지 않을까? 이 험난한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 거의 모두 돈에 쫓기고, 시간에 쫓기고, 사람에 치이며 살아간다. 그들에게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타이완에 가 보세요. 삶에 지친 당신, 푹 쉴 수 있을 거예요. 친구네 집에서 맛있는 음식 먹고, 노천 온천물에 목욕하고, 커피 마시고, 수다 떠는 것처럼 천천히 게으름 피우다 오세요. 그리고 작은 보물들을 가슴 한가득 안고 오세요.” -p.15
1년 전 어머니가 유방암, 대장암 말기라는 선고를 받은 후, 나의 모든 일상은 어머니 병간호에 맞춰졌다. 똥 기저귀를 갈아 드리고 하루에 두세 번씩 샤워를 시켜 드리고, 하루에 네다섯 번씩 끼니를 챙겨 드리던 어머니가 6월에 갑자기 돌아가시자 나는 깊은 상실감에 빠졌다. 어머니의 고통, 아픔에 가슴이 저렸고 온갖 후회와 슬픔이 뼈에 사무쳐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어머니의 환청도 들렸고 늘 아픈 배를 잡고 웅크리고 있거나, 화장실을 가다 오줌을 지린 채 방구석에 쓰러져 있던 불쌍한 어머니의 모습이 떠올라 맨 정신으로 있기가 힘들었다. 아내가 직장에 나가고 나면 라면에 소주, 혹은 라면에 막걸리를 마시며 취해 지냈다.
한 달 남짓을 그렇게 보내다 결심했다. 상중이었지만 여행을 하기로 했다. 나는 여행작가다. 여행을 하고 글을 써야 한다. 밥벌이를 해야 하고 삶의 의욕을 되살려야 한다. 그러나 사실 이런 상황에서 여행할 기분도 나지 않았다. 고민 끝에 선택한 여행지는 첫 여행지였던 타이완이었다. 그곳에 가면 인생의 황금기였던 삼십 대 초반으로 돌아가, 삶의 의욕을 다시 불러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떠나기 며칠 전,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던 중에 아내는 이렇게 말했다.
“당신, 그동안 고생했어. 이제 타이완에 가서 주름졌던 날개를 좍좍 펴고 와. 그리고 다시 힘차게 날았으면 좋겠어.”
아내의 바람대로 우울하게 시작했던 나의 타이완 여행은 밝고 희망차게 끝났다. 그 과정이 이 책에 담겨져 있다. -p.28
오랜만에 룽산쓰와 화시제를 다시 거닐었다. 이런 풍경들이 좋았다. 생의 중심에서 멀어진 채 살아가는 노인들의 노래 소리, 사회에서 낙오된 여인들의 웃음, 그리고 길거리에서 꼬치구이와 국수를 파는 초라한 상인들, 형편없는 달인 연주자와 그걸 보는 노인들.
이런 모습에 애정을 느끼는 나는 ‘초라한 루저’일까? 그래서 그런 이들을 보며 위안을 얻는 사람일까? 아니다. 혹은 먹을 것 챙겨 놓고 남들의 절박함과 초라함을 단지 감상적으로 바라보는 한량 같은 사람일까? 아니다. 나는 삶의 본질을 보고 싶었다. 사람은 상처를 받고 거꾸러져 봐야 삶의 본질을 본다. 사람들이 좇는 저 위의 화려한 것들이 허상임을 깨닫는 날, 풀 같은 보통 사람들의 삶이야말로 상처받은 우리를 위로하고, 넘어진 우리를 다시 일으켜 세우는 힘임을 알게 되는 것이다. -p.73
혼잡한 인파 속에서 깃발을 흔드는 중년 사내가 있었다. 한 사십 대 중반? 다가가 보니 아이스크림 장수였다. 젊은 사내는 아이스크림을 열심히 팔고, 중년 사내는 깃발을 죽어라 흔들며 목에 핏줄이 설 정도로 무어라 외치고 있었다.
깃발의 글자는 ‘夜市人生’.
그걸 보는 순간 가슴이 뭉클해졌다. 야시인생. 야시장에서 커 온 사람인지, 혹은 앞으로 자신의 생을 야시장에 한번 걸어 보겠다는 각오인지 모르겠다. 대단한 것도 아닌 아이스크림을 팔면서 깃발을 죽어라 흔드는 저 사내의 인생에 ‘뒷얘기’가 없을 리 없다. 그의 가슴속에 맺힌 슬픔, 좌절, 각오, 희망이 궁금했다.
야시장을 걸어 나오며 잠시 내게 물었다. 나는 무슨 인생이지? 여행인생? 작가인생? 저이처럼 죽을힘을 다해, 시장 한가운데서 ‘무슨무슨 인생’ 하면서 깃발을 휘두를 수 있는가? 세상 속에서 살며 세상 밖을 기웃거리는 경계인으로 살아온 나는 열정을 속에 삭이고 산다. 그래서 남에게 드러내 놓고 깃발을 휘두르는 사람은 아니다. 그러나 가끔은 그런 열정이 부럽기도 했다. -p.82
“낚시하러 갑니까?” “아뇨, 여행하러 갑니다.”
“혼자서요?” “예.”
“호텔은요?” “거기 가서 구하려고
첫댓글 이지상 지음 / 출판사 좋은생각 | 2011.06.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