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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저자 교십광 칠예<<漆藝>> 중국미술학원 출판사
제 2장 중국 칠예 역사(p7~p36)
중화민족의 장구한 몇 천년의 역사, 세상에는 무수한 진귀한 보물이 남아 있으며, 칠공예는 고대 화하(중국의 옛 명칭)문화 보고 중에서 반짝반짝 빛나는 귀중한 보배이다.중국은 일찍이 칠기를 사용했고, 오늘날 칠천년 역사에 이르렀다. 식석기시대의 주칠나무사발, 옻칠 도기 에서부터, 전국시대와 한나라 까지 발전했으며, 칠공예는 발전과 응용 범위가 아주 컸다. 한나라시대의 칠공예는 이미 비교적 과학적이고, 생산관리 방법이 구성 되어 있다. 위진남북조시대, 칠기는 회화의 영향을 받았고, 평면 칠의 한계를 타파했으며, 무지개 빛깔, 진주 빛(보는 각도에 따라 색이 변함)의 새로운 기법이 출현했다. 당나라 시대는 금은 평탈 칠기가 발전하였으면, 조칠(기물에 여러 차례 칠을 바르고 말린 후 각종 무늬를 부조한 것)이 발견했다. 송나라와 양나라시대, 금도금 조칠(기물에 여러 차례 칠을 바르고 말린 후 각종 무늬를 부조 한 것) 이 발전 되었기 때문에, 칠기가 더욱더 번창했다. 명나라와 청나라시대에는 중국 칠기 발전의 왕성한 시기에 도달하였다.
제 1, 신석기시대와 하, 상, 주 칠기
칠기 그 자체가 나무즙을 칠하는 것에서부터 나무 자체 , 그것을 관점으로 볼 때, 나무의 사용과 천연칠의 발견은 그렇게 긴 시간의 차이가 나지 않는다. 원시시대, 유인원에서부터 도구가 사용되기 시작했고, 나무와 돌덩이는 떼어 놓을 수 없는 인연이다. 도구에서부터 건축 까지 시종일관 나무를 떠날 수 없다. 왜냐하면 나무는 쉽게 수집 할 수 있고, 쉽게 조소할 수 있으며, 돌보다 사용 범위가 넓다. 토템(totem)의 발전에 따라, 사회 정신적 생활이 나날이 풍부해 졌고, 목재 기물의 범위가 넓어 졌으며, 이에 따라 제기 등이 확대 되었다. 이외에, 천연 칠 그자체가 바로 나무껍질을 자르고 나무 액을 체취하고, 산림 중의 생활에 서 대량으로 목재를 이용하여 도구와 기물을 제작하는 원시인 을 예를 들자면, 그들은 그것이 어렵지 않다는 것을 발견했다. 중국고대 문헌 기록에 근거하면, 우순제 때 칠기로 만든 식기와 제기를 사용했다. 신석기 시대의 고문 유적 중, 옻칠로된 나무사발, 옻칠 항아리, 옻칠 주전자, 옻칠 술잔과 제자용 잔등이 발견되었으며, 대부분이 생활 식기 이다. 상나라 시대에는 칠기 제작에 더욱 신경을 썼으며, 기물 태(어떤 기물의 원형, 바탕)骨은 두꺼운 목태(木台)로 많이 이용되기 시작하였다. 색칠로 옻칠 하는 거 외에, 청동기에 연한부조 혹은 조개상감기법, 옥석기법을 이용하여 제작하였고, 특히 놀란 것은 상조시대의 금박 상감기법의 발견이다. 그것이 중국 칠공예 역사상 상감 금박 공예의 시작이다. 칠공예는 서주 까지 발전하였으며, 채색과 상감기법은 주요한 장식기법이 되었고, 색채와 상감은 결합하여 자주 사용되어졌다. 절강에 남아있는 아름다운 하무도(河姆渡)는 신석기시대유적 제 3 문화층의 고고의 발견이고, 그것은 찬란한 한부분이며 칠예 역사에 보탬이 되었다. 눈앞에 펼쳐진 하나의 칠그릇, 그것은 칠기 기원의 근 칠천년의 역사를 넘어무너 뜨린다. 그 칠그릇은 나무 재질이고, 렴구, 복부눈 과능형 모양이고, 하부는 동그랗게 되어 있으며, 칠그릇의 내부와 외부모두 빨강색 도료를 이용해 옻칠하였고, 그것이 오늘날에 이르러 우리가 알고 있는 가장 오래된 칠기의 실물이다(그림1). 그러나 사물의 발전 규칙에서 보면, 옻칠나무의 칠원액 에서부터 옻칠을 이용해 배합, 주칠을 이용한 옻칠 기물의 과정에서 판단해 보면, 그 기간은 필연적으로 상당히 긴 발전 과정이다. 이로 추단하여, 중국이 가장처음으로 옻칠을 이용해 물건을 제작한 것은 칠천년 전이고 아주 긴 시간이다.
주칠그릇과 동시에 칠기 잔등멸(纏藤蔑)주칠 목간이 발굴되어 나왔으며, 바탕의 바른 나무 토막을 가공하여 이용한 것으로 원통 내 외부는 모두 밝고 깨끗하고, 두께는 균일한 타원형으로 판단 된다. 외벽의 양단에 단단한 등멸에 동그랗게 테를 두르고, 칠기외벽에 옻칠은 한 층의 비교적 얇은 주칠장물이고, 비록 많은 시간이 경과 하였지만, 여전히 광택이 희미하게 남아 있음을 알수있다 (그림2). 주의 깊게 볼 것은 , 태등의 활용이다. 그것은 춘추시대에는 날조한 대나무 바탕의 출현을 뒷일을 위해 암암리에 감추었다.
절강안휘향요산9호묘에서 옥으로된 높은 손잡이가 있는 컵이 발굴 되었고, 그것은 良渚문화시기에 발견되었고, 칠기와 옥조각을 함께 결합하면, 더욱더 그것을 심미가치가 두드려 진다고 설명되어지고 있다(그림3).
강소吳江의단결촌 良渚문화유적 중, 옻칠 색채 토기 잔은 깨끗이 처리되었고, 강소梭堰의 유적중 綜地 노랑과 빨강 두가지색의 칠화 흑 토기 주전자가 발견되었다.그런 발굴 문화는 중국에서 이미 생칠을 응용하여 토기를 제작 한 것으로 설명 되어지고 있다.
중국 칠공예는 노예사회에 진입한 이후에 상나라시대에 더욱 발전 되었다.
1973년 하북藁成台西촌유적중, 적지 않은 상나라 칠기 자여 조각이 발굴되었고, 발굴된 칠기는 비로 이미 부패 되었지만 가장 큰 근본 형태는 여전히 식별할 수 있었으며, 쟁반도 있었고 작은 통도 있었다. 어떤 것 표면에 주칠을 이용하여 바탕을 꾸며주었고, 흑칠을 이용한 制雷紋, 葉叶纹, 饕餮纹 등이 있었다. 어떤 것은 먼저 나무 바탕에 무늬 장식을 새기고 그 표면에 다시 옻칠을 한 것도 있었으면 그것은 일종의 부조 효과에 도달 한 것이다(그림4). 어떤 것은 장식도안위에 원형 또는 사각형의 터키옥을 끼워 넣는 방법도 있었다. 또 어떤 것은 금박을 붙이는 것으로, 두께는 약 0.1센티미터 정도이고, 이러한 기술은 이후 평탈 기법의 기원이다.
하남 라산 螓张乡(진장향)天湖村(천호춘), 상나라 말기 묘지에서 많은 칠기가 발굴 되었다. 그 중에는 나무로 된 그릇, 그것은 전체를 흑칠을 이용하여 옻칠 한 것이고, 나무의 바탕과 무늬의 관찰을 통해서, 그것은 가장 단단한 나무의 겉판으로 시행 제작 하는 것으로 보인다. 또한 그것은 우리가 알고 있는 가장 일찍이 제작되어진 나무로 된 칠기 선반 이다(그림5). 이 나무로 제작되어진 선반의 특징은: 기물 형태가 아주 정연하고, 그릇의 입구에서 바닥의 각도가 아주 자연스럽고, 내외 표면은 매끄럽다.
이번 발굴의 칠기 중 완전하지 못한 흑칠목纂(찬)도 있었다. 그것은 고대 무기와 창, 미늘창(옛날, 무기의 하나)과 기물의 손잡이고, 그것은 위쪽에 다섯 겹의 얇은 선이 감겨 있었고, 손잡이 부분에는 바둑판 모양의 방격(方格)雲雷纹으로 구성되어 있고, 각 도안은 네겹의 방격(바둑판모양) 과 하나의 십자로 구성되어 있고, 주의 깊게 봐야 할 것은 방격의 꽃무늬의 높고 낮음은 순서가 있음이 뚜렷하게 보여 진다. 그것은 표면이 평평하지 않고, 근대 조칠과 유사하다(그림6). 만약에 손으로 겹겹이 감았다면 도안의 높고 낮음을 순서있게를 할 수 없을 것이며, 그럼 도대체 어떤 공예 이며 한걸음 나아가서 관찰 고증할 것을 기다리고 있다.
주나라의 칠공예의 응용 범위는 나날이 넓어졌고, 나전 칠기도 발달 되었다. 천연 생칠은 점도와 튼튼함의 성능을 가지고 있고, 어떤 종류 혹은 그 외 여러 종류의 물체를 이용한 나전 장식을 모두 상감 이라고 불렀다. 대표적으로 북경유리하남제국묘지에서 발굴된 서주칠기이다. 漆豆(두)옛날 제기의 하나.(나무로 굽이 높고 뚜껑이 있게 만듦), 漆고(술잔고)-옛날 글자를 쓰던 목판, 漆뢰(술그릇 뢰)옛날에 사용하던 술잔, 漆壺(주전자),漆궤(궤 궤)고대에 제사 지낼 때 서직을 담던 귀가 달린 나무 그릇,漆杯(잔), 漆磬(옛날 타악기의 일종), 漆俎(옛날에 쓰던 도마) 등 많은 종료의 목태 칠기가 있었고, 그중 漆豆(두)옛날 제기의 하나.(나무로 굽이 높고 뚜껑이 있게 만듦), 漆고(술잔고)-옛날 글자를 쓰던 목판, 漆뢰(술그릇 뢰)(옛날에 사용하던 술잔 )는 가장 근사하고 멋있었다. 세 가지 모두 목태 이고, 漆고(술잔고)-옛날 글자를 쓰던 목판, 漆뢰(술그릇 뢰)(옛날에 사용하던 술잔 ) 는 모두 바탕이 주칠로 되어 있고, 갈색칠의 꽃무늬, 漆豆(두)옛날 제기의 하나.(나무로 굽이 높고 뚜껑이 있게 만듦)은 갈색칠의 바탕에 빨강색 칠을 이용했다. 칠기의 외벽은 모두 상감, 상감의 나전 표면이 평평하고 매끄럽고, 가장자리는 질서 정연하며, 이음매는 아주 정교하다. 이것은 당시의 조개껍질 상감과 연마제작 기술은 이미 상당한 주순이 도달했다고 설명된다.
제2 춘추, 전국 시대의 칠기
춘추 전국시대가 되면서, 옻나무의 분포가 아주 넓어 졌고, 대 면적의 인공 종식이 출현했으며, 철학자 장자는 일찍이 옻 밭 관리를 담당 했다. 옻밭 경제와 사람의 일상 생활 필수품 뽕나무 마 임업과 염업 모두한테 섞어서 중요하다. 사회 생산력의 발전으로 하여금 칠공예의 빠른 발전을 얻을 수 있었다. 춘전 전기가 되면서, 각종 공예 상호간의 영향이 나날이 두들어졌다. 칠의 응용은 나날이 넓어지고, 칠공예의 내포는 나날이 풍부 해졌다. 수공 조건이 높아짐에 따라 칠공예의 정교한 정도는 더욱더 높아 졌다.
춘추전기에는 목태 이외에, 죽편태(竹編胎)(籃胎)가 출현하였다. 전국시대에는 칠기 태골(胎骨)과 목태(木胎)가 주를 이루었다. 그러나 공예상의 중요한 발전이 있었고, 특히 전국 중말기칠기胎骨은 약간 얇아 졌고, 얇은 목태(木胎)칠기가 뚜렷하게 증가 하였다. 그리고 협저태가 출현했다. 협저태라 하면, 천과 골회를 이용하여 칠기의 태골(胎骨) 을 만들었다. 이러한 종류의 태골(胎骨)의 특징은 얇고 가벼우며, 조형은 어느 정도의 자유성을 가질수 있다. 태골 제작기술의 발전하였기 때문에 그로 인해 당시 칠기 조형품의 종류가 갑자기 증가하였고, 응용 또한 더욱더 광범위 해졌다. 형식에는 여러 모양이 있고, 실용과 미관의 결합으로 좋은 작품을 얻을 수 있었다. 이 시기에 아주 유행하는 장식 기법은 색채와 추화(錐畵)기법이다. 추화는 전국시대 새로이 출현한 기법중의 하나이고, 그것은 바로 뾰족한 공구를 이용하여 칠기의 표면에 용수철처럼 세밀하게, 막힘없이 나풀거리는 선을 부조 하는 것이다(그림9).
그 외에 조각과 색채가 함께 결합된 형식의 작품이 출현했고, 그 장식 기법은 나무로 제작된 칠기 모양위에 칼을 이용하여 조각하고 꽃무늬 자수를 새긴 후에 다시 옻칠을 한다(그림10).
전국 중말기에 발굴한 칠기 중 구리로된 사각 모양의 칠기도 발견되었고, 원형공예 제작이 진보되었기 때문에 얇은 목태의 협저태; 가볍고 정교하며 단단하고 내구성이 좋으며, 기물의 가장자리 입구에 얇은 은 조각의 둥근 바퀴모양의 테를 끼워 넣었고 이것을 이름하여 "구" 기, "금(金)은(銀)구(두드릴구)" 한나라 시대에 매우 넓이 유행했다(그림11).
1971년 산동(山東)監淄郞家庄, 춘추 말기 무덤에서 대량의 칠기가 발굴되었다. 그 중 하나는 원형 잔여 조각이다. 원형 중앙에는 3마리의 포유동물이 데굴데굴 구르면서 장난치고, 외벽에는 네 채의 건물이 그려져 있으면 집에는 사람이 그려져 있었다. 집은 사람의 키와 비슷한 높이고, 짧은 기둥이 받쳐 들고 있고, 집에 인물들의 자태는 제각기 차이가 났다. 어떤 사람은 두 손으로 물체를 머리 꼭대기 까지 올려 들고 있고, 어떤 사람은 손을 사물과 접촉하도록 내밀고, 어떤 사람은 몸을 굽히고, 어떤 사람은 몸을 세워 두 손으로 받쳐 드는 시늉을 하고 있으며, 그림은 아주 생동감 있고 형식감이 강화게 나타나 있다(그림12).칠화 공예는 이미 아주 능숙하고 숙련된 상태에 이르렀다.
전국시대는 중국 칠 공예 역사상 최초의 번창을 맞이 하였을 뿐만 아니라 오랜 시간동안 쇠퇴되지 않았고, 서한까지 계속해서 이어져 갔다. 전국시대는 중국 봉건 사회가 급속히 발전한 시기이고, 칠기가 보편적으로 사용되었기 때문에, 사회 생산력의 급속히 높아지고, 수공예역시 더욱더 발달되며, 노동 분담이 나날이 세밀하고 생산 구성이 적지 않게 확대 되었으며, 각종 공예를 포함한 칠공예의 발전에 좋은 조건이 창조 되었다. 칠의 장점은 날이 갈수록 사람들로 하여금 인식하게 하고 받아 들여 지면, 그것은 변하지 않는 광택, 화려한 색채, 편리함, 감편함, 부패 방지, 내열성이 강함, 깨끗함, 무 냄새 이다. 칠기의 장식 수단은 끝없이 나타났고, 자유로우며 기물의 크기에 제안이 없으면 형태는 스스로 필요한 것에 근거하여 재빠르게 변화 시킬 수 있다. 그런 장점은 銅器와 기타 그릇에 비교할 수 없다. 그래서 인민의 많은 사랑을 받았고, 날날이 일상생활에 사용되어진 청동기 대신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고고 전국시대 발굴된 칠기에서 보면, 생산량, 품종, 정교 할뿐만 아니라 분포 범위 모두 이전에 어떤 시기의 물건과 비교 되지 못한다.
전국 시대의 칠기는 대부분 초나라 묘에서 발굴되었으며, 초나라 당시 영역은 광활하고 넓었으며, 토지가 비옥하고 산물이 풍부하며, 수공업과 상업이 아주 발달 되어, 그래서 칠공예의 번영에 튼튼한 기초가 되었다.
호북 강릉은 초나라 묘가 가장 집중되어 있는 곳이고, 남쪽 성 구역은 춘추 전국시대 초 나라의 고도이다. 城東雨台山위의 초나라 묘지, 시대 경간에서 보면 춘추시대 초기에서부터 전국시대 말기까지고, 그곳에서 대량의 칠기가 발굴 되었다. 전국시대 칠기는 춘추 시대 칠기보다 아주 많다. 그중 최초 발견된 鴨形豆(오리 형상의 그릇;豆(두)옛날 제기의 하나.(나무로 굽이 높고 뚜껑이 있게 만듦))등이 있다. 鴨形豆, 목태, 豆座(좌:받침) 나팔형식의 모양이며, 뚜껑과 합쳐 몸을 웅크리며 졸음이 충만한 한 마리의 오리 모양이며 머리를 몸의 날개 쪽으로 오그리려 아주 평안함이 두드려진다. 오리의 머리와 날개 부분은 새기였고, 대부분의 깃털은 흑칠 바탕에 주로 주홍, 황금색을 이용하여 묘사했으며, 조형은 간결하고 풍부했다. 조각과 그림이 결합한 완벽한 아름다움을 얻을 수 있었다. 용기내부는 주칠을 이용하였고, 오리의 꼬리 양쪽은 두 마리의 오리와 대칭하는 봉황이 그려져 있었으며, 漆豆의 손잡이 부분과 받침에는 삼각형 구름무늬와 새털구름 무늬과 장식되었있고, 鴨形豆의 조형은 정교하고 아름답다. 색채는 눈부시게 아름답고, 배합이 잘 어울리며, 중국의 고대 옻칠 공 예사들은 아주 놓은 기술감지력을 가지고 있다고 충분히 설명할 수 있다(감상그림6).
전국시대 초문화와 천지 귀신 신양은 특수한 관계를 반영하고 그것은 색채목조진묘수 이며, 그것 또한 한번 봐야한 예술품이다. 진묘수는 묘주의 보호신을 상징하고 있으며, 신묘, 그것은 사악을 없앤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진묘수는 일반적으로 사슴뿔, 頭面(옛날 부녀자들의 머리 장식품),立座 세부분으로 구성 되어 있다. 그중 사슴뿔이 가장 중요하며, 긴 것도 있고 짧은 것도 있으며, 복잡한 것과 단순한 것도 있다. 그러나 모두 좌우 대칭을 이루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일반 적으로 모두 실제 사슴뿔을 이용하여 제작하였다. 頭面은 짐승모양, 사람모양, 묘사, 조각등이 있다. 하북信陽長台關에서 전국 추나라 묘중 색채진묘수가 발굴되었고, 전체 높이는 1.4미터, 전체 짙은 갈색을 이용하여 칠하였고, 금 은 색을 이용하여 비늘을 묘사하였으며, 머리에는 두 개의 사슴뿔이 박혀 있었고, 두 귀는 수직을 똑바르게 서있으며, 눈은 둥글고 크며, 입은 넓으면 혀의 길이는 복부 까지 왔으며, 두 개의 팔다리로 뱀을 잡아 입으로 통째로 삼키는 모양이고, 외모는 매우 흉악하다. 작가는 진묘수의 사악함을 두드려지게 묘사하기 위하여 조형과 색채는 아주 과장게 표현 하였다.(그림13).
전국 시기의 칠기가 끊임없이 발굴됨에 따라, 우리는 볼수 있었다. 전국 시기 칠기는 이미 사회가 영역에 응용되고 있고, 생활공구로 예를 들자면, 술잔, 豆, 접시, 상자, 경대(화장상자)등; 가구를 예를 들자면, 책상, 선반, 침대; 악기로는, 북 종 거문거랑 비슷한 현악기; 무기로는, 창, 방패, 활, 화살 장대, 화살넣는 전동; 장례 용품으로는, 칠 관, 관내부 시체를 받치는 꽃 판, 묘실 내부의 진묘수 등이 있다. 우리는 전국 시대 문화생활을 이해할수 있고 큰 작용을 했다는 것을 알수 있다. 長沙市五里牌406號전국시대묘중 처음으로 색채 용무늬가죽 방패가 발견되었고 방패의 형태는 조롱박 모양과 비슷하였으며 아래 좌우는 사각형 모양이다. 방패의 등쪽은 약간 높이 솟아 올라 모가 나있으며, 뒷 부분은 손잡이가 있으며, 현재에는 이미 벗겨 졌다. 그러나 손잡이 한쪽 금 동 손잡이 장식은 여전히 보존 되어 있었다. 가죽바탕에 방패의 양쪽은 전부 흑칠로 되어 있으며, 옻칠 방패의 정면 가장자리는 홍갈색의 구름모양의 장식이 있고, 중간에는 황, 홍색으로 구불거리는 용 모양을 묘사 하였다. 뒷면장식과 정면은 약간의 차별이 있으면, 가장자리 장식은 홍 황 색을 이용하여 구름모양을 묘사하였고, 중간은 홍색을 이용하여 용을 묘사 했다. 고대 문헌 기록에는, 방패는 두가지 용도가 있다; 한가지는 실제 전쟁에서 사용되며, 또하나는 무도용으로 쓰이는" 만무"(萬舞). 만무는 전쟁을 무도로 본뜬 것이고, 이런 무도를 연출할 때 방패, 척(고대 도끼와 비슷한 무기) ,창 모두 무도의 공구이다. 옻칠 방패의 노동 도안은 아주 정밀 한것을 우리는 발견할 수 있고, 그것은 실제 방어용 무기 같지 않고 무도용 방패일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그것은 의장대가 지닌 무기나 의장기 또는 기타 장식물 일수도 있다(그림14).
호북성형문시포산3호 초나라 묘에서 발굴된 다량의 칠기 중에서, 색채(出行圖)의 칠화장상자(경대)가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다. 그것은 원형, 곧은면, 협저태, 전체가 상자 뚜껑 과 몸채 두부분으로 나눈다. 상자 내부는 모두 주칠이고 외부는 전부 흑칠을 한 후, 빨강, 황금색, 파랑, 주황 네 색을 이용하여 묘사했다. 전체 칠 화장상자에는 두 대의 마차, 두 대의 차, 아홉 마리의 대아, 두 마리 개, 한 마리 돼지, 다섯 그루나무, 그리고 말을 모는 사람 타는 사람, 시인 모두 26명이고, 차, 말 ,인물 이 (出行圖)에 절묘하게 묘사되어 있다. 조형은 우아하고 아름다우며 배치가 합리적이고 기품 있어 전국시대 칠화 중 보배라고 부를만한다(그림15).
종합적으로 애기 하자면, 전국시대의 칠기 장식 기법과 전국시대 이전과 비교하자면 많은 변화가 있음을 볼수 있고, 그로하며금 칠기은 더욱더 풍부하고 다채로왔다. 칠기 공예가 나날이 발전함에 따라, 전문적으로 칠 생산 관리 부분이 설립되어, 정부의 관리 실행하였고, 분담이 나날이 세분하 지면서, 전문 공예, 전문 노동자 제도가 실행되었다. 그후 적지않은 민간 개인장소들이 생기고, 개인 작업장이 출현함으로써 칠예 공예의 번영이 한걸음더 나아 가 추진되었음을 알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