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反躬自省(반궁자성)
反:되돌릴 반, 躬:몸 궁, 自:스스로 자, 省:살필 성.
어의: 잘못된 원인을 자신에게서 찾는다. 즉 허물을 자기 자신에게서 찾아 고친다는 말이다.
문헌: <익재난고 익재진자찬(益齋亂藁 益齋眞自贊)>
이재현(李齋賢.1287~1367)은 고려 제25대 충렬왕(忠烈王) 때의 유학자로 본관은 경주(慶州)이고, 호는 익재(益齋). 실재(實齋). 역옹(역옹)이다.
15세에 성균관시(成均館試)에 장원으로 합격하였으며, 22세에 예문춘추관(藝文春秋館)에 발탁되어 4번이나 재상을 지낸 뛰어난 정치가였다.
제현은 자기를 경계할 때면 이렇게 말했다.
“사슴을 좇는 자는 산을 보지 못하고, 돈을 움켜쥔 자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 가을철의 털끝 같은 작은 것은 살필 수 있어도 수레에 가득 실은 땔나무는 보이지 않는다. 이는 마음이 오로지 한곳에 쏠려 있고 눈이 다른 데에 미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는 충선왕(忠宣王)을 따라 원(元)나라에 갔다가 그곳 수도 연경(燕京)에서 뛰어난 재능으로 문재(文才)를 드러냈다. 그래서 그곳의 인재 조맹부(趙孟頫) 등과 교류하며 지냈다. 그는 평소 이렇게 말했다.
“우임금은 물에 빠진 사람이 있으면 자기가 그를 빠지게 한 것같이 여겼고, 직(稷)은 굶주린 사람이 있으면 자기가 그를 굶주리게 한 것같이 여겼다. 하늘이 큰 인물에게 소임을 맡길 때는 이 세상을 구제하려 함인데 곤궁하고 불쌍한 사람을 보고도 구제할 생각을 않는다면 어찌 그것이 하늘의 뜻이라 하겠는가, 그리고 높은 곳에 올라 아래를 내려다보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닌데 왜 몇 걸음밖에 굽어보지 못 한단 말인가?”
그는 또 모든 잘못은 남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있는 것이라며 자성할 것을 촉구했다.
“학문이 빈약하면 도를 깨닫는 것도 늦는 것이 당연하다. 이 모든 것이 나에게서 나오는 것이거늘 어찌 스스로 반성하지 않는가? 내가 이제 나이 들어 벼슬에서 물러났으니 뭇사람들의 비방만 듣겠구나, 분명히 말하노니 한 번 보고 세 번 생각하라. 그리고 쉬지 말고 공부하라.”
그는 선비들의 삶을 다음과 같이 말했다.
“사람의 재주는 배의 노와 같고, 운명은 그 배에 불어오는 순풍과 같은 것이며, 순풍에 이끌려가는 돛배라 할지라도 그 배를 운용하는 사람이 그만한 인물이 되지 못하면 세상의 거친 파도와 풍랑을 어떻게 헤쳐 나가겠는가?” 라고 하였다. 이를 일러 반궁자성, 또는 반궁자문(反躬自問)이라고 한다.
(임종대 편저 한국고사성어에서)
半船之運(반선지운)
半:반 반, 船:배 선, 之:어조사 지, 運:운수 운.
어의: 몸의 반은 배 위에, 반은 땅 위에 있는 운이라는 말. 피할 수 없는 운명을 뜻한다.
문헌: 태종실록(太宗實錄), 한국인명대사전(韓國人名大辭典)
조선 태조(太祖) 이성계(李成桂. 재위1392~1398)는 제1차 왕자의 난에 화가 나서 왕위를 방과(方果. 정종(定宗1357~1419)에게 물려주고 함경남도 함흥으로 가서 은거했다. 이에 아들 방원(方遠)이 제2차 왕자의 난을 일으켜 정종으로부터 왕위를 이양 받아 태종이 된 후, 아버지를 모셔오고자 차사(差使)라는 임시 벼슬을 내려 수차례 보냈으나 그때마다 이성계는 차사를 죽여버렸다. 하여 한 번 간 후 돌아오지 못하는 사람을 빗대어 함흥차사(咸興差使)라고 했다.
그러자 차사에 지원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그때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박순(朴淳)이 스스로 다녀오겠다고 자원했다. 그는 이성계에게로 갈 때 새끼가 딸린 어미 말을 데리고 가서 새끼 말은 이성계의 집 앞 나무에 매어 놓고 어미 말만 타고 안으로 들어갔다.
박순과 이성계가 대청에 마주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어미 말이 새끼를 찾으며 애타게 울었다. 태조가 이 광경을 보고 박순에게 그 까닭을 물었다.
“어미 말이 새끼와 떨어지지 않으려고 그러하옵니다. 비록 짐승이지만 지극한 정이 가상하지 않습니까?”
이성계는 박순과 친구 사이라서 바둑을 두며 서로의 정을 나누었다. 그때 천장에서 어미 쥐가 새끼를 안고 떨어졌다. 어미 쥐는 떨어지고 나서도 새끼를 안고 있었다. 그것을 본 이성계가 가상히 여기자 박순은 그때서야 비로소 자기가 태종의 명을 받은 차사임을 밝히고 울면서 간청했다.
“하찮은 미물인 쥐도 죽을 때까지 제 새끼를 감싸주는데 하물며 사람으로서 어지 자식을 버릴 수 있겠나이까? 지금 태종이 오매불망 전하를 그리워하고 있사오니 이제 그만 노여움을 푸시고 저와 함께 귀경하시옵소서!”
이에 감동한 이성계는 함주(咸州)에 들렸다가 돌아가겠다고 했다.
박순은 그렇게 확약을 받고 귀로에 올랐고, 태조는 지금까지와는 달리 그를 살려주어 돌아가게 했다.
그러나 이성계의 신하들이 전례와 같이 죽여야 한다고 주장을 펴고 나섰다. 이성계는 옛 친구와의 정을 생각하여 그를 죽이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그가 용흥강(龍興江)을 충분히 건너갔으리라 생각되었을 때 그를 죽이라 명령하면서 조건을 달았다.
“만약 그가 이미 강을 건넜으면 더 쫓지 말도록 하하.”
그러나 불행하게도 박순은 몸이 불편한 탓으로 시간이 늦어져 명사들이 도착했을 때 몸의 반은 육지에, 반은 강을 건너는 배 위에 있어 그만 죽임을 당하고 말았다.
이성계는 반선지운(半船之運)으로 죽은 옛 친구를 그리워하며 매우 슬퍼했고, 박순의 아내 임씨(임씨)는 남편이 죽었다는 부음을 듣고 자결했다.
태종은 그의 공을 찬양하여 충민(忠愍)이라는 시호를 내려 충신으로 칭송하고, 그의 고향에 충신. 열녀의 두 정문(旌門)을 세우게 했다.
(임종대 편저 한국고사성어에서)
放下犬聲(방하견성)
放:놓을 방, 下:아래 하, 犬:개 견, 聲:소리 성.
어의: 개소리를 그만하라. 즉 이론이나 상황에 맞지 않는 허튼소리는 하지 말라는 뜻이다. 말을 할 때는 전후,
좌우상하를 가려서 하라는 의미로 쓰인다.
문헌: <한국인의 지혜. 잡기(韓國人의 智慧. 雜記)>
논산 대곡에서 3대째 소농을 경작하면서 살던 안두기(안두기)라는 사람이 생일을 맞자. 자식들이 기르던 개를 잡아서 생신 상을 차리려 했다. 그런데 눈치를 챈 개가 사람 곁으로 오지 않고 슬슬 피했다. 그러다가 안두기가 볼일을 보러 변소에 들어가자 개가 따라 들어갔다. 그것을 본 큰 아들이 올가미를 감추고 변소 문 뒤에 숨어서 기다렸다.
잠시 후, 변소에서 나오는 개에게 올가미를 씌우려고 덤비자 개가 놀라서 도망치다가 그만 마당가의 우물에 빠질 뻔했다. 마침 우물가에서 손을 씻으려던 둘째 아들이 엉겁결에 개의 뒷다리를 붙잡았다. 개를 잡긴 했으나 하도 요동치는 바람에 도움을 청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변소에 있는 아버지에게 급하게 말했다.
“아버지 빨리 나오시오. 아버지 빨리…….”
그런데 그 모습이 우물에 처박힌 개를 거꾸로 붙잡고 외치고 있어서 마치 개를 아버지라 부르는 형국이었다.
그렇게 어렵사리 개를 잡아 가마솥에 안치고 불을 지폈다. 그때 셋째 아들이 방으로 들어와 아버지가 앉아 있는 방석 밑에 손을 넣어 방이 따뜻한지 만져 보면서 말했다.
“방금 개를 안쳤더니 방이 뜨뜻해 오네요.”
이번에는 아버지가 방석 위에 앉아 있는 것을 보고 개를 안쳤다고 하니 아버지가 개가 된 꼴이었다.
음식이 다 마련되자 동네 노인들을 청해 놓고 술과 개고기를 대접하니 모두들 소매를 걷어 올리고 맛있게 먹으면서 뼈다귀를 휙휙 문밖으로 내던졌다. 그러자 동네 개들이 모여들어 서로 으르렁거리면서 다투어 먹었다. 이것을 본 넷째 아들이 말했다.
“허허, 오늘이 개 생일이구먼.”
그날이 자기 아버지 생일인 것을 생각하지 않고 개들이 잘 먹는다고 개의 생일이라고 한 것인데 마치 자기 아버지를 개라고 지칭한 꼴이 되었다.
안두기는 아들이 열 형제나 되어 아들들이 서로 먼저 아버지의 생신을 축하하려고 여기저기서 모셔가려 했다. 그래서 큰 아들이 이를 확인하려는데 다섯째가 보이지 않으므로, 자기 아들에게 다섯째 작은 아버지에게 가서 어떻게 할 것인지 물어보고 오라고 했다. 아이가 다섯째 작은 아버지 집에 가서 말했다.
“오늘 할아버지 저녁 진지를 어느 댁에서 차릴 것인지 물어보고 오래요.”
마침 다섯째 동생이 뒷간에 있었는데 식구들이 다 분주했던 탓으로 미처 대답하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그래서 조카가 아무 대답도 못 듣고 그냥 가버리면 안 되겠다 싶어 소리를 질렀다.
“할아버지 저녁 진지는 여기서 차린다고 전해라!”
그 뜻은 우리 집에서 모신다는 것이었는데, 변소 안에서 ‘여기서 차린다’ 고 하니 아버지는 그냘 저녁 밥상을 뒷간 안에서 받아야 할 판이었다.
안두기는 아들들을 다 세간을 내어주고 막내아들과 함께 살고 있었다. 그런데 기르던 개를 잡아먹고 나니 도둑이 들까 걱정이 되어 말했다.
“애들아, 어디서 강아지 새끼라도 하나 얻어다가 기르면 어떻겠느냐? 함께 있던 짐승이 없어지니 서운하구나.”
그러자 아들이 말했다.
“아버지, 이젠 개소리 좀 그만하세요.”
개에 대한 이야기를 그만하라는 말이었는데, 아버지의 말이 개소리가 된 꼴이니 또 실수였다.
말은 조금만 부주의해도 엉뚱한 뜻으로 바뀔 수 있다.
어떤 사람이 자기 어머니를 승용차의 옆자리에 모시고 가며 아버지에게 이렇게 말했다.
“집에서 어머니를 싣고 가서 장터에 내려놓고, 거기서 작은아버지를 싣고 가서 작은아버지 집에 내려놓고 난 다음, 다시 장을 본 어머니를 싣고 오겠습니다.”
이 말은 어머니와 작은아버지를 차에 싣는 물건으로 취급한다는 뜻으로 들린다. 말은 항상 주의해서 하라는 가르침을 주는 이야기이다.
(임종대 편저 한국고사성어에서)
百結碓樂(백결대락)
百:일백 백, 結:맺을 결, 碓:방아 대, 樂:풍류 락.
어의: 백결의 방아악이라는 말로, 백결선생이 가난을 슬퍼하는 아내를 위로해 주기 위하여 거문고를 연주했던
고사에서 유래했다. 어려움을 참고 이겨내는 의연한 태도를 이른다.
문헌: 삼국사기 열전 제8
신라 제20대 자비왕(慈悲王) 때 악성 백결(百結) 선생은 백성들의 살림이 어려워지자 왕에게 정치를 바로 잡아야 한다고 상소했다. 그러나 개선의 기미가 보이지 않자 벼슬을 버리고 경주 낭산(狼山) 밑에서 숨어 살았다. 자연히 살림살이가 가난해져 옷을 누더기처럼 백(百) 곳이나 기워(結.결) 입고 다녔는데 마치 온몸에 메추라기를 달아 맨 것과 같아 그를 동리(東里) 또는 백결 선생이라는 별호로 불렀다.
어느 해 세모(歲暮)에 다른 집에서는 떡방아를 찧는 소리가 요란했으나 백결 선생의 집에서는 그러하질 못했다. 그러자 그의 아내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곡식이 있어 설을 쇠는데 우리는 그렇질 못하니 어떻게 차례를 지내리까?”
그러자 백결 선생이 말했다.
“”대저 사람이 죽는 것은 명(命)에 달려 있고, 부귀(富貴)는 하늘에 달려 있는 것이오, 오는 것을 막지 못하고 가는 것을 쫓을 수 없는 것이 인생인데 그대는 어찌 그렇게 마음 상해하시오? 내 그대를 위하여 떡방아 찧는 소리를 연주해주리니 마음이라도 즐겁게 가지시오.“
그러고는 거문고를 잡고 덩더쿵! 덩더쿵! 하고 떡방아 찧는 소리를 연주했다. 이것이 그의 유명한 ‘방아악’, 즉 대악(碓樂)이지만 안타깝게도 곡은 전하지 않는다.
백결 선생은 인간의 희노애락(喜怒哀樂)의 모든 심사를 거문고 가락에 실어 풍미하였다.
후세 사람들은 신라 사람으로서 공명정대하기는 김양(金陽)만한 이가 없으며, 영웅호걸(英雄豪傑)로는 김유신(金庾信)만한 이가 없다. 그러나 백결 선생은 두 분을 합친 것과 같은 인격자였다고 칭송했다.
(임종대 편저 한국고사성어에서)
百死丹心(백사단심)
百:일백 백, 死:죽을 사, 丹:붉을 단, 心:마음 심.
어의: 백 번 죽어도 변하지 않는 마음이라는 말로, 고려의 충신 정몽주가 죽음을 무릅쓰고 충절을 지킨 고사에
서 유래했다. 오직 한 임금만을 위하는 절개를 뜻한다.
문헌: 조선명인전 포은집(朝鮮名人傳 圃隱集)
정몽주(鄭夢周. 1337~1392)는 목은(牧隱) 이색(李穡), 야은(冶隱) 길재(吉再)와 함께 고려 말 삼은(三隱) 중 한 사람이다. 그의 본관은 연일(延日)이고 호는 포은(圃隱)이며, 자는 달가(達可),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어머니가 그를 잉태했을 때 난(蘭)의 꿈을 꾸어 처음에는 이름을 몽란(夢蘭)이라 했다. 그가 아홉 살 때에는 흑룡(黑龍)이 나무에서 떨어지는 꿈을 꾼 후 나가보니 그가 나무 밑에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몽룡(夢龍)이라 했다가, 장성한 다음에 몽주라고 개명했다. 공민왕(恭愍王) 때 세 번이나 장원급제하였고, 벼슬이 삼중대광(三重大匡. 정1품)에 이르렀다.
고려 우왕(禑王) 때 성균관대사성으로 있던 정몽주는 배명친원(排明親元)의 외교 노선을 반대하다가 언양(彦陽)으로 유배되기도 했다. 그리고 1379년에는 조전원수(助戰元帥)가 되어 이성계(李成桂) 휘하에서 왜구 토벌에 참전했다. 그러나 이성계는 위화도(威化島)에서 회군한 후, 날로 세력이 강해져 마침내 조선 건국의 대업을 꾀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정몽주는 김진양(金震陽) 등과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고려를 지키려고 했다.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이성계의 셋째 아들 이방원(李芳遠)이 정몽주의 마음을 회유시키기 위하여 그의 뜻을 묻는 시조를 읊었다.
이런들 어떠하며 저런들 어떠하리. (如此亦何如 如彼亦何如.여차역하여 여피역하여)
만수산 드렁칡이 얽혀진들 어떠하리. (城隍堂後壇 頹落亦何如.성황당후단 퇴락역하여)
우리도 이같이 얽혀져 백년까지 누리리라. (我輩若此爲 不死亦何如.아배약차위 불사역하여)
이에 정몽주는 즉석에서 시를 지어 거절했다.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 (此身死了死了 一百番更死了.차신사료사료 일백번갱사료)
백골이 진토 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白骨爲塵土 魂魄有也無.백골위진토 혼백유야무.)
임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向主一片丹心 寧有改理也歟.향주일편단심 녕유개리야여)
어떤 일이 있어도 고려 왕조를 향한 마음은 변치 않으리라는 뜻이다.
정몽주가 고려에 대한 확고한 충성심, 즉 백사단심을 드러내자 이방원은 그의 마음이 변하지 않을 것임을 알고, 제거하기로 작정했다. 그래서 조영규(趙英珪)를 시켜 사냥을 하다가 말에서 떨어져 다친 이성계를 문병하고 돌아가던 정몽주를 선죽교에서 죽였다.
이방원은 훗날 왕위에 오른 뒤 그의 충절을 기리어 영의정에 추증하고, 익양부원군(益陽府院君)으로 추봉했다.
(임종대 편저 한국고사성어에서)
別室之祿(별실지록)
別:나눌 별, 室:방 실, 之:어조사 지, 祿:봉급 록.
어의: 별실에 쌓아둔 녹봉이라는 뜻으로, 의롭지 않은 돈은 그냥 보관만 할 뿐 쓰지 않는다. 또는 그 돈을 말한다.
문헌: 단종실록 선원계보(端宗實錄 璿源系譜)
조선 시대의 문신 하위지(河緯地.1412~1456)는 본관이 진주(晉州)요, 호는 단계(丹溪)이며, 시호는 충렬(忠烈)로 사육신(死六臣)의 한 사람이다.
그는 인품이 침착하고 말수가 적었으며, 오로지 집현전에서 학문에만 열중한 첫 손에 꼽히는 청백리였다.
1453년 수양대군이 조카 단종(端宗)으로부터 왕위를 빼앗고 세조로 등극한 후 하위지를 예조참의에 임명했다. 그러자 하위지는 이를 고사하고 고향 선산(善山)에 내려가 은둔했다. 그러나 세조가 강압적으로 명령하자 마지못해 부임은 했으나 ‘나는 단종의 신하이지 세조의 신하가 아니다.’ 하여 세조가 준 녹봉을 쓰지 아니하고 별도의 장소에 쌓아 두었다.
그는 다른 충신들과 함께 단종 복위를 꾀하다 탄로가 났으나 세조는 그의 인품을 아껴서 마음을 돌려 함께 일하자고 종용했다. 그러자 그는 단호히 말했다.
“ 이미 역적(逆賊)이라 이름 지었으면 응당 죽일 것이지 어찌하여 묻고 또 묻는 것이오? 아무리 그리해도 내 마음은 변하지 않을 것이니 더 이상 괴롭히지 마시오.”
그러자 세조가 말했다.
“너는 이미 내가 준 녹봉을 받아 먹었으니 짐의 신하가 되었는데 이제 와서 다른 말을 하는 게냐?”
“천만의 말씀이오. 나는 당신이 의롭지 않음을 알기에 당신이 준 부끄러운 녹봉을 한 푼, 한 톨도 축내지 않고 모두 별실에 따로 모아 두었소이다.”
세조는 그의 확고한 충절에 어찌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성삼문(成三問), 박팽년(朴彭年), 이개(李塏), 유응부(兪應孚), 유성원(柳誠源) 등과 함께 작형(灼刑. 불로 살을 지지는 형벌)에 처했다.
그는 나중에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같은 사육신의 한 사람인 성삼문도 역시 세조가 준 녹봉을 먹지 아니했다고 한다.
(임종대 편저 한국고사성어에서)
報恩緞洞(보은단동)
報갚을 보, 恩:은혜 은, :신 뒷축 단, 洞:고을 동.
어의: 은혜를 베푼 사람이 살았던 동네라는 말. 자기의 처지는 생각지 않고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을 도와 주었
는데 도움을 받은 사람이 훗날 큰일을 해결해준 고사에서 유래했다.
문헌: 한국인의 지혜(韓國人의 智慧)
조선 14대 선조(宣祖) 때 명나라 통역관 홍순언(洪純彦)은 한양의 미동(美洞)에 살았다. 그는 본래 호협한 사람으로 뛰어난 친화력이 있어 중국에 가는 사신을 수행했다.
통주(通州)에 도착하여 여정을 풀고 구경도 할 겸 청루에 놀러 나갔다가 몸을 판다는 여인의 글을 보고 찾아 들어갔다. 그런데 그녀가 소복을 한 채 수심이 가득하길래 물어보니 부모가 갑자기 병으로 돌아가셨으나 장사지낼 돈이 없어서 몸을 팔러 나왔다고 했다. 홍순언은 그 말을 듣고 거금 3백금을 몸값으로 주고 그녀를 청루에서 풀려나게 해주었다. 그녀는 무척이나 고마워하며 그의 이름을 물었으나 그는 다만 조선의 홍 역관이라고만 알려주었다.
그리고 귀국 후 그는 3백금이라는 막대한 국고금을 축낸 사실이 드러나 옥에 갇히게 되었다.
그 무렵, 명나라에는 태조 이성계의 아버지가 이자춘(李子春)이 아니라 고려의 권신 이인임(李仁任)이라고 잘못 알려져 그를 바로잡는 일로 외교적 마찰을 겪고 있었다. 그러니까 명나라에서는 조선 건국 후 200여 년간이나 이성계가 전주(全州) 이씨가 아닌 성주(星州) 이씨인 이인임의 아들로 잘못 알려져 있었다. 더군다나 이인임은 매관매직을 하다가 이성계에 의해 慘刑된 사람이었다. 그런 그를 태조의 아버지로 기록해놓고, 고려의 왕을 넷이나 죽이고 쿠테타로 정권을 탈취했으므로 정통성을 인정할 수 없다고 주장하면서 잘못된 기록을 수정해 주지 않고 있었다. 그러니까 <대명회전(大明會典)>의 잘못된 기록이 외교상 문제가 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13대에 걸쳐 15차례나 사신을 보냈으나 고쳐지지 않았다. 선조는 대로(大怒)하여 사신들의 잘못이니 꼭 바로잡도록 하라고 엄명을 내렸다. 그러자 대신들이 모여서 숙의를 했다.
“이 일을 해결하려면 명나라의 사정을 잘 아는 홍순언이 꼭 필요한데 그가 감옥에 갇혀 있으니 우리가 대신 공금을 갚아주고 그를 명나라로 보내기로 합시다.”
이렇게 해서 홍순언은 감옥에서 풀려나 주청사 황정욱(黃廷彧)과 함께 명나라로 가게 되었다.
홍순언이 사신 일행과 조양문에 도착하자 뜻밖에 예부시랑 석성(石星)이 마중 나오더니 뒤이어 기병이 달려왔다. 그러면서 ‘홍 역관이 누구냐’ 고 찾더니 홍순언을 정중히 모시고 가는 것이었다.
그가 한 객실에 들어 기다리니 지체가 높아 보이는 부부가 다가와 큰절을 올리고 나서 말했다.
“나으리! 저는 나으리의 은혜를 하루도 잊어 본 적이 없습니다.”
부인 옆에 있던 남편도 정중히 머리를 숙이며 말했다.
“통주에서 어른께서 베푸신 은혜는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어른께서는 천하의 대인이십니다.”
홍순언은 그때서야 몇 년 전의 일을 떠올렸다.
그 여자는 청루에서 나와 부모의 양반가도를 이어 받아 석성의 후처로 들어갔는데 석성이 출세하여 예부상서가 되었던 것이다.
석성이 홍순언에게 물었다.
“이번에는 무슨 일로 오시게 되었습니까?”
홍순언이 종계변무(宗系辨誣) 문제로 왔다고 말하자 그는 적극적으로 나서서 조선 왕실의 종계를 바르게 고쳐 주었다. 그리고 홍순언이 돌아올 때 그 부인이 손수 짰다는 비단 10필에 손수 보은단(報恩緞)이라는 글씨를 수놓아 홍순언에게 주었다.
귀국하자 사람들이 그 비단을 사러 홍순언의 집 앞에 구름처럼 모여드니 그 동네를 보은단동(報恩緞洞)이라 하였는데 지금의 서울 중구 소공동 롯데호텔 부근이다.
선조는 공이 큰 홍순언에게 2등 공신을 주고, 당능군(唐陵君)이라는 군호까지 내렸다.
임진왜란 때에는 홍순언이 지원병을 요청하기 위해 다시 명나라에 가니 석성이 병부상서로 승진하여 적극적으로 도와주어 일이 순조롭게 되었다. 홍순언은 역관 출신이어서 큰 벼슬은 못했으나 그의 손자 홍효손(洪孝孫)은 숙천부사를 지냈다.
(임종대 편저 한국고사성어에서)
覆椀之功(복완지공)
覆:뒤집힐 복, 椀:주발 완, 之:어조사 지, 功:공 공.
어의: 독약이 든 밥상을 엎지른 공이라는 말로, 왕을 독살하려 했던 이자겸의 난에서 유래했다.
어떤 일이 잘못 되었음을 알고 모험을 하면서까지 바로잡는 행동을 이른다.
문헌: 인물한국사(人物韓國史)
고려의 이자겸(李資謙.?~1126)은 둘째 딸이 제16대 예종(睿宗)의 비로 책봉되자 소성군개국백(邵城郡開國伯)의 자리에 올라 세력가가 되었다. 예종이 죽자(1122년) 그는 왕위를 탐내던 왕제들을 물리치고 외손자를 인종(仁宗)으로 옹립하고, 자기의 셋째 딸과 넷째 딸을 비(妃)로 삼게 했다.
그렇게 해서 막강한 위세를 얻자 자기 일파를 요직에 등용하고, 자기는 태자와 동등한 대우를 받았다. 또 매관매직을 통하여 부를 축적하고, 권세와 더불어 십팔자(十八子), 즉 이씨가 임금이 되리라는 참위설(讖緯說)을 퍼드렸다. 그리고 왕위를 찬탈하기 위해 인종을 자기 집에 초대하여 독살을 시도했다. 즉 자신의 딸인 왕비를 시켜 독이 든 음식을 인종에게 가져다주라고 했던 것이다. 그러자 왕비는 아버지의 말을 들으면 남편인 왕을 죽인 요부가 될 것이고, 안 들으면 불효가 된다는 생각에 심하게 갈등하던 끝에 상을 들고 가다가 일부러 넘어져 음식을 엎질러버렸다. 그녀는 남편을 살림과 동시에 아버지의 명령도 거역하지 않는 지혜를 발휘했던 것이다.
얼마 후, 이자겸의 이 음모가 탄로나 붙잡히자 왕비 이씨도 역적의 딸이라 하여 폐비되었다.
그러나 인종은 일부러 상을 엎질러 자신의 목숨을 구해준 이씨에게 토지와 노비를 하사하고 끝까지 돌보아 주었다. 그 후부터 밥상을 들고 가다 엎어지는 여인을 비꼬는 말로 복완지공(覆椀之功)을 세우려고 하느냐고 놀리게 되었다.
(임종대 편저 한국고사성어에서)
자료출처-http://cafe.daum.net/palp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