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이기 밭의 비밀
이미숙
“에이 씨. 연이기 밭을 결국 팔았단다. 우리 밭 옆에 복숭아 농사짓는 윤수 있지? 그 새끼랑 계약을 끝냈다더라."
며칠 동안 전화를 받지 않던 언니가 성난 황소처럼 씩씩거렸다. 귀지 같은 육두문자는 외부 소리를 차단하고, 자갈돌처럼 굴러다니며 마음 밭에 채이고 호미 끝에 걸렸다.
“......”
“뭐가 그리 급해서 헐값에 팔아치우나 몰라. 어찌 된 게 우리 오빠들은 부모 전답을 못 팔아서 안달인지, 이해할 수가 없어. 에이 씨.”
“아버지가 에이 씨였어? 이 씨 아냐?”
싱거운 농담을 건넸지만 언니는 웃지 않았다.
“그래. 나도 이렇게 서운한데 언니는 오죽하겠어.”
연이기 밭은 내게도 특별했다. 언니를 돕는다는 핑계로 자주 드나들어 정이 많이 들었다.
서운함을 주체 못 하는 언니를 토라진 여인네 달래듯 부드럽게 타일렀다. 우리와 인연이 다한 밭이라고 씀바귀 같은 소리도 했다. 집착하면 할수록 언니 건강만 해친다고 손익을 따져 보기도 했다. 하지만 그녀는 어떤 소리도 듣고 싶어 하지 않았다.
“뭘 어째여. 할 수 없지.”
강풍에 부러진 나뭇가지 같은 마음이 퉁명스러운 말속에 고스란히 드러났다.
누구를 향한 울분일까. 땅을 판 오빠에 대한 부당한 원망일까. 땅을 산 윤수라는 사람에 대한 애꿎은 감정일까. 거도 아니면 땅을 팔지 못하게 말리지 못한 자신을 용서하지 못함일까.
펄펄 끓는 국처럼 뜨거운 감정을 쏟아내던 언니는 결국 말을 잇지 못하고 전화를 끊었다.
39년 전, 엄마가 돌아가시고 맏이인 큰오빠는 얼마 되지 않는 논과 밭, 우리가 살고 있던 집까지 팔았다. 덕분에 나는 할머니를 모시고 여동생과 함께 남의 집 뒷방살이를 해야 했다.
그때 당시 연이기 밭은 사려는 이가 없었다. 자갈이 많아 자갈밭이라 불렀으며, 수로가 없던 시절이라 물도 귀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언니는 그 밭을 부모 대하듯 애지중지했다.
280평 정도 되는 땅에 들깨와 참깨를 심어 기름을 짜고, 무와 배추를 뽑아 김치냉장고를 그득 채웠다. 봄이면 고라니와 싸워가며 상추와 유채 나물을 뜯어 먹었다. 자줏빛 가지는 썰어서 말리고 고구마로 겨울 양식을 준비하기도 했다. 손이 유난히 컸던 언니는 밭에서 나는 작물을 퍼 돌리며 파꽃처럼 흐드러졌다.
작은집에서 농사짓던 연이기 밭은 서울 사는 막내 오빠 앞으로 등기되어 있었다. 작은엄마가 들 일이 힘들어지자, 십 년 전부터 언니가 주인 아닌 주인 행세를 하고 있었다.
오빠는 그동안 어렵게 사는 여동생을 배려해 권리행사를 하지 않았었다. 하지만 육십의 마지막 문턱을 넘으면서 생각이 달라졌나 보다.
당신이 귀농해서 농사지을 것도 아니고, 조카들이 부모 유산이라고 아버지 고향까지 다니며 밭을 돌볼 수도 없었다. 어쩌면 정년퇴직한 삼식이로 살면서 올케 보기 미안해서 생활에 보탬이 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젖먹이 아이처럼 막무가내인 언니에게 오빠의 이런 사정은 고려의 대상이 아니었다. 부모의 재산이기에 무조건 보유하고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가뜩이나 평당 5만 원이라는 헐값에는 절대 팔면 안 된다고 했다. 그렇게 싼값에 정리할 거면 자신에게 주어도 될 텐데 오빠가 욕심을 부렸다고 흉을 보았다.
“며칠 전에 오빠가 전화를 했더라. 근처 부동산에 밭을 내놓아달라고.”
“그래? 언니가 사겠다고 하지 그랬어?”
언니는 그전부터 밭을 갖고 싶어 했다.
“달라고 했더니, 니가 그 밭을 사서 뭐 할 거냐며 묻더라. 이렇게 빨리 팔릴 줄 알았으면 좀 더 졸라볼 걸 그랬어.”
“아니야, 이참에 잘 됐어. 언니도 그 몸으로 농사지으면 안 돼. 큰일 난다고.”
언니는 작년에 두 무릎을 수술했다. 왼쪽은 뼈를 깎아내고 핀을 박아 고정시켰고, 오른쪽은 연골을 재생시키는 인공관절 수술을 했다. 예전처럼 건강해서 자전거라도 탈 수 있으면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지금은, 보행과 이동이 절대 자유롭지 못하며 일상생활도 버거워하고 있다.
밭은 자동차로 10분 거리에 있다. 주말엔 조카가 데려다주지만 평일에는 택시를 타고 가야 한다. 왕복 차비가 만 원이다. 고정 소득이 없는 언니로선 교통비 부담이 되지 않을 수 없다.
밭에는 여러 종류의 과실수가 있어 다채로운 맛을 선사했다. 호두, 대추, 자두, 살구, 단감, 가시 꾸지뽕 등, 퇴원 후 언니는 감나무를 몇 그루 더 심었다.
나무는 때맞춰 병충해를 막아주는 농약만 쳐주면 된다. 쪼그려 앉아 김을 매고, 땅을 파헤쳐 수확을 해야 하는 농작물에 비해 무릎에 부담이 덜 했다.
그 나무들이 제법 자랐다. 지난 시월에는 대봉감을 50kg 이상 따서 팔기도 했다. 하루가 다르게 자라는 나무가 내년에는 더 많은 열매를 맺어 줄 것이다. 언니가 애지중지 키운 나무들이 남의 손에 넘어가게 생겼으니, 본전 생각이 날법도 했다.
“언니, 밥 먹었어?”
“아니.”
전화선을 타고 온 언니의 목소리가 심상치 않았다.
“10시가 지났는데 요기도 안 했단 말이야?"
“배도 안 고프고 만사가 귀찮네.”
언니는 당뇨와 고지혈증, 목 디스크가 있어 챙겨 먹어야 할 약이 한 줌이었다. 애도를 넘어 극심한 우울의 늪으로 빠지는 언니가 안타까웠다. 소나기처럼 지나갈 잔소리를 퍼부었다.
“엄마가 그 밭 일구느라 얼마나 애썼는지 아나? 작은엄마가 그러더라. 도라지 밭은 원래 무덤이었다고. 엄마가 야금야금 밭으로 만들어서 지금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지. 남의 집 묘까지 파서 일군 밭인데, 세상에 그걸 팔아버리다니...”
“정말?”
언니는 밭에 갈 때마다 기도를 했다. 옷이랑 신발을 사다 태워드리기도 했다고 한다.
“제 어머니를 용서해 주세요. 자식들 굶는 게 죽는 것보다 무서웠던 사람입니다. 엄마 눈에는 제비 새끼 같은 아이들만 보였나 봅니다. 지극히 이기적이었지만 헌신적인 어미였습니다. 대신 제가 잘 모시겠습니다.”
엄마의 그 간절하고 절박했던 마음을 누가 알까. 나도 아이들을 키우는 엄마지만, 내 어머니의 깊은 속은 가늠해 볼 길이 없다. 넘치는 모성애에 그저 고개가 숙여질 뿐이다.
기억 속에 업마는 눈망울이 선한 암소처럼 우직한 분이셨다.
사십 대 중반에 남편이 돌아가시고, 달궈진 돌 같은 시어머니와 눈 밑에 다닥다닥 붙어 있는 사마귀 같은 자식을, 먹이고 가르치느라 무던히도 애쓰며 살았다. 이른 새벽에 나가 밤늦도록 일해도 나아질 것 없는 살림살이였다. 늘 비어있는 곡간에 가난이 동무하자고 덤볐지만 그 세월에 굴복하지 않았다. 하지만 보이지 않는 몸 안의 암 덩어리, 그것은 어찌해 볼 도리가 없었다.
엄마에게 논밭은 무엇일까. 그것은 부모와 자식을 살리고 당신이 살 수 있는 유일한 보물창고이며 금고였다. 어쩌면 자신보다 더 귀하게 여기며 돌봤을 것이다. 가뭄에 쩍쩍 갈라지더라도 생명을 죽일 수 없는, 기어이 키워내야만 하는 책임과 의무로 뭉친, 엄마는 우리들의 땅이며 생명의 대지였다.
한때 내게도 허수아비와 참새마저 떠난 가을 들녘 같은 시절이 있었다. 만 원짜리 지폐 한 장이 없었던 시간도 살아내야 했다. 내 어머니가 물려주신 강인한 정신이 있었기에 그 시절을 견디고 이겨낸 게 아닐까. 엄마의 고귀한 희생과 사랑이 없었다면 나는 어떻게 살고 있을까.
제 어미라고 무조건 편들고 싶은 마음은 없다. 하지만 누구의 부모여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가난 앞에 무참히 무너져 내린 엄마의 품위, 누가 감히 잘못했다고 돌팔매를 던질 수 있을까.
엄마처럼 애성이 많고 정이 깊었던 언니에게 밭은 무엇이었을까. 그곳은 심심할 때 언제든 뛰어나가 놀 수 있는 놀이터였다. 65년의 고단한 삶을 견디게 해 준 그녀만의 성전이며 기도처였다. 단순히 작물을 길러내는 땅이 아니라 모태와 연결된 유일한 통로인 탯줄이었다.
언니가 지키려고 한 것은 무엇일까. 엄마가 피땀 흘려 가꾼 땅일까. 심어놓은 나무들일까. 아니면 산 사람들을 위하여 기꺼이 자신의 터를 내어준 어느 조상님의 고마움일까.
명의가 바뀌었다고 땅이 사라지는 건 아니다. 밭은 사랑하던 사람들을 잃어버림과 동시에 쇠퇴하고 소멸하여 한 생을 마감한 것이다. 이제 새로운 주인을 만나 새로운 삶을 준비 중이다.
나의 바람이 있다면 밭에 대한 상실감이 언니 안에서 제대로 부패하기를 바랄 뿐이다. 인연이 다한 것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밭이 제 몫의 삶을 잘 살 수 있기를 축복하고, 지난 시간에 감사하는 것, 그리고 우리 가족의 역사와 엄청난 비밀을 품은 땅을 영원히 기억하고 추억하는 것이다.
얼었던 땅이 녹고 따뜻한 바람이 불면 마지막으로 연이기 밭에 다녀오려 한다. 한겨울 추위를 이겨낸 냉이의 뿌리가 굵어져 있을 것이다.
첫댓글 언니에게 그 밭은 부모님의 마음 밭 이었던 것 같습니다.
부모님을 떠나보낸 것 같은 허전함과 상실감이었겠네요.
동생이 그 마음 조금이라도 채워야겠어요.
그랬나 봅니다. 유독 애착이 집착이 된 걸 보면
밭에 대한 언니의 지나친 애도가 사람을 향한 원망으로 쏟아지니
저도 지치고, 미움과 원망을 삭여야 할 시간이 필요한 것 같아
오히려 요즘은 연락을 않고 있어요
예전엔 흔한 일이기도 했지요
요즘이야 법이 존재하니
약자에게 때로 도움 되기도 하지만 말이지요
우리오빠도 얼마나 욕심 덩어리인지
먹고 살기엔 다소 나으니 다 모른척했지요
여자들
참 존재감이 없었지요 그땐ㅡ
재밌게 읽었네요
수필 속 아픔 함게였습니다
예전엔 제가 어려서 아무것도 몰랐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너무 아쉽고 아깝다는 생각이 듭니다
집이라도 남겨놓았다면 별장처럼 팬션처럼 드나들며 좋았을 것을...
팔린 그 집이 지금은 형체도 없이 사라지고 콩밭으로 변했더라구요 ㅠ,,,ㅠ
밭이 될 때까지 부모님의 노력이 눈에 선한데 그걸 함부로 판 오빠가 곱게 보이진 않았겠네요.
그런데 '연이기'가 무슨 뜻이죠? 텃밭은 아닌 것 같고...
네~~ 특히 언니는 손수 경작을 하던 밭이라 더 애착이 있었습니다
연이기는 밭이 있는 동네 이름입니다.
뭉클합니다. 역시 수필 잘 쓰십니다.
이 작가님, 해탈하셨어요. 애정 어린 밭에 대한 집착을 그토록 편하게 여의시다니!!
'연이기' 네이버 찾아보았더니 경북 상주에 있는 지명이군요.(하단에 *(아스타) 표시 요망)
저도 고향에 있는 밭을 팔아 챙기려고 하는데, 누님 여동생들이 가만 있을까?
조금 두렵습니다.ㅋㅋ
잘 읽었습니다.
돈 앞에 장사없다고. 저희 집만 그런 건 아닌가 봅니다.
엊그제 만난 선배 언니도 자신의 명의로 되어있는 땅을 팔면서 오빠와 갈등이 있었는데 지혜롭게 잘 해결했더라구요.
연이기가 마을 이름이군요ㆍ세상 어머니들에겐 밭에 대한 묘한 감성ㆍ 감정ㆍ믿음이 있죠ㆍ아들은 이해 못할 사연 었나 싶기도 하고요ㆍ언니의 상실이 병이 될까 염려 되네요ㆍ이미숙님 글감 부자 시네요ㆍ
언니 성향상 쉽게 떨쳐버리지 못할 것 같아 저도 걱정이 됩니다
정작 오빠에게 아무소리도 하지 못하고 혼자 속으로 끙끙 앓고 있어서
언니의 아픔을 고스란히 견뎌내야 할 몸이 잘 버텨줄지....
글감 부자!!! 돈보다 귀한 부자네요
잘 읽었습니다.
누구보다도 언니의 서운함이 있었겠다고 짐작되네요.
불덩이 같은 화살이 오빠가 아니고 제게 날아들 것 같아
식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언제 어떻게 전화를 다시 해야할지 때를 보고 있습니다.
가족이나 친척 간에 땅으로인한 갈등이 참 많이 있지요. 언니가 마음의 상처를 잘 다스리고 건강하게 사시길 바랍니다.
밭고랑 사이사이에 흘린 땀과 애정과 과거의 추억이 한꺼번에 팔려 나갔네요.... 장남은 모두 욕심이 좀 있는듯....
소설인 듯 수필인 듯 삶의 장면이 그대로 글이 되어 생생한 감동을 안겨 주네요.
시골에 고향을 둔 사람이라 가족과 땅에 얽힌 비슷한 사연에 흠뻑 공감하며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