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월성신이 땅에서 증발하는 기운을 훈도(薰陶)하고 생양수장(生養收藏)이 사람과 만물의 운화(運化)에 순환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한결같아서 어길 수 없으니, 이것이 곧 우주(宇宙)의 대정(大政)이다. 사물의 입장에서 보면 비록 그 사물을 위하여 정사가 행해지는 것 같지만, 실지는 바로 그 사물이 운화를 인(因)하여 동작하고 쉬는 것이니, 사람의 입장에서 보더라도 어찌 유독 사람을 위하여 우주의 정사가 배포된 것이랴. 실지는 사람이 자기 몸에서 징험(徵驗)할 수 있다.
사물은 각각 지각(知覺)이 있고 사람은 각각 추측(推測)이 있는데, 만일 내 신기(神氣)의 지각과 추측이 아니면 범위(範圍)의 대정을 체인(體認)할 수 없다. 그러므로 사람이 극히 작은 심목(心目)의 지각을 가지고 능히 크고 작은 운화를 추측하게 된다. 여기에서 하늘과 땅이 나누어 맡은 기화(氣化)의 정사가 모두 내 신기로 들어와 사람에 수용(須用)이 되니, 이것이 인정(人政)이 생긴 시초이다.
정(政)이란 바로잡는다는 뜻이니, 인위(人爲)의 바르지 못한 것을 금하여 막고 천도(天道)의 바른 것을 본받아 따르게 하여, 우내(宇內)의 인민을 통찰(統察)하여 정사의 대체(大體)를 세우고, 때로 그 지방의 풍속을 관찰하여 정사를 적절히 조종하는 것이다. 견식(見識)이 여기에 이르면 천인(天人)의 정사를 논할 수 있고 또 천인의 정사를 행할 수 있어,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것을 내 몸을 편안하게 하는 것으로 삼고, 백성을 기르는 것을 내 몸을 기르는 것으로 삼고, 백성을 가르치는 것을 내 몸 가르치는 것으로 삼는다.
견식이 얕은 자는, 마음속에 배포(排布)되어 있는 천지 인물과 몸 밖의 천지 인물을 둘로 여겨, 안을 주체(主體)로 하고 밖을 객체(客體)로 하여서 흔히 심리(心理)에 좇아 정사를 논하고, 밖에서 얻어서 밖에다 쓰는 것과 신기란 두루 통달하여 내외가 한가지이고 원근(遠近)이 다르지 않음을 깨닫지 못한다.
이 때문에 예율(禮律)과 상벌(賞罰)에 정련(精鍊)한 사람을 쓰지 못하고, 다만 스스로 예율ㆍ상벌의 한 부분에 대한 견해를 얻은 것을 자랑한다. 천박한 비유나 인용하여 하등의 평판에나 맞추려 하고, 각심(刻甚)하게 폐단을 말하여 곤궁한 뜻을 풀려 하니, 이것은 모두 정사의 말무(末務)이다. 종신토록 습숙(習熟)하더라도 간위(奸僞)가 쉽게 생겨 정교(政敎)를 좀먹고 해치니, 정사가 미진(未盡)함을 근심할 것이 아니라, 오직 견식이 통달하지 못함을 근심해야 할 것이다.
대저 넓은 땅은 좁은 범위로 다스릴 수 없고 많은 백성은 혼자 다스릴 수 없으니, 세상을 함께 다스려 안정시킬 수 있는 현준(賢俊)을 신중히 가려서, 천공(天工. 하늘의 일, 즉 백성을 다스리는 일)을 대신하고 민원(民願)에 화협(和協)해야 한다. 벼슬을 높이고 녹(祿)을 후하게 주는 것은 한갓 어진이를 존숭(尊崇)하기 위한 것만 아니라, 정치의 체통(體統)을 밝히고 다른 사람들의 관감(觀感)을 일으키게 하려는 것이며, 낮은 벼슬과 천한 직무도 그를 어리석고 비루하다고 여기는 것이 아니라, 민사(民事)를 접해 보고 직책을 맡아 보게 하려는 것이니, 출척(黜陟)과 영욕(榮辱)의 문을 활짝 열지 않을 수 없다. 백방으로 조련(調練)하고 통어하는 도리를 연구한다면, 옛 성왕(聖王)의 정치를 모방할 것을 의식하지 않아도 자연 알지 못하는 사이에 부합됨이 있을 것이다.
어려서부터 운화하는 기(氣)의 가르침에 젖는다면 애써 권면하지 않아도 잘 승순(承順)할 것이니, 이미 인위의 바르지 않음이 없다면, 어찌 바르게 하는 일에 정신을 수고롭게 할 것이 있겠는가. 다만 그 무사(無事)를 행하여 그 무위(無爲)를 이룰 뿐이다.
그러나 수많은 사람들이 생(生)을 탐하고 욕심을 부리니, 어찌 바르지 못한 행위가 전혀 없을 수 있으랴. 부정(不正)에도 세 가지가 있으니, 천품(天稟)이 순정(純正)하여 부정을 해선 안 되는 것임을 알 뿐만 아니라, 항상 중인(衆人)이 부정을 행함을 염려하여 반드시 그 연유(緣由)를 궁구하여 교화(敎化)로 이를 막는 것은 상(上)이고, 비록 부정을 할 생각은 가지나 왕법(王法)을 두려워하고 친구의 책선(責善)함을 두려워하여 감히 행하지 못하는 것은 중(中)이고, 탕확(湯鑊)의 형륙(刑戮)도 돌아보지 않고 인물(人物)을 해치는 것은 하(下)이다.
비록 지극히 융성(隆盛)한 시대라도 어찌 부정한 백성이 없겠는가. 그것을 바로잡는 도리가 근원에서부터 흐름을 순순히 인도하는 데서 나와 바로잡을 수 있는 사람에게 맡겨 바르지 못한 백성을 바로잡는다면, 이는 형세에 순응(順應)하는 것이라 일이 쉬우나, 그 도리가 과격하고 무리하게 억압하는 데서 나와 스스로 부정한 정치로 돌아간다면, 도리어 과실(過失)을 조장(助長)한다는 비방을 일으키게 되니, 이것은 형세에 역행(逆行)하는 것이라 일이 어렵다. 이런 까닭에 정치가 사람에게 관계되는 바가 중대하다. 만일 한 사람이 제 일만 행하다가 일생을 마칠 뿐이라면 비록 정치가 없어도 되겠지만, 나라를 다스리고 집안을 통솔함에 어찌 일통(一統)의 정치가 없을 수 있겠는가.
일통으로 사람을 헤아리고 일통으로 사람을 가르치고 일통으로 사람을 선발하고 일통으로 사람을 쓴 뒤에야, 경색(硬塞)되고 분열(分裂)되는 근심이 없어 자연 천인(天人)의 대정(大政)이 서로 부합될 것이다. 진실로 일통으로 사람을 쓰고자 하면 반드시 먼저 일통으로 사람을 선발해야 하고, 일통으로 사람을 선발하려면 반드시 먼저 일통으로 사람을 가르쳐야 하고, 일통으로 사람을 가르치려면 반드시 먼저 일통으로 사람을 헤아려야 한다.
사람을 헤아림이 난잡하면 사람을 가르침에 표준이 없고, 사람을 가르침이 표준이 없으면 사람을 선발함에 정밀하지 못하고, 사람을 선발함이 정밀하지 못하면 사람을 씀에 어긋남이 많아서, 선하다고 쓴 것이 혹 선하지 못하기도 하고 사정(私情)으로 쓴 것이 도리어 사정을 배반하기도 한다. 이제 측인(測人)ㆍ교인(敎人)ㆍ선인(選人)ㆍ용인(用人)을 들어 네 부문으로 배정하고 각각 조목을 나열하여, 이름을 《인정(人政)》이라고 하였으니, 그 공용(功用)은 오로지 측인ㆍ용인 두 부문에 있고, 교인ㆍ선인은 그 중간에 있어 조종하고 변통하는 바른 법칙이 된다.
제왕(帝王)이 창업수통(創業垂統)하는 것이나 대인(大人)이 덕업(德業)을 널리 이루는 것이나 일반 백성이 한 집안을 편안히 보전하는 것이 모두 인정(人政)에 연유되니, 그것이 마땅함을 얻으면 화창(和昌)할 것이고 마땅함을 잃으면 복패(覆敗)할 것이다. 평소 한가할 때에 능히 이 인정을 강구해두지 않으면, 급하게 이것이 필요할 때에 무엇을 가지고 일을 두루 처리하겠는가.
진실로 세상을 경영하는 데 뜻을 두었다면, 인정으로 천도(天道)를 본받는 일을 삼아 원위(源委)를 구명하고 이병(利病.이익과 병폐)을 연구하여, 교제에 두루 통하고 동정(動靜)의 사이에 살피며, 글을 읽어서 권계(勸戒)의 뜻을 인정에 붙이고 일을 행하여 인정에 시험하여, 이를 쌓아 틀을 이룬다면 자연 얻어지는 범위가 있게 마련이고 익숙해지면 밝음을 얻을 것이니, 어찌 선후(先後)의 부합이 없겠는가.
천지의 법칙을 표준 삼아 인정을 세운다면 억조의 백성이 모두 편안하지만 인위(人爲)로 인정을 세운다면 군정(群情)이 위태롭다. 역사가 있은 이후로 정치를 논하는 사람이 대부분 인위에만 매몰되어, 언론이 번잡할수록 지의(旨義)는 더욱 저하되며, 사람으로 하여금 신기(神氣)가 편안하고 일이 화창하지 못하게 하였으니, 어찌 우주의 대정(大政)을 법칙으로 삼지 않겠는가. 인성(人性)의 고유(固有)한 것에 물든 것을 일깨워서 인도하면 말을 따라 즉시 응하고 말이 없어도 기틀을 알 것이며, 운화(運化)의 활동 궤철(軌轍)을 밝혀 보여준다면 정치를 논함에 표준이 있고 정치를 행함에 천도를 따르게 될 것이다.
경신(1860) 맹하(孟夏)에 최한기(崔漢綺)가 기화당(氣和堂)에서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