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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년 나해 4월6일 부활 팔일 축제 내 월요일
[수도회] 내 삶의 갈릴래아에서 -
기경호 프란치스코 작은 형제회 프란치스코회 신부 -
† 제1독서 사도 2,14.22-33
† 복음 마태 28,8-15
★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뒤, 성령을 받은 베드로는 다른 사도들과 함께
예루살렘에서 설교한다. 베드로는 유다인들을 위해 구약 성경을
인용하면서, 하느님께서 당신의 거룩한 이에게 죽음을 보지 않게
하시리라는 시편의 말씀이 그리스도의 부활로 성취되었다고 선포한다
(제1독서).
★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빈 무덤을 떠나 부활 소식을 전하러 가던
여인들에게 나타나 평화를 전하신다. 진정한 평화는 죽음의 캄캄한 터널을
통과하신 그리스도께서 당신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주시는 고귀한
선물이다. 제자들은 갈릴래아에서 다시 예수님을 뵙게 될 것이다(복음).
◈ 오늘의 묵상
“평안하냐?”는 우리말로 하나의 질문입니다만, “안녕하세요!”처럼, 굳이
질문이라기보다는 단지 인사로 이해할 수도 있겠습니다. 복음의 원문인
그리스 말로는 “기뻐하여라!”라는 명령문입니다. 예수님 탄생 예고 당시
천사가 성모님께 한 인사와 같은 단어입니다. 그리스 말에서 이 단어 또한
평범한 인사가 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아람 말로 말씀하셨다면
“샬롬!”이라고 하셨겠지요. “평화!”입니다. 평화를 기원하는 말이기도
하지만, 이것도 히브리 말에서는 일상적인 인사말입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님의 이 인사는 더 온전한 의미로 받아들여야 할 것
같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희망과 기다림의 실현입니다. 오늘의
제1독서가 이 사실을 보여 줍니다. 사도행전에서 베드로 사도가 인용하는
시편 제16편은(화답송 참조), 하느님께서 당신께 피신하는 이를 죽음에서
지켜 주시고 그에게 생명과 기쁨을 누리게 하시리라는 희망을 노래합니다.
시편 저자는 아직 내세에 대해 분명히 알지는 못했지만, 하느님께서 어떤
분이신지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러한 희망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그의 삶을 늘 인도하시는 하느님께서 죽음의 순간에도 그의 손을 결코
놓지 않으시리라고 믿었던 것입니다.
구약의 이 믿음이 그리스도의 부활로 이제 확인되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 사도는 이 시편이 그리스도의 부활을 예견하는 예언이었다고
고백합니다. 그 부활로써, 생명과 기쁨은 이미 우리에게 주어졌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기뻐하여라!” “평화!” 하고 인사하실 때, 당신의
부활로 죽음을 이기신 그분의 기쁨과 평화가 이미 우리의 삶 안으로 뚫고
들어왔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분만이 참으로 우리에게 기쁨과
평화의 선물을 주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 매일 미사 -
◈ [수도회] 기 프란치스코 신부님 - 내 삶의 갈릴래아에서
2015년 나해 4월6일 부활 팔일 축제 내 월, 마태 28,8-15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래아로 가라고 전하여라.”(마태 28,10)
내 삶의 갈릴래아에서
우리는 성대한 전례로 부활의 신비를 거행하였다. 그러나 신앙의 핵심인
부활의 기쁨이 내 안에서부터 샘솟고 있는가? 어디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뵈올 수 있을까? 유다 지도자들은 자신들의 권력을 남용하여
예수님을 제거하려고 갖은 노력을 다 해왔다. 그러나 예수님의 부활은
영원한 생명과 진리 앞에 그들의 사악한 계략은 늘 패배할 수밖에 없음을
보여준다. 대사제들은 무덤을 지키던 경비병들을 많은 돈으로 매수하여
그들이 잠든 사이에 예수님의 제자들이 그분의 시신을 꺼내 갔다는 소문을
퍼뜨리라고 사주를 받는다.
예수님을 따르던 여인들이 부활의 기쁨을 선포하는 것과는 달리 그분의
반대자들은 부활을 숨기려고 그렇게 몸부림친다. 나자렛에서 갈릴래아로,
갈릴래아에서 예루살렘으로 이어진 적대자들의 거짓과 반생명적 술수가
멈추질 않고 있다. 그러나 예수님의 부활은 인간적인 음모나 조작에 의해
감출 수는 일이 아니다. 부활의 신비를 깊이 체험한 베드로 사도는 오순절
설교를 통하여 하느님께서 성경의 예언들을 이루시며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부활시키셨음을 증언한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당신을 찾기도 전에 ‘먼저’ 우리를
찾아오신다. “여자들은 두려워하면서도 크게 기뻐하며 서둘러 무덤을
떠나, 제자들에게 소식을 전하러 달려갔다.”(28,8)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자 그들은 두려움에서 벗어나 큰 기쁨을 맛보았다. 그런데 예수께서
그들에게 마주 오시면서 “평안하냐?”(28,9) 하고 말씀하셨다. 이것이 바로
부활하신 구세주의 입에서 나온 위대한 부활의 메시지이다. 찾아오시는
예수님을 맞아들이며 “여인들은 다가가 엎드려 그분의 발을 붙잡고
절했다.”(28,9ㄴ) 우리는 인생 여정에서 더 이상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그 어떤 악의 세력과 폭력, 반생명적 움직임에
의해서도 결코 죽으실 수 없는 분이심을 믿기만 한다면 마음에 평화를
간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받아들인 여인들에게 사명을 부여하신다. “...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래아로 가라고 전하여라. 그들은 거기에서 나를
보게 될 것이다.”(28,10)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당신의 ‘형제들’
이라고 하셨고(12,49-50), 종말 심판관이신 사람의 아들은 지극히 미천한
이들을 당신의 ‘형제들’이라고 하셨다(25,40). 이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체포되신 순간 도망쳤던 제자들을 당신의 ‘형제들’이라고 하시면서
그들을 갈릴래아로 부르신다. 제자들은 이제 갈릴래아로 가서 형제적
유대관계를 회복할 것이며 예수님과 완전히 일치하게 될 것이다. 부활의
기쁨을 살려면 어떤 삶을 살고 무엇을 하느냐에 앞서 나 자신이 바로 결코
죽지 않으시는 예수님의 '형제'임을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이제 다시 갈릴래아, 곧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체험하고서, 그분의 말씀과 행적이 배어있는 삶의 원점인
갈릴래아에서 만나게 된다. 자신들의 몰이해와 무지, 연약한 믿음 때문에
눈이 어두워져 역사의 예수님을 뵙지 못했던 갈릴래아에서 그분을 만나게
된 것이다. 예수님의 철저한 자기비허인 죽음에 의해 변화되는 나의 삶의
현장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야 하는 것이다. 부활하신 주님은 구름
속의 거짓 신비나 그럴싸한 수식어로 포장된 영성주의나 감상적 흥분
속에 계시지 않는다. 갈릴래아, 곧 예수님의 사랑의 말씀과 행적이
선포되는 곳이자 나의 인간적 한계가 고스란히 드러나는 일상의 삶
한복판에서 그분을 만나야 한다. 이렇게 우리의 삶은 갈릴래아에서
예루살렘으로, 다시 예루살렘에서 갈릴래아로 되돌아와 시작하는 삶이다.
갈릴래아에서 골고타로, 그리고 골고타에서 갈릴래아로 향하는 예수님의
제자들의 순례길은 그분이 당하셨듯이 바리사이들과 충돌하게 된다.
예수님의 부활은 제 3자인 경비병들에 의해서도 증명되었는데,
대사제들과 원로들은 위선과 거짓에 휘말려 부활의 선물을 거부하고
있다. 부활한 신앙인의 삶은 반대와 시련과 고통이 따르는 삶이다.
예수님의 부활의 신비를 일상의 삶 안에서 살아내려면 매순간 갖가지
형태로 다가오는 캄캄하고 두려운 죽음의 순간과 대면해야만 한다.
우리는 사람이 되신 하느님 예수님을 추종하는 삶을 살아야 하기에
일상의 순간마다 죽음의 문화, 반 생명 현상 가운데에서도 결코 죽임을
당하실 수 없는 부활하신 주님을 믿고 따라야 할 것이다. 내 삶의
갈릴래아에서......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
◈ [인천] 주님을 따르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할 것
2015년 나해 4월6일 부활 팔일 축제 내 월요일
제1독서
<이 예수님을 하느님께서 다시 살리셨고 우리는 모두 그 증인입니다.>
◎ 사도행전의 말씀입니다. 2,14.22-33
복음
<내 형제들에게 갈릴래아로 가라고 전하여라. 그들은 거기에서 나를 보게
될 것이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8,8-15
요즘이야 강의 부탁을 받으면 시간만 허락된다면 기쁘게 수락합니다.
그러나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었지요. 왜냐하면 남들 앞에서 말을
한다는 것 자체를 너무나 어렵게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또한 소위
울렁증이라는 것을 가지고 있어서, 남 앞에 섰을 때의 긴장감이 저를 무척
힘들게 했습니다.
2,000년, 제가 보좌신부 때 처음으로 강의 부탁을 받았던 해였습니다.
저는 능력이 없어서 할 수 없다고, 그것도 두 시간 동안이나 아무것도
모르는 제가 할 수 있겠냐면서 거절을 했었지요. 그랬더니 강의를
부탁하신 신부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별 내용이 없어도 상관없어. 그냥 지루하지 않고 재미있게만 하면 돼.”
선배신부님의 반 명령조의 부탁이라 수락하기는 했지만, 아마 지금까지
강의준비를 하면서 제일 힘들었던 순간이었습니다. 더군다나 내용이
중요하지 않고 재미있게만 하면 된다는 말이 저를 더욱 더 힘들게 했지요.
저는 신부이지, 개그맨이 아니잖아요.
이 강의가 계기가 되었는지 모르겠지만, 그 뒤로 강의부탁을 많이 받고 또
실제로 많이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강의주제를 어떻게 할까요?”
라고 여쭤보면 대부분 “주제는 신부님께서 알아서 정해주고요. 그냥
재미있게만 해주세요. 안 그러면 신자들이 지루해서 힘들어하거든요.”
라고 말씀하십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제가 사제인 것이 분명한데,
신자들은 사제가 아닌 개그맨을 원할까요?
재미있는 것을 찾는다면 개그 프로그램을 보는 것이 더 낫지 않겠습니까?
아니면 사제가 아닌 인기 개그맨을 부르는 것이 더 나을 것 같기도 한데요.
여러분 생각은 어떠세요?
사실 재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감동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안에 담겨 있는
의미를 찾아 감동을 얻을 수 있는 것. 비록 재미가 없더라도 의미를 찾아
감동을 얻을 수 있다면 가장 최고의 강의인 것입니다.
얼마 전, 우리나라 대표 개그 프로그램의 시청률이 점점 하락한다는
기사를 보았습니다. 그 이유는 소재의 고갈과 새로움의 부재라는
것이었지요. 재미라는 것은 이렇게 한계가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은 어떻습니까? 2000년 넘게 사람들의 관심과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말씀이 재미있습니까? 새로울 것도 없습니다. 하지만 지금
이 자리에서 뜨거운 감동을 주는 말씀이기에 변화를 일으키고 주님을
따르겠다는 다짐을 하게 됩니다.
신앙을 어떤 세속적인 재미 속에서 찾으면 안 됩니다. 그보다는 그 안에
담긴 주님께서 주시는 감동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 부활의 모든 것을 본 경비병들이 어떻게 했는지를 주의 깊게
보십시오. 그들은 시신을 도둑맞았다고 거짓말 하는 대가로 돈을
받음으로써 부활의 영광을 외면하지요. 그들은 부활에 관하여 침묵함으로
이 세상의 영예와 즐거움을 산 것입니다.
우리도 신앙을 세속적인 재미 속에서만 찾는다면 경비병의 길을 따를
수밖에 없습니다. 적극적으로 예수님을 만나려고 노력 했던 여인들이
결국 부활하신 예수님을 제자들보다도 먼저 만나고 또한 제자들에게
사명을 전달하는 중요한 몫까지 얻게 되었음을 기억하면서, 우리도
예수님을 쫓은 여인처럼 주님을 따르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세상의 재미를 얻을 수 없을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큰 감동 속에서
참 행복의 길을 걸어갈 수 있을 것입니다.
자살이란 살인의 최악의 방식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후회할 기회가
하나도 없으므로(J C 크린스).
요즘에는 정말 이렇게 스마트폰을 들이댈 것 같아요.
어부의 기도(작자 미상)
주님, 저로 하여금 죽는 날까지
물고기를 잡을 수 있게 하시고,
마지막 날이 찾아와
당신이 던진 그물에 내가 걸렸을 때
바라옵건대 쓸모없는 물고기라 여겨
내던져짐을 당하지 않게 하소서.
가슴을 ‘꽝’하고 울리는 기도였습니다. 사람 낚는 어부로 오신
주님이시지요. 사실 어부는 쓸모없는 고기는 과감하게 버립니다.
가져와봐야 쓸데가 없고, 짐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바로 내 자신이
그 쓸모없는 물고기의 모습이라면 어떨까요? 주인이신 주님으로부터
절대로 내던져지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할 수밖에 없습니다.
자비와 사랑을 베풀어 달라고....
어제 소래에 가서 찍은 사진. 어부의 밥상인가? 그런 제목인 것
같더라구요.
◈ [수도회] 2015.04.06.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두려워하지 마라.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래아로 가라고 전하여라.
그들은 거기에서 나를 보게 될 것이다.”> (마태 28,10)
부활의 첫 메시지는 예수님을 만나려면 갈릴래아로 가라는 것입니다.
갈릴래아는 하느님 나라 운동이 시작된 곳이고 제자들이 예수님을 만나
복음을 배운 곳입니다. 또 이스라엘에서도 가장 소외되고 무시당했던
변방지역이기도 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라고 하십니다.
나를 만났던 곳으로 다시 가라고 하십니다.
가장 소외되고 아픔이 서려있는 곳으로 가라고 하십니다.
부활을 맞이하며 교회 각 공동체는 소위 '엠마오' 행사들을 가집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러 가자는 것이지 놀러 가자는 것은 아닐진대
그렇게 변질되어 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오늘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러 전국 각지에서 '팽목항'으로
모이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여러분도 예수님을 처음 만났던 그곳을 떠올려 보십시오.
그분을 만나서 벅찬 감동을 느꼈던 그때를 돌아보십시오.
부활은 새로운 시작입니다. 형제들이여, 다시 시작합시다!
출발~~
- 작은 형제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 -
◈ [수도회] 주님 부활 체험 -기쁨과 평화-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신부님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2015년 나해 4월6일 부활 팔일 축제 내 월요일
사도2,14.22-33 마태28,8-15
제1독서
<이 예수님을 하느님께서 다시 살리셨고 우리는 모두 그 증인입니다.>
◎ 사도행전의 말씀입니다. 2,14.22-33
복음
<내 형제들에게 갈릴래아로 가라고 전하여라. 그들은 거기에서 나를 보게
될 것이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8,8-15
주님 부활 체험 -기쁨과 평화-
오늘 말씀을 묵상하던중 문득 떠오른 제목은 '복음의 기쁨'
즉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책 제목이었다가, '믿음의 용사'였습니다.
다시 새벽에 '부활 체험'이란 제목이 생각나 바꿨습니다.
생각하면 세 제목은 깊이 관련되어 있음을 봅니다.
어제 강론 제목은 '부활의 삶'이었다가 오늘은 '부활 체험'입니다.
파스카의 삶, 파스카의 체험으로 바꿔도 무방하겠습니다.
요즘 깊이 깨닫는바 체험입니다.
체험을 통해 체득할 때 비로소 안다 할 수 있습니다.
사막의 지혜는 바로 체험적 지혜를 말합니다.
머리로 아는 것과 마음과 몸 전체로 아는 것과는 천양지차입니다.
수도생활을 하지 않고도 머리로 공부하여 수도생활에 대해 강의를 할 수
있습니다. 산티아고 순례를 다녀오지 않고도 산티아고 순례를 다녀 온
듯이 말할 수 있습니다.
제가 그랬습니다.
예전 블라시오 아빠스의 산티아고 순례체험 이야기를 듣고
네 핵심적 요소-하느님 목표, 이정표, 도반, 기도-를 추출해
다녀온 듯이 인생순례에 빗대어 피정자들에게 많은 강론을 했습니다.
그러나 실제 산티아고 순례를 체험하고 나니 머리로 안 것은 안 것이
아님을 깨닫습니다. 진정 체험을 통한 앎이자 겸손과 지혜임을
깨닫습니다. 정말 중요한 것이 체험입니다.
우리의 모든 수행의 목표도 체험을 통한 깨달음에 있음을 봅니다.
수도생활의 궁극 목표인 '마음의 순수' 역시 체험을 통한 끊임없는
깨달음에서 성취됩니다. 하여 우리의 삶은 '깨달음의 여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주님의 부활 역시 똑같습니다. 부활체험은 순전히 은총입니다.
부활체험 없이도 얼마든 부활에 대해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부활 체험없는 이런 지식은 공허할뿐, 주님 부활의 체험적
깨달음을 통해서 비로소 변화요 샘솟는 기쁨에 평화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보다시피 주님 부활을 체험한 여자들은 두려워하면서도
크게 기뻐하며 서둘러 무덤을 떠나, 제자들에게 소식을 전하러 달려
갑니다. 바로 이것이 부활체험을 통한 부활의 기쁨, 복음의 기쁨이요
아무도 빼앗아갈 수 없는 체험적 참 기쁨입니다.
이어 재차 주님 부활을 체험하는 여자들입니다.
"평안하냐? 두려워하지 마라.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래아로 가라고 전하여라.
그들은 거기에서 나를 보게 될 것이다.“
이런 부활을 체험한 여자들에게 새삼 무슨 설명이 필요하겠는지요.
이런 주님 부활 체험이 없을 때 말 그대로 판단의 혼란입니다.
바로 복음 후반부가 이런 사실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의 빈무덤은 두가지
결론이 가능합니다. 하나는 "예수님은 부활하셨다"
또 하나는 "예수의 제자들이 밤중에 와서 경비병들이 잠든 사이에 시체를
훔쳐갔다." 이 둘뿐입니다.
상식적으로 어느 쪽을 믿겠습니까?
전자의 부활보다는 후자의 제자들이 훔쳐갔다로 판단은 기울 것입니다.
경비병들은 돈을 받고 시킨대로 하였고, 이 말은 오늘날 까지도 유다인들
사이에 퍼졌다 합니다. 그러니 부활체험이 없는 이들은 경비병들의 말이
진실이고, 예수 부활은 근거 없는 유언비어로 치부할 만 합니다.
하여 부활 체험이 그리도 중요합니다. 주님 부활 체험에서 선사되는
기쁨과 평화가 온갖 두려움의 몰아내 겁쟁이들을 믿음의 용사들로
맏듭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후 기쁨과 평화에 넘쳐 달려가는 여인들을 상상해
보십시오. 오늘 1독서의 사자후를 토하는 베드로의 설교를 보십시오.
예전 수난복음에서 예수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부인하던 베드로가
아닙니다. 부활체험이 이렇게 믿음의 겁보를 믿음의 용사로 만든
것입니다.
부활체험 없이 이런 설교를 어떻게 할 수 있겠습니까?
바로 이런 증언이 예수부활이 유언비어가 아님에 대한 생생한 증거입니다.
1독서 베드로의 설교 역시 풍부한 묵상자료입니다.
설교문의 주어는 온통 하느님입니다. 하느님이 주어입니다.
하느님께서 하신 일입니다.
바로 이것이 렉시오 디비나의 묵상방법입니다.
부활체험이 베드로의 보는 눈을 바꿨습니다.
부활사건을 하느님의 눈으로 보는 베드로입니다.
우리 삶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삶의 문장에 하느님이 주어가 될 때 놀라운 깨달음이요
여기서 비로소 겸손과 순종도 가능해집니다.
진정 부활 체험은 우리 삶의 문장의 주어를 하느님이 되게 합니다.
베드로의 렉시오 디비나 묵상이 참 풍부합니다.
시편까지 인용합니다.
"나 언제나 주님을 내 앞에 모시어,
그분께서 내 오른쪽에 계시니 나는 흔들리지 않는다.
그러기에 내 마음은 기뻐하고 내 혀는 즐거워하였다.
내 육신마저 희망 속에 살리라. 당신은 저에게 생명을 주신 분,
당신 면전에서 저를 기쁨으로 가득 채우실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부활의 기쁨입니다. 다윗의 기쁨이자, 예수님의 기쁨이요,
베드로의 기쁨이자 우리 모두의 기쁨입니다.
마지막 베드로의 설교는 얼마나 힘이 있고 감동적인지요.
예수부활이 유언비어가 아닌 기적적 현실임을 웅변합니다.
"이 예수님을 하느님께서 다시 살리셨고 우리는 모두 그 증인입니다.
하느님의 오른쪽으로 들어 올려지신 그분께서는 약속된 성령을
아버지에게서 받으신 다음, 여러분이 지금 보고 듣는 것처럼 그 성령을
부어 주셨습니다.“
똑같이 부활하신 주님께서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우리 모두에게 성령을
부어주십니다. 우리 모두 부활하신 주님을 체험하는 복된 미사시간입니다.
"주님, 파스카 신비의 은총을 저희 마음에 가득 채워 주시어, 영원한
구원의 삶을 살게 하소서."
아멘.
-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신부 -
◈ [수도회] 또 다른 세상
2015년 나해 4월6일 부활 팔일 축제 내 월요일
제1독서
<이 예수님을 하느님께서 다시 살리셨고 우리는 모두 그 증인입니다.>
◎ 사도행전의 말씀입니다. 2,14.22-33
복음
<내 형제들에게 갈릴래아로 가라고 전하여라. 그들은 거기에서 나를 보게
될 것이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8,8-15
또 다른 세상
제가 어렸을 때의 일입니다. 남도의 한 항구로 여행을 갔었는데, 바다를
처음 본 터라 모든 게 너무 신기했습니다. 크고 작은 화물선이며 어선들이
쉼 없이 들어오고 나가고를 반복했습니다. 한참동안 그 배들을 계속
바라보다가 제가 한 가지 개인적으로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짐을 가득 실은 큰 화물선 한척이 출항할 때였습니다. 바로 앞에서 보니
크기가 어마어마했습니다. 엔진소리도 엄청났습니다. 크게 뱃고동을
울리면서 항구를 벗어났는데, 그때부터 저는 계속해서 그 배 한척의
뒤꽁무니만 바라봤습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요?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일까요? 그 큰 화물선이 멀어져가면서 점점
작아지더니 어느 순간 제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져버리는 것이었습니다.
그 배가 도대체 어디로 가버렸을까요? 바다 속으로 침몰한 것도
아니고...
비록 제 시야에서 사라졌지만 그 배가 없어져 버린 것은 절대 아니겠지요.
지구가 둥글기 때문에 한시적으로 제 시야에서 사라져버린 것입니다.
어딘지는 모르지만 그 배는 어느 바다 위에 떠 있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리고 얼마간 시간이 흐른 후 지금 우리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지구
반대쪽 나폴리라든지 부에노스아이레스라든지 또 다른 아름다운 항구에
도착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네 인생도 똑같은 이치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지금 우리가 바라보고
있는 이 세상이 끝이라고 생각합니다. 내게 주어진 이번 생이 마지막이라고
생각합니다. 내 눈앞에 펼쳐지는 이 현실이 전부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렇게 죽음을 두려워하고 거부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부활로 인해 모든 것이 뒤바뀌게 되었습니다. 그 누구도
정복하지 못한 죽음이 예수님의 죽음으로 인해 정복된 것입니다. 이제
죽음은 또 다른 세상, 하느님 나라로 건너가는 관문이 된 것입니다.
얼마간 세월이 흐르고, 나이가 더 들고, 병들고, 그렇게 끝이려니
생각했었는데, 또 다른 생이 있다니, 이 얼마나 큰 기쁨이고 축복입니까?
우리네 인생의 바다 저 건너편에 또 다른 대륙인 하느님 나라가
존재한다니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습니다. 이 모든 것이 바로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로 인한 축복인 것입니다.
하루하루가 고통의 연속이고 고달프다하더라도, 매일이 죽기보다 힘든
삶이라하더라도 또 다시 희망하고 용기를 내고 열심히 살아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이 세상이 지나가면 그것으로 인생 종치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아름다운 세상, 하느님 나라가 있고, 그곳에서 우리를 끔찍이도
사랑하시는 하느님께서 두 팔을 활짝 벌리고 우리를 기다리고 계심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또 다른 세상은 이 세상보다 훨씬
풍요롭고 아름다운 세상입니다. 사랑 자체이신 하느님과 함께 하는
불멸의 세상이요 영원한 생명이 보장되는 세상입니다.
지금 우리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 이 모든 지상적인 것, 육체적인 것이
다가 아니라 보다 영원한 것, 보다 가치 있는 것, 불멸하는 것, 결코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을 대상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아름다운 나라가
분명히 존재합니다. 그 풍요롭고 충만한 새로운 세상에 대한 희망을 안고
오늘 나 자신의 이 비참함, 이 현실의 혹독함을 기꺼이 견뎌나가야겠습니다.
- 살레시오회 한국관구 관구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 [청주] 돈은 사람을 움직인다|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5년 나해 4월6일 부활 팔일 축일 내 월요일(마태28,8-15)
제1독서
<이 예수님을 하느님께서 다시 살리셨고 우리는 모두 그 증인입니다.>
◎ 사도행전의 말씀입니다. 2,14.22-33
복음
<내 형제들에게 갈릴래아로 가라고 전하여라. 그들은 거기에서 나를 보게
될 것이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8,8-15
돈은 사람을 움직인다.
선거철에 나타나는 색깔은 생색이랍니다. 자기의 잇속을 챙기느라 모든
것을 동원하여 자기를 드러내고자합니다. 얼마 남지 않은 재보궐 선거에
소신을 버리고 자기가 최고라고 뻔뻔함을 보이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거기다 돈은 사람을 사고 음모를 꾸밉니다. 헛소문이 전해집니다. 결국
시기와 질투가 사람을 죽이고 진흙탕 속을 헤매기도 합니다. 국회의원,
공직자, 대기업 회장, 군 장성 등등 물질 때문에 모든 명예를 한 순간에
잃는 이들이 많습니다. 돈과 속임수가 손을 잡고서 거짓을 퍼뜨리는 일은
예나 지금이나 여전합니다. 수석 사제들은 원로들과 함께 모여 의논한
끝에 군사들에게 많은 돈을 주면서 말하였습니다. “‘예수의 제자들이
밤중에 와서 우리가 잠든 사이에 시체를 훔쳐 갔다’ 하여라. 이 소식이
총독의 귀에 들어가더라도, 우리가 그를 설득하여 너희가 걱정할 필요가
없게 해 주겠다”(마태28,13). 경비병들은 돈을 받고 시킨 대로 하였습니다.
돈이 좋긴 좋은가 봅니다.
그러나 빈 무덤의 부활사건을 덮을 수는 없었습니다. 진실은 드러나게
마련입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래아로 가라고
전하여라. 그들은 거기에서 나를 보게 될 것이다”(마태28,10).하신 주님의
말씀대로 증거 되었습니다. 권력과 돈으로 무덤을 덮으려 하였지만,
무덤은 덮을 수 있어도 살아 나오신 예수님을 가릴 수는 없었습니다. 돈과
권력이 사람을 움직일 수는 있어도 결코 예수님의 부활을 막을 수는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사랑과 정의가 살아있고, 사랑의 희생은 반드시
승리한다는 진리를 일깨워줍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버리고
흩어졌었지만 예수님께서는 여전히 그들을 “내 형제들” 이라고
말씀하시며 그들과의 관계의 끈을 여전히 놓지 않으셨습니다. 우리에
대한 주님의 사랑은 여전한데 늘 우리가 주님을 외면하였습니다. 이제
다시 약속된 갈릴래아로 가는 사람은 주님을 만나게 되고 관계를 새롭게
회복하게 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죄악의 어둠을 밝게 비추시고 새로
나게 하시어 어려운 환경과 처지 안에서도 진실하게 살아가는 이들에게
위안과 희망이 되어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다시 살아나셨고 우리도
반드시 다시 살아날 것이기에 매일이 한 점 부끄럼이 없는 거룩함으로
지켜져야 하겠습니다.
성 끌레멘스는 “우리를 죽음으로 이끄는 헛된 수고들, 즉, 불화와
질투심을 버리고 예수그리스도의 자비하심과 선하심을 간절히
청하십시오. 우리의 모든 생각, 불화, 질투, 탐욕까지도 그분의 십자가
앞에 굴복시키며 오로지 십자가의 사랑과 자비를 청하십시오. 반드시
부활의 은총을 얻어 누릴 것입니다.” 하고 권고하였습니다. 결국 부활을
믿는다는 것은 믿음의 생활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주님의 자비와 사랑에
의탁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주님의 부활에 대한 믿음을 새롭게 하는
오늘이기를 바랍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청주 성보병원 부원장 반영억 라파엘 신부 -
◈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그리스도는 모든 성경해석의 열쇠
2015년 나해 4월6일 부활 팔일 축제 내 월요일
< 내 형제들에게 갈릴래아로 가라고 전하여라. >
복음: 마태오 28,8-15
< 그리스도는 모든 성경해석의 열쇠 >
데이비드 건은 1984년 뉴욕 지하철 책임자였습니다. 깨끗한 지하철, 범죄
없는 지하철을 만들고 싶었던 데이비드 건 소장은 여러 사람에게 자문을
구했습니다.
범죄학자였던 조지 켈링은 지하철 낙서에 초점을 맞추라고 조언했습니다.
지하철 낙서야말로 충동적인 범죄의 심리적 온상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는 객차마다 스케줄을 잡아 지하철 낙서를 지우기 시작했습니다. 7년
동안 낙서와의 끈질긴 전쟁이었습니다. 지하철 낙서가 줄어들자 마침내
범죄도 줄어드는 특별한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이처럼 문제를 푸는 것은 모든 것을 다 풀어야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실타래를 풀듯 전체에 영향을 미칠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파악하고 그
원칙을 끝까지 지키며 관철시키는 일입니다.
모든 문제를 직면할 때 그 문제를 풀 수 있는 ‘열쇠’가 있고, 그 열쇠만
있으면 모든 것들이 저절로 다 풀려가는 것을 볼 때가 있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베드로는 성령을 받고 구약의 예언을 훑으며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해 죽으셨다가 부활하셔야 함을 설명해줍니다. 그리고 자신을
비롯한 제자들은 그 증인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돌아가시기 전에는 베드로도 예수님께서 죽으셨다가
부활하셔야 함을 이해하지 못하던 인물이었습니다. 그가 성경을 모르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다만 예수님께서 성경에 대해 설명해 주어도
이해하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유다인들의 손에 죽으셔야 함을 말씀하셨을 때도 베드로
그래서는 안 된다고 그분을 말렸습니다. 그래서 사탄이라는 소리까지
들어야했습니다. 예수님은 분명 성경 말씀대로 이루어져야 함을
말씀하셨는데도 제자들은 좀처럼 그런 말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성경을 이해하지 못했던 이들이 이젠 성경을 완전히
이해하게 된 것입니다. 그 이유는 성경의 열쇠를 지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성경의 열쇠란 바로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입니다.
오늘 베드로는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나고 나서 성경 박사들도 섞여있는
앞에서 성경말씀을 풀이해줍니다. 성경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만 굳게
믿으면 그 열쇠로 어렵지 않게 다 해석이 가능합니다. 왜냐하면 모든 성경
내용이 그분의 죽음과 부활을 예언하고 설명해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성경을 아무리 파고들어도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믿지
않는다면 성경말씀을 이해할 수 없게 됩니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제 성경에서 그리스도의 존재가 메아리치지 않는 곳은 아무 데도 없다.
신약은 구약에 숨어있고 구약은 신약에서 드러난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은 마치 산의 정상과 같습니다. 성경의 모든
내용이 마치 산에 나 있는 무수한 길처럼 그 한 곳을 향해있습니다. 그
죽음과 부활을 기점으로 모든 성경내용을 바라보면 평생 성경을 연구한
사람들보다 더 확신에 찬 믿음으로 성경을 이해하고 선포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구약은 마치 신약과 관계없는 것처럼 성경을 가르치는
모습을 너무도 많이 봅니다.
성경의 처음부터 그렇습니다. 성경 처음에 하느님께서 태초에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다는 말이 나옵니다. 그런데 이 하늘과 땅을 그리스도와
연결시키지 못하고 우리가 눈으로 보는 하늘과 땅으로 여기며 성경을
처음부터 오해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이사야서에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시겠다고 나오고, 요한 묵시록에 새 하늘과 새 땅을 보았는데
이것이 하느님의 어린양과 천상예루살렘, 즉 그리스도와 교회와의 관계가
됩니다. 그러나 처음부터 우리가 보는 이 하늘과 땅이 창조된 것처럼 읽어
내려가니 어떻게 성경이 이해될 수 있겠습니까? 모든 성경은 그리스도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을 절대 잊지 말고 성경을 읽어야 할 것입니다.
요셉 신부님 미니홈피: http://minihp.cyworld.com/30joseph
- 수원 교구 복음화국 부국장 전삼용 요셉 신부 -
◈ [서울] 죽음전후 뒤엉킨 혼란상황
2015년 나해 4월6일 부활 팔일 축제 내 월요일
제1독서
<이 예수님을 하느님께서 다시 살리셨고 우리는 모두 그 증인입니다.>
◎ 사도행전의 말씀입니다. 2,14.22-33
복음
<내 형제들에게 갈릴래아로 가라고 전하여라. 그들은 거기에서 나를 보게
될 것이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8,8-15
죽음전후 뒤엉킨 혼란상황
일반상식을 완전히 날려버린 예수님의 메가톤급 놀랄 부활사건입니다.
죽여서 무덤에 넣었는데 당당히 되살아 나왔으니 혼비백산할 수밖에요.
장소 거리 시간 등 장애들은 블랙홀로 사라지고 예수님만 당당히 계십니다.
문 닫혀도 거리 멀어도 두 장소에 동시출현 주님의 부활상태 얼을 뺍니다.
확실한 그 시대 그 사실을 못 믿겠다면 구체적으로 반박할 수는 있습니까?
확실한 죽음전후가 정리 안 되던 사도들의 혼란상황 한 번 짐작해봅시다.
“그런데 갑자기 예수님께서 마주 오시면서 그 여자들에게 ‘평안하냐?’
하고 말씀하셨다. 그들은 다가가 엎드려 그분의 발을 붙잡고 절하였다.
(마태오 28,9)”
- 서울 대교구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 -
◈ [서울] 부활 팔일 축제 내 월요일
2015년 나해 4월6일 부활 팔일 축제 내 월요일
제1독서
<이 예수님을 하느님께서 다시 살리셨고 우리는 모두 그 증인입니다.>
◎ 사도행전의 말씀입니다. 2,14.22-33
복음
<내 형제들에게 갈릴래아로 가라고 전하여라. 그들은 거기에서 나를 보게
될 것이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8,8-15
신학교에서 성주간 피정을 하였습니다. 신학교는 제가 먹고, 기도하고,
공부한 못자리입니다. 신학교에서의 피정은 다른 곳에서의 피정과 달리
그리움과 편안함이 함께 있어서 좋습니다. 늘 그렇지만 과거로 돌아간다면
좀 더 기도하고, 공부하였을 것 같습니다.
이번 피정 중에 신부님들의 강론을 들었습니다. 매일 강론을 하던 제가
강론을 들으니 새로웠습니다. 신부님들의 말씀은 봄날의 햇볕처럼 제
마음을 따뜻하게 비추었습니다. 한 신부님께서 예수님의 극진한 사랑을
이렇게 표현하였습니다. ‘그분은 똑똑하고, 유능한 율법학자를 바라보지
않고 무식하고 능력 없는 어부들을 바라보셨습니다. 그분은 내세울 것이
많은 사람을 바라보지 않고 기도할 때조차도 죄인임을 고백하는
사람들을 바라보셨습니다. 그분은 건강하고, 잘 살며 행복해 보이는
사람을 바라보지 않고 가난하고, 병든 이들을 바라보셨습니다. 이런
예수님의 사랑을 닮은 모습이 있습니다. 아이에게 젖을 먹이는 엄마의
모습입니다. 자신의 것을 아무런 조건 없이 아이에게 내 주면서도 행복해
하는 엄마의 모습입니다. 아이의 기저귀를 갈아주는 엄마의 모습입니다.
냄새나는 기저귀를 갈면서도 엄마는 환하게 웃습니다. 자신의
배설물조차도 치우지 못하는 무력한 아이를 사랑하는 엄마의
눈빛입니다.’ 강론이 한 폭의 그림처럼 제게 선명하게 다가 왔습니다.
죽음이란 무엇일까요? 종교적으로 죽음은 끝이 아닙니다. 하느님과의
새로운 만남입니다. 육체라는 껍질을 벗어버리고, 새로운 세상에로 나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죽음을 ‘돌아가셨다’라고 표현합니다. 이 말 역시 죽음이
끝이 아님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생물학적으로 죽음은 생명활동이 멈추는 것입니다. 더 이상 생존과
번식을 할 수 없는 상태입니다. 그래서 죽음은 살아 있는 것들과의
단절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죽음은 이별이고, 슬픔이며, 고독한 것입니다.
인문학적으로 죽음은 새로운 시대로 넘어감입니다. 절대주의는
상대주의로, 상대주의는 회의주로 넘어갑니다. 고전은 낭만으로, 낭만은
인상으로 넘어갑니다. 고대, 중세, 근대, 현대로 넘어갑니다. 로마네스크,
고딕, 바로코, 로코코, 현대 건축으로 넘어갑니다. 같은 죽음이라도
바라보는 관점에 따라서 이렇게 다를 수 있습니다.
마더 데레사 수녀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침묵의 열매는
기도입니다. 기도의 열매는 믿음입니다. 믿음의 열매는 사랑입니다.
사랑의 열매는 봉사입니다. 그리고 봉사의 열매는 평화입니다.” 달리
말하면 침묵하지 않으면 기도할 수 없습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믿음을
얻지 못합니다. 믿음이 없으면 사랑의 의미를 알 수 없습니다. 사랑이
없는 봉사는 진정한 봉사가 아닙니다. 평화는 이웃을 위한 봉사에서
시작합니다.
평화를 얻고 싶으시다면 봉사하십시오. 봉사의 기쁨을 알고 싶으면
사랑하십시오. 사랑하려면 하느님을 믿고 이웃을 믿어야 합니다. 사랑은
기도의 샘물에서 얻을 수 있습니다. 기도하고 싶으십니까? 침묵의 시간을
가져 보십시오.
오늘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아쉽고, 야속하고, 화가 날 수도
있는 일입니다. 믿었던 제자들이 자신을 배반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평화의 인사를 건네십니다. ‘평안하냐!’ 예수님의
이 말씀은 제자들에게 위로와 힘을 주었습니다. 이제 제자들은 두려움을
떨쳐 버릴 수 있었습니다. 걱정을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
오늘 제1독서는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서 변화된 제자들의 이야기입니다.
‘나 언제나 주님을 내 앞에 모시어, 그분께서 내 오른쪽에 계시니 나는
흔들리지 않는다. 그러기에 내 마음은 기뻐하고 내 혀는 즐거워하였다.
내 육신마저 희망 속에 살리라.’
우리는 주님의 부활시기를 지내고 있습니다.
걱정과 근심, 두려움과 슬픔을 다 떨쳐버리고, 주님께서 오늘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듯이 우리들도 편안한 마음으로 한 주간을 시작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도 부활하신 주님과 함께 편안한 하루 되십시오.
- 서울 대교구 성소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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