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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드니 인문학교실 홍길복의 인문학강좌 (2022-34)
제35강: 정말 멀고도 먼 길 - 당신을 이해하고 나를 아는 길
(구조주의와 그에 얽힌 이야기 나누어 보기)
⚫ 들어가는 말
1) 인간은 가만히 있지를 못하는 존재입니다. 좀이 쑤셔서 견디지를 못합니다.
인간이 가만히 있지 못하는 것에는 두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항상 그 무엇인가를 ‘알고 싶어 하는것’이고,
둘째는 항상 그 무엇인가를 ‘하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 인식과 행위, 지식과 제(창)조, 앎과 일, -
이 두가지를 통해서 인간은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고
삶의 기쁨과 보람, 성취와 만족 등 가치를 만들어 가려고 합니다.
2) 그리스철학에서는 탈레스(Thales)이후 인간은 끊임없이
무엇인가를 알고 싶어하는 충동에 따라 질문을 이어왔습니다.
처음엔 하늘과 땅과 바다와 산을 보면서 우주의 본질을 묻기 시작했습니다.
‘만물의 Arche는 무엇인가?’
그러나 그후 얼마의 시간이 지난 후 부터는
우주의 본질에 대하여
쉬임없이 물어왔던 사람들이 마침내는 질문하는 자기 자신에 대하여 묻기 시작했습니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나는 누구인가?’
3) 이렇듯 ‘인간’과 ‘자기 자신’에 대해서
쉬임없이 묻고 대답하고 토의하고 성찰하자는 것이
서구 인문학과 철학의 목표요, 전통이었습니다.
종교학과 신학은 신을 문제 삼고,
각종 자연과학과 응용과학과 사회과학들은 자연과 물질과 사회를 질문의 대상으로 삼습니다.
그러나 인문학은 그 무엇을 대상으로 삼든지, 주어진 대상에 대하여 알고 싶어하며
질문을 던지는 ‘인간 자신’ ‘자기 자신’을 가장 알고 싶어 합니다.
4) 서양철학에서는 퍽 오랫동안 인간을
어떤 ‘보편적 개념’ ‘일반적 개념’ 혹은 ‘집단적 개념’으로 이해해 왔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인간은 ‘이성적 동물’이라든가 ‘사회적 동물’
‘정치적 동물’ ‘경제적 동물’ 혹은 ‘탐욕적 존재’라는 것과 같은 개념들이었습니다.
그 외에도 많이 있습니다. Homo sapiens를 필두로
homo habilis, homo erectus, homo politicus, homo socies,
homo religious, homo economicus, homo cultualis, homo technicus, homo symbious,
homo movens, homo viator, homo ludens, homo duplex
homo artex, homo consumes, homo nomad, homo hundred 등등이 있습니다.
5)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알게 되었습니다.
인간들 중에는 이성적 존재도 있지만 감성적 존재도 있고,
사회적 인간도 있지만 비사회적 성향의 사람도 있고,
정치적 사람도 있지만 지극히 비정치적 인간도 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이제 우리는 인간을 전체적으로, 통털어서 어떤 획일적 개념이나 단정적 명칭으로
정의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바로 ‘절대 이성’을 주창했던 헤겔(Hegel)까지 이어온 이 서양철학사에
결정적으로 반기를 든 것이 우리가 지난 번에 공부한 실존주의였습니다.
6) 실존주의자들은 인간을 개별적 존재요, 단독적 존재라고 보았습니다.
인간이란 그 누구도 결코 하나로 묶어서 보거나 묶어서 설명 할 수 없는
단독자라고 본 것입니다.
우리가 공부해온 키에르케고르, 가브리엘 마셀,
야스퍼스, 하이데거, 사르트르, 카뮈, 한나 아렌트, 시몬 드 보브아르 등은
한결같이 인간이란 한 사람, 한 사람, 그가 처해 있는 삶의 현실, 상황,
그 콘텍스트에 따라 개별적 존재로 이해해야한다고 보았습니다.
<인간은 개별적 존재다. 인간은 단독자다. 인간은 실존적 존재다.
따라서 모든 인간은 그의 생각과 말과 행위가 제각각 다르며 다를 수 밖에 없다.
세상엔 같은 생각을 갖고 같은 행동을 하는 똑같은 인간이란 있을 수가 없다.
모든 인간은 자유인이다. 생각도 말도 행동도자유다.
그리고 그 자유에 대한 책임은 그 자신이 진다>
7) 그런데 이런 실존주의 사상이 다는 아닙니다.
실존주의가 보는 인간과 인간이해가 최종적 결론이 될 수는 없습니다.
인류의 정신사와 역사는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정반합(正反合 –Thesis, Antithesis, Synthesis) –을 거듭해 갑니다.
20세기 후반에 들어서면서 인간을 보는 새로운 시각이 대두했습니다.
바로 구조주의입니다.
⚫ 구조주의(構造主義, Structuralism)
심리학에서 20세기 초 '기능 심리학'에 대립되는 '구조 심리학'이라는 개념으로 사용되었으나,
소쉬르 이후 언어학에서 사용하기 시작함으로써, 철학에서는 그 의미가 달라지게 된다.
구조주의(構造主義, 영어: structuralism)는,
인문학과 사회 과학 등 다양한 학문에 영향을 미친 철학의 사상 흐름의 하나로,
근본 요소들 사이의 상호 관계 위에 정신적, 언어적, 사회적, 문화적 '구조'가 성립하며,
그 구조에서 특정 개인이나 문화의 의미가 생산된다는 관점이다.
본디 언어학에서 출발하였지만,
점차 그 적용 범위를 넓혀가면서 언어, 문화, 정치, 사회를 분석하는
가장 유명한 접근방법들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구조주의의 출발은 보통 페르디낭 드 소쉬르의 언어학 연구라고 보며,
프랑스 학자들이 소쉬르의 구조적 접근법을 다른 학문에 적용시키면서 유행하게 되었다.
심리학에서 구조주의는 주관적 성찰에 의해
인간의 마음을 구성요소로 분석해 보는 것이지만,
철학에서 구조주의는 주관적 성찰에 의해 인간이 파악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인간은 관찰자에 의해 구성되는 대상들의 관계와 구조 속에서 그 의미를 '부여'받는다는 것이 된다.
즉, 인간의 존재를 자신의 의지나 생각에 관점에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사회에서 이미 만들어진 언어구조나 무의식 등에 의해 구성된 존재라고 바라보는 철학이다.
1. 구조(Structure)의 뜻
- 구조란 어떤 틀이나 조직을 통칭합니다.
개개의 것들이 서로 얽히고 섥히어 전체를 이루어 내는 것을 이르는 말입니다.
따라서 틀이나 얼개나 조직은 개인을 지칭하는 개념이 아니라
개개인들이 속해 있는 집단과 전체를 말합니다.
구조란 개개인처럼 확연하게 눈에 드러나지는 않습니다.
구조란 개개의 물체들이 모여서 만들어 놓은 형태(Form)이며
개개인들이 소속된 조직(System)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렇듯 부분과 개인이 모여 전체와 구조를 이루는 체제 중에는
주로 건축물을 비롯하여 각종 물질계와 정신계는 물론이고
여러가지 사고체계, 이데올로기, 정치체계, 경제체계, 종교체계, 문화체계 등등이 있습니다.
우리가 국가의 조직, 주택의 구조, 인간심리의 틀, 원자의 구조,
종교단체의 조직, 오징어게임의 구조라고 말 할때도
우리는 그것들이 짜여진 형태와 틀을 생각하게 됩니다.
오늘날 우리는 점점 더 복잡한 네트워크(Network), 즉 다양한 관계망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인간이란 개별적이고 독립적이며 단독적이며 실존적 존재로만 이해되는 것이 아니라,
점점 더 수 없이 많은 관계속에 연계되어 있는 존재요,
구조속에 소속되어 있는 구성 요소로 이해되어 가고 있습니다.
2. 구조주의(構造主義, Structuralism)란 무엇인가?
- 철학사전에서의 의미를 간추려 보면 이렇게 정리할 수 있습니다.
A) 구조주의란, 20세기 이후,
인간이나 어떤 사물을 개별적으로 이해하거나 독립적으로 인식하지 않고
그 사람과 사물이 속해 있는 전체 체계속에서,
또 다른 사람이나 다른 사물과의 관계를 살펴보면서 인식하려는
현대적 인식론의 한 방법론입니다.
B) 인간의 개인적 지식과 인식, 경험과 행위를
궁극적으로 규명해 주는 것은 그 개인이 몸 담고 있는
총체적 구조와 체계를 탐구해야만 가능합니다.
– 요약하면 구조주의는 20세기 후반에 들어서서
그 이전 실존주의 사상에 대한 Antithese로
인간과 그 사상, 역사와 사물 전반에 대하여
우리가 인식해 온 방법론을바꾸어 보자는 것입니다.
구조주의는 그 이전 실존주의나 현상학이나 해석학에서
인간을 이해하려고 할 때 흔히 사용했던 방식,
곧 인간 개개인에게서 나타나는 생각과 말과 행위란
그의 독립적이고 개별적이며 단독적인 것이라는 주장에 대하여
단호하게 ‘그렇지 않다’고 선언합니다.
" 모든 인간 존재의 사고와 언어와 행위는
그 인간들이 살아가고 있는 구조와 틀, 조직과 얼개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인간의 생각이나 그가 사용하는 언어와 행동등은
그를 에워싸고 있는 가정, 사회, 법과 제도 등으로 부터 영향을 받습니다.
인간은 ‘이미 짜여진 그 어떤 틀’ 즉 구조(structure)
–예컨데, 언어의 구조, 가정의 전통, 사회의 법률과 제도,
받은 교육과 사상 같은 구조로부터 자유로운 존재가 아닙니다.
인간은 구조의 지배를 받는 존재입니다."
어떤 한 사람의 생각과 말과 표현과 행동들
– 종교, 글, 그림, 운동등은 왜 그렇게 나타나는가?
그걸 알려면 우리는 그를 둘러싸고 있는 삶의 총체적 구조를 먼저 파악해야만 합니다.
인간이란 개별적으로 출생하기 이전 부터 어떤 구조 속에 던져진 존재입니다.
이런 선험적 구조는 일종의 보편적 구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실존주의 이후 구조주의가 크게 두드러지게 된 것은,
그 이전까지 지지를 받아왔던 인간 개개인의 자유와 절대적 권위를 무너뜨릴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자유로운 존재다. 인간에게는 자유의지가 있다>
고 말했던 실존주의에 대하여 구조주의는 말합니다.
<NO! 실존과 자유는 개인의 것이 아니다!
개인적, 개별적, 실존적, 독단적 인간배후에는
어떤 정형화된 틀, 정형화된 구조가 있어서
모든 개별적 인간들은 그 구조의 지배를 받게 되어 있다!>
따라서 구조주의에서는 개인이 제각기 따로 따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처럼 보여도,
사실은 그가 속해 있는 구조나 조직이
이미 그를 그렇게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도록만든다고 봅니다.
<모든 개인과 개개의 사물들은
다 어떤 구조와 조직, 틀과 얼개속에서 만들어지고 형성되고 또 표출된다.
그러므로 인간과 역사, 사물과 문화는 개별적으로 인식할수도 없고, 또 그래서도 않된다.
이런 것들은 전체적 체계와 구조와 틀,
즉Structure와 System 속에서 인식하고 이해해야 한다>
전통적 철학과 실존주의에서는 항상 ‘내’가 중심이었지만,
구조주의에서는 ‘나도 타인’이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나도 나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구조주의는 ‘나는 나다’라는 자기동일성을 부인합니다.
여기에서 구조주의는 어떤 구체적 상황속에서 벌어지는한
인간의 언행심사, 그 자체가 관심과 연구의 대상이 아니라
<그 사람을 그렇게 생각하고 말하고 움직이게 만드는
구조와 틀과 mechanism>이 철학과 인문학이 풀어가야할 과제라고 봅니다.
3. 구조주의 인식론
– 인식론은 존재론과 더불어 철학과 인문학의 가장 길고 오래된 주요 관심 사항입니다.
<인식>(認識, Epistemology)이란 ‘무엇에 대하여 안다’는 것입니다.
오랫동안 인간 <인식의 대상>에는 신과 자연과 사회와 인간 자신을 포함하여
문사철(文史哲)과 시서화(詩書畵)와 소리 등이 있어 왔습니다.
인식의 <방법론>으로는 대륙을 중심한 합리주의와 영국의 경험주의가
오랫동안 대립되어 오다가 칸트에 이르러 그 두가지가 통합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 유명한 칸트의 ‘선험적 관념론’(Transcendental Idealism)이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성주의든 경험주의든 선험적 관념론이든, 인식의 방법론은
늘 <인간 중심적 인식방법>이 주류를 이어왔습니다.
<인간이 만물의 척도다> <인간이 세계의 중심이요 주인이다>
마치 인간들은 자신이 신의 대리인이나 된 것처럼
인간이 세계와 사물과 인간 자신을 생각하고 판단하고 규정하면
그것이 곧 의미를 지니게 되고 거기에 가치가 부여된다고 보았습니다.
인식의 객체가 되는 ‘물자체’(Ding an sich)에게는 물어보지도 않고,
인간이 스스로 주체가 되어 객체를 제단하고 덧붙이고 설명하고 평가하고 분석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새로운 생각이 싹트기 시작했습니다. 구조주의였습니다.
구조주의는 인간이 인식의 주체가 되어 자율적으로, 혹은 독단적으로
어떤 대상이나 심지어는 자기 자신을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모든 인식의 대상들은 인식의 주체인 인간 자신과 인식의 대상이 되는 객체 사이에서 생겨나는
다양한 관계들과 또 그 객체들 사이에서 형성되는 여러가지 상호관계를
만들어주는 구조, Structure, System 속에서만 인식되는 것이라고 봅니다.
구조주의에서의 인식론은 전통적 인식론의 방법론적 전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구조주의적 인식론은 그 이전 사상들이
‘우리는 이 세상을 어떻게 생각하고 인식하고 이해하고 또 설명할 것인가?’하는 물음에 대해서
<이성적, 합리적, 경험적, 선험적, 실존적, 정치적, 경제적, 심리적, 종교적, 주체적>
으로 말해온 것에 대하여 <아니다! 구조적이다!>라고 답합니다.
인간의 사고와 언어와 행위는 개인이 아닌 전체요,
개별이 아닌 조직과 구조 안에서 형성되고 규정되고
또한 표출되는 것임으로 모든 인간 개인과 사물들은
전체적 맥락과 얼개 안에서 인식되지 않으면 결코 올바로 인식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인문학이나 철학은 한 인간과 그가 속한 사회 전체를
<총체적 구조의 틀 속에서 살펴보고 탐구해야 한다>는 것이
구조주의 인식론의 핵심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는 일견, 현상과 구조의 대립, 개별과 보편의 대립 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중세의 유명론과 실재론을 중심한 보편논쟁도
이런 현상과 구조, 개별성과 보편성, 실재와 이름 사이에서 격었던
역사적 경험 중 하나였다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므로 구조주의 인식론에서는 인간을 이해하는 것 역시
당연히 우리가 알려는 사람이 속해있는 전체적 틀과 얼개 속에서 파악하려고 합니다.
4. 구조주의의 주장
– 핵심은 ‘구조를 변화 시키지 않으면, 개인은 결코 바뀌지 않는다’는 말로 요약해 볼 수 있습니다.
구조주의에서는 아무리 개인을 변화 시켜도 구조와 조직이 지닌 근본적 틀 자체를 바꾸지 않으면
그 구조속에 이미 몸담고 있는 개인은 결코 변할수 없다고 봅니다.
구조가 악하면 선한 개인이 만들어지지도 않지만
혹시 선한 의지를 지닌 개인이라 할지라도 그가 살아가는 악한 구조속에 참여하게 되면
그 악한구조 속에 선한 개인은 함몰되고 만다는 것입니다.
라인홀드 니버의 말대로 ‘도덕적 인간(Moral man)’도
‘부도덕한 사회(Immoral society)속에서는 그가 지닌 도덕성을 유지하기가 불가능하다는 판단입니다.
건축의 전체적 구조자체가 잘못되었으면,
아무리 그 건축물을 형성하고 있는 벽돌이나 못이나 목재 자체들은 든든하고 하자가 없다하더라도,
그래도 그 건축물은 부실 건축물이 되어 곧 무너지게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다른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여기 개인적으로 인격도 고상하고 심성도 선하고 신앙심도 깊고
기도나 봉사도 많이 하는 교회의 한 평신도 지도자가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별로 크게 문제될 만한 것이 없는 편입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의 기업체를 경영하는데 있어서는,
고용인들에게 적은 임금에 긴 노동을 요구하고, 탈세를 위해 장부를 조작하고,
은밀하게 정치인들에게 자금을 제공합니다.
<이것은 개인의 문제인가? 아니면 그 사회의 구조와 조직의 문제인가?>
구조주의는 주장합니다.
<그것은 구조의 문제다. 구조를 변화시켜야한다.
구조적 변화가 없이는 개인적 변화는 불가능하다.>
5. 구조주의 이전의 구조주의
– 현대 실존주의에 대한 anti -thesis로서의 구조주의가 생겨나기 이전 부터 있어 왔던
원시적 구조주의에 대해서는 흔히 다음과 같은 몇 가지를 예시합니다.
이것들은 인간을 출생, 삶, 죽음, 죽음 이후에 이르기까지
그 어떤 기계적이고 운명론적인 틀과 구조, 계급과 체계,
종교와 이데올로기로 이해하고 설명하려고 했습니다.
A) 플라톤의 국가(Politeia)
– 플라톤은 그의 국가론에서 이상적 국가는 3개의 계층적 조직을 갖는다고 주장했습니다.
첫째는 지배계층(통치자 계층), 둘째는 군인계층 셋째는 생산계층 입니다.
그에 의하면 지배계층은 지혜를 지닌 철학자들이고,
군인계층은 용기를 덕목으로 갖춘 전사들이며,
생산계층은 욕망을 본질로 하는 서민들로서 그들에게 요구되는 것은 절제였습니다.
플라톤은 국가구성의 조직들이 이상적 국가를 만들기 위해서는
각 계층에게 주어진 3가지 덕목인 지혜와 용기와 절제를 충실하게 이루어 갈 때 이루어진다고 보았습니다.
특히 플라톤은 강조합니다.
(1) 계층이란 타고나는 것이다.
(2) 자신에게 주어진 계층적 역할에 충성을 다해야 한다.
(3) 다른 계층을 넘보지 말아라. 자신의 일을 전문화된 조직으로 만들어라.
(참고: 시드니인문학교실 제12강 ‘플라톤 선생님, 두가지 물어볼 것이 있습니다.
– 그의 이원론과 국가관의 문제점 살펴보기)
플라톤의 이런 계층적 구조주의는 그 후 서구 사회에서는
<귀족주의, Aristocracy>로 자리로 잡아 중세 시대는 물론
현대에 이르기까지 영국의 왕실과 영연방국가들과 유럽의 여러 나라와
교회를 비롯한 종교적 계층에서 그 터를 굳게 지키고 있습니다.
원래 Aristocracy는 그리스어 aristo (최상의)와 cratia(지배)의 합성어로
<우수한 자들에 의한 통치>를 의미하는데서 나왔습니다.
그러나 이 후 이 개념은 군사적 힘, 정치적 권력, 물질적 부유함,
그리고 지적 우월함까지 두루 갖춘 세습적 계층에 의한
서민들을 향한 수탈, 탄압, 지배등 억압적 통치를 뜻하는 것으로 발전이 되었고
특히 중세 이후엔 그 절정에 이르렀습니다.
왕족, 귀족, 봉건 영주, 기사 등의 각종 작위와
그 세습적 구조와 계층적 형태에 대해서는
따로 한번 공부해야 하리라고 봅니다.
종교도 고대의 세습적 제사장제도로 부터 시작하여
특히 카톨릭교회에서는 교황권을 위시한 추기경, 대주교, 주교, 신부, 보좌신부
등등의 계층적 구조가 강화되었습니다.
현대의 구조주의 이전에 이미 이런 여러가지 형태의 구조주의가
동서양을 막론하고 이어져 왔음을 알 수 있습니다.
B) 힌두교의 카스트(Caste) 제도
– 카스트는 고대 힌두사회에서만이 아니라 오늘날의 인도사회를 구조화시킨 기본 틀 중 하나입니다.
카스트란 산스크리트어로 본래는 ‘출생’을 뜻하는 말이었습니다.
다만 현대 인도어로는 ‘바르나’(Varna)라 하고, 그 의미는 ‘색깔’ (colour)입니다.
여기에는 4개의 계급이 있습니다.
(1) 브라만(Brahman) – 사제계급입니다.
(2) 크샤트리야(Kshatrya) – 군인 혹은 정치적 지배 계급입니다.
(3) 바이샤(Vaisyas) – 농공상인 계층입니다.
(4) 수드라(Sudras) – 노예계급입니다.
흔히 ‘불가촉 천민’(untouchables)이라고 불리웁니다.
현재도 인도인구의 약 15%에 이른다고 합니다.
물론 현대의 인도는법률적으로는 카스트제도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불가촉 천민들도 대학교육을 받을수 있도록 민주적제도는 마련이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밖에서는 인도를 아시아에서 가장 민주적 제도가 잘 갖추어진 나라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인도의 사회, 문화, 전통은 철저하게 카스트라는 구조적 틀의 지배 가운데 놓여 있습니다.
직업의 선택이나, 연애, 결혼은 물론이고 버스, 기차, 비행기를 타는 데 있어서 까지
카스트에 따라 달리 취급받습니다.
C) 한국에서의 양천제도와 반상제도
– 신라시대의 각종 골품제는 성골, 진골, 평민등으로 분류되어
각종 관직은 물론 결혼의 대상, 가옥의 규모, 생활용품의 숫자와 종류등을 차별화 했습니다.
고려시대도 왕족, 귀족, 중인, 평민, 천인으로 분류하여
관직으로 나가는 과거의 제한은 물론이고 조세의 차이와 직업의 차별을 제도화 했었습니다.
조선시대도 그 전통을 따라 각종 신분제도가 철저하게 법제화 되어 있었습니다.
양인과 천인으로 나누어진 양천제를 비롯하여
양반과 상민으로 가르는 반상제도는 이름만 바꾸어 가며
계속 사회적 구조를 신분사회로 고착화 시켰습니다.
동학이나 일제 강점 시대와 한국전쟁 등을 거치면서
한국사회도 점차 전통적 신분제도와 그에 따른 사회적 차별은 많이 사라지고 있지만
그래도 여전히 한국인들의 심성 속에는 유교적 전통의 잔재가 남아 있어
문(文)은 높이 보고 사농공은 천히 여기는 관습이 남아 있습니다.
6. 현대적 구조주의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만한 몇 가지 실례들
A) 프랑스의 구조주의 철학자이며 비평가인 롤랑 바르트
(Roland Gerard Barthes, 1915-1980 몇가지 대표적 저술: 현대의 신화, 이화여대 기호연구소옮김, 동문선, 1997
/ 텍스트의 즐거움, 김희영옮김, 동문선, 1997 / 사랑의 단상, 김희영옮김,
문학과 지성사, 1991. 기타 바르트의 편지들 여러편이 한국어로 번역되어 있음)
는 구조주의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문학작품을 포함하여 대부분의 책이란
첫째로, 저자 혼자서 만들어낸 창작품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인간으로서의 저자는 무에서 유를 창조해 내는 신이 아니라고 봅니다.
한 시대의 모든 작품들은 글을 쓴 자신의 가정환경, 학교교육,
어린 시절의 경험, 질병, 독서, 종교, 정치적 환경, 경제적 상황등이
종합적으로 만들어 낸것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모든 작품은 그 시대의 수많은 문화들 사이의
대화와 반박을 통해서 만들어진 복합적 글쓰기이다>
더 나아가 바르트는 이렇게 말합니다.
<작품의 문화적 다양성이 모이는 장소는 바로 독자다.
텍스트는 독자에게서 드디어 새롭게 규정되고 인식된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저자는 죽어야 한다. 저자의 죽음을 통하여 마침내 독자가 탄생한다>
인식은 인식하는 주체와 인식 당하는 객체가 함께 만들어내는 것이라고 본 것입니다.
그는 하나의 작품을 예로들었지만 모든 인식과 이해에는
그 인식과 이해를 가능하게 하는 <구조가 있고 그 구조를 통하지 않고는 그 대상을 바로 알수가 없습니다>
B) 그림, 음악, 서예, 문학, 예술, 철학, 종교, 정치, 경제 등등도 거의 비슷합니다.
인물을 중심으로 하는 서양화는
서양철학과 서양사상을 바탕으로 하는 사회구조가 만들어 낸 것이고,
자연을 중심에 그려내는 동양화는
노장철학을 중심한 동양 세계관이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서양의 오르간이나 피아노, 바이올린이나 기타, 같은 악기들과,
우리네의 거문고와 가야금, 징과 장구, 단소와 꽹과리 역시 모두
그들 사회의 전통과 역사, 신화와 종교등 한 공동체의 구조와 전통이 어우러져 만들어 낸 악기들입니다.
같은 서예라 하더라도 중국의 書法, 한국의 書藝, 일본의 書道는 물론이고,
아랍 에미레이트 항공의 역사성을 지닌 로고
(구글에서 한번 아랍에미레이트항공의 로고를 검색해 보았습니다)나,
유럽의 캘리그래피(Calligraphy) 역시 제각기 다른 사회적 전통과 역사, 구조와 틀속에서 만들었고
이름 붙여진 것들이라는 이야기를 듣습니다.
C) 개인이 갖게되는 종교도 마찬가지입니다.
A씨는 티벳트에서 태어났기에 ‘옴 마니 반메 훔’(산스크리트어로 연꽃과 보석을 뜻함)이나
‘수리수리 마하수리(산스크리트어로 ‘깨끗케 하옵소서’라는 뜻) 같은 주문을 외우고,
B씨는 사우디에서 태어난사람이기에
‘알라후 아크바르’(Allahu Akbar –알라는 위대하시다)라고 외치면서 고백하게 되고,
C씨는 히브리인이기 때문에 야훼 하느님을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브르며,
D씨는 기독교가 주종을 이루는 나라에서 태어났기에 ‘예수는 인류의 구세주’라고 믿으면서
자주 ‘할렐루야 아멘’을 되뇌이곤 합니다.
또다른 A 씨는 이탈리아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카톨릭 신자가 되었고,
B씨는 미국의 남부에서 태어났기에 침례교인이 된 것이고,
C씨는 영국에서 태어나서 성공회,
D씨는 서울에서 태어나서 장로교,
D씨는 강화도에서 태어나서 감리교,
E씨는 사우디나 인도네시아에서 태어났기에 무슬림이 되고,
F씨는 태국에서 태어나서 불교도가 된 것이지,
어떤 한 사람이 특정한 종교를 갖게 되는 것은 결코
그 개인의 선택 사항이 아니라 그가 낳고, 자라고, 배우고, 살아가는 사회구조가 결정해 준다는것입니다.
D) 또 다른 예를 생각해 봅시다.
여기 김선생이 있습니다. 우리는 김선생이 생각하는 것이나
말의 의미나 행동의 의도를 표면적으로 나타난것만 가지고서는 제대로 알 수 없습니다.
그의 나이와 성별은 물론이고 그의 가문, 고향, 가족, 학력, 종교, 친구등을
종합적으로 알아야만 그의 생각과 말과 행동을 비로소 알수 있습니다.
그가 한국 사람이냐, 호주 사람이냐 / 그가 백인이냐, 흑인이냐 /
그가 시민권자냐, 오바 스테이를 하는 사람이냐 / 그가 전라도 사람이냐, 경상도 사람이냐 /
그가 광주출신이냐, 대구출신이냐 / 그가 어떤 종교, 혹은 어떤 교회에 다니느냐 /
그가 다니는 교회는 어떤 교단에 속해 있고 어떤 교회연합기관에 참여하고 있는가 등등,
우리는 한 사람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도, 그가 태어난 지역이나 시대,
소속된 사회나 조직이나 단체를 종합적으로 알아야만
그 사람을 어느 정도, 비교적 제대로 이해할수 있다는 것이 구조주의에서의 인간 이해입니다.
그가 한국 경영자 총연합회의 회원인가, 아니면 민주노총의 회원인가를 알면
우리는 그의 생각과 언행을 보다 더 잘 알수 있습니다.
루터라는 사람이 태어난 15,16세기 유럽,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배경이 되는 19세기 중반 미국의 남부와 인종차별,
프랜시스 퍼킨스(Francis Perkins)같은 우리시대의 대표적 ‘도덕적 분노인’을 만들어낸
미국역사상 가장 유명했던 1911년 뉴욕의 화재사건,
본 회퍼라는 인물이 저항한 20세기 히틀러 치하의 독일,
남아프리카에서 20세기 후반 反아파르트헤이트(Anti-Apartheid)운동으로 인하여
27년간이나 감옥살이를 했던 넬슨 만델라(Nelson Mandela),
‘82년생 김지영’이라는 소설과 영화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이렇듯 구조와 조직이 개인을 만들기에, 개인을 알기 위해서는
그가 살아가는 시대와 지역은 물론, 역사와 전통, 그를 둘러싸고 있는
일체의 환경과 정형화된 틀, 정형화된 구조까지도 모두 종합적으로 고려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이
구주주의에서의 인식론입니다.
마리아, 클라라, 주경식, 전현구, 홍길복이 그런 생각을 하고 그렇게 말하고
또 그렇게 행동하고 살아가는 것은 그들 개인의 생각과 결정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들이 낳고, 배우고, 만나고, 경험해온
삶의 context, 삶의 system, structure가 빗어낸 결과입니다.
모든 개별적 인간들은 구조의 지배를 받습니다.
한 사람의 생각이나 말이나 행위와 삶 전체를 결정해 주는 것은
그가 태어난 지역, 국가, 시대, 그리고 그 시대의 지배적 사상과 정치체계,
경제구조, 문화와 이데올로기 같은 구조, Structure, System들입니다.
7. 구조주의 철학자들
– 초기구조주의와 후기구조주의 이론가들을 모두 다루기에는 힘이 미치지 못합니다.
그래서 임의로 다음 몇몇 분들만 간단히 살펴보겠습니다.
A) 페르디낭 드 소쉬르
(Ferdinand de Saussure, 1857-1913)는 구조주의를 대표하는
스위스의 언어철학자요, <구조주의의 아버지>라고 불리웁니다.
학적 방법론을 제시한 사람입니다.
그는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언어의 무의식적 구조를 살펴보는 데서 출발하였습니다.
소쉬르는 우리가 일상에서 사용하는 말의 표면적 의미 뒤에 있는 구조적 법칙을 알아보려고 했습니다.
<모든 말은 나타난 현상이 전부가 아니다.
인간들이 쓰는 언어는 투명한 것이 아니라 항상 은폐되고왜곡된다>
따라서 그는 발설되거나 기록된 말 이외에
우리 인간들이 사용하는 몸짓, 표정, 목소리를 비롯하여 각종 기호들,
? ! ( ) < > / * # ^은 물론이고 요즘 많이 쓰는 ㅋㅋㅋ ㅎㅎㅎ 으으으 등도
대단히 중요한 <기호언어>라고 보았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그는 말합니다
<구조주의에서는 사람이 말을 하는 것이아니라 말이 말을 한다>,
<내 생각이란 내 생각이 아니라 타자가 주입한 생각이다>
결국 소쉬르가 생각한 구조주의에서의 <구조란 인간이 사용하는 언어의 구조>입니다.
인간들이 사용하는 언어와 그 언어의 구조를 살펴보고 연구하면
인간존재 그 자체가 들어난다는 것입니다.
그에 의하면, 언어 이전에는 사물이나 사상이나 관념이란 존재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이름이 없는 사물은 아직 사물이 아니다. 이름이 붙음으로
마침내 사물은 사물이 되고, 사람은 사람이 되고 그의 존재는 증명이 된다>
(이런 소쉬르의 구조주의적 언어철학에 대해서는 다음 달에 이어지는 제 36강
<언어철학>에서 좀 더 살펴보겠습니다.
/ 한국어로 번역된 그의 대표적 저서들 : 일반언어학 강의, 최승언옮김, 민음사, 2006 /
마지막 강의, 김성도옮김, 민음사, 2017 /
소쉬르의 제 1차 일반언어학, 제 2차 일반언어학, 제 3차 일반언어학, 김현권옮김, 그린비, 2021)
B) 레비-스트로스(Claude Levi-Strauss, 1908-2009)는
다음에 소개할 로랑 바르트 , 라캉, 그리고 푸코와 더불어
프랑스를 대표하는 구조주의 4인방이라고 말하지만 특별히 <구조인류학의 아버지>라 불리웁니다.
그는 소쉬르의 구조주의를 널리 알리고 그를 계승한 구주주의자였지만 특
히 이를 인류학에 접목한 사람입니다.
레비-스트로스는 벨기에에서 출생했지만 파리의 소르본느대학에서 공부한 후
브라질의 상파울로대학에서 사회학 교수로 재직중
아마존 상류의 원주민들을 연구하면서 인류학적 관심을 넓혀 나갔습니다.
그후에는 유네스코에서 일하면서 방글라데시, 미얀마, 인도등지를 다니면서
인류학적 현지조사를 통하여 그 유명한 책 ‘슬픈 열대’를 출판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구조적으로 볼 때, 소위 말하는 문명사회와 미개사회 사이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다고 보았습니다.
한 부족의 풍습이 는 구조는 미개하거나 야만적인 것이 아니라,
그 종족의 생존과 번영을 위한 고유한 구조라고 보았던 것입니다.
예컨데 문명사회에서는 근친결혼을 야만적이라고 말하지만
이는 사실 그 부족의 쇠퇴를 막고 종족을 이어가려는
그들 사회의 지혜로운 조직이요, 구조적 틀이라는 인식입니다.
<각각의 사회는 비교할수 없다. 그들은 제각기 다른 가치관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경제적으로 지배적이라고해서 문화적으로도 지배적이어서는 않된다.
서구인들의 사고 방식은 문화제국주의다>,
<원주민 사회는 서구와는 다를 뿐이지 사실 미개하거나 야만적인 것이 아니다.
인간 세상에는 다른 사회 보다 우월한 사회란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
<원주민들에게는 벌거벗고 사는 것이 수치가 아니다.
그들은 사람이 수치심을 느끼는 기준과 감정이 다르다고 본다.
옷을 입었느냐, 벗었느냐 하는 것은 결코 수치심을 일으킬 요소가 아니다.
오히려 마음이 평안하냐 아니냐 하는 것이 수치심의기준이 되어야한다>,
<모든 문화와 역사는 비교가 불가능하다. 거기에는 차이만 있을 뿐이지 차별은 없어야 하기 때문이다>,
<문화인류학자들은 지금까지 그들의시각에서 미개부족의 후진성을 밝히려고 애를 썻지만
그들은 번지를 잘못 집었다. 원주민들은 원주민의 시각에서 보아야 바로 보인다>.
비록 사용하는 어휘는 적고, 개개인들을 부르는 이름도 없고,
풀로 움막을 만들고, 벌거벗은 채 땅바닥에서 먹고 자며 살아가지만
그들은 야만이 아니라 우리와는 다른 삶의 구조를 지닌 또 다른 과학자들이라고 본 것입니다.
레비-스트로스는 말합니다.
<그들은 정적 사회와 따뜻한 사회 속에서 살고 있는데
우리네 서구인들은 동적 사회와 냉각 사회에서 살고 있다.
정적 사회가 바로인간과 자연이 함께 공존하는 사회다>
레비-스트로스의 인류학적 구조주의는
<인류는 문명과 문화라는 구조를 만들고, 동시에 자기들이 만든
그 문명과 문화의틀 속에서 생각하고 행동한다>는 것입니다.
메소포타미아문명, 나일강문명, 갠지스문명, 황하문명으로 부터
오늘날의 다양한 정치와 경제, 종교와 예술등 온갖문명과 문화는
모두 인간들이 만든 것들이지만 동시에
인간은 그 문명과 문화의 구조와 조직과 얼개속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거기에 갇혀서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오늘도 ‘슬픈 열대’는 과열된 구조 사회 속에서 자신을 상실하고 살아가는 우리를 향하여 묻습니다
. <진정 당신은 누구입니까?>
(한국어로 번역된 그의 책들 중에서 몇권을 소개합니다.
슬픈 열대, 박옥줄옮김, 한길사, 1998 / 레비-스트로스
이종인옮김, 시공사, 1998 / 신화학 1,2,3권, 임봉길옮김, 한길사, 2005, 2008, 2021 /
우리는 모두 식인종이다, 강주현옮김, 아르테, 2015 / 말, 류재화옮김, 마음산책, 2016 /
인류학, 류재화옮김, 문예출판사, 2018
(C) 자크 라캉
(Jacques Lacan, 1901-1981)은 프랑스에서 프로이트를 계승하고 해석하고 동시에
그를 넘어서려고 노력했던 정신분석학자입니다.
그는 정신분석학에 언어학을 결부시켰습니다.
그는 언어의 구조를 분석하면서 인간의 무의식은
언어와 비슷한 형태로 구조화되어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그는 우리가 어떤 말을 배우는 것은 단순한 언어 학습이 아니라
그 언어가 펼쳐져서 지배하는사회구조속으로 들어가는 행위라고 보았습니다.
예컨데 우리가 존댓말을 쓰도록 배운다든가, 표준어를 학습하도록 강요당한다든가,
Good Morning. How are you? 같은 외국어로 인사를 한다든가,
혹은 Thank you, Sorry 같은 말을 해야한다고 배우는 것은,
단순히 의사 소통을 위한 수단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그런 언어를 사용하는 집단과 사회의 구조속으로 밀려들어가는 것이라고 본 것입니다.
<언어란 한 사회의 기존 질서와 구조를 구성하는 권력체계다>
(그의 저서 소개를 비롯하여 라캉에 대해서는 2019년도, 우리 인문학교실
<제 26강 Desdero ergo sum – 나는 욕망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
– 인간이성에 대한 또 다른 도전자, 프로이트와 라캉 이야기>에서
한번 공부했던 부분이기에 여기서는 이만 줄이겠습니다)
D) 로랑 바르트
(Roland Barthes, 1915-1980)는 프랑스의 구조주의 학자로
특히 포스트 구조주의(Post- Structuralism)를 대표하는 사람 중 한분입니다.
우리가 이제까지 살펴본 소쉬르의 구조주의는
<모든 사물은 사물 그 자체의 특성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물들과의 관계 속에서 결정된다.
따라서 개체는늘 전체와의 관계 속에서 보아야하고
전체적 구조의와 그 맥락 속에서 이해해야 한다.
구조와 체계가 변하면 개개의 사물이 지닌 의미도 변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바르트는 여기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구조를 해석하는 점에서
그 <다양성과 무한성>을 주장했습니다.
그는 특히 기호학에 관심이 많았는데
<하나의 기표는 다양하게 해석되고 또 다양하게 해석해야한다>고 보았습니다.
로랑 바르트에 대해서는 이 강의안의 앞부분인
6A)에서 ‘현대의 신화’와 ‘텍스트의 즐거움’ ‘사랑의 단상’등을 소개하면서
구조주의를 설명하는데 유익하다고 여겨지는 실례를 들 때,
그의 ‘문학작품 속에서 만들어지는 구조주의’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기에
다른 저서 한두권만 소개하는 것으로 가늠하겠습니다.
( 신화론, 정현옮김, 현대미학사, 1995 /
기호의 제국, 한은경옮김, 산책자, 2008)
E) 푸코
(Foucault Michel Paul 1926-1984) 역시 프랑스의 뛰어난 구조주의 철학자이면서
동시에 후기 구조주의를 대표한다고 하겠습니다.
푸코도 다른 구조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인간 이성에 대하여 신랄하게 비판했습니다.
그는 서양철학에서 기둥처럼 여겨왔던 이성적 주체관을 비판하고
삶의 모든 자리에서 권력화된 이성을 비판하는데 앞장섰습니다.
<지식과 지성도 권력이다. 정치권력만이 권력이 아니다.
오히려 이성적이며 지식적 계급에 속한 사람들이
정치적 권력자들보다 훨씬 더 폭력적이었다.
그들이야말로 주어진 지식과 폭력적 이성으로 각종 사회적약자들
– 집없는 사람, 거지들, 버려진 아이들, 신앙심이 적은 사람들,
부랑자들, 방탕자들, 난봉꾼들, 동성애자들을 비정상적 인간으로 취급하며 박해하는데 앞장서 왔다>
지적권력을 지닌 자들이 역사상 얼마나 잔혹하게 배우지 못한 사람들과
가난한 사람들과 민중들을 억압해 왔던지를 폭로하면서,
푸코는 특히 사회적 약자들과 소수자들 –minority –를 옹호하고
그들의 편에 서는 사회참여 활동에도 크게 힘을 기울였습니다.
그는 죄수들, 정신박약자들과 신체적 장애인들, 동성애자들, 노숙자들, 성매매여성들,
이주 노동자들의 권리 신장을 위해서 참여하는 지식인으로 일했습니다.
그의 박사학위논문이기도한 ‘광기와 이성’은
유럽에서의 감옥과 병원을 분석함으로 소위 말하는 이성적 사회에서
지식권력이 정치권력과 결탁하여
어떻게 권력이 지배하는 사회체계를 만들었는지를 밝히려고 노력하고 연구한 책입니다.
그는 주장합니다.
<지식을 추구하는 자들은 기본적으로 권력을 차지하기 위한 의지에서 출발한다.
권력은 지식을 기반으로 나오고 지식은 권력을 얻기 위한 수단이된다.>
푸코에 의하면 권력이란 단순히 국가권력이나 정치권력, 혹은 경제권력만이 아니라
가정권력, 문화권력, 종교권력등 모든 권력이 내포된다고 보았습니다.
한 회사의 사장만 권력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심지어는 그런 회사의 건물 경비원까지도 나름의 권력을 행사하려는 것이
인간들이 살아가는 구조라고 분석한 것입니다.
<어떤 현상이든 그 현상의 뿌리에는 권력이 있고 그 권력의 배후에는 악한 이성과 불의한 지성이 있다>
(한국어로 번역된 푸코의 저서들
: 광기와 이성, 이규현 옮김, 나남, 2003, 김부용옮김, 인간사랑, 1999년도 판은 품절 /
말과 사물, 이규현옮김, 민음사, 2012 /
감시와 처벌, 오생근옮김, 나남, 2016 /
성의 역사 1권, 이규현옮김, 나남, 2004 /
2권 신은영옮김, 나남, 2018 /
3권 이혜숙, 이영복옮김, 나남, 2020 /
4권 오생근옮김, 나남, 2019
(F) 장 보드리야르
(Jean Baudrillard 1929-2007) 역시 후기 구조주의와 해체주의와
포스트 모더니즘을 주창했던 프랑스의 사회학자이며 현대철학자중 한 사람입니다.
후기 구조주의에서는 구조의 절대성을 부정합니다.
장 보드리야르는 모든 전통적 구조나 틀이나 조직은 그것이 만들어진 역사 속에서 보고
그 역사의 흐름과 상대성을 인정해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모든 역사, 공동체, 종교, 정치, 경제, 문화등은 끊임없이 변한다.
따라서 모든 구조는 다양하게 해석되어야한다.
하나의 질문에는 하나의 대답만 있는 것이 아니다. One question, Many answers.
더 나아가면 사실 모든 질문에는 정답이 없다.
‘인간이란 무엇인가?’하는 질문에는 수 많은 대답도 있지만
사실 정답 그 자체가 존재하지도 않는다.
시대와 장소와 사람에 따라 수많은 대답이 있기도 하고,
또 수많은 설명이 가능하기도 하다는 말은 곧 정해진 정답이란 없다는 뜻이기도하다>
(사실 저 같이 종교인으로 살아온 사람에게는
하느님이나 인간등에 대해서 정답이 여러개일수도 있고
나아가 정답이란 없다고 하는 후기 구조주의와 포스트 모더니즘이 주는 충격이란
엄청난 것이도 합니다만
그래도 저는 마음의 문을 열고 생각을 넓히며
역사적으로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연구하고 주장한
다양한 생각이나 이론들에 대하여 겸손해지려고 하는 편입니다)
파리 제 10대학에서 사회학교수로 있었던 보드리야르는
68운동에 참여한 지식인 중 하나였습니다.
(한국어로 출판된 그의 저서들 : 시뮬라시옹(원제는 Simulacres et Simulation), 하태환옮김, 민음사, 2001 / 소비의 사회 – 그 신화의구조, 이상률옮김, 문예출판사, 2015 / 사물의 체계, 배영달옮김, 지식을 만드는 지식 출판, 2011)⚫ 나가는 말 – 세상에서 가장 멀고 먼 길, 제일 어렵고도 험한 여정, 그것은 <당신이란 존재는 과연 어떤 사람인지>를 아는 것이며, 동시에 <나라는 인간 역시 어떤 존재인지>를 깨닫는 것이라고 봅니다. 소포클래스의 말대로 <이 세상에는 정말 이상한 것들이 한 두가지가 아니지만, 그런데 그 중에서도 제일 이상한 것은 사람입니다> 이 말을들으면 그것도 옳은 것 같고, 저 주장을 듣고 나면 그것도 틀린 것 같지 않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말도 맞고, 데카르트나 흄의 말도 틀린 이야기는 아니고,
칸트나 헤겔의 주장도 다 일리가 있습니다.
실존주의자들의 고뇌도 충분히 이해가 되고,
구조주의자들의 주장도 참 그럴듯하게 들립니다.
우리 인문학교실은 처음부터 인문학의 목표에 따라
인간과 나를 찾아가는 긴 여정을 이어오면서 서로 서로 인문학과 관계되는 책들을 소개하기도하고
소개받기도 하면서, 읽고, 생각하고, 이야기를 나누어 왔습니다.
그러나 우린 우리의 주제를 놓치지 않습니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나란 존재는 과연 어떤 인간인가?>
⚫ Questions, Comments & Sharing
– 오늘의 이야기 나누기:
(1) <나>라고 하는 한 <인간>에게,
동시에 <인간> 중에 하나라고 할 수 있는
<나>에게 내가 말을 걸어봅시다.
–지금의 내 생각과 사고방식, 내 행동과 행동양식
그리고 내 삶의 태도와 방법이 형성되기까지,
직접적으로, 혹은 간접적으로 영향을 끼친 각종 구조와 체계
(가정, 사회, 교육, 사상, 종교 등)
에는 어떤 것들이 있었을까요?
그리고 그것들에게는 제각기 어떤 장점과 단점들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각자의 노트에 써보거나 서로 이야기를 나누어 봅시다.
(2) 르네상스시대를 연 초기 인문주의자들 중에는
흔히 단테, 페트라르카, 그리고 보카치오를 거론합니다.
그 중 페트라르카(Francesco Petrarca)가 남긴 유명한 경구를 기억합니다.
‘사람이 분별력이 모자라거나 분별력을 잃어버리게 되면
안에서 찾아야 될 것을 꼭 밖에서 찾으려고 한다’
– 지금까지 인생을 살아오면서 내가 얻은것가 잃은 것들은
각각 무엇인지 한번 생각해 보고 써보고 말해 볼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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