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크라이나 곡물을 실은 선박이 1일 오데사항을 떠나 흑해 바닷물을 가르기 시작했다. 최종 목적지는 레바논. 러-우크라-터키-유엔 4자의 우크라이나 곡물 수출 합의가 열흘만에 결실을 맺은 셈이다.
흑해를 항해 중인 우크라이나 곡물 선적 선박/사진출처:터키 ahaber.com.tr 영상 캡처
지난달 22일 전쟁으로 막힌 흑해 바다를 다시 열기로 한 4자 합의에는 튀르키예(터키)가 결정적인 역할을 해냈다. 나토(NATO) 회원국이면서 러시아와 정치·경제·군사적 관계가 긴밀하고, 흑해로 진입하는 보스포러스 해협 등을 사실상 장악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다 에르도안 대통령 등 튀르키예의 정치·외교적 수완을 무시할 수 없다.
한국외대 국제지역대학원 러시아-CIS 학과가 매월 발간하는 '러시아CIS 토크' (Russia-CIS Talk)는 2022년 제 8호(2022년 8월 1일자, https://ruscis.hufs.ac.kr)에서 '전쟁 속에 빛나는 튀르키예의 외교 전략'을 다뤘다. 러시아·CIS 정치 전공 조용성(박사 과정, 현재 상트페테르부르크 국립 대학교 정치학과 박사 과정 재학 중)이 쓴 '튀르키예의 팔색조 외교'다.
전쟁 와중에도 협상을 통해 글로벌 문제(식량 위기)를 해결하고, 국익을 극대화할 수 있다는 점을 실증적으로 확인시켜준 튀르키예의 외교력은 우리 외교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판단해 이 글을 소개한다.
'러시아CIS 토크'는 미리 "이 글은 저자 개인의 의견이며 학과의 공식 견해와는 무관함을 알려드립니다"라고 밝혔다. 바이러시아(www.buyrussia21.com) 편집진도 같은 입장이다/편집자 주.
◇ 나토 회원국으로서의 역할
우크라이나 전쟁 발발 이후 튀르키예의 현란한 '팔색조 외교'가 국제 사회의 관심을 끈다. 강대국 미국과 러시아뿐 아니라 스웨덴, 핀란드, 우크라이나 등 이해 당사국들과 고도의 수싸움과 기싸움을 통해 중요한 국익들을 관철시키고 있어서 그렇다. 앙카라(터키의 수도)는 나토와의 동맹을 자국 안보정책의 주춧돌로 여기지만, 다른 한편으론 독자외교를 통해 안보 이익을 극대화하고 있다.
우선, 튀르키예는 기본적으로 나토 회원국으로서 러시아의 재팽창 야망 봉쇄 임무를 적절히 수행하고 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특수 군사작전 이후 남부의 헤르손을 비롯한 흑해 연안 지역이 러시아군의 수중에 떨어졌다.
하지만 흑해함대 기함인 모스크바함이 지난 4월 14일 바닷속으로 가라앉으면서 우크라이나 남부 최대항구인 오데사가 함락을 면했다. 또 흑해상의 전략 요충지 중 하나인 '즈미이니(뱀)섬'에서 러시아군이 철수하면서 오데사항을 통한 우크라이나의 곡물 수출도 숨통을 트게 되었다. 뒤집어 해석하면, 러시아가 흑해 제해권을 완전히 장악하지 못한 것이다.
이같은 러시아 흑해 함대의 활동 약화는 튀르키예가 흑해에서 에게해로 넘어가는 두 개의 해협(보스포러스와 다르다넬스)에 대한 외국 군함의 통행을 차단했기 때문이다. 이런 조치는 외국 군함의 해협 통행과 함선의 배수량을 제한하는 권리를 튀르키예에 부여한 1936년의 ‘해협 통과에 관한 몽트뢰(Montreux) 협정’에 근거한다. 이 협정은 오늘날 튀르키예와 흑해 연안의 루마니아, 불가리아의 안보 불안을 일정 수준 경감시켜주고 있다.
또한, 튀르키예는 자국산 무인기(드론) '바이락타르'를 우크라이나에 제공함으로써 러시아군에 타격을 주기도 했다. 실제로 전쟁 초기, 바이락타르는 러시아 탱크를 잡는데 혁혁한 공로를 세웠고 이를 통해 우크라이나군이 반격을 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었다. 이미 '바이락타르' 무인기는 지난 2020년 아제르바이잔과 아르메니아 간에 벌어진 나고르노-카라바흐 전쟁에서도 그 성능과 위력을 입증한 바 있다.
◇ 튀르키예의 독자외교
이와 더불어 튀르키예는 나토 확장에 어깃장을 놓는 방식으로 자국 안보이익을 주도적으로 확보했다. 나토 회원국 확대의 만장일치 제도를 활용해 신규 가입을 희망하는 스웨덴과 핀란드에 반대급부를 요구함으로써 안보 현안을 해결한 것이다. 튀르키예는 자국이 테러 조직으로 간주한 쿠르드노동자당(PKK)에 대한 지원을 금지하는 조건으로 스웨덴과 핀란드의 나토 가입에 동의했다. 동시에 미국에게도 러시아산 S-400 방공 미사일 시스템 구매로 중단되었던 F16 전투기 추가 구매 및 장비 개량 지원도 요구해 해결을 앞두고 있다.
그럼에도 주목할 만한 점은 나토국가로서의 튀르키예의 행보가 대러관계의 악화와 적대 표현 없이 진행되고 있다는 것이다. 튀르키예는 러시아의 비우호국가 목록에 포함되지 않았고, 국내 경제위기, 우크라이나산과 러시아산 밀에 대한 높은 의존도로 인해 제재에도 동참하지 않고 있다. 6월 21일부터 28일까지 진행된 러시아의 가스관 기술 점검에도 양국간의 '터키스트림 파이프'는 공급을 재개했는가 하면, 우크라이나 측이 요청한 러시아 선박의 곡물 압류 요청을 거부하기도 했다.
사실 튀르키예는 형제민족이라고 할 수 있는 크림타타르인을 지지하며 러시아의 크림 병합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게다가 2020년 러시아군의 공습으로 시리아에서 튀르키예 군인 30여명이 전사한 사건도 있었다. ‘튀르키예-서구 갈등=튀르키예-러시아 관계 증진’ 공식이 일치하지 않는 것이었다.
이처럼 앙카라는 서구, 러시아와 모두 갈등 현안이 있음에도 대화의 영역에서 문을 열어두고 있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평화회담 중재자를 튀르키예가 자처해오고 있다는 점이 이를 잘 보여준다.
◇ 튀르키예 외교정책의 시사점은?
튀르키예의 이런 자기 주도적 실용외교는 우리에게 어떤 시사점을 주는가? 흔히 동맹 지도국의 의도에서 벗어나는 독자 행보를 보이는 정책은 무모한 것으로 치부되곤 한다. 이는 동맹국의 신뢰를 떨어뜨려, 맹주로부터 유사시 지지를 받지 못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현재 ‘신냉전’ 키워드가 화두가 된 상황에서, 일각에서는 경제적 상호의존 상태, 즉 커플링을 고려하지 않은 채, ‘권위주의와의 투쟁 및 강력한 자유주의 진영에 절대적 의존’이라는 여론몰이가 우리 사회에서 관찰된다.
외교는 통용되는 상식과 달리 “상국(上國)을 정하고 섬기는 행위”가 아니다. 같은 자유주의, 민주주의 가치를 공유하더라도 과거 냉전 시대처럼 공공재를 투입하고 자원을 배분하는 역할을 이제 패권국에게 기대하기가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 그들 역시 민주주의 국가로서 ‘자국 우선주의’라는 국내 여론을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동맹국 또한 자본주의 시장경제질서 하에서 우리의 주요 경쟁 대상국이 되기도 한다. 그런 측면에서 우리 정치권에서 중·러의 권위주의 국가와 경제를 포함한 다양한 분야에서의 협력을 약화시키는 대외적 행보 및 외교언사를 자주 표출하는 것은 우리의 국익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본다.
한국과 튀르키예 모두 미국과의 동맹이 외교안보의 기본 토대를 구성하고 있다. 동시에 중·러와의 정치 및 경제관계 또한 무시할 수 없는 비중을 차지한다. 한미 동맹을 유지하면서도 중·러와도 안정적인 관계를 구축하는 외교적 지혜가 요구되는 이유다. 나토 동맹국 튀르키예의 유연한 실리외교가 그 방향성을 제공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