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카락이 뭐라카는지
정한용
휴대용 진공청소기로 차를 청소하는데 웬일인지 말을 안 듣는다. 밤새 충전기에 꽂아 놨는데도 작동을 멈춘다. 오래 썼으니 이제 갈 때가 되었나? 혹시나 해서 흡입구 안쪽을 열어보았더니, 오 마이갓! 머리카락 한 움큼이 단단하게 뭉쳐 있다. 필터가 꽉 막혔다. 수년간 내 머리를 빠져나간 카락이 훨훨 날아 여기 다 모여 있다. 모종의 음모처럼, 숨은그림찾기처럼, 모발들이 주인을 버리고 모반을 도모하고 있다. 나무는 흙 속으로 뿌리를 내려 이웃 나무와 통한다고 하던데, 내 머리카락도 허공을 날아 모스 부호처럼 톡톡 끊어진 것인지. 우리 집을 벗어나, 스위스에 있는 아들과, 전쟁 중인 가자지구까지, 안드로메다 너머까지, 가는 데까지 가보자 별렀던 듯하다. 내 의지와 상관없이, 우주는 얽혀 있고, 사람들은 서로 머리카락으로 통하며 살고 있는 건 아닐까. 홀로 머문 시간이 긴데, 이렇게라도 멀리멀리 주파수를 쏘아 보낼 수 있다는 게 여간 위로가 아니다. 청소기가 다시 돌아가자, 차 운전석 아래에서 모래와 머리카락이 빨려 올라온다. 내가 보낸 메시지가 아직 해독되지 않은 채, 아직 날것인 채, 돌아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