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는 제가 2018년부터 작성해 온 글로써, 매년 조금씩 교정하여 다시 올리고 있습니다.]
(마 21:23)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 가르치실새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이 나아와 이르되 네가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느냐 또 누가 이 권위를 주었느냐
(마 21:24)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나도 한 말을 너희에게 물으리니 너희가 대답하면 나도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는지 이르리라
(마 21:25) 요한의 침례가 어디로부터 왔느냐 하늘로부터냐 사람으로부터냐 그들이 서로 의논하여 이르되 만일 하늘로부터라 하면 어찌하여 그를 믿지 아니하였느냐 할 것이요
(마 21:26) 만일 사람으로부터라 하면 모든 사람이 요한을 선지자로 여기니 백성이 무섭다 하여
(마 21:27) 예수께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가 알지 못하노라 하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도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이르지 아니하리라
저는 성경을 읽을 때 일반적으로 비난받는 인물들을 같이 비난하기보다는 ‘그들은 도대체 왜 그랬을까?’를 생각하는 편입니다. 요셉의 열 형제들은 왜 그랬을까, 바로는 왜 그랬을까, 사울 왕은 왜 그랬을까, 바리새인들은 왜 그랬을까...
예수님은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두려움은 믿음의 반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막 5:36) 예수께서 그 하는 말을 곁에서 들으시고 회당장에게 이르시되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하시고
요한은 요한일서에서 두려워하는 자들은 사랑을 이루지 못한 것이며 사랑 안에는 두려움이 없고 완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는다고 했기 때문에 여기서 두려움은 사랑과도 반대인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요일 4:18)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그리고 성경 구절로 증명할 길은 없지만, 저는 소망의 반대도 절망이 아닌 두려움이라고 생각합니다. 소망은 뭔가 좋은 일이 일어날 것이라는 생각인데 반대로 두려움은 뭔가 나쁜 일이 일어날 것이라는 생각이기 때문이지요. 그러니 믿음, 소망, 사랑 이 모든 것의 반대가 두려움이라는 말씀입니다. (= 제 생각)
그래서 저는 요셉의 열 형제, 바로, 사울 왕, 바리새인들 등이 가졌던 문제의 핵심은 두려움이라고 봅니다. 오늘은 특별히 바리새인들의 경우만 예로 들자면 그들은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로서 백성들에게 자신들의 위치를 인정받고 존중받기를 원했을 것입니다. 지도자니까요. 그런데 “예수”라는 젊은이가 혜성같이 나타나서는 자기들이 하지 못하는 기적을 행하고 또 권위 있는 말씀을 전하는 모습을 봤을 때, 예수님과 자신들이 비교되어 보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보통 일반적으로는 잘 강조되지 않지만, 바리새인들 중에서도 예수님께 나아왔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니고데모가 그랬고 그 외에도 사도행전에 나오는 인물들도 있고 성경에 기록되지 않은 상당수의 종교지도자들이 주님께 나아왔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니까 당시 종교 지도자들이 전부 예수님을 거절했던 것은 아니고 진정한 “지도자”들도 있었다는 말씀인데 어쨌든 ‘종교’와 ‘지도자’는 둘 다 권력의 맛에 점점 타락할 가능성이 있는 자리이기 때문에 진정한 하늘의 권위로 백성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예수님의 등장이 탐탁지 않았을 것입니다.
왜겠습니까? 예수님이 자신들과 비교가 되어서 자기들의 단점과 약점이 부각되기도 했을 것이고 자신들을 지도자로 따라야 할 백성(유대교인들)들이 예수님을 따르게 생겼으니 두려움이 앞섰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두려움이란 것은 있는 그대로 인식이 되기보다는 자기가 처한 환경에 따라 다른 모습의 가면을 쓰고 등장합니다. 이 종교 지도자들은 이미 너무 교만해져 있었기 때문에 자기들이 두려움을 경험하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대신 그 두려움을, 율법을 어기는 자에 대한 당연한 분노로 인식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무튼 제가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은 세상에는 두 가지 힘이 있는데 하나는 사랑이고 하나는 두려움이며 이해할 수 없는 사람들의 이상한 반응은 대부분 그 뿌리가 두려움일 가능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에겐 저 바리새인들이 중요한 게 아니라 나 자신의 삶과 신앙의 성장이 중요하니 우리에게 적용해 보자면, 어떤 행동이든 우리가 그 행동을 할 때 그것의 원동력이 사랑이냐, 아니냐(아닌 경우는 두려움)를 생각해 보는 것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그리고 동기나 원동력 같은 것을 생각해 보는 것은 매우 본질적인 일이기 때문에 우리 삶에 큰 변화를 가져다주기도 하지만 그만큼 큰 용기가 필요한 작업이기도 합니다.
성령께서 우리의 신앙 성장을 도우실 때, 그분은 우리의 걸음에 맞춰 주십니다. 그래서 우리의 신앙 성장은 마치 양파 껍질을 벗기는 것과 비슷하다는 것을 아마도 대부분 경험해 보셨을 것입니다. 그 양파의 한가운데 중심에 있는 것이 바로 우리의 동기, 우리가 지금 하는 일을 왜 하느냐, 바로 그것입니다. 우리 각자가 다들 어느 정도까지 다다랐는지 그것은 다르겠지만 목표는 바로 나를 움직이는 것(내가 직장에 다니는 이유, 내가 사역하는 이유, 내가 현모양처를 하는 이유, 내가 인생을 사는 이유)이 바로 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되는 것입니다.
(고후 5:14)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강권하시다’에는 강압적인 힘으로 끌고 간다는 뜻이 들어있습니다. 바울의 고백처럼 나를 이끌고 가는 힘이 그리스도의 사랑이 되는 것이 우리의 목표지만 현재의 내 모습은 아닐 수 있습니다. 두려움이 나를 질질 끌고 갈 수도 있고 죄책감이 나를 움직이게 하고 있을지 모릅니다. 그런데 앞서 말씀드렸듯이 이것은 양파의 한가운데, 매우 본질적인 것이기 때문에 여기까지 생각을 해 보는 사람도 별로 없을 것이기에 나를 움직이는 것이 사랑이 아니라는 것을 발견했다 해도 실망할 것은 없습니다. 그것을 발견하는 사람들도 별로 없거든요. 병을 고치기 위해서는 진단이 먼저 있어야 하듯, 성령께서 우리에게 나를 이끌고 가는 힘이 무엇인지 보여주셨다면 이제 그것을 고치시겠다는 뜻입니다.
할렐루야! 그리스도의 사랑만이 우리를 강한 힘으로 이끌고 가는 놀라운 축복이 저와 여러분에게 임하시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