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란군 치하의 여순(좌익계 기록)
날자별 상황
10월 20일
0시 정각 여수항에 정박중인 세 척의 해군함선을 향하여 어디선가 총소리가 있자 수많은 병사들은 무기고를 습격,점령한 다음 일부 장교들을 학살 혹은 감금하고 2시 반에는 여수경찰서를 습격하였다. 3시반경 여수시내의 전 파출소를 반란군이 점령하고 반란군 일부는 3시 반에 여수역을 출발하는 순천행 열차로 북행했다. 여수시내는 경찰서가 전소되고 거리 거리에 '인민대회'의 포스터가 나붙었으며 '인공기'가 전 여수시내에 휘날렸다. 시민들은 인공기를 들고 중앙동 광장에 모이기 시작했다. 시가지에는 '제주도출동거부 병사위원회'의 이름으로
1.제주도출동 결사반대
2.미군도 소련군을 본받아 즉시 철퇴하라.
3.인공수립만세
등의 요지의 성명서가 발표됐다. 남로당 여수읍당위원회에서도 재빨리 읍인민위원회를 조직하고 읍사무소 자리에 보안서를 설치하고 10시경부터 경찰과 우익인사들을 체포하기 시작했다.
소위 인민대회는 중앙동 광장에서 약 4만여 군중이 모여 진행했는데 오후 3시반에 <추도가>,<해방의 노래>등으로 개시되어 이용기,박채영,김귀영,문성휘,유복동 등 5명이 의장이 되어 대회를 진행했다.
인민대회에서도 좌익노동조합대표, 농민조합대표, 여성동맹대표, 청년대표의 '인민공화국'수호를 외치는 연설이 있었고 6개 항목의 결정서를 채택했다.
1.인민위원회의 여수행정기구 접수를 인정한다.
2.'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대한 수호와 충성을 맹세한다.
3.대한민국의 분쇄를 맹세한다.
4.남한정부의 모든 법령은 무효로 선언한다.
5.친일파,민족반역자,경찰관 등을 철저히 소탕한다.
6.무상몰수,무상분배의 토지개혁을 실시한다.
이러한 내용의 결정서를 채택하고 <최후의 결전가>로 대회를 끝냈다. 그리고 군중시위에 들어갔다. 한편 비합법적으로 지하에서 활동하던 '민애청', '학통' '민주여성동맹','합동노조','교원노조','철도노조'등이 나타나 제각기 간판을 붙였다.
좌익군중들은 여수군청을 비롯한 각 기관들을 접수함으로써 하루 아침에 여수시내는 남로당치하가 되고 말았다.
10월 21일
좌익분자들은 소위 '반역자'들을 적발했다. 한독당을 제외한 한민당, 독촉국민회, 대동청년단, 민족청년단, 서북청년회 등의 간부와 단원들이었다.(한독당을 제외한 것은 김 구와 그 일부가 남북협상에 참가하고 5.10선거를 반대했기 때문이었다) 집집마다 시내를 달리는 차에도 인공기를 달게 했으며 반란군이 시내를 지나갈 때마다 어린이들에게 만세를 부르게 했다.
이 날 '인민재판'이 있었는데 제일 먼저 여수경찰서장 고인수를 비롯한 사찰계직원 10여명이 학살되었다. 오후에는 국군비행기로부터 반란군에게 "앞으로 2시간의 여유를 줄테니 귀순하라" 는 전단이 뿌려졌다. 당시 여수의 분위기는 매우 살벌했으며 반란군들의 사기는 높았기 때문에 귀순권유 전단을 뿌렸지만 별 반응이 없었다.
10월 22일
이 날도 소위 반역자 적발과 숙청이 계속되었다. 여수군청을 비롯한 각 행정기관을 접수한 인민위원회는 종래 과장급 이상을 모두 파면시키고 하부직원들은 그대로 집무케 했다. 과장급 이상은 좌익간부들이 차지했다.
10월 23일
여수인민위원회에서는 시민들에게 1인당 백미 3홉씩을 배급하고 천일고무 창고에 있는 백색 '지까다비'를 나눠 주었다. 각 금융기관과 산업직장은 그의 종업원들에게 운영권을 위탁하고 일반 시민에게 일부 대출까지 했다. 반란군에 대한 원호활동을 전개하고 그들에게 전매국에 있는 담배를 공급했다. 이 날 남로당에서는 반역자 처리를 위한 심사위원회라는 것을 조직하고 동 위원회로 하여금 숙청대상자들을 인민재판에 회부하여 처형하게 했다. 이 날까지 인민재판에서 숙청된 사람들은 김영준(한민당 여수지부장), 박귀환(대동청년단 여수지구위원장), 연창회(경찰서후원회장), 차활인(한민당 간부), 이광선(CIC 여수주재위원), 최인태(우익계인사), 김수곤(우익계인사), 박찬길(경찰요원), 박귀역(경찰요원)등 수십 명이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10월 24일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국군의 반격이 시작됐는데 이는 순천방면부터 개시됐다. 이에 좌익분자들과 반란군이 합세하여 대항했는데 이 전투에서 반란군에 탄약을 운반하던 여성동맹원 정기덕(18세)이 피살됐다. 이 날 처음으로 <여수인민보>라는 좌익신문이 발간됐는데 이 신문은 <여수일보.를 접수하고 그 시설을 이용하여 발간한 것이다. 발행인은 여수인민위원회이며 남로당 간부인 박채영이었다. 1면에는 [여수인민에게 호소함]이라는 표제하에 '제주도출동거부자 병사위원회'가 폭동을 일으킨 자기들의 명분을 밝혔으며 20일에 있었던 여수 인민대회의 이름으로 된 [인민군장병들에게 드리는 감사문]과 동 대회에서 연설한 각계 대표들의 연설요지를 게재했다. 2면에는 인민대회의 상황을 상세히 보도했다.
10월 25일
국군의 토벌공격은 계속되었으나 여수시민은 아직도 반란군치하에 있었다. 24일 폭도에게 탄약을 나르다 죽은 여맹원 정기덕에 대한 인민장례식이 보안서 광장에서 거행됐는데 이 장의식에 수천명의 주민이 강제동원됐다.
10월 26일
이 날부터 국군의 토벌작전은 본격화되었다. 전차, 장갑차, 비행기등 기동부대들이 여수를 진압했다. 반란군과의 전투가 치열하게 전개됐는데 여수읍 교외의 미평 오림리부근의 전투가 가장 치열했다. 반란군은 이러한 공격에 견디지 못해 구례방면으로 퇴각했으며 여수시내는 대부분 좌익계 청년들만 남게 되었ㄴ다.
10월 27일
여수시 시가전은 한 집 한 집을 두고 치열하게 벌어졌다. 오후 1시경에 시내는 완전히 진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