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이야기]
'만인예술가 展' 기획한 아트센터 나비 관장
노소영
내 안에 잠자고 있는 ‘예술가’를 깨워라
/ 글 이진숙 미술평론가 kmedichi@hanmail.net, 사진 최정동 기자, 아트센터 나비
/ 중앙선데이 2012.09.16.
▲ 통섭인재양성소 ‘타작마당’ 개관 기념 전시 |
작아진 아이 옷을 다른 아이의 것과 바꿔 입히는 것은 예술일까 아닐까? 모바일 앱을 통해 집단 따돌림 문제의 심각성을 체험하는 일은? 산하의 풍경을 획일화하는 4대 강 사업에 반대해 내성천 하류의 삼강보 공사를 막아내는 일은?
아트센터 나비가 4일 서울 장충동에 새로 문을 연 통섭인재양성소 ‘타작마당’에서 시작된 전시 ‘만인예술가’(10월 6일까지)에서는 이 모든 것이 예술이 된다. 모든 예술은 창조 행위이고, 그래서 전에 없던 일을 하기 시작했다면 그는 곧 예술가라는 논리다. 국립현대미술관의 ‘올해의 작가상 2012전’, 광주비엔날레, 미디어시티 서울 그리고 곧 시작될 부산비엔날레까지 잘나가는 예술 프로들의 잔치가 펼쳐지는 와중에 오히려 ‘안티-비엔날레’를 내세우며 ‘아마추어’들의 참신함에 초점을 맞춘 것이다. 전시뿐 아니라 예술에 대해 새로운 생각을 가진 사람들의 발언장인 콘퍼런스 ‘제9공화국’을 개최했고, 특별공연 ‘더 라스트 월 비긴즈’에서는 예술장르를 아우르는 총체극을 선보였다.
“‘만인예술가’ 기획전을 통해 제가 궁극적으로 바라는 것은 우리 안에 잠자고 있는 ‘예술가’를 깨우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아티스트거든요. 인간에 대한 깊은 통찰이 있었던 스티브 잡스도 아티스트죠.”
이 전시를 기획한 아트센터 나비 노소영(51) 관장의 말이다. 만인예술가(Lay artist)는 평신도(layman)에서 따온 말로, 일상의 실천 속에서 예술을 하는 사람들을 의미한다. 건축·패션·공연·공공예술·만화·영화·미디어아트·공예·사회운동 등 삶의 전 영역에서 평범한 사람들이 행하는 풀뿌리 예술이기도 하다.
전시가 보여주는 것은 보다 좋은 삶, 더 재미있는 세상을 위해 궁리하는 사람들의 다양한 노력이다. 장애인 차별, 이주노동자, 이주여성 문제, 새터민, 통일, 환경 문제 등은 사회정치적인 시각에서 보면 거칠고 힘든 것들이지만 문화적 시각에서 바라보면 ‘샐러드(국내 거주 이주민을 위한 다문화방송국과 극단의 이름)’처럼 부드러운 문제가 된다. 그렇게 우리 사회의 크고 작은 문제를 제기하고 해결해 나가는 사람들이 ‘만인예술가’라는 이름으로 한자리에 모였다. 형식은 기발하고 내용은 진지하다.
이들은 모바일 게임으로 나무를 심고, 가난한 나라 아이들에게 쌀을 보내주고, 말라리아로부터 어린 생명을 지키는 퇴치운동에 동참한다. 내 손에 든 스마트폰으로 행하는 작은 착한 실천들이다. ‘산책가’는 시각장애인 소년이 병원에 입원한 누나를 만나러 가는 길에서 느낀 것들을 손으로 조물조물 만들어 표현한 작품이다. 소년이 부닥쳐 느낀 세상의 감각이 따뜻하게 전해진다.
사실 “모든 사람은 예술가”라는 말은 현대미술가 요제프 보이스가 이미 천명했다. 백남준은 그것을 전제로 많은 사람이 기술 수단과 정보 수단을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는 시대를 꿈꿨다. 그 기반을 만들어 준 것이 디지털 혁명이다.
“디지털이 처음 나왔을 때 인간이 종속된다고 했지만 아니라는 거죠. 테크놀로지가 파워풀하지만 인간은 언제나 그보다 더 우위에 있었습니다. 인간은 무한을 품을 수 있는 존재고 어디로 튈지 모르는 존재거든요. 기계를 만드는 회사는 사용방법을 제시하지만 인간은 주어진 프로그램 안에 한정되지 않아요. 이런 것을 가장 잘하는 사람들이 아티스트입니다. 지금 보시는 것처럼 아주 다양한 방법으로 그 프로그램을 사용하고 있잖아요?”
노 관장의 말은 디지털시대에 우리 모두가 예술가가 될 수 있는 근거이기도 하다.
이 전시에는 물론 다양한 방면에서 활동 중인 프로 미디어아티스트들도 참여하고 있다. 아트센터 나비에서는 작가 김영희와 박수미가 물리적 컴퓨터 기술과 부드러운 섬유디자인을 결합시킨 ‘웨어러블 컴퓨팅(wearable computing)’ 작업을 선보이고 있다.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기술을 인간적으로 길들이는 작업이며 동시에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작품이기도 하다.
미디어아티스트 유동희의 신종 사회게임 ‘강남부자를 이겨라’에서 컴퓨터와 사용자는 똑같이 1억원을 가지고 10년간 총 10번의 이사를 한다. 컴퓨터는 강남지역에서만, 사용자는 강남 외 지역에서만 이사를 다닐 수 있다.
이 게임은 지난 10년간 서울의 실제 부동산 시세 자료를 이용해 ‘강남 불패 신화’를 검증한다. 사회적 변화를 보여주는 복잡한 통계자료를 감성적으로 소화해 보여주는 것이다. ‘서둘러요 조합맨’은 철거와 재건축 과정의 이슈를 역시 게임으로 보여준다.
“예술가가 되는 것은 삶의 주인이 되는 것”
지금은 외장은 다 뜯어내고 골격만 남겨 그 자체로 현대미술품처럼 보이는 서울 장충동 ‘타작마당’ 건물은 전시 이후 리모델링을 통해 통섭인재양성소로 자리매김할 예정이다. 이곳은 10년 넘게 미디어아트라는 한길을 걸어온 노 관장의 꿈이 여무는 새로운 시작점이다. 그가 원하는 것은 “예술과 기술에 대한 새로운 패러다임을 직접 실현하는 것”이다. 삶과 예술의 경계를 허물자는 구호는 오래전부터 존재했었지만 대부분의 예술이 미술관이라는 제도에 흡수되고 말았었다. 그는 이런 상황들을 넘어서고자 한다.
“디지털 혁명이 시작된 20여 년간 우리는 엄청난 문화사적 변혁을 겪고 있지 않습니까? 그것은 위로부터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아래로부터 생활과 밀착해 생겨나고 있죠. 중요한 것은 그 진화의 코스를 컨트롤할 수 없다는 겁니다. 미디어아트냐 아니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사회의 변화, 흐름을 타는 창의적인 활동인지가 중요합니다. 타작마당은 바로 그런 것을 위한 장소입니다. 예술과 산업의 융복합을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로 연결하는 산파 역할을 하고 싶습니다.”
이 공간에는 벌써 ‘신종 예술가’들이 속속 모여들고 있다. 잡지 ‘MAKE’의 한국편집장 정희씨는 “공개된 기술에 개인의 창조적 아이디어를 접속해, 자기만의 물건을 만드는 시대가 됐다”고 말한다. 이 잡지는 ‘개인 제조시대의 풀뿌리 기술 혁신’을 기치로 내걸고 DIY(Do it yourself)의 적극적인 삶을 위한 정보를 나누고 있다. 이들에 따르면 800만원 정도면 온라인상에 공개된 오픈 소스를 이용해 나만의 인공위성을 띄울 수 있다.
“10초 영화제에서는 누구나 감독이자 관객이다. 기존의 영화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당신이 직접 만들고 상까지 줘라.” 3년째 ‘10초 영화제’를 성공적으로 운영하고 있는 스튜디오 셀터 관계자의 말이다. 이들은 예술을 타인의 예술창작물을 그저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적극적으로 표현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해한다.
‘오픈소스·자유문화·공유경제·지식생태를 지지하며, 여러 가지 민주적인 창작과 소통 도구를 활용하는 독립활동가이자 생활예술가’라고 자신을 소개하는 아티스트 어슬렁(본명 이미영)의 말은 기분 좋은 울림으로 남는다.
“구경꾼으로 남아 있지 않겠다. 내게 필요한 것을 상품과 서비스로만 해결하는 소비자로 살지 않고 내 삶의 주인으로 살기로 했다. 예술가가 되는 것은 자신의 본성을 되찾고 내 삶의 주인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창작을 공유하면 세상이 좋아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