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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사무쌍(國士無雙)
그 나라에서 가장 뛰어난 인물은 둘도 없다는 뜻으로, 나라에서 견줄 사람이 없을 정도로 빼어난 선비를 이르는 말이다.
國 : 나라 국(囗/8)
士 : 선비 사(士/0)
無 : 없을 무(灬/8)
雙 : 짝수 쌍(隹/10)
(유의어)
동량지기(棟梁之器)
일세지웅(一歲之雄)
출전 : 사기(史記) 회음후열전(淮陰侯列傳)
국사는 나라의 훌륭한 선비, 곧 나라에서 둘도 없는 뛰어난 인물이란 뜻이다. 이 고사성어에 들어간 한자는 선비 사(士) 자이긴 하지만, 주나라부터 초한쟁패 시기까지는 사와 대부는 서양 봉건제의 말단 기사들과 유사한 존재들이었다. 작은 단위의 영지를 관리하다가 전쟁시에는 자기 영지의 병사들을 인솔하는 군사 지휘관으로 차출되었다.
또 공자의 유학은 춘추시대부터 점점 주류 학문으로 퍼져나가긴 했지만 아직 지배 사상으로 안착하진 않았기에 사대부들이 딱히 유학자가 아닌 경우가 많았다. 士가 오늘날 흔히 생각하는 유학을 공부하는 문관 선비의 이미지로 바뀌기 시작한 건 통일되고 안정된 한나라 체제가 지속되면서 부터다. 어쨌거나 현대에는 딱히 군인이나 장군에 국한해서 쓰이기보단 그냥 여러 분야의 인재들에게 두루 쓰는 말이 되었다.
사기(史記) 회음후열전(淮陰侯列傳)에 나오는 말이다. 한(漢)나라 명신 소하(蕭何)가 한신(漢信)을 한고조 유방(劉邦)에게 추천할 때, "나라안의 선비 중 한신에 비견할 자가 없습니다(至如信者 國士無雙)"이라고 한 데서 비롯되었다.
진(秦)이 망하고 초(楚)의 패왕 항우와 한왕 유방이 천하를 다투고 있을 때의 일이다. 초군(楚軍)의 위세에 눌려 파촉 땅에 갇혀 있던 한군(漢軍) 가운데 한신(漢信)이 있었다. 한신(漢信)은 처음에는 초군(楚軍)에 속해 있었으나, 아무리 군략(軍略)을 말해도 항우(項羽)가 이를 한 번도 채택해 주지 않은 데 실망하여 도망쳐 한군에 들어간 사람이다. 그러나 그때까지 한신(漢信)은 유방의 눈에 들 기회를 갖지 못했다.
한신은 우연히 부장 하후영에게 인정을 받아 치속도위(治粟都尉)에 천거되었다. 그 직무가 병량(兵糧)을 관리하는 일이라 그는 승상인 소하(蕭何)와 알게 되었다. 원래 한신은 그가 품은 큰 뜻에 걸맞는 탁월한 재주를 갖추고 있었는데, 소하는 그걸 알아채고 은근히 기대를 걸었다.
그즈음 관동 각 처에서 유방을 찾아온 부장들 중에는 참을 수 없는 향수에 젖어 도망하는 자가 꽤 많았다. 군중에 동요가 보이자 한신도 도망을 쳤다. 자신의 재주는 치속도위쯤으로는 도저히 만족하지 못했던 것이었다.
한신이 도망했다는 말을 듣자 소하는 부리나케 뒤를 쫓았다. 너무나 급히 뒤쫓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소하도 도망을 치는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유방은 이 소식을 듣자 양팔을 잃은 것같이 낙담하였고, 그런 만큼 노여움도 컸다.
그런데 이틀 후에 소하가 불쑥 나타났다. 그의 얼굴을 보고 유방은 한편으로는 노하고 한편으로는 기뻐했다. “승사의 몸으로 어찌 도망을 했던고?” “ 도망한 것이 아니옵니다. 달아나는 자를 잡으려 했을 뿐입니다.” “누구를?” “한신입니다.” “뭐라고? 한신을 잡으려고 했단 말이오? 지금까지 여러 장사가 도망을 했으되, 경은 그 중 단 한 사람도 잡으러 가지 않았거늘, 어지 이름도 없는 한신을 잡으러 갔단 말이오?”
“지금까지 도망친 인물이라면 얼마든지 구할 수 있습니다. 주공께서는 이름도 없는 한신이라 하셨지만 그것은 한신을 아직 모르시기 때문이옵고, 한신이야말로 국사무쌍(國士無雙)이라 할 인물이옵니다. 주공께서 파촉의 땅만을 영유(領有)하시어 만족하시려면 모르거니와, 만일 동쪽으로 진출하여 천하를 다투실 생각이 계시다면 한신을 두고 달리 군략의 인물을 얻기 어려울 것입니다. 한신이 필요하고 않고는 오직 주공께서 천하를 원하시는지 않으시는지에 달려 있을 뿐입니다.”
“그야 나도 천하를 목표로 하고 있지.이곳에서 썩고 말 생각은 아예 없으니까.” “그러시다면, 제발 한신을 활용하십시오. 활용하시면, 한신도 돌아가려하지 않을 것이옵니다.” “좋아, 내 아직 한신을 모르지만 경이 그렇게까지 추천한다면 그를 장군으로 삼겠소.” “아닙니다. 그런 정도로는 진정 활용하시는 것이 못 됩니다.”
이리하여 한신은 한의 대장군이 되었다. 드디어 그의 재주를 발휘할 때가 온 것이었다. 이것이 한왕(漢王) 원년이 일이었다.
국사무쌍(國士無雙)
나라에 둘도 없는 뛰어난 인재라는 뜻으로, 어떤 사람의 능력과 인품이 그 시대나 국가에서 비할 바 없는 독보적인 존재임을 강조할 때 사용하는 말이다. 사마천의 사기(史記) 회음후열전에 나오는 말이다.
중국 천하를 최초로 통일한 진나라가 망하고 유방과 항우가 천하를 두고 대립할 때 활약한 명장 한신을 두고 한 말이다. 한신은 젊은 시절 무척 가난했고 보잘것없이 보였던 인물이다. 과하지욕(袴下之辱)이란 고사가 생겨날 만큼 건달들의 가랑이 밑을 기는 수모도 겪을 정도로 인정받지 못했다. 초기에는 항우 휘하의 장수로 들어갔으나 항우에게 인정받지 못했다.
뒷날 유방에게로 갔으나 유방 또한 초기에는 그를 인정하지 않다가 소하의 청에 의해 그를 발탁하여 대장군(大將軍)으로 삼았다. 이때부터 한신은 그 능력을 발휘하여 천하의 명장이 되었고, 유방이 천하를 통일하고 한(漢)나라를 세우는데 빛나는 공을 세웠다. 뒷날 유방은 자신은 지략과 용맹에서 항우보다 못하지만, 한신과 같은 장수를 쓸 줄 알았기에 천하통일이 가능했다고 하였다.
또 사가(史家)들은 초한 전쟁 때 한신이 항우를 끝까지 도왔다면 항우가 천하를 통일하게 되었을 것이나, 유방을 도왔기에 유방이 천하를 통일하였으며 만약 한신이 어느쪽도 돕지 않고 스스로 세력을 확장했다면 천하는 유방과 항우, 한신의 삼국정립(鼎立)의 형세를 이루었을 것이라고 평하기도 한다. 이렇게 출중한 능력의 한신을 항우는 알아보지 못했으며 유방도 초기에는 한신을 알아보지 못했으나 소하에 의해 그를 알아보고 크게 활용하였다.
항간에서는 현 정부에서는 검찰밖에 없는 것 같다고 한탄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래서 검찰 공화국이란 말이 공공연하게 등장하였다. 이것은 현 정부에서 기용하는 주요한 인사가 대부분 검찰 출신이라는 데서 기인한 말인 듯하다. 그런데 그런 불만을 내밀하게 분석해 보면 윤 정부의 인사들은 상당수가 검찰이 아니면 과거의 이명박 정부의 인사들이거나 이미 한차례 그 능력이 검증된 그렇고 그런 사람들인 경우가 많은 것 같다.
그런데 이러한 불만은 과거 정부 시절에도 종종 있었다. 그때는 운동권 출신이 인사의 중심에 서 있었다. 과거 정부부터 인재 등용에 대한 국민의 불만이 세간의 화제가 되었을 때 그 내면을 살펴보면 하나같이 자기와 이념과 사상이 같은 자, 자기와 동고동락을 함께 하고 자기 구미에 맞는 사람만 찾아 등용하였기 때문이었다.
널리 인재를 두루 등용하려는 넓은 마음이 부족한 탓이었다. 그리고 그런 말에는 대통령의 출중한 인재가 없으며 대통령 또한 출중한 인재를 구하지 않는다는 불만이 들어 있다. 시대마다 정치가 혼돈되고 나라가 어지러울 때 최고통치자의 주변에 인재가 없음을 한탄해 왔던 것은 오늘의 일만이 아니다. 아주 고대부터 지금까지 이어 온 인재 등용에 대한 최고통치자의 지혜와 덕, 그리고 혜안을 두고 해 온 말이다.
인재가 없음을 한탄하는 것은 그 최고통치자가 덕이 없어 인재가 숨어버린 탓이기도 하고 최고통치자의 소견이 좁아 자기에게 아첨하고 관계가 있는 사람만 발탁하고 조금만 비위에 어긋나도 발탁하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세상에 인재는 넘쳐나고 다만 그런 인재를 찾아 발탁하여 활용하지 못하는 최고통치자의 지혜와 그릇이 부족한 탓이라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다.
진(秦)나라 진시황이 갑작스럽게 죽은 이후 조고와 이사의 국정농단에 의해 망하고 군웅들이 할거하였다. 그때 천하의 두 영웅이 천하를 두고 패권 싸움을 벌였다. 바로 초나라 패왕(霸王) 항우와 한나라를 일으킨 유방(劉邦)이었다.
초기에 한나라 유방은 초나라 항우의 위세가 매우 강하여 고전을 면치 못했으나 한신 등 명장들의 활약으로 전세를 가다듬고 승기를 잡아 결국은 항우를 물리치고 천하를 통일하여 한(漢)나라라는 통일 제국을 열게 되었다. 여기에 혁혁한 공을 세운 장수가 있었는데 그가 바로 한신이었다.
사마천의 사기(史記) 회음후열전에 의하면, 한신은 본래 일반 백성에 지나지 않았다. 젊은 시절 가난에 시달려 끼니조차 해결하기 힘들었으며, 어머니가 죽었을 때는 장례조차 제대로 치를 수가 없었다. 먹고 살길이 없어 남창정이란 마을 정장 집에서 눈칫밥을 얻어먹으며 얹혀살기도 했다. 그러나 마음속에 큰 뜻을 품고 있었기에 항상 큰 칼을 차고 다녔다.
한신이 고향인 회음의 시장 거리를 큰 칼을 차고 걷고 있었다. 그때 한신이 눈에 거슬렸던 불량배 하나가 한신에게 다가와 시비를 걸었다. “야, 넌 늘 큰 칼을 차고 다니는데 사실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겁쟁이다. 네 놈에게 사람을 죽일만한 능력과 용기가 있으면 그 칼로 나를 한 번 찔러 보아라. 그렇게 못하겠다면 내 가랑이 밑으로 기어 나가라”고 떠들었다.
사람들이 모였다. 한신은 한참을 망설이다가 거침없이 그 불량배의 가랑이 밑을 기어 나갔다(과하지욕袴下之辱). 이 일 이후 시장 사람들은 한신을 겁쟁이라고 비웃었다. 한신의 젊은 시절은 이렇게 형편없었다. 그러나 한신의 가슴에는 천하를 얻고자 하는 큰 꿈이 용솟음치고 있었으며 다만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한신은 가까스로 항우 휘하의 장수가 되었다. 그러나 항우는 한신을 염두에 두고 보지 않았다. 어느날 한신에게 좋은 군사 계략이 있어 항우에게 올리려 했으나 항우는 한신의 말을 한 번도 들어주려 하지 않았다. 직책도 말단 장수였다.
한신은 그런 항우에게 정이 떨어져 전전하다가 장량의 설득으로 항우의 군영을 이탈하여 유방의 군영에 투항했다. 그러나 자신이 유방에게까지 알려지려면 한참의 시간이 필요했다. 유방 휘하의 부장(副長) 하후영(夏候嬰)은 한신을 받아들여 치속도위(治粟都尉)로 임명되었다.
치속도위(治粟都尉)는 군사들의 식량을 관리하는 직책이었는데 직접 전투를 지휘하는 자리는 아니지만 한편으로는 중요한 직책이라 직무수행 중에 승상(丞相)인 소하(蕭何)를 만나게 되었다. 소하는 한신을 보자마자 그에게는 상당한 재주와 포부가 있음을 알아차리고 내심으로 큰 역할을 수행하리라는 기대를 걸고 있었다.
그때 관동(關東)지방엔 각지에서 유방을 따라온 부장(副長)들이 지리멸렬한 싸움 속에서 향수(鄕愁)를 못 이기고 도망치는 자가 상당히 많았다. 유방은 고전을 면치 못하고 군사들은 도망치고 군영은 동요하였다. 그때 한신도 함께 도망을 쳤다. 한신은 자기에게 내려진 치속도위(治粟都尉)의 직책이 자신의 가슴에 품은 포부를 펴기에는 너무도 보잘것없는 자리였기 때문이었다.
한신이 도망쳤다는 보고가 승상 소하에게 전해졌다. 소하는 급히 말을 몰아 한신을 뒤쫓았다. 그 일이 너무나 급작스럽게 일어난 일이라 소하도 도망쳤다고 여기는 자들이 유방에게 그 사실을 보고하였다. 유방은 두 팔을 잃은 듯 크게 낙담하면서 분노도 치밀었다.
그런데 이틀이 지나자 소하가 돌아왔다. 그런 소하를 보자 유방은 반갑기도 했고 화도 치밀었다. 하여 큰 소리로 꾸짖었다. “승상이나 되는 자가 어찌하여 도망쳤는가?” 소하왈, “소인은 도망을 친 것이 아니옵니다. 다만 도망을 친 자를 쫓았던 것입니다.” 유방왈, “누구를 쫓았는가?” 소하왈, “한신을 쫓았습니다”
유방왈, “뭐라고, 한신을 쫓았다고. 지금까지 도망을 친 자가 열병이 넘거늘, 그동안 경은 그 중 한 사람도 뒤쫓은 적이 없었다. 그런데 이름도 없는 한신을 쫓았다고, 거짓말 하지 마라”
소하왈, “그렇습니다. 지금까지 도망친 장수가 많습니다만 그중에는 쫓을 만한 인물이 없었습니다. 도망친 장수 정도의 인물은 얼마든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한신만은 다릅니다. 주공께서는 한신이 이름도 없는 장수라고 하셨지만 그건 한신을 잘 모르시기 때문입니다. 한신은 실로 국사무쌍(國士無雙)이라고 부를 만한 출중한 인물입니다. 만약 주공께서 이 파촉(巴蜀; 파촉은 중국 삼국 시대에 유비가 세운 蜀의 거점이기도 하다. 그 蜀은 위에게 멸망하였다, 옛 노나라의 땅이며 지금의 사천성에 해당한다) 땅만을 영유하기를 원하신다면 한신이란 인물은 전혀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동방으로 진출하여 천하를 얻고자 하신다면 한신은 꼭 필요한 인물입니다. 주공께서는 한신을 기용하여 군략(軍略)을 짜신다면 천하를 손에 쥘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 군략에 관한 한 한신에 비할 인재가 없습니다. 그러니 한신이 필요하냐 아니냐는 것은 주공께서는 이 파촉에 만족하느냐 천하를 얻으려 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모든 것은 주공께서 결정하소서.”
유방왈, “물론 나는 천하를 얻을 생각이다. 내가 이 파촉에서 썩을 생각은 추호도 없다.” 소하왈, “그러시다면 반드시 한신을 중요하게 기용하십시오. 그러면 한신은 반드시 머무르며 큰일을 해낼 것입니다.”
유방왈, “알겠다. 나는 아직 한신을 잘 모르나 경이 그토록 천거하니 한신을 장군으로 임명하겠노라.” 소하왈, “아닙니다. 그 정도로는 아직 한신을 활용하는 것이 못됩니다.” 유방왈, “그럼 좋다. 한신을 대장군(大將軍)으로 임명하겠다.” 소하왈, “잘 판단하셨습니다.”
그리하여 한신은 소하의 천거로 유방으로부터 대장군의 직책을 부여받고 임무를 수행하게 되었다. 한신은 이때부터 탁월한 군략을 펴며 능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그때가 바로 유방이 세운 한왕 원년이었다. 그 후 한신은 가는 곳마다 대승을 거두고 항우를 물리치는데 지대한 공을 세웠다.
사가(史家)들은 초한 전쟁 때 한신이 항우를 끝까지 도왔다면 항우가 천하를 통일하게 되었을 것이나, 유방을 도왔기에 유방이 천하를 통일하였으며 만약 한신이 어느쪽도 돕지 않고 스스로 세력을 확장했다면 천하는 유방과 항우, 한신의 삼국정립(鼎立)의 형세를 이루었을 것이라고 평하기도 한다.
이렇게 출중한 능력의 한신을 항우는 알아보지 못했으며 유방도 초기에는 알아보지 못했으나 소하에 의해 그를 알아보고 크게 활용하였다. 한신은 유방이 천하를 통일하여 한나라를 일으키는데 주춧돌이 되었다. 인재는 항상 겉으로 화려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알아보는 자가 있어야 빛을 발휘한다.
초한지에 지략가 장량이 한신을 회유하며 설득하는 과정에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옛날에 천리마라는 명마가 있었다. 그러나 그 천리마도 백락(伯樂; 본명은 손양遜陽, 춘추시대 진秦나라 목공 때 사람으로 천리마 감별에 출중한 안목을 지녔다고 한다)이란 뛰어난 천리마 감별사를 만나지 못했을 때는 말 구유에서 보통 말과 썩여 있어서 보통 말과 똑똑은 취급을 받았고 때로는 더 구박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천리마는 백락이란 뛰어난 감별사를 만났기 때문에 천리마로서의 빛을 발휘할 수 있었다. 장량은 한신을 바로 천리마와 같은 인물로 추켜세우며 그를 회유하였다. 항우는 한신의 능력을 알아보지 못하고 있으나 유방은 알아보고 유용하게 쓸 것이라는 말이었다.
인재도 마찬가지다. 아무리 뛰어난 인재도 보통 사람들과 어울려 지낼 때는 누구도 인재임을 알아보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러나 뛰어난 통치자, 혜안이 있는 지도자라면 그를 훌륭한 인재로 인정하고 영입하려 애를 쓴다. 천리마를 알아보는 백락[伯樂]과 같은 뛰어난 혜안이 있는 지도자라야 인재를 얻을 수 있다.
항우에게는 그런 혜안이 없고 자기 능력의 출중함만 믿었기에 범증 같은 훌륭한 책사도 떠나보내고 한신 같은 명장도 푸대접했다. 그러나 유방은 인재를 알아보는 혜안과 그들을 품을 만한 덕이 있었기에 주변에 인재가 모였고 천하를 얻을 수 있었다.
진(秦)나라 목공은 자기 나라 밖에서까지 널리 인재를 구하여 상앙이란 출중한 인재를 얻어 혼란한 진나라의 질서를 구축하였고, 나라를 안정시켜 부국강병을 이루는 초석을 다졌으므로 진나라게 천하를 통일하는 기틀을 마련하였다. 나라가 흥할 때는 언제나 인재 등용이 고르고 다양하나 나라가 어지러울 때는 항상 인재 등용이 편파적이고 옹졸하였다.
소하에 의해 국사무쌍(國士無雙)으로 인정받고 유방에 의해 국사무쌍(國士無雙)으로 쓰임 받았던 한신에 얽힌 이 고사는 오늘날 정치 지도자들이 인재를 등용함에 있어서 새겨볼 만한 말이다. 출중한 인재는 화려한 스펙에만 있지 않다는 것도 알아야 한다.
국사무쌍(國士無雙)
한 나라에 둘도 없는 훌륭한 인물, 천하제일의 인물
역사 속에는 수많은 인물들이 존재하지만, 그중에서도 한 나라에서 단 하나뿐인 뛰어난 인물을 가리키는 표현이 바로 국사무쌍(國士無雙)입니다. 이는 단순히 재능이 뛰어나다는 의미를 넘어, 도덕성과 지도력을 겸비한 인물을 뜻하며, 국가와 사회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사람들을 일컫는 말입니다.
이러한 인물들은 시대를 초월하여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며, 후세의 귀감이 됩니다. 본 글에서는 국사무쌍(國士無雙)이라는 표현의 의미와 역사 속 대표적인 사례를 살펴보고,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국사무쌍(國士無雙)과 같은 인물이 필요한 이유에 대해 논의하고자 합니다.
국사무쌍(國士無雙)이라는 표현은 중국의 역사서에서 유래한 말로, 특히 사기(史記)나 삼국지(三國志) 같은 고전에서 자주 등장합니다. 이는 한 국가에서 유일무이한 능력을 갖춘 사람을 가리키는 말로, 단순한 지식이나 무력이 아니라 지혜, 인격, 리더십 등을 두루 갖춘 인물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인물들은 국가의 흥망성쇠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며, 난세에 빛을 발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역사 속에는 국사무쌍(國士無雙)이라 불릴 만한 인물들이 많습니다. 예를 들어 중국 역사에서는 한신(韓信)이 대표적입니다. 그는 뛰어난 전략가이자 용맹한 장수로, 유방을 도와 한나라를 건국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뛰어난 능력 때문에 권력자들에게 경계의 대상이 되어 비극적인 최후를 맞기도 했습니다. 이는 국사무쌍(國士無雙)인 인물이 시대와 권력 구조에 따라 어떤 운명을 맞을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우리나라 역사에서도 국사무쌍(國士無雙)에 해당하는 인물이 많습니다. 조선의 세종대왕은 과학, 문화, 경제 등 여러 분야에서 혁신적인 발전을 이룩하였으며, 훈민정음을 창제하여 민중의 문맹률을 낮추었습니다. 그의 리더십과 혜안은 한 나라를 뛰어넘어 세계적으로도 높이 평가받고 있습니다. 또한, 이순신 장군은 불가능해 보였던 전쟁에서 조국을 지키며 국사무쌍(國士無雙)의 면모를 보여주었습니다. 그는 단순한 무장이 아니라, 백성을 생각하는 지도자로서도 존경받았습니다.
현대 사회에서도 국사무쌍(國士無雙)과 같은 인물이 필요합니다. 과거에는 왕이나 장군과 같은 정치·군사 지도자들이 주요한 역할을 했다면, 오늘날에는 정치, 경제, 과학, 문화 등 다양한 분야에서 국사무쌍(國士無雙)이라 불릴 만한 인물이 등장합니다.예를 들어, 테슬라의 CEO 일론 머스크는 혁신적인 기술을 바탕으로 세계적인 변화를 이끌고 있으며, 마이크로소프트의 창업자 빌 게이츠는 IT 산업뿐만 아니라 인류 복지와 질병 퇴치에 힘쓰며 국사무쌍(國士無雙)과 같은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습니다.
또한, 사회적 변화와 개혁을 주도하는 인물들도 국사무쌍(國士無雙)의 현대적 사례라 할 수 있습니다. 넬슨 만델라는 인종차별 철폐를 위해 평생을 바쳤고, 말랄라 유사프자이는 교육의 권리를 위해 싸우며 전 세계에 감동을 주었습니다. 이들은 모두 자신이 속한 사회에서 유일무이한 영향력을 발휘하며, 인류의 발전에 기여했다는 점에서 국사무쌍(國士無雙)이라는 표현이 어울리는 인물들입니다.
국사무쌍(國士無雙)이란 단순히 능력이 뛰어난 사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시대적 요구에 부응하며, 국가와 인류를 위해 헌신하는 인물을 뜻합니다. 역사 속에서는 수많은 국사무쌍(國士無雙)들이 등장하여 나라를 구하고 문화를 발전시켰으며, 그들의 유산은 오늘날에도 큰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현대 사회에서도 우리는 국사무쌍(國士無雙)과 같은 인물이 필요하며, 그러한 인물들은 정치, 경제, 과학, 문화 등 다양한 분야에서 등장하고 있다. 결국, 우리 각자가 자신의 분야에서 최선을 다하고, 공익을 생각하는 태도를 가진다면, 국사무쌍(國士無雙)과 같은 인물이 더 많이 등장할 것입니다.
국사무쌍(國士無雙)이라는 개념은 단순히 역사 속 인물들에게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도 적용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역사적인 위인들만을 바라보며 감탄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 속한 사회에서 어떻게 하면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을지를 고민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꼭 위대한 정치가나 기업가가 되지 않더라도, 각자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고 타인을 위한 행동을 실천하는 것이야말로 현대적 의미에서의 국사무쌍(國士無雙)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급변하는 시대 속에서 다양한 문제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기후 변화, 빈부 격차, 전쟁과 갈등 등 많은 사회적 문제가 존재하는데,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국사무쌍(國士無雙)이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한신(韓信, ? ~ 기원전 196년)
개요: 국사무쌍(國士無雙)
전한의 무장으로, 초한쟁패기 시절 한나라의 초대 대장군이다. 당대의 군사적 상식을 파격적으로 뒤집고 연전연승했던 천재적 명장으로 중국사 전체에서도 명장의 대명사로 여겨진다. 젊었을 적엔 무능력한 인물로 취급받았다. 반진전쟁기에 항가군에 입대했지만 중용받지 못했다. 그러다 한왕 유방(劉邦)에게 귀부한 뒤 기재를 인정받아 대장군(大將軍)이 되었다. 무수한 군공을 세워 유방에게 천하를 안겨주고 자신은 제(齊)왕과 초(楚)왕의 자리까지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진(秦)나라 멸망 이후 항우의 분봉(分封) 당시 파촉에 갇혀 절망적인 상황에 처한 한군을 한중에서 암도진창(暗度陳倉)으로 몰래 이끌고 나와 장한을 비롯한 삼진(三秦)을 멸하고 관중 땅을 평정하여 한나라의 기반을 마련했다. 팽성대전 이후 한나라가 멸망할 수도 있는 최악의 상황에서 오합지졸로 이루어진 3만의 별동대를 이끌고 위(魏), 대(代), 조(趙), 연(燕), 제(齊), 초(楚) 6국을 멸망시켜 유방이 항우를 꺾고 천하통일을 이루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 공으로 전한 건국 이후 최초에 봉해진 7명의 이성왕(異姓王)[2] 중에 한 명이 되었다.
괴철의 의견처럼 한신이 점령한 조나라와 제나라는 유방에게서 독립하여 천하삼분을 노려볼 법한 큰 나라였다. 유방과 여후가 한신을 견제할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천하를 삼분하거나 유방에게 절대 충성하거나 둘 중 하나를 정확하게 해야 했는데 애매모호하게 있다가 비극적인 최후를 맞았다.
현대에는 유방의 손을 들어 한신의 행동을 유방이 어떻게 더 참을 수 있겠느냐는 의견이 많다. 평가 항목에서 볼 수 있듯 고대와 중세에는 한신이 반역을 저지른 죄와 별개로, 유방이 한신을 토사구팽했다는 의견이 많았다. 가장 큰 죄인 반역죄에 엮여서 죽은 인물치고는 특이한 일인데 그만큼 유방이 천하를 통일하는데 한신의 활약이 절대적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한신을 통해서 토사구팽(兎死狗烹)이라는 고사가 널리 퍼졌다. 한신이 처음 만든 단어는 아니지만 토사구팽이라는 사자성어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대표적인 인물이 되었다. 영포와 노관이 한신과 팽월이 죽은 것을 보고 자신들도 죽을 거라고 걱정하여 반란을 계획한 것으로 보아 당시에도 한신이 토사구팽 당했다는 분위기가 있었다.
한신은 많은 표현을 만들어냈다. 불량배의 가랑이 사이를 지나가는 치욕을 참아 목숨을 부지하고, 초나라 왕이 된 후 그 자를 불러 돈을 내리고 용서하여 과하지욕(胯下之辱)이란 고사를 만들었다. 한신을 불쌍하게 여겨 밥을 주고 "당신에게 돌려받을 것은 기대도 안 한다"라고 말했던 동네 아낙네에게 왕이 된 후 크게 보답하여 일반천금(一飯千金)이란 고사를 만들었다.
소하가 유방에게 한신을 천거할 때에는 국사무쌍(國士無雙)이라는 표현을 받았다. 유방과 대화에서 지금도 자주 쓰이는 고사인 다다익선(多多益善)을 만들었다. 전략으로 적을 속이는 명수잔도 암도진창(明修棧道 暗度陳倉)이란 말을 만들었다. 병법 최악의 수이자 금기인 배수진(背水陣)을 성공시켜 배수진을 전략적 전술 또는 결사적 각오라는 의미로 재탄생시켰다. 항우와 마지막 결전인 해하 전투에서 항우를 사지로 몰아넣어 사면초가(四面楚歌)라는 말이 나오게 하였다.
한신의 생년에 대해선 정확한 기록이 남지 않아 추측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한고제보다 연상으로 추정되는 노익장 팽월과 B.C. 247년 출생한 것으로 추정되는 한고제와 그 비슷한 세대인 소하, 장량, 조참 같은 제장 그룹보다는 어린 게 확실해 보인다. 천하통일 이후 시황제 치세 속에서 각종 찌질한 일화를 남긴 회음 시절의 정황을 보면 그 시점 한신의 나이는 대략 20대 무렵으로 추정된다.
그렇다면 B.C. 209년 발발한 진승·오광의 난에 호응한 항량의 군대에 합류했을 때 나이는 대략 이립(30대)쯤에 접어들었지 않냐는 추정이 가능하다. 즉 B.C. 232년 출생한 것으로 알려진 항우보다 약간 연상이거나 또래일 가능성이 높다. 한신의 몰년인 B.C. 196년쯤엔 30대 후반~40대 전반 정도로 여겨진다.
1. 겁쟁이 한신
(1)걸식표모(乞食漂母)
한신의 집안은 왕족과는 거리가 멀며, 가난한 집안 출신에 지나지 않았다. 가난하게 자란 탓에 한신 본인의 품행도 그다지 단정하지 못해 어디서 추천도 받지 못했다. 한신의 키는 꽤 큰 편으로 보이지만 장사꾼 노릇도 그럴 듯하게 하지 못해 항상 누군가에게 빌붙어서 밥을 얻어먹는 백수 신세였다. 이 때문에 주위 사람들은 거의 한신을 겁쟁이로 업신여기면서 싫어했다. 그럼에도 큰 뜻을 품고 검을 항상 차고 다녔다.
그러다가 한신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는데, 한신은 장례를 치를 비용도 없었다. 그러나 물기 없는 높은 곳에 어머니를 매장하여 마치 그 주위에 1만여 가를 둔 것 같이 했는데, 사마천(司馬遷)은 자신이 직접 회음에 가보니 진짜로 그러하였고, 한신이 그때 상황은 막장이었어도 뜻은 높은 곳에 두고 있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묏자리를 잘 쓴다고 해서 당장 없는 밥이 생기는 것도 아니었다. 비참한 꼴이 된 한신은 알고 지내던 정장(亭長)의 신세를 지며 밥을 빌어먹었는데, 정장의 아내가 한신을 대단히 싫어해 일부러 새벽에 남편의 밥을 지어 먹여 한신이 빈대짓을 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한신은 그 뜻을 알고 정장과 절교하고 다시는 그 집에 가지 않았다.
그렇지만 딱히 밥을 벌어 먹을 수 있는 재주도 없고, 굶주린 채 낚시터를 어슬렁거렸는데, 빨래 하던 아낙네가 그 모습을 불쌍히 여겨 한신에게 밥을 주었고, 한신은 그걸 얻어먹으면서 굶주림을 해결했다.
며칠을 이렇게 얻어먹자, 한신은 워낙 고마워서 아낙네에게 이렇게 약속하였다. "내가 나중에 꼭 베풀어준 은덕에 보답하겠습니다." 그러나 그 말을 들은 아낙네는 성을 내었다. "대장부가 스스로 살아가지 못해 내가 왕손(王孫)을 불쌍히 여겨 밥을 준 것이니 어찌 보답을 바라리오." 그러나 훗날 한신은 진짜로 약속을 지켰다.
(2)과하지욕(胯下之辱)
이렇게 동네 아낙네들에게도 무시당할 지경인데, 젊은 사람들에게는 말할 나위도 없었다. 어느 날 회음의 젊은 사람들 중 불량배 한 명이 대놓고 한신을 욕하면서 소리쳤다. "네가 체격이 좋고 칼도 즐겨 차지만 속은 겁쟁이가 아니더냐? 네가 용기가 있으면 나를 찌르고 이 길을 지나가고, 없다면 내 가랑이 밑으로 기어 지나가라."
한신은 한참을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허리를 굽혀서 가랑이 사이를 질질 지나갔다. 마침 길거리에 있던 사람들 모두가 그 모습을 보고는 비웃음을 터뜨리면서 한신에게 겁쟁이라고 놀려대었다. 이 사건으로 한신은 고향에서 그야말로 조롱거리 신세로 떨어져버렸다. 용저가 훗날 이 이야기들을 들먹인 걸 보면 어지간히 유명한 일이었던 듯하다. 한신이 떠들고 다녔을 리는 없을 테고.
2. 한(漢)의 대장군
(1) 죽을 지경에서 벗어나다
답이 없는 찌질이가 되어 막장스런 나날을 보내고 있던 한신에게 드디어 기회가 찾아왔다. 당시 진나라의 상황은 말이 아니었다. 진시황(秦始皇)의 시대부터 이어진 폭정으로 백성들은 신음했고, 이세황제(二世皇帝)는 환관 조고(趙高)에게 일을 맡긴 채 사치와 방종에 빠졌다.
결국 폭탄은 터져버려 BC 209년, 진승(陳勝) 등이 처음으로 저항을 시작하여 진승·오광의 난이 발발했고, 진승은 장초(張楚)를 건국했다. 이에 여러 군현의 백성들도 모두 진나라 관리를 때려 죽이고 봉기에 동참했다. 이때, 오현(吳縣)에서 거병한 항량(項梁) 역시 북상하여 회수(淮水)를 건너던 참이었다. 한신은 칼을 하나 차고 서둘러 항량에게 달려가 그 부하가 되었다.
그러나 항량의 부하가 되었다고 해서 무슨 반전이 일어난 것도 아니었다. 한신은 철저하게 이름이 묻혀 알아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훗날 용저가 한신의 일화들을 들먹인 걸 보면 오히려 안 좋은 쪽으로 이름이 알려져 있었을 것이다. 곧 항량이 전사하고 그의 조카 항우(項羽)가 그 세력의 우두머리가 되었고, 한신은 집극랑(執戟郞) 자리에 임명되었다.
상황이 조금 나아진 듯 싶기도 했지만, 한신이 무슨 제안을 올릴 때마다 항우는 철저하게 무시했고, 어떤 계책도 써주지 않았다. 결국 참다 못한 한신은 항우에게서 도망쳐 버리고 말았다. 마침 그 시기는 유방이 홍문연(鴻門宴)의 일이 있은 후, 천하의 벽지인 파촉(巴蜀)으로 터벅터벅 들어가고 있던 시기였다. 한신은 그 행렬에 합류해 한군에 귀속했다.
홍문의 연회 이후 파촉 땅으로 떠나는 유방을 따라 떠난 한신의 일화는 유명하고, 바로 여기서 유방과 한신의 첫 만남이 이어졌다. 다만, 초한춘추(楚漢春秋)라는 사료를 참조하면 한신과 유방간의 '접촉'은 이때보다 좀 더 이전이다. 패왕이 홍문에서 몸을 빼내 샛길을 따라 군중에 도달했다. 이에 한신과 장량이 항왕의 군문에 이렇게 아뢰었다. "패공께서 신에게 백벽 한 짝을 받들어 대왕 족하께 바치고, 옥두 한 짝을 대장군 족하께 바치라고 하셨습니다." 아부(범증)는 옥두를 받아 땅에 놓고는 극(戟)을 쳐들어 이를 깨버렸다.
초한춘추는 바로 이 초한전쟁 당대의 인물인 육가(陸賈)라는 사람이 쓴 그 시대의 1차 사료로, 현재는 소실 되었지만 여러 사료에 파편적으로나마 약간의 원본이 남아 있다. 그 유명한 홍문연 자리에서 유방과 항우 뿐만 아니라 한신 역시 한 구석에서 그걸 지켜보고 있었다고 생각하면 흥미로운 부분이다.
그러나, 한군에서도 한신의 자리는 없었고 거기서도 이름을 날리지 못한 채 곡식 창고를 관리하는 '연오'라는 낮은 직책에 머물러 있을 뿐이었다. 그러던 와중, 어떤 죄에 연루되어 한신은 참수형을 당하게 되었고 한신과 같이 있던 죄수들도 모두 끌려와 눈 앞에서 차례로 처형당했다.
한신 앞으로 13명이 모두 처형되고 이제 한신의 차례가 되자, 한신도 이렇게 죽기는 어이가 없었는지 하늘을 바라보다가 마침 눈 앞에 있는 하후영(夏侯嬰)에게 소리쳤다. “왕께서는 천하를 취하지 않으실 것입니까? 어찌 장사를 죽이려고 하십니까!” 하후영이 듣기에 실로 기묘한 말이 아닐 수 없었다.
그는 우선 한신이 죽지 않게 했고, 이야기를 해보니 이 사람이 키도 크고 허우대도 좋고 해서 유방에게 한신을 추천했다. 말을 들은 유방은 한신에게 전군의 군량의 수급, 운송, 관리를 담당하는 치속도위(治粟都尉) 자리를 주었지만, 아직은 한신이 별로 뛰어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2) 소하가 천거하다
이때, 소하는 한신과 몇 번 대화를 해볼 기회가 있었고, 말을 나눠 본 후 이 사람이 생각보다 뛰어난 인물임을 알아차렸다.
이 당시 한나라는 대단히 상황이 좋지 못했는데, 터벅터벅 파촉으로 걸어온 유방의 군대가 남정(南鄭)에 이를 무렵이 되자 이 벽지를 견디지 못하고 향수병에 빠져버리는 바람에 하루에도 장수 수십 명이 도망가버리는 막장스런 상황이 이어지고 있었다. 머나먼 지역에 고향을 두고 있는 병사들도 매일매일 동쪽의 고향에 돌아갈 생각으로 노래만을 불러대었다.
그리고 그렇게 도망가는 장수들 중에는 한신도 있었다. 어차피 여기 있어봐야 유방은 자기를 써주지도 않을 것이니 다른 나라로나 가자고 여긴 것이다. 이 사실을 들은 소하는 미처 사정을 고할 겨를도 없이 한신의 뒤를 쫓아 추격했다.
한편 유방은 소하가 사라졌다는 소식을 듣고 이제 소하마저 나를 버리고 가는구나라는 생각에 두 팔을 잃은 것처럼 낙담하고 있었다. 그러다 소하가 돌아오자 기쁘기도 하고 분통이 터지기도 해서 연유를 물었는데, 소하는 한신을 쫓아간 사실을 말했다.
이에 유방은 지금껏 도망 간 장수가 많았지만 소하는 한번도 붙잡으러 간 적이 없었다며 한신 같은 이를 붙잡으러 갔다는 말은 거짓이라 추궁하자 소하는 다음과 같이 말하며 그를 대장으로 임명할 것을 권했다. "여러 장수들 같으면 얻기 쉽지만, 한신 같은 자라면 나라 안의 인물 중 그에 비견할 자가 없습니다. 왕께서 꼭 오래토록 한중(漢中)의 왕이 되려고만 하신다면, 한신을 쓰시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러나 반드시 천하를 다투고자 하신다면, 한신이 아니면 더불어 대사(大事)를 도모할 만한 자가 없습니다. 원컨대 왕께선 편안히 결정하십시오."
이때 한신은 그저 아무에게도 인정받지 못하던 하찮은 인물에 지나지 않았지만, 소하는 한신의 진면목을 완전히 꿰뚫어 본 것이다. 유방 역시 이런 벽지에 처박히고 싶은 생각은 없었기에, 소하의 말대로 한신을 장수로 쓰겠다고 말했다. 그러자 소하는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비록 장수로 삼으신다 해도 한신은 머무르지 않을 것입니다." 이에 유방은 한신을 대장군으로 임명했다.
하지만 소하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또 다른 제안을 했다. "대왕은 평소에 오만무례하십니다. 오늘 대장군을 임명한다고 하시면서 대장 될 사람에 대한 태도가 마치 어린아이 대하듯 하십니다. 이런 자세로 인해 한신 같은 호걸들이 대왕 곁을 떠나려고 합니다. 왕께서 한신을 대장군에 임명하시려고 한다면, 필시 좋은 날을 택해 목욕재계(沐浴齋戒) 하신 다음, 단을 세우고 예를 갖추어 의식을 갖추어야 합니다." 이에 유방은 소하의 제안대로 단을 세우고 대장군을 임명하는 예를 갖추었다.
그러자 번쾌나 조참과 같이 유방 곁에서부터 시작한 개국공신급에 가까운 장수들이 "야 신난다! 보나마나 내가 대장군이 되겠지?" 같이 기대감에 부풀어 식장에 모였다. 정작 모이고 보니 웬 키만 큰 놈이 단에 오르고 있었다. 이에 장수나 병졸이나 할 것 없이 모두 경악했다고 한다.
사기 회음후열전의 표현을 빌리면, '한신이 대장이 되자, 일군(一軍)이 모두 놀랐다'고 나온다. "여러 장수들도 모두 기뻐 하면서(諸將皆喜 제장개희), 사람이면 사람마다 각기 자신이 대장이 될 것으로 생각하였다(人人各自以爲得大將 인인각자이위득대장). 대장이 배수되자(至拜大將 지배대장), 이에 그가 한신이니(乃韓信也 내한신야), 군사들이 모두 놀랐다(一軍皆驚(일군개경)."
이는 한편으로는 유방의 용인술이 비범했음을 보여주는 대목인데, 만약 유방이 파촉에 처박혀 있으려거든 내부 단속이 중요하기 때문에 굳이 한신을 대장군으로 삼아서 분란의 씨앗을 심을 이유가 없다. 따라서 유방의 야망, 혹은 치지 않으면 당할 수 있다는 날카로운 위기 의식을 보여준다.
둘째로, 도박이긴 하지만 실제로 유방은 저평가 되던 한신에게 걸어볼 정도로 답이 없던 상황이었다. 유방의 부하들로서는 아무리 생각해도 항우와 상대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면 어차피 이러나 저러나 0에 가까운 확률이기 때문에 도박도 걸어 볼 만하다.
셋째로, 이 도박에서 소하와의 관계이다. 유방은 최측근이자 우수한 내정관련 참모인 소하가 없으면 자신의 세력을 이끌어나가기 몹시 어렵다고 판단하고 있었으며 소하의 사람됨과 능력을 믿고 있었다. 실제로 소하는 유방과 항우의 전쟁 중에 배신은커녕 옛 진나라의 역량을 싹싹 긁어모아 유방을 뒷바라지한 인물이기에 소하 없이 내 야망이나 위기를 헤쳐나갈 수 없다는 판단이라면 도박의 가치가 올라가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부하가 자신이 오만무례하다는 혹평을 면전에다 대고 했는데도, 무례하다고 화를 내기는커녕 그의 조언을 그대로 받아들여 실행하는 모습 또한 비범한 면이다. 훗날 걸주드립도 웃어넘긴 거 보면 확실히 대범하다 가장 놀라운 부분은 하후영이나 소하 말고는 알지도 못하는 한신을 대장군으로 만들고도 내부를 수습할 수 있던 통솔력이다.
시기상으로도, 한신의 기용은 대단히 파격적이었다. 유방이 관중에서 파촉으로 향했을 때가 기원전 206년 2월, 후술하겠지만 유방이 출전 준비를 끝내고 삼진을 공격했을 때가 같은 해 8월이다. 관중에서 파촉으로 이동한 시간과 새로 기용한 한신의 지휘 아래 전쟁 준비를 한 기간을 고려하면 한신이 이 대장군 직에 임명된 것은 한신이 유방에 합류한 지 길어야 2~3달 남짓이다. 진영에 들어온 지 몇 달 안 된 외부 인사를 대장군이라는 최고위 직위에 임명한 것이다.
(3) 유방에게 진면목을 보이다
이렇게 임명식이 끝나고 난 뒤, 유방은 따로 한신을 불러들였다. 소하가 하도 칭찬해서 어떤 사람인지 궁금하기도 했고 항우에 대적하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으나 벽지인 파촉지방에서 어떻게 해야 할지 그 방도를 찾지 못하고 있었는데 일단 대장군으로 뽑았으니 뭔가 방법이라도 있는지 궁금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한신은 감사의 예를 올리며 유방에게 이렇게 물었다. "지금 대왕의 적은 항왕(項王)이 아니겠습니까? 대왕께선 스스로 용맹함과 날램, 인자함과 강인함을 항왕과 비교해보신다면 어떠십니까?" 이 시기 항우는 거록전투에서 진나라군을 격파하고, 모든 제후들을 영향권 아래 두고 있는 그야말로 전성기였다.
유방은 살짝 머뭇거렸지만 일전에 장량도 비슷한 질문을 한 적이 있었기에 유방은 솔직하게 "내가 다 항우만 못하다"고 인정했고, 이에 한신은 유방에게 두 번 절을 올리고 유방을 치하하며 말했다. "저도 대왕께서 항왕보다 못하다고 여기고 있습니다. 그러나 신이 일찍이 항왕을 섬긴 적이 있으니 그의 됨됨이를 말해보겠습니다. 항왕이 분노하여 소리치면 수많은 사람들이 모두 나가 떨어집니다. 그러나 현명한 장수를 임명하여 맡기지 못하니 이는 필부의 용맹에 불과합니다.
항왕은 다른 사람에게 공손하고 화기애애하게 말을 하며 다른 사람이 병에 걸리면 눈물을 흘리며 음식을 나눠주지만, 다른 사람이 공을 세워 마땅히 봉작(封爵)할 때는 아쉬워하며 어쩔 수 없이 인수를 새겨주니, 이는 아녀자의 인자함에 불과합니다.
항왕이 비록 천하를 제패하고 제후들을 신하로 삼았으나, 관중(關中)에 머물지 않고 팽성(彭城)을 도읍으로 정했습니다. 또 의제(義帝)와의 약속을 저버리고, 제후들을 고르게 대하지 않았습니다. 제후들은 항왕이 의제를 강남(江南)으로 쫓아낸 것을 보고는 각자 돌아가서 주인을 쫓아내고 좋은 땅을 차지해 스스로 왕을 칭했습니다.
항왕은 지나가는 곳마다 잔멸(殘滅)에 잔멸을 거듭하여 백성들의 원성이 가득하며, 백성들이 스스로 항왕에게 의탁한 것이 아니라 그 위세에 겁을 먹어 강제로 복종했을 뿐입니다. 비록 패왕(覇王)이 되었지만 실제로는 천하의 인심을 잃었으니, 그래서 강성함이 쉽게 약해진다고 하는 것입니다.
지금 대왕께서 이를 바로잡고 천하에서 무용(武勇)이 있는 자를 임명한다면 어찌 주살하지 못하겠습니까! 천하의 성읍을 공신들에게 나눠준다면 어찌 복종하지 않겠습니까! 의병의 마음을 쫓아 동쪽으로 거병한다면 무엇인들 무너뜨리지 못하겠습니까! 또 삼진(三秦)의 왕들은 진(秦)의 장수가 되었는데, 오랫동안 진의 병사들을 거느려 죽은 자는 헤아릴 수 없고, 또한 그 무리를 속여 제후들을 항복시켰습니다.
항왕이 신안(新安)에 이르렀을 때 항복한 진나라 병졸 20여만 명을 속여서 파묻고, 오직 장한(章邯), 사마흔(司馬欣), 동예(董翳)만 살려주었습니다. 진의 부형들은 이 세 사람을 골수에 사무치도록 원망하고 있습니다. 대왕께서는 무관(武關)에 입성하여 백성들에게 추호도 해를 끼치지 않고, 가혹한 진의 법을 폐지하고, 백성들에게 약법 3장을 약속하여 진나라의 백성들은 대왕께서 진나라의 왕이 되길 바라고 있습니다. 다른 제후들과의 분봉에서 대왕께서 당연히 관중의 왕이 되어야 하며, 관중의 민호(民戶)들도 이를 알고 있습니다.
왕께서 관중을 빼앗기고 촉으로 쫓겨나 모든 진의 백성들이 한탄하고 있으니, 이제 왕께서 동쪽으로 거병하여 격문을 돌린다면 삼진은 저절로 평정될 것입니다."
이 말은 파촉에 처박혀 항우보다 모든 면에서 불리한 자신이 그에게 맞서 살아남을 수 있을지 고뇌하던 유방에게, 그야말로 막힌 곳을 뻥 뚫어주는 것처럼 시원한 말이었다. 유방은 한신의 말을 듣고 대단히 기뻐하면서, 자신이 한신을 너무 늦게 얻었다고 여겼다. 유방은 마침내 한신의 능력을 완전히 신뢰했고, 한신은 유방의 신뢰를 바탕으로 작전을 수립해 각 장수들이 움직일 곳을 정하여 동진하기 시작한다.
3. 전설의 시작
(1) 삼진 정벌과 관중 평정
마침내 BC 206년 8월, 한군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한군이 동진하기 위해서는 진령산맥(秦嶺山脈)을 넘어 관중으로 들어가야 했는데 이때 가장 먼저 만나게 되는 적이 진나라의 명장이었던 장한이었다.
이는 진(秦)을 멸한 후 항우가 각 제후들에게 분봉할 때 유방을 한중의 왕으로 삼고 파촉의 벽지에 몰아 넣고 그를 견제하기 위해 옛 진나라 땅에는 옛 진나라의 장수이자 충성을 맹세한 장한(章邯), 사마흔(司馬欣), 동예(董翳)를 각각 옹왕(雍王), 새왕(塞王), 적왕(翟王)으로 삼아 진나라 땅을 3등분하여 삼진 땅에 봉하여 군을 주둔시킴으로써 유방이 주둔한 파촉을 견제하며 유방이 나오지 못하도록 하였는데 장한에게 관중의 8백 리 진천(秦川)을 봉해 유방이 나오지 못하도록 하였다.
즉, 이곳에 장한을 배치했다는 것 자체가 유방을 봉쇄하겠다는 의도를 드러낸 것이다. 유방도 이를 잘 알고 있었기에 파촉에서 나가지 못할까 두려워 했고 한신을 등용하기 전까지도 딱히 대책을 세우지 못했다. 허나 한신을 대장군으로 임명한 뒤 한신의 제안에 따라 장한을 공격했는데 이때 한신이 제안한 전술은 성동격서에 기초한 것으로서 당시 유방은 파촉에 들어올 때 항우의 의심을 사지 않기 위해 장량의 건의에 따라 여러 절벽 등에 만들어 놓은 잔도(棧道)를 모두 불태웠는데 이 상황을 이용한 것이었다.
한군이 잔도를 모두 불태웠으니 장한은 당연히 한군이 나오려면 그 험한 환경의 잔도를 복구하는데 최소한 년 단위 시간이 걸릴 거라고 생각했으며 잔도를 수리하더라도 오랜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적당히 주기적으로 정찰을 보내 감시하면 대비가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들과 장한의 저런 심리를 이용하여 잔도를 대대적으로 고치는 모습을 보여줘 장한의 주의를 끌고 다른 길을 통해 몰래 기습을 했는데 이때 나온 말이 명수잔도(明修棧道) 암도진창(暗度陳倉)이다.
이에 대해 흔히들 그냥 '잔도를 고치는 척하며 다른 길로 나아갔다'라고만 알고 있으며 그 진격로나 길 등에 대해서는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이 과정은 당시 한군에게 가장 큰 걸림돌이었고 한군의 관중 진출에 중요한 고비인데 이에 대한 자료나 정보는 찾아보기 힘들다.
환정삼진 당시 한군의 진격로를 살펴보면 과연 옹나라에서 방비하지 않은 옛 길이라는 것이 있었는지가 의심스럽다. 위의 그림을 보면 진창 서쪽에서 행해진 작전이 꽤 있음을 볼 수 있다. 장한이 대비하지 않은 옛 길을 통해서 진창을 급습한 것이라면 옹나라의 진창에서 군대와 교전하는 것은 이상하다. 옛 길에 대비가 미약하다면 굳이 진창에 가기 전에 정리해야 할 만큼의 군대가 있는 것이 이상한 것이다. 더구나 옹군은 한군이 진격하는 것에 맞서 싸우려는 움직임까지 보여준다.
이를 통해 봤을 때 한나라의 진창 진격은 옹나라가 미처 모르는 사이에 기습적으로 행해진 것이 아니라고 할 수 있다. 도리어 옹나라도 한나라가 그쪽으로 올 것을 알고 준비는 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장한이 원래 거느린 군대는 항우의 신안대학살로 인해 하나도 남지 않았고 막 옹나라 왕으로 와서 8달 동안 뽑은 군사들과 장한이 진나라 장수로서 함곡관을 나올 때 남아서 진나라 각 지방을 지키던 군사들로서 실전 경험이 이미 충분히 쌓인 한나라 군대를 막을 수 없었을 것이다.
여기서 참고로 설명하자면 한중(漢中)에서 관중(关中)으로 가는 길을 알아야 한다. 일단 관중으로 나가려면 한중의 북쪽을 통해 나아가야 하는데 이 한중의 북쪽과 관중 사이에는 해발 3,000m의 거대한 진령산맥(秦嶺山脈)이 있다. 훗날 촉한(蜀漢)의 제갈량(諸葛亮)이 북벌을 할 때 항상 넘어야 했던 곳인데 진령산맥은 매우 험준한 곳으로 긴 산맥 중에서도 제대로 된 길이 거의 없었으며 최단거리로 나아가기 위해 잔도를 만들어 넘어야했다. 군대를 움직이기 위해 쓸 수 있는 길은 별로 없었으며 당시의 한중은 거의 개발되지 않아서 그나마 있는 길들 또한 제대로 개발이 되지 않은 상태였다.
일단 가장 동쪽에는 자오곡(子午谷)이 있는데, 후에 촉한(蜀漢)의 위연(魏延)이 북벌 당시 제안했던 자오곡계책의 길이 바로 이 길이다. 이 길의 북쪽 구역을 자곡(子谷), 남쪽 구역을 오곡(午谷)이라 하여 자오곡(子午谷)이라 한다. 자곡의 입구가 장안(長安) 남쪽에 있어서 당시에는 함양으로 가는 길이기도 했으며 간혹 한신이 이 자오곡을 통해 장한을 습격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이 길은 한중에서 바로 장안으로 가는 길이라 그 길이가 660리에 달하고 높은 산과 계곡들로 이루어져 거의 죽음의 길이라 불리었으며, 대규모 병력을 움직일 수 없고 결정적으로 아직 개발조차 되지 않았다.
게다가 이 시기는 진한교체기로서 장안성은 유방이 항우를 쓰러뜨리고 한나라를 세운 후에 지었으며 함양은 항우에 의해 불태워져 폐허가 되었기에 출격하더라도 거의 황량한 벌판이었다. 중간에는 당낙도(儻駱道), 즉 낙곡이 있었는데 계곡 길이가 420리로 장한이 도읍으로 둔 폐구와 가까워서 이 길로 나아가면 가장 위협적이었지만 당낙도 또한 길이 험한 데다가 자오도와 마찬가지로 완전히 개발되어 있지 않아 대군을 움직이기 힘들었다.
서쪽에는 포야도(褒斜道)가 있는데 이 포야도는 관중으로 가는 길 중 상대적으로 넓고 평탄했으며 길이가 470리로 당락곡보다 조금 더 먼 길이다. 남쪽 구역을 포곡(褒谷)이라 하였고 북쪽 구역을 사곡(斜谷)이라 하였는데 사곡(야곡)의 입구는 미현의 남쪽으로 진한교체기 당시 이 길은 관중에서 한중으로 들어가는 주요 교통로로서 유방도 이 길을 통해 한중으로 들어왔는데 유방이 군을 이끌고 들어간 것처럼 대군을 이끌기에 좋은 길이었다.
그런데 장량의 계책에 따라 포야도의 잔도를 모두 불태워서 포야도를 통해 출병하려면 반드시 잔도를 복구해야 했다. 그리고 포야도의 서쪽에 진령을 통해 북쪽으로 이동하면 진창(陳倉)에 도달하는 길이 또 하나 있는데 일찍이 관중에서 한중을 드나들 때 사용되던 주요 길이었으나 포야도가 개통되면서 점차 버려지고 잊혀졌다. 이 길이 바로 고도(故道)인데 당시에는 진창으로 가는 길이라 하여 진창고도(陳倉故道)라 불렸다.
포야도만큼 바른 길은 아니지만 군을 이동시키기에 무리가 없을 정도로 충분히 양호했으며 포야도에 의해 가려진 길이라 장한 또한 경계를 별로 하지 않았다. 그래서 B.C 206년 6월~7월 사이 한신은 병사와 백성들을 대거 동원하여 포야도의 잔도를 복구하는 작업이자 기만책을 거하게 펼치며 장한의 주의를 포야도 쪽으로 집중시켰다.
일단 포야도의 잔도 수리가 장한을 속이기 위한 수단이기는 하였으나 군을 움직이고 물자를 나르는 등 보급을 위해서는 반드시 잔도를 복구해야만 했기에 기만책이여도 착실하게 행하였고 이것이 장한을 더욱더 쉽게 속일 수 있는 요소였다. 하여 장한은 군을 사곡 쪽에 집중시켰으나 잔도 복구의 시일과 유방의 세력 안정, 복구 후에도 한군은 지쳐있을 거라 생각하여 크게 신경쓰지 않았다.
결국 그 해 8월, 한신은 충분한 시간차를 두어 장한을 안심시킨 후 몰래 진창고도(陳倉故道)를 통해 군을 이끌고 진창을 기습하였다. 진창은 교통이 발달하여 진나라 시절 최초의 현이 설치된 곳이자 군사적 요충지로 사용되어 옛날부터 성곽을 축조하고 많은 물자가 비축된 곳이었는데 한군은 이곳을 기습해 대량의 군량과 군수품을 얻었고 진창의 견고한 성곽을 함락시켜 대승을 거둔 덕분에 군사들의 사기가 크게 올랐다.
이에 장한은 한군을 막기 위해 진창(陳倉)으로 달려나왔으나 패했고 이후 지금의 섬서성 건현(乾縣)인 호치(好畤)로 물러나서 다시 싸웠으나 여기서도 또 다시 패배했다. 그리하여 장한은 결국 폐구(廢丘)로 물러났다. 이후 장한을 폐구에서 포위한 채 유방은 그 사이에 다른 장수들을 시켜 1달 사이 옹 땅을 모조리 평정했다.
그리고 폐구에 포위된 사이 사마흔과 동예의 구원을 막기 위해 이들도 패배시킨 후 항복을 받았으며 이때 자신의 주군이었던 항우는 제나라 정벌에 발이 묶여 정창을 한왕으로 삼아 유방을 견제하고자 했으나 한신(한왕 신)이 정창을 격파하여 한나라 땅을 탈취하였고 하남왕(河南王) 신양(申陽)이 항복하자 유방은 그곳에 하남군을 두었다.
장한의 동생 장평(章平)과 조분(趙賁)은 농서와 북지로 퇴각해 저항하며 항우의 지원을 기다렸으나 한군이 농서를 공략하고 이듬해 정월, 북지를 공략해서 장한의 동생 장평을 생포하고 후에 폐구성을 수공으로 수몰시키자 장한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로써 유방은 관중 지역을 모조리 평정했다.
이 과정에서 사마흔, 동예, 장한, 신양 등을 격파한 공을 모조리 한신의 공적처럼 말하는 경우도 있는데 1가지 알아둘 점은 이때의 공적은 한신뿐만 아니라 한군 전체에게 공적이 있다는 점이다. 회음후 열전에서는 이 진격 과정이 잘 나와있지 않은데 예를 들면 번쾌는 폐구 수공에서 활약했고, 주발은 함양 일대를 장악했으며, 역상은 북지군을 함락시켰다.
즉, 당시 한신의 지위가 대장군이었기에 삼진 정벌과 관중 공략을 계획하고 실행한 것은 분명 한신이지만 총지휘는 유방이 맡았고 빠른 시일 내에 여러 곳을 공략해야 하는 과정에서 직접 성이나 군을 공격하거나 함락시키는 데 여러 장수들이 나섰어야 했으며 이러한 움직임에서 작전을 성공적으로 이끈 장수들의 공 또한 크다는 것이다.
사실 잔도를 고치며 위장하는 부분도 사기 등에서는 딱히 언급이 없으며 단지 우회로를 통해 장한을 쳤다고 나와있는데 이 우회로를 제공한 사람도 한신이 아니라 수창정후 조연이라는 이야기가 있어서 암도진창 자체가 대부분 허구 아니냐는 의견도 있다.
사기에 한군의 우회공격에 대한 얘기가 아예 없는 건 아니다. 본기나 열전이 아닌 고조공신후자연표에 107위 공신으로 나오는 수창정후 조연의 공적으로 나온다. "알자로서 한왕 원년(기원전 206년) 처음 한중에서 일어났는데 옹나라 군대가 진을 막자, 황상에게 아뢨다. 황상은 돌아가고자 했는데, (조)연의 말을 좇아 다른 길을 내니, 길이 통했다. 나중에 하간수가 됐고, 진희가 반란을 일으키자, 도위 상여를 죽였다. 이 공으로 열후가 돼 1400호를 받았다."
(2) 팽성대전, 한군의 대패
이후 유방은 위왕(魏王) 표(豹), 은왕(殷王) 사마앙(司馬卬) 등을 격파하고 이들의 항복을 받아내며 순조롭게 진격을 거듭했다. 당시 항우는 북쪽에서 제나라와 싸우고 있었고 유방은 초 의제를 암살한 서초의 팽왕을 친다는 명분을 앞세워 다섯 제후를 끌어모아 무려 56만이라는 대군으로 항우의 본거지인 팽성(彭城)에 진입했다.
이때 제나라에서 싸움이 끝나지 않았던 항우는 팽성 함락 소식을 듣고 제나라에 병력을 다수 남기되 최정예 3만여 명의 병력을 이끌고 급히 달려와 한군을 그야말로 개박살냈다. 한군은 곡수(穀水)와 사수(泗水)에서 10만이 죽고 수수(睢水)에서 또 10만, 도합 30만 이상이 죽었다.
팽성대전에 대해서는 유방 때문에 한신이 공적을 세우지 못했다는 이야기가 널리 퍼져 있다. 한신이 공적을 세우는 것을 시기했거나 유방 스스로가 다 이겼다고 생각해서 한신 말을 듣지 않거나 하는 식으로 한신의 군지휘권을 가로막았고 심하게는 혈통에만 집착해 위나라 왕 위표를 총대장으로 임명했다는 인식이다. 이후에 유방이 크게 자폭한 다음 한신이 이를 겨우 수습했다는 것이다.
다만 사기나 한서 같은 정사 기록에서는 이와 같은 모습을 찾아볼 수 없다. 소설 초한지 등에서는 유방의 쪼잔함과 방심을 강조하기 위해 위와 같은 에피소드가 첨가되어 있고 소설을 읽은 사람들이 이것을 그대로 받아들인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는 유방이 박탈하고 자시고 이전에 팽성대전 당시엔 한신에게 지휘권 자체가 없었다.
한신이 총 지휘권을 가지게 된 것은 팽성전투 이후 유방이 장량에게 문의하여 얻은 답변을 기초로 영포와 팽월을 끌어들이고 그와 별개로 휘하 장수인 한신에게 일군을 주어 조와 대를 공략하도록 명령한 뒤였기 때문이다. 팽성대전에서 끌어모은 제후 연합군은 유방이 직접 통솔했기 때문에 처음부터 유방에게 전권이 있었으며 한신은 곁에서 유방을 보좌했거나 유방 휘하에서 일군을 담당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반대로 일부에서 한신을 미화하기 위해 이야기하는 것과 달리 팽성대전 당시에 한신이 팽성에 없었다 주장하기도 힘들다. 고조 본기, 항우 본기, 회음후 열전, 하후영 열전, 관영 열전, 유후 세가, 조상국 세가, 한서 고제기, 한서 한신전 등의 역사 기록을 살펴볼 경우 한신이 따로 움직여서 행동했다고 보기 힘든 탓이다.
팽성대전에서 한신은 별다른 지휘권이 없었으며 유방을 필두로 한 제후국 전부가 항우에게 영혼까지 털린 결과라고 보는 편이 적절할 것이다. 이를 두고 한신도 항우에게 털렸다거나 쪼잔한 유방이 한신을 물먹인 결과가 팽성대전의 패배라는 건 다소 어불성설인 셈. 한신은 항우와 싸운다 운운하기 이전에 유방이 있던 자리에선 따로 병권을 쥐지 못했고 항우는 팽성을 점거하고 방심한 연합군을 쳐서 단번에 격퇴한 셈이다.
결론적으로 한신은 팽성대전의 패잔병을 수습하고 있었다. 이후 형양에서 유방과 만난 한신은 초군을 격파해 그 진군을 저지했고 덕분에 유방은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여기서 한신이 패잔병을 수습한 후 유방과 만났다는 것에는 다양한 해석이 존재하지만 팽성에서 패배한 후 남은 병사들을 수습하고 서쪽으로 향하다가 유방을 만났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만일 한신이 팽성에 존재하지 않았다면 패잔병을 수습한 게 아니라 지원군을 데리고 왔다 기록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회음후 열전 등에서도 유방과 한신이 형양에서 만나 적을 격파했다고 기술하고 있으며 항우 본기나 하후영 열전 등에서도 유방이 형양에 도착한 뒤에 패잔병들을 모두 모을 수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여기에 더해 관중의 인력을 모두 끌어모아 형양으로 미친듯이 보내고 있던 소하 덕택에 유방을 포함한 한나라는 태세를 추스를 수 있었다.
이후 벌어진 경색 전투(京索之战)에서는 기병대 관영의 활약이 컸다. 여기까지 한신의 모습을 정리해보자면 분명 전략적인 식견은 있었으나 대중들에게 알려진 것처럼 독보적으로 엄청난 활약을 한 것은 아니었다. 병권은 없었지만 일단 대장군 직책을 맡고는 있었으니 팽성대전의 참패에도 명목상의 책임 정도는 물을 수 있을 테고 패잔병들을 수습해 반격하긴 했지만 수많은 공신들을 제치고 대장군에 임명된 장수의 활약이라 보기엔 부족한 모습인 게 사실이다.
(3) 위표를 박살내다
팽성에서 한군이 처참하게 박살나자, 항우의 지릴 듯한 포스에 정신이 번쩍 든 제후들은 죄다 한나라에서 초나라로 편을 갈아타기 시작했다. 새왕(塞王) 사마흔(司馬欣)과 동예(董翳)가 모두 항우에게 도망쳤으며, 제·조·위나라가 모두 유방을 배신하고 항우에 붙어먹었다. 특히, 위왕 위표(魏豹)는 부모의 병문안을 가야 한다고 구라(?)를 치고는, 유방의 곁을 떠나자마자 항우의 편으로 갈아탔다.
이때, 유방은 위표를 다시 이쪽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역이기(酈食其)를 보내 설득을 해봤지만, 통하지 않았다. 그러자 유방은 무력 행사로 나가기로 하고, 한신을 좌승상으로 임명해서 위표를 치게 했다.
당시 역이기는 위표를 회유하는 데 실패했지만 위나라를 쳐야 할 것을 알고 있었기에 위군의 정보를 수집하여 돌아왔는데 유방이 역이기에게 물었다. "적의 대장이 누구이던가?" 그러자 역이기가 대답했다. "백직(栢直)이라는 인물이옵니다." 그 말을 들은 유방은 크게 기뻐하고 웃으며 "그놈은 젖비린내나는 더벅머리일 뿐이다. 그놈이 어찌 한신을 당해낸단 말이냐?"라고 말하며 좋아했다. 여기서 구상유취(口尙乳臭)가 유래했다.
그리고 위표를 치기 위해 군을 이끌고 가던 한신 또한 위나라에 대한 정보를 알기 위해 역이기를 만났는데, 한신은 주숙(周叔)이라는 자를 경계하고 있어서 역이기에게 혹시 위표가 주숙을 대장으로 삼지 않았냐고 재차 물었다. 역이기가 위표가 백직을 대장으로 삼았다고 재차 답해주자, 한신은 "어린 놈일 뿐이군!"이라고 말하며 좋아했다. 참고로 위표와 백직 중 누구를 어린 놈이라 표현한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이때, 위표는 포판(蒲坂)이라는 곳에 군대를 주둔시켜 놓고, 임진(臨晉)쪽으로 한신이 강을 건너 올 것을 대비하고 있었다. 그 사실을 알아챈 한신은 일부러 군을 나누어 임진 쪽에 위표의 부대를 붙잡아 둘 일부 군을 두고 대군으로 보이게 끔 하여 도강하려는 듯한 움직임을 보여주는 기만술로 속이는 한편, 그 사이에 한신 자신과 실질적인 주력은 포판보다 더 북쪽의 하양(夏陽)으로 이동시켜 목앵부(항아리를 나무에 엮어 만든 뗏목)을 타고 강을 건너서 위나라의 수도 안읍(安邑)을 공격했다.
한편 대치중이던 위표는 갑작스런 한군의 공격에 수도가 함락당했다는 소식에 경악해서 빠르게 군대를 돌려 안읍으로 돌아가지만, 임진 쪽에서 적의 주의를 끌던 한나라군은 당연히 순식간에 도하하여 위나라군의 뒤를 쳤고, 안읍으로 갔던 병력 역시 위표를 공격했다. 앞뒤에서 공격받는 협공상황이 벌어지자 위나라군은 단박에 무너지고 총사령관 위표는 사로잡혔다. 단 한 번의 싸움으로 나라 하나를 멸망시키고, 적 군주를 사로잡은 것이다. 이 안읍 전투에서 위나라를 평정한 한신은 그곳에 하동군을 설치했다.
4. 한신, 북벌을 시작하다
하동을 평정한 한신은 유방에게 사람을 보내, 자신의 의견을 전했다. "원컨대 3만 병사를 더해주시면, 신이 북으로 연(燕)‧조를 잡고, 동으로 제를 치고, 남으로는 초의 보급로를 끊은 후, 서쪽에서 대왕과 형양에서 만나기를 청합니다." 그리고 장량 역시 이를 권하자, 유방은 장이(張耳)를 감군으로 삼아 병사 3만과 함께 보내주었다. 한신은 3만의 군대를 이끌고, 유방과는 별개로 장이, 조참을 옆에 둔 채 독자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1) 정형 전투(井陘戰鬪)
한신이 위표를 격파했을 때가 8월이었다. 그런데 9월 무렵, 한신은 대(代)를 평정하고 있었다. 본래 대나라는 진여(陳餘)의 땅이었으나 진여가 조나라에서 조왕을 보필하고 있었기에 대나라는 그의 측근이었던 재상 하열(夏說)이 지키고 있었다. 한신의 군대가 몰려오자 하열이 한군을 막아보려 안간힘을 써봤지만, 연여(閼與)에서 대패하고 한신에게 사로잡혔다. 다른 사서인 조상국세가에서는 하열이 전사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대나라 정벌의 과정은 자세히 기록되어 있지 않아 어떻게 전투가 이루어졌는지 등에 대해서는 알 수 없으나 뒤에 광무군 이좌거(李左車)가 계책을 내놓을 때 '한신이 연여(閼與) 땅을 피로 물들였다 합니다'라고 말하는 점으로 미루어보아 한군의 일방적인 공세에 대나라의 군대가 처참히 깨진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이 무렵, 유방 쪽은 항우가 성고와 형양 지대를 계속해서 쳐들어왔고 간신히 팽월과의 연계로 번번이 위기를 빠져나가고는 있었지만 손해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이에 유방은 한신의 부대에서 정예병들을 차출하여 형양으로 데려가 초군을 막도록 했다. 하여 한신의 부대는 규모가 줄어들었을 뿐만 아니라 정예병이 모두 빠지고 신병들과 위나라, 대나라에서 군사를 개편한 오합지졸의 군대가 되었다.
게다가 조나라 정벌을 위해 조참에게 따로 군사를 맡겨 오성(鄔城)에 주둔한 조나라의 별장 척장군(戚將軍)을 공격케 했는데, 이후 조참의 군대는 유방의 군대에 합류했다. 또한, 대나라에서의 교전에서도 사상자가 있었을 것이며 대나라 땅에도 군을 주둔시켜야 했기 때문에 한신의 군세는 3만은커녕 실질적으로는 1~2만 내외의 오합지졸 군대였을 것이다.
하지만 한신과 장이 등은 이러한 상황에 아랑곳하지 않고 동쪽 정형(井陘)으로 나아가 조나라를 격파하려고 했다. 이에 조왕 헐(歇)과 성안군(成安君) 진여(陳餘)등은 호왈 20만에 달하는 군대를 이끌고 한신을 막으려고 했다.
이때, 조나라의 광무군(廣武君) 이좌거(李左車)는 조왕과 진여(陳餘)에게 자신의 계책을 말했다. "듣자하니, 한의 장수 한신이 서하(西河)를 건너, 위왕을 사로잡고 하열을 붙잡았으며, 연여(閼與) 땅을 피로 물들였다 합니다. 오늘 다시 장이(張耳)의 보좌를 받은 한신은 조나라를 함락시키려는 계책을 의논하고 있다니, 승세를 타고 나라를 떠나 멀리서 싸우는 그들의 예봉(銳鋒)을 당해낼 수가 없습니다. 신이 듣건대, '천 리 밖에서 군량을 운송하여 먹는 군사들은 그 얼굴에 주린 기색을 띄우고, 또한 장작을 패고 풀을 베어 불을 지펴야만 밥을 해 먹을 수 있는 군사들은 항상 굶주려 있다'고 합니다. 지금 정형의 길은 수레가 굴러 다닐 수 없고, 기병이 대열을 이룰 수 없습니다. 수백 리를 행군하였으니, 그 군대의 군량은 반드시 뒤에 있을 것입니다. 원컨대 족하(足下)께서는 신에게 뛰어난 병사(奇兵) 3만을 빌려주시면, 샛길을 따라 그 수송대를 끊겠습니다. 족하께서는 도랑을 깊이 파고 성채를 높게 쌓고 적과 더불어 싸우지 마십시오. 적은 앞에서는 싸울 수 없고, 퇴각해서는 돌아갈 수 없으니, 신이 병사로 그 배후를 끊고, 들판에서 약탈할 만한 식량을 치워버리면, 열흘도 지나지 않아 두 장군인 한신과 장이의 머리를 휘하에 바칠 수 있습니다. 원컨대 군(君)께서는 신의 계책에 유의해 주십시오. 이렇게 하지 않는다면 반드시 적의 두 장군에게 사로잡힐 것입니다."
즉, 방어 태세로 일관하면서, 따로 별동대를 뽑아 적의 길어진 보급로를 차단해서 박살을 내버리자는 것이었지만, 진여는 싸움은 항상 정정당당하게 해야 하는 것이라는 근육뇌스러운 생각을 가지고 있었고, '병력의 양이 많아 그냥 싸워도 우리가 이길 텐데 비겁하게 그런 방법까지 써야겠나?'라는 이유로 그 제안을 거절했다. 이것만 보면 인의도덕만을 내세우다 송양지인(宋襄之仁)의 주인공이 되어 웃음거리로 전락한 송양공(宋襄公)처럼 보일 수가 있는데, 전력에 자신이 있으면 단기간에 정면승부로 끝내는 것이 병법상 옳다. 그리고 자신감을 가질 근거도 충분히 있었다.
진여는 이좌거의 계책에 반대하며 이렇게 이야기하였다. "내가 들으니 병법에 '아군이 적군의 열 배가 되면 포위하고, 두 배가 되면 싸우라'고 했소. 지금 한신의 병력이 수만이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수천에 지나지 않소. 게다가 천리 먼 곳에 와서 우리를 치는 것이니, 역시 벌써 아주 지쳤을 것이오. 지금 이런 적을 피하고 치지 않는다면 나중에 대군이 쳐들어올 때에는 어떻게 싸우겠소? 그렇게 되면 제후들이 우리를 비겁하게 여기고 함부로 쳐들어올 것이오."
조나라의 군대가 실제 20만이 되지는 않더라도 분명 한군의 몇 배에 달하기에 질질 끌지 말고 단숨에 제압해야 주변 국가들에게도 만만하게 보이지 않으며, 거의 모든 면에서 우위를 점하고 있으니 공격만 해도 절대 질 리가 없다는 생각이었다. 게다가 진여의 영지인 대나라가 한신에게 털린 상황이니 오합지졸에 불과해보이는 한나라 군대를 최대한 빨리 섬멸하고 실지를 회복해야 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진여의 입지가 아무리 확고하다고 하더라도 결국은 조왕의 신하에 불과하니, 압도적인 병력 우세를 앞세워 단기결전 후 실지 회복을 노리는 게 사실 정상이다. 그리고 조왕 또한 이러한 진여의 생각을 받아들여, 진여를 대장으로 삼아 한군을 상대하도록 하였다. 당시 양측 군대를 비교했을 때 조나라 군대가 수도 몇 배는 더 많았고 훈련도 더 잘 되어 있었으며, 자기네 영토에서 싸우기 때문에 지리적 이점과 보급 면에서도 우위를 점하고 있었다. 따라서 진여의 계책은 지극히 상식적이고 정석적이었다.
문제는 상대가 한신이었다. 한신은 첩자를 보내 염탐하였는데, 첩자로부터 이좌거의 계책이 쓰여지지 않았다는 말을 듣자 대단히 기뻐하였다. 이좌거의 계책은 멀리 원정군을 이끌고 온 한신으로서는 가장 상대하기 힘든 대처법이었기 때문이다. 여튼 이 소식을 접한 후 한신은 지체없이 곧바로 군대를 이끌고 나섰는데, 당시 조나라군은 정형구(井陘口)의 누벽에 군을 주둔시키고 있었으며, 이에 한신은 정형의 약 30리 앞에서 야영을 했다.
그리고 새벽이 되자 몸을 가볍게 한 경기병 2천을 따로 선별하여 그들 모두에게 한군의 깃발인 적기를 나눠주며, 정형 앞 샛길을 통해 몰래 병사들을 산으로 보낸 후 조나라 군대가 있는 누벽을 보게 하며 이렇게 말하였다. "조나라 군대는 우리가 달아나는 것을 보면 반드시 누벽(壘壁)을 비워놓고 우리를 쫓아올 것이다. 너희들은 그 사이에 빨리 조나라 누벽으로 들어가서 조나라 깃발을 뽑아버리고 한나라의 붉은 깃발을 세워라."
게다가 이후 어떤 일련의 움직임을 보여 주었는데... 그 당시로서는 모두가 경악할 만한, 그 누구도 이해할 수 없는 이 전투의 핵심과 같은 명령을 내렸다. 당시 정형의 조군 앞에는 면만(綿曼)이라 불리는 강이 있는데, 이를 면만수(綿曼水)라 불렀다. 그리고 이곳에서 한신은 가뜩이나 병력도 없는 상황에서 오합지졸의 군사들 중 1만 정예군을 따로 조직하여 이 면만수를 건너게 한 뒤, 강을 뒤에 두고 진영을 치게 했다.
오래전부터 손무(孫武), 오기(吳起), 사마양저(司馬穰苴) 등 병법가들을 비롯한 많은 명장들이 경고했고 심지어 일반 병졸들도 알고 있으며 절대 해서는 안 될 금기인 등에 강을 지고 진을 치는 배수진(背水陣)을 펼친 것이다. 그러고서는 한술 더 떠 오합지졸의 1만 정예병들을 제외한 나머지 군사들과 노약자들로 부대를 구성하였다. 배수진만으로도 이미 요단강을 눈 앞에 둔 것과 같은데 적이 바로 눈 앞에 보이는 곳에서 병력을 분산시키는 아주 대담하면서도 위험천만한 행동을 한 것이다. 만약 이때 진여가 군사를 보냈으면 패할 것이 분명했다.
그래서 주위 사람들이 그것을 알고 우려하였으나 한신은 한 군리(軍吏)에게 이렇게 얘기하며 조나라군이 먼저 나올 일은 없을 거라 단언했다. "조나라 군대는 우리보다 먼저 유리한 지점을 골라 누벽을 쌓았다. 또 저들은 우리의 대장기와 북을 보기 전에는 우리의 선봉을 공격하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좁고 험한 곳에 부딪쳐 돌아가 버릴까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즉, 진여는 한군을 이곳에서 전멸시켜 한 번에 끝내고자 하니, 한군이 병력을 나누더라도 도망칠 것을 우려하여 공격하지 않을 것이라는 뜻이며, 그 말은 그대로 적중하였다.
한군의 배수진을 보고 진여는 물론 일반병사들까지 웃었으며, 진여는 "역시 한신 저 놈은 병법을 모르는 게 확실하다"라고 여겨 한군이 가까이 공격해 오면 전군을 보내 일거에 소탕하려고 했다.
그리고 한신은 날이 밝자 모든 군사들에게 음식을 나누어 주며 이렇게 말하였다. "오늘 조나라 군대를 격파한 뒤에 모여서 잔치를 하자!" 실로 패기 넘치는 발언이었고, 당연히 이 말을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심각한 병력차와 물자 부족 및 보급 문제, 그리고 도무지 자신들의 머리로는 이해할 수 없는 작전으로 이길 거라고는 절대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병사들은 물론 장수들도 건성으로 "네, 네" 하고 대답했다.
그리하여 한신은 앞서 진영에 남겨둔 병력을 제외한 군사들로 구성된 부대를 이끌고 장이와 함께 몸소 직접 조나라 군대에게 북을 울리며 도전하였다. 물론 조나라 군사들은 모두 비웃기만 했으며 당연히 이 도전을 받아들여 출격하였다. 그러나 비록 한군도 두려워하며 출정할 때는 건성으로 대답하곤 했으나, 이미 배수진을 치고 진격하니 그들 또한 인간이기에 살고는 싶었으나 도망갈 곳이 없음을 알고서는 퇴로가 막힌 병사들은 오로지 살기 위해 목숨 걸고 싸웠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한신이 노렸던 점이었다. 살기 위해 미친듯이 싸우는 군사들의 패기(霸氣)와 살기(殺氣)란 실제로 엄청났다.
그래서 수적으로도 매우 우세한 조나라 군대였지만 이러한 한군의 저항에 놀라 쉽게 한군을 밀어내지 못한 채 전투가 지속되자 전의면으로 보면 압도적인 차이가 나다보니 그 사기가 크게 꺾였다. 허나 전력차가 워낙 컸으며 진짜 목적은 따로 있었기에 한군은 이내 감당하지 못하고 병사들이 도망치기 시작했다.
실제로 이것이 연기가 아님을 숨기기 위해 적은 병력으로 오랫동안 싸웠으며, 도망칠 때도 리얼함을 보여주기 위해 대장기까지 버리고 강가에 쳐둔 진까지 도망쳤다. 비록 초반의 완강한 저항에 눌리긴 했으나, 오히려 이러한 저항과 도망치는 리얼함에 속아 넘어간 진여는 요새에 있는 군대까지 모두 출격시켜 도망치는 한군을 추격해 섬멸하려 하였다.
한신, 장이를 비롯한 한군이 도망쳐 강가에 있던 진영에 이르자 진을 지키던 군사들이 문을 열어 그들을 맞이하였고, 진여가 정형에 있던 조나라의 모든 병마를 이끌고 누벽을 비운 채 나오자, 한신은 강가에 진을 쳐둔 1만의 정예병과 합세하여 20만 대군에 맞섰다.
그리고 이제 진짜 도망갈 곳조차 없음을 알게 된 한군은 강을 등지고 필사적으로 싸웠는데, 질적으로는 밀리지만 목적 의식 자체가 다른 한군은 살고자 하는 일념하에 그야말로 살기 드러내며 미친개처럼 싸웠고 조나라 군대는 한군을 물리칠 수가 없었다. 조나라는 그래도 상황은 자신들에게 유리하니 일단은 철수하여 진영에서 재정비를 하기 위해 돌아가려고 하였다.
그런데 조나라 군대의 배후로부터 엄청난 고함소리와 함께 진영에는 이미 한군의 적색 깃발이 도배되어 휘날리고 있었다. 이게 어찌된 일인가 하면, 새벽녘 양쪽 산에 숨겨둔 2천의 경기병들이 줄곧 매복해 있다가 조나라 군대가 한신의 말대로 정말 누벽을 극소수의 군사만 두고 비운 채 전군이 공격을 나가자 한신이 진영에 합세하여 배수진에서 미친 듯이 버티고 있을 때 그 틈을 타 빈집에 가까운 적의 누벽을 급습한 것이었다.
이렇게 한신의 예상대로 모든 계책이 성공했고, 조나라 군사들은 조금 전까지만 해도 멀쩡히 있던 누벽이 한군에게 점령된 것을 보자 아연실색했다. 허와 실을 모르는 조군은 한군이 이미 누벽을 점령해 돌아갈 곳도 없는데 누벽에 휘날리는 많은 수의 깃발을 보자 얼마나 많은 수의 한군이 후방에 있는지 전혀 짐작할 수가 없었기에 포위된 채 뒤에서 한의 대군이 공격해올 것이라 생각하여 그 공포감이 엄청난 속도로 퍼져나갔고 순식간에 혼란에 빠져 와해되어 모두 뿔뿔이 흩어져 도망쳤다.
이러한 광경을 본 진여가 병사 몇 명의 목을 베어 막으려 했지만, 이미 패닉에 빠진 조군을 통제할 방법이 없었고, 상황이 이렇게 되자 조왕과 진여도 급히 도주하였다. 이렇게 조군 전체가 혼란에 빠져 도망치자 전세는 순식간에 역전되어 한신은 조군을 추격하였고 뒤에 누벽을 점령한 병사들도 함께 공격하기 시작, 앞뒤로 협공을 당하자 조군은 이제 퇴각하여 도망치기 바빴으며 오히려 조군이 강 속으로 뛰어드는 광경이 펼쳐졌다.
그리고 이곳 정형 전투에서 대승을 거둔 후 한신과 한군은 계속해서 조군을 추격하여 지수(泜水) 부근에서 진여(陳餘)의 목을 베었고, 조왕 헐(歇)을 사로잡는 데 성공했다. 그렇게 한신은 반나절 만에 조나라의 20만 대군을 물리치고, 단 한 번의 싸움으로 하루아침에 조나라를 멸망시켰다.
전투가 끝난 후 정말 한신이 이야기했던 것처럼 조나라 진영에서 잔치를 벌였는데, 여러 장수들이 전투 전에는 전혀 이해하지 못한 한신의 용병술에 탄복하면서 절대 이기지 못할 것이라 여기며 한신의 전술을 믿지 못한 자신들에 대해 부끄러워하며 의문어린 표정과 어조로 한신에게 물었다. "병법에는 '산릉(山陵)을 오른편으로 해 등지고, 수택(水澤)을 앞으로 해 왼편으로 한다'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장군께서는 저희들에게 도리어 물을 등지는 배수진(背水陣)을 치라고 명령하시고, 조나라를 깬 뒤에 잔치하자고 하셨습니다. 저희들은 마음속으로 승복하지 않았으나, 허나 결국은 이겼습니다. 이것이 대체 무슨 전술입니까?"
그러자 한신은 여제껏 장수들이 의문을 품어왔던 전술에 대한 질문에 웃으며 명쾌히 답했다. "이것도 병법에 있는 것이다. 다만 그대들이 살펴보지 않았을 뿐이다. 병법에 이런 말이 있지 않던가? '사지에 빠뜨린 뒤에야 살 수 있고, 망지에 놓은 다음에야 보존할 수 있다.' 또한 내가 평소부터 훈련받은 사대부들을 따르게 하는 것이 아니라, 아무런 훈련도 받지 않았던 시장 바닥의 사람들을 몰아다가 싸우게 한 것과 같은 이치이다. 그들을 죽을 땅에 두어서 사람마다 자신을 위해 싸우도록 만들지 않고, 이제 그들에게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을 준다면 모두 달아날 것인데, 어찌 그들을 쓸 수 있겠는가?"
한신이 이것 또한 병법에 있는 것이라 하였지만, 배수진(背水陣)은 정말 절박한 상황이 아니면 위험성 때문에 줄곧 금기처럼 여기던 전술인데 한신이라 하여 어찌 이것을 몰랐겠는가? 허나 한신의 말처럼 그가 이끌던 병사들은 어딘가의 정예병이 아닌 시장 바닥에서 놀던 사람들을 급히 모아 만든 오합지졸의 부대였다.
위나라와 대나라에서 모병된 군사들도 많았기에 한군에 대한 애착이 없어 살 길이 생기면 도망치기 바빴을 것이며 기존 한나라의 군사들 또한 신병이기에 조금만 패색이 보여도 도망쳤을 것이다. 그렇기에 한신 또한 어쩔 수 없이 고민 끝에 병법을 응용하여 군사들을 사지로 내몰아 그 능력을 극대화시켜 죽기살기로 싸우게 하였고, 한편으론 상대의 생각을 읽어 과감한 행동으로 진여와 조나라군을 방심하게 만들고 자만하게 하여 계획을 손쉽게 이끌고 갈 수 있었다.
한신은 이러한 한군의 상황과 진여의 심리를 자세히 관찰하고 따져 계책에 계책을 더한 용병술을 썼으며, 배수진(背水陣)이라는 금기이자 위험한 상황을 오히려 대전략으로 승화시켜 지금까지도 계속 쓰이는 금기가 아닌 전략적 배수진(背水陣)의 정의를 만들었다.
이 조나라와의 정형 전투는 전략, 전술적 관점에서도 중요하지만 초한전쟁에서도 굉장히 중요한 사건이다. 이 전투의 승리로 한신의 이름이 온 천하에 알려져 명성과 위세를 떨쳤으며, 동시에 한신이 북방에서 자리를 잡아 세력을 키우게 되는 발판이 되었다. 반면 항우는 전선이 늘어져 북쪽에 적을 두게 된 탓에 군을 나눠야만 했다.
또한 후대에 한신의 이 배수진을 얼치기로 따라하려다가 강가를 피로 물들이는 일도 여러 번 있었다. 좋은 예로 읍참마속의 그 마속이 있으며, 임진왜란 당시 신립의 탄금대 전투를 이 얼치기 양산형 배수진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이런 얼치기 배수진과 한신의 배수진을 비교해보자면, 한신의 군사들은 애초부터 상식적이고 규칙적인 전술을 운용할 수 없는 잡배들이었기에 한신으로서는 뭔가 변칙수(배수진으로 모든 사람들의 원초적 욕망인 생존의지를 자극함)를 띄울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고, 거기에 이러한 잡졸들의 의지만으로는 전술적 승리를 불러올 수 없다는 것을 알았기에 2000의 경기병을 활용하여 적의 사기와 진형에 거대한 충격을 가한 것이다.
일단 성이 점령당했다는 것에 놀라고, 양쪽에서 포위당했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 진형이 형편없이 무너지지 않을 수가 없다. 즉, 적은 군사와 보잘것없는 병력을 최대한 알뜰하고 살뜰하게 활용한 결과물이었기에 그 승리가 찬란하게 빛나는 것이지, 아무 때나 쓴다고 이길 수 있는 전술은 아니다. 쉽게 생각해도, 적군이라고 살고 싶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리고 적이 보다 신중하여 위에서 언급된 이좌거의 계책대로 성문을 걸어잠그고 한신이 피폐해지기를 기다렸더라면 이러한 전술은 아무런 의미도 없었을 것이다. 성공한 전략에는 운도 따라준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이는 단순히 운이 아니라 적장 진여의 심리를 잘 꿰뚫어봤던 것이다.
진여는 나름 뛰어난 인물이었지만 헛된 명성에 휘둘리는 면도 있어서 만약 한신이 공격해오면 기다리기보다는 맞서 싸울 거라고 생각했고 이게 적중했다. 또한, 아무리 한신의 계획대로 진여가 움직인다 한들 군대가 배수진이라는 말도 안되는 진형을 유지하고 싸울 수 있는 배경에는 진여를 잘 아는 장이가 진영에 있으면서 한신의 결정을 지지했기에 가능했을 수 있다.
무턱대고 적장은 물론이고 병사들조차 비웃는 위치에 진을 피고 싸우면서 별동대가 적 거점을 점령한다는 작전은 당장 오합지졸인 배수진 위치의 병사들의 반란으로 자멸할 수도 있지만 상술한 대로 적장을 잘 아는 장이가 이 작전을 지지한다면 병사들의 불안감이 일부 해소되어 작전대로 싸울 수 있었을 것이다.
(2) 연나라를 항복시키다
한편 한신은 정형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후, 군중에 광무군을 죽이지 말라고 엄명을 내리고, 그를 사로잡아 오는 자에게는 천금(千金)을 내리겠다 하였다. 그러자 누군가가 광무군을 포박해 데리고 왔는데 한신이 직접 광무군의 포박을 풀어주며 동쪽을 향해 앉게 하고 자신은 서쪽을 향한 채 광무군을 스승으로 삼고자 하였다.
그리고 자신이 연나라와 제나라를 공격할 의도가 있음을 설명하고 광무군에게 "내가 북쪽으로 연나라를 치고 동쪽으로 제나라를 치려는데,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라고 물었다.
허나 광무군은 이를 사양하며 말했다. "신이 들으니 '패배한 군대의 장수는 무용(武勇)에 대해서 말할 수 없고, 망한 나라의 대부(大夫)는 나라를 존속하는 일을 도모할 수 없다'라고 합니다. 그리고 지금 신은 패망한 나라의 포로인데 어찌 큰 일을 꾀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자 한신이 광무군을 설득하고자 말했다. "내가 들으니 백리해(百里奚)가 우(虞)나라에 있었지만 우나라는 망했고, 그가 진(秦)나라에 있을 때에는 진나라가 패자(覇者)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것은 백리해가 우나라에 있을 때에는 어리석다가 진나라에 있을 때에는 현명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 임금이 그를 등용했는지 안 했는지, 그의 계책을 들었는지 듣지 않았는지에 달려 있을 뿐입니다. 만약 성안군이 그대의 계책을 들었다면 나와 같은 자는 벌써 포로가 되었을 것입니다. 허나 그대를 쓰지 않았기 때문에 내가 그대를 모실 수 있게 되었을 뿐입니다."
그래도 광무군이 주저하자 한신이 강한 태도로 말했다. "내가 진심으로 그대의 계책에 따르겠으니 더 이상 사양하지 마십시오."
이렇게 한신이 진심으로 부탁하자 광무군이 말했다. "신이 들으니 '슬기로운 사람도 천 번 생각하다 한 번의 실수가 있을 수 있고, 어리석은 사람도 천 번 생각하면 한 번은 맞을 수 있다'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미치광이의 말도 성인(聖人)은 가려서 듣는다'라고 했습니다. 신의 계책이 반드시 채용될 만한 것은 못 되지만 그래도 충심껏 아뢰겠습니다."
그리고 이좌거는 굳이 싸울 필요는 없다며 한신에게 계책을 올렸다. "원래 저 성안군 진여는 백전백승(百戰百勝)할 수 있는 입장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루아침에 단 한 번의 실수로 그의 군사는 호성(鄗城)에서 패하고 그의 몸은 저수(泜水) 강안에서 죽었습니다. 오늘 장군께서는 서하에서 하수를 건너 위왕 표(豹)를 사로잡고, 북쪽으로 진격하여 연여(閼與)를 피로 물들이며 대(代)나라의 상국 하열(夏說)을 포로로 삼았습니다. 계속 진격하여 일거에 정형(井陘)의 관문을 떨어뜨리고 오전도 미처 다 가기 전에 조나라의 20만 대군을 격파하고 그 대장 성안군 진여를 죽였습니다. 장군의 이름은 해내에 멀리 퍼지고, 그 위세는 천하를 진동시켰습니다. 이에 병화가 머지않아 자기 몸에 이르리라고 생각한 농부들은 농기구를 손에 놓아 밭 갈기를 멈추고 좋은 옷을 입고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언제나 동원령이 내릴지를 알기 위해 귀를 기울이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정세는 장군에게는 매우 이로운 일입니다. 그러나 지금 백성들은 과로에 시달리고 군사들은 피로에 지쳐있어 사실은 전투에 동원하기가 어렵습니다. 오늘 장군께서 피로에 지친 군사들을 다시 일으켜 연나라로 진격하여 그 견고한 도성 밑에 진을 치고 비록 싸우려고 하신다 할지라도 장시간의 공격에도 그 성을 함락시키지 못하기라도 한다면, 오히려 한군의 피폐한 실상만 드러나고, 군대의 기세는 꺾이어 결국은 시일만 오래 끌게 되어 군량미만 다하게 될 것입니다. 약한 연나라를 굴복시키지 못한다면 제나라는 필시 국경의 경비를 강화하여 전력을 다해 한군에 대항할 것입니다. 그렇게 된다면 연(燕)과 제(齊)는 기각지세(掎角之勢)를 이루며 서로 양쪽에서 버티며 결코 항복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로써 한(漢)과 초(楚)의 싸움은 승부가 분명하게 되지 않고 전선은 교착상태에 빠지게 되면 천하의 정세는 장군에게 불리하게 변하게 됩니다. 소인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연제(燕齊) 두 나라를 공격하려는 장군의 계획은 옳지 않은 것 같습니다. 자고로 용병에 능한 자는 자기의 단점으로 상대방의 장점을 공격하지 않으며, 자기의 장점으로 상대방의 단점을 공격합니다."
즉, 사실 이미 한신의 군대는 한계에 봉착했고, 연나라와의 싸움에서 고전하게 된다면 그 어려운 실상을 드러내게 되는 꼴이니 그렇게 되면 결국 연나라도, 제나라도 항복하지 않을 것이란 이야기다. 그러나 한편으론 정형 전투의 승리와 조나라 평정으로 인해 지금 한신의 명성이 절정에 오르고, 모두가 한신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이에 이좌거는 굳이 싸울 필요 없이, 적당한 사람을 보내서 항복을 권유하면 저쪽에서 항복할 것이라고 말해주었다. 그리고 한신은 이좌거의 계책이 옳다고 여겨 그 계책에 따라 연나라에 사람을 보냈고, 연나라의 왕 장도(臧荼)와 신하들은 바람에 쓰러지는 풀잎처럼 모두 한나라에 항복했다.
(3) 잠자다가 군사를 빼앗기다
한신과 장이는 진군을 멈추는 대신 하수를 통해서 넘어와 조나라 땅을 넘보는 초나라 군을 쫓아내고, 그 대가라는 구실로 사람들을 징발해 유방에게 보내었지만 시간이 갈수록 유방 쪽은 한신과 달리 상당히 위급한 지경에 처하게 된다. 형양에서 1년 넘게 항우의 공격을 근근이 막아내고 있었지만 이제 한계에 가까워진 것이다. 급한대로 진평(陳平)의 계략을 이용하여 범증(范曾)을 쫓아내는 데는 성공했지만, 눈앞에 있는 항우의 군대는 어쩔 수가 없었다. 결국 기신(紀信)이 유방으로 분장하여 초나라 군대의 시선을 끌고, 본인은 관중으로 몸을 피했다.
소하와 영포가 긁어온 군사를 얻어 잠깐동안 완성으로 항우를 유인해 버티던 유방은 팽월의 유격전으로 항우가 일시적으로 회군하자 성고(成皐)로 진입했지만, 병사가 모자라 형양의 포위까진 뚫지 못하고 그 사이에 팽월을 어느 정도 처리한 항우가 돌아와 형양의 주가를 쳐부수고 성고에 있는 유방에게 맹공을 퍼부어 6월 즈음에 이르러 형양-성고 라인은 붕괴 일보 직전에 몰렸다.
그런데, 정작 한나라가 이렇게 멸망까지 몰리는 와중에는 한신이 원군을 보내주었다는 언급이 나오지 않으며, 항우가 없어진 틈에 성고에 입성한 유방과 호응한 적 또한 없었다. 이렇게 되자 유방은 한신이 찝찝해진 듯 일단 포기하기로 한 성고에 잠깐 더 병력을 남겨둔 채 하후영만 데리고 몰래 빠져나와 한신의 군영으로 향했다.
그리고 한신이 있는 소수무에 도착하고도 일부러 하루를 머물러서 새벽에 일어나서는 처음에 한나라의 사자라고 자신의 이름을 대고 성벽으로 들어가, 한신의 침소로 침입해 장군의 인수(印綏)와 부절(符節)을 손아귀에 넣고 순식간에 인사 배치를 끝내 그 병력을 완전히 자신의 통제 하에 놓았다. 이때 한신은 잠자고 있었다.
유방이 눈 깜짝할 사이에 군대의 지휘권을 장악하는 동안, 한신은 장이와 함께 꿈나라 여행을 떠나고 있던 중이었다. 자고 일어나 보니 느닷없이 유방이 있자 한신과 장이는 경악했다. 유방은 장이에겐 줄어든 군사를 조나라에서 보충하라는 명목으로 한신의 곁에서 떼어놓았고, 한신은 한나라 좌승상에서 조의 상국으로 사실상 강등시키고 조참, 관영, 주설, 부관을 한신에게 협조하라는 명목으로 북방 전선으로 이동시켰다. 그리고 한신에겐 즉시 제나라를 공격하도록 명령을 내렸다.
많은 역사에서는 지방에 파견된 군대에서는 지휘권을 가진 장수가 최고의 권력을 휘두르기 때문에, 마땅한 호위 부대 하나 딸려 있지 않은 군주가 찾아오면 장수에게 이래저래 휘둘리고 구석에 찌그러져 있는 경우가 많다. 심지어 나쁜 뜻을 품은 장수라면 군주가 비명횡사하는 경우마저 적지 않은데, 그런 시나리오를 무시하고 유방은 순식간에 지휘권을 손에 넣어 군권을 장악했다. 잠자고 있던 한신은 저항 한 번 해보지 못하고 순식간에 털렸다.
한신과 유방의 악연은 이때부터 시작된 셈인데, 이후로도 한신은 잠자다가 창졸간에 군대를 빼앗긴 이때처럼, 유방에겐 이상할 정도로 약한 모습을 자주 보여주고 만다. 또한 멋대로 군대를 강탈해 간 유방이 치사하게도 보이지만, 달리 보면 주군이 지휘하는 본진 쪽이 무너지기 직전인데도 먼저 원군을 보낼 생각은 않고 잠이나 잘 만큼 한신과 유방 사이의 연결이 약해져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일화이기도 하다.
웃기는 점은, 이때 한신의 옆에 있었던 건 다름 아닌 자기가 죽을 상황인데 원군을 안 보내줬다고 절친 진여와 원수가 된 장이였다는 것이다. 다만 유방 입장에서는 좀 조심하긴 했지만 딱히 크게 생각하고 한 짓은 아닐 수도 있다. 한신을 꺼려서 한신의 군사를 뺏어갔다기보다는 그냥 제일 가까운 곳에 있는 게 한신이라서 급한 김에 들러서 한참 항우에게 당하고 있을 성고와 형양을 지원할 군사들을 데려간 것이라는 말이다.
물론 한신을 만나기 전에 이미 군권을 회수, 확보하긴 했지만 원래 한신과 장이는 유방과 처음부터 함께 거병한 인물들은 아니므로 주의하는 건 오히려 당연한 것이고 이것만으로 한신을 핀포인트로 찝어서 노렸다고 할 수만은 없다. 굳이 말하자면 한신 정도면 내가 좀 급한데 군대 좀 떼어가도 알아서 잘하겠지 정도?
게다가 이때는 이미 목표였던 조와 대를 평정한 터라 군대를 좀 떼가도 괜찮을 거라고 생각해도 무리도 아니고, 한신이 워낙 혁혁한 공을 세운 터라 연과 제는 천천히 압박해도 충분했다. 당장 연은 한신의 존재만으로도 냉큼 항복해 버렸고 한신이 이후 다시 출진하게 된 것은 역이기가 제나라를 설득하러 갔기 때문이었다. 또, 이미 조와 대를 얻고 기존의 위나라도 함락했던 만큼 여기서 징병하는 것도 가능했다.
그러나 유방은 이러한 기습 인사를 그다지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을지 몰라도, 한신은 그렇게 여기지 않았다는 게 문제였다. 사실 역이기가 죽은 비극은 별 일 아닐 거라며 군대를 빼간 유방의 조치로 말미암은 한신의 불신에서부터 비롯된 것이었다.
(4) 역이기의 죽음
유방의 명령대로, 한신은 조참, 부관, 주설 등과 함께 군대를 이끌고 제나라의 평원(平原)으로 이동했다. 이때, 아직 한신이 도착하기 이전, 역이기가 먼저 유방에게 청하여 제나라를 항복시키기 위해 떠났다.
처음에 역이기를 경계하며 이전 초나라에 거역했다가 당한 험한 꼴때문에 좋은 분위기는 아니었으나 이내 역이기의 화려한 언변과 한신의 조나라를 시작해 여러 나라를 복속시키고 초나라가 불리하다는 전황에 대해 능숙한 설명을 들은 제왕 전광(田廣)은 한나라와 싸워봐야 더 나을 것도 없다고 생각하여 유방에게 항복하기로 하고 역이기를 믿고 역하(歷下)에 주둔하고 있던 제나라 군사들의 경계를 전부 풀게 했다. 이대로라면 싸우지 않고도 한나라가 제나라를 영향권 아래 둘 수 있는 상황. 그리고 한신 또한 역이기가 제나라를 설득하여 항복시켰다는 소식을 듣고 제나라 정벌을 그만두고자 하였다.
그런데 여기서 언변이 뛰어난 제나라 출신의 변사이자 연나라 정벌이후 합류한 책사 괴철(蒯徹)이라는 인물이 한신에게 ‘유방은 제나라를 설득할테니 군사를 멈추라는 명령은 내리지 않았다’는 말과 함께 이대로 제나라 함락이라는 큰 공을 역이기에게 빼앗길 셈이냐고 한신의 불안감을 충동질했다. 결국 전공에 눈에 멀어 괴철의 말에 넘어간 한신은 즉시 군대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제나라는 한껏 준비를 하고 싸워도 승부가 어떨지 모르는 판에, 경계를 완전히 풀고 있다 기습을 당했으니 전방위로 밀고 들어오는 한신의 군대에 상대가 될 리 없었다. 한신은 황하를 건너 역하(歷下)에 있던 제나라 군대를 습격하여 순식간에 격파해 크게 승리하고 제나라 군대를 패퇴시켰으며, 패주하는 적을 파죽지세로 쫓아 결국 제나라의 수도 임치(臨淄)에까지 이르렀다.
당시 역이기는 제나라 중진을 비롯해 사람들과 좋게 술자리를 가지면서 주연을 한껏 만끽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파발마가 달려와 한신의 전면적인 침공이라는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졌고, 이에 역이기에게 속았다고 생각한 전광은 역이기에게 "지금 당장 저 한신의 군대를 오지 못하게 하지 않으면 네놈을 삶아 죽여주마"라고 협박했다.
하지만 역이기는 이런 어처구니없는 상황에도 불구, 기개를 끝까지 잃지 않았다. "큰일을 도모하는 사람은 자질구레한 일을 개의치 않으며, 덕이 높은 사람은 다른 사람의 책망을 사양하지 않는다고 했소.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내가 공을 위해 무슨 일을 다시 할 수 있겠소?"
결국 역이기는 전황에 의해 팽형에 처해져 죽었다. 이 어처구니없는 상황에 대해 사마천은 전담열전(田儋列傳)에서 "참으로 심하도다, 괴통(蒯通)의 지모여! 제나라를 혼란에 빠뜨렸으며 회음후를 교만하게 만들어 마침내는 그 두 사람을 망하게 만들었다"라고 하며 괴철을 비난했다.
만일 이때 괴철이 한신을 부추기지 않았다면 제나라 전씨는 유방에게 무난하게 항복했을테고, 연왕 장도나 조왕 장오(張敖)처럼 이성왕에 임명되면서 가문을 좋게 보존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러나 괴철의 트롤러급 제안 때문에 역이기는 사망하고 제나라는 박살이 났으며 유방은 한신의 충성심을 본격적으로 의심하기 시작했다.
사마천은 이 일이 제나라 전씨를 몰락시켰을 뿐만 아니라 한신을 교만하게 만들었다고 지적했다. 이때 역이기는 유방의 승낙을 받고 제나라에 파견되었으므로 한신의 이 행위는 한왕 유방의 뜻을 분명하게 거스르는 행위였다. 보는 시각에 따라 한신에 대한 유방의 분노를 사버렸고 이후에 상관인 유방이 위험한 와중에 왕을 시켜달라며 조르는 협박에 가까운 한신의 행태가 훗날의 비참한 말로로 이어졌다는 평가도 있으니 여기서 업보의 씨앗을 뿌렸다고 볼 수도 있다.
여담으로 초한전쟁이 모두 끝난 후 황제가 된 유방은 오호도라는 섬으로 도망가있던 제왕 전광의 숙부 전횡에게 '그대를 왕으로 삼아줄 터이니 지난 날의 아픔은 잊자'고 하며 낙양으로 올 것을 명하고, 역이기의 동생 역상에게도 전횡에게 해코지할 경우 처형하겠다고 하였다.
하지만 전횡은 두 명의 식객과 함께 낙양으로 오던 중 "천자께서 내린 명령이라 할지라도 내 손으로 직접 삶아 죽인 자의 동생을 죄스러워 어찌 본단 말인가. 이제 낙양이 멀지 않았으니 여기서 내 목을 베어 가져간다면 썩지 않고 알아볼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고는 자결해버렸다.
유방은 눈물을 흘리며 죽은 전횡을 왕의 예로 장사지내게 하고 두 식객을 도위로 임명했으나 그 두 식객마저 전횡의 무덤 앞에서 자결해버리고 말았다. 한신이 저지른 민폐가 이렇게 큰 파급력의 비극을 야기한 셈이며 이런 후환을 고려 못했다면 진짜 역대급 눈새라고 볼 수 밖에는 없다.
(5) 용저를 격파하고 제나라를 평정하다
제왕 전광은 역이기를 삶아 죽이고 고밀(高密)로 달아나면서, 자신을 도울 수 있는 사람을 구했다. 한신은 유방의 부하이고, 유방에 적대한다면 붙을 사람은 한 명밖에 없었다. 그 사람은 바로 항우였고, 전광은 항우에게 사람을 보내 도움을 요청했다.
항우 역시 한신이 초나라 북쪽을 완전히 평정하는 일을 두고 볼 수는 없었기에, 항우로서는 이례적으로 기록상 무려 20만이나 되는 대군을 용저(龍且)와 주란(周蘭)에게 맡겨 한신을 상대하도록 명령했다. 이에 용저는 군대를 이끌고 전광과 합류했다.
이때, 용저가 한신과 겨루기 전, 어떤 사람이 하나의 전략을 제시했다. 지금 한신이 이끄는 군대의 기세가 엄청나 싸우면 형세가 좋지 못하니 싸움은 피하고, 제왕 전광을 내세워 항복한 제나라의 성들을 설득하고, 초나라 20만 대군의 기세를 보이면 항복한 성들이 모두 다시 분위기를 보고 들고 일어날 것이며, 후방이 막히게 되는 한신은 싸움 한번 제대로 못하고 박살나버린다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용저는 한신을 저평가하였는지 이렇게 말하며 사망 플래그를 세웠다. "나는 평생 한신의 사람됨을 알아 왔는데, 쉬운 상대일 뿐이다. 빨래하는 아낙에게 밥 얻어먹었으니 자신의 계책을 취하는 바가 없고, 가랑이 밑을 지나가는 치욕을 받았으니 사람의 용기라곤 겸한 것이 없으니, 족히 두려워할 바가 아니다. 또 제를 구하고 그를 항복시킨다면 내게 무슨 공이 있는가? 지금 싸워서 그를 이긴다면 제의 반을 얻을 수 있는데, 어찌 그만두겠는가?"
한신이 초나라 군대에 있었던 적이 있었으니, 용저 역시 한신의 막장 시절 이야기는 들어본 것으로 보인다. 용저는 한신의 찌질한 일화들을 들먹이며 지금껏 초와의 연전연승한 그를 무시했고, 즉시 교전을 벌이기 위해 유수(濰水)를 사이에 두고 한군과 대치했다.
이때, 한신은 밤을 틈타 1만 개의 주머니를 만들고, 그 안에 모래를 잔뜩 넣어 모래 주머니를 만든 뒤, 강의 상류에 가서 그것을 던져 물의 흐름을 막아버렸다. 그리고 용저의 군대에 싸움을 걸다가, 짐짓 패하는 장면을 연출하여 달아났고, 이를 본 용저는 기뻐하며 말했다. "나는 한신이 겁쟁이라는 것을 원래 알고 있었다!"
초나라군이 얕아진 유수를 건너 한군을 추격하자 한신은 모래주머니로 만들어 둔 임시 보를 터뜨려 수공을 가했다. 이에 초나라 군대는 혼란에 빠졌으며 그 와중에 한군이 재차 반격을 가하자 용저는 전사했고, 사령관이 죽으면서 초나라 군대도 여지없이 박살이 나버렸다. 제왕 전광도 달아났고, 한신은 도망치는 부대를 성양(城陽)까지 추격하여 대부분의 병사들을 사로잡았다. BC 203년, 마침내 한신은 위(魏), 대(代), 조(趙), 연(燕), 제(齊) 5개국을 모조리 평정하는 데 성공했다.
5. 한나라의 신하가 되느냐, 대왕의 길을 걷느냐
(1) 제나라의 왕이 되다
이때 한신의 기세는 그야말로 하늘을 찌를 듯했다. 이때 한신에게 유방의 사신이 와서 "항우의 매서운 공격에 형양이 함락 직전이니 구원하러 오라"라는 군령을 내리나 한신은 제나라의 민심을 다스려야 한다는 명분으로 자신을 제나라의 가왕(假王), 즉 임시적인 왕으로 봉해주면 가겠다고 청하였다. "제나라 사람들은 거짓과 속임수가 많고 변화무쌍하니 번복이 심한 나라입니다. 또한 남쪽으로 초나라와 국경을 접하고 있어 가왕(假王)이라도 되어 진정시키지 않는다면 정세가 안정되기 어렵습니다. 신을 가왕으로 삼아 주시면 모든 일이 순조로울 것입니다."
이 한신의 제안이 천하의 삼분의 일을 차지하고 있는 사나이의 야심인지, 아니면 진실로 그저 일시적인 계책으로 제안을 하는 일인지 그 동기에 대해 사기나 한서에서는 별다른 언급이 없다. 이때 유방의 상황을 보자면 사수(汜水)에서 초나라 대사마(大司馬) 조구(曹咎)와 장사 사마흔을 격파했으나, 소식을 들은 항우가 팽월(彭越)을 공격하다 말고 돌아와서 안심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게다가 이미 한신은 역이기의 협상으로 쉽게 복속시킬 수 있었던 제나라의 뒤통수를 쳐서 역이기도 죽게 만들고, 불필요한 전투를 벌여서 국고와 인명을 낭비하기도 했다. 거기에 이 당시 유방은 휘하장수 기신이 가짜 유방으로 투항하며 희생하고 그 사이 후방으로 도망치는 등 매우 위험한 상황이었다. 애초에 제나라의 민심을 불안하게 만든 게 한신 본인인데, 그걸 빌미로 상관을 협박하는 모습이었다.
이 때문에 유방은 몹시 분개해서 앞뒤 생각하지 않고 크게 노하여 욕을 퍼부었다. "나는 이곳에 포위되어 밤낮 네가 와서 도와주기를 바라고 있는데, 네놈은 스스로 가왕이 되려고 한단 말이냐!"
이때 장량이 유방의 발을 슬쩍 밟고 귓속말로 "한신이 왕이 되고자 한다면 지금의 우리가 어떻게 막겠습니까? 그냥 달라는 대로 주십시오. 아니면 변고가 일어납니다"라는 말을 해주자, 열받긴 했지만 초나라를 무찌르려면 한신이 필요하다는 사리분별을 할 능력은 충분히 있던 유방은 순식간에 태도를 돌변해서 소리쳤다. "대장부가 제후를 평정했으면 진짜 왕이 되는 것이지 어찌 가왕이 된다는 말인가?"
그리고 곧바로 장량을 한신에게 보내 한신을 제나라 왕으로 책봉했고, 곧바로 초나라를 치도록 명령했다. 밥을 빌어먹고 지내던 회음의 겁쟁이가 당당한 제나라의 왕이 되는 순간이었다.
(2) 천하 삼분
믿었던 최측근 용장 용저까지 죽어버리고 나자, 항우 역시 한신의 기세에 덜컥 겁을 먹었다. 게다가 제나라는 초나라의 바로 머리 위쪽이니, 한신이 항우를 압박하기 시작하면 이미 초나라 후방을 휘젓던 팽월만으로도 부담스러운 항우에게는 정말 가공할 위협이 아닐 수 없었다. 이에 항우는 우이(盱胎) 사람 무섭(武涉)을 보내 한신을 회유하려고 시도했다.
무섭은 한신을 만나 이렇게 말했다. "천하가 다함께 진(秦)을 괴로워한 지 오래되어 서로 힘을 합쳐서 진을 쳤습니다. 진이 이미 격파되자 공로를 계산하여 땅을 나누고 왕을 봉해 사졸들을 쉬게 하였습니다. 지금 한왕(漢王)이 다시 군사를 일으켜서 동쪽으로 나와 다른 사람의 몫을 침략하고 다른 사람의 땅을 탈취하니, 이미 삼진(三秦)을 격파하고 군사를 이끌어 함곡관을 나와 제후들의 군사를 거두어 동쪽으로 초를 쳤는데, 그 뜻은 천하를 다 삼키지 않으면 그치지 않을 것이어서 그가 만족할 줄 모르는 것이 이처럼 심합니다! 또 한왕(漢王)은 반드시 할 수 없을 것인데, 몸이 항왕(項王)의 손에 들어간 것이 자주 있었고, 항왕은 그를 연민하여 살려두었습니다. 그러나 벗어나면 번번이 약속을 어기고서 다시 항왕을 치니, 그를 믿을 수 없음이 이와 같습니다. 이제 족하(足下)가 비록 스스로 한왕과 두텁게 사귀어 그를 위하여 힘을 다하여 군사를 사용하였으나, 반드시 끝내는 사로잡히는 바가 될 것입니다. 족하가 잠시라도 오늘까지 오게 된 것은 항왕이 아직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두 왕의 일에서 저울질하는 것은 족하에게 있으니, 족하가 오른쪽으로 던지면 한왕(漢王)이 이기고, 왼쪽으로 던지면 항왕이 승리할 것입니다. 항왕이 오늘 망한다면 다음 날에는 족하를 빼앗을 것입니다. 족하와 항왕은 연고가 있는데, 어찌하여 한을 반대하고 초와 연합하여 화친하면서 천하를 셋으로 나누어 여기에서 왕 노릇하려고 하지 않으십니까? 이제 이 시기를 놓아 버리고 스스로 한에게 분명히 하면서 초를 치려고 하는데, 또한 지혜로운 사람이 정말로 이처럼 하겠습니까?"
하지만 한신은 단칼에 거절하면서 이렇게 대답했다. "내가 항왕(項王)을 모실 때는, 관직은 낭중에 불과했고, 하는 일은 극(戟)을 들고 항왕의 신변이나 지켰습니다. 간언을 올려도 귀를 기울여주지 않았고, 계책을 내어도 쓰지 않았습니다. 그런 나를 한왕은 상장군에 임명하고 그 인장과 함께 수만 명의 군사를 주었습니다. 또한 나를 대하기를 자기의 옷을 벗어 나를 입혀주고, 자기의 식사를 같이 나누어먹게 했습니다. 나의 말에 귀를 기울여주고 나의 계책을 채택해 주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여기 이 자리에 있게 된 것입니다."
이에 무섭도 대답할 말이 없어 물러갔다. 그런데, 이때 또 괴철이 슬금슬금 한신에게 다가왔다. 괴철이 보기에 천하의 향방이 한신에게 달려 있었으므로, 그를 위해 계책을 한번 내어보기로 한 것이다.
괴철은 처음에는 '관상을 봐주겠다'라는 시답잖은 소리를 하며 한신에게 접근하더니, 곧 본색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천하에 처음으로 일어나 어지러워졌을 때, 영웅호걸들이 제각기 명분을 내걸고 한 번 소리치니 천하의 재사들이 구름과 같이 몰려들어 물고기 비늘처럼 서로 뒤섞이더니, 들불처럼 번지는 화염과 같이, 일진광풍의 회오리바람을 일으키며 일어났습니다. 당시 선비들의 관심사는 단지 진나라의 멸망에 대한 것뿐이었으나, 그러나 지금은 초와 한이 나뉘어 다툼으로써, 천하의 죄 없는 백성들은 그들의 간과 쓸개가 땅에 깔리게 되었고, 황량한 교외의 들판에 나뒹굴고 있는 아비와 자식의 해골은 그 수효가 많아 이루다 헤아릴 수 없을 정도입니다. 초나라가 팽성에서 일어나 사방의 적을 쫓아다니다 그 패주하는 적의 뒤를 따라 형양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승세를 탄 초군이 천하를 석권하며 천하를 진동시켰습니다. 그러나 그 초군도 경(京)과 색(索) 사이에서 한군의 반격으로 기세가 꺾이고 성고의 서쪽에 있는 험악한 산세에 막혀 더 이상 전진하지 못한 지가 이미 3년이 되었습니다. 한왕은 몇십만이나 되는 인마를 이끌고 공현(鞏縣)과 낙양(洛陽) 일대에서 초군의 서진을 막고, 그곳의 험준한 산과 강의 요충지에 의지하여 초군의 공격에 간신히 버티고 있습니다. 한왕은 그동안 하루에도 몇 번이나 싸움을 치렀음에도 지금까지 한 치의 공도 세우지 못하고 패전만 계속하다가 외부로부터 구원도 받지 못하고 결국은 형양과 성고의 싸움에서 타격을 입고 완(宛)과 섭(葉) 땅으로 달아났습니다. 이것이 소위 지혜는 바닥이 나고 용기는 다하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군대의 사기는 험준한 요새에서 꺾이고 창고의 양식은 다 떨어졌으며 백성들은 고통과 피로에 지쳐 그 원성은 길거리를 가득 메우고 있어 민심은 동요되어 의지할 곳이 없게 되었습니다. 이에 제 소견으로는 이러한 형세는 천하의 성현일지라도 그 화란을 그치게 할 수 없다고 여겨집니다. 오늘 결국 한왕과 초왕 두 왕들의 운명은 모두 장군의 손안에 달려있게 되었습니다. 장군께서 한왕에게 협조하면 한왕이 승리할 것이고, 초왕에게 협조하면 초왕이 승리를 취하게 될 것입니다. 이에 제 속마음을 피력하여 어리석은 계책이나마 올리고자 하오나 단지 걱정되는 것은 장군께서 제 계책을 받아들이지 않을까 해서입니다. 진실로 능히 장군께서 저의 계책을 받아들이신다면 한과 초 두 나라에 이익을 주어 모두 존속케 하고, 천하를 삼분하여 정족지세(鼎足之勢)를 이루어 아무도 감히 먼저 움직이지 못하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된다면 장군의 뛰어난 능력과 성스러운 덕성으로 수많은 무기와 군사들을 거느리고 부강한 제나라를 근거지로 삼고, 연과 조 두 나라를 복종시키고 유(劉)와 항(項)의 군대가 없는 땅으로 나아가 그들의 후방을 압박한다면, 그것은 바로 백성들의 마음에 순응하는 바가 될 입니다. 또한 계속해서 서쪽의 형양성 쪽으로 진격하여 유(劉)와 항(項)의 분쟁을 중지시켜 군사들과 백성들을 위해 그들의 목숨을 보전시키라고 요구한다면, 천하 사람들은 바람처럼 달려와 메아리처럼 호응할 것입니다. 누가 감히 장군의 명을 듣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큰 나라는 쪼개지고, 강한 나라는 약하게 되어 제후들을 세울 수 있게 됩니다. 이에 제후들이 일단 서게 된다면, 천하는 장군이 베푼 덕에 감격하여 제나라의 명을 받들며 귀의할 것입니다. 이에 제나라의 옛 땅을 안정시키고 교하(膠河)와 사수(泗水) 유역을 근거지로 하면서 덕을 베풀어 감동시킨 제후들을 소집해서 두 손을 높이 들어 읍을 하면서 겸양의 자세로 자신을 낮춘다면 천하의 제후왕들과 그 재상들은 줄을 서가며 제나라에 들어와 조배를 드릴 것입니다. 나는 '하늘이 주는 것을 취하지 않는다면 오히려 후에 벌을 받고, 때가 왔을 때 행동하지 않는다면 도리어 그 재앙을 받는다(盖聞天與不取 反受其咎, 時至不行 反受其殃)'라고 들었습니다. 원컨대 장군께서는 심사숙고하시기 바랍니다."
쉽게 말해 항우와 유방 어느 쪽에도 붙지 말고, 별개의 세력으로 독립한 후 항우와 유방에게 더 이상 싸우지 말라고 압박을 넣으면서 평화를 유지하면 천하의 사람들이 한신을 따를 것이며, 당장 힘으로 항우마저 찍어누를 수 있는 한신이기에 항우와 유방을 한신이 충분히 억제할 수 있으니 천하를 삼분하고 그 주도권을 쥐라는 것이다. 이전에 항우가 한신을 회유하기 위해 보낸 무섭이 말한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괴철이 설득하고, 한신이 고민하는 이 부분은 회음후열전과 사기 전체에서도 명장면으로 손꼽히는 부분이다. 한신은 이 말을 듣고, "한왕이 나에게 잘 해주었는데, 내가 배신하는 게 옳겠는가?" 하고 고민했다. 그러자 괴철은 문경지교라 일컬어졌지만 파탄난 장이와 진여의 우정, 그리고 월왕 구천을 패자로 만들었지만 의심을 피해 떠난 범려를 언급하며, 하물며 유방과 한신의 관계가 한때의 장이와 진여만큼 각별한 것도 아니고, 한신이 범려가 구천에게 한 것만큼 유방에게 지극하게 충성한 것도 아닌데 어떻게 유방만이 의리를 지키기를 바라느냐며 강하게 밀어붙였다. 한신은 "조금 생각해 보겠다."면서 답변을 미루었다.
며칠 뒤, 애가 탄 괴철은 다시 한 번 한신을 설득했으나, 한신은 주저하다가 결국 괴철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자신의 공이 워낙 크기 때문에, 자신에게서 유방이 제나라를 쉽게 빼앗아가지는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자 괴철은 한신의 어중간한 태도에 일이 글렀음을 알고, 일부러 미친 사람 행세를 하고 무당이 되었다. 유방이 승리하면 이런 이야기를 나누었다는 것만으로도 처형감인데, 정신병자 행세를 해서 이를 모면해 보려고 한 것이다.
이 이야기에서 한 가지 의문은, 괴철과 한신의 이 대담은 그야말로 완전히 밀담인데, 어떻게 사마천이 바로 이 이야기를 옆에서 본 것 같이 생생하게 기록했냐는 점이다. 일단 회음후열전에서도 '주위의 사람을 물리고' 이야기를 했다고 나온다. 이는 진시황 사망 후, 이사와 조고, 호해가 사구(沙丘)에서 모의를 하는 부분과 더불어 사마천이 절대로 그 내막을 알 수 없는 상황으로 손꼽힌다.
다만, 사구정변 쪽도 항목에 나오듯이 사마천이 '절대로 그 내막을 알 수 없다'는 부분에 반론이 있으며, 괴철의 대담 쪽은 오히려 이런 의문 자체가 성립하기 어렵다. 우선 한신과 괴철이 대담을 가졌던 사실 자체는 확실하다. 한신의 사망 후에 유방은 괴철을 잡아들였으며, 이때 괴철은 "내가 한신에게 반란을 권했다"라고 인정했기 때문이다.
자세한 대화 내용이 문제인데, 괴철이 결국 죽지 않고 풀려났음을 생각해본다면 괴철이 상황을 말했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우선 유방이 괴철을 잡아들여 신문하는 과정에서 자세한 대화의 내용도 당연히 조사했을 것이고, 괴철은 그런 권고를 했다는 것을 당당하게 자백한 만큼 자세한 대화의 내용도 숨길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더구나 공식적으로 괴철이 한신에게 그런 권고를 했다는 것이 공개된 상태에서 황제가 괴철을 친히 석방했으므로, 이후에 괴철이 대화 내용에 대해 계속 함구해야 할 이유가 없다.
(3) 해하 전투, 초왕이 되다
항우는 팽월과 유방의 협공 때문에 어떻게 하지도 못하고 있었고, 군량도 부족해졌으며, 또한 한신의 기세 때문에 두려움에 떨었다. 결국 항우는 먼저 유방에게 홍구(鴻溝) 이서의 땅은 한나라에, 그 이동의 땅은 초나라 땅으로 하여 천하를 양분하자는 제안을 내었다. 유방도 이에 승낙하여, 두 사람은 각자 동쪽과 서쪽으로 떠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서쪽으로 떠나던 유방은 장량과 진평의 제안으로 항우의 뒤를 치기 시작했고, 동시에 팽월과 한신에게도 연락하여 움직이기를 권하였다. 그런데 한군이 고릉(固陵)에 이르렀음에도 불구, 팽월과 한신은 꼼짝도 하지 않고 버티기만 했고, 유방은 초나라의 반격을 받아 고릉 전투에서 큰 패배를 당했다.
결국 장량의 제안에 따라 유방은 자신의 신하라고 할 수 있는 사람들과 또다시 거래를 해야만 했고, 거래 성사 뒤 한신 역시 그제야 부대를 이끌고 직접 유방을 도우려 달려왔다. 또다시 감히 임금을 상대로 거래를 시도한 한신은 분명 다시 유방에게 찍혔을 테고, 유방은 한신을 완전히 위험인물로 주시했을 것이다.
화를 꾹꾹 눌러 참으며 유방은 장량의 제안에 따라 팽월과 한신의 봉지를 넓혀주기로 약속하고, 초에 오랫동안 봉직한 장수이자 항우의 대사마 주은을 회유하였고, 수춘을 공격하던 영포와 유고까지 합류시켰다. 그리고 유방에게 합류한 관영의 공격에 항우가 진현에서 패주하자 한신과 팽월이 결국 유방의 제안을 뿌리치지 못하고 군대를 이끌고 옴으로써, 영웅들은 마침내 해하(垓下)에서 모두 집결하였다.
BC 202년, 해하에서 집결한 연합군은 항우의 최후를 장식하기 위해 진격하였다. 이때, 한신은 무려 30만 대군을 이끌고 초군과 정면으로 격돌하였다. 이후 항우의 괴력에 밀려 후퇴하다가, 측면 부대를 이용해 초나라 군대를 요격했고, 다시 본대가 뒤돌아 공격을 퍼부어서 초군을 대파하였다. 결국 항우가 도주하다 자결하면서 초한전쟁은 드디어 종결을 맞이했다.
유방은 최후까지 버티던 노현(魯縣)을 굴복시켜, 완전한 끝을 장식했다. 그런데 승리를 거둔 후 서쪽으로 가던 유방이 정도 부근에 이를 무렵, 유방은 또 갑자기 한신의 진영으로 달려가 한신의 군권을 빼앗았다. 이미 한번 당해본 일이었지만 이미 전쟁도 끝난 마당에 갑작스러운 기습에 한신은 놀랐는지 제대로 반항도 못 해보고 고스란히 병권을 넘겨주었다.
이와 동시에 유방은 한신을 본거지인 제나라에서 항우가 다스리던 초나라 왕으로 옮기고, 도읍을 하비(下邳)에 정하게 하였다. 제나라는 폐지해서 한나라에서 1년간 직접 다스리다가 BC 201년에 부활시켜 유방의 서장자 유비에게 맡겼다. 숙청은 기본적으로 이쪽이 상대보다 힘이 있을 때 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유방이 당초에 한신의 세력을 압도한다고 말하기 어렵다.
초한전쟁의 최종 결전인 해하 전투에서 한신은 유방의 후군과는 별개로 단독으로 30만 대군을 동원했다. 설사 이를 3분의 1만 믿는다고 해도 그 군대는 10만에 이르는 거대한 규모인데, 전 중국을 뒤흔들고 수많은 나라를 멸망시켰으며 왕들을 참살한 군사 10만을 이끄는 장군의 위세란 실로 어마어마했을 것인데 유방은 이런 한신을 어떻게 숙청했을 지는 여전히 의문으로 남아있다.
다만, 워낙 한신의 정치력이 떨어졌으니 이때 역시 정말로 자기 방어를 철저히 했을지 의문스럽긴 하다. 뻔히 숙청당해 제왕에서 초왕으로 옮겨졌으면 경계를 하든 진짜 반란을 일으키든 이제라도 보신을 하든 해야 하는데 당하고 또 당해서 회음후로 떨어지고 결국 자기 목까지 떨어졌으니. 사실 숙청을 피하려면 군사력 못잖게 중요한 것이 정치력인데 이 점에서 한신은 빵점이나 다름없었다.
당장 한신을 뒤에서 받쳐줄 사람들은 없거나 원래 유방의 사람이었고 한신 자신의 사람은 괴철뿐이었다. 그런 주제에 유방 주위의 사람들과 교류를 할 생각도 없어서 자신을 찾아온 번쾌를, 그것도 관영 등과 싸잡아서 모욕했을 정도니 참으로 생각이 없는 인물이다.
당장 위에 나오는 유비도 여후에게 한번 죽을 뻔하자 자기 땅을 여후와 딸 노원공주에게 바쳐서 살아남은 적도 있고, 소하도 고제가 자신을 의심하자 자기 가문 사람들을 전쟁터에 보내서 고제의 의심을 가라앉힌 예도 있는데 비해 정작 한신은 이런 융통성을 발휘했다는 말조차 없으며 그렇다고 오왕 유비처럼 반란을 착실하게 준비한 것도 아니다.
일단, 이때는 제나라 군사는 빼앗기긴 했어도, 최소한 일방적인 숙청은 아니었다. 한신은 자신의 기반이 있던 제나라에서 자신의 고향 초나라로 왕직을 옮겼는데, 초나라 역시 결코 중요성이 떨어지거나 작은 나라는 아니었다. 규모로만 따지면 임치· 낭야· 제북· 교동 4군(또는 임치· 낭야· 제북· 박양· 교동· 교서 6군) 73성인 제나라보다 오히려 더 큰 나라가 설· 회양· 사천· 동해· 회계 5군 89성인 초나라였다.
거기다 항우가 죽고 유방이 황제가 된 시점에선 큰 의미는 없는 얘기지만, 초나라는 몇년 전까지 유방이 섬겼던 나라이며 유방이 항우를 정벌한 명분도 초의제 시해였다.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숙청'은 좀 더 뒤의 시점이고, 제왕에서 초왕으로 옮긴 것은 봉지를 바꾸는 '전봉(轉封)'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왜 규모도 크고 명예도 좀 더 얹어지는 초왕으로 전봉시킨 것인가 생각할 수 있는데, 한신을 그가 몇년 동안 운영했던 부대와 분리시키기 위한 조치라고 생각된다. 현대사회의 인사 용어로 풀면 좌천성 영전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이미 여러번 한신이 유방을 자극했던 이력이 있으니 항우가 패사한 시점에서 한신이 가장 위험분자라 할 수 있었다. 그런 한신의 손 아래에, 한신의 부대의 장교진이 모두 유방의 수하라고는 하지만, 몇년 동안 수족처럼 부린 부대가 그대로 있는 것은 위험하다. 그렇다고 바로 왕작을 박탈하면 한신이 반란을 일으킬 수도 있고, 다른 이성왕들이 불안해할 수 있다.
그렇다보니 일단 다른 왕작으로 옮겨서 손에 익은 부대와 분리시키는 것이 해당시점에서는 최선일 것이다. 일단 옮기는 것 자체가 요즘처럼 깔끔하고 간단한 것도 아니라 상당한 기력을 소모시키는 것이기도 하고, 비록 초나라가 제나라보다 규모가 크고 명예가 얹어지더라도 초나라는 엄연히 방금 전까지 싸우던 적국이었다는 점을 잊으면 안된다.
항우의 평가와는 별개로 해하에서 자국을 박살내고 자국의 왕을 죽이는데 크게 일조한 사람이 이제 자국의 왕이라는 점은 초나라 사람들이 한신을 딱히 즐겨 따르게 하지 않았을 것이라 추측할 수 있으며, 거기에 초나라에는 황제본인과 주요 공신들이 악연으로 친인척 관계로 엮여있는 고향 동네도 있었다. 실제로 한신을 초나라 병사가 고변한 것이 한신의 회음후 강등의 계기가 된다.
거기에 당시 제나라 인근에는 고릉전투에서 한신 못지않은 위험분자로 밝혀진 팽월의 양나라나, 한신과 인연이 있는 장이의 조나라 장도(연왕)의 연나라가 인근에 있어 한신이 반란을 일으키면 같이 호응할 가능성이 높았고, 이에 한신의 세력을 남쪽으로 강제이주시켜 당시 주요 제후왕중 그나마 한고조와 코드가 맞고 한신과의 인연이 적은 회남왕 영포, 장사왕 오예와 이웃하게 만들 목적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6. 토끼가 죽으면 사냥개를 삶는다
(1) 밥값을 갚다
졸지에 제왕에서 초왕이 되긴 했지만, 초나라 지역은 한신의 고향이기도 했다. 한신은 위풍당당한 왕이 되어, 과거 자신을 찌질이로 여겼던 사람들 앞에 다시 나타났다. 한신은 자기에게 밥을 주던 아낙네들을 찾아나서 천금(千金)을 주었고, 밥을 빌어먹었던 정장에게는 백전(百錢)만 주면서 이런 소리를 덧붙였다. "공은 소인이다. 덕을 베풀면서 끝까지 하지 않고 중도에서 그만두었다." 밥 한 그릇의 은혜를 천금으로 보답하니 일반천금(一飯千金) 고사다.
그리고 과거 자신을 가랑이 사이로 걸어가게 했던 사람도 찾아내서, 초나라의 중위(中尉)에 임명하였고, 이번에는 이런 말을 부하들에게 하였다. "이 사람은 장사다. 그가 나를 욕보였을 때, 내가 어찌 그를 죽일 수 없었겠는가? 그를 죽인다 한들 이름을 얻을 길이 없어, 오랫동안 참아 공을 이루어 이 자리에 있게 된 것이다." 인내는 쓰고 그 열매는 달다는 명언을 몸소 실현한 것이었다.
가랑이 사이를 긴 것은 한때고 밥을 빌어먹은 건 여러 날이 되었는데 분명 후자도 한신이 분기탱천하는 계기가 되었음에도 조롱하며 백전만 준 것은 오히려 자기를 중간에 저버린 정장을 창피주기 위해서 이랬다고 해석할 수도 있다. 비록 이런 행동이 호의나 용서를 표현하는 일이었었어도 궂이 상대에게 모욕감을 주는 행태에서 볼 수 있듯이 한신의 자기중심적인 행동은 여기서도 발현되었다.
여기에 꽤 오랜 시간 밥을 먹여주고 잠자리도 제공해준 정장한테는 밥값만 주고 자기한테 대놓고 모욕을 준 사람에게는 관직을 주고 밥 몇번 준 사람에게는 천금을 줬으니 이치에 맞지 않아 보인다. 결국 이런 행보로 인하여 한신은 초나라 백성들의 인심을 크게 사지 못했고 후술할 종리말 고발 사건으로 자멸하게 된다.
이를 두고 한신을 옹호하는 측에서는 한신이 뻔뻔한게 아니라 당시 관념으로는 한번 식객으로 받으면 끝까지 책임지는 게 도리이기에 정장이 잘못한 건 맞다고 주장한다. 게다가 한신을 내쫓는 과정도 정말 찌질하기 그지 없었는데 비록 한신도 말년에 인의를 저버렸다곤 하나 최소한 종리말에게 본인이 직접 사죄하고 해명하며 "사정이 이리이리 됐으니 도와달라"고 말했다.
그리고 이 상황에서는 종리말을 내주지 않으면 100% 확률로 한신은 극형에 처해질 위기였기에 한신의 입장도 이해가 가는 편이다. 그러나 정장은 한신 한명의 숙식을 대기 어려워서 중간에 식객을 파기한 게 아니라 단지 부인의 잔소리가 싫어서 식객의 예를 파기한 것이다. 목숨이 걸려있는 사안이라 종리말을 팔아먹은 한신이랑은 명분에서 차이가 다르다.
게다가 앞서 말했듯 정 사정이 여의치 않아 식객의 예를 파할 거 같으면 정장 본인이 직접 한신에게 해명하고 사죄하면서 "사정이 이리이리 됐으니 더 이상 숙식을 제공하지 못하겠다. 미안하게 됐다"라고 하는 게 예법에 맞다. 적어도 이랬으면 한신이 나중에라도 정장의 사정을 봐줘서 편의를 봐주거나 똑같이 천금을 하사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정장은 아내의 잔소리가 두려워서 한신을 쫓아내는 일을 아내에게 일임해 버렸다. 그런데 아내가 택한 방법이란 게 남편 대신 설득하거나 그런 것도 아니라 식사시간 때 찾아온 한신에게 말 한 마디도 안 하고 밥솥 바닥을 긁는 퍼포먼스를 보여줬다. 아무리 한신이 당장은 직업이 없고 한량이라 한들 본인이 자처해서 정장의 식객이 된 것도 아니고 정장이 먼저 한신에게 식객이 되길 권했는데 이런 식으로 모욕을 주는 건 이치에 맞지 않는다.
차라리 자기 다리 밑을 기어가라고 한 사내는 그 모욕이 찰나의 순간이고 본인도 칼을 찬 사내 앞에서 그 정도 오기를 부릴거면 목숨을 걸었다는 변명이라도 가능하지 본인이 식객으로 먼저 맞이해놓고 나중에 본인은 스리슬쩍 빠지고 부인 뒤에 숨은 주제에, 그것도 부인이 이런 식으로 노골적으로 "너 같은 놈 줄 밥은 없다. 꺼져라"라는 식의 압박을 하는 건 전례가 없는 아주 몰상식한 행동이다. 괜히 한신이 정장을 찾아서 소인배라고 욕한 게 아닌 것이다.
물론 한신을 비판하는 측도 있는데 식객대우에 대한 옹호론은 크게 근거가 없는 추정에 불과하며 오히려 비슷한 시기 전국시대의 식객들의 일화를 보면 식객들을 재주에 따라 차별대우를 받던 풍훤의 경우나 후원자가 왕에게 아예 죽여버리라고 권유까지 했던 상앙 등 한신보다 더 심한 대우를 받은 식객들이 넘쳐난다는 것이다.
한신과 비슷한 시기를 살던 이사도 진시황의 외국인 추방령에 외국출신(초나라)이라 쫒겨날 위기에 처하자 간축객서로 변호하고 이를 진시황이 받아들여 축객령을 철회된 일화가 있었는데 반대로 말하면 식객을 쫓아낼 권한은 온전히 주인의 권한이었고 식객이 쫓겨나지 않을 권한은 성문불문을 고하하고 존재하지 않았다. 당장 간축객서 내용을 살펴봐도 식객을 추방하는게 도덕적으로 문제가 된다는 구절은 없다.
거기에 한신이 살던 시기에는 날품팔이 무리가 왕과 장군이 되고 거렁뱅이, 범죄자, 개백정까지 제후왕, 장군들이 우후죽순으로 등장할 정도로 기존 신분제와 도덕률이 밑바닥부터 박살나던 난세였다. 그런 상황에서 식객과 후원자에 대한 그런 불문율이 (있었는지도 의문이지만) 있었다고 해도 기존의 불문율이 제대로 지켜질리가 만무했다.
다만 그렇다고 해도 남이 불문율을 안지킨다고 나도 안지켰다는게 잘한 행동은 결코 아니며 이러니 저러니 해도 나름대로 이유가 있어서 쫒아낸 이들과 달리 정장은 단지 부인의 잔소리가 싫다는 골때리는 이유로 한신을 치졸하게 쫒아낸 것이기 때문에 당대의 식객문화를 떠나 잘못한건 맞다.
(2) 반란혐의와 회음후 강등
아무튼 초왕으로 옮겨간후 한편으론 매우 의심되는 행동도 했었는데 무슨 의도인지는 불명이나 당장 항우의 몰락 이후에도 유방에게 항복하지 않은 초나라의 주요 장수 종리말이 의탁해오자 유방으로부터 숨겨준 것이다. 심지어 황제인 유방이 종리말을 체포하라는 명령까지 한신에게 내렸는데도 이를 무시하고 숨겨준 것이다.
당시 한신은 팽성 근처인 하비에 수도를 삼아 항우의 서초 지역 대부분을 통치하는 상황이었는데 이런 상황에서 옛날 항우의 부하들을 포섭하는 행동은 항우의 잔존세력을 기반으로 유방에게 반기를 도모해보겠다고 해석될 수도 있다. 거기에 한신은 초 땅에 부임하자 곧 군대를 대거 양성하고 초나라 지역을 순행하는 등 수상한 행보를 이어갔다.
이렇게 되자 앞에서 말한 행동들도 죄다 반란을 준비한다는 것으로 의심받았다. 그것도 가뜩이나 같은 시기 영천후 이기, 연왕 장도가 각각 반란을 일으켜 유방이 직접 진압하러 간 상황에서 이런 짓을 벌인 것이었다. 특히 이기는 항우의 부하 출신이라 항우 세력의 재집결에 전 한나라가 신경이 곤두선 상황이었다. 정리하자면 한신은 과거 항우의 본거지에서 항우의 백성들과 부하들을 모으는 짓을, 그것도 황명까지 어겨가며 벌이고 있었던 것이다.
이전부터 끝끝내 괴철의 제안을 거부한 것이나, 한신의 말이나 행동을 종합해보면 정말로 유방에게 반기를 들고 대적하려는것 까지는 아니었을 가능성이 높지만 그건 한신 생각이고 이미 제나라 사건 등으로 눈 밖에 나있었던 한신이 이런 짓을 한다는 건 사실상 자신의 명을 재촉한 것이나 다름없었다.당연히 이런 골때리는 행동을 여러번 저지르다 보니 그를 감싸주는 사람도 없는건 덤이다.
게다가 초나라 쪽의 여론도 한신에게 부정적이었는지, BC 201년 음력 12월 다름 아닌 이렇게 징병된 병사 중 한 명이 한신의 진지를 드나들더니 유방에게 한신이 모반하려 한다고 상소를 올렸다. 작년 연왕 장도의 반란으로 유방과 신하들 모두 반란에 신경이 곤두선 상황에서 신하, 장수들은 이 소식을 듣고 유방에게 "군사를 동원해 한신을 묻어버려야 한다"고 강경하게 주장했다.
제장들의 태도와는 별개로 유방은 오히려 침묵을 유지하며 신중을 기했다. 당연히 유방이라고 한신이 별로 이뻐서 그런 건 아니었던 것 같고, 다만 '이렇게 단순무식한 방법으로 상대할 수 있는 사람은 아니다'라는 쪽에 가까웠던 듯하다.
유방이 진평에게 대응책을 묻자, 지금 폐하의 장수와 군대는 한신을 이길 수 없고, 한신이 모반했다는 걸 아는 사람도 없으며, 한신도 계획이 새어나간 걸 모르니 그냥 놀러 온 척 하고 찾아가서 한신을 간단하게 사로잡으라는 것이었다. 유방은 진평의 계책에 따라 남방의 운몽택(雲夢澤)으로 놀이를 나간다고 하면서 제후들을 모두 진현으로 모이게 했다. 물론 이는 한신을 사로잡기 위한 계책이었다.
회음후 열전에 따르면 처음에 한신은 그 사실을 몰랐다. 그러나 이후에는 알게 되었는데, 당초에는 놀라 아예 한번 군대를 이끌고 한나라와 전쟁을 벌일까도 생각했지만, 이내 괴철의 제안에 우물쭈물했던 그때처럼 머뭇거리다가 직접 나서서 억울함을 밝히면 공신 입장인 자신이니 유방이 용서해 줄 거라고 믿고 그만두어 버렸다.
이에 누군가가 한신이 숨겨주고 있던 '종리말의 목을 가져다 바치면, 황제가 용서해줄 것'이라고 말하자 한신은 그 이야기를 종리말에게 꺼냈다. 그러자 종리말은 한신에게 욕을 퍼부었다. "황제가 초를 공격하지 않은 것은 내가 있기 때문이다. 지금 나를 바치면 나도 죽지만, 곧 너도 죽을 것이다. 너 같은 자를 어찌 장자(長者)라고 하겠는가?" 그리고 자신의 목을 찔러서 자결해 버렸다.
한신은 종리말의 목을 베어 싸들고 유방을 만나러 갔는데, 애초에 종리말이 문제가 아니였던 유방은 당연히 그런 건 신경도 쓰지 않았고, 근흡(靳歙) 등은 한신을 사로잡아 수레에 태워버렸다. 한신은 이렇게 한탄하였다. "과연 사람들이 교활한 토끼가 죽으면, 좋은 사냥개가 삶겨진다(狡兎死 走狗烹)라 한 것과 같구나!"
이 한신의 누명 주장을 들은 유방은 "나라에 반기를 든다는 고변이 있었다"라며 차갑게 반박한 뒤 한신에게 수갑을 채워버린다. 진승상세가에서는 어처구니가 없다는듯 좀 더 노골적으로 윽박지르며 "네가 뭐가 억울하냐!"라고 소리쳤다고 한다.
그리고 다음 날 낙양에 도착한 유방은 대사면령을 내려 한신을 사면하고, 직후 한신의 초왕 자리를 박탈해 그 땅을 유씨 친척들에게 분봉할 것을 주장한 전긍의 건의를 받아들여 10여 일 뒤 한신의 초왕 직위를 박탈하고 회음후로 강등시켜 버린다. 이렇게 한신은 이번에도 손 한번 써보지 못하고 막대한 군사력을 동원할 수 있는 초왕 자리를 빼앗기고 말았다.
(3) 다다익선
그 이후로 한신은 유방이 자신을 두려워하여 제거하려 든다는 것을 인지한 뒤로 병을 칭하면서 조정의 조회나 행사에 전혀 참석하지 않으면서 흠을 주지 않기 위해 방안에 틀어박혔다. 그러다 보니 비참해진 자신의 처지에 대한 불만도 날이 갈수록 높아졌고, "내가 주발이나 관영 번쾌 같은 놈들과 동급이 되다니!" 하고 불평했다.
어느 날 번쾌의 집에 초대받아 갔는데, 번쾌는 같은 후작임에도 자신을 신(臣)이라 표현할 정도로 한신에게 굽실댔다고 한다. 한서에서는 번쾌가 한신을 대왕으로 부르면서 "왕께서도 자신이 신하라는 사실을 인정하셔야 합니다"라고 충고했다고도 하는데, 기분이 별로였는지 한신은 "지금은 같은 후일 뿐이지 않더냐. 왕은 무슨 왕"이라며 툭 내뱉었다고 한다.
이는 한신이 망한 이유를 잘 보여주는 일화로 한신이 깎아내린 관영, 주발, 번쾌는 다 초한전쟁에서 혁혁한 전공을 세운 익장들이자 명장·용장들이며 고제와의 관계도 한신보다 훨씬 가까웠고, 또 관영은 한때 한신 휘하에서 함께 싸우기도 했던 인물이었으며 특히 번쾌는 유방과 초창기부터 함께한 깊은 인연과 공적도 높은 데다 여후의 여동생과 결혼했기에 유방과 친인척 관계가 되는 중신이며 주발은 나중에 한나라에서 재상직까지 맡게 되는 거물이다. 고조공신후자연표에 의하면 관영은 9위, 주발은 4위, 번쾌는 5위로 걸물 중의 걸물이다.
게다가 마음 속에 품은 건 시원하게 입 밖으로 내뱉어버리는 번쾌의 성격상 한신에게 보여준 행동은 진심이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은데 오만해진 한신은 이걸 그냥 흘려버리고 말았으니 결국 자신의 수명을 갉아먹은 꼴이다. 사타구니 밑을 기어서라도 참으며 인내했던 한신은 대성한 후엔 뭐든 제 맘대로 돼야 속이 풀리는 소인배가 되어 있었다.
하지만 어느 날은 그래도 기분이 괜찮았는지 유방을 만나 각 장수의 장단점에 대해 토론하는 시간을 보냈다. 이때 유방이 한신에게 "내가 어느 정도 숫자나 이끌 수 있을 것 같으냐?"고 묻자, 한신은 "10만 정도"라고 대답했다. "그럼 너는?"이라는 유방의 질문에 한신은 이렇게 대답하였다. "신(臣)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습니다."
이에 기분이 상한 유방이 그렇게 잘났으면서 왜 자신에게 사로잡혔는지 물어보자, 한신은 이렇게 말했다. "폐하께서는 비록 군사를 많이 거느릴 수 있는 재능은 부족하시지만, 그 군사들을 잘 통솔할 수 있는 장군들을 거느릴 수 있는 재능이 있으십니다. 그래서 제가 폐하의 포로가 된 것입니다. 하물며 폐하는 하늘의 도움을 받고 계셔서 사람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가 없습니다."
여기서 하늘의 도움을 받고 있다는 말은 유방이 실제로 재주는 없는데 운이 좋았다는 식의 조롱일 수도 있지만, 도저히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한신을 몇 번이나 간단하게 제압해버리는 유방에 대한 한신의 솔직한 감정일 수도 있다. 물론 이런 행적들이 한신의 수명을 차근차근 깎아 먹은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4) 성야소하 패야소하(成也蕭何 敗也蕭何)
이렇게 불만이 쌓이는 와중에, 진희(秦豨)라는 인물이 거록군의 태수로 임명되는 일이 생겼다. 진희는 유방이 직접 "무척이나 믿음직했다"라고 말했을 정도로 신임받던 인물이다. 그런데 한신은 진희를 따로 만나더니 하늘을 우러러 보고 탄식하고 속내를 털어 놓았다. 그 속내는 바로 반란에 관한 일이었다.
진희가 부임하는 거록에는 강병들이 많으니 진희가 반란을 일으키고, 한신 본인이 내부에서 흔들어버리면 일은 쉽다는 게 요지였다. 이에 진희는 제안을 받아들였고, BC 197년 8월 실제로 반란을 일으켰다. 유방은 9월 달에 진희를 진압하러 떠났지만, 한신은 병을 핑계로 같이 나서지 않았다.
한신은 몰래 진희와 연락을 계속하면서 조서를 가짜로 꾸미고 사람들을 움직일 계획을 세우고는, 먼저 여후부터 족치려고 하였다. 그런데 한신의 밑에 있던 사람들 중 한 명이 죄를 지어 한신이 가두어 놓았는데, 하필 그 사람이 탈출한 뒤 여후에게 도망쳐 이 모든 일을 고해버리고 말았다.
계책을 알았어도 한신의 이름이 워낙 대단하니 함부로 적대의사를 표방하고 잡으려고 하면 위험해질 수 있는 상황이었다. 이때 여후가 계책을 물어본 사람이 바로 소하였다. 소하는 이미 진희가 패배했다고 거짓 정보를 꾸몄고, 한신에게 “병중이기는 하지만, 억지로라도 들어와서 축하하시오”라고 했다. 이에 한신은 의심 없이 궁으로 나왔다가, 여후가 준비해놓은 무사에게 사로잡히고 만다.
결국 장락궁(長樂宮)에서 참형을 당하게 된 한신은 일이 이렇게 된 것이 어이가 없어서 마지막으로 소리쳤다. "내가 괴철의 말을 듣지 않은 것이 참으로 원통하구나! 내가 한낱 아녀자에게 속임을 당해 죽게 되었으니, 이것은 분명 하늘의 뜻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렇게 온갖 고난과 역경을 이겨내고 회음의 시정잡배에서 당당히 제왕과 초왕의 직위에까지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 항우를 제압하고 천하를 유방에게 안겨 준 장본인인 한신은 오만해져 업보를 쌓은 나머지 비참한 말로를 걸으며 그 파란만장한 생을 마감하게 된다. 한신이 죽은 후 연좌제로 인해 그 삼족도 모두 처형된다.
한신의 모반은 여전히 불분명하지만 소하가 그의 죽음에 관여한 사실은 분명하다. 소하는 이후, 한신의 반란을 진압하는 데 한몫했다는 이유로 상국(相國)에 임명되었다. 한신은 소하의 추천으로 인해 한나라에서 자신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게 되었지만, 정작 소하 때문에 최후를 맞이하게 되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되었다.
송(宋)나라 사람 홍매(洪邁)는 자신의 저서인 용재속필(容齋續筆)에서 "한신이 대장군이 된 것은 소하가 천거했기 때문이요, 이제 그가 죽음을 맞이한 것도 소하의 꾀에 의한 것이었다. 그래서 항간에 성공하는 것도 소하에게 달려 있고, 실패하는 것도 소하에게 달려 있다라는 말이 떠돌게 되었다(信之爲大將軍, 實蕭何所薦, 今其死也, 又出其謀. 故俚語有成也蕭何敗也蕭何之語)"라고 기록하였다.
한편 한신이 죽은 후 진희의 반란을 진압하느라 부재중이었던 유방은 돌아와 한신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한편으로는 기뻐했고, 한편으로는 안타까워했다(차희차련)라고 한다. 한신이 최고의 위험분자였지만 어쨌든 자기를 그 자리에 올려준 일등공신이었던 것과 전술재능이 최고인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유방과 한신 사이의 미묘한 애증 관계를 잘 나타낸 말이라고 볼 수 있겠다.
(5) 한신은 실제로 모반을 일으키려고 했나?
일세 영웅의 최후라고 보기에는 너무나 허무한 죽음이라 이 한신의 반란 의도 자체에 대해 당시의 상황과 신빙성, 근거가 적고 설득력이 낮아 옛날부터 사기에 쓰여 있음에도 학자들 사이에서 논란이 많았으며 현대에 이르러서도 논란이 되고 있다. 단순히 한왕 신과 한신을 당대 사람들과 사마천까지 헷갈려서 진희가 흉노 측과 접선하면서 그쪽에 망명해있던 한왕 신과 결탁한 것이 이쪽 한신이 한 일로 혼동된 것 아니냐는 의견도 있다.
한신에게는 반란을 일으키고자 했다면 이미 일으킬 수 있는 기회가 수없이 많았다. 특히 제나라 정벌 후 제왕 시절에는 명성과 위세가 천하를 진동시켜 항우조차 두려워할 정도로 군세나 세력이 커져서 유방과 항우를 합친 것보다 크거나 비슷할 정도였기에 괴철이 천하삼분을 제시하고 항우는 자신에게로 회유시키고자 하였으며 유방은 가왕을 요청하는 사신에게 화를 냈다가 장량의 조언에 가왕이 아닌 진짜 제왕으로 봉했다.
게다가 조나라 정벌 시절 때에도 일으키고자 하였으면 반란 자체는 충분히 가능했으며 제왕 시절부터 해하 전투가 끝나고 난 후, 그리고 제왕에서 초왕으로 전봉되었을 때에도 충분히 반란을 일으켜 성공시킬 기회는 수없이 많았으나 단 한 번도 배신하지 않았기에 그대로 유방에게 당했다.
다만, 이 부분은 막연히 유방을 믿고 방자하게 굴던 한신이 이에 대해 처벌을 받고 앙심을 가져 뒤늦게 배반할 마음을 품었다고 여길 수도 있다. 그러나 한신의 시기적인 문제를 제외하더라도 그 외의 여러 부분에서 한신의 역모는 그 실재가 의문스럽다.
우선 한신의 참수 이유는 '진희의 모반에 가담했다'라는 명분이었는데 당시 진희의 행적을 보면 한신과 한 번 만났다는 기록조차 엇갈리고 친분 등 다른 연계되는 부분이 전혀 없으며 진희가 한신을 거론한 적도 없고 내부동조임에도 불구하고 문서 같은 것 하나 없었다. 사기에서 진희와 내응했다는 부분을 보면 모순되는 부분과 이상한 점이 너무나도 많다.
사기에서 둘이 만났을 때 진희가 아닌 한신이 먼저 진희에게 모반을 부추겼다는 식으로 나와있으나 실제로 모반을 꾀한 주범은 진희였다. 그 또한 그를 따르는 행렬에 수많은 빈객들과 수레로 인해 주창에게 의심을 받다가 유방의 지시에 따라 조사했더니 실제로 수레와 빈객들의 불법적 내용이 들키면서 유방으로부터 의심을 받기 시작해 진희가 두려워하기 시작한 것이 발단이었고 그 무렵부터 모반을 꾀해 실제로 왕황, 만구신 등과 내통했다.
게다가 사기의 내용을 보면 진희가 밖에서 모반하고 한신이 내부에서 동조하겠다 했는데 내통을 했다면 당연히 연락 등을 했을 것이며 상황을 살펴보았을 텐데 실제 한신이 죽은 것이 진희가 군사를 일으킨 후인지 전인지 정확히 알 수 없으나 군사에 있어서는 정점인 그가 모반을 위해 진희를 믿고 군사를 일으키도록 한 거라면 진희의 회답을 기다리는 사이에 벌써 그렇게나 빨리 진압되었다는 거짓을 모를 리가 없다. 게다가 정말 가담했다면 최소한 도망의 시도라도 하는 것이 정상인데 한신은 그냥 소하를 따라가기만 했을 뿐이다.
그리고 한신이 배신하려고 했다면 여후와 태자를 공격할 것이 아니라 군사를 일으켜서 나라를 세우거나 한고제를 암살했을 것이다. 그런데 직접적으로 한고제의 신상을 위협하거나, 가신을 제거하거나, 병력을 일으킨 것이 아닌 여후와 태자에 대한 습격이 한신의 역모의 근거가 되었다. 허나 이 방법은 한나라를 전복시키기 위한 적절한 수단이 아니다.
용병술에서 극에 달했던 한신이 한나라를 배신하려고 하는데 고작 여후와 태자를 죽이는 방법으로 역모를 시작하는 것보다 병력을 일으켜 주요 거점을 공격/장악하는 게 제대로 된 방법이다. 따라서 한고제가 사망하자 여후가 한나라 개국공신을 숙청하고 정권을 장악하는 모습에 비추어 한신이 모반을 꿈꾼 것이 아니라 배신의 근거조차 여후가 조작하여 여씨천하의 최대 방해물인 한신을 숙청한 것으로 보는 것이다.
위에서 언급한 모든 문제들을 넘어가더라도 정치에 대해서는 까막눈이었으나 군사에 대해서는 통달한 그인데 갑자기 미치지 않고서야 진희가 유방을 상대로 성공할 리가 만무한, 무모한 계획과, 본인은 여후와 태자 세력을 제압한다는 영양가 없는 계획을 세웠다는 건 매우 이상한 부분이다. 위에서 언급한 대로 시기적인 문제를 그런대로 이유를 붙여 넘어가더라도 반란의 계획 자체가 이상한 것이다.
게다가 당시 상황으로는 유방은 반란을 제압하는 데 여념이 없었고 모두 진압하였으며 여후는 권력을 잡기 위해 위협이 되는 세력을 제거할 계획을 짜고 실제로 옮기고 있었다. 특히나 여후는 모략으로 많은 이들을 죽였는데 그 대표적인 게 팽월이다. 물론 팽월은 한신보다 후에 죽었지만.
그래서 회음후로 강등되어 실권조차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가장 두려운 존재였기에 여후가 가장 먼저 한신을 죽이기 위해 모략으로 진희의 반란에 연루시켰다는 것으로 여기고 한신이 정말로 모반에 가담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 경우에는 한신이 미쳐서 진희에게 가담했고, 경비도 제대로 하지 않아서 정보가 여후에게 흘러들어갔으며, 거짓 조서를 내려 각 관아의 죄인들과 관노를 풀어주고서는 순순하게 소하를 따라가 제 발로 사지에 들어갔다는 소리가 된다.
실제로 당시 유방은 진희를 토벌하러 갔으며 후에 돌아올 때 한신이 죽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한편으로는 씁쓸했다고 하는 대목이 나온다. 사실상 유방 또한 한신이 많은 심기를 건드리긴 했지만 엄청난 공적과 더불어 오래동안 함께 해왔고, 특히나 파촉에 짱박혀 있던 자신에게 항우에 대한 반격을 시작할 수 있도록 결정적인 도움을 준 사람이 다름 아닌 한신이기 때문에 애증이 생긴 것인지 항상 유방 자신은 한신으로부터 군권을 박탈하고 강등을 시킬지언정 직접 죽이려고 하지 않았다.
유방 자신 또한 한신이 위협은 되지만 반란을 일으키지는 않을 거라는 생각을 했을 것이고, 그렇기에 회음후로 강등시켜놓고 계속 구금만 시켜 놓은 것이며, 한신이 참수당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가장 씁쓸한 반응을 보였던 사람이 바로 유방이었다. 게다가 한신은 모반을 꾀했다고 그냥 참수만 했는데, 실제 모반은 일으키지 않고 고향으로나 되돌아가게 해달라는 팽월은 죽일 뿐만 아니라 젓갈까지 담그어 제후들에게 보내었으니.
오히려 그 시기에 한신으로부터 가장 위험을 느낀 것은 유방이 아닌 여후였다. 유방이 오래 살지 못할 것은 짐작하는 내용이고 유방이 죽고 나면 자신이 권력을 잡고자 하는데 거기에 가장 큰 걸림돌이 되는 게 한신이니. 한신의 최후는 유방이 아닌 여후가 계략을 짜서 소하를 이용해 한신을 죽인 셈이다.
소하가 여후 등에 의해 죽음을 면했던 근거도 "애초에 배신하려면 한참 전에 했을 것이다"라는 말로 의혹을 면하는데, 이말을 그대로 적용하면 한신 또한 배신하려면 가왕이 되었을 시절이나 초왕 시절에 충분히 하고도 남았다. 한신이 한나라 영토의 2/3를 정벌하고 그의 군사력이 항우와 유방의 군력을 합친 것보다 많거나 또는 비슷했기 때문이다. 소하가 위 발언으로 숙청을 면했는데, 한신이 위에 해당하지 않았던 것도 한신의 배신이 진실인지 의문을 갖게 한다.
그리고 한신의 반란을 고변했다는 사람에 대한 기록도 이상할 정도로 없다. 한신의 반란이라는 중대한 사건을 고변해서 이를 막았다면 큰 공을 세운 것이므로 당연히 상당한 포상을 받았어야 마땅한데, 고변 과정이나 받은 포상에 대한 기록은 고사하고 이름이나 그 정체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으며, 단지 '한신 밑에 있던 사람'이, 구체적인 내용도 없이 "한신에게 죄를 지어서" 처벌받게 되자 고변했다고만 언급된다. 이 때문에 한신의 반란이 드러난 과정 자체가 조작된 것이 아닌지에 대한 의심도 있다.
평가
1. 역사상 최고의 지휘관
지금 장군께서는 서하를 건너 위왕을 사로잡았고, 하열을 연여에서 사로잡았습니다. 단번에 정형을 내려와 하루 아침에 조군 20만을 깨뜨리고, 성안군을 베어 죽임으로써 그 이름이 온 나라에 들리고 그 위엄이 천하에 떨쳤습니다. - 이좌거, 사기(史記) 회음후열전(淮陰侯列傳)
또한 신(臣)이 듣건대, "용기와 지략이 주인을 놀라게 하면 몸은 위태롭고, 공로가 천하를 덮는 사람에게는 상을 주지 아니한다"라고 하였습니다. 이제 족하(足下)는 주인을 놀라게 한 위엄을 가지고 있으며 상을 받을 수 없는 정도의 공로를 끼고 있으니 초(楚)에 귀부하면 초인(楚人)들이 믿지를 않고, 한(漢)에 귀부하여도 한인(漢人)들이 두려워 떱니다. 족하(足下)는 이것을 가지고 어디로 돌아가려 합니까? - 괴철, 사기(史記) 회음후열전(淮陰侯列傳)
기록상 전공(戰功)과 초한전쟁에서의 활약상을 보면 한신은 세계 전쟁사를 통틀어도 흔히 찾을 수 없는 전설적인 명장이다. 더 중요한 사실은 이러한 승리를 항우의 군대를 상대로 거두었다는 점이다. 물론 항우와 직접적으로 붙은 적은 없으나 개인의 용력이나 용병술에 있어서 마찬가지로 역사상 최고반열에 손꼽는 항우가 키우고 선별한 명장들을 차례로 무너뜨렸고 해하전투에서는 결국 그 항우에게 처음이자 마지막 패배를 안겨주었다.
위대한 군사 지휘관으로서 수많은 병사를 자신의 손발처럼 지휘하는 화려한 군사적 재능으로 한나라의 대장군이 되어 항우를 무너뜨리고 유방에게 천하통일의 위업을 안겨주는 데 가장 결정적인 역할을 했으며 세간에서도 장자방이 있어도 한신이 없었다면 통일은 어려웠을 것이라는게 보통이다.
항우는 개인의 무력 뿐만 아니라 용병술에 있어서도 역대 최고를 다투는 지휘관이었기에 아무리 그가 여러가지 실책을 하더라도 한신이 없었다면 전쟁의 승리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결국 전쟁은 상대방을 죽여야하고 상대의 군대를 제압해야하는데 항우가 전쟁 의외의 모든 면에서 덜떨어진 측면을 보여주었어도 그 누구도 항우와 맞서는건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한신이야 말로 그야말로 최고의 상대를 대상을 본인의 역량을 유감없이 보여준 역사 최고의 지휘관이라는 말이 아깝지 않다.
한신은 팽성대전의 참패 이후, 열악한 한나라의 상황 속에서 고작 3만의 오합지졸로 군세를 시작하였는데, 수 년만에 위(魏), 대(代), 조(趙), 연(燕), 제(齊), 초(楚)의 여섯 개의 나라(六國)를 무너뜨렸으며, 두 명의 왕을 사로잡았고, 한 명의 왕을 참살했다. 그 과정에서 우회 공격, 배수진, 수공, 망치와 모루 등 온갖 방식의 전술을 능수능란하게 구사했고, 모든 전투에서 이겼다. 또한 당시 중국의 지배자이자 군사적 능력으로는 역시 역대 최고의 장군 중 하나로 꼽히는 항우를 참살하는 데 가장 큰 공을 세운 인물이기도 하다.
이처럼 군사와 전투에 관련해서는 같은 시대의 그 어떤 인물도 따라오지 못할 업적을 세웠기에, 그의 군사적 능력과 전공에 관해서는 이견을 제시할 수 없다. 당대에도 마찬가지 평가를 받았는데, 사기에서는 그가 제나라를 정벌하여 제왕(齊王)이 되었을 때는 고작 3만의 오합지졸로 시작했던 군세가 유방과 항우의 세력을 능가할 정도로 강성해졌고, 그 이름이 온 나라에 들리고 그 위엄을 천하에 떨쳤다고 서술한다.
용저를 참살한 이후에는 그 이전까지 회유라는 개념을 가지지 못했던 항우조차도 전투를 이길 수 없다는 두려움에 사신으로 무섭을 보내 한신을 회유하려 했을 정도이니, 한신의 영향력이 어느 정도였는지 알 수 있다.
특히 한신의 진가는 압도적으로 불리한 상황에서도 모든 전투를 대승으로 이끌었다는 점에 있는데, 그 예로 정보 수집을 통해 적군의 동향을 읽고 단 한 번의 싸움으로 나라를 멸망시키고 적 군주를 사로잡은 안읍 전투, 적장 진여의 심리를 정확히 꿰뚫어보고 상황에 맞는 전술을 사용해 배수진(背水陣)이라는 금기를 오히려 대전략으로 승화시켜 '전략적 배수진'의 정의를 만들어 낸 정형 전투, 지형지물과 부하 지휘관들을 적재적소에 활용해 제(齊)와 초(楚) 두 나라의 연합군을 완벽하게 제압하고 초한대전의 향방을 결정지은 유수 전투 등이 있다.
사실 한신이 무너트린 여섯 개의 나라들은 이름만 국가지, 전국시대 열국의 후예나 군벌이 항우의 후원을 받아 급조된 정권들이었다. 다만 이 당시에는 국가라는 개념이 아주 명료하게 정립되어 있지 않았다. 그래서 이후 출현하는 중앙집권형 국가들보다 국가 체제 자체가 미비했고, 국가의 동원력은 물론 군사의 질 같은 수준도 아주 높았다고 볼 수 없다.
물론 배수진의 일화에서 보듯이 병력의 질이 낮은 것은 한신의 군대도 마찬가지였으며, 거기에 더해 한신의 세력은 병력의 숫자도 밀리고, 원정군이었으므로 대체로 피로가 누적된 상황이었다. 이렇게 대체로 상대보다 유리할 게 없는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전략적 불리함을 극복하고 무패의 군단이 되어 천하를 평정한 것은 한신의 능력이었다고밖에 볼 수 없다. 다만 중요한 것은 하향평준화라고 하더라도 중요한 것은 상대는 항우였고 한신이 아니었다면 그 누구도 항우와 맞대결한다는 생각은 감히 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하지만 그 이상으로 재밌는 부분은 한신이라는 사람의 개성이다. 한신은 젊은 시절에는 불량배의 가랑이 사이를 기어다니고 아낙네에게 밥이나 빌어먹고 사는 무능한 사내로 평가받았고, 항우의 군단에 있을 때도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다. 한의 대장군이 되기 전에는 대군은 커녕 부하를 다루는 위치도 못 됐던 사람인데, 유방의 밑에서 한번 기회를 잡자 천연덕스러울 정도로 완벽하게 지휘관으로서 자신의 능력을 내보였다.
현대의 일반기업에서도 낙하산 인사라고 손가락질 받으며 조직을 운영하기에 어려움을 겪는 것이 당연한 상황인데 병사들을 이끌고 중국 대륙의 반을 종단하는 대원정을 성공시킨 것은 조직 관리에서도 범인은 상상하기 힘든 영역이라 할 것이다. 거기에다 병법으로 말하자면 타고난 명장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단순히 야전 지휘관으로서의 활약만 엄청난 게 아니라, 이좌거의 조언에 따라 연나라를 싸움 없이 항복시키는 등 전략적인 식견도 출중했다.
정치적인 판단력에서 항우와 마찬가지로 미진하였으나 단순히 전투뿐만 아니라 큰 관점에서 전쟁을 바라보며 지휘하는 능력도 매우 출중했다. 요컨대, 항우가 돌격대장이 및 선봉 혹은 대규모의 부대를 이끄는 야전지휘관으로 최고라면 한신은 그러한 항우의 능력에 더하여 전세나 형세 판단 및 전투를 하지 않고도 이기는 방법등에 대해서도 빠삭한 그야말로 군주 밑의 원수로써의 능력이 출중했다고 볼 수 있다. 문제는 군략을 제외한 부분에서 너무 능력치가 떨어졌다는 것이지만.
2. 너무나도 개념 없는 처세술
한신이 번쾌의 집에 들렀다. 번쾌는 한신을 대왕이라 칭하고, 한신을 대접하며 종종걸음으로 나아가고 물러났다. 한신이 번쾌의 집을 나서며 혼잣말하였다. "내가 살아서 번쾌와 같은 반열에 서는구나." - 한서
(괴철) "대체로 듣건대, '하늘이 주는 것을 가지지 않으면 도리어 허물을 받고, 때가 이르렀는데 시행하지 않으면 도리어 재앙을 받는다'라고 하였습니다. 바라건대 족하(足下)는 이를 깊이 고려하십시오." 한신이 말했다. "한왕이 나에게 아주 후하게 대우하였는데, 내가 어찌 이익을 향하여 의(義)를 배반할 수 있겠소?" - 사기(史記) 회음후열전(淮陰侯列傳)
한신은 군대를 통솔하는 영역에서 만큼은 동시대의 또다른 명장이자 한나라의 숙적 항우를 제외하면 적수가 없을 정도로 신들린 전략, 전술적 역량을 보여주었지만, 본인의 주 분야인 전투, 전략 이외의 영역에서는 오히려 모자란 모습을 많이 보여주었다. 특히 왕이나 신하로서 국가의 수성기나 안정기에 보여준 정치력이나 행태는 부족함이 많았고 아쉬운 모습을 많이 남겼는데, 사실 처세 이전에 한신은 일평생 너무나도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하여 타인을 전혀 배려하지 않는 행태로 악명을 쌓았다.
주군인 유방과 주변인들 입장에서 한신은 심히 자기 중심적으로 행동하여 동료의 목숨을 해하고 국가의 대전략을 어그러 뜨리는 트롤짓을 하고 막바지에는 진짜 배신에 가까운 명령불복종을 하면서 한나라를 불안하게 할 일을 몇 차례 해놓고, 막상 정말로 유방과 맞먹을 수 있는 결정적인 순간에는 유방의 은혜를 잊을 수 없다며 그를 배신하는 걸 꺼렸다.
이같은 형편없는 처세술은 본인의 죽음으로 이어진다. 당대의 모두가 두려워했던 항우를 제압하고 그 항우마저 두려워했던 자가 한신이었으나 유방의 두려움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이었다. 다만 한신은 이러한 점에 대해서 도통 이해하지 못하였고 용병과 전략을 운용하는 데는 천재였으나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거나 움직이게 하는 데 있어서는 최악이었다.
한신이 유방에게 붙잡힐 때 대단한 전투라도 있었을 것 같지만 한신은 이 지경까지 와서도 정치력이 빵점이었던 탓에 그렇지 않았다. 유방이 자신의 성을 방문하겠다고 하자 혹시 역모를 의심하는 것 아닐까 무서워진 한신은 유방이 싫어하는 종리말의 목만 가지고 호위병 없이 유방에게 나아갔다. 유방은 두 말 할 것도 없이 한신을 형틀에 묶어서 한나라 수도로 잡아갔다. 이게 상황의 전부이다.
한신은 모든 문제를 자기 생각대로 판단했다. 자기 감정에 따라 문제를 일으키고, 결정적인 순간에서도 이성적으로 자신에게 유리한 판단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감성적이고 이기적으로 판단했다. 항우가 보낸 무섭의 제안을 거절한 이유도 다른 인물들이 그랬듯 정치적인 고려가 아니라 "항우는 나를 형편없이 대했으나, 유방은 나를 인간적으로 잘 대해주었다." 같은 감정적인 이유였다.
그런데 정작 그런 말을 한 한신은 이전에 유방이 세운 제나라 화친책을 자기 멋대로 어그러뜨려 최측근 참모 역이기를 죽게 만들었다. 이래놓고는 자기가 제나라를 이겼으니 제나라 왕위를 달라고 하였다. 결과적으로 역이기의 사망은 고제의 권위에 흠집을 내는 행동이었고 더불어 불필요한 피를 흘리게 만들고 서로 원수나 다름없던 제와 초가 연합한다는 최악의 결과를 불러왔다.
과정이야 어찌됐든 용저의 삽질 덕분에 결과적으로는 한신이 이겼으니 망정이지 잘못하여 패배했다면 한신 본인도 죽거나 하북이 평정되고 항우는 최후의 반전을 기대해볼 수 있게 되는 것은 물론 눈엣가시 같은 팽월을 효과적으로 견제할 수 있게 되고 자칫하면 제후들이 또 다시 유방과 항우 사이에서 간을 보게 하는 상황이 만들어져 유방에게 불리한 일만 생겼을 것이다.
게다가 고제가 위급할 때 무려 2년씩이나 원군은 안 보내면서 반란을 핑계삼아 왕위를 요구한 것은 협박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한신 본인에게 그럴 의도가 없었다고 해도 가장 중요한 국면에서 상사의 명령에 거래를 시도한 것부터가 문제이다. 딜을 걸더라도 일단 상황을 파악하고 걸어야 하는데도 한신은 초대형 사고를 친 직후에 유방이 한신을 가장 필요로 했을 때 딜을 걺으로써 고제를 격분하게 만들었다.
애초 유방이 아무리 필요해서 그랬다고는 해도 옹치 같은 놈조차 열후에 봉하였고 한신보다 못한 공적을 지닌 관영, 조참 등도 나름대로 상을 받았고 제나라를 역이기가 회유한다고 해서 한신의 공적이 가려질 리도 없었다. 오히려 이후에도 초와 한은 몇 번 전투를 더 벌였고 최후의 결전인 해하 전투까지 남아있었기에 한신이 활약할 기회도 더 남아있어서 비록 제나라를 피를 흘리지 않고 회유하게 될 역이기나 소하 등에게 공적을 뺏긴다고는 해도 공신이 되지 못할 일은 결코 없던 터라 가만히만 있어도 될 것을 괜히 유방의 심기만 건드린 꼴이 됐다.
군주인 유방에게 단단히 밉보여 언제 토사구팽 당할지 모르는 불안한 상황인 만큼 이제라도 정신 차리고 자기가 살 길을 찾았어야 했지만 한신은 이 지경에서도 상황 파악이 전혀 안 된 건지 유일한 출구 전략이 될 수 있는 항우와의 연대를 유방과의 개인적인 의리 때문에 거부했고 이는 적인 항우의 몰락과 죽음은 물론 본인의 죽음에도 일조했다.
물론 가왕이니 제왕이니 한들 당시 한신은 한나라 소속이었으며 한신의 제나라 왕 작위와 한신의 병력은 유방에게서 받은 것이었고 유방의 충신인 조참 등이 그의 명령을 따르면서도 감시하는 형태였기 때문에 유방을 적으로 돌리고 거병하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란 의견도 있다.
또한 항우가 마냥 믿을 만한 인물인가 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애초 항우는 한신을 홀대해 떠나게 만들었고 유방이 먼저 관중을 점령했음에도 의제와의 약속을 어기고 멋대로 관중의 왕이 되었고 그 과정에서 홍문연에서 유방을 죽이려 한 게 항우이다.
거기다 원래는 의제가 해야 했던 제후들의 분봉도 무시하고 자기가 해버린 것도, 의제가 거슬린답시고 죽여버린 것도 항우였기에 항우의 악명과 더불어 항우가 믿을만한 놈이 못된다는 생각은 이미 전 중국에 퍼져 있었고 이이제이를 노려서 유방과 한신이 둘다 자멸하거나 한신이 유방과 척을 치게 만들 속셈으로 자신의 이익을 위해 독립을 권유한 것이니 한신 입장에서 무작정 신뢰할 수 없는 것도 당연하기는 하다.
사실 현재 상황은 누가 봐도 유방이 더 유리했으니 굳이 한신이 위험을 무릅쓰고까지 항우를 편들 이유도 없었다. 거기다 그 항우를 위기에 빠뜨린 게 한신 본인이었으니 만약 항우와 손을 잡고 유방을 치더라도 곧바로 항우에게 뒤통수를 맞을 가능성이 높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한신은 신중하게 자신의 미래를 고민하며 저울질해 보고 항우의 제안을 거부한 것이 아니라 단순히 항우는 날 홀대했는데 유방은 날 잘해줬지 같은 어처구니 없는 이유로 거부한 것이다. 거기다가 처음 손쓰기만 어렵지 막상 실행만 하면 한신은 최적의 위치에서 우세를 점할 수 있음에도 무작정 거병조차 포기해 버렸다.
물론 예양이나 고순의 사례처럼 충신은 좋은 평가를 듣기 마련이기는 하지만, 그 같은 선택이 본인이 죽는 결과를 초래한 것은 물론 아군을 팀킬해놓고는 왕 자리 내놓으라고 요구하는 등 예양이나 고순의 순수한 충성심이나 의리와 비교하면 한참 모자라는지라 진정한 충신으로 보기도 어렵다.
거기다 항우의 제안을 물리친 건 둘째치더라도 정작 본인의 선택이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 전쟁이 끝나면 유방이 자신을 어떻게 대할지 같은 건 전혀 고민하지 않는 모습을 보였다. 그저 막연히 내가 이만큼 공을 세웠는데 설마 폐하가 날 죽이겠어? 같은 게 전부였고 이 같은 안일한 생각은 결국 토사구팽과 본인의 죽음으로 돌아왔다.
그렇다고 한신이 마냥 인정 없고 냉혹한 면모만 보여준 것은 아니다. 충분한 기반과 계기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유방과의 의리를 이유로 괴철의 반란 제안을 거듭 거절한 것과 자신이 밥을 빌어먹던 사람들에게 상을 내리고, 자신을 찾아온 종리말을 내치지 않고 숨겨준 일, 일개 패전국의 신하에 불과한 이좌거를 스승으로 모시고 거듭 예를 표하며 자문을 구한 일 등 한신은 형식상이나마 의리있고 겸손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문제는 그 의리와 겸손한 태도가 자신이 유리한 상황에서만 발휘되었지 자신에게 조금이라도 불리해지면 항상 이기적인 행태를 보여주었다.
당장 처음 한나라로 들어갔을 때부터 죽을 뻔한 상황에서 하후영과 소하가 목숨도 살려주고 치속도위라는 중책을 맡겼지만 길어야 3달 정도 만에 유방이 크게 쓰지 않는다며 탈영해 버렸으며, 괴철의 말에 넘어가 동료인 역이기를 죽게 만들고 적국을 멋대로 늘려버린 행태나 공적이나 상하관계가 명확하기는 했어도 한때 같은 전선에서 싸웠던 전우 번쾌와 관영을 두고 "내가 저 따위 놈이랑 어떻게 동급이란 말이냐?" 같은 말을 서슴없이 했다.
특히 바로 위의 인용문에서 나오는 번쾌 홀대는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는데, 번쾌는 여후 집안의 사람이라 정치적 입지나 발언권이 매우 뛰어나 한신을 구명해줄 수 있는 몇 안 되는 인물이었고, 유방에게 초왕 자리를 빼앗기고 한나라 수도에 포로처럼 잡혀있는 한신을 번쾌는 왕처럼 깍듯하게 배려하고 존중하며 대접했다.
한신에게 있어 번쾌는 말 그대로 제발로 그물에 뛰어든 물고기였고 그 관계를 잘 유지만 했어도 다시 왕으로 복귀하는 것은 무리더라도 비참한 말년까지는 피하게 해줄 수도 있었음에도 제 손으로 관계를 파토냈다. 이쯤 되면 토끼가 죽어서 사냥개가 삶아진 게 아니라, 사냥개가 자기 몸에 된장 바르고 삶아달라 시위하는 수준이다.
또 본인은 밥을 빌어먹었던 정장이 자신을 돌보는 것을 그만두자 군자가 아니라고 꾸짖었으면서 자신의 보전을 위해 의탁하던 종리말을 죽게 했고, 죽기 직전에 괴철이 자신에게 반란을 사주했다고 불어버려서 괴철을 위기로 몰아넣었다. 이는 결국 자신에게 도움이 되거나 자신을 도우려 한 사람을 스스로 차버린 것이다.
일각에서는 한신이 끝끝내 거병을 하지 않았고 유방이 잡으러 왔을 때도 무장조차 안 하다가 순순히 포박된 것을 근거로 충신이라고 평하기도 하지만 이건 정치력이나 처세술의 문제라고 봐야지 정말로 한신이 충신이었을 가능성은 낮다. 물론 대우도 제대로 안 해주는데 가만히 있으라는 이야기는 아니고 자신이 공을 세운만큼 대우를 받는 게 합당하긴 하지만 공을 세우려고 아군조차 팀킬하고 군주가 위기의 상황인데 왕위를 달라고 이야기하는 건 아예 격이 다른 문제다.
유방은 이성왕을 숙청하는 등 공신들을 견제하는 작업을 했고 그 결과 팽월 등이 숙청당했고 소하, 번쾌 같은 최측근들까지 의심하여 죽이려는 면모를 보였다. 때문에 이 같은 행동은 유방이 토사구팽의 대명사가 되는데 일조하기도 했고 팽월 등을 숙청한 것에 대해서는 대부분 부정적으로 본다.
그런데 이들과 한신을 동일하게 묶기 어려운 것이 한신 숙청에 관련된 인선만 봐도 고제가 견제했고, 소하가 협력했고, 여후가 제거했고, 장량이 소하에게 상을 줄 것을 청했으며 그 과정에서 한신을 변호하거나 소하에게 그랬던 것처럼 제대로 귀띔해준 사람이 전혀 없었다.
이걸 다시 보면 황제는 물론 대신들에게도 단단히 찍혔다는 말이 된다. 그리고 과거에나 현대에나 팽월 등을 숙청하거나 영포가 위기감을 느껴 거병하게 만들고 측근까지 숙청하려던 유방의 행태에 대해서 비판하는 경우는 있어도 한신의 경우에 관해서 만큼은 그를 비판하는 사람들이 거의 없다. 누가 봐도 한신의 잘못이 명확하기 때문. 한신은 사람을 모으고 그들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는 능력이 부족했다.
조, 위, 연, 제 4개의 나라를 무찌를 정도의 공을 세웠으면 분명히 한신의 아래에도 여러 인재가 있었을 것이고, 그런 인재들을 자신의 편으로 만드는 것도 능력이다. 무엇보다도 그것을 제대로 보여준 게 고제이다. 고제는 형식상 초나라의 밑에서 성장했지만, 원정 도중에 장량, 역이기, 관영 등을 직속 수하로 얻으며 그 세력을 불려나갔다. 이좌거나 괴철의 사례를 보면 한신이 인재를 포섭하려는 시도를 아예 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유방에게는 한참 못 미치는 수준이었다고 볼 수 있다.
한신에게는 신하로 삼을 만큼 능력있는 사람들이 주위에 거의 없었다. 기껏해야 괴철과 이좌거 등 일부 참모진이 전부고 부장급 인물들은 대부분 유방에게 충성을 바치는 데다 지휘관급들도 조참, 관영 등 유방의 최측근인 사람들 뿐이었다. 그래서 한신이 반란을 일으키면 이들이 합류할 가능성은 없었다.
그 와중에 이좌거도 유방의 지시로 산둥성 일대에 둔전을 개척하는 임무로 빠진 뒤 그곳에서 천수를 누렸다는 이야기도 있다. 즉, 고제는 한신을 그나마 도와줄 사람까지도 빼낼 정도로 눈이 좋았고 한신의 태도를 교정해 줄 조언자는 한 명도 없었으며 기껏 있다 간 괴철은 바람만 넣고 갔으니 사람 복이 없어도 너무 없었다.
단순히 운이 없어 주변에 훌륭한 사람이 없이 쓸데없이 아첨만 하는 사람만 붙었다고 하기도 뭐한 것이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유명한 권력자 옆에는 항상 저절로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기 마련인데 그들 중에는 당연히 능력있는 인재도 있겠지만 아첨만 해서 득만 보려는 소인배도 많다.
이런 다양한 종류의 사람들 속에서 인재를 골라내어 중용하고 소인배는 내쳐버리는 것이야말로 권력자의 가장 중요한 능력이다. 사람 잘 쓰기로 유명한 유방의 곁이라고 충신들만 몰려들고 소인배들이 없었겠는가? 유방은 소인배를 알아보고 쓰지 않았고, 한신은 소인배를 알아보지 못하고 그냥 날뛰게 놔둔 것에서 둘의 용인술의 역량 차이는 이미 천지 차이였다.
또한, 제후왕 자리, 그것도 특별한 위상과 의미를 가진 제왕과 초왕의 작위를 한신은 겉으로 내세울 명분이나 혈통도 없이 손에 넣었다. 그 자리에 오르기까지의 과정도 당시의 가치관으로 보면 부적절하기 짝이 없었고 단순히 가치관 문제 이전에 한신의 무리한 제나라 정벌로 초한전쟁이 1~2년은 더 연장되어 버렸으며 이 과정에서 희생된 인명도 결코 적은 숫자가 아니다.
이러니 한신에 대해 단순한 질투 이상의 악감정이 들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인데 번쾌의 일화에서 보듯이 한신은 시종일관 공신들을 무시하고 오만한 태도를 취했다. 자신의 공훈을 믿고 교만해진 탓에 자신에게 독이 되는 행동을 서슴없이 저지른 것이다. 거기에 자신의 보전을 위해서 종리말에게 죽어달라고 말한 것부터가 상황 판단도 문제지만 인망이 없다는 것을 완벽하게 보여준다.
오히려 종리말을 어설프게 껴안은 탓에 본인의 왕 자리까지 뺏긴 것을 보면 더더욱. 차라리 처음부터 고제에게 종리말을 붙잡아 가든가 의리가 문제라면 끝까지 껴안든지 차라리 모른 척하고 풀어주는 것이 상책이었음에도 기껏 보호할 때는 언제고 고제가 종리말을 잡으려 들자 뒤통수를 친 것이다. 종리말이 격분해서 자살할 정도로 이기적인 짓이었으니 욕을 먹어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다.
한신의 행보를 보면 눈에 띄는 부분이 있는데, 바로 어중간함이다. 한신은 열렬한 충신 되지 못했는데 그렇다고 극단적으로 냉혹하고 철두철미한 모략가가 되지도 못했다.
제나라 왕을 탐한 것처럼 야심이 없는 것도 아니었으나 막상 지금이 최적의 기회니 거병을 하라는 괴철의 제안을 거부하는 등 본인이 살 길을 찾아봐야 함에도 손을 쓰는 건 거부했고 종리말을 숨겨주듯 자잘한 인정이 없는 것도 아니었으나 하후영처럼 막상 그를 끝까지 보호해준 것도 아니라서 자신에게 위기의 순간이 다가오자 종리말을 죽게 만든 것처럼 인정을 위해 한몸을 바친 것도 아니었다.
생각은 있는 듯 하며 여러 사람들에게 도발적인 행보를 보이면서도 막상 실행은 안 하고 꾸물거리며 여러 사람들의 부아만 돋구고 말았다. 즉 열렬한 충신도, 극단적인 모략가도, 대단한 선인도, 지독한 악인도 되지 못했다. 그저 모든 것이 어중간했다. 일단 정말로 반역을 저지른 건 아니라지만 또 반역자로 몰려도 할 말이 없을만한 짓들을 했기에 팽월처럼 억울하다고 보기도 어렵다.
어떻게 보면 지나칠 정도로 인간적이었는데 그의 능력을 보면 천하를 뒤흔든 천하대장군이자 영웅적인 모습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사람됨은 묘한 소인배스러움이 느껴지는 신기한 경우이다. 이런 점 때문에 간혹 한신에 대해 "영웅의 모습과 소인배의 모습이 섞였다"라는 식으로 보는 사람들도 있다.
시바 료타로는 자신의 소설 항우와 유방에서 한신의 이런 이중성을 부각시켰는데 작중 괴철이 한신에 대해 "무인으로서는 걸출한 재능의 소유자지만 다른 면에서는 백치같은 인물"이라고 평가하는 부분이 있다.
관심병을 가지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아무리 그래도 상식으로는 좀 설명하기 힘든 표모걸식과 과하지욕을 일으킨 점, 집극랑 따위나 하면서도 계책을 올렸던 점, 겨우 한나라로 건너갔음에도 직위가 부족하자 탈주 및 파업을 하며 이목을 끌려 하는 점, 유방에게 공에 대한 상을 자꾸 요구하지만, 정작 강압적 행동에는 무르고 모반은 하지 못하는 모습 등을 고려하면 짐작할 수 있다.
자기 공을 내세우지만 결국 유방의 우위를 인정한 다다익선 일화에서도 그런 해석이 가능하다. 그러나 현실의 관심병이 그렇듯 당하는 이들 입장에서는 매우 피곤하게 되고, 결국 역적 지망생으로 몰려 최종적으로 그를 몰락의 길로 이끌었다고 볼 수 있다.
결론적으로 한신은 능력 자체는 뛰어나지만 군공이 쌓여갈수록 자신의 능력을 믿고 교만해졌으며 군사적 재능에 비해 정치적으로 사람을 부릴 줄 모르며 처세술의 부재로 인해 서서히 주변 사람들의 인망을 잃어갔다. 군사적 재능 하나만으로 한의 대장군이 되어 왕의 자리까지 오른 그가 그 능력 때문에 토사구팽당해 비참하게 죽어갔다는 점은 항우와 매우 비슷하다.그나마 항우는 본인이 실권자이기라도 했지 한신은 유방의 수하이면서도 처신을 잘못해 본인의 신세를 망치고 말았다.
3. 역사서의 평가
●진평이 말하였다. "폐하의 제장들 중 용병술이 한신을 뛰어넘는 인물이 있습니까?"
●황상(유방)이 말하였다. "용병술은 한신을 따라갈 사람이 없소."
- 사기(史記) 진승상세가(陳丞相世家)
●만약 한신이 도리를 배우고 겸양의 미덕을 발휘하여 자기를 공을 과시하지 않고, 자기의 재능을 과신하지 않았다면, 그가 세운 공은 아마도 주나라 천 년 왕조의 기틀을 마련한 주공(周公), 소공(召公), 태공(太公) 등이 세운 공훈에 비견되어 후세들로부터 혈식(血食)을 받아먹으며 받들어졌을 것이다.
●이렇게 되려고 힘쓰지 않고, 천하의 정세가 이미 정해진 뒤에야 반역을 꾀했으니, 일족이 멸망한 것은 역시 당연한 일이 아닌가?
- 사마천, 사기(史記) 회음후열전(淮陰侯列傳)
●세상에서 어떤 사람은 한신이 첫째로 큰 계책을 세웠다고 하니, 고조와 더불어 한중(漢中)에서 군사를 일으켜 삼진(三秦)을 평정하고, 드디어 군사를 나누어 가지고 북쪽으로 가서 위표(魏豹)를 사로잡고, 대(代)를 빼앗았으며, 조나라(趙)를 무너뜨렸고, 연(燕)을 위협하였으며, 동쪽으로 가서 제나라(齊)를 공격하여 이를 소유하고 남쪽으로는 초를 해하(垓下)에서 멸망시켰으니, 한나라(漢) 왕조가 천하를 소유할 수 있던 것은 대개 한신의 공로입니다.
●그가 괴철(蒯徹)의 유세를 거절하고 고조를 진구(陳丘)에서 환영한 것을 보면, 어찌 반란할 마음이 있었겠습니까? 오랫동안 직책을 잃어 앙앙불락(怏怏不樂)하다가 드디어 패역의 구렁텅이로 빠진 것입니다. 무릇 노관(盧綰) 같은 자는 고조와 같은 고향이라는 옛날의 정리(情理)를 가지고 연나라에서 왕 노릇을 했는데, 한신은 열후가 되어 조회에나 참석하니 이것은 고조가 한신에게 잘못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신 사마광은 그런 한신을 고조가 속이는 꾀를 써서 진구에서 사로잡았으니, 이것은 고조가 잘못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한신 역시도 죄를 받을만한 일을 했습니다.
●애초에, 한이 초나라(楚)와 형양(衡陽)에서 서로 대치하고 있는데, 한신은 제를 멸망시키고 돌아와서 보고도 하지 않고 스스로 왕이 되었으며, 그 후에 한이 초를 추격하여 고릉(固陵)에 이르러서는 고조가 한신과 더불어 초를 공격하기로 기약했었는데 한신은 오지 않았습니다. 당시에 이미 고조는 한신을 사로잡을 마음이 있었지만, 다만 힘이 부족했을 뿐입니다. 천하가 평정되고 나서는, 대체 한신을 다시 믿을 이유가 무엇이 있겠습니까?
●무릇 때를 틈타서 이익을 취하려는 것은 시정잡배의 생각이고, 공로를 돌리고 은덕에 보답하는 것이 선비나 군자들의 마음입니다. 한신은 스스로가 시정잡배의 뜻을 가지고 그 몸을 이롭게 하면서, 정작 다른 사람에게는 선비나 군자의 마음을 기대했으니 이는 어려운 일이 아닙니까?
- 사마광, 자치통감(資治通鑑)
●한나라 고조가 천하를 얻은 것은 모두 한신의 힘인데, 만약 한신으로 하여금 괴철의 꾀를 들어 써서 제(齊)나라의 강함을 근거삼아 솥발처럼 세 곳에 할거하여 서로 대치하였다면 고조가 비록 천명이 있었다 하더라도 그 형세가 매우 어려웠을 것이니, 역시 반드시 곤궁(困窮)한 뒤에야 얻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한신은 본디 배반할 마음이 없었는데 오로지 고조가 그의 능력을 두려워하고 미워하여 반드시 죽이려고 하였기 때문에 분격(憤激)하여 반모(反謀)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비록 그러나 한신의 공은 제사를 지내지 않을 수 없는데 그 집에 살아남은 이가 없게 하였으니, 고조는 진실로 한신을 저버림이 있습니다.
- 이맹현, 성종실록, 5년(1474) 8월 10일(임진) 5번째 기사
●한 고조가 공신을 대우함을 있어 처음에는 옳게 하지 못하였습니다. 다만 그것으로 천하를 취하려고만 했을 뿐 잘 어거하는 도는 알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한신(韓信)이 가왕(假王)되기를 청한 것은 참람하고 방종한 마음을 가지고 임금의 마음을 의심케 함을 면치 못하였고, 고제(高帝) 역시 마지못해 그의 청을 들어주고는 후일을 도모하려는 생각을 면치 못하여, 상하가 서로 의심한 끝에 결국은 보전하지 못하였습니다. 이것이 '나는 새가 다 없어지니, 좋은 활도 쓸모가 없게 됐다.'는 탄식이 있게 된 까닭입니다.
- 안처성, 중종실록, 2년(1507 2월 13일(정해) 2번째 기사
●한신은 이미 재능 때문에 고제가 꺼렸고 여후(呂后) 또한 총애하는 심이기(審食其)와 더불어 한신과 팽월(彭越)을 죽이려고 도모했었습니다. 그러므로 팽월에 있어서는 사인(舍人)을 시켜 무고하게 하여 죽였고 한신에 있어서도 그렇게 한 것이니, 소위 '진희(陳豨)를 시켜 모반하게 했다.'는 것은 곧 사인의 아우 사공(謝公)이란 자가 고발한 말입니다. 주자는 일찍이 말하기를 '한신의 반역은 나타난 증거가 없다'고 했고, 여조겸(呂祖謙)이 십칠사상절(十七史詳節), 대사기(大事記)를 편수할 적에 모두 한신이 모반하려다가 주벌당했다는 것으로 말하자 주자는 '사람을 잘못 죄에 빠뜨린 것이다'고 했었습니다.
●대개 진희가 대(代)의 정승으로 부임할 적에 따라간 빈객(賓客)의 수레가 1천 승(乘)이었는데 주창(周昌)이 빈객이 불법인지를 조사하라고 청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말이 진희에게까지 걸리게 되자 진희가 주벌당할까 두려워하여 모반한 것이니, 한신에게서 나온 일이 아님이 매우 분명합니다. 주자가 지극히 은미한 내용을 추찰해 보고서 《강목》에 '여후가 회음후(淮陰侯) 한신을 죽이고 삼족을 멸했다'고 특서한 것입니다.
●여후와 심이기는 평소에 제장들을 없애려고 했었기 때문에 고제가 붕(崩)했을 적에 비밀로 하고 발상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 때에 진평(陳平)과 주발(周勃)은 군사 20만을 거느리고 노관(盧綰)에게 붙어 연(燕)에 있었고 관영(灌嬰) 또한 군사 10만을 거느리고 낙양(洛陽)에 있었는데 역상(酈商)이 심이기를 달래어 '만일 제장들을 족주(族誅)한다면 주발과 관영이 회군하여 그대들을 씨도 남기지 않을 것이다'고 말하므로 이에 발상하였던 것입니다.
●또한 한서 형법지(刑法志)를 고찰해보면 '한신과 팽월을 벨 적에 여후가 우선 혀를 모두 베도록 했다' 했으니, 이는 자신의 추잡한 행실을 말할까봐 두려워서 그렇게 외람하게 형벌을 쓴 것이 아니겠습니까.
- 유희춘(柳希春)
●한신이 어찌 군신의 의리를 안 사람이겠습니까. 한왕(漢王)과 함께 초나라(楚)를 치기로 기약해놓고도 오지 않았습니다.
- 김우옹(金宇顒)의 반박
●초래(草萊)에서 서로 의탁한 사이는 평상시의 군신 사이와는 다릅니다. 그 당시에 한나라 신하들이 한왕을 족하라고 불렀으나 이것이 어찌 평상시 군신의 예이겠습니까. 한신이 기약을 어기고 오지 않은 것은 진실로 죄가 있는 일입니다마는, 제(齊)나라 전부를 차지하여 천하를 삼분(三分)한 형세가 되었을 적에 괴철(蒯徹)이 거듭 꾀었는데도 '내 어찌 이득을 좇아 의리를 저버리겠는가' 하고 잘라서 말했으니, 이는 그의 늠름한 대절(大節)이 드러난 부분입니다.
●또, 항우를 처음 패배시켰을 때 한왕이 시급히 제왕(齊王)의 성으로 들어가 정예병을 모조리 빼앗고 다시 초왕(楚王)으로 봉했지만 조금도 불평하는 기색이 없었으므로 선유(先儒)들은 '그가 스스로 의심을 품고서 사로잡았으니 이는 진실로 한왕의 잘못이다' 하였는데, 사마천(司馬遷)과 반고(班固)는 한나라의 신하이기 때문에 곧바로 쓰지 못한 것이고, 뒷날의 사마공과 대계(戴溪) 또한 그가 모반하였다는 것을 믿었습니다.
●온공(溫公: 사마광)은 성격이 순후하기는 하지만 그다지 사리에 밝지는 못하여 평상시의 군신의 예를 고집하여 초래에서 서로 의탁한 사람을 책망한 것입니다. 한신이 죄없이 사로잡혀서 열후(列侯)로 강등되어 번쾌(樊噲)와 같은 서열에 든 것이 부끄러워서 불만스럽고 무료해 한 적은 있었겠지만, 모반했다고 한다면 심하게 무함한 것입니다.
- 유희춘의 재반박, 선조실록 8권, 7년(1574 2월 5일(경술) 1번째 기사
●한 고조가 한신을 죽인 것은 대체로 혜제(惠帝)가 어리고 약했기 때문에 후환이 있을까 염려하여 그랬던 것이다. 만약 혜제도 문제(文帝)처럼 영명(英明)했다면 필시 한신 등을 죽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 효종, 효종실록 4권, 1년(1650 7년) 7월 28일(기묘) 2번째 기사
●한나라 고조가 운몽(雲夢)에서 거짓으로 놀다가 한신(韓信)을 사로잡은 것은 정도(正道)가 아닌 듯하다. 진평(陳平)의 계략은 진실로 정도가 아니고, 한신 또한 그르다. 경포(黥布)에 대해 말한 것과 군사를 일으키고 장수를 보낸 일은 어찌 사리에 맞는 말이겠는가?
●또 무섭(武涉)을 사양하여 돌려보냈을 때를 당하여 '나를 먹여 주고 나를 입혀 주었다'는 말은 이미 전국(戰國) 때의 여풍(餘風)이 있음을 면하지 못한다. 그러나 한신의 재주는 과연 성질이 사납고 교만한 까닭에 반심(反心)이 이미 싹텄었으니, 그 형세가 길 수 없었다. 한나라 고조의 일은 부득이한 것이었다. 그러나 일찍이 한나라 고조가 그를 성심(誠心)으로 대우하였었는데, 어찌하여 이 지경에 이르렀는가?
- 순조, 순조실록 11권, 8년(1808 11월 19일(경진) 1번째 기사
●무릎을 꿇었다고 한신을 겁쟁이라고 봐선 안 된다. 무릎을 꿇을 때는 두 가지 경우가 있다. 하나는 놀라서 간이 콩알만 해지고 정신이 멍해져서 털퍼덕 하고 무릎을 꿇는 경우다. 이런 사람은 겁쟁이다. 다른 하나는 위로 뛰어오르기 위해 무릎을 꿇는 경우다. 나중에 높이 뛰어오르기 위해 무릎을 꿇는 사람이라면 분명 영웅이다. 화가 치민다고 덥썩 깨물고 죽어도 놓지 않는다면 개나 다름없는 사람이다.
- 보양(栢楊)
●한신은 한 시대의 명장이자 최고의 공신이었습니다. 그는 꿋꿋하게 곤경을 버티고 일어나 전투에서 뛰어난 공을 세웠습니다. 하지만 그는 백전백승하여 최고의 위치에 올랐다가 침몰하고 말았습니다. 그는 유방을 배신할 수 있었을 때 충성을 지켰으며, 반란이 성공할 가능성이 가장 적을 때 모반을 꾀했습니다. 혹자는 한신의 모반이 (날조된 혐의라)절대로 불가능하다고 하고, 혹자는 모반의 증거가 확실하다고 주장합니다. 또 혹자는 그가 핍박을 당해 최후의 발악으로 모반을 일으켰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는 모두 중요하지 않습니다. 한신은 영웅 시대의 영웅으로서 치욕을 참았으며, 끊임없이 노력했습니다. 가끔씩 우유부단하고 이해득실에 노심초사했지만, 후세인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겨 주었습니다. 그의 일대기는 음미할수록 깊은 감동을 주는 동시에 음미하는 이를 심사숙고하게 만듭니다.
- 이중톈, 초한지 강의 pp.70 中 4.
기타
●한신의 유명한 일화 중 하나인 과하지욕 일화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뒷 이야기가 있다. 후한시대 문헌인 풍속통의에 따르면 이 과하지욕 당시 상대편에서 한신을 모욕할 때 말이 미묘하게 다른데 풍속통의(風俗通義)에 인용된 한신을 모욕하는 말은 다음과 같다. 회음의 한 소년이 한신을 모욕하며 말했다: "그대는 비록 아리땁고 고울지라도, 오히려 긴 칼을 차고 다니는구나(淮陰少年有侮信者, 曰: 君雖姣麗, 好帶長劍)." 여기서 쓰는 한신의 외모를 묘사할 때 쓰이는 표현이 교려(姣麗)인데 교(姣)는 주로 여성의 아름다움을 묘사할 때 사용되는 표현이다. 설문해자에서 '교(姣)'는 단순히 '아름답다(好)'로 정의되지만, 실제 문헌에서는 여성적 미모를 강조하는 경우가 많다. '려(麗)' 역시 아름다움을 뜻하나 중성적이지만, 이 둘이 결합된 용어인 교려는 여성스러운 미모를 강조하는 의미로 해석된다. 멀리 갈것도 없이 현대 중국어에서도 이 단어는 '예쁘다'라는 뜻으로 사용되며 바이두 백과 교려(姣丽) 예시 항목에도 한신의 일화가 요염하다던지, 절세 미녀를 칭찬하는 교려의 의미 예시들 가운데 수록되어 있다. 풍속통의(風俗通義)에서 소년은 한신이 남성적 기질이 부족하다는 모욕으로 한신을 여성에 비유하며 그의 외모와 행동(칼 차고 다님) 사이의 괴리를 풍자했는데 이는 한신이 남성적 기질이 부족하다는 모욕이긴 하지만, 한신의 외모를 두고 극히 요염한 미녀를 수식하는 말을 쓴건 흥미로운 부분이다. 애초에 한신의 남성성이 조롱 받은건 단순히 한신이 놀고 먹는 백수여서가 아니라 한신의 외모 자체에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남성성이 없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한신(한왕)과 동시대에 활약했던 동명이인으로 본명이 똑같은 한신(韓信)이었다. 구분하기 위해 보통 이 문서에서 소개한 회음후 한신은 더 유명하니까 그냥 '한신'으로, 그리고 한왕 한신은 '한왕 신'이나, '희신'(姬信)으로 구분해 쓰기도 한다. 같은 시대에 이름이 같은 두 사람이 존재하고 동시에 기록되어서 사기를 처음 보는 독자들에겐 얘기가 이상복잡해지는 주요 요인이다. 이 때문에 인터넷이 활성화되기 이전의 초한시대 관련 창작물에서는 두 한신을 혼동해서 행적을 섞어버린 실수를 저지른 경우가 상당히 많다. 예를 들어 고우영 화백은 고우영 십팔사략에서 한신을 한(韓)나라 왕족 출신이라고 잘못 설명했다. 참고로 두 한신 모두 기원전 196년 1월에 사망했다.
● 한신이 왕이 되어 다스렸었던 제나라와 초나라는 이전에 천하를 통일한 진나라 바로 다음 가는 국력을 자랑한 두 강국이다. 진나라에 의해서 통일되고 다시 여러 군웅이 나눠먹었던 초한쟁패기를 겪은 다음의 국가이니 과거 전국시대만큼의 국토나 국력을 지니고 있던 것은 아니었지만 정통 6국의 이름을 그대로 계승한 특별한 위상을 가진 국가였다. 한때 유방의 주군이었고 유방에게 항우를 토벌할 최고의 대의명분을 제공해 준 초의제는 본래 '초회왕'이었다. 항우의 시해로 인해 끊어졌던 초왕의 지위를 한신이 받았으니 이는 형식적으로 초의제의 자리를 한신이 이어받은 것이었다. 그 밖에도 고조 유방과 그의 측근들, 한신 자신도 초나라 출신이었고 최대의 적수였던 항우의 나라였던 만큼 정서적으로 각별한 의미가 있다.
● 중국 역사에서는 물론 한국사에서도 뛰어난 장수를 칭송하면서 '옛날 한신과 같다'라는 표현이 자주 쓰였다.
● 한신이 장기를 만들었다는 전설이 있다. 불가능하다는 의견은 '상'에 해당하는 코끼리는 먼 옛날 초나라 땅에 코끼리가 살았으니 가능하지만 '포'는 대포인데 이 당시에 화약 무기는 없었다. 화약은 12세기 남송 시절에나 등장하는 것으로 이때의 화포로 몽골군의 진격을 몇 차례나 막아냈을 정도인데 이것이 기원전에 있었더라면 모를리가 없다. 하지만 시대를 거쳐가면서 종이나 여러 요소가 바뀌어왔다고 주장한다면 얼추 내용을 맞출 수 있기는 하다. 가령 투석기와 노포는 이미 춘추전국시대부터 널리 쓰였다.
가능하다는 의견은 장기 항목에서도 설명하고 있는 것처럼 장기의 포(包)는 그 한자(砲) 자체의 의미에서부터 꼭 화약을 이용한 화포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투석기든 노포든 탄환을 쏘아보내는 무기를 모두 포괄하는 개념이므로 '한신이 살던 시절에는 화약이 없었는데 어떻게 포가 있을수 있느냐'는 지적은 완전히 빗나간 것이다. 오히려 이 부분은 화약의 보급으로 비 화약 사격병기가 모두 도태되면서 포라고 하면 당연히 화포를 생각하게 된 현대인의 고정관념이 지나치게 개입된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이 점은 기원전 1세기 전한시대의 서적에도 장기(샹치에 대한 언급이 있고, 6세기 북주시대의 서적에는 아예 규칙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이 있는 점을 보아서도 명백하다. 어쨌든 장기(샹치) 자체는 차투랑가에서 파생된 다양한 게임 중 하나로써 그 탄생과정에 한신이라는 특정 인물이 개입했다는 구체적인 증거는 전혀 제시되고 있지 않으므로, 이런 종류의 전설과 민담에서 흔히 그러하듯 유명인의 행적에 신비감을 부여하기 위해 (또는 해당 놀이에 신비감을 부여하기 위해) 만들어진 이야기일 가능성이 높다.
한고제가 전국을 통일하고 난 후 역모의 의심을 받은 한신이 감옥에 투옥되었을 때, 평소부터 그를 존경해오던 병졸이 그에게 말했다. "장군, 장군께서 저에게 병법을 전수해 주신다면 저는 그것을 대대로 전수하여 장군의 이름을 빛내도록 하겠습니다." 처음에는 그의 부탁을 수락하지 않았으나, 그 병졸이 몇 번이나 간곡히 청하자 한신은 마침내 그에게 3일 후에 다시 이야기하자고 하였다.
3일 후 한신은 그 병졸과 마주앉았다. 그리고는 땅바닥에 있던 큰 네모 판자에 적군과 아군 진영을 나누고 거기에 각각 32개의 칸을 그려넣은 다음, 중간에 강을 경계로 삼고 그 안에 "초하(楚河), 한계(漢界)"라고 적어 넣었다. 또 한편에는 16개의 붉은 종이조각을 배치한 후, 수(帥), 사(仕), 상(相), 차(車), 마(馬), 포(炮), 병(兵) 등의 글자를 써넣고 다른 한편에는 16개의 푸른 종이조각을 배치한 후, 장(將), 사(士), 상(象), 차(車), 마(馬), 포(炮), 졸(卒) 등의 글자를 써넣었다.
그 모습을 본 병졸은 갸우뚱하며 "이것이 병법입니까?"라고 말했다. 그러자 한신이 대답했다. "이 72개의 작은 사각형을 우습게 보지 말거라. 여기에는 천군만마의 대전투를 모두 담을 수 있다. 이 16개의 종이조각은 각각 자기 편을 대표하는데, 용병에 있어서도 문무를 바탕으로 상하가 일치단결하여 전반적인 계획을 적절하게 운용하면 어떤 변화에도 능히 대처하여 백전백승할 수 있다. 이 방법에 정통한 후에 그것을 군사(軍事)에 응용하면 그대로 적용할 수 있어 천하에 적수가 없게 될 것이다."
이 말을 들은 병졸은 무릎을 꿇고 절한 뒤 한신을 스승으로 삼고 병법을 배웠다. 한신이 죽은 뒤 병졸은 공직을 사양하고 병법 연구에만 몰두하였다. 편의상 그는 종이에 장기판을 그리고 종이 조각 대신 나무조각을 깎아 장기알을 만들었다. 그 후 이것은 사회에 널리 전파되어 지금까지도 유행하고 있다.
▶️ 國(나라 국)은 ❶회의문자로 国(국)은 간자(簡字), 囗(국), 囶(국), 圀(국)은 고자(古字), 囲(국), 围(국)은 동자(同字)이다. 國(국)은 백성들(口)과 땅(一)을 지키기 위해 국경(口)을 에워싸고 적이 침입하지 못하게 했다는 데서 나라를 뜻한다. ❷회의문자로 國자는 ‘나라’나 ‘국가’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國자는 囗(에운담 위)자와 或(혹 혹)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或자는 창을 들고 성벽을 경비하는 모습을 그린 것이다. 그래서 이전에는 或자가 ‘나라’라는 뜻으로 쓰였었다. 그러나 누가 쳐들어올까 걱정한다는 의미가 확대되면서 후에 ‘혹시’나 ‘만일’이라는 뜻으로 가차(假借)되었다. 그래서 지금은 여기에 囗자를 더한 國자가 ‘나라’라는 뜻으로 쓰이고 있다. 그러다 보니 國자는 성벽이 두 개나 그려진 형태가 되었다. 참고로 國자는 약자로는 国(나라 국)자를 쓰기도 한다. 그래서 國(국)은 (1)어떤 명사(名詞) 다음에 쓰이어 국가(國家), 나라의 뜻을 나타내는 말 (2)성(姓)의 하나 등의 뜻으로 ①나라, 국가(國家) ②서울, 도읍(都邑) ③고향(故鄕) ④고장, 지방(地方) ⑤세상(世上), 세계(世界) ⑥나라를 세우다 따위의 뜻이 있다. 용례로는 나라 백성을 국민(國民), 나라의 법적인 호칭을 국가(國家), 나라의 정사를 국정(國政), 나라의 안을 국내(國內), 나라의 군대를 국군(國軍), 나라의 이익을 국익(國益), 나라에서 나라의 보배로 지정한 물체를 국보(國寶), 국민 전체가 쓰는 그 나라의 고유한 말을 국어(國語), 한 나라의 전체를 전국(全國), 자기 나라 밖의 딴 나라를 외국(外國), 양쪽의 두 나라를 양국(兩國), 외국에서 본국으로 돌아감 또는 돌아옴을 귀국(歸國), 국가의 수를 세는 단위를 개국(個國), 조상 적부터 살던 나라를 조국(祖國), 제 나라를 위하여 목숨을 바침을 순국(殉國),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을 애국(愛國), 그 나라에서 가장 뛰어난 인물은 둘도 없다는 국사무쌍(國士無雙), 나라의 수치와 국민의 욕됨을 이르는 말을 국치민욕(國恥民辱), 나라의 급료를 받는 신하를 국록지신(國祿之臣), 나라의 풍속을 순수하고 온화하게 힘을 이르는 말을 국풍순화(國風醇化), 나라는 망하고 백성은 흩어졌으나 오직 산과 강만은 그대로 남아 있다는 국파산하재(國破山河在) 등에 쓰인다.
▶️ 士(선비 사)는 ❶회의문자로 하나(一)를 배우면 열(十)을 깨우치는 사람이라는 데서 선비를 뜻한다. ❷상형문자로 士자는 '선비'나 '관리', '사내'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士자는 허리춤에 차고 다니던 고대 무기의 일종을 그린 것이다. 士자는 BC 2,000년경인 오제(五帝)시대에는 감옥을 지키는 형관을 뜻했고, 금문에서는 형관들이 지니고 다니던 큰 도끼를 말했다. 그러니 士자는 본래 휴대가 간편한 고대 무기를 그린 것이라 할 수 있다. 지금은 학문을 닦는 사람을 '선비'라고 하지만 고대에는 무관(武官)을 뜻했던 것이다. 士자에 아직도 '관리'나 '군사', '사내'와 같은 뜻이 남아있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그래서 士자가 부수로 쓰일 때는 '선비'나 '관리', '남자'라는 뜻을 전달하게 된다. 그래서 士(사)는 (1)장기에 있어서 궁을 지키기 위하여 궁밭에 붙이는 두 개의 말 (2)중국 주(周)나라 때 사민(四民)의 위이며 대부(大夫)의 밑에 처해 있던 신분 등의 뜻으로 ①선비(학식은 있으나 벼슬하지 않은 사람을 이르던 말) ②관리(官吏), 벼슬아치 ③사내, 남자(男子) ④군사(軍士), 병사(兵士) ⑤일, 직무(職務) ⑥칭호(稱號)나 직업의 이름에 붙이는 말 ⑦군인(軍人)의 계급 ⑧벼슬의 이름 ⑨벼슬하다 ⑩일삼다, 종사하다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선비 유(儒), 선비 언(彦)이고,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장수 장(將), 백성 민(民)이다. 용례로는 병사를 지휘하는 무관을 사관(士官), 선비의 아내 또는 남자와 여자를 사녀(士女), 선비의 힘 또는 병사의 힘을 사력(士力), 장교가 아닌 모든 졸병을 사병(士兵), 병사의 대오를 사오(士伍), 학식이 있되 벼슬을 하지 않은 선비를 사인(士人), 군사를 사졸(士卒), 군사의 기세 또는 선비의 기개를 사기(士氣), 선비로서 응당 지켜야 할 도의를 사도(士道), 선비들 사이의 논의를 사론(士論), 선비와 서민 또는 양반 계급의 사람을 사민(士民), 일반 백성을 사서(士庶), 선비의 풍습을 사습(士習), 문벌이 좋은 집안 또는 그 자손을 사족(士族), 학문을 연구하고 덕을 닦는 선비의 무리를 사류(士類), 군사와 말을 사마(士馬), 선비의 기풍을 사풍(士風), 양반을 일반 평민에 대하여 일컫는 말을 사대부(士大夫), 사회적 지위가 있으며 덕행이 높고 학문에 통달한 사람을 사군자(士君子), 교육이나 사회적인 지위가 있는 사람을 인사(人士), 하사관 아래의 군인을 병사(兵士), 절의가 있는 선비를 지사(志士), 조국과 민족을 위하여 성심껏 장렬하게 싸운 사람을 열사(烈士), 의리와 지조를 굳게 지키는 사람을 의사(義士), 기개와 골격이 굳센 사람을 장사(壯士), 세상을 피하여 조용히 살고 있는 선비를 은사(隱士), 학덕이 있고 행실이 선비처럼 어진 여자를 여사(女士), 의욕이나 자신감이 충만하여 굽힐 줄 모르는 씩씩한 기세를 떨쳐 일으킴을 일컫는 말을 사기진작(士氣振作), 사기가 하늘을 찌를 듯이 높음을 일컫는 말을 사기충천(士氣衝天), 그 나라에서 가장 뛰어난 인물은 둘도 없다는 뜻으로 매우 뛰어난 인재를 이르는 말을 국사무쌍(國士無雙), 수양이 깊어 말이 없는 사람 또는 말주변이 없어서 의사 표시를 잘못 하는 사람을 일컫는 말을 무언거사(無言居士), 백금을 받은 용사라는 뜻으로 매우 큰 공을 세운 용사를 이르는 말을 백금지사(百金之士), 산림에 묻혀 사는 군자를 두고 이르는 말을 산림지사(山林之士), 세속밖에 홀로 우뚝한 훌륭한 사람을 일컫는 말을 특립지사(特立之士), 궤변을 농하여 국가를 위태로운 지경에 몰아넣는 인물을 일컫는 말을 경위지사(傾危之士), 보잘것없는 선비 또는 식견이 얕은 완고한 사람을 일컫는 말을 일개지사(一介之士), 나라의 앞일을 걱정하는 기개가 높고 포부가 큰 사람을 일컫는 말을 우국지사(憂國之士), 세상일을 근심하는 사람을 일컫는 말을 우세지사(憂世之士), 좋은 일에 뜻을 가진 선비를 일컫는 말을 유지인사(有志人士), 무슨 일이든지 한마디씩 참견하지 않으면 마음이 놓이지 않는 사람 또는 말참견을 썩 좋아하는 사람을 일컫는 말을 일언거사(一言居士), 조그마한 덕행이 있는 사람을 일컫는 말을 일절지사(一節之士), 나라를 잘 다스려 백성을 편하게 할 큰 뜻을 품은 사람을 일컫는 말을 지사인인(志士仁人), 바위 굴속의 선비라는 뜻으로 속세를 떠나 깊은 산 속에 숨어사는 선비를 이르는 말을 암혈지사(巖穴之士), 천명을 받아 천자가 될 사람을 보필하여 대업을 성취시키는 사람을 일컫는 말을 좌명지사(佐命之士), 항우와 같이 힘이 센 사람이라는 뜻으로 힘이 몹시 세거나 의지가 굳은 사람을 비유해 이르는 말을 항우장사(項羽壯士) 등에 쓰인다.
▶️ 無(없을 무)는 ❶회의문자로 커다란 수풀(부수를 제외한 글자)에 불(火)이 나서 다 타 없어진 모양을 본뜬 글자로 없다를 뜻한다. 유무(有無)의 無(무)는 없다를 나타내는 옛 글자이다. 먼 옛날엔 有(유)와 無(무)를 又(우)와 亡(망)과 같이 썼다. 음(音)이 같은 舞(무)와 결합하여 복잡한 글자 모양으로 쓰였다가 쓰기 쉽게 한 것이 지금의 無(무)가 되었다. ❷회의문자로 無자는 ‘없다’나 ‘아니다’, ‘~하지 않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無자는 火(불 화)자가 부수로 지정되어 있지만 ‘불’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 갑골문에 나온 無자를 보면 양팔에 깃털을 들고 춤추는 사람이 그려져 있었다. 이것은 무당이나 제사장이 춤추는 모습을 그린 것으로 ‘춤추다’가 본래의 의미였다. 후에 無자가 ‘없다’라는 뜻으로 가차(假借) 되면서 후에 여기에 舛(어그러질 천)자를 더한 舞자가 '춤추다'라는 뜻을 대신하고 있다. 그래서 無(무)는 일반적으로 존재(存在)하는 것, 곧 유(有)를 부정(否定)하는 말로 (1)실체가 존재하지 않는 것. 공허(空虛)한 것. 내용이 없는 것 (2)단견(斷見) (3)일정한 것이 없는 것. 곧 특정한 존재의 결여(缺如). 유(有)의 부정. 여하(如何)한 유(有)도 아닌 것. 존재 일반의 결여. 곧 일체 유(有)의 부정. 유(有)와 대립하는 상대적인 뜻에서의 무(無)가 아니고 유무(有無)의 대립을 끊고, 오히려 유(有) 그 자체도 성립시키고 있는 듯한 근원적, 절대적, 창조적인 것 (4)중국 철학 용어 특히 도가(道家)의 근본적 개념. 노자(老子)에 있어서는 도(道)를 뜻하며, 존재론적 시원(始原)인 동시에 규범적 근원임. 인간의 감각을 초월한 실재이므로 무(無)라 이름. 도(道)를 체득한 자로서의 성인(聖人)은 무지(無智)이며 무위(無爲)라고 하는 것임 (5)어떤 명사(名詞) 앞에 붙어서 없음의 뜻을 나타내는 말 등의 뜻으로 ①없다 ②아니다(=非) ③아니하다(=不) ④말다, 금지하다 ⑤~하지 않다 ⑥따지지 아니하다 ⑦~아니 하겠느냐? ⑧무시하다, 업신여기다 ⑨~에 관계없이 ⑩~를 막론하고 ⑪~하든 간에 ⑫비록, 비록 ~하더라도 ⑬차라리 ⑭발어사(發語辭) ⑮허무(虛無) ⑯주검을 덮는 덮개 ⑰무려(無慮), 대강(大綱)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빌 공(空), 빌 허(虛)이고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있을 존(存), 있을 유(有)이다. 용례로는 그 위에 더할 수 없이 높고 좋음을 무상(無上), 하는 일에 막힘이 없이 순탄함을 무애(無㝵), 아무 일도 없음을 무사(無事), 다시 없음 또는 둘도 없음을 무이(無二), 사람이 없음을 무인(無人), 임자가 없음을 무주(無主), 일정한 지위나 직위가 없음을 무위(無位), 다른 까닭이 아니거나 없음을 무타(無他), 쉬는 날이 없음을 무휴(無休), 아무런 대가나 보상이 없이 거저임을 무상(無償), 힘이 없음을 무력(無力), 이름이 없음을 무명(無名), 한 빛깔로 무늬가 없는 물건을 무지(無地), 대를 이을 아들이 없음을 무자(無子), 형상이나 형체가 없음을 무형(無形), 아무런 감정이나 생각하는 것이 없음을 무념(無念), 부끄러움이 없음을 무치(無恥), 도리나 이치에 맞지 않음을 무리(無理), 하는 일 없이 바쁘기만 함을 무사분주(無事奔走), 한울님은 간섭하지 않는 일이 없다는 무사불섭(無事不涉), 무슨 일에나 함부로 다 참여함을 무사불참(無事不參), 즐거움과 편안함에 머물러서 더 뜻 있는 일을 망각한다는 무사안일(無事安逸), 아무 탈없이 편안함을 무사태평(無事泰平), 재미나 취미나 없고 메마르다는 무미건조(無味乾燥) 등에 쓰인다.
▶️ 雙(두 쌍, 쌍 쌍)은 ❶회의문자로 双(쌍)의 본자(本字), 双(쌍)은 간자(簡字), 﨎(쌍)은 동자(同字)이다. 새 추(隹; 새)部에 새 추(隹; 새)部를 더한 새 두 마리와 又(우; 손)의 합자(合字)이다. 한 쌍의 새를 손에 잡고 있음의 뜻이 전(轉)하여 둘의 뜻이 되었다. ❷회의문자로 雙자는 '한 쌍'이나 '짝수'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雙자는 又(또 우)자와 隹(새 추)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소전에 나온 雙자를 보면 새 두 마리를 붙잡고 있는 모습이 그려져 있었다. 雙자는 이렇게 한 쌍의 새를 붙잡고 있는 모습으로 그려져 '한 쌍'이라는 뜻을 표현했다. '한 쌍'은 짝을 이루고 있는 '둘'을 의미한다. 그래서 雙자는 '한 쌍'이라는 뜻 외에도 '둘'이나 '짝수'나 '짝이 되다'라는 뜻을 갖게 되었다. 참고로 雙자는 획이 복잡하여 속자(俗子)로는 双(쌍 쌍)자가 쓰이기도 한다. 그래서 雙(쌍)은 ①두, 둘 ②한 쌍(雙) ③짝수 ④밭의 면적(面積) ⑤돛(배 바닥에 세운 기둥에 매어 펴 올리고 내리고 할 수 있도록 만든 넓은 천) ⑥성(姓)의 하나 ⑦견주다(어떠한 차이가 있는지 알기 위하여 서로 대어 보다) ⑧비견하다 ⑨서로 짝짓다 ⑩짝이 되다 따위의 뜻이 있다. 유의어로는 兩(두 량/양, 냥 냥/양)이고, 반의어로는 隻(외짝 척)이다. 용례로는 양쪽을 쌍방(雙方), 우열이 없이 여럿 가운데에서 둘이 다 뛰어나게 훌륭한 존재를 쌍벽(雙璧), 양손이나 두손을 쌍수(雙手), 같은 묏자리에 있어 합장하지 아니하고 나란히 쓴 남편과 아내의 두 무덤을 쌍분(雙墳), 두 다리를 쌍각(雙脚), 양쪽 어깨나 두 어깨를 쌍견(雙肩), 한 개의 알에서 두 마리로 나온 병아리를 쌍계(雙鷄), 서로 짝이 되거나 맞서는 관계를 쌍대(雙對), 나란히 붙어 있는 두 개의 머리를 쌍두(雙頭), 쌍방의 이익을 쌍리(雙利), 한 태에서 둘이 나온 아이 쌍둥이를 쌍생아(雙生兒), 수고로운 노동이나 방사 따위로 말미암아 생긴 피로를 해소하는 탕약을 쌍화탕(雙和湯), 쌍쌍이 오고 감을 이르는 말을 쌍거쌍래(雙去雙來), 두 나라가 서로 대등한 의무를 지는 협정을 이르는 말을 쌍무협정(雙務協定), 함께 잠자고 함께 날아간다는 뜻으로 부부를 이르는 말을 쌍숙쌍비(雙宿雙飛), 짝을 지어 다니며 직업적으로 중매를 하는 사람 또는 그런 중매를 일컫는 말을(雙童仲媒), 그 나라에서 가장 뛰어난 인물은 둘도 없다는 뜻으로 매우 뛰어난 인재를 이르는 말을 국사무쌍(國士無雙), 세상이 변하여 가는 것이 더할 수 없이 많고 심함을 이르는 말을 변화무쌍(變化無雙), 복은 거듭 오지 않으며 한꺼번에 둘씩 오지도 않음을 이르는 말을 복무쌍지(福無雙至), 양쪽에 다 이유가 있어서 시비를 가리기 어려움을 이르는 말을 양시쌍비(兩是雙非), 화살 하나로 수리 두 마리를 떨어뜨린다는 뜻으로 한 가지 일로 두 가지 이득을 취함을 이르는 말을 일전쌍조(一箭雙鵰) 등에 쓰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