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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심에서 두 치
11화 — 황철이라는 존재
대회 당일 아침, 만복이 학교에 일찍 나왔다.
목공실에 올라가서 선반에 올려둔 모형을 확인했다. 이상 없었다. 기둥 하나하나를 손으로 흔들어봤다. 꿈쩍도 안 했다. 만복이 안도의 숨을 내쉬고 포장 상자에 모형을 조심스럽게 넣었다.
복도로 나왔을 때 황철이 지나갔다.
둘이 눈이 마주쳤다.
황철이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대회 잘 나가."
빈 말이었다. 소리만 빈 게 아니라 눈도 비어 있었다. 만복이 대꾸하지 않았다. 지나쳤다.
복도 끝에서 은동이가 손을 들며 달려왔다.
"선배! 저도 왔어요. 응원하러요."
만복이 은동이를 봤다. 오늘은 사복을 입고 있었다. 줄무늬 티셔츠에 청바지. 배낭은 여전히 메고 있었다.
"부모님한테 허락 받았어?"
"할머니한테요. 괜찮으셨어요."
"학교 끝나고 오는 거야?"
"오늘 오전수업 끝나서요."
둘이 나란히 대회장으로 걸어갔다. 은동이가 포장 상자를 들겠다고 했다. 만복이 내줬다.
"무거우면 다시 줘."
"안 무거워요. 조심히 들게요."
은동이가 두 손으로 조심스럽게 상자를 들었다. 걷는 속도가 살짝 줄었다. 흔들리지 않게 신경 쓰는 게 보였다.
만복이 그 옆을 걸으면서 뭔가를 느꼈다. 뭔지 딱 꼬집어 말하기는 어려운 감각. 그냥, 옆에 있는 것 같은 느낌이랄까.
대회장은 학교 강당이었다.
여러 학교 작품들이 전시돼 있었다. 저마다 공들인 흔적이 보였다. 현대식 주택, 전통 한옥 모형, 상업 건물 모형. 다양했다.
만복이 자기 작품을 배치하면서 주변을 훑어봤다. 황철의 작품이 보였다. 3층 구조의 세련된 현대식 주택이었다. 유리창 모형까지 달려 있었다. 보기에는 화려했다.
은동이가 황철 작품 옆을 지나가다가 잠깐 멈췄다.
"은동아, 뭐 봐?"
"저 기둥이요."
은동이가 눈을 좁히며 황철 작품을 봤다.
"어때 보여?"
"……화려한데. 근데 2층 기둥이 살짝."
"살짝 뭐?"
"아무것도 아니에요." 은동이가 눈을 돌렸다. "우리 꺼 잘 놓아요."
만복이 작품을 전시대 위에 내려놓았다. 집성목 특유의 윤기가 형광등 빛을 받아 도드라졌다.
심사위원이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12화 — 심사와 결과
심사위원이 만복의 작품 앞에 섰다.
손으로 기둥을 가볍게 눌러봤다. 꿈쩍도 안 했다. 조금 더 힘을 줘서 흔들어봤다. 역시 안 흔들렸다.
심사위원의 눈이 관심 있어하는 눈빛으로 바뀌었다.
"집성목을 쓰셨나요?"
"네. 구조 안정성이 더 높아서요."
"설계는 직접 하셨어요?"
만복이 잠깐 망설였다. 옆에 서 있는 은동이를 봤다. 은동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파트너가 도와줬어요."
"파트너요?"
심사위원이 은동이를 봤다. 은동이가 고개를 숙였다.
"박은동입니다. 내년에 중학교 입학해요."
심사위원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초등학생이 설계에 참여한 건가요?"
"네. 할아버지한테 배운 설계 방법으로요."
심사위원이 작품을 다시 살펴봤다. 기둥 간격을 눈으로 재어봤다. 대들보 위치를 살펴봤다. 지붕 경사를 봤다.
"간격이 균일하고, 무게 배분이 정교하군요. 집성목을 이 수준으로 다듬는 솜씨도 탁월하고."
만복의 심장이 빨리 뛰었다.
심사가 끝나고 결과를 기다리는 시간이 제일 길게 느껴졌다.
은동이가 옆에서 조용히 앉아 있었다. 발을 살짝 움직였다. 긴장한 것 같았다.
"긴장해?"
만복이 물었다.
"조금요. 선배는요?"
"많이."
은동이가 픽 웃었다.
"잘 됐으면 좋겠다."
"응."
잠시 침묵.
"은동아."
"네."
"결과가 어떻든 고마워. 처음으로 제대로 완성한 거잖아."
은동이가 만복을 봤다. 만복은 앞을 보고 있었다.
"저도요." 은동이가 조용히 말했다. "할아버지한테 배운 거 누군가한테 쓸 수 있어서요."
결과 발표가 시작됐다.
동상. 은상. 그리고.
"금상. 청현중학교 강만복."
만복이 굳었다.
은동이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선배! 선배 금상이에요!"
"……진짜야?"
"진짜예요!"
만복이 천천히 일어나서 앞으로 걸어갔다. 상장을 받으면서 손이 살짝 떨렸다.
뒤돌아보니 은동이가 손뼉을 치며 웃고 있었다.
13화 — 대회 뒤의 황철
황철은 복도에서 혼자 서 있었다.
은상. 자기가 은상이었다. 3년 동안 대회마다 1등이었는데, 오늘 처음으로 만복한테 졌다.
손가락이 축축했다. 땀이 났다. 황철이 스스로도 몰랐다. 이게 억울함인지, 수치심인지, 아니면 다른 뭔지.
복도 창문으로 강당 안을 내다봤다. 만복이 은동이랑 나란히 서서 웃고 있었다. 상장을 들고. 그 조그만 초등학생이랑.
황철이 이를 갈았다.
초딩 덕분에 이긴 거잖아. 만복이 혼자 한 게 아니잖아.
그 생각이 마음을 파고들었다. 정당하지 않다. 만복 혼자의 실력이 아니다. 어른한테 배운 게 아니라 초등학생한테 도움받은 거잖아. 그게 뭐가 대단하냐.
황철이 복도를 돌아서 계단으로 내려갔다. 등이 아팠다. 자존심이 아팠다.
근데 동시에, 아주 조금, 뭔가 다른 것도 느꼈다.
만복 작품의 기둥이 흔들리지 않던 거. 심사위원이 '정교하다'고 했던 것. 자기 것보다 더 단단했다는 게 보였다.
황철이 자기 손을 내려다봤다.
내가 뭘 놓친 거지
14화 — 은동이, 전학 오다
3월 새 학기.
만복이 교실에서 내려오다가 1학년 복도에서 은동이를 발견했다.
중학교 교복을 입은 은동이. 양 갈래 머리는 여전했다. 배낭에는 여전히 종이들이 삐죽 나와 있었다. 신발은 새 것이었다. 근데 서 있는 자세가 어딘가 어색했다. 주변을 살피는 눈이 조심스러워 보였다.
만복이 계단에서 손을 들었다.
"야, 은동아!"
은동이가 고개를 들었다. 만복을 보자마자 얼굴이 환해졌다.
"선배!"
뛰어올 것처럼 발이 앞으로 나왔다가 멈췄다. 아마 중학교라서 긴장했겠지.
만복이 계단을 내려갔다.
"반이 어디야?"
"1학년 2반이에요."
"목공부 올 거지?"
은동이가 잠깐 망설였다. 주변을 한 번 둘러봤다. 3학년 복도 쪽을 봤다.
"황 선배도 있잖아요."
"내가 있잖아."
말이 먼저 나왔다. 생각하고 한 말이 아니었다. 만복도 살짝 당황했지만 시선을 돌렸다.
은동이가 잠깐 멍하다가 히죽 웃었다.
"……그럼 가입할게요."
"목공실은 3층이야. 방과 후에 와."
"알아요."
만복이 돌아서 계단을 올라가면서 뒤통수가 간지러웠다. 왜 그런 말을 한 거지. '내가 있잖아.' 뭐가 있다는 거야.
근데 가만히 있으라고 했으면 그 쪽이 더 이상했을 것 같기도 했다.
15화 — 목공부의 분위기
은동이가 목공부에 들어온 첫 날.
목공실에 2학년 부원들이 네 명 있었다. 모두 만복의 금상 소식을 알고 있었다. 만복이 은동이를 소개했다.
"설계 잘해. 작년에 같이 작품 만들었어."
"아, 소문으로 들었어요. 설계가 정밀했다던 그 애요?"
은동이가 고개를 꾸벅했다.
"잘 부탁드립니다."
부원들이 웃으며 받아들였다. 분위기가 나쁘지 않았다.
그러다가 황철이 들어왔다.
황철이 은동이를 봤다. 은동이가 황철을 봤다. 잠깐 정적이 흘렀다.
황철이 먼저 시선을 돌렸다.
"……1학년이 목공부에 들어왔네."
"네. 가입했어요."
은동이가 담담하게 말했다.
황철이 코웃음을 쳤다.
"초등학교 때 도면 그려본 거랑 실제 목공은 다른데. 여기서 다칠 수 있어."
"조심할게요."
"1학년이 3학년 부장 말에 어찌 대꾸를 그렇게 해."
만복이 끼어들었다.
"황철아. 은동이 설계 실력 알잖아. 대회에서 봤잖아."
"설계는 설계고, 목공은 목공이지."
황철이 목공실 안쪽으로 들어가며 말했다.
"눈에 거슬리는 짓은 하지 마. 여긴 내가 부장인 곳이야."
은동이가 그 뒷모습을 보며 조용히 있었다.
만복이 낮게 말했다.
"무시해."
"……응."
은동이가 배낭을 내리고 자리에 앉았다. 노트를 폈다. 오늘도 할아버지 노트였다.
16화 — 처음으로 혼자 온 날
그다음 주 화요일.
은동이가 방과 후에 목공실에 왔는데 만복이 없었다.
"선배 어디 갔어요?"
부원 한 명이 말했다.
"오늘 학교 일로 남아야 한다고. 좀 늦을 것 같다고 먼저 가라고 했는데."
은동이가 혼자 자리에 앉았다. 노트를 꺼냈다. 뭔가를 그리기 시작했다.
황철이 들어왔다.
은동이가 황철을 봤다가 다시 노트로 시선을 내렸다.
황철이 은동이 옆을 지나가다가 멈췄다. 노트를 내려다봤다.
"그게 뭐야."
"도면 연습이요."
"허."
황철이 한동안 보다가 자리를 잡았다. 자기 작업을 시작했다. 잠시 조용했다.
"야, 은동이."
"네."
"작년에 만복이 설계 네가 다 한 거야?"
"같이 했어요. 선배가 나무 다루는 건 혼자 다 하셨어요."
"근데 설계가 정밀했다고 하던데."
"할아버지한테 배운 거예요."
황철이 잠시 조용했다.
"그 노트가 할아버지 건 거야?"
"네."
황철이 더 물어보려다가 멈추더니 자기 작업으로 시선을 돌렸다.
만복이 들어온 건 한 시간 후였다.
"늦었다. 은동이 왔어?"
"왔어요."
만복이 은동이 옆에 앉았다. 은동이가 그린 도면을 봤다.
"오늘 이거 그린 거야?"
"네. 혼자 있어서요."
"뭐야, 3층짜리 설계야?"
"연습이에요. 할아버지 노트에 3층 계산법 있어서요."
만복이 도면을 찬찬히 봤다.
"……은동아, 이거 진짜 실제로 지을 수 있겠다."
"언젠간 진짜로 짓고 싶어요."
"건물?"
"응. 도서관 같은 거요. 할아버지처럼."
만복이 은동이를 잠깐 봤다가 도면으로 시선을 내렸다.
"짓겠다, 그때."
"선배가요?"
"같이."
은동이가 멈칫했다가 웃었다.
"……알겠어요."
17화 — 비가 오던 날의 대화
수요일에 비가 왔다.
방과 후 목공실에 남은 건 만복과 은동이뿐이었다. 다른 부원들은 비가 와서 일찍 갔다.
빗소리가 창을 두드렸다. 목공실 안은 나무 냄새와 빗소리로 가득했다.
은동이가 도면을 그리다가 연필을 내려놓았다.
"선배."
"왜."
"오늘 쉬는 시간에 1학년 애들이 저 좀 무시했어요."
만복이 대패를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무슨 얘기로?"
"공부도 잘하지 않고, 전교 1등도 아닌데 목공부에 왜 들어왔냐고요. 목공이 성적에 도움이 되냐고요."
"그 애들이 멍청한 거야."
"알아요. 근데 그래도 기분이 나빴어요."
만복이 대패를 내려놓고 팔꿈치를 작업대에 올렸다.
"그래서?"
"그래서 오늘 좀 속상해요. 선배한테는 말할 수 있을 것 같아서요."
창밖으로 빗소리가 더 거세졌다.
만복이 한동안 은동이를 봤다.
"나도 처음에 많이 무시당했어. 손재주는 좋은데 설계를 못 한다고. 목공부 부장이면서 작품을 계속 망가뜨린다고."
"그때 어떻게 했어요?"
"버텼어. 달리 방법이 없었어."
"그게 다예요?"
"그리고."
만복이 잠깐 멈췄다.
"은동이 만났지."
짧은 말이었다. 은동이가 만복을 봤다.
만복이 시선을 창밖으로 돌렸다.
"너 만나고 나서 처음으로 제대로 완성한 거잖아. 그니까 그 사람들 말이 다가 아닌 거야."
은동이가 한동안 만복을 바라봤다.
"할아버지가 그러셨어요. 집은 속일 수 없다고요. 잘 지어진 집은 오래가고, 엉터리 집은 언젠가 무너진다고."
"사람도 그렇겠다."
"그죠?"
빗소리가 잠잠해졌다.
만복이 다시 대패를 들었다. 은동이가 연필을 들었다.
그렇게 한동안 둘이서 조용히 작업했다. 이상하게 편안한 시간이었다. 비가 오는 날 목공실에 둘만 있는 것이, 왠지 자연스럽게 느껴졌다.
18화 — 황철의 제안
다음 주.
황철이 부원들을 모았다.
"미니 건물 짓기 대결 해보려고."
만복이 눈을 가늘게 뜨고 황철을 봤다.
"무슨 대결?"
"학교 화단에 폐자재로 작은 창고 짓는 거야. 팀 대 팀. 2주 뒤에."
"팀 구성이 어떻게 돼?"
황철이 입꼬리를 올렸다.
"내 팀이랑 만복이 너 팀. 내 팀은 3학년 부원 다 들어갈 거고. 만복이 네 팀은……"
황철이 은동이를 봤다.
"은동이 포함해서 하면 되지 않냐. 둘이서."
"다섯 명이랑 두 명이랑 공평해?"
"숫자 싸움이 아니라 실력 싸움인 거니까. 만복이 너 실력 자신 있잖아."
만복이 황철을 봤다. 황철의 눈빛이 모처럼 진지했다. 비웃는 눈이 아니었다. 무언가를 확인하려는 눈빛 같았다.
"은동아, 너는?"
만복이 은동이에게 물었다.
은동이가 잠깐 생각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해요. 해볼게요."
"진짜 둘이서 할 수 있어?"
"선배가 있잖아요."
만복이 황철을 봤다.
"하자."
황철이 고개를 끄덕였다.
"2주 뒤. 방과 후에."
19화 — 준비하는 2주
2주 동안 만복과 은동이는 대결 준비를 했다.
먼저 설계부터.
"창고니까 단순하지만 실용적이어야 해요. 비 안 새야 하고, 바람에 안 쓰러져야 해요."
은동이가 도면을 그렸다. 만복이 옆에서 봤다.
"기둥은 몇 개?"
"네 개. 사각 배치. 간격은 80센티."
"지붕 경사는?"
"25도. 이 지역 강수량 기준이에요."
만복이 고개를 끄덕이며 재료 목록을 적었다.
"집성목으로 하자."
"좋아요. 근데 폐자재라서 상태가 제각각일 수 있어요. 제가 골라볼게요."
"나무 보는 눈이 있어?"
"할아버지랑 많이 다녔거든요. 결 보는 법이랑 단단함 확인하는 법 알아요."
만복이 피식 웃었다.
"또 할아버지 노트."
"할아버지가 다 알려주셨으니까요."
다음 날부터 폐자재 더미에서 은동이가 나무를 골랐다. 통통 두드리며 소리를 듣고, 손으로 쓸어보며 결을 확인했다. 못 쓸 것 같은 건 옆으로 치우고, 쓸 수 있는 건 따로 쌓았다.
만복이 옆에서 보다가 말했다.
"야, 이거 어떻게 알아?"
"소리가 달라요. 단단한 나무는 맑은 소리 나고, 속이 빈 건 둔탁하게 나요."
만복이 나무를 두드려봤다. 정말 소리가 달랐다.
"할아버지한테 배운 거야?"
"응. 할아버지가 나무 고르는 데 제일 오래 걸리셨어요. 나무가 기초니까 기초가 좋아야 한다고."
만복이 잠깐 생각하다가 나무를 두드려봤다.
"이건?"
"그건 괜찮아요. 결도 고르고 소리도 맑고."
"……나도 배울게."
20화 — 대결 전날 밤
대결 전날.
만복이 잠을 잘 이루지 못했다.
설계도를 머릿속에서 몇 번이고 돌렸다. 기둥 위치, 간격, 대들보 올리는 순서, 지붕 경사 각도. 다 알고 있었다. 근데 막상 실전이 되면 또 어디서 어긋날지 모른다는 불안이 있었다.
아침에 일어나서 은동이한테 문자를 보냈다.
[만복: 야, 내일 잘 할 수 있을까?]
잠시 뒤 답장이 왔다.
[은동이: 선배는 나무 다루는 건 천재잖아요. 저는 설계 책임질게요. 둘이 하면 돼요.]
[만복: 근데 황철 팀이 다섯 명이야.]
[은동이: 근데 우리 둘이잖아요.]
만복이 그 말을 보고 잠깐 멍했다.
근데 우리 둘이잖아요.
뭔가 확실한 말이었다. 단순한데 이상하게 안심이 됐다.
[만복: ……알았어.]
[은동이: 자요. 내일 몸 상태가 중요해요.]
[만복: 니가 어른 같다.]
[은동이: 원래 그래요 ㅎㅎ]
만복이 휴대폰을 내려놓고 천장을 봤다.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잘 수 있을 것 같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