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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금성(紫禁城, Forbidden City)
중국 베이징 중심부에 위치한 궁궐로,
현존하는 궁궐로는 세계 최대 규모를 자랑한다.
1421년 명나라의 영락제가 처음 거주하기 시작해 1924년 선통제가 여기서 쫓겨날 때까지 5백년 동안 명나라·청나라 두 왕조 24명의 황제가 이 곳에서 중국을 통치했다. 높이 11m의 성벽과 너비 52m, 깊이 6m의 호성하로 둘러싸인 동서 760m, 남북 960m, 면적 720,000m², 건물 980채, 8,707칸[7]의 방으로 구성되어 있다. 1924년 이래 궁전의 기능을 상실한 뒤 1925년부터 고궁박물원(故宮博物院, Palace Museum)이라는 이름으로 오늘날까지 대중에 공개되고 있다. 1961년 중화인민공화국 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로 지정되었고, 1987년에는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중국에서는 주로 '고궁(故宮)'이라고 부른다. 한때 고궁이라는 이름이 옛 것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해서 폐궁(廢宮)이라 부르자는 주장도 있었으나 공공시설의 이름에 폐(廢)자를 쓰는 건 좋지 않다 해서 고궁으로 낙점되었다.
코로나19 유행으로 중국 당국에서 2020년 춘제 당일인 1월 25일 이후로 무기한 임시 휴업에 들어갔다.
2. 이름의 유래
예로부터 중국에서는 천자의 거처가 우주의 중심인 자미원(紫微垣)에 있어 그곳을 기점으로 우주가 움직인다고 믿었기에 이를 상징하는 뜻에서 '자(紫)'를, 황제의 허락 없이는 아무도 범접할 수 없는 공간이라는 뜻에서 '금(禁)'을 사용해 자금성이라 명명했다. 이런 자세한 내력을 모른 명나라 시대 유럽 선교사들은 '금할 금(禁)'자와 '성 성(城)'자를 각각 '금지된'과 '성벽을 둘러친 도시'란 뜻으로 직역하면서 서양에는 '금지된 도시'라는 뜻으로 알려졌다. 따라서 영어로는 '포비든 시티(Forbidden City)'로 불린다. 그러나 이는 '금지된'에만 주목한 결과로 엄밀히 말해서 오역이다.
3. 역사
3.1. 명나라
3.1.1. 대륙의 기상
영락제는 1406년(영락 4) 자신이 중심지로 삼았던 북경으로 천도하면서 남경의 궁전을 모방해 북경에 궁전을 짓도록 했다. 이후 1420년(영락 18)에 완공되니 그 결과물이 바로 자금성이다. 14년 동안 10만 명이 넘는 장인들과 1백만 명 이상의 노동력을 아낌없이 갈아넣어서 건설했는데, 여기에 소요된 자재는 중국 운남성 지역의 밀림에서 벌채한 남목(楠木)[8] 수십만 그루와 쑤저우 등지에서 생산한 금전(金磚)[9] 1억 개, 각종 유리기와 2억 개 등이었고, 기와를 만드는 도토는 안휘성 태평에서, 채화의 연료는 서남부의 각 성에서 징발했으며, 기단부와 조각에 사용될 한백옥은 50km 바깥의 채석장에서 운반했는데 그 중 가장 무거운 돌은 200t에 육박했다. 이런 돌은 보통 마차로 운반하는 게 불가능해 채석장에서부터 자금성까지 일정한 간격으로 우물을 판 다음 겨울에 그 우물에서 물을 길어서 뿌려 빙판을 만든 다음에야 겨우 운반할 수 있었다. 스케일의 상태가
3.1.2. 잇따른 화재
이렇듯 명나라의 모든 물자와 노동력이 총동원되어 1420년(영락 18) 12월 완성된 자금성은 1421년(영락 19) 정월 성대한 낙성식을 거행했고 영락제는 황실 가족과 수많은 환관, 궁녀들을 거느리고 새로 지은 집에 들어갔다. 그런데 완공 후 불과 반년도 지나지 않은 같은 해 5월에 벼락이 쳐서 자금성의 중심인 3개의 대전(大殿)을 포함한 상당수의 전각들이 깨끗하게 불타버렸다.
가뜩이나 천도에 말이 많은 상황에서 힘들여 지은 궁전이 1년도 넘기지 못하고 벼락을 맞자, 황제가 하늘의 뜻을 거슬렀다며 민심이 흉흉해졌고 급기야 다시 남경으로 환도하자는 주장까지 제기되어 조정이 소란스러워졌다. 영락제는 남경 천도론을 주장한 신하 한 사람을 죽이고서야 겨우 여론을 진정시킬 수 있었다. 이후 영락제가 몽골을 정벌하러 나갔다가 원정지에서 객사해 북경에 돌아왔을 때도 그의 관은 잿더미가 된 자금성에 안치되었다가 능묘에 매장되었으며[10], 중건이 마무리된 시점은 19년의 세월이 흘러간 정통제 때인 1440년(정통 5)이었다.
그리고 1459년(천순 3)에는 자금성 서쪽에 황실원림인 서원(西苑)을 새로 영건했는데 이곳은 오늘날 중난하이(中南海)로 불리며 중화인민공화국 정부 요인들의 관저 구역으로 사용되고 있다.
한동안 잠잠하다가 120여년 뒤인 1557년(가정 36)에 다시 화재가 발생해 3대전을 포함한 주요 전각들이 순식간에 잿더미가 되고 말았다.[11] 첫 번째 화재와는 달리 2번째 화재에서는 진화되자마자 바로 중건에 들어가 1561년에 공사가 끝났다.
그리고 30여년 뒤인 1597년(만력 25)에 또다시 화재가 발생해 이번에도 어김없이 3대전이 전소된 것은 물론이고 황제 일가의 사적 공간인 후3궁도 불타는 등 자금성 완공 이래 명나라 역사상 가장 큰 피해가 발생했다. 파괴된 전각 모두를 한꺼번에 지을 수는 없었지만 황제의 옥좌가 있는 정전인 태화전만은 무리를 해 간신히 중건하는데, 이를 위해 무거운 세금이 부과되어 백성의 고혈을 쥐어짰다. 황제는 뭘 했느냐고? 이때의 황제는 만력제.
3번째 화재로 불탔던 태화전이 중건된 건 30년이 지난 1627년(천계 7)이었다. 천계제의 재위 7년째 되던 해로 이 해에 천계제가 죽고 숭정제가 즉위해 갓 지은 옥좌에 앉았으나 20년을 못넘기고 1644년(숭정 17)에 명나라가 망했다.
이웃나라의 어느 끈질긴 근성의 사찰과 비교하면 약과일지도.
3.2. 청나라
3.2.1. 이례적인 재사용
보통 새 왕조가 들어서면 전 왕조의 궁궐을 헐고 새로 짓는 것이 사실상의 관습처럼 굳어졌는데, 청나라는 명나라를 멸망시킨 이자성을 자금성에서 몰아낸 뒤 자금성을 철거하지 않고 입주해 그대로 사용했다.[13] 물론 전각을 수리하거나 개축하는 소규모 공사는 있었지만 전반적인 구조 자체는 명나라 시절과 달라지지 않았다.
명나라 때 발생한 3번째 화재 이후 40년 가까이 중건되지 못한 전각들은 강희제 때인 1683년(강희 22)에 공사에 들어가 1695년(강희 34)에 다시 지어졌고, 건륭제의 재위기간 동안 황제의 취향에 맞는 화려하고 우아한 장식이 갖춰진 전각과 화원이 다시 짓고 고쳐 짓기를 60년 내내 반복했다. 물론 이로 인해 가뜩이나 적자에 시달리던 내무부의 재정부담은 더욱 가중되었다 건륭제의 취향이 반영된 이 정원은 '건륭화원'이라는 이름으로 지금도 남아있다.
3.2.2. 왕조의 마지막 순간
청조의 전성기였던 건륭제 사후 점차 청나라가 쇠퇴하면서 자금성의 권위에도 영향을 미쳐 1813년(가경 18) 천리교도들이 자금성에 난입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사상 초유의 사태에 근위병들이 갈팡질팡하는 동안 친왕 시절의 도광제가 직접 총을 쏴서 천리교도 격퇴에 일조한 게 이때의 일이다.
명나라 때의 3차례 대화재 이후 청나라 때의 자금성은 큰 화재 없이 2백년 동안 무사했으나 1886년(광서 14) 광서제의 국혼을 앞두고 태화문 인근에서 화재가 시작되어 태화문과 정도문, 소덕전 등이 불타는 사건이 벌어졌다. 비록 6년 뒤에 중건되긴 했지만 황제의 결혼이라는 국가적인 경사를 목전에 두고 터진 일이라 불길한 징조라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다.
이후 1900년에 의화단 운동을 진압하려 온 서구 열강을 주축으로 한 8개국 군대에게 점령당하는 수모를 겪었으며, 신해혁명의 불길이 중국을 뒤덮은 1912년(선통 4)에 청나라가 망했다.
3.3. 중화민국
1912년 중화민국이 수립되면서 마지막 황제 선통제가 퇴위했지만 자금성 안에서 거주하는 것은 허락되어 황실 가족들은 외국 황실의 대우로 청 왕조 시절과 같은 생활을 계속했다. 그러나 1917년 장훈복벽으로 황실에 대한 신뢰가 땅에 떨어졌고, 1923년 건복궁에 불이 나더니 1924년 2차 직봉전쟁 와중에 펑위샹이 북경정변을 일으켜 베이징을 점령, 핍궁사건을 일으켜 선통제를 아예 자금성에서 쫓아내고 말았다.
주인이 없어진 궁전은 고궁박물원으로 개칭되어 황실의 진귀한 보물 및 다양한 궁중 유물들을 보관, 전시하는 박물관이 되었는데 1913년에 선양고궁과 승덕피서산장에 소장된 보물도 모두 자금성으로 이관해 일반에 공개되었다. 중일전쟁이 발발하면서 고궁박물원에 있던 수백만 점의 소장품 중 중요 유물을 골라 13,491개 상자에 나누어 일본의 침략을 피해 상하이로 옮겨졌다. 1945년 일본이 항복함에 따라 북경으로 돌아온 유물들은 국공내전이 격화되자 중요한 유물을 중심으로 다시 이삿짐을 싸서 1948년 장제스의 국민당 정부가 공산당에 패퇴해 대만으로 쫓겨갈 때 함께 가지고 가 1965년 새로운 고궁박물원을 만들었다.
이때 대륙에서 가져온 유물들은 고궁박물원 소장품 가운데서도 가장 가치있는 엄선된 것으로, 대만에는 알짜배기가 있고 자금성에는 쭉정이만 남았다는 말까지 나올 정도였다. 현재 대만 고궁박물원의 소장품은 당시 대륙에서 이송한 게 대부분을 차지하는데 그 숫자는 68만 2,061점에 달해 가히 세계구급(...). 수백만 점이었던 유물들이 이곳저곳으로 옮겨진 통에 상당수가 사라졌음에도 남은 게 이 정도(...). 자금성이 명청시대의 궁궐이라 국민당이 뜯어간 유물도 명청시대의 궁중유물 위주였다.
참고로 타이완 국립고궁박물원의 소장품 종류와 숫자는 다음과 같다. (2010년 12월 집계)
•서화: 12,066점
◦원나라 이전의 회화(繪畫): 574점
◦원나라 이전의 서법(書法): 155점
•청동기: 6,056점
◦선진(先秦) 시대의 명문이 있는 청동기: 약 500점
•도자기: 25,506점
•공예품
◦옥기: 12,122점
◦칠기: 719점
◦법랑: 2,520점
◦자수: 306점
◦직물: 1,485점
◦대나무·나무·상아·뿔 조각: 658점
◦문방사우 등 문구: 2,379점
◦화폐: 6,953점
◦기타: 12,457점
•서적
◦청나라 황실 관련 문헌: 386,729책
◦만주어·몽골어 문헌: 11,501점
◦수집 서적: 200,604책
3.4. 중화인민공화국
중화민국이 타이완 섬으로 옮겨간 뒤 중국 인민해방군이 1949년 북경을 점령한 후에도 자금성은 무사했으며 1950년대 이후 수리 및 복원 계획이 세워져 국가적인 문화재로 관리를 받았다. 그러나 1966년 문화대혁명의 광풍이 몰아쳐 홍위병들이 과거의 명승 유적들을 '타파해야 할 부르주아 반동의 폐습'이라고 외치며 닥치는대로 파괴하자 저우언라이 총리가 군대를 동원해서 자금성을 지켜냈다.
한편 타이완 고궁박물원에 자극받은 중국 정부는 자금성에 있던 기존의 소장품에 새로이 전국에서 수집한 미술품 수만여 점을 더해 이전보다 더욱 규모가 커져 양적인 측면에서는 베이징 고궁박물원도 타이완에 뒤지지 않는 수준으로 성장했다. 2011년 현재 북경의 고궁박물원 소장 유물은 약 180만 7,558건이라고 한다. 그중 국가에서 지정한 1,2,3급 문물 즉 진귀문물은 168만 4,490건, 일반문물은 11만 5,491건, 표본은 7,577건이라고 신화통신이 전했다. 비록 많은 유물이 대만으로 건너갔지만 이후 많은 문물이 고고학적으로 발굴되었으며, 또 최근 국가에서 수집하거나 기증받고, 또 중국 재벌들이 자비로 환수하여 기증한 것이 많다.
•서화: 14만여점
◦원나라 이전의 회화(繪畫): 420점
◦원나라 이전의 서법(書法): 310점
•청동기: 1만 5천여점
◦선진(先秦) 시대의 명문이 있는 청동기: 약 1,600여점
◦고대 화폐: 약 1만여점
◦동경(銅鏡): 약 4,000여점
◦인장(印章): 약 1만여점
•도자기: 35만여점
◦1급 문물: 1,100점
◦2급 문물: 5만 6천여점
•공예품
◦옥기: 28,461점
◦칠기, 법랑, 유리, 대나무·나무·상아·뿔 조각, 문방구 등: 101,845 건
◦분재: 1,442점
•서적: 19만 5천여 책
4. 주요 건축
4.1. 소개
자금성은 크게 외조(外朝)와 내정(內廷)으로 나뉘는데, 외조는 황제가 국사를 돌보던 곳으로 태화전(太和殿)·중화전(中和殿)·보화전(保和殿)의 3대전과 그 양쪽에 문화전(文華殿)·무영전(武英殿)이 있으며, 내정은 황제가 휴식을 취하는 곳으로 건청궁(乾清宮)·교태전(交泰殿)·곤녕궁(坤寧宮)의 후3궁으로 되어 있다.
곤녕궁 북쪽에는 어화원(御花園)이 있고 후3궁 동서 양쪽에 황후와 후비들이 거주하던 6개의 궁이 각각 있어 동서6궁으로 칭하는데, 동6궁은 경인궁(景仁宮)·승건궁(承乾宮)·영화궁(永和宮)·종수궁(鍾粹宮)·경양궁(景陽宮)·연희궁(延禧宮), 서6궁은 영수궁(永壽宮)·태극전(太極殿)(계상궁(啓祥宮))·장춘궁(長春宮)·익곤궁(翊坤宮)·저수궁(儲秀宮)·함복궁(咸福宮)이다. 서6궁 남쪽의 양심전(養心殿)은 황제가 평소 거주하던 곳이고, 동6궁 남쪽의 재궁(齋宮)은 큰 제사를 앞두고 황제가 머물며 재계하던 장소다. 그리고 동서6궁 북쪽은 황태자의 거처, 서6궁 서쪽은 황태후와 황태자비의 거처다.
4.2. 궁성
천안문(天安門)
황성 의 남문. 베이징은 내성과 외성으로 나뉘어있었고, 내성안에 황성이 있었다. 그 황성안에 자금성이 있다. 많은 사람들이 자금성의 정문이라 착각하지만 자금성의 정문은 아래의 오문(午門)이다. 1417년(영락 15) 건설 당시에는 승천문(承天門)이었다. 1457년(천순 1) 벼락을 맞고 1465년(성화 1)에 중수했으며 1644년(숭정 17) 이자성 군대의 북경 점령 때 소실되었다가 1651년(순치제 8)에 재건되면서 '하늘로부터 명을 받아 나라를 편안케하고 백성을 다스리다(受命于天, 安邦治民)'라는 의미의 천안문(톈안먼)으로 개칭했다. 왕조 시대에는 새로운 법률의 반포와 출전 또는 개선하는 군대가 황제를 알현하는 장소로 사용되었으나 1949년 10월 1일 마오쩌둥이 천안문의 문루에서 중화인민공화국의 성립을 선포한 이래 신중국의 상징이 되어 현재는 마오쩌둥의 대형 초상화가 걸려있다.[16] 이곳 앞에 펼쳐진 천안문광장에서 1976년의 4.5 운동(천안문 사태)과 1989년 천안문 6.4 항쟁이 일어나기도 했다. 1969년에 전면적인 해체수리를 했다.
천안문과 오문 사이에 있는 중간 문. 1420년(영락 18)에 세워졌고 외형은 천안문과 똑같다. 황제가 조회시, 만조백관들이 이 문 앞에서 꿇어앉아 대기하다가 황명이 내리면 이 문을 통하여 궁으로 들어갔다.
오문(午門)
자금성의 정문이자 남문. 1420년(영락 18)에 세워진 이래 1647년(순치 4), 1801년(가경 6)에 중수했다. 정중앙에 있는 전루는 중첨무전정(重檐廡殿頂)에 정면 9칸(60.05m), 측면 5칸(25m)이며 이 건물과 함께 자리한 4개의 다른 전각의 배치가 봉황이 날개를 편 것과 비슷하다 해서 속칭 오봉루(五鳳樓)라 부른다. 황제가 새 달력을 반포하거나 명절에 신하들에게 물품을 하사하는 곳으로 사용되었다. 5개의 문 중 가운데의 문은 황제 전용으로, 지금은 굳게 닫혀 있다. 황제 아닌 사람이 여길 지나갈 수 있는 경우는 국혼날 가마를 탄 황후가 입궁할 때와 과거 전시에서 진사급제한 장원·방안·탐화[17]가 퇴궐할 때 뿐이었다. 가운데 문을 기점으로 문무백관은 동쪽문을, 종실들은 서쪽문으로 출입했다.
고완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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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금성의 북문. 1420년(영락 18)에 처음 지었을 때는 현무문(玄武門)이었지만 청나라 때 강희제의 이름 현엽을 피휘해 신무문으로 고쳤다. 전루는 중첨무전정(重檐廡殿頂)에 정면 5칸, 측면 1칸이며 곽말약이 쓴 '고궁박물원'이라는 편액이 성문에 걸려 있다. 1924년 선통제가 자금성에서 쫓겨날 때 이곳을 통해 출궁했다.
동화문(東華門)
자금성의 동문. 1420년(영락 18)에 세워졌다. 전루는 중첨무전정(重檐廡殿頂)에 정면 5칸, 측면 3칸으로 반대편에 있는 서화문과 같은 모양이다. 청나라 때는 황제, 황후, 황태후가 세상을 떠난 후 그 재궁(梓宮)이 이 문을 통해 나갔기 때문에 속칭 '귀문(鬼門)'이라고도 불렀다.
서화문(西華門)
자금성의 서문. 1420년(영락 18)에 세워졌다. 전루는 중첨무전정(重檐廡殿頂)에 정면 5칸, 측면 3칸으로 반대편에 있는 동화문과 같은 모양이다. 맞은편에는 황실의 원림인 서원(西苑)이 있었기 때문에 황제와 황후가 서원에 행차할 때 자주 사용했다. 1900년(광서 26) 8국 연합군이 베이징을 점령하자 서태후와 광서제가 이 문을 통해 시안으로 도망쳤다.
각루(角樓)
자금성의 궁성 네 귀퉁이에 각각 세워진 건물로 황색 유리기와를 얹은 3층의 전각이다. 성벽을 제외한 각루만의 높이는 27.5m이다. 경복궁의 동십자각과 같이 궁성을 수비하는 망루 역할을 한다. 영락제 때 세워진 이래 오늘날까지 당시의 모습 그대로 보존되었다.
4.3. 외조
4.3.1. 3전 3각
태화문(太和門)
태화전의 전문으로 중첨헐산정(重檐歇山頂)에 정면 9칸, 측면 3칸, 높이 23.8m, 면적 1,300㎡이다. 앞에는 명당수 역할을 하는 내금수하(内金水河)가 흐르고 있다. 1420년(영락 18)에는 봉천문(奉天門)이라 했다가 1562년(가정 41) 황극문(皇極門)으로, 다시 1645년(순치 2) 태화문으로 개칭했다. 1886년(광서 14)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1894년(광서 20)에 중건되었다. 태화문의 좌우에는 각각 정경문(貞慶門, 명나라 때는 홍정문(弘政門))과 소덕문(昭德門, 명나라 때는 선치문(宣治門))이 있다.
태화전(太和殿)
자금성의 정전. 중첨무전정(重檐廡殿頂)에 정면 11칸, 측면 5칸, 길이 64m, 너비 37m, 전각 높이 26.92m, 면적 2,368m², 기단 높이 8.13m, 기단까지 합친 높이 35.05m로 중국에 현존하는 궁전 건축 가운데 규모가 가장 큰 목조 구조물이다. 한백옥으로 된 3단의 기단 위에 세워져 72개의 남목 기둥이 떠받치고 있는데 가장 큰 것은 높이 12.7m, 직경 1.06m에 이르며 이 중 옥좌와 가까운 곳의 6개 기둥은 금박으로 덮여 있고, 지붕 처마에는 11개의 잡상이 있다. 태화전이 자리한 월대에는 황제의 통치권을 상징하는 일구(日晷)와 가량(嘉量), 장수를 상징하는 청동거북과 청동학, 그리고 동정(銅鼎) 18개가 진설되어 있다. 1420년(영락 18)에는 봉천전(奉天殿)이었으며 1562년(가정 41) 중건하면서 황극전(皇極殿)으로 개칭했고 1645년(순치 2)에 태화전으로 개칭했다. 자금성에서 가장 넓은 광장이 여기에 있어서 황제의 즉위식, 국혼, 황후 책봉, 조회 등 국가적인 중대사 때 주로 사용되었다. 태화전 좌우의 담장은 원래 회랑이 있었던 자리였으나 청나라 때 화재를 막기 위해 지금과 같은 담장으로 바꿨다.
중화전(中和殿)
태화전 뒤편에 있는 전각으로 평면은 정방형이며 단첨사각찬첨(單檐四角攢尖)에 정면 3칸, 측면 3칸, 높이 29m, 면적 580㎡이다. 1420년(영락 18)에는 화개전(華蓋殿)이었고 1562년(가정 41) 중극전(中極殿), 1645년(순치 2) 중화전으로 개칭했다. 전각의 이름은 예기(禮記)의 중용(中庸) 중 '중이란 천하 모든 것의 가장 큰 근본이며, 화란 천하 모든 것에 두루 통하는 도이다(中也者天下之本也, 和也者天下之道也)'라는 의미에서 유래했다. 태화전에서 공식 행사를 치르기 전에 잠시 대기하며 휴식을 취하거나 평소에 상소문을 읽고 처결하는 공간으로 사용했으며 청나라 때는 황실의 족보를 7년마다 개수하는 작업을 해 그 결과물을 중화전에서 진상받았다.
보화전(保和殿)
중화전 뒤편에 있는 전각으로 중첨헐산정(重檐歇山頂)에 정면 9칸, 측면 5칸, 높이 29.5m, 면적 1,240m²이다. 1420년(영락 18)에는 근신전(謹身殿), 1562년(가정 41) 건극전(建極殿), 1645년(순치 2) 보화전으로 개칭했다. 명나라 때는 황제가 의복을 갈아입는 공간이었고, 청나라 때는 매년 제야와 정월 15일에 황제가 소수민족 왕공대신들에게 연회를 베푸는 용도로 사용되었다. 1789년(건륭 54) 이후에는 이곳에서 전시가 치러지기도 했다.
문화전(文華殿)
서쪽에 있는 무영전과 짝을 이루도록 지어진 전각. 공(工)자 형태의 평면으로 되어 있는데, 앞쪽에는 헐산정(歇山頂)에 정면 5칸, 측면 3칸인 문화전이 있고 천랑을 통해 후전인 주경전(主敬殿)과 연결되어 있으며, 동서 양쪽에는 배전인 본인전(本仁殿)과 집의전(集義殿)이 있다. 명나라 초에는 황제의 편전이었으나 이후 천순제, 성화제 때 태자가 황제를 대신해 정사를 돌보기도 했다. 청나라 때는 매년 봄과 가을에 황제가 경연을 하는 장소로 사용하기도 했다. 1776년(건륭 41)에는 문화전 뒷쪽에 문연각(文淵閣)을 세워 <사고전서>를 비롯한 황실에서 소장한 중요 문헌을 보관했다.
무영전(武英殿)
동쪽에 있는 문화전과 짝을 이루도록 지어진 전각으로 헐산정(歇山頂)에 정면 5칸, 측면 3칸, 길이 33.4m, 기단 높이 1.5m다. 뒷쪽에는 후전인 경사전(敬思殿)과 천랑으로 연결되어 있으며, 동서 양쪽에 배전인 응도전(凝道殿)과 환장전(煥章殿)이 있다. 명나라 때는 황제가 정무를 보거나 대신들을 접견하던 장소였다. 1644년(숭정 17) 자금성을 점령한 이자성이 바로 이곳에서 4월 29일 황제 즉위식을 거행했다. 청나라 때는 이곳에서 흠정본(欽定本)의 편집과 간행이 이루어졌는데 이를 무영전판, 약칭 전판(殿版)이라 해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1869년(동치 8) 화재로 인해 무영전 일대가 불타면서 건물은 같은 해에 중건했으나 전판들은 소실되었고 잔존한 전판은 현재 타이베이 국립고궁박물원에 있다.
홍의각(弘義閣)
동쪽의 체인각과 마주보고 있는 단첨무전정(單檐廡殿頂)에 정면 9칸, 측면 3칸, 높이 25m의 전각이다. 태화전 광장 서쪽에 있다. 1420년(영락 18)에는 무루(武樓), 가정제 때 무성각(武成閣), 청나라 초에 홍의각으로 개칭했다. 영락제 때 편찬된 <영락대전>이 소장되어 있었다.
체인각(體仁閣)
서쪽의 홍의각과 마주보고 있는 무전정(廡殿頂)에 정면 9칸, 측면 3칸, 높이 25m의 전각이다. 태화전 광장 동쪽에 있다. 1420년(영락 18)에는 문루(文樓), 가정제 때 문소각(文昭閣), 청나라 때 체인각으로 개칭했다. 1678년(강희 17)에 이곳에서 143인의 학사들을 모아 <명사(明史)>를 편찬했다. 1783년(건륭 48)에 발생한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같은 해에 중건되었다.
4.3.2. 자금성 동남부
전심전(傳心殿)
문화전 동쪽에 있는 제사 의례용 건축물로 동서 25m, 남북 100m의 권역 내부에 위치하고 있다. 권역 안에는 제사 때 사용되는 건물들이 있는데 경산정(硬山頂)에 정면 5칸, 측면 3칸의 치생소(治牲所), 3칸의 축판방(祝版房), 3칸의 신주(神廚), 5칸의 치방(值房) 등이 그것이다. 청나라 강희제 때는 이곳 정중앙에 복희·신농·요·순·우·탕·문왕·무왕의 신위를, 동쪽에는 주공의 신위를, 서쪽에는 공자의 신위를 모시고 철마다 제사를 지냈다.
문연각(文淵閣)
1773년(건륭 38)에 편찬한 <사고전서>를 보관하기 위해 1776년(건륭 41)에 완성된 전각이다. 이곳을 지을 때 해녕 지역의 유명 장서처인 천일각의 구조를 본떴으며 이후 문연각은 청나라가 세운 장서처인 북4각(문연각·문원각(文源閣)·문진각(文津閣)·문소각(文溯閣))과 남3각(문종각(文宗閣)·문회각(文匯閣)·문란각(文瀾閣))의 규범이 되었다.
남3소(南三所)
명나라 때는 이 일대에 단경전(端敬殿)과 단본궁(端本宮), 힐방전(擷芳殿) 등이 있어서 태자의 거주지였으나 강희제 때 궁인들의 처소로 바뀌었고, 1746년(건륭 11) 여기에 새로 전각과 정원을 꾸며 황자들의 처소로 삼았다. 위치상 동쪽에 있기에 청색과 녹색의 유리기와를 얹은 것이 특징이다. 1782년(건륭 47) 9월 16일 도광제가 이곳 힐방전에서 태어났다.
내각대당(內閣大堂)
청나라 때 전각대학사들이 모여 국사를 논하던 곳이다.
4.3.3. 자금성 서남부
남훈전(南薰殿)
명나라 때 세워진 정면 5칸의 전각으로 휘호를 올리거나 책봉식 등에 사용된 금보와 금책문을 보관했다. 1749년(건륭 14)에 중수해 그때까지 궁궐에서 소장하던 태호, 복희 등 전설상의 시조부터 역대 왕조 황제·황후·공신의 초상화 121축을 옮겨와 진전으로 기능하기도 했었다. 여기에 있었던 초상화들은 현재 타이완에 있는 타이베이 국립고궁박물원에 소장되어 있다.
4.4. 내정
4.4.1. 후3궁
건청문(乾淸門)
외조와 내정을 연결하는 통로 역할을 하는 문으로 보화전 뒤쪽에 있으며 앞으로는 건청문 광장과 마주하고 있다. 정면 5칸, 측면 3칸으로 1420년(영락 18)에 지어진 이래 1655년(순치 12)에 중수되었다. 동쪽에는 경운문(景運門), 서쪽에는 융종문(隆宗門)이 있다. 담장 서쪽 끝에 있는 작은 건물이 군기처였다.
건청궁(乾淸宮)
1420년(영락 18)에 처음 지어졌고 1798년(가경 3)에 마지막으로 중건되었다. 명나라와 청나라 강희제 때까지는 황제의 침궁이었으나 옹정제 때 침소를 양심전으로 옮기면서 정식 조회를 여는 편전으로 바뀌었다. 명나라가 멸망할 때 숭정제의 아내 주황후가 이곳에서 목을 매 자살했다. 청나라 때는 1722년(강희 61)과 1785년(건륭 50)에 각각 강희제와 건륭제의 천수연(千叟宴)이 성대하게 거행되었다. 건청궁이 유명해진 건 옹정제가 시작한 비밀건저제의 무대가 되었기 때문인데, 이곳 옥좌 위에 걸려 있는 순치제의 어필로 된 '정대광명(正大光明)'이라는 편액 뒷쪽에 제위계승자의 이름을 적은 쪽지를 함에 넣어 보관했다가 황제 사후 왕공대신들의 입회하에 함을 개봉해 차기 황제가 즉위하도록 했다. 부속 전각으로 단응전(端凝殿), 무근전(懋勤殿)이 있다.
교태전(交泰殿)
건청궁 뒷쪽에 있는 정방형의 평면으로 된 3칸의 전각이다. 황후의 탄신일인 천추절을 축하하는 공간으로 사용되었고 건륭제 때 대청수명지보(大清受命之寶)·황제봉천지보(皇帝奉天之寶)·대청사천자보(大清嗣天子寶)·황제지보(皇帝之寶) 2과·천자지보(天子之寶)·황제존친지보(皇帝尊親之寶)·황제친친지보(皇帝親親之寶)·황제행보(皇帝行寶)·황제신보(皇帝信寶)·천자행보(天子行寶)·천자신보(天子信寶)·경천근민지보(敬天勤民之寶)·제고지보(制誥之寶)·칙명지보(敕命之寶)·수훈지보(垂訓之寶)·명덕지보(命德之寶)·흠문지새(欽文之璽)·표장경사지보(表章經史之寶)·순수천하지보(巡狩天下之寶)·토죄안민지보(討罪安民之寶)·제어육사지보(制馭六師之寶)·칙정만방지보(敕正萬邦之寶)·칙정만민지보(敕正萬民之寶)·광운지보(廣運之寶) 등 옥새 25과를 여기에 보관하면서 왕조가 25대까지 이어지기를 염원했지만 잘 알려져 있다시피 그런 거 없다. 이외에도 1745년(건륭 10)에 제작한 물시계와 1798년(가경 3)에 제작한 서양식 자명종 시계도 보관되어 있는데, 이 시계는 태엽을 돌리면 지금도 사용이 가능하다고 한다.
곤녕궁(坤寧宮)
교태전 뒷쪽에 있는 정면 9칸, 측면 3칸의 전각. 명나라 때는 황후의 침궁으로 사용되었다. 청나라 때는 강희제의 두 아내 효성인황후(孝誠仁皇后, 1653.11.26~1674.6.16)와 효소인황후(孝昭仁皇后, 1653~1678.3.18)가 이곳에서 세상을 떠났으며 옹정제 이후로는 곤녕궁의 공간을 둘로 나누어 동난각에서는 황제와 황후의 국혼 첫날밤을 치렀고 서난각에서는 만주족 전통 신앙에 따라 날마다 육류를 바치는 제사를 지냈다. 강희제, 동치제, 광서제가 여기서 국혼 첫날밤을 보냈으며 선통제의 국혼이 이곳에서 거행된 마지막 대례였다.
4.4.2. 내정 서쪽
양심전(養心殿)
건청궁 서쪽에 있는 곳으로 공(工)자 평면에 황색 유리기와를 쓴 헐산정(歇山頂)식 건물이다. 명나라 가정제 때 처음 건설되었으며 청나라에 이르러 옹정제부터 광서제까지 8명의 황제가 침궁으로 사용했다. 이곳에서는 순치제(1661.2.5), 건륭제(1799.2.7), 동치제(1875.1.12)가 붕어했고 강희제가 로마 교황이 보낸 사절을 접견했다. 또한 동치 연간에 이곳 동쪽의 체순당(體順堂)에서 동태후가, 서쪽의 연희당(燕禧堂)에서 서태후가 수렴청정을 했으며, 선통제의 아버지 순친왕이 섭정왕으로서 국가대사를 살피는 등 작은 규모에 비해 큰 사건이 많았다. 그리고 청나라 마지막 어전회의가 열려 융유황태후가 선통제의 퇴위 조서에 옥새를 찍은 곳이기도 하다.
4.4.3. 동6궁
경인궁(景仁宮)
1420년(영락 18)에는 장안궁(長安宮)이었다가 1535년(가정 14) 경인궁으로 개칭했다. 강희제의 생모 효강장황후(孝康章皇后, 1640~1663), 광서제의 애첩 각순황귀비(恪順皇貴妃, 1876.2.27~1900.8.15)[19] 등이 이곳에 거주했으며, 1654년(순치 11) 5월 4일 강희제가 이곳에서 태어났다. 부속 전각으로 전전, 후전, 동서남북의 배전이 있다.
승건궁(承乾宮)
1420년(영락 18)에는 영녕궁(永寧宮)이었다가 1632년(숭정 5) 승건궁으로 개칭했다. 숭정제의 애첩 공숙황귀비(恭淑皇貴妃, ?~1642), 순치제의 애첩 효헌단경황후(孝獻皇后, 1639~1660.9.23), 함풍제의 생모 효전성황후(孝全成皇后, 1808.3.24~1840.2.13) 등이 이곳에 거주했다. 부속 전각으로 전전, 후전, 동서남북의 배전이 있다.
영화궁(永和宮)
1420년(영락 18)에는 영안궁(永安宮)이었다가 1535년(가정 14) 영화궁으로 개칭했다. 옹정제의 생모 효공인황후(孝恭仁皇后, 1660~1723.5.23), 도광제의 아내 효정성황후(孝静成皇后, 1812.6.19~1855.8.21), 함풍제의 후궁 장정황귀비(莊靜皇貴妃, 1837.2.27~1890.11.15), 광서제의 후궁 단강황귀비(端康皇貴妃, 1873~1924) 등이 이곳에 거주했으며, 1678년(강희 17) 12월 13일 옹정제가 이곳에서 태어났다. 부속 전각으로 동순재(同順齋, 후전), 동서남북의 배전이 있다.
종수궁(鍾粹宮)
1420년(영락 18)에는 함양궁(咸陽宮)이었다가 1535년(가정 14) 종수궁으로 개칭했고, 1571년(융경 5)에는 전전을 흥룡궁(興龍宮), 후전을 성철전(聖哲殿)으로 개칭해 태자의 거처로 삼기도 했다. 숭정제의 태자 주자랑(1629~1644), 광서제의 아내 효정경황후[20](孝定景皇后, 1868~1913.2.22) 등이 이곳에 거주했다. 부속 전각으로 전전, 후전, 동서남북의 배전이 있다.
경양궁(景陽宮)
1420년(영락 18) 장양궁(長陽宮)이었다가 1535년(가정 14) 경양궁으로 개칭했다. 태창제의 생모인 공비 왕씨가 출산 이후 여기에서 30년 넘게 유폐되다시피 지내며 아들을 만나지 못하다가 1611년(만력 39) 죽음이 임박하자 소식을 듣고 달려온 태창제가 잠긴 문을 부수고 들어가 실명한 생모를 안고 통곡했던 비극이 일어난 곳이다. 부속 전각으로 전전, 어서방(御書房, 후전), 동서남북의 배전(동배전은 정관재(靜觀齋), 서배전은 고감재(古鑒齋))이 있다.
연희궁(延禧宮)
1420년(영락 18)에는 장수궁(長壽宮)이었다가 1535년(가정 14) 연기궁(延祺宮)으로, 청나라 때는 연희궁으로 개칭했다. 1832년(도광 12), 1845년(도광 25), 1855년(함풍 5)에 잇따라 화재가 발생해 그때마다 중건했으나 함풍제 때 화재 이후로는 터만 남았고 선통제 때 융유황태후의 명으로 그 자리에 수정궁(水晶宮)을 짓도록 했으나 나라가 망하기 직전이라 비용 문제로 완공되지 못했다.
4.4.4. 서6궁
영수궁(永壽宮)
1420년(영락 18)에는 장락궁(長樂宮)이었다가 1535년(가정 14) 육덕궁(毓德宮)으로, 1616년(만력 44) 영수궁으로 개칭했다. 건륭제의 생모 효성헌황후(孝聖憲皇后, 1693.1.1~1777.3.2)가 이곳에 거주했고, 1789년(건륭 54) 건륭제의 딸 고륜화효공주(固倫和孝公主, 1775.2.2~1823.10.13)가 니오후루 허션의 아들과 결혼했을 때 연회를 베푼 장소로 사용되기도 했다.
태극전(太極殿)(계상궁(啓祥宮)
1420년(영락 18)에는 미앙궁(未央宮)이었다가 1535년(가정 14) 가정제의 생부 흥헌왕이 태어난 곳이라 해서 계상궁(啓祥宮)으로 고쳤다가 청나라 때 태극전으로 개칭했다. 동치제의 후궁 헌철황귀비(獻哲皇貴妃, 1856.7.2~1932.2.3)가 이곳에 거주했다. 부속 전각으로 체원전(體元殿), 체화전(體和殿)이 있다.
장춘궁(長春宮)
1420년(영락 18) 장춘궁이었다가 1535년(가정 14) 영녕궁(永寧宮)으로 바꾸었고 1615년(만력 43) 다시 장춘궁으로 개칭했다. 건륭제의 아내 효현순황후(孝賢純皇后, 1712.3.28~1748.4.8)와 동치제의 생모 서태후(1835.11.29~1908.11.15)가 이곳에서 거주했는데, 특히 서태후는 1884년(광서 10)까지 거주했다. 부속 전각으로 승희전(承禧殿), 수수전(綏壽殿), 이수전(履綏殿), 평안실(平安室)이 있다.
익곤궁(翊坤宮)
1420년(영락 18)에는 만안궁(萬安宮)이었다가 1535년(가정 14) 익곤궁으로 개칭했다. 부속 전각으로 원화전(元和殿), 연홍전(延洪殿)이 있다.
저수궁(儲秀宮)
1420년(영락 18)에는 수창궁(壽昌宮)이었다가 청나라 때 저수궁으로 개칭했다. 가경제의 아내 효숙예황후(孝淑睿皇后, 1760.10.2~1797.3.5)와 효화예황후(孝和睿皇后, 1776~1850.1.23), 선통제의 아내 효각민황후(孝恪愍皇后, 1906.11.13~1946.6.20) 등이 이곳에서 거주했으며, 1856년(함풍 6) 4월 27일 동치제가 이곳에서 태어났다. 부속 전각으로 체화전(體和殿), 여경헌(麗景軒)이 있다.
4.4.5. 내정 동쪽
재궁(齋宮)
황제가 하늘에 제사지내러 나가기 전에 머물던 전각이다. 전전은 정면 5칸, 측면 3칸이고 동서 배전은 각각 정면 3칸이며 침궁으로 사용되는 성숙전(誠肅殿)은 정면 7칸으로 되어 있다.
육경궁(毓慶宮)
1680년(강희 19)에 처음 세워진 전각. 본래 강희제의 황태자인 윤잉(胤礽)이 생활하던 동궁이기도 하였다. 윤잉이 폐위된 이후에는 어린 나이에 즉위한 황제들이 이곳에서 지내기도 하였다.
봉선전(奉先殿)
황실의 조상을 제사지내는 가묘 성격의 전각으로 자금성 내정 동쪽에 있으며 명나라 때 세워졌다가 1657년(순치 14) 중건되었다. 전전(前殿)은 정면 9칸, 측면 4칸, 면적 1,225㎡이고 전전 앞의 월대는 길이 40m, 너비 12m, 면적 500㎡이며 후전(後殿)은 정면 9칸, 측면 2칸, 면적 755.00㎡이다. 국가적인 경사나 제사, 대규모 행사 때 이곳에서 조상신에게 그 사실을 고했다. 자금성 바깥에 있는 태묘와 대비되어 '내태묘(內太廟)'라 부르기도 했다.
4.4.6. 서궁 권역
자녕궁(慈寧宮) 정전(正殿)
1536년(가정 15)에 인수궁(仁壽宮) 자리에 새로 지었고 만력제 때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중건했으며 이후 1653년(순치 10), 1689년(강희 28), 1751년(건륭 16)에 수리되었다. 명나라 때는 만력제의 생모 효정태후, 만력제의 후궁 공각황귀비(恭恪皇貴妃, ?~1630.7)와 선의소비(宣懿昭妃, 1557~1642)가 거주했고 청나라 때는 순치제의 생모 효장문황후(孝莊文皇后, 1613.3.28~1688.1.27) 이래로 태황태후, 황태후, 태비, 태빈 등의 정궁으로 사용되었다.
대불당(大佛堂)
자녕궁의 후전으로 정면 7칸, 측면 3칸의 전각이며 앞에는 월대가 있다. 청나라 때 황태후와 황태비들이 예불을 올리던 장소로, 내부에는 다양한 불상들과 함께 불교 의례에 사용되는 각종 기물들이 진설되어 있다.
수강궁(壽康宮)
자녕궁 서쪽에 있으며 1735년(옹정 13)에 건설을 시작해 1736년(건륭 1)에 완공되었고 이후 1820년(가경 25)과 1890(광서 16)에 중수했다. 건륭제의 생모 효성헌황후(孝聖憲皇后, 1693.1.1~1777.3.2), 건륭제의 후궁 영귀비(穎貴妃, 1731~1800), 도광제의 아내 효정성황후(孝静成皇后, 1812.6.19~1855.8.21) 등이 이곳에서 거주했다.
수안궁(壽安宮)
수강궁 북쪽과 무영전 남쪽에 있는 전각으로 1420년(영락 18)에는 함희궁(咸熙宮)이었다가 1525년(가정 4) 함안궁(咸安宮)으로 바꾸었고, 1751년(건륭 16) 건륭제의 생모 효성헌황후의 육순을 기념해 수안궁으로 개칭했다. 천계제의 유모 객씨가 이곳에서 지낸 적이 있으며 효성헌황후의 육순과 칠순 생일날 건륭제가 황자와 황손들을 대동하고 하례를 올렸던 장소다. 부속 전각으로 춘희전(春禧殿), 복의재(福宜齋), 훤수당(萱壽堂)이 있다.
영화전(英華殿)
정면 5칸의 전각으로 1420년(영락 18)에는 융희전(隆禧殿)이었다가 1567년(융경 1) 영화전으로 개칭했다. 황태후와 태비, 태빈들이 예불을 올리던 장소로 사용되었다.
4.4.7. 영수궁 권역
황극전(皇極殿)
1689년(강희 28)에 지으면서 처음에는 영수궁(寧壽宮)이라 했다가 1772년(건륭 37)부터 1776년(건륭 41)에 걸쳐 영수궁 일대를 새로 지을 때 전전을 황극전으로 개칭했다. 1796년(가경 1) 건륭제가 가경제에게 양위하고 태상황으로 물러난 뒤 이곳에서 마지막 천수연을 거행했으며 1894년(광서 20)에는 서태후의 60세 생일을 하례받았다. 1904년(광서 30)에는 서태후의 70세 생일을 하례하러 온 9개국 사절을 접견하는 곳이기도 했다.
영수궁(寧壽宮)
황극전 뒷쪽에 있는 전각으로 영수궁의 후전이다. 광서제 때 서태후가 여기서 잠시 거주한 적이 있는데 그때 금룡화새채화로 장식되어 있던 원래의 모습에서 소식채화로 바꿔 변형되었다가 1979년에 중수하면서 다시 건륭제 때의 장식으로 복원했다.
양성전(養性殿)
1772년(건륭 37)에 지어진 영수궁의 침전 역할을 하는 전각이다. 태상황이 된 건륭제가 거주하기도 했다. 이 전각도 나중에 서태후가 머물면서 장식을 변형시켜 원래의 모습을 잃어버렸다.
낙수당(樂壽堂)
양성전 뒤쪽에 있는 전각으로 정면 7칸, 측면 3칸, 길이 36.15m, 너비 23.20m, 면적 839㎡이다. 1772년(건륭 37)에 지어져 1802년(가경 7)과 1891년(광서 17)에 중수되었고, 1894년(광서 20)부터는 서태후가 이곳의 서난각을 침실로 사용했다. 이곳에는 건륭제 때 제작한 높이 224cm, 너비 96cm, 무게 5t에 이르는 옥세공품 <대우치수도옥산(大禹治水圖玉山)>이 보관되어 있다.
이화헌(頤和軒)
낙수당 뒤쪽에 있으며 정면 7칸, 측면 1칸의 전각으로 뒤쪽의 경기각과 천랑으로 연결되어 工자형 평면이다. 1772년(건륭 37)에 지어져 1802년(가경 7)과 1891년(광서 17)에 중수되었다.
앞쪽에 있는 낙수당과 천랑으로 연결된 정면 7칸, 측면 3칸의 2층 전각이다. 1771년(건륭 36)에 건설된 뒤 1802년(가경 7)과 1891년(광서 17) 두 차례 중수되었다. 경기각의 동쪽 2층에는 옆에 있는 작은 가산과 연결되는 한백옥 다리가 놓여 있다.
창음각(暢音閣)
1772년(건륭 37)에 짓기 시작해 1776년(건륭 41)에 완성한 3층 누각으로, 명절에 황실 가족과 신하들이 궁정에서 연희와 경극 등을 관람하던 극장이며 1802년(가경 7년)과 1891년(광서 17) 수리했다. 높이는 20.71m이고, 상층은 복대(福臺), 중층은 녹대(祿臺), 하층은 수대(壽臺)로 내부가 3개 층으로 구성된 희대(戱臺)가 있다. 서태후는 경극을 매우 좋아해서 생일날이 되면 일주일 혹은 열흘 이상씩 계속되는 경극을 이곳에서 관람했고, 그런 서태후의 취향과 편의에 맞춰 광서제 때 창음각을 대대적으로 고쳐 지었다. 궁궐 내부에 현존하는 경극용 극장 건물로는 가장 규모가 크다.
심연서옥(尋沿書屋)
영수궁화원 안에 있으며 1772년(건륭 37)에 지어진 정면 5칸, 측면 1칸의 전각이다. 현판은 건륭제의 어필로 되어 있으며 서태후가 낙수당에 거처할 때는 광서제가 매일 이곳에서 문안인사와 식사 시중을 들던 공간이었다.
수초당(遂初堂)
고화헌 뒤쪽에 있는 전각으로 1772년(건륭 37)에 지어진 후 1802년(가경 7)과 1891년(광서 17)에 중수했다. 정면 5칸, 측면 3칸이며 건륭제의 어필로 쓰여진 한자와 만주어 현판이 걸려 있다.
부망각(符望閣)
영수궁화원에 있는 전각 중 가장 높은 건물로 외부는 2층이지만 내부는 3층으로 구성되어 있다. 1772년(건륭 37)에 세운 이래 1802년(가경 7)과 1891년(광서 17)에 중수했다. 자금성 내에 있던 건복궁화원의 연춘각(延春閣)을 모방했다. 건륭제 때는 매년 정월 21일에 이곳에서 왕공대신들을 불러 음식을 내렸고, 가경제는 부망각에서 바라본 경치를 읊은 <영부망각(詠符望閣)>이라는 시를 짓기도 했다.
권근재(倦勤齋)
부망각 뒤쪽에 있으며, 영수궁화원의 가장 북쪽에 자리한 전각이다. 1772년(건륭 37) 건복궁화원의 경승재(敬勝齋)를 모방해 지었으며 동쪽 5칸은 부망각과 마주보고 있다.
경복궁(景福宮) 서쪽면
조선의 경복궁과 한자까지 똑같다(…). 1689년(강희 28) 강희제가 양모 효혜장황후(孝惠章皇后, 1641.11.5~1718.1.7)의 거처로 지은 전각이다. 1772년(건륭 27년)에 새로 중건하면서 건륭제가 국정을 돌본 후 휴식을 취하는 공간으로 사용했다. 1802년(가경 7)과 1891년(광서 17) 중수했다. 내부에는 건륭제 때 궁중에서 사용한 서양의 기물들이 진설되어 있다.
4.4.8. 중화궁 권역
중화궁(重和宮)
건륭제가 왕자 시절 이곳에서 지내다가 화석보친왕으로 책봉되었고, 즉위한 뒤에 궁으로 바꾸었다. '중화'라는 명칭은 순 임금을 가리키는 경칭에서 유래했다. 1743년(건륭 8)부터 매년 새해에 대학사와 한림들에게 다연(茶宴)을 베풀던 장소로 사용되다가 함풍제 이후에는 다연이 거행되지 않았다.
우화각(雨花閣)
수십 좌의 불상이 안치된 궁중에서 가장 큰 3층 불전으로, 1749년(건륭 14) 건륭제가 몽골 출신의 국사 호토극도(胡土克圖)의 건의에 따라 티베트에 있는 탁림사(托林寺) 단성전(壇城殿)을 모방해 개건했다. 가장 꼭대기의 지붕 처마에는 금박을 입힌 4마리 용 조각이 장식되어 있다. 이곳은 티베트 불교의 라마승들이 황제와 황실 가족의 안녕을 기원하며 불공을 드리던 공간이었다.
수방재(漱芳齋)
1420년(영락 18)에 세워진 뒤 건륭제 때 중수되어 황태후의 생일날 연회를 베풀고 왕공대신과 함께 경하하는 공간으로 사용되었다. 동치제의 후궁 헌철황귀비(獻哲皇貴妃, 1856.7.2~1932.2.3)가 이곳에 거주하기도 했다.
4.4.9. 화원
어화원(御花園)
자금성 중심축선에 위치한 후원으로 곤녕궁 뒷쪽에 있어서 명나라 때는 궁후원(宮後園)이라 했다가 옹정제 때 어화원으로 개칭했다. 동서 135m, 남북 89m, 면적 12,015m²이며 흠안전(欽安殿)을 중심으로 동쪽에는 어경정(御景亭)·이조당(璃藻堂)·부벽정(浮碧亭)·만춘정(萬春亭)·강설헌(絳雪軒)이, 서쪽에는 연휘각(延輝閣)·위육재(位育齋)·징서정(澄瑞亭)·천추정(千秋亭)·양성재(養性齋)·사신사(四神祠)·정정(井亭)·녹대(鹿臺) 등의 정자·대·누각이 소나무·측백나무·대나무 숲과 괴석 사이에 자리하고 있다. 황제와 후비들이 휴식을 취하고 경치를 감상하던 곳이었다.
건복궁화원(建福宮花園)
자금성 내 서북쪽에 있으며 건륭제가 1742년(건륭 7)부터 강남 원림의 풍취를 살려 조영한 화원이다. 1923년 11월 25일 화재가 발생해 정이헌(靜怡軒), 연춘각(延春閣), 경승재(敬勝齋), 중정전(中正殿) 등이 소실되었다가 70여년이 지난 1999년 고궁박물원에서 4백만 달러를 투입해 복원공사를 하기로 결정했다. 이에 따라 복원 1기 프로젝트로 연춘각의 중건이 시작, 2001년 4월 3일에 상량식이 거행되었으며 기타 다른 전각들도 복원되어 중국을 방문한 국빈 가운데서도 최고 국빈을 접견하는 장소로 사용되고 있다.
영수궁화원(寧壽宮花園)(건륭화원(乾隆花園))
건륭제가 1772년(건륭 37)부터 1776년(건륭 41)까지 영수궁을 개건하면서 조성한 동서 40m, 남북 160m의 후원으로 건륭화원이라고도 불린다. 가산과 괴석, 꽃과 나무, 정자와 누대를 조화시키면서 풍부한 색채를 사용해 건륭제의 심미안을 한껏 드러내는 후원이다.
4.5. 유명한 장소
진비정(珍妃井)
영수궁 북쪽 정순문(貞順門) 내에 위치한 우물이다. 겉모습은 일반적인 자금성 내의 우물과 다를 게 없지만 이 우물이 유명해진 건 1900년(광서 26) 8개국 연합군이 북경을 점령하자 서태후가 광서제를 데리고 서안으로 도망치기 직전 평소 개혁적인 성향으로 서태후의 눈밖에 난 광서제의 애첩 진비(珍妃)[21]를 우물 속에 던져 익사시켰기 때문이다. 1년 뒤 북경으로 돌아온 광서제는 진비의 시신을 건져 후하게 장사지냈으며, 선통제가 즉위하자 진비와 자매였던 근비(瑾妃 = 단강황귀비(端康皇貴妃, 1873~1924))가 진비정 북쪽의 정순문 천당(穿堂) 동쪽에 진비의 위패를 모신 작은 영당을 마련해 회원당(懷遠堂)이라 이름짓고 삭망 때마다 향을 피우며 그녀의 넋을 달랬다.
5. 자금성 주변
자금성 주변은 황성(皇城)이 둘러싸고 있었지만 중화인민공화국이 성립되고 나서 베이징 시가 도시 정비 계획을 추진할 때 동서 교통에 방해된다는 이유로 철거해 현재는 천안문 양 옆에 그 흔적만 남아 있다. 외성(外城)도 같은 논리로 철거되었다. 이곳에 현존하는 대표적인 유적으로 좌묘우사(左廟右社)의 원칙에 따라 자금성 정면 양쪽에 세워진 태묘(太廟)와 사직단(社稷壇)이 있다.
5.1. 태묘(노동인민문화궁)
천안문 동편에 위치한 139,600m² 면적의 태묘는 조선의 종묘와 같은 역할을 수행하는 곳으로 역대 황제와 황후의 위패를 모시고 각종 의식을 거행하던 공간이었다. 남북이 긴 장방형의 평면이며 3겹의 담장이 사방을 둘러싸고 있다. 1420년(영락 18) 지어진 이래 1544년(가정 23) 개건하였으며 청나라가 멸망한 후 1924년 화평공원(和平公園)으로 개칭했다가 1950년 노동인민문화궁(勞動人民文化宮)으로 바뀌면서 제례를 행하는 본래의 기능을 상실해 현재는 공연, 전시회 등이 열리는 행사장으로 사용되고 있다.
5.2. 사직단(중산공원)
5.3. 경산공원
경산은 산이 없는 북경의 특성상, 자금성 뒤편에 주산으로 지은 인공산이다. 북해공원의 호수를 팔 때 나온 흙을 퍼내 쌓았다고 하며 명나라 때는 만세산이라고 불렀지만 청나라 때 경산으로 이름을 고쳤다. 본래 자금성의 북쪽 후원으로 사용되었고 공원 안에도 궁궐이 있었는데, 지금은 경산의 5개의 정자만 공개한다. 가장 꼭대기에 있는 만춘정에 올라가서 내려다보는 자금성의 경관이 유명하다. 자금성의 북쪽 끝 신무문을 나오면 바로 앞에 경산공원이 보인다. 명나라 마지막 황제인 숭정제가 목을 매 자결한 곳이기도 하다.
5.4. 중난하이
5.5. 북해 공원
5.6. 중화문
현 모주석기념당 자리에 있던 문
베이징 내성 남문인 정양문과 천안문사이의 어도에 있던 문이여서 황후가 혼인하러 궁궐로 들어올때 이문으로 들어왔다. 명나라땐 대명문이었고 청나라땐 대청문으로 고쳤고 중화민국때 중화문이 되었다가 모주석기념당 짓는다고 헐렸다.
6. 관광 팁
•입장료는 일반인이 11월~3월까지 40 위안,
4월부터 10월까지는 60 위안.
외국인은 기본적으로 일반인 요금의 적용 대상이다.
가이드 비용은 최소 200 위안이지만
오디오 투어(40 위안)이 훨씬 더 싸고 믿을만하다.
휠체어는 500 위안을 맡겨두면
공짜로 사용할 수 있다.
그외 일부 구역에서는 15 위안 이내에서
추가 요금을 내야 한다.
•관광 가능 시간은 11월~3월에는
오전8시 30분~오후 4시 30분,
4월부터 10월까지는 오전8시 30분~오후 5시.
•춘절, 노동절, 국경절 연휴에는
사람이 어마무지하게 많이 몰리며,
다른 공휴일에도 사람들이 몰리는 건 마찬가지다.
다른 유명한 관광지들도 마찬가지지만,
천안문에서부터 만원전철을
간접 체험할 수 있을 정도.
상징성이 워낙 큰 유적이다 보니
중국 공안이 통제하고 있지만
그래도 조심하자.
•베이징 시내가 거의 그렇지만,
이곳도 공안이 거의 100m 간격으로 배치되어 있다.
•보통의 배낭여행자들은 오문으로 입장했다가
신무문으로 나온다.
이 신무문 밖, 경산공원 사이가 헬 오브 헬이다.
특히 성의 폐관시간이 다가오는
4시 30분이 넘어가면
버스를 타려는 이들과 우왕좌왕하는 관광객들,
그리고 후퉁 관광을 가자고 하는
인력거꾼과
호구를 찾아 다니는 사기꾼,
고래고래 소리지르는 공안까지
정말 가만히 있어서 정신이 혼란해진다.
문제는 신무문 밖에서
지하철까지의 거리가 꽤 된다는 것.
•배낭여행객들에게 추천하는 것은
절대 여기서 지하철, 버스 이외의 것을
타지 말라는 것.
오토바이 개조한 이상한 교통수단을 탔다가는
호구를 넘어 강도를 당하기도 십상이다.
이는 경산공원도 마찬가지.
택시를 타도 택시기사들이
미터기를 끄고 값을 배 이상으로 부른다.
가장 이상적인 방법은 버스를 타고
가까운 지하철역으로 이동하거나
큰 대로로 나가 택시를 타는 것.
다리가 튼튼하다면 역까지 걸어가는 것도
생각해볼만 하다.
•자금성은 지금도 보수 중이다.
구역 중 하나를 출입 통제하고
몇년 간 복원 및 보수한다고 한다.
•고궁박물원 당국은
자금성 관리비용을 마련하기 위한 일환으로
스타벅스의 자금성 입점을 허용해
건청문 광장 오른쪽에서
2000년 9월부터 영업을 시작했다.
하지만 "자금성의 존엄과
중국 문화의 전통을 해친다"는
여론이 들끓자
결국 2007년 매장이 폐쇄되었다.
7. 자금성의 크기
전한의 정궁인 미앙궁은
대지면적 약 4.8km²로
인류 역사상 가장 큰 궁궐이었고,
수나라의 정궁인 태극궁은
대지면적 약 1.92km²,
당나라의 정궁인 대명궁은
대지면적 약 3.11km²로
대지면적이 0.72km²에 불과한
자금성보다 훨씬 넓었다다고 하지만,
이는 낭설이며 오해다.
이 중 좌측의 호수부분인 중난하이는
공산당 고위 간부들의 청사로 활용되어서
떨어져 나가고,
북해와 사직, 경산은 공원이 되고
태묘는 개조되어
공산당 공연장으로 떨어져 나가
진짜 황성 권역 중 제대로 보존되고 있는 부분은
궁성밖에 남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지금의 우리들은
궁성 부분만 자금성이라고 부르고 있다.
덕분에 천안문이 자금성의 정문이나
황성의 정문이냐는 식의
논쟁이 많이 벌어지는데
황성이 곧 자금성임으로 천
안문이 자금성의 정문이라는 말은 맞는 말이다.
연암 박지원이 직접 연행길에 올라
베이징을 갔다온 후에
자금성의 4문 중 남문으로 천안문을 꼽았다.
오문은 자금성 전체의 정문이 아니라
궁성의 정문이다.
원래의 규모에 비해
크게 축소된 지금의 자금성 역시
성벽이 오래되어 심하게 훼손된 부분이 많다.
부식, 풍화, 균열, 침하 등
거의 종합선물세트 급으로 망가진 상태라
폭우가 쏟아지거나 할 경우
무너져 내릴 상황이라고.
결국 2016년 11월부터
중국정부가 정부수립 후
최대의 수리 프로젝트에 들어갔다.
관광객의 입장이 중지된 것은 아니지만
성벽만은 오문(午門)에서
동화문(東華門)에 이르는
약 500m 구간만 관람 가능하다고.
오히려 명청시대의 자금성 면적이
미앙궁보다 2배 이상 넓다.
즉, 자금성은 인류 역사상
최대의 궁궐이 맞다.
더군다나 그 크다는 미앙궁도
실제로는 청나라 황제의
여름별궁인 피서산장 보다 작다.
8. 여담
•일본 만화 천공의 옥좌에서는
가상의 중국왕조가 그 배경이 되는데
황궁으로 자금성이 등장한다.
지도를 보면 명나라인데
극중의 황궁에서의 등장인물들의 복식은
당나라, 명나라, 청나라의
궁중 옷차림으로 빠짐없이 나온다.
•자금성 전체의 크기는 광대하지만,
단일 목조 건물로 비교하면
태화전은 일본의 다이부츠덴보다 작다.
•자금성 안에 자객이 숨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자금성 안에는 나무가 한 그루도 없다는 말이 있는데
이는 정확하지 않다.
위 위성사진을 보아도 알 수 있지만
자금성 안에는 녹지가 상당히 많이 있다.
물론 오문에서 태화전을 타고 이어지는
중심축 건물 부분에는
나무가 없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후원과 부속건물 부분에는
나무가 많이 있다.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 감독의 영화
마지막 황제의 무대로
놀랍게도 촬영장이 아닌
실제 장소에서 촬영되었다!
이는 중국 정부의 이례적인 배려가 있었기 때문.
다만, 엘리자베스 2세가 촬영 중
방중했는지라 자금성 방문은 못했다고.
•뉴에이지 음악가 야니가
1997년 5월 30일 서양인 음악가로는 최초로
이곳에서 공연을 가졌다.
조명비 160만 달러,
총 무대비용 400만 달러,
스탭 200명,
준비기간 2년이 소요된 이때의 실황을 담은
라이브 앨범이 'Tribute'.
그리고 1998년 9월 5일
장이머우 감독이 연출하고
주빈 메타가 지휘를 맡은
푸치니의 오페라 투란도트가
자금성 특설무대에서 공연되었다.
두 공연 모두 정확하게 따지면
자금성 앞 태묘
(노동인민문화궁)에서 한 것이지만,
일반적으로는 통칭해서
자금성 공연이라고 부른다.
•2011년 들어서
유달리 사건 사고가 끊이지 않고 있다.
홍콩 량이창 박물관의 특별전이 열리던
성숙전(誠肅殿)에 전시된 예술품이
도난당하는 소동이 일어나고,
송나라 때의 국보급 청자 접시가
직원의 실수로 깨진 걸 은폐하려다가
언론에 폭로되는가 하면,
건복궁(建福宮)을 갑부를 위한
회원제 클럽으로 운영하려다가
여론의 지탄을 받는 등
고궁박물원의 운영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냐는
지적이 계속되고 있다.
•베트남의 옛 수도 후에에 있는 황궁에는
자금성을 카피한 건물이 몇 채 있다고 한다.
아예 내정(內廷) 자체를
'자금성(Tử Cấm thành, 紫禁城, 뜨껌타잉)이라고 불렀다.
•베이징 국제 마라톤 대회에서 자
금성 성벽에 그것도 개인이 아닌 단체로
노상방뇨를 하는 사진과 기사가 실렸다.
•흔히 경복궁은 소박하고 검소한 궁궐이고
자금성은 호화롭고 사치스러운 궁궐이라는
인식이 사람들 머릿속에 박혀있다.
자금성은 제작비용도 천문학적이지만
건물구역 규모로는 전대궁궐들보다 작다.
경복궁은 자금성보다 작지만
국력에 비하면 상당히 크다.
•샤오미에서 미믹스3 공개를 진짜 자금성에서 했다.
그때문인지 자금성 에디션도 같이 공개를 했다.
•2020년 1월 24일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
확산 예방의 일환으로
일시적으로 영업 중단을 한다고 밝혔다.
이는 근 40년 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