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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9.25.土. 아침
“따르릉..따르릉..따르릉..”
휴일 날, 아침 일찍 걸려오는 전화는 대부분 조금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받게 된다. 평일 날, 자정이 넘어서 걸려오는 전화와 비슷한 만큼의 무거운 회색을 띄고 있기 때문이다.
“여어, 동생? 나 형이네. 그래, 식구들은 다 잘 있제. 작은어머님께서도 잘 계시고. 응, 그래 제수씨랑 아이들도 학교 다 잘 다니고. 아참, 아이들은 방학이 끝나서 학교로 다시 돌아갔겠구만. 내년이나 되어야지 집에 오겠네 그랴. 그래, 응응. 나도 잘 있지 뭐. 그런데 말이지. 오늘 새벽에 막내 작은 어머니께서 돌아가셨단 말이지. 그래, 그래, 건강하셨지, 글쎄 어제 아침까지 멀쩡하시던 분이 커튼 새로 바꾼다고 외출하고 돌아와서 좀 피곤하시다면서 방으로 가 누워계셨다는데 저녁식사 때가 되어 그 집 큰 동생이 방에 들어가 보았더니 숨소리가 거칠더라는 거야. 그래서 119에 신고하고 바로 응급실로 모셔갔는데 당직 의사가 검진을 해보더니 이미 뇌사상태에 빠져 있다고 마음의 준비를 하라고 그러더란 말이지, 그랴. 그리고 오늘 새벽에 운명을 하셨다는 거야. 그래, 응 응. 그래서 모레가 발인이니까 그렇게 알고 있으라고 이렇게 전화를 했다네. 응응, 그래 나도 오늘 오후에는 가봐야제. 동생이 내려오면 연락을 해줘. 내가 장례식장으로 갈 테니까. 거기서 얼굴을 보자고. 그래, 서울 쪽에는 연락들이 다 갔을 테니 동생이 연락을 안 해도 지금쯤 다 소식들을 알고 있을 것이네...... 그래, 그럼 그때 얼굴들 보기로 하세.”
고향 형님은 말끝에 허허 하고 웃으시면서 “어머니 세대가 가시면 다음은 우리 차례여~”하고 말꼬리를 길게 빼신다. 그래서 내가 형님께 물어보았다. “형님이 올해 어떻게 되시우?”그러자 형님이 말했다. “다섯, 예순다섯이지. 가만,, 동생도 예순이 거의 가까울 것인데.”그러자 내가 말했다. “거참, 형님도. 저야 예순 되려면 아직 몇 년 남았지요. 아직은 초록이 팔팔한 오십대입니다. 그런데 작은 어머니께서 올해 어떻게 되셨던가요?”형님이 잠깐 생각을 하느라고 멈칫대더니 말을 해주었다. “어, 일흔셋이라고 그런 것 같았지, 아마...”
아마.. 아마,, 그 말 뒤로도 이런저런 이야기를 조금 더 나누었지만‘그래 그럼 그때 얼굴들 보기로 하세’라는 말로 대화를 끝냈다. 재작년 봄에는 큰아버지께서, 작년 봄에는 막내 작은아버지께서 돌아가셨고, 올봄에는 넷째 작은 어머니께서, 추석을 사흘 앞둔 일요일에는 막내 작은 어머니께서 돌아가셨다. 차례야 조금 바뀌었지만 세월의 순서에는 그다지 어긋나지 않을 만큼의 일정한 흐름을 타고 와서 머물다 가신 것이다.
추석날 차례를 모셔야하는데 문상을 다녀오게 되면 차례 상 앞에서 절은 물론이고 차례 상에 오를 음식도 손을 대어서는 안 된다는 말씀이 있어서 다음날인 월요일 새벽 일찍 혼자 문상 겸 고향 바람을 쐬러 다녀오기로 했다. 대목을 앞두고 귀성객으로 도로가 여간 붐빌 것 같지 않아 인터넷으로 조회를 해보았더니 월요일 새벽 K시에 가는 첫 고속버스가 4시30분에 있었다.
새벽 세시 경에 일어나 준비를 하고 난 뒤 아내에게 고속터미널까지 차로 데려다달라고 부탁을 했다. 아직 어둠이 촘촘히 박혀 있는 밖에는 비가 제법 내리고 있었고 지하철은 아직 운행을 하기 전이라 그편이 더 나을 것 같아서 운전을 하는 아내 옆자리에 앉아 가로등불 사이로 반짝이는 빗줄기를 보며 고속터미널까지 갔다. 터미널 도착할 무렵에는 비가 더 쏟아지기 시작했다. 아내에게 손을 흔들어주고 돌아서서 터미널 입구에 들어서는 그 짧은 동안에 벌써 양복 어깨와 바짓가랑이는 빗물에 젖어버렸다. 어느 모임에 하객으로 가든지 또는 문상객으로 가든지 간에 궂은 날씨에 옷까지 비에 젖어 후줄근하게 나타나면 왠지 분위기마저 충충하게 만드는 것 같아 옷차림에 신경을 쓰는 편이지만 갑자기 쏟아지는 비에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터미널 안에 들어서니 시계는 4시25분을 가리키고 있는데 매표소는 문이 닫혀있고 사람들은 드문드문 보였다. 매표소 맞은편에 설치되어 있는 자동매표기를 두드려보니 첫차가 5시30분에 있는데 그것도 좌석이 몇 개 남아있지 않았다. 일단 발권을 하고나서 남은 한 시간 동안 무얼 할까 생각하다가 혹시 임시차라도 투입될지 모를 일이야 하면서 출발홈 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그리고 그때 출발홈 앞에서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네 시 반 가실 분 오세요. 네 시 반 가실 분 빨리 오세요.”
운전 기사석 바로 뒤에 있는 맨 앞자리에 앉으니 시야가 참 편했다. 옆 빈 좌석에 저고리와 가방을 놓아두고 좌석 등받이를 뒤로 젖힌 후 눈을 감았지만 잠이 오지 않았다. 이상하게 나는 우등고속이 일반고속보다 드러누울 때는 더 불편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허리 밑 부분이 등받이에 딱 붙지 않고 조금 떠있는 듯해서 그 공간을 밀착시켜보려고 몸을 이리저리 움직이게 되는데 몸이 편한 위치를 잡기가 쉽지 않아서이다. 아마 내 허리가 일반 표준형보다 길든지 아니라면 일반 표준형의 허리가 나보다 더 짧든지 하기 때문일 것이라 생각을 했다. 그렇게 몸을 뒤척이다보니 휴게소에서 15분간 쉬어가겠다는 안내방송이 나오고 곧이어 버스가 휴게소 주차장에 멈춰 섰다. 버스가 남쪽으로 내려온 만큼 빗발은 약해져 있었지만 새날의 희부연 색깔 속에 비는 여전히 사방 풍경들을 어슷하게 자르면서 내리고 있었다.
8시에 K시에 도착을 해서 장례식장에 들어설 때는 8시30분이 미처 되기 전이었다. 하늘에 구름은 많았지만 꼭 그만큼 푸른 하늘도 화창하게 들여다보이는 K시에는 비가 내리지 않고 있었다.
아침 식사를 하며 사촌동생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고등학교 동창인 이 댁 큰 사위가 걸어 들어왔다. 그렇지 않아도 작은 댁 큰딸인 여동생과 상갓집에서 주고받을 수 있는 덕담을 나누며 웃고 있는 참이었다.
“방울아, 너는 나이가 들어도 여전히 예쁘구나.”
어렸을 적 애칭이 방울이었던 여동생이 이제 중년을 넘어서는 쉰의 된 나이가 되었는데도 나는 여전히 방울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단정하던 오빠께서 나이가 드시더니 어째 좀 능글맞아지신 것 같아요. 그나저나 조금 있다 안 서방 오거들랑 방금 하신 그 말 크게 한 번 더 해주세요.”
“그야 뭐 어렵지 않지. 더구나 사실이 그렇구. 아이는 학교 잘 다니고 있니?”
“예, 4학년이에요.”
“그놈이 S대 다닌 다는 놈이냐?”
“예. 그런데 그놈이 아니고 그녀랍니다.”
“호오 그녀로구나. 그럼 그녀 하나냐?”
“예.”
“그럼 전공은?”
“중문학이요.”
“중문학? 윗대 어느 할아버지 DNA 속에 중문학이 있었던 모양이구나. 안서방도, 너도, 딸아이까지 모두 중문학인 걸 보면 말이다. 그렇지 않니?”
“몰라요. 아빠, 엄마가 중문학을 가르치니까 중문학이 좀 만만해보였던 모양이지요. 저 오빠, 그렇지 않아도 오빠를 뵈면 미국 유학에 대해서 묻고 싶은 게 있었는데요.”
“미국 유학에 대해서? 중문학 전공이면 학부마치고 중국으로 유학을 가야하지 않니?”
“글쎄, 석사는 중국으로 생각하고 있지만 박사는 미국으로 가고 싶은 모양이에요.”
“그래? 그나저나 너희 집에 박사가 떼로 나겠구나. 안 서방도 박사, 너도 박사, 네 딸아이도 박사면 일가족이 모두 박사로구나.”
“오빠 아이들은 전공이 뭐지요?”
“아들놈은 경영학이고, 딸아이는 국제정치학이란다. 아내 하는 말이 아빠처럼 철학이나 문학을 전공한다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근심거리를 싹 씻어줘서 기분이 매일매일 굳이라고 한단다.”
“두 아이들이 같은 학교에 다녀요?”
“아니, 한 1500Km는 떨어져 있을 걸.”
“그럼 고등학교는 같이 다녔나요?”
“아니, 고등학교 때는 아마 한 2000Km는 더 떨어져 있었을 거다.”
“왜 그렇게 뚝 떨어져서 다녔데요?”
“서로 가고 싶어 하는 지역이 달라서 각자 취향대로 보내주었거든.”
“오빠, 아이들을 미국으로 보낼 때...”
그때 어슬렁거리며 들어오는 이 댁 큰사위인 동창과 눈을 맞추고 나서 악수를 하고 손을 마주 잡았다. 원래 살집이 없는데다 나이가 들어가더니 내 손바닥에 느껴오는 동창 손마디의 감촉이 예전 명절날이면 시골에서 어쩌다 잡아보았던 당숙이나 아저씨들의 그것과 흡사했다. 우리는 오랜만의 만남을 반가워하면서 서로 궁금했던 이야기들을 주고받았다. 그러다 문상객들이 줄줄이 밀려들어오자 나는 사촌 동생들과 동창에게 작별의 인사말을 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서울로 올라오는 도중에는 간간이 비가 내리는 곳도 있었지만 서울에 도착을 하고보니 비는 멈추고 해가 그런대로 하늘 가장자리를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다음날에는 비가 하루 내내 엄청 쏟아졌다. 그리고 다음날이 추석이었다. 아침에 일어나서 이부자리를 개고 방을 청소한 다음부터는 모든 행사에서 나를 제외한 채 차례준비가 척척 진행되었다. 어느 날 뜬금없이 낙마한 장관처럼 갑자기 할 일이 없어진 나는 우리 집 대문 께를 어슬렁거리며 드나들다가 결국 활동범위를 넓혀 인적이 한가한 동네 길들을 여기저기 싸돌아다녔다. 비는 어제 밤에 멈췄지만 추석날 하늘은 흐렸다. 하늘을 짙게 덮은 잿빛 구름 아래로 돌아다니면서 왜 문상問喪을 다녀오면 차례에 함께 참석하지 못할까를 생각해보았다. 어른들께 물어보면 금방 알 수 있겠지만 내 식으로 생각을 정리해보는 것도 흥미 있는 일이었다.
사람이 숨을 거두고 명命을 다하면 그때부터 그 사람을 이 세상 사람으로 간주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바로 저 세상 사람이 되는 것도 아니다. 사람이 죽고 나서 49일 동안은 그 혼령이 차안此岸과 피안彼岸 사이에서 머물러있게 되는데 그것을 중음신中陰神이라고 한다. 차안에서도 피안에서도 존재감이 없는 중음신은 사람으로서 뿐만 아니라 제사를 받거나 참여할 수도 있는 저 세상의 혼령으로서도 대접을 해주지 않는 것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중간자中間者의 입장이란 어디서나 쉽지가 않다. 하양과 검정 사이에 분명 회색이 있지만 우리는 회색을 곤란하거나 불결한 것으로 간주하기 십상이다. 세상을 양분법으로 판단을 하면 명쾌하고 간단하던 일들이 그 가운데 있는 중간의 것들을 인정하다보면 혼돈스럽고 복잡해지기 마련이다. 그렇지만 곰곰 생각해보면 중간의 것들을 인정할 수 있는 포용력과 인내심이 양분법을 넘어서는 더 우월한 세상을 만드는 첩경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마치 삼원색三原色만 가지고 자연을 표현할 수 없는 것처럼.
추석 다음날인 추분 밤의 음력 열엿새 달은 푸른빛이 돌 정도로 밝고 아름다웠지만 이번 추석명절은 비와 구름과 생각이 많았던 길고 긴 연휴였던 것이다.
(- 희미하지만 분명히 경계에서 울려오는 소리,“따르릉..따르릉..따르릉..”-)
첫댓글 역시 생각이 남다른 긴울림님 덕분에 또 하나의 상식을 깨우쳤습니다... 사고를 흑백 양분법으로 나누려는 관습을 바꿔야겠습니다
추석 특집 드라마를 본 것 같은 느낌이다.
문상에 다녀오면 차례를 지내지 못하는걸 몰랐네요... 어쩌면 중간의 것들을 인정한다는게 가장 편한 처세술은 아닐런지요..끝자락에 서면 외롭고 고독하니까..잘읽었읍니다.
왜 사람들이 중용을 가장한 이 편도 저 편도 아닌 중간자로 머물려는 이유가 "끝자락에 서면 외롭고 고독해"서 그런거였군요.
이세상 사람도 아니고 저 세상 사람도 아닌 혼돈의 중음은 더 외롭고 고독할 것 같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