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도 명절증후군이란 말이 있겠지요?
예전엔 그 말이 이 땅의 많은 며느리들이 명절만 되면
호되게 몸 고생 마음 고생을 해서 생기는 여러 이상
증상들을 두고 하는 말이었는데, 요즘은 그 대상이
시어머니나 친정어머니에게로 많이 옮겨가는 중이라고
듣고 있습니다.
그런데 세상에는 언제나 열외는 있는 법입니다.
제 아내. 바로 열외 며느리였습니다.
여러 번 아내의 병치레에 대한 이야기를 했던 것 같습니다.
자랑은 아니지만 옛날부터 병은 소문내라고 하였으니
제 딴에는 옛말을 충실히 따른 셈이죠.
그래도 동방예의지국인 우리나라에서 며느리가
잔병치레를 좀 자주 한다고 해서 쉽게 열외 며느리가
될 수는 없는 일이죠.
삼십 년 조금 덜 된 어느 한 해는 추석을 앞두고는
폐렴을 앓아서, 그 이듬해 추석을 앞두고는 루프스를
앓아서 명절 고향을 향한 행렬에서 빠졌었습니다.
루프스란 병이 자가면역질환이다 보니 그 치료약으로
스테로이드란 호르몬제제 알약을 먹는데...
초기에 하루 열 알씩 먹던 약이 두 알로 줄어들 동안
당연히 명절에 고향으로 내려갈 수가 없었고,
그 후 일 년 반 정도의 세월이 흐른,
2000년의 설날.
그때도 저 혼자 설을 쇠러 고향 내려갈 준비를 하는데...
아내가 배가 약간 아프다고 했습니다.
워낙 자주 아프다 보니 미안한 마음이 들었든지 그 말
끝에 견딜만하다는 말을 덧붙이며 저에게 꺼낸
말이었습니다.
자주 있는 명절도 아니고, 혼자 부모님께 내려가는
마음도 죄송한데 보기에 많이 아픈 것 같아 보이진
않아서 저는 혼자 고향에 내려가기로 결정했습니다.
고향에서 설을 쇠는 동안 수시로 연락을 주고
받았습니다. 그때마다 아내는 참을만하다고 했고
저는 내심 불안했지만 그 말을 믿었습니다.
설을 쇠고 난 다음 날 아침 귀경 열차에 오르기 전에
다시 집으로 전화를 했습니다.
근데 전화로 들려오는 아내의 목소리는 정상이
아니었습니다.
'아... 너무... 아파요. 이제 출발해요?
올 때까지 어떻게든 참아 볼게요... 끙...'
목소리에는 밤새 아픔을 참아낸 고통이 묻어있었고
그냥 참고 기다리라고 하기엔 뭔가 불안한 긴박감이
느껴졌습니다.
얼른 김포에 살고 있던 작은누나에게 집에 들러보고
필요한 조치를 취해 달라고 전화로 부탁을 했습니다.
그 통화를 마지막으로 제 핸드폰 배터리는 수명을 다했습니다.
'내려오는 게 아니었어...'
'아무 일 없어야 할 텐데... 잘 이겨내야 할 텐데...'
'누나가 잘 알아서 처리할까...?'
'목소리가 보통 아픈 목소리가 아니던데... 또 무슨
큰 병이 닥쳐오는 건 아닐까...?'
'내가 올라가기 전까지는 잘 견뎌내야 할 텐데...'
기차를 타고 올라오는 내내 제 발은 가만히 바닥에
붙어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안절부절 서성대고... 머릿속에는 갖가지 걱정과
상념들이 뒤엉켜 갈피를 잡지 못하고...
손에 꼭 쥐고 있던 배터리가 다 닳은 핸드폰은 점점
땀으로 얼룩져 갔습니다.
역에 내려 전화할 틈도 없이 집으로 내달리니
누나와 함께 온 질녀가 얼른 세브란스 병원 응급실로
가보라고 했습니다.
누나가 오자마자 상태를 보고는 서둘러 응급실로
데리고 갔다고...
반은 반갑고 반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쳐다보는
아이들을 질녀에게 맡겨두고 얼른 차를 내달아
응급실로 뛰어드니 응급실 침대에 누워 있다가
나를 본 아내가 참았던 울음을 울먹거립니다.
수속차 나가있던 누나가 들어오고 곧이어 담당 의사가
들어왔습니다.
'곧바로 수술해야 합니다. 얼른 수술 동의서에
사인하세요. 맹장염입니다.'
'좀 일찍 오시지... 맹장이 약간 터진 것 같습니다.
많이 아팠을 텐데 어떻게 참았는지...'
수술 중에 가장 간단한 수술이라는 맹장수술이었지만
수술실로 들어가서 회복해서 다시 나오는
그 네 시간은 제가 서울로 올라오던 기차간에서
보낸 네 시간보다 훨씬 더 긴 시간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날 저녁 입원실로 옮겨진 아내 곁에서 아픔에
지치고 놀란 아내를 달래느라 우스개 소리로 분위기를
바꾸려 애를 쓰던 제 입안에는 바깥으로 내뱉지
못한 말 한마디가 맴돌고 있었습니다.
'미안하다... 정말 미안해...'
그 후로 아내는 당당한 열외 며느리가 되었습니다.
새로운 병치레를 할 때마다 저희 집으로 올라오셔서
몸소 고생을 겪으셨던 어머니의 동의와 제 염려와
주변 친척들의 묵계 하에 열외 며느리가 되었습니다.
이젠 타국에서 살고 있고, 그동안 부모님 두 분도
돌아가셨으니 이젠 그 열외 며느리 딱지를 떼내려
해도 떼낼 도리가 없습니다.
이곳에서 오래 살다 보니 이제 설이나 추석은
남의 나라 명절처럼 조용히 넘어가곤 합니다.
그렇지만 명절 때가 되면 늘 그때 일이 떠오르고,
다행히 카페 활동을 하다 보니 들뜬 명절 분위기에도
편승할 수 있어 다행이라 여기며 삽니다.ㅎ
첫댓글 그랬었군요.
회한이 많겠네요.
이젠 건강을 회복하셨겠지만
부모님 모두 돌아가셨으니~
이젠 부모님 추억하면서 두 분이
잘 살면 되겠지요.
텍사스가 건조하고 따뜻한 곳이라
다행히 아내는 이곳에 와서 재발
하지 않고 다른 병도 없이 건강 잘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이젠 99세의 아이들 외할머니 한 분
살아계시는데, 제가 열외 사위가
되고 말았습니다. ㅎㅎ
많이 놀라고 힘든 날들 이였네요
몸이 약한 부인을
진심으로 사랑하셨네요~
좋은 남편으로 느껴집니다
타국에서
열심히 살아 가시는 마음자리님!
마음으로 응원합니다~^^
오래전의 일이라 희미해지는 기억입니다.
요즘은 아내가 제 건강을 걱정합니다. ㅎㅎ
미국에 가시어 건강이 회복되었다니
전화위복입니다.
타국이나마 만족하며 즐겁게
일상 영위 하세요.
네. 똘똘뭉쳐 각자 자리에서
열심히 삽니다. ㅎ
열외요?
읽기전에는 농땡이치는 건달이고나하는 선입감이있었지아주 당당한 이유가있는 열외입니다
내 사정을 이야기하고 싶지만부끄러워 차마 올릴수없습니다,
멍어리 냉가슴 앓는다고 제가 그꼴입니다,
매해 매번,이 아픔을 누구에게 하소연하리요?
부모님께 죄송하여
마음은 울고있습니다.
호반청솔님 인품이야 글로 잘 보고 있는데요, 언제 마음 홀가분하신 날에 벙어리 냉가슴 앓으시며 묻어두셨던 사연도 훌훌 털어놓으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공감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멀리 계시지만,
마음은 항상 고국땅이겠지요.
열외 며느리가 될 수 밖에 없었지만,
아내에 대한 사랑이
남편에 대한 사랑이
뚝뚝 흘러 나오는 옛 기억입니다.
그만큼, 명절이면 부모님 찾아뵙기는
본래의 당연한 이야기였던 것이지요.
타국 땅에 계셔도
마음은 고국 하늘을 바라보겠지요.
특히나 명절엔....
나는 콩꽃님의 부덕이 부럽기만합니다,
부덕이란 타고난 바탕과 교육의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습니다. 명절이면 더하지요. ㅎ
주말 집에 쉬면서 옛명절 추억
떠올리다 보니 그때 그 시절의
추억이 떠올랐습니다.
요즘은 명절이면 아들들이 중간에 끼어서 마음고생이 더 심한 듯합니다.
저도 40년 넘게 명절을 쇠러 고향에 다니면서, 개선책은 없을까 늘 고민합니다.
이젠 열외가 되셨지만 그 고충 이해합니다.
그렇다고 들었습니다.
고부간의 중간에 서야하다보니
그 아들의 입장이 만만치 않겠지요.
저는 막내라 그런 고충이 한결 덜했습니다.
세상에나~
밤새 맹장염을 앓으셨던
사모님 참을성이 대단하시네요.
참을성이 항상 좋은 결과만
가져오는건 아니라는걸
저도 뒤늦게 알았지만요.
시부모님이 돌아가시고 나면
며느리 역할도 끝나더군요.
한국의 며느리들
정말 애 많이 쓰고 살았습니다.ㅋㅋ
저도 스무살 때 맹장이 터질 정도로 앓아 보아서 그 아픔을 알지요.
그래서 더 미안한 마음이 컸었어요.
요즘은 예전과는 달리 좀 더 합리적인
방법으로 명절을 쇠는 것 같습니다. ㅎㅎ 물론 옛 어른들이 보신다면
펄쩍 뛰시겠지만요.
시대 따라 변해야지요.
부인께서 명절날 홀로 남으셨다가 맹장이 터져 큰 어려움을 겪으시고
열외며느리가 되셨다는 얘기이군요. 지금은 건강이 많이 좋아지셨는지요
제가 영월에서 신혼을 보낼때 몸이 유난히 약한 아내는 서울에서 제부모님이 오신다면
며칠전부터 끙끙 앓았었지요. 오시면 간신히 부모님을 모셨던 생각이 납니다
그리고 얼마 안되어 부모님이 모두 돌아가시고 아내도 건강이 많이 호전되었는데
부모님이 지금 살아계신다면 잘해드릴수 있을텐데 하고 후회합니다
몸은 약하고 흠 잡히고 싶진 않고...
그런 마음 이해하고도 남습니다.
제 아내도 그랬으니까요.
지나고 돌아보니 여러가지가 후회로
남습니다.
부인 걱정에 노심초사한 시간을 보내셨네요.
지금은 많이 좋아지셨다니 다행입니다.
맹장 수술 얘기를 하시니
잊었던 옛 기억이 납니다.
맹장이 터지고도 한참, 복막염이 되어
수술도 회복도 얼마나 힘들었는지...
아플 땐 인내가 미덕이 아니더군요.
참아서 괜찮은 것이 있고, 참으면 안 되는 것이 있지요.
몸이 아픈 건 절대 참아서는 안 되는 일이지요.
복막염이 되었으니 얼마나 힘이 더 들었을까요...
사모님께서 많이 아프셨군요.
열외 며느리가 될 수 밖에 없었겠어요.
마음자리 님 가족들께서 인품이
좋으신 분들이라 사모님이 열외 며느리가
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저는 몸과 마음이 많이 아파도 열외 며느리가
될 수 없었답니다.
손아래 두 동서가 이혼을 하고 나간지라
맏며리인 저혼자서 늘 몸살약 먹어가면서
일을 했지요.
명절도 추석보다는 설이 더 힘들었어요.
어른이 계시니 새배꾼들이 드나드니 손님
대접하기도 참 힘들더라고요.
이제는 맏며느리도 졸업하고 나니 아이들한테
명절에 여행가고 싶으면 가고 처가에 가서
지내고 싶으면 처가로 가라고 합니다.
마음자리 님, 가정을 아름답게 이끌어 가시는
모습이 참 보기좋습니다.
그 시절 그 지역, 동서도 없이 맏며느리 혼자 감당해야 하는 명절.
법도와 지켜야할 예절이 왜 그렇게 많던지요...
그 힘듬과 고됨이 충분히 공감ㄷ히고도 남습니다.
글로 쓰셔도 참 좋은 소재일 것 같습니다.
아프면 본인이 제일 괴롭지요.
열외는 당연합니다.
그간 아내를 지켜 보시던
마음자리님의 마음도
수시로 타들었지 싶어요.
가정을 사랑으로 든든하게
받치시지요.
올해도 댁내 두루 행복하십시요.
아프다고 명절 열외 받기가 쉽지 않던 시절이었지만 반복해서 아프다보니 열외를 시켜주신 것 같았습니다.
아버지도 저처럼 막내시라 큰댁으로 제사를 모시러 가다보니 집에서 할 일은 많지 않아서 다행이었습니다.
물도 설고 산도 설은 타국에서
그 힘든 병마를 이기고 사신다니
대단하다는 감탄사밖에 놀랍습니다.
모르긴 해도
따뜻한 마음을 가지신
남편 덕분이 아닌가?는 생각을 해보며
새해에는 더욱 건강하시길 기원합니다.
좋은 의사 만나서 잘 관리 받고 있는 덕분입니다.
예지원님도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건강하세요~
글에서 마음자리님의
지극하신 아내 사랑이 느껴집니다
옛일이지만 발빠른 대처로 부인이
무사하셔서 얼마나 다행인지요
옛날에 저의 큰외삼촌이 맹장이 터진줄 모르고
단순한 배탈로 여겨 까스명수만 여러병 먹고
버티다 그만...
당시는 병원 문턱이 높기도 했지만 무지가
빚어낸 비극 이겠지요.
저희 시댁 형제들은 다 고향에 살아서
명절이나 제사때 서로 모이지만 저희는
타지에 살다보니 제대로 참석을 못해서
저도 본의 아니게 열외 며느리가 됐어요^^
윗글에서 해솔정님의 시댁에 대한
애정과 사랑이 어떠신지 잘 알 수 있었어요.
때가 맞으면 그 열외가 열의로 바뀔 겁니다. ㅎ
맹장염을 참었으니 얼마나 아펏겠어요.ㅠㅠ
명절 때만 되면 떠 오를 것같아요.
잔병 치례가 많으면 아무래도 더
챙기게되긴해요.
알게 모르게 사랑을 듬뿍 받는 맘 자리님
와이프 같아요.
저도 스무살 무렵에 거의 복막염 되기
직전까지 맹장염을 앓아봐서 잘 알지요. ㅎ
가끔 그런 농담합니다. 자주 아픈 덕에 호강했다고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