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록코트의 유행을 도운 더블릿
프록코트는 허리 품이 잘록하고 아랫단이 무릎까지 내려오는 남성용 외투다. 프록코트가 오늘날의 디자인으로 자리 잡은 것은 나폴레옹전쟁 때였다. 원래 오스트리아‧프러시아 연합군 장교들이 입던 제복이었는데, 기능성과 실용성이 뛰어나 프랑스군도 이를 제복으로 채택하게 되었다. 프록코트의 원형은 16세기에 출현한 영주나 기사들의 복장인 더블릿(Doublet)이었다. 이 옷은 그 위에 갑옷을 덧입기 위해 몸에 착 달라붙도록 제작되어 있었다. 패션 감각이 뛰어난 프랑스 왕 루이 14세가 더블릿을 입기 시작하면서 전 유럽으로 번져갔다.
더블릿을 개량한 프록코트가 처음 나타난 것은 18세기였다. 처음에는 무릎까지 치렁치렁 내려오는 형태라 ‘수도사의 옷’이라고 놀림을 받기도 했지만, 점차 허리에 끈을 묶거나 단추로 앞을 여밀 수 있는 코트 형태로 바뀌면서 프랑스‧스페인‧이탈리아‧루마니아‧프러시아 등 유럽 각국에서 널리 유행하기 시작했다. 19세기로 접어들자 오스트리아와 프러시아 장교들이 프록코트를 제복으로 채택하여 전장에 모습을 드러냈다. 이때는 ‘귀족의 옷’이라고 불렸을 만큼 허리가 잘록하고 화려한 장식이 달려 있는 멋진 옷으로 형태가 바뀌어 있었다.
‘귀족의 옷’이라고 불릴 때 프록코트의 가장 큰 특징은 칼라와 소매가 없는 것이었다. 귀족 출신 장교들이 안에 받쳐 입는 저킨(Jerkin)에 레이스가 달린 소매가 있기 때문에 프록코트에는 별도의 소매가 필요 없었던 것이다. 당초 프록코트에는 단추가 한 줄만 달려 있었는데, 이는 국방예산을 절감하기 위한 조치였다. 원래 두 줄로 달려 있던 단추도 전쟁이 장기화되면 한 줄로 바뀌곤 했다. 19세기 전체가 전쟁의 세기였기 때문이다. 1840년 프러시아가 프록코트를 장교들의 표준제복으로 정하자 프랑스‧러시아‧미국 등도 이를 따랐다. 프록코트가 전장의 비바람과 추위를 막아주는 데 그만큼 효과가 컸기 때문이었다. 이후 서구의 다른 나라들도 순차적으로 연미복 대신 프록코트를 장교들의 제복으로 채택했다.
남군의 영웅 로버트 리 장군
프록코트가 가장 잘 어울리는 군인으로 미국인들은 상굿도 남북전쟁 당시 남군 총사령관 로버트 리 장군을 꼽는다. 그는 비록 패전지장이었지만 미국인들은 승장인 북군 총사령관 율리시스 그랜트 장군보다 리 장군을 더 위대한 군인으로 꼽는다. 역사박물관에서도 미국 국민들은 회색 프록코트를 입고 있는 리 장군의 동상 앞에 가장 길게 줄을 늘어서 있다.
미 육군은 1851년 장병들의 제식복장을 통일하면서 상의 외투로 프록코트를 채택했다. 보병은 청색, 포병은 진홍색, 기병은 주황색, 산악부대는 초록색으로 구분했다. 지휘부와 참모들은 검정 프록코트를 입었다. 1861년 남북전쟁이 발발하자 남군과 북군은 혼동을 피하기 위해 즉각 군복부터 바꾸었다. 남군은 짙은 회색, 북군은 청색을 채택했지만 프록코트의 모양은 그대로 두었다. 남군이나 북군 모두 프록코트의 디자인을 좋아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남북전쟁을 승리로 이끈 아브라함 링컨 대통령도 늘 프록코트를 입고 다닌 인물로 유명했다. 다만 그가 프록코트를 입고 다닌 이유는 멋을 부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193㎝의 신장과 빼빼 마른 몸매에 달리 적합한 복장이 없기 때문이었다. 링컨 대통령의 프록코트를 제작하던 ‘브룩스 브라더스’라는 패션 브랜드는 상굿도 존속하면서 고급 브랜드 이미지를 유지하고 있다. ‘브룩스 브라더스’는 1865년 미국 역사에 남을 유명한 프록코트를 제작했는데, 링컨은 이 옷을 입고 4월 4일 미 의회의사당 앞에서 재선 취임연설을 했다. 이어 열흘 뒤인 4월 14일 포드극장에서 어느 미친놈의 총격을 받고 서거할 때도 이 프록코트를 입고 있었다.
카키색 Khakis 군복
19세기 이전까지 유럽에서 군복은 부의 상징이었다. 귀족만 임관될 수 있는 장교들은 화려한 색상을 지닌 고급 원단으로 군복을 만들어 입고 한껏 멋을 내고 다녔다. 20세기로 접어들어 전쟁의 양상이 바뀌면서 군복에도 획기적인 변화가 왔다. 장교든 사병이든 단일 색과 디자인으로 통일된 군복을 입게 되었던 것이다. 제1차 세계대전이 결정적인 변화의 원인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은 무기의 발전과 함께 전쟁 양상도 완전히 바꾸어놓았다. 19세기까지만 해도 저격이라는 개념이 없어 장교나 특정 군인을 겨누어 총을 쏘는 일은 없었다. 비신사적이라는 이유 때문이었다. 미국 독립전쟁을 배경으로 한 영화 《패트리어트-늪 속의 여우》에도 보면, 영국 장군 찰스 콘월리스가 미국 민병대 대령 벤자민 마틴에게 장교를 쏘는 일을 삼가달라고 요청한다. 그러나 무기와 조준경의 정확도가 높아져 장교가 주 표적이 되자 멀리서도 식별이 가능한 화려한 색상의 장교용 복장과 장식들은 삽시에 자취를 감춰버렸다.
뛰어난 저격술로 장교 사망률이 치솟자 귀족들이 장교 지원을 기피하면서 그 대안으로 각국에 설립된 것이 사관학교였다. 사관학교를 졸업하면 평민도 장교가 될 수 있기 때문에 지원자가 줄을 이었다. 평민이 장교가 되면서 호화로운 군복을 사 입을 형편이 되지 못하자 자연스럽게 제복이 통일되었고, 개인이 사 입던 제도도 국가에서 무상 지급하는 형태로 바뀌었다. 이때 통일된 군복의 색상으로 등장한 것이 카키색이었다. 처음에는 똥색이라며 놀림도 많이 받았지만, 실전에서 그 효능이 입증되자 오래지 않아 분위기가 예찬으로 바뀌었다.
카키는 힌두어로 먼지라는 뜻이다. 영국이 1846년 식민지 인도의 서북부 국경에 국경수비대를 창설했을 때 처음 채택한 군복은 면 소재의 흰색 전통복장이었다. 목에 칼라가 없고 상의가 무릎까지 내려오는 ‘쿠르타’라는 옷이었다. 그런데 고온다습한 지역에서 흰옷을 입고 근무하다 보니 하루도 입기 전에 제복이 더러워졌다. 이에 몇몇 사병이 제복에 흙탕물을 들여 때가 타도 잘 표시가 나지 않는 방법을 쓰기 시작했다. 이를 카키색이라고 했다.
1848년 인도국경수비대가 새로 군복을 맞출 때였다. 부대에는 영국군의 전통군복인 빨간색 제복을 일제히 맞출 예산이 없었다. 논의 끝에 ‘쿠르타’를 제복으로 채택하되 카키색으로 통일함으로써 값싸고 때가 잘 타지 않는 제복으로 자리를 잡게 되었다. 마침 부대 주변에는 마자리야자가 많이 식생하고 있었는데, 그 열매로 물을 들이면 통일된 카키색을 얻을 수 있었다. 이후 카키색 군복은 전 영국군으로 확산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여 수많은 장병이 죽어나가자 다른 나라 군대도 일제히 영국군 제복을 본떠서 카키색 군복을 채택했다.
첫댓글 멋진 제복에 코트 가 변형이 되어 군인들을 위한 제복이 되었네
내가 항상 프록코드 타입을 자주 선호해 그런종류 옷이 많아유^^
내힢이 젊을때 허리선에서 좀 두드러져 지지바 같단 소릴 더러 들어 그걸 감추려....^^
더운데 집필 하시느라,....^^씨원한 로찐!~냉장고 서 꺼내시게^^커억!~~조흐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