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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때 우리 가수님!이 부르는 노래마다 이야기(비록 세 편에 불과했지만요)를
만들어 보며 재미있을 것 같다는 다소 무모한 생각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희한하게 우리 가수님!의 노래에는 단순히 노래만이 아니라
그 속에 어떤 이야기들을 품고 있는 듯 했거든요.
얼마 전 원주 고구마축제에서 오랜만에 들었던 백일홍이 지나간 시간들을
아련히 떠올리게 했습니다.
당시 백일홍에 대한 열정들이 정말 대단했죠.
원주천에 백일홍길이 생겨났고 또 많은 에밀스들
백일홍 심으랴 잡초 매랴 하면서 수시로 오가기도 하고,
또 삼행시도 지으면서요.
백일홍하면 배롱나무꽃인 줄 알았는데 우리 가수님! 덕분에 꽃 백일홍도 알게 되었죠.
이제는 제일 친근한 꽃이기도 합니다.
우리 가수님! 100문 100답에 말을 시작할 때부터 92세라고 했다는데
계산해보니 1934년생 일제 강점기 시대네요 ㅎ
그래서인지 이야기의 배경이 그 때를 떠올리게 합니다.
예전에 카페에 올렸던 글이지만 당시를 회상하면서 다시
백일홍의 열정을 피워보자는 의미에서 긴 글이지만 올립니다.
* 카페 응원차원에서 간간이 그동안 써 두었던
자유 글들을 올려도 불편(너무 긴 글들이라서 ㅎ)
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백일홍
여인에게는 생의 처음 기억이 삶의 어느 시기마다 되풀이되어 다시 돌아오는 듯했습니다.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온전히 그대로 남아있다는 것은, 그것이 삶의 한 자락으로서 여인의 마음 가장 밑바닥에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인 것 같았습니다. 사람의 기억이란 대개 희미해지고 덧씌워지고 바래지기 마련인데, 어떤 기억은 오히려 세월이 지날수록 더 선명해지기도 합니다. 여인의 것이 그랬습니다.
아침밥을 먹고 설거지를 막 끝낸 후 한숨 돌릴 즈음이었고, 겨울의 끝자락인 듯 시퍼런 칼날 같은 새파란 하늘과 아직 수줍음이 덜 가신 햇살이 살짝 고개를 내밀고 있었습니다. 곱게 쪽진 머리에 하얀 한복 차림을 한 할머니는 어린 여인의 손을 잡고 집을 나섰습니다.
앞마당에는 여인의 것인지 아니면 갓 태어난 동생의 것인지, 새하얀 기저귀가 햇살과 바람 사이를 오가며 이리저리 나부끼고 있었습니다. 새파란 하늘과 새하얀 기저귀의 시린 듯한 묘한 조화와 강렬한 청량감이 어린 여인의 가슴을 붕붕 뜨게 했음인지, 깡충깡충 춤을 추며 걸었습니다.
생인손을 앓고 있던 오른손 중지에 송진을 따서 붙이기 위해 집 근처 산 초입까지 간 것이 여인이 기억할 수 있는 것의 전부였는데, 그 기억의 파편들에 대한 인상은 파랗고, 하얗고, 시리고, 찬란하고, 나부끼고, 그리고 아픔이었습니다.
여인은 이 기억이 왜 이렇게 선명한지 오랫동안 알지 못했습니다. 그저 어린 날의 신기한 아침이었을 뿐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러나 나이가 들고 삶이 쌓이면서, 그 기억이 단순한 과거가 아니라 자신의 안을 들여다보는 창 같은 것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파랗고, 하얗고, 시리고, 찬란하고, 나부끼고, 아픔. 이 여섯 가지 인상이 여인의 삶 전체를 요약하는 것만 같았습니다.
그가 떠난 이후 여인은 그 파편의 한 조각인 파란 하늘만큼은 올려다보는 것이 무척 힘겨워졌습니다. 그의 환한 얼굴과 반짝이는 눈빛이 바로 여인의 얼굴과 맞닿아 있는 듯했기 때문입니다. 추억만으로 살아갈 수 있다고 했지만, 이때만큼은 아니었습니다.
새파란 하늘을 바라보는 그의 눈빛은 유달리 반짝였고, 주체할 수 없는 기쁨으로 가득한 그의 표정은 곁에 있는 사람마저 덩달아 들뜨게 했습니다. 환영인 듯, 유독 시리도록 푸른 하늘을 볼 때면 이런 그의 모습과 종종 마주하게 되었는데, 빨려들 듯 여인의 두 손이 절로 뻗쳐져 그의 얼굴에 닿으려는 순간, 그는 온데간데없이 허공으로 사라져 버렸습니다.
힘껏 치올랐던 팔이 힘없이 축 내려지면서 순간 균형을 잃은 여인의 몸도 휘청거리며 땅바닥으로 털썩 주저앉기를 여러 번 반복했습니다. 살아있는 동안 아물 것 같지 않았지만 그래도 다독이며 겨우 진정시켜 온 가슴의 통증도, 이때만큼은 한 치의 사정없이 여인의 가슴을 마구 헤집고 다녔습니다. 결국 숨도 못 쉴 지경에 이르면 여인은 강변으로 달려가 가슴의 통증을 한 올 한 올 풀어내어 흘러가는 강물에 실어 보낸 뒤에라야 겨우 제대로 된 숨을 토해낼 수 있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면 여인의 눈은 습관적으로 하늘로 향했습니다. 하늘색에 따라 여인의 마음 단속도 달라져야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구름 한 점 없이 시리도록 푸른 하늘이면 여인은 더욱 분주해졌습니다. 매일 하는 집안일은 물론 어제 손 본 장독대를 다시 닦거나, 호미질을 너무 자주 했음인지 잡초는 고개를 내밀 엄두조차 내지 못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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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인의 집과 밭은 항상 반짝이고 말끔했는데, 이웃 사람들의 칭찬은 자자했지만 여인을 바라보는 시부모님의 눈에는 안쓰러움이 가득 실려 때론 몰래 눈물을 훔치기도 했습니다. 그 바쁨이 진짜 바쁨이 아니라는 것을 시부모님은 알고 있었습니다. 파란 하늘이 오면 그의 생각이 너무 간절해져서 다른 무언가로 그 마음을 눌러야 하는 여인의 안간힘을, 그분들은 말없이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여인에게도 평화로운 안식의 날이 있었습니다. 비가 오면 여인은 무척 반가웠습니다. 학업 중이던 그가 잠시 짬을 내어 집에 들렀을 때의 그 반가움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이날만큼은 지난날 그와의 추억들을 하나하나 끄집어내어 되새겨 볼 수 있었고, 또 그와 함께하는 온갖 것에 대한 상상의 나래를 마음껏 펼칠 수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여인에게 푸른 하늘이 담긴 햇빛은 슬픔을 더욱 영글게 했다면, 촉촉하게 내리는 비는 그 슬픔의 틈이 살짝 열려 그리움이 피어나도록 했습니다. 슬픔은 기쁨의 반대말이 아니었습니다. 슬픔은 그리움과 따뜻함과 기쁨의 씨앗이기도 했습니다.
장난꾸러기 기질이 다분했던 그는 매번 집에 올 때마다 여인에게 추억 하나를 심어주었습니다. 그 추억들은 크거나 화려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어이없고 황당하고 웃음이 나는 것들이었는데, 그렇기에 오래도록 기억 속에 생생하게 남아 있었습니다.
추위가 덜 가신 어느 햇볕 좋은 날, 화단가에서 머리를 감고 있던 여인은 헹굴 물을 퍼내려고 고개를 옆으로 돌렸는데 방금 전까지 있었던 물동이가 사라지고 없었습니다. 두리번거렸는데, 반대편에서 그가 키득거리며 화분 조리개에 담은 물을 여인의 머리에 쏟아 부었습니다. 머리카락을 뒤적이며 헹구어 주는 듯했지만, 처음의 조심스러운 손길과는 달리 점차 장난기가 발동하면서 조리개를 마구 흔들어 물을 튕겨대는 바람에 여인의 옷을 흠뻑 적셔 놓기도 했습니다.
한 번씩 그는 어떻게 하면 여인을 놀려줄까 궁리하는 듯했는데, 그때마다 그의 기발한 생각에 여인은 어이없어 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어이가 없어서 웃었는지, 웃겨서 어이가 없었는지 모를 그 표정을 짓고 있으면 그는 또 그 표정이 좋다며 실없이 웃어댔습니다. 그 웃음소리가 마당에 퍼지면 집안이 환해지는 것 같았습니다.
부모님에게 학비와 용돈을 받아가는 날이면, 그는 여인이 읽고 있던 책 속에 약간의 돈을 꽂아 두기도 했고, 다 읽은 책을 집으로 가져와 두고 가면서 책상 위에 꼭 한 줄의 글귀를 남겨놓았습니다. 여인은 또 그 글귀가 있는 책을 찾기 위해 그 책들을 읽어야 하는 수고로움을 더해야 했습니다. 수고로움이었지만 그러나 싫지 않았습니다. 그 글귀를 찾아가는 과정이 마치 그와 대화를 나누는 것 같아서, 여인은 일부러 천천히 한 페이지 한 페이지를 읽기도 했습니다.
그가 집에 오면서 사 가지고 오는 과일 중 몇 개는 상한 것이거나 흠집이 나 있을 때가 많았습니다. 시어머니는 이를 두고 '이왕 살 거면 반듯한 것을 골라 올 것이지' 하면서 못마땅해 하면, 그는 말없이 씨익 웃곤 했습니다.
분명 그가 과일을 산 곳은 잘 차려진 과일점이 아니라, 하나라도 더 팔기 위해 늦게까지 발을 동동거리고 있던 어느 추레한 이가 파는 노점상이었을 것이고, 그 사람은 또 과일을 봉지에 담아 주면서 이미 상품으로서 가치가 없는 것 몇 개를 은근슬쩍 함께 넣었을 것이었습니다. 여인이 과일을 깎기 위해 상한 부위를 도려내고 있으면, 그도 약간은 미안했던지 '나 같은 사람도 있어야 그 사람들도 살지' 하고 말했습니다. 그 한마디에 여인의 가슴에서도 따뜻한 열기가 일었습니다.
이렇듯 그는 종종 인간의 중간적 삶이 싹둑 잘려나간 것처럼 느껴질 때가 많았습니다. 아이처럼 순진무구하다가도, 또 어떤 때는 마치 성자의 경지에 이른 듯 너무도 사려 깊은 행동을 보여 여인은 그가 정말 이 세상 사람인가 할 때도 있었습니다.
그와의 세월은 비록 짧았지만, 그와의 추억들은 아무리 되새기고 되새겨도 항상 새로웠고 미소 짓게 했고 따뜻했습니다. 여인에게 이 세상의 시간은 이제 별 의미가 없었습니다.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어 그가 언젠가는 반드시 돌아올 것이라는 기약 없는 믿음이 뼛속 깊이 새겨져 있었기에, 여인은 순간순간의 삶을 견디며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비 오는 날이면 여인은 그가 떠나던 날 손수 지었던 그의 한복을 꺼내었습니다. 그가 돌아오면 입혀 줄 옷이었는데, 닳아질까봐 노심초사하며 간직해 오던 것이었습니다. 지나간 세월을 쓰다듬듯 그의 옷을 어루만지면서, 산꼭대기만 들어낸 채 하얀 구름으로 뒤덮인 먼 산을 바라보며 여인은 속말을 토해내곤 했습니다.
당신 있는 그곳에도 지금 비가 내리고 있나요?
나에겐 참 반가운 비님인데 당신에겐 궂은비가 되겠네요.
그러나 너무 거추장스러워 말아요.
비에 젖어 당신 추위에 떨까봐 이 옷 고이 싸서 바람결에 들려 보낼게요.
혹여 당신이 잠들어 있는 그곳이 어디 메쯤인지 바람도 모른다고 하면,
옷을 솜으로 풀어내어 구름 산 되듯 그렇게 온 산을 덮어 달라는 부탁도 잊지 않을게요.
그거 아시나요, 당신.
당신은 시간마저 함께 가져가버렸는걸요.
당신이 떠나던 날이 어제이고, 당신이 돌아오는 날이 내일이 될 거에요.
당신이 돌아오지 않으면 난 영원히 오늘로만 살아야 돼요.
제발 날 멈춰있게 하지 말아요.
어제는 슬프고 오늘은 아프고 내일은 그리움인걸요.
그러니 날 너무 아프게도 또 너무 그리워하게도 하지 말아줘요.
당신이 뿌려놓고 간 백일홍 씨앗이 어느새 또 고개를 내밀었네요.
당신 그랬었지요. 꽃이 필 때쯤이면 돌아오겠다고.
그러기에 그런 줄 알았네요.
당신 한 번도 허튼말 하지 않았으니까요.
그래서 당신 보내드리면서 잠깐의 이별이니 눈물은 보이지 말자고 했었지요.
얼마나 후회했는지 몰라요.
내 눈물이 당신 가슴에 응어리라도 되어 당신 지켜줬을지도 모르는데요.
그런데 하필 많고 많은 꽃 중에서 왜 백일홍이었나요.
피어서 열흘 아름다운 꽃 없다 하던데
석 달하고 열흘이나 곱게 피어 있는 꽃이라서
당신 오래오래 그리워하고, 오래오래 기다려 달라고 그랬나요.
아니면 영원히 잊지 말아 달라는 뜻이었나요.
당신 너무 심한 거 아닌가요.
떠나면서 그것까지 염두에 두었단 말인가요.
아무려면 어때요, 당신만 돌아와 주면 되는데요.
당신 하신 말 또 곰곰이 생각해 봤었지요.
꽃 필 때쯤이라 했었잖아요.
그래서 뿌리고 또 뿌리고, 피우고 또 피우다 보니
또 알게 되었지요, 당신 속마음을요.
석 달하고 열흘이나마 당신 기다리는 마음으로 살라는 뜻이었겠지요.
하지만 기다릴게요. 언제까지나 피워낼게요.
당신 돌아와 내 앞에 서는 그날까지
백만 송이든 천만 송이든 아니 온 사방 천지인들 못 피울까 봐요.
피울 흙이 모자라면 내 가슴 흙 되어서라도 피워낼게요.
당신 돌아오면 꼭 하고픈 일 있어요.
저 푸른 하늘 보며 깊은 숨 마음껏 토해내고 싶어요.
여인은 해마다 백일홍 씨앗을 뿌렸습니다. 처음에는 그가 돌아오면 보여주고 싶어서였습니다. 그다음 해에는 지난해에도 피었으니 올해도 피울 수 있다는 확인을 위해서였고, 또 그다음 해에는 피우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아서였습니다. 그렇게 해가 거듭되면서 백일홍을 피우는 일은 여인의 삶에서 빠질 수 없는 의식이 되었습니다.
석 달하고 열흘. 여름의 한복판부터 가을이 깊어질 때까지 지치지 않고 피어있는 꽃. 여인은 그 꽃이 피어있는 동안만큼은 그가 어딘가에서 살아 숨 쉬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꽃이 지면 씨앗을 거두고, 봄이 오면 다시 뿌렸습니다. 그 씨앗들이 그와 자신을 잇는 가느다란 실 같은 것이라 여겼습니다.
이웃 사람들은 여인의 집 앞 백일홍을 보고 꽃을 참 잘 키운다고 했습니다. 여인은 그 말에 그냥 웃었습니다. 꽃을 키운 것이 아니라 기다림을 키운 것이라고, 그리움을 피워낸 것이라고 차마 말할 수는 없었으니까요. 파란 하늘 아래 깊은 숨 한 번 쉬고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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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글을 읽는데 가슴이 짠 하네여
포근님 반갑습니다
떠난님을그리워하는마음더할날없었라생각해보니찡하네요🌻🌸
포근님 오랜만의 글 환영합니다 엽편 소설이군요. 개인적으로 전 긴 글을 좋아합니다.
이해와 성찰의 총량이 늘어나기 때문이죠. 요즘처럼 짧은 한 줄짜리 글에 몰두하는 사회는 너무 얕고 비참하지 않나요?
여인의 삶
아름다운 상상을 하셨네요
어제는 슬프고 오늘은 아프고
내일은 그리움 ᆢ이 문장이 눈에 띄어요. 제 폰 벨소리가 백일홍이예요. 전화한 사람마다
곡이 넘 좋다고들 합디다. 제가 부재시엔 일부러 노래 끝까지 다 듣는다고 해요. 포근님 다음 글 기대해 봅니다 ~~^^♡
건필을 빌게요
포근 님 안녕하세요 이 새벽 눈이 뜨여 포근 님의 글을 아주 천천히 자세히 읽어 봅니다 포근 님 이야기인지 소설이지는 잘 모르지만 정말 가슴 한쪽이 시리도록 님을 그리워하는 소설 같은 글 백일홍에 담긴 사연의 글 이 아침 소설 책 한권 잘 읽었다 할만큼 생생한
아주 그 먼 옛날 백일홍 꽃에 담긴 사랑 이야기 마음 한 구석이 아련해지는 글 잘 읽었습니다
저도 우리가수님 백일홍 노래를 들을 때면 참 슬프구나 하는 생각을 할때가 많았습니다
그러고보니 백일홍 그렇게 오래동안 피었던게 다 사연이 있었군요 적어도 포근님께는요....
깊은 사연이 담긴 좋은 감사합니다♡
슬프고도 아련한 꽃 백일홍 ~~
백일동안 곱게피였다가 지는꽃 장문의 글을읽으며 지난시대에 한여인의 지고지순한 삶을 꽃말속에서 잘 표현해주셨네요 ~
이른새벽에 일어나 포근님의 장문의글을 읽으며 가수님의 백일홍 🎵 노래가
더애착이 가는군요~
올려주신 포근님 함께응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