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교 : 滿月を さがして & Princess Tutu
글쓴이 코코볼
서론
1. 변신물이라는 장르의 본문에서의 정의
본론
1. 변신소녀물로 본 두 작품
2. 주변인물로 본 두 작품
3. 음악과 소재로 본 두 작품
4. 1-2기의 차이로본 두 작품
5. 주제로본 두 작품
결론
1. 츄츄에서 바라보는 눈
2. 만월에서 바라보는 눈
3. 결론
서론
이 글을 쓰는 목적은 두 작품을 비교 분석하려는 것으로써 두 작품의 어느 한쪽을 비판한다거나 혹은 비교해서 우위에 있다고 평가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두 작품에서 유사한 점과 차이점이 제 눈에 들어온 부분이 있다고 판단, 두 작품을 택한 것입니다.
1. 변신물이라는 장르의 본문에서의 정의
미소녀 변신물이라는 장르에 대하여 본인이 알고 있는 지식은 매우 빈약하며 또한 정확하게 서술하기 위해서는 많은 페이지와 자료가 필요하므로 본문에서는 간략하게 필요한 부분만 서술하겠습니다. 때문에 본문에서의 정의는 상당히 틀릴 수 있습니다.
●본문에서의 정의
미소녀변신물 혹은 변신소녀물등으로 부르는 이 장르를 본문에서는 '평범한 여자아이가 불가사의한 힘으로 변신하여 활약하는 장르'로 정의한다.
가장 좋은 예시는 [괴도 세인트 테일]과 [간호천사 리리카 SOS]등을 떠올리면 쉬울 것이다.
●기존 소녀변신물의 대상층
이렇게 말하면 꼭 그 대상층만이 이 장르를 보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지도 모르지만 변신소녀물이 겨냥하고 있는 연령과 성별은 당연히 저연령층의 여아이다. 이는 자신의 불가능한 혹은 현재 할 수 없는 꿈을 대신 이뤄주는 역할로써 주인공을 바라보게 하고 대신 이룰 수 없는 꿈을 이뤄주는 대리만족감을 느끼게 되는데 의도가 있다.
본론
1. 변신소녀물로 본 두 작품
두 작품의 공통점으로 우선은 주인공의 변신을 들 수 있다. 이로인해 두 작품 모두 변신소녀물이라는 공통점을 지니게 되었다. 우선 변신소녀물이라는 장르의 정석에 대해 조금 살펴보자 <밍키모모> <빨간망토 챠챠> 등에서 쓰이고 있는 방식으로 각화는 각화별 이야기를 지닌다. 그리고 이야기들은 결국에는 한 방향으로 모여 결론을 이루어낸다. 그리고 각 화별 이야기에는 반드시 중반 혹은 종반부에 주인공 소녀의 변신이 있다. 이는 적, 혹은 변신하지 않고 할 수 없는 일을 만나게 되어서 이며 필연적으로 변신만이 이야기 해결의 길을 열어준다. 때문에 고전적인 정석에서 소녀들의 무언가로의 변신은 이야기의 해결을 의미하며 마치 마법처럼 이룰 수 없던 일을 이루어 준다. 츄츄는 이 정석을 완전히 따르고 있지는 않지만 거의 따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매회별로 하는 변신은 항상 이야기의 원만한 해결을 보지는 못하지만 이야기의 어느정도 절정과 하강을 가늠하게 해주는 역할을 한다. 게다가 변신전에 보이는 드롯셀마이어의 대사는 반드시 이 장면에서 변신을 할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시청자에게 주지시킨다. 이로써 변신의 정당성을 상당히 확보하고 있다. 그에 비해 만월은 조금 장르적으로 차이를 보인다. 변신이 해결이 아닌 변신은 '노래'라는 꿈을 위한 하나의 방편으로 존재한다. 즉 변신만하면 완전한 해결이 아니라 변신은 해결을 위한 하나의 전제로 존재한다. 예를 들어 10화 [연예계의 규칙]에서 초등학생적인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기 때문에 노래를 부르기 어려운 위기에 처했을 때 결국 스스로의 위기를 해결한 것은 변신했기 때문이 아니라 본인의 본디의 의지 덕분이었다. 변신을 한다고 해도 사실 내면은 변할리가 없다라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는 부분이다. 이 내면이 변하지 않는 다는 것은 변신이 모든 것의 해결책이 아니며 만월에서 변신은 하나의 수단일뿐 결코 중심에 변신 그 자체가 있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후 이 이야기가 더욱 설득력을 얻는 것은 스스로 변신을 거부하는 부분인데 이것은 아래에서 조금더 자세하게 설명하기로 한다.
변신에는 원인이 있다. 그 원인이 무엇이었는가는 매우 중요하다. 우선 츄츄에서 변신의 원인은 츄츄 자신에게 있는 것이 아니다. 다른 이(드롯셀 마이어)가 오리에게 이야기를 이어가게 하기 위해서 별로 중요하지도 않은 역할을 억지로 끌어다 맡긴 것이다. 변신소녀의 역할이 사실 메인이 아니었다는 점이 기존의 정석과 작은 차이를 보인다. 기존의 이야기에서 끌어다가 시킨 소녀들(ex>세일러문)은 결국 자신이 이 이야기의 주인공임을 자각하고 무척 성실하게 처음부터 끝까지 이야기를 계속진행시키면 행복해 질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종반이 조금씩 차이는 있지만 전체적으로 자신의 역할에 대한 강한 믿음을 지니고 있으며 본래의 자신보다 오히려 변신 했을 때의 자신을 더 소중히 여기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츄츄에서 변신은 그것과는 다른 의미를 지닌다. 자기자신의 본모습이 아닌 변신 심지어 츄츄로 변신하기 전의 사람모습까지 실제로는 자신의 모습이 아닌(아히루는 실제로는 오리였다.), 그리고 자신의 일이 과연 자신에게 그리고 자신이 돕기를 원하는 왕자에게 도움이 되는 것인가? 라는 의문을 끊임없이 던진다. 또한 츄츄에서 변신은 반드시 해야하지만 그것이 왕자에게 도움이 되는 것인지는 잘 알 수 없는 행위이다. 물론 결과적으로 그리고 전개상으로는 왕자와 모두에게 본모습을 돌려주는 도움이 되는 일이지만, 개연성이 부족하지 않은가? 과연 변신이라는 것을 해야만 했는가? 그 이전에 왕자에게 마음을 돌려주는 행위를 왜 자신이 해야하는지 의심조차 품지 않았는가? 자신이 원해서 프린세스 츄츄가 된 것이 아니라면 그정도는 생각해 봐야 하지 않았을까? 여기에 답은 한가지다. 이 작품의 주제인 작가와 등장인물의 관계에서 등장인물의 해방 거기에 있다.우선 등장인물들은 작가의 의지대로 움직인다. 츄츄가 처음에 자신의 역할을 받아들인 아니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여기서 발견할 수 있다. 또한 변신의 필요성과 정당성은 여기서 발견할 수 있다. 변신이라는 것은 작가가 그녀에게 맡긴 역할. 등장인물의 임무는 그 역할을 받아들여서 작가의 의지대로 이야기를 진행시키는 것. 하지만 이것은 1기 중반이후 변하기 시작한다. 자신이 츄츄가 되어서 과연 왕자를 행복하게 해주었는가? 라는 질문에 츄츄는 '그렇다'라고 대답할 수 없게 되버린 때문이다. 변신을 포기하기 일보직전까지 가게된다. 그리고 여기서 변신의 정당성을 부여해 주는 왕자의 대답이 등장한다. 비록 괴로운 일도 있을지라도 마음을 돌려달라고 하는 왕자의 대답은 츄츄로의 변신을 정당화 해주고 또한 필연적으로 만들어 준다. 이제 아히루는 왕자를 위해서 츄츄가 되는 것이다. 이전까지 이야기의 전개를 위해 츄츄가 되는 수동적인 역할이 아닌 조금씩 주체적으로 왕자와의 약속을 통해 의무를 지게 되는 것이다. 자신과의 약속을 통한 의무. 어찌보면 조금 수동적일 수도 있는 부분이지만 다른 방법은 선택할 수 없지만 있다고 해도 츄츄가 되는 길을 택했을 것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따라서 츄츄의 변신은 표면적으로는 수동적이지만 내면상으로는 능동적인 모습을 볼 수 있는 것이다.
만월에서는 변신의 이유만큼은 상당부분 주체적이다. 물론 변신을 시켜주는 대상이 본인의 아니라 사신인 타쿠토라는 점은 수동적이며 타율적인 면이지만 변신을 혹은 그런 능력이 절실하게 필요했던 것이 미츠키라는 점을 생각해 볼 때 초반츄츄에서 필요하거나 절실하게 꿈꾸던 내용이 아닌 완전히 맡겨진 역할과는 다르다. 하지만 만월에서 보이는 자율적의지로 인한 변신도 직업을 갖는 변신물(ex>괴도 세인트 테일)등에서 보이던 모습으로 완전히 특별한 것은 없다. 다만 주체적으로 능력이 필요했기 때문에 그 스스로 그 능력에 대해 거부하고 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 결정적 차이를 만들어 낸다. 타 애니에서 볼 수 없던 무려 10화에 달하는 부분에서 변신이 전혀 없었다는 초유의 사태가 만들어 질 수 있는 근거가 된다. 37~46화에 이르는 부분에서 풀문의 변신은 없다. 42화까지는 스토리상 불필요에 의해 47화까지는 본인의 의지에 의해 변신이 없다. 이것은 종반부도 마찬가지 거의 변신한 풀문의 모습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대걔의 변신소녀물이 변신한 상태에서 마지막까지 가게 되고 최종화의 마지막 절정은 반드시 변신에 의한 것으로 끝나는데 반해 만월에서 최종화는 콘서트 이후가 실제의 절정이라 할 수 있다. 콘서트가 끝난 후에 수술을 받는 미츠키와 누군가(아마도 사신 부장)에 의해 심판을 받게 되는 타쿠토와 메로코. 이부분이 콘서트 이상의 절정인 것이다. (근거는 아이캐치가 없다는 데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콘서트는 풀문으로써의 마지막 일이자 사건의 클라이막스로의 전개 그리고 '노래'와 '변신'이라는 소재의 마지막 폭발이다.하지만 그 이후의 엔딩부분이 없었다면 미츠키는 단지 1년간 꾼 꿈의 끝을 맞이하는 것으로 허무하게 결론이 날뿐디ㅏ. 즉 변신한 상태에서 모든 상황을 끝내버리는 이전의 변신소녀물에 확실히 차별화를 가한 일이다. 이 모든 것이 변신의 주체적 선택과 변신의 이유는 '노래를 부르기 위해서'이지 '변신하고 싶고 모습이 바뀌는 것이 좋아서'가 아니다. 하지만 다른 애니메이션들에서는 이것이 종종 잊혀지는 경우가 있다. 물론 츄츄에서는 잊혀지지 않았고 만월과 마찬가지로 아니 그 이상으로 클라이 막스에는 자신의 본 모습을 드러냈다. 하지만 만월을 찾아서에서 주목하고 싶은 점은 그 변신의 이유가 주체적이었기 때문에 스스로의 힘으로 일을 진행하려는 모습을 보여주고 결국 그것이 엔딩에 까지 이어진다는 점이다. 결정적으로 타쿠토가 좋아하는 것은 풀문이 아닌 미츠키가 아닌가?! 츄츄에서 뮤토가 좋아하는 것은 아히루가 아니라 츄츄인 것과는 극단적으로 다르다. 결국 츄츄에서 아히루가 얻은 것은 그렇게 큰것이 없는 원래의 상황이다. 물론 화키아가 옆에 있어주고 왕자의 행복을 달성했으니 본인의 마음은 만족되었고 또한 금관마을이 드롯셀마이어로 부터 해방되었으니 어마어마한 변화를 받은 것은 사실이지만 정작 본인 자신은 나아간 것이 아니다. 처음에 말했던 '나는 오리, 그냥 오리.'로 돌아간 것이다. 본래의 자신이라는 주제에 그야말로 들어맞는 일이지만 엔딩을 보면서 만족스러워 할 수는 없었다. 무언가 부족한 일. 시청자에게 한가지 분명 이 결말이 바람직한 거야. 라고 제작자는 말하고 싶어하지만 수용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 오리가 본래의 모습이라고 하는 임펙트의 부족일까 아니면 오리로 돌아가는 것이 당연하다고 느낄 수 없는 거부감이 원인일까? 답은 '언젠가 변신이 풀리게 되면 꿈에서 깨어난다.' 라는 슬픈 사실 때문이다. 다른 사람은 모두 바꾸어 놓았으며 스스로도 행복하다고 느끼고 있지만 그것은 행복한 꿈의 결말. 꿈의 계속은 아닌 것이다. 변신을 꿈을 꾸는 것(희망의 꿈)이라고 한다면 츄츄의 결말은 '희.망.을 이.루.어.버린 상태'가 아닐까? 때문에 엔딩을 보는 사람의 입장에서 씁슬함을 느낄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이야기의 끝. 그 때문이다. 이것의 시초는 주체적인 변신이 아닌 타인에 의한 변신의 결과다. 본인이 꾸는 꿈이 아닌 타인이 꾸게 시작한 꿈. 비록 본인이 그 꿈을 주체적으로 키워나가지만 결국 꿈에서 깨어나고 보면 진정한 자신의 모습이 보인다. 25화에서 아히루는 '비록 진정한 자신이 지금보다 못하더라도 돌아가겠다.' 라고 하지만 그건 납득일뿐, 의지로 보이지는 않는다. 츄츄의 결말은 어쩌면 희극을 가장한 비극의 전형적인 모습일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미츠키가 얻은 것은 둘도 없는 친구(혹은 최소 15살 이상 연상의 애인; )이다. 그리고 새로운 인생. 삶의 또다른 가능성. 진부한 결말이며 과도하게 이야기를 헝클어 놓은 지극히 인위적인 모습임에는 틀림없다. 하지만 그 모습을 보면서 이야기의 끝에 매달리고 싶지 않아지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왜냐하면 미츠키의 이야기는 이제부터 시작인 것이다. 자신의 바램으로 시작된 일은 완전히 이루어지기 까지 끝나지 않는다. 1년이라는 시간은 수동적이고 모든일에 약하고 자신없던 미츠키를 '변신'이라는 도구를 통해 '1년뒤에 죽어도 노래하겠다.' 에서 '살아남겠다'로 바꾸어 놓았다. 또한 내면의 모습 뿐 아니라 외적으로도 생명을 받았다. 수명의 연장은 당연히 앞으로의 희망이다. 아히루는 본 모습으로 돌아온 이후 희망을 달성하지만 미츠키는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온 이후 부터가 희망의 시작이다. 두 애니메이션에서 변신의 이유가 그리고 주체가 지니는 중요성은 이 차이에 있다.
마지막으로 정리한 변신의 결과이다. 만월에서의 변신은 앞에서 설명했듯이 본인의 성장. 한걸음 앞으로 나아가는 미츠키. 꿈에 조금더 가까워지는 그녀. 변신은 그것을 만들어 냈다. 변신하지 않았다면 단지 1년뒤에 죽어버리는 것으로 끝났을 그녀는 변신함으로써 자신의 본래의 의지를 그리고 꿈을 되찾았고 생명을 찾았다. 변신으로 얻게되는 힘은 크지 않지만(사실 그녀 스스로의 힘을 회복시켜줄 뿐이지만) 미리 경험하게 되는 그녀의 밝은 미래는 그녀를 순수한 그리고 반드시 살아나가야겠다는 굳은, 의지를 회복시켜 주는 치유와 성장의 역할을 한 것이다.
그렇다면 츄츄에서의 변신은 어떤 역할을 했을까? 츄츄에서 변신은 제자리로 귀환이다. 제자리로의 회귀를 위한 일종의 일탈. 그 일탈은 벗어나가고 있는 사람들을 원래의 자리에(그 자리가 지금의 위치보다 사실 못하더라도)돌려 준다. 이 변신은 만월의 변신에 비해 조금은 보수적이다. 하지만 그 의미는 생각하게 하는 바가 크다. 앞으로 나아가는 것 이상으로 중요한 것은 진실된 자신을 찾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해주었으니 말이다. 아히루의 희망은 이루어졌다. 아히루의 희망은 지금 이 상황이 아닌 원래 자기가 있어야 할 곳 원래 자기가 해야할 일 원래 자기가 생각해야 할 일 원래 자기가 만나야 할 그리고 사랑해야 할 대상에 대해 자각을 준다. 그렇다고 본래의 위치에 못박아 두는 것은 아니다.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우선은 본래의 위치에 복귀해야 한다는 뜻이다. 츄츄에서 변신이 지니는 의미는 이것으로 해석 할 수 있는 것이다.
변신으로 본 두 애니메이션은 서로 극단적으로 다른점을 지니면서도 귀결되는 모습은 캐릭터의 성장과 정체성의 회복이었다. 두 작품 모두 변신이라는 소재를 사용해서 주인공과 그 주변인물의 정체성을 회복시켜 주었고 결과적으로는 한단계 성숙된 모습을 보여 주었다. 변신소녀물이라는 장르는 이 성장과 정체성이라는 두 중요한 제재의 표현을 위한 적합한 채용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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