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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혜옹주는 1912년 당시 환갑이 넘은 고종황제와 명성황후 측근을 뫼시던 궁녀였던 양씨 사이에서 태어난 고종의 고명딸이다. 고종은 환갑의 나이에 본 아이이고, 장성한 왕자들 사이에서 태어난 옹주를 금이요, 옥이요 하면서 귀애했다.
일단 덕혜옹주의 삶을 말하기 전에 그녀의 어머니 복녁당 귀인 양씨에 대해서 잠시 언급하고자 한다.
복녁당 귀인 양씨는 궁녀 출신으로 명성황후 최측근의 궁녀였다. 명성황후가 을미사변으로 비참하게 시해를 당하고나서 고종은 러이사 공사관에서 황귀비 엄씨의 보살핌을 받고 있었는데 그 후 환궁하여 양씨를 취했다는 설이 있다.
양씨의 가문은 보잘 것 없는 평민출신의 가문이고, 부모는 어려서 죽었다고 전해진다. 양씨의 곁에는 부모는 없지만 부모를 대신한 오라비가 한 명 있었는데 사대부집 고깃감이나 끊어주는 심부름을 하던 보잘 것 없는 사내였다. 그런데 누이가 황제의 승은을 입고 후궁이 되니 180도 달라졌고, 누이가 사는 전각을 향해 덩실덩실 춤을 추면서 절을 했다는 코믹한 일화가 있다. 게다가 양씨가 옹주를 낳아 고종을 기쁘게 하니 고종은 아이를 금이요, 옥이요 귀애하면서 바람불면 날아갈까 비가 오면 휩쓸려 가버릴까 애지중지 했다.
조선은 일본의 기세로 기가 많이 죽어있었고, 고종의 유일한 즐거움은 하나 밖에 없는 고명딸 덕혜옹주를 보는 것이 하루하루 살아가는 기쁨이었다. 그는 옹주를 낳은 복녁당에게 서운한 기색 없이 즉시 종 1품 귀인으로 승격시켜 복녁당이라는 당호를 하사하고 거처를 마련해주었다.
기록에 의하면 후궁들은 총애도에 따라서 월급을 받았다고 하는데 후궁들 중에서는 복녁당 양씨가 가장 많은 월급을 받았다고 한다.
얼마나 옹주를 사랑했는지 하루는 유모가 젖을 먹여야 한다며 고종 품에 있는 옹주를 데리고 다른 방으로 가려 하자 고종이 유모를 막으며 "과인이 보는 앞에서 옹주의 젖을 먹이도록 하라. 옹주가 건강하게 젖을 잘 빠는지 보고싶구나."라고 하여 유모를 당황하게 했지만 고종은 옹주가 건강하게 젖을 잘 빠는 것을 보자 몹시 흐뭇해 했다고 한다. 게다가 옹주와 함께 대전에서 잠들며 자장가를 불러준다든지, 옹주가 밥을 먹으면 항상 자신의 수라 옆에 옹주의 상을 따로 받아 같이 먹는다는지 하는 행동은 궁중 사람들의 마음까지 따스하게 했다.
옹주 나이 다섯 살이 되던 해 옹주를 위해 궁안에 유치원을 세운 고종은 옹주와 옹주 또래의 사대부집 딸아이들이 재미나게 뛰어노는 모습을 보고 있었다. 그러자 일본인 데라우치가 다가와 "폐하. 따님을 참으로 귀애하신다고 들었사옵니다."라고 말하자 고종은 웃으며
"경에게도 저만한 딸이 있다고 들었소만."
"그렇습니다. 저에게도 저만한 딸이 있는데... 무척이나 보고싶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근심이 있소."
"무엇이옵니까?"
"저 아이 나이가 다섯 살이라 옹주의 직위를 줘야 하는데 그게 내 마음대로 되지 않아 안타깝구려."
그러자 데라우치는 고종의 속내를 알아채고, 순간 고국에 있는 자신의 딸애가 생각나 눈물 지으면서 즉시 덕혜옹주가 정식으로 옹주의 직위를 부여받을 수 있게 도와주었다.
고종은 특별히 옹주를 위해 경복궁 안에 유치원을 하나 마련하여 옹주 뿐만 아닌 일반 사대부집 여아들이 자유로이 출입하며 옹주와 놀 수 있도록 배려를 했는데 유치원에 있는 여아들은 대부분이 여흥민씨와 안동 김씨가 주류를 이루었고, 대략 8명 안팍이 전부였다고 한다.
하루는 옹주와 함께 놀던 민씨 여아가 소변을 참지 못해 유치원 바닥에서 선 채로 실수로 오줌을 누며 울자 옹주는 스스럼없이 자신이 입고 있던 치마를 풀어 울고 있는 여아에게 입혔다고 한다. 이 일화를 살펴보면 옹주가 얼마나 어린 나이인데도 조숙했는지 잘 보여준다.
1919년, 고종은 한많고, 비극적인 군주의 삶을 마감하게 된다. 눈을 감으면서까지 그는 딸 덕혜를 생각하며 눈물을 흘리며 죽었다는 설이 있다. 일부에서는 고종이 좋아하는 커피를 마시다 거기에 탄 독극물에 의해 죽었다는 설이 있다.
옹주의 궁궐 안의 생활은 평탄하지않았다. 이미 고종은 영친왕 이은의 아내로 일본여자 마사코를 며느리로 맞이한 전례가 있어 이번에는 그리 하지 않으리라 마음 단단히 먹고, 옹주의 베필로 민씨 총각으로 점지하고 몰래 일을 수행하려 했지만 이를 알아챈 일본이 재빨리 대마도주와 강제 혼인을 시켜버렸다.
13살의 나이로 영친왕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일본 유학을 떠나게 되고, 그 곳에서 옹주는 조국을 잃어버린 왕녀라는 비아냥을 받으며 학습을 했다. 그녀는 1930년 앞서 이야기를 한 바와 같이 대마도주인 종무지와 강제 혼인을 하여 비극적인 삶을 살아가게 된다.
결혼을 해서도 여전히 자신은 명실상부한 조선의 왕녀라는 사실을 망각하지 않고 지냈다. 그리고 남편인 종무지와의 정략결혼이 좋을리 없다. 종무지는 대대로 대마도에서 살아왔고, 옹주와 결혼을 하는 조건으로 백작의 직위를 하사받게 되어 많은 과수원과 땅을 상금으로 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두 사람의 궁합은 그리 좋지 않았으며 심지어 종무지는 옹주를 강제로 범하며 딸 마사에(정혜)를 낳게 한다.
일본은 결국 제 2차 세계대전에서 패하게 되고, 종무지 또한 활복 자살로 생을 마감했는데 항간에서는 전쟁터에서 그대로 죽었다고 한다. 그리고 미망인이 된 덕혜옹주는 혼자 힘으로 딸 마사에를 기르면서 어렵게 살고 있었다. 그러나 딸 마사에는 어머니가 조선의 왕녀라는 사실을 아주 민감하게 거부 반응을 하면서 어머니를 반대했었고, 순수한 일본인이 되고싶다고 자주 말을 해 덕혜옹주와 심한 말다툼을 하기도 했다.
일설에는 마사에와 덕혜옹주의 사이는 아주 좋았다고 하는대 내 주관적인 관점에서는 당시 조선사람에 대한 대우가 좋지 못한 것으로 볼 때 그다지 좋은 사이의 모녀는 아닌 것 같다.
마사에의 죽음은...
첫번째 가정은 마사에가 등산을 나갔다가 실종이되었다고 하고, 두번째는 히로시마 원폭이 터질 때 히로시마에 있다가 죽었다고도 한다. 여튼 딸의 죽음과 자신의 고단한 삶에 염증을 느낀 옹주는 정신질환을 겪에 되어 병원에 입원을 하고, 그녀의 곁으로 자주 이방자 여사가 다녀갔었다고 한다. 너무도 심각하게 정신질환(내가 보기에는 우울증 같다)을 겪고 있은 탓에 투신 자살 소동이나 손목을 긋고 생을 마감하려 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고, 1962년 1월, 옹주는 정신질환 등의 병이 있었지만 결국 그렇게도 오고싶어했던 고국으로 돌아왔다. 그녀는 그 후 헌종대왕이 사랑하는 경빈 김씨를 위해 지었다는 낙선재로 들어와 살기 시작했고, 그녀를 모시던 상궁과 유모가 그녀의 노회한 모습을 보자 할 말을 잃고 울기만 했다고 한다.
그리고 1989년 4월 21일, 실어증과 정신병으로 고생을 하던 옹주는 그 많은 생을 마감하고 말았다. 유해는 남양주시 금곡동에 있는 홍유릉에 묻혔다.
(출처 : '마지막 황녀 덕혜옹주' - 네이버 지식iN)
첫댓글 덕혜옹주남편 할복자살안했어요.
소문만 있을 뿐이죠 아직까지 자살/전쟁터에서 죽음 이 두가지 설이 가장 유력하다고 합니다
아...눈물이 난다...어릴적에 단편극 보고 너무 충격을 받고 슬펐었는데...
가슴아프네요...
요새 궁을 다시보고 있어서 그런가 왠지 느낌이 달라요...왕실이 복원되길 원하지는 않지만 궁궐을 예전처럼 복원하고 잘 알렸으면..역사교육이나 좀 제대로해!!!!!
ㅠㅠ 가슴아프다..ㅠㅠ
예전에 MBC에서 단막극으로 해줬었는데 정말 재밌었어요~어렸을때라 잘을 몰랐는데 지금 다시 보려고 하니 그 자료가 아예 없더군요..아 또보고시ㅠ어..
종무지랑 사이 좋았다는데요. 종무지가 나쁜 놈이다, 신분 낮다, 이런 건 오히려 나라 뺏긴 설움에 생긴 야사로 알고 있는데.
종무지랑 마사에는 사이가 좋앗죠 ... 총명한 여식이엿다고 하네요 ... 말다툼 벌일 일이 없엇을 것인데 ..... 종무지란 사람이 옹주의 정신병을 보고 병원에 입원시켯다는 말이 잇고 .. 암튼 옹주와 마사에는 거의 같이 산 적이 없어요 ... 종무지의 글에 보면 어릴 적 부터 마사에는 옹주와 같이 잇은 적이 별로 없다하던데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