헝가리 15 - 비셰그라드 고성을 구경하고 옛 왕궁 유적을 지나 마을을 둘러보다!
2022년 5월 7일 비셰그라드 Visegrád 에서 880번 버스를 타고 에스테레곰 에 도착해 대성당 Szent Adalbert
Foszekessegyhaz 과 구시가지를 구경하고는 다시 버스로 비세그라드 로 돌아와서는 언덕길을 오릅니다.
그러고는 비셰그라드성 Visegrád Castle 을 보기 위해 언덕을 7~8분을 올라가니 육중한
성문 이 보이는데, 6각형 성문 을 구경하고는 계속 올라가면서 사람들에게 비세그라드성
까지 얼마나 가느냐고 물으니 30분 이라기에 올라가 삼거리에서 또 물으니 40분 이랍니다?
해가 지는데다가 사람도 보이지 않는 호젖한 산길 이라 불안한 마음도 드는데다가..... 체력 도 자신이
없는지라 고성 Visegrád Castle (Fellegvar Citadel) 을 포기하고는 되돌아 내려와서는
Lower Castle 이라는 성문 Salamon Tower 에서 잠시 쉬면서 유유히 흐르는 도나우강을 내려다 봅니다.
그러고는 언덕을 내려와서는 비세그라드 Visegrád 마을로 접어들어 걸으니 오래된 건물의
유적 터를 만나는데 여긴 마차시 1세의 옛 왕궁 Kiralyi Royal Palace 이라고 합니다.
유럽을 여행하면 왕궁 Royal Palace 이라는 이름을 많이 보는데 우리나라 경주나 서울 처럼 꼭 왕이 살았던
집이 아니더라도 왕이 잠깐 머물거나 또는 대주교나 대귀족의 집 도 대개는 왕궁 으로 불리나 봅니다?
비셰그라드 (Visegrád) 는 헝가리 페슈트 주에 위치한 도시로 면적은 인구는 1,800명이며 도나우 강
우안과 접하고 있고 부다페스트 북쪽에 위치하고 초기 르네상스 시대의 유적 이 남아 있습니다.
헝가리의 국왕 마차시 1세의 여름 궁전 과 중세시대 요새로 유명한 도시인데, 도시 이름은 슬라브어파에 속하는
언어로 "위쪽에 있는 요새" 또는 "위쪽에 있는 마을" 을 뜻하는 단어에서 유래됐는데 산으로 둘러쌓여 있습니다.
우리가 좀 전에 올랐던 비셰그라드 성 Visegrádi Fellegvar 은..... 1009년 문헌에 처음 등장
했으며, 1242년 몽골 제국의 유럽 침공 때 남쪽으로 약간 옮겨진 채로 재건되었는데
1325년 헝가리의 국왕 카로이 1세 는 자신의 거주지였던 이 곳을 왕실의 거처로 선포하게 된다.
1335년 헝가리의 국왕 카로이 1세 는 보헤미아의 국왕 얀, 폴란드의 국왕 카지미에시 3세와 함께 2개월에
걸친 회의를 개최했으니 헝가리와 보헤미아, 폴란드 세 왕국 간의 평화를 이끄는 한편
헝가리와 폴란드가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가에 대항 하기 위해 동맹을 결성하는 계기가 되었다 합니다.
1405년 부터 1408년 사이에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겸 헝가리의 국왕 이었던 지기스문트 가 왕실의
거처를 남쪽 부다(부다페스트) 로 옮겼고 마차시 1세 시대에는 한때 왕궁 소재지로 여겨
지기도 했지만 1526년 헝가리 왕국이 모하치 전투를 계기로 분할되면서 중요성을 상실하게 됩니다.
1991년 헝가리와 체코슬로바키아, 폴란드 의 정치 지도자들은 1335년 이 곳에서 열렸던 회의를 상기시키는
한편 이들 국가 간의 지역 협력체인 비셰그라드 그룹 을 결성했으며 2000년 시로 승격되었다고 합니다.
여기 옛 왕궁터 Kiralyi Palota Romkert/ Museum of Matthias Rex 는 1316년 카를 1세 는 행정을 이곳
비셰그라드로 옮기기 위해 왕궁 을 지었으며.... 100년후에는 초기 르네상스양식의 예술과 문화의
중심지로 발전했고 마차시왕은 왕비 베아트리스를 위해 이탈리아 예술가를 불러 왕궁을 재건축했다고 합니다.
다이닝룸의 화려한 천장 과 금박을 입힌 기둥들, 대형 대리석 샘이 있는 방과 무도회장, 보무르이
방과 정원에 마련된 회의실은 황홀한 궁중 생활을 보여주지만.... 오스만 투르크의
공격으로 잿더미 가 되었고.... 1934년에 야노스 슐레크가 왕궁 일부와 사자분수 를 발견했습니다.
한때 왕이 머물던 왕궁 은 파괴되어 이제 유적으로만 남았는데 아마도 전쟁의 참화이지 싶으니 언제적
전쟁인지는 알수 없지만 문득 1차 세계대전이 멈춘지 100여년전이니 헝가리도 참전국
이라..... 임용한씨가 동아일보 임용한의 전쟁사에서 쓴 “습관성 기억 상실증” 이란 글이 떠오릅니다.
“ 11일 프랑스 파리에서는 제1차 세계대전종전 100주년 기념 행사 가
대대적으로 개최됐다 . 2014년에는 개전 100주년 기념행사가 열렸다.
4년 만에 다시 1차대전관련 기념행사 로 떠들썩하다. 하지만 호들갑스럽다는 느낌은 들지 않는다.
사상자만 1000만명 이 넘었던 비극의 역사를 되돌아 보지 않으면 무엇을 돌아볼 것인가?”
“20세기 만큼 인류에게 벅찬 감동과 희망 으로 시작된 시기는
없었다. 과학과 이성, 민주주의 의 발달 은 인류
에게 전에 없는 번영과 평화 를 안겨다 줄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10년 남짓 지난 후 세계를 호령하던 선진국 시민 들은
진흙탕이 된 참호 속에서 뒹굴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됐다. ”
“호각 소리와 함께 돌격 이 시작되면 기관총의 십자화망 이 병사들
을 휩쓸었다. 중대가 전멸 하는 데는 5분 이면 충분했다.
그러나 무엇 보다 가장 끔찍한 기억은 인류가 이런 비극에서도 전혀 교훈을
얻지 못했다는 사실 이다. 1차대전으로 러시아에서는 혁명이 발생
했고 각국에서 사회주의 세력이 급성장하면서 냉전 시대의 기틀 이 마련됐다. ”
“살아남은 세대는 복수를 외치며 다음 전쟁 을 준비 했고, 전쟁을 반대했던
사람들도 그 반대가 새로운 전쟁의 토양 이 되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다. 비극은 국가와 사회의 혐오와 이기주의 를 더 키웠다.”
“정말로 아이러니한 사실은 전쟁을 방지하기 위해 노력했던 외교적 정책적
결정 들이 한결같이 세계대전의 직접적 원인 이 됐다는 점이다.
1차 세계대전이 남긴 최고의 교훈은 역사의 교훈을 잊으면 비극은 되풀이 된다 는 것이다.
종전 기념식 을 열고 열강 정상들이 모두 참여한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더 중요한 교훈이 하나 있다. 인간은 역사의 교훈을 반드시 잊는다. 지금 유럽
에서 벌어지는 혼란과 고민,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는 갈등과 분노 가 그 증거이다.
100년이면 1000만명의 죽음이 주는 교훈도 잊기에 충분한 시간 이다. 종전 100주년
행사가 그 망각을 방지하기 위한 최후의 몸부림 이 아니기를 간절히 바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