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성영화와 변사-
우리가 살면서 말을 유창하게 하는 사람을 만나면 변호사같은 사람이라 하지만 옛날에는 '변사(辯士)'같은 사람이라 했다. 모두 조리있게 말한다는 점에서는 같지만, 전자는 법적 다툼이 있을 때 유리한 문제 해결을 바라는 의뢰인을 위해 일하고, 후자는 무성영화에 등장한 인물을 대신해서 해설을 하는 사람이라는 점에서 호(護)자가 붙기도 않기도 한다.
오늘날처럼 개인과 개인, 개인과 집단, 집단과 집단 간의 이해관계로 법적 소송까지 가는 일이 거의 없었던 옛날에는 변호사도 드물었지만 설혹 그런 문제가 일어나도 집안끼리나 이웃 어른들이 나서 화해를 붙여 해결해 주었으니 그들이 변호사와 판사 역할을 했다. 그래서 옛날 시골 사람들은 변호사가 있는지도 모르고 살았다. 그러던 중 변호사가 무슨 일을 하는지 알게 된 것은 아마 무성영화가 가설극장에서 상영된 시기부터가 아닌가 생각된다. 가설극장에서 이틀 사흘 간 상영했던 무성영화는 후일 유성영화로 바뀌었지만, 70년대 흑백TV가 보급되기 전까지 시골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입장료가 비싸 그것이 아까운 사람들은 동네에 영화포스터를 붙이거나 때는 작업에 동원되어 입장료 문제를 해결했다.
그 당시 상영된 무성영화는 가장 흥미있는 대중문화의 한 영역이었다. 명배우였던 김승호, 조미령, 김진규, 황정순 씨 등이 주연으로 나와 가난한 살림을 알뜰하게 꾸려 나가는 부모의 모습, 자식을 목숨보다 아끼는 부모의 사랑 이야기, 따뜻한 형제애, 애정의 꽃을 피우다 결실을 보지 못하는 안타까운 사랑 등을 다루었다. 이 과정에서 극중 인물들이 법정에 서야하는 안타까운 상황도 자주 등장했는데, 영화 속의 법정에서 법복(法服)을 입고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들 편에 서서 판사에게 죄인이 범죄를 저질 수밖에 없었던 상황을 탄식어린 목소리로 설명하면서 관용을 베풀어 주도록 청하는 변호사의 모습을 시골 사람들은 처음 보았다. 영화에서 그들은 힘 없고 가난한 이들의 아픔을 어루만져 주었고 인간을 인간답게 바라보도록 하는 눈을 가지게 해 주었다. 그래서 변호사의 애절한 변론으로 무죄가 선고되면 관객들은 손벽을 치며 환호했고 유죄가 나오면 한숨과 아픈 가슴을 쓰려내렸다.
그래서 무성영화에서는 변호사와 변사는 동심이체(同心二體)였다. 동심이체란 변호사가
영화에서 열연을 하면 변사는 그런 연기와 상황에 맞게 특유한 억양의 목소리로 해설을 했다는 것이다. 관람객들에게 탄식, 슬픔, 기쁨을 안겨주었던 장본인이 변사였기에 그는 당시 당당한 문화전도사(文化傳道師)였다.
오늘 날 한국영화의 독자적인 미학(美學)과 다양한 화법 개발에 이 변사들의 해설이 크게 공헌함으로써 한국영화가 지금 세계의 문화시장에서 외화(外畵)를 누르고 승승장구하게 된 배경이 되었다. 변사의 해설은 외래문화였던 영화를 우리 식의 정서와 화법으로 풀어 낸 독특한 문화이자 한국적인 특색이 반영된 영화문화이며 한국인의 정서를 주물렀던 공연문화라 하겠다.
그래서 영화를 보러 시오리를 걸어 와 온 사람들도 있었고 영화가 끝나면 밤길을 걸어 귀가했다. 귀가 길에 여우가 나온다는 산길을, 또 귀신이 득실거린다는 공동묘지와 상여 집도 지나야 했다. 그러나 이웃동네 처녀 총각들이 함께 오면 집단데이트가 되어 밤늦게 걸어가는 발길이 무서움을 압도했을 것이다.
이처럼 무성영화는 사람들에게 상상과 낭만 그리고 꿈과 희망을 심어 주었던 보물이었다.
오늘 저녁이 보름인지 유난히도 휘영청 둥근 달이 중천에 떠있다. 저 달을 보니 그 옛날 무료입장해서 본 영화 속의 심순애가 밤이슬에 젖은 자막 위로 저런 달을 보고 한없이 울었던, 판소리창법의 목소리로 심순애의 울던 모습을 그려내어 마음을 적셔주었던, 가난한 차림의 변사 모습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간다.
무성영화도 변사도 다 떠나가고 없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