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카투만두 다르바르 광장
2. 원숭이 신 하누만
3, 거리의 장신구 시장
5. 파슈파디나트 입구
4.우리와 모양이 같은 재기차기 솜씨가 신기에 가까움
5. 처음으로 보인 히말라야 설산
6. 달라이 라마 사진 6. 보드나트 8. 카투만두 시내 전경 9. 원숭이 사원에서
9일차 : 1월 13일 수요일(카투만두) 아침 미팅 약속시간 6시 30분. 대충 씻고 로비에 나와 보니 아무도 없다. 어제의 긴 여정에 모두들 많이 고단했던가보다. 다 함께 새벽의 ‘더르바르’ 광장을 산책하기로 했었다. 이 광장은 ‘카트만두’의 한 중심으로 유네스코 지정 문화재가 밀집한 곳인지라 네팔을 찾은 모든 여행자 모여드는 곳이다. 약속 시간에 한 시간이나 늦어서야 로비에 모인 일행들은 우선 아침 식사를 해결하기로 하고서 중심가인 ‘타멜’ 거리로 나선다. 모퉁이 돌아 삼거리 한편에 제과점이 깔끔한데 독일식 빵을 구워낸다는 간판이 버젓하다. 점포에 들어서니 제빵기에서 막 꺼낸 다양한 모양의 빵들이 진열장에 그득하다. 야채를 풍성히 한 쌘드위치와 커피를 받아 들고 2층 옥상에 오르니 정갈한 탁자가 거리를 굽어보며 배치되었다. 간밤의 안개는 어느 덧 사라졌다. 주변의 건물 벽 사이로 이제 막 비춰들기 시작한 햇살에 등판이 따뜻하다. 배부른 음식과 은근한 커피 향에 심신이 살짝 늘어진다. 거리로 나서니 바로 곁에 환전소가 자리했다. 여기도 인도처럼 정규은행이 아니어도 사설 환전소가 도처에 자리잡았다. 네팔에 체류 경비가 얼마나 되려나? 그냥 100US$ 정도면 우선은 충분하리라. 중심가인 ‘타멜'거리를 관통하여 ‘더르바르’ 광장을 향한다. 거리는 온통 등산 장비점과 기념품가게들이 즐비한데 이른 아침 임에도 벌써 다 개점을 했다. 길 가는 사람들은 현지인들과 함께 온갖 인종들이 뒤섞였는데 모두의 공통 목적지는 같은 방향, ‘더르바르’ 광장이다. 거리의 저만큼에 자리한 레스토랑의 간판이 ‘한국 사랑’이라고 쓰였다. 점심때 찾을 요량으로 위치를 가늠해둔다. 광장에 이르는 길을 따라 목조의 고 건축물들이 즐비한데 먼지가 더께더께 쌓인 네모 동판 지붕아래 정교히 장식 된 다양한 문양들에는 세월이 담겨 있다. 힌두사원 곁 고목 진 팽나무 아래 제법 버젓한 약국이 자리했다. 현지인들의 설사약과 감기약이 필요한 일행들에게는 깜짝 반가운 곳이다. 이 광장은 옛 왕궁과 사원이 밀집한 카트만두의 상징 거리다. 내국인과는 달리 외국인들에겐 만만찮은 입장료를 요구하는데 매표와 검표 시스템이 하도 허접하여 가상 자리로 대충 걸어 들어가는 경우도 많고, 검표원에게 그냥 미모와 웃음으로 들이밀어도 통하는 식이다. 광장에 들어서니 푸른 하늘이 툭 트였고 햇볕은 강렬하다. 썬그라스 없이는 눈부심을 감당할 수가 없다. 기온도 금방 올라 더위를 느낀다. 열대지역이라는 인도 길 위에서는 도리어 추위에 떨었고, 해발 1,300m인 이곳에선 히말라야의 언저리라는 것이 무색하게 더위를 느끼니 이걸 두고 상식의 허와 실이라 할 수 있겠다. 주위를 둘러보니 온 사방의 앞뒤로 고색창연한 목조건물이 즐비한데 그 배치가 다소 어수선하며 서로 경쟁 하는 듯하다. 그도 그럴 것이 카트만두는 3개의 왕조가 동시에 나란히 각각의 왕국을 통치했고, 바로 이 광장이 세 왕국의 중심부였다. 자연히 왕들은 서로 경쟁하듯 건축물을 올렸기에 자연 이런 배치 양상이 되었단다. 발걸음을 왼편으로 꺾어 도니 붉은 커튼이 드리워진 아래에 원숭이 신인 ‘허누만’의 동상이 기다리고 있다. 바로 ‘허누만 도카’로 불리는 17세기 ‘멀러 왕조’의 궁궐인데 지금은 박물관으로 쓰이고 있다. 따로 입장료를 지불해야하는 이곳은 아까의 허접함에 비하여 그 출입 감시가 엄정하기 그지없다. 좁은 입구에 경비병이 섰는데 아예 총검까지 부착한 소총을 어깨에 기대고 있으며 전방을 응시하는 눈초리가 매섭다. 이 궁궐을 비롯하여 이 광장에서만 7개의 건물이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있다. 이곳에서 다시 왼편 끝에는 목조로 된 사원이 있으니 바로 살아있는 신 ‘라즈 쿠마리(Raj Kumari)’가 살고 있는 ‘쿠마리사원’이다. ‘쿠마리’는 힌두교의 처녀 신 ‘쿠마리의 화신(化神)’을 말한다. 명문가의 어린 소녀 중에서 선출된 ‘쿠마리’는 살아있는 여신으로 모든 이들의 숭배를 받는지만 평소에는 외부 출입을 할 수 없고 1년에 7번 있는 종교의식 때에만 사원 밖으로 나올 수 있다. 특히 9월의 ‘인드라 축제’ 때는 국왕도 그 앞에 무릎을 꿇는단다. 그러나 ‘라즈 쿠마리’가 첫 생리를 하면 신의 저주를 받은 것으로 보고 그 자리를 물려주게 되니 대략 6, 7년간 만 신으로 대접을 받는 것이다. 이후의 그녀들의 삶은 대개는 불행하다고 하니 안타까운 일이다. 때로 관광객에게 얼굴을 보여주는 경우가 있다고 하지만 우리에게 그런 행운은 오지 않았다. 발걸음을 되돌려 다시 원숭이 신 앞으로 가노라니 저편에서 한 도인이 다가온다. 붉은 장삼을 입고 경문이 빼곡히 쓰인 노란색 숄을 걸쳤다. 숄 아래로는 온갖 종류의 목걸이가 주렁주렁하고 지팡이를 든 열손가락에는 모두 보석 반지가 끼어있다. 삼국지의 ‘관우’를 연상케 하는 수염에다가 이마에는 온통 주황색의 꽃봉오리로 장식 했는데 그 눈빛이 형형하다. 염주로 말아 올린 모자의 꼭대기엔 구리판의 초생 달을 얹었다. 그 모습이 하도 기괴하여 가만히 카메라를 들이대자 도인은 선뜻 손을 들어 ‘브이(V)’ 자를 만들고선 씨익 웃으며 포즈를 취해 주는가 싶더니 이내 다가와 손을 내민다. 모델료를 내라는 것인데 조금 당황스럽다. 원숭이 신 곁에는 족히 천(千)마리는 됨직한 비둘기들이 사람이 건네는 먹이를 탐하며 무심한 소(牛)떼의 등 위를 난다. 이제는 비슷한 상황들이 다 그만그만하다. 발바닥도 조금 아파온다. 광장의 초입, 붉은 벽돌로 아홉 개의 기단을 쌓은 뒤 목조 건물을 얹힌 전망대에 올라 다리쉬임한다. 옛날 군왕들은 이곳에서 민가를 살펴보며 밥 짓는 연기가 나지 않는 굴뚝을 점검하였단다. 처마 밑의 서까래 장식들이 현란하여 카주라호의 사원 조각을 방불케 한다. 민가로 들어서는 골목은 노천 이발소가 성업 중이다. 시멘트벽에는 작은 거울이 걸렸고 하늘색으로 칠 한 나무 의자엔 노인이 앉았다. 머리카락 전체를 면도로 밀어내는 중인데 그 뒤로도 세 명의 손님이 차례를 기다린다. 골목 안쪽은 막다른 길이다. 낡은 벽돌의 3층 집 창문마다에 걸린 빨래가 정겹다. 다시 건넌 편 광장으로 나서보니 두 줄 나란히 노점이 차려져있다. 주로 장신구과 골동품을 취급하며 흥정에 따라 값이 많이도 오르내린다. 여행 중 ‘흥정의 기술’이란 다른 게 없다. 첫 가격을 잘 받아놓으면 그 다음은 일사 천리인 것이다. 묘안석 목걸이 두 개를 구입했다. 주위엔 별반 다른 나라 사람들은 없고 중국인 몇 명에 주로 한국인 여행자들이다. 벌써 오후 3시다. 갑자기 시장기가 돈다. 아까 봐 두었던 ‘타멜’ 거리의 ‘한국 사랑’을 찾아가니 ‘삼겹살 백반’이 선뜻 눈에 든다. 잔디밭으로 잘 꾸며진 후원에 식탁이 마련되어 조용하면서도 운치가 있다. 한국말 유창한 종업원의 써비스가 깔끔하다. 몇몇 백인은 해바라기를 하며 조용히 식사를 하고 중국인들은 처마그늘 안쪽에서 시끄럽다. 오랜만에 찰진 밥과 삼겹살에 반주까지 곁들이니 포식이 되었다. 이 지역에서 ‘스즈키 경차’는 따로 표시가 없어도 모두가 택시다. ‘인도’와는 달리 구릉 지대가 많아 저렴한 ‘자전거릭샤’ 등을 도저히 운행할 수가 없다. 몇 번의 가격 흥정 후에 동쪽으로 5km를 달려 힌두교의 사원이자 화장터인 ‘파슈파디나트’로 향한다. ‘파슈’는 시바신의 여러 이름 중 하나이다. 네팔 힌두교 최고의 성지인 이곳은 1,500년의 역사를 가진다. ‘갠지즈 강’이 시작하는 ‘바그머티 강’ 옆에 자리잡은 때문에 해마다 ‘인도’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성지순례를 하기 위해 들리는 곳이다. 그 안의 화장터에서 많은 힌두교인들이 스러지고(燒) 싶어 하는 하는 가장 큰 이유는 그 재를 이 강에 뿌리면 물길 따라 흘러가 곧바로 성스러운 ‘갠지스 강’에 가 닿기 때문이다. 외국인에게만 적용되는 지나친 입장료가 부담스럽다. 또한 ‘바라나시’에서 같은 장면을 너무도 많이 겪었다. 화장터에 밴 묘한 냄새를 다시 맡아야할 이유가 없다. 발걸음을 돌려 한가히 거리 구경에 나선다. 산재한 유적들이 심하게 무너진 채 거의 방치되어있다. 바짓단을 걷어 올린 단 한명의 인부가 삼태기에 흙을 담아 느릿느릿 일을 하는데 다 정비되려면 십년 안쪽으론 어림없을 것 같다. 소박한 상가 뒤편엔 ‘죽음을 기다리는 집’도 마련되어있다. 조금이라도 ‘시바’ 신의 곁으로 가까이 가려하는 인도의 부자들까지도 이곳에서 몸을 씻는 것을 소원으로 여기고 몇 달씩 지내며 그 시간을 경건하게 기다린단다. 길가 그늘에서 다리쉼을 하는데 어미 없는 송아지가 스스럼없이 다가오더니 나그네의 손에 들려있는 바나나를 욕심낸다. 공터에서 재기차기를 하는 젊은이들의 솜씨가 신기에 가깝다. 사하촌을 벗어나 ‘티벳 불교’의 근거지인 ‘보드나트’사원으로 걸음을 재촉한다. 먼지 폴폴 나는 비포장의 언덕길을 넘으니 포실한 동네가 자리했다. 저만큼 미루나무 그늘 아래 노천이발소가 자리했다. 우리네의 어릴 적 풍경을 생각하며 줌 렌즈를 들이대자 돌아오는 반응이 그리 우호적이지 못하다. 가운데 손가락을 세워 보이며 뭐라 지껄이는데 어쩐지 배타적 분위기가 느껴진다. 짐짓 모른 척 웃음과 함께 손을 흔들어주고 말았다. 붉은 벽돌담 벽면엔 ‘팬 케익’ 모양으로 붙여 둔 쇠똥이 빼곡하다. 잘 말려두게 되면 불땀 좋은 연료가 된다. 조악한 군것질꺼리가 진열 된 손바닥 만 한 좌판을 담배 문 중년의 여인이 지키고 있다. 그래도 구운 옥수수와 땅콩은 먹음직하게 보인다. 군 옥수수 입에 물고 ‘쿠마리 하이스쿨’을 돌아서니 우물가의 빨래터엔 아이들까지 섞여 수다가 시끄럽고, 집 안엔 큰 베틀 앞에 아낙들이 고운 옷감 짜기에 한창이다. 고개를 들어보니 저편 언덕 너머엔 장엄한 설산이 펼쳐있다. 이번 여정의 한 목적이 히말라야 연봉을 바라보는 트레킹인데 이제 설산을 처음 대하게 되니 벌써부터 마음이 설렌다. 비포장의 자갈 언덕이 헛바퀴 돌리는 트럭 탓에 뽀얀 흙먼지가 가득하다. 눈코를 가리고서 힘겹게 대로에 올라서자 바로 ‘보드나트’로 이어진 주(主)도로다. 상점이 즐비한 가운데 사진관 벽에 기대인 ‘티베트’ 망명 정부의 지도자 ‘달리이라마’의 사진이 인상적이어서 ‘티베트’의 느낌이 든다. 이 거리는 ‘티베트’가 중국의 한 자치구로 병합 되던 1950년대 집단으로 넘어온 망명자들의 거주지로서 오늘날에는 ‘네팔’ 속의 작은 ‘티베트가 된 때문에 이런 분위기가 된 것이리라. 가던 길 건너 왼편에 연꽃무늬 장식의 정문 뒤로 ‘엎어 놓은 반구형’의 ‘스투파(대형 탑)’가 섰다. 그 위로는 노란 벽돌을 층층이 쌓고서 붉은 커튼을 드리웠고, 그 아래엔 ‘이마에 제3의 눈을 가진 부처님’이 세상을 굽어본다. 그 눈은 ‘지혜의 눈’으로서 통찰력이 담긴 눈매가 나그네를 움찔하게 만든다. 다시 그 위로 ‘도금된 13층의 정사면뿔 고깔 탑’에는 줄줄이 흑백청황적 ‘타르초’ 깃발이 매달려 온 하늘을 가렸다. 이런 저런 종교적 풍경들로 인해 경배심이 절로 인다. 합장을 하고서 삼배로 예를 표한 뒤 많은 ‘티베트’인들 틈에 끼어 ‘코라(탑돌이)’를 돈다. 길 따라 3층 구조의 ‘티베트’ 풍 건물들이 잇닿은 것이 마치 티벳의 수도인 ‘랏사’의 ‘바코르 거리’를 연상케 한다. 그 곳은 티벳 불교 최고의 성지인 ‘조캉사원’의 둘레 길로써 사시장철 ‘코라’를 도는 순례자들로 넘쳐나는 곳이다. 몇 년 전에 방문 했었던 ‘조캉사원’의 광장과 일주 도로의 모습이 뚜렷하다. 그 곳에는 중생 제도의 간절한 염원을 안고서 오체투지의 예를 행하는 ‘티베탄’들로 넘쳐났었다. 하늘에서 마른번개가 몇 번 치더니 이내 바람이 일며 검은 구름에 어둑해진다. 처마 아래로 비를 피하는데 마침 ‘마니차’가 놓인 곳이다. 이것은 불경을 내장한 원통으로 한 바퀴를 돌리면 경전을 한번 읽은 것과 마찬가지라는 ‘티벳불교’의 성물이다. 합장과 함께 몇 번의 통돌이를 한 뒤 오늘의 마지막 방문지 ‘원숭이 사원’으로 향한다. 택시를 타고서 혼잡한 도심을 관통하여 도시의 반대편 ‘스엠브’ 언덕에 위치한 사원에 당도하니 서서히 땅거미가 깔리기 시작한다. ‘스와얌브나트 사원(SwayambBodhnath)’. "스스로 존재함"이라는 뜻이며 많은 원숭이 때문에 ‘원숭이 사원’으로 불리는 곳. 이 곳은 네팔에서 가장 오래된 불교 사원으로 역시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문화 유산이다. 하도 돌아다니다 보니 무릎관절이 아파온다. 가파르게 조성 된 385개의 계단이 만만찮다. 계단가의 몇 마리 원숭이를 벗하며 힘들게 오르던 차에 웬 중(中)노인이 다가와 한국 돈을 꺼내더니 환전을 부탁한다. 연유야 어떻든 간에 두툼한 한국 돈 천원권이 이곳에서는 소용없으리라. 성격 좋은 아우가 열심히 환율 계산을 해보더니 선선히 바꾸어준다. 여기의 물가 수준으로는 꽤 많은 금액을 챙긴 노인의 표정이 흐뭇하다. 사원의 경내에 올라서니 높은 곳에 자리한지라 ‘카트만두’ 시내 전체가 한 눈에 내려다 뵌다. 산 넘어 서쪽 저편엔 낮은 구름 아래로 붉은 노을이 번졌다. 불교사원인지라 방문자들은 주로 검붉은 전통 옷을 걸친 티벳 사람들이다. 역시나 ‘타르초’ 깃발은 저녁 무렵의 골바람에 요란히도 펄럭인다. 저 아래로 시내에는 창에 불 밝혀지는 숫자가 점점 늘어난다. 서울 절반 크기의 ‘카트만두’는 다섯 개의 봉우리로 쌓인 분지 지형으로서 원래는 호수였다 한다. 전설에 의하면 멀리 ‘티베트’에서 온 문수보살이 명상 끝에 ‘지혜의 칼’로 산허리 내리치자 물이 빠지며 분지가 만들어졌고 그 뒤 연꽃이 있던 자리에 이 사원을 지었다했으니 바로 이곳은 ‘문수도량’인 것이다. 이미 날은 어두웠다. 다시 내려온 긴 계단, 희미한 가로등 아래에 몇몇 촛불 상인들이 순례자를 기다린다. 여행객들에게 공덕을 비는 촛불을 파는 것이다. 어둠 속에 빨갛게 호롱거리는 불꽃이 몹시 아름답다. 오늘은 처음으로 전체 일행이 한자리에서 저녁 식사를 하기로 한 날이다. 미리 봐 두었던 한국 식당 ‘축제’를 찾아가니 인상 좋은 ‘네팔’인 사장의 한국어가 너무도 유창하다. 서울의 가락시장에서 7년을 일했단다. 원래 한국인이 경영하던 곳을 인수했다는데 매너와 함께 음식이 훌륭하다. 아침 ‘쌘드위치’와 커피 이후 종일토록 변변히 식사도 못했다. 삼겹살을 구워놓고 양주와 맥주로 폭탄주를 만들었다. 오랜만의 포식에 느긋해진다. 쌉쏘롬한 상추 맛도 일품이다. 내일의 여정을 위해 공기 밥 두 그릇을 챙겨두었다. 튜브 고추장이 있으니 비상식량이 되리라. 장비점에 들러 쑈핑을 하려는데 이미 철시할 시간이다. 잠깐 둘러보며 ‘레키 스틱’ 한 쌍만을 구입하고 나머진 뒤로 미뤄둔다. 상가들이 철시하자 거리는 다른 모습으로 바뀐다. 온 사방의 지하실이 클럽으로 변신하는가 보다. 방음이 제대로 안된 채 흘러나오는 ‘그룹싸운드’의 연주가 거리 가득 시끄럽다. 슈퍼에서 맥주 몇 병을 준비하였다. 숙소에 돌아와 그간 친근해진 다른 두 명과 함께 조촐한 파티를 가졌다. 시간은 역시 자정에 가깝고 창밖엔 보슬비가 내린다. 오전에 맡겨둔 세탁물을 찾았다. 수건과 속옷 등속의 보송보송한 느낌이 새롭다. |
출처: 우보조아 원문보기 글쓴이: 牛步 yyun bird
첫댓글 재미있는 인도여행 실감이 새록새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