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9년 2월 4일,
경향신문 `여적(餘滴)` 필화사건
경향신문 1959년 2월 4일자 고정칼럼 `여적(餘滴)`란의 기사가 선거제를 부인하고 폭동을 선동했다는
이유로 다음날인 2월 5일 경향신문 한창우 사장 앞으로 압수수색영장이 내려졌다. 편집국장은 신문이
발행된 당일 연행됐다. 여적(餘滴)은 ‘붓에 남아 있는 먹물’이란 사전적 의미처럼 우리나라 사회에서
일어난 각종 정치·사회·문화 현상을 원고지 5장 내외의 짧은 행간을 통해 간결, 명쾌하게 비평해왔다.
강한 주장을 펴지 않으면서도 예리한 시각을 견지해온 ‘여적’은 60년이 넘는 경향신문의 역사와 줄곧
함께해 온 유일한 고정 칼럼이었다. 지금까지 ‘여적’을 집필해온 150여명의 필자 중에는 당대 최고의
논객들이 포함돼 있었다.
경향신문 1959년 2월 4일, ‘여적餘滴’
문제의 ‘여적’ 칼럼은 1959년 2월 4일자에 실린 글인데 같은 신문에 연재 중인 페르디난드 A 허맨스
교수(미국 노트르담대학)의 글을 논평하는 내용이었다. ‘다수결의 원칙과 윤리’라는 그의 글에는
주목할 만한 견해가 담겨 있어 국내에서도 소개할 필요가 있었다고 보인다. ‘여적’의 필자는 그중
일부를 인용하면서 좀 강성의 논조를 펼쳤다. 그 첫머리의 일부를 소개하면 이러하다.
“허맨스 교수에 의하면 ‘다수결의 폭정’이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아마도 이 학설을 보는 한국의
다수당은 아전인수로 해석하려고 달려들 것 같으나 자세히 보면 그의 주장 속에는 하나의 커다란
전제조건이 있다. 그것은 즉 ‘인민이 성숙되어 있어서 자기 의사를 자유롭게 행사할 수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다는 것이요, 바꾸어 말하면 어제는 다수당을 지지하여 그에게 권력을 준 투표자도
내일은 그것을 버리고 그를 소수자로 전락시킬지도 모르며….”
‘여적’은 그 다음 대목에서 “한국의 현실을 논하자면, 선거가 올바로 되느냐 못되느냐의 원시적인
요건부터 따져야 할 것이다”라고 문제를 제기한 데 이어 “물론 ‘진정한 다수’라는 것이 선거로만 표시되는
것은 아니다. 선거가 진정 다수결정에 무능력할 때는 결론으로는 또 한 가지 폭력에 의한 진정
다수결정이라는 것이 있을 수 있는 일이요, 그것을 가리켜 혁명이라고 할 것이다. 그렇다면 가장된
다수라는 것은 조만간 진정한 다수로 전환되는 것이 역사적 원칙인 것이니 오늘날 한국의 위기의
본질을 대국적으로 파악하는 출발점이 여기 있지 않을까”라고 맺는다.
이승만 정부는 이 단평을 “혁명에 의해서라도 진정한 다수의 의사가 반영되어야 한다고 역설함으로써
폭력을 선동했다”며 헌법에 규정한 선거제도를 부정하고 폭력을 선동했다는 죄목을 뒤집어씌웠다.
경찰은 2월17일 ‘여적’ 필자인 주요한에 대한 구속영장을 신청했다. 하지만 법원은 이를 기각했다.
이 사건을 송치받은 서울지검(담당 조인구 부장검사)은 주요한과 한창우를 내란선동 및 출판물에 의한
명예훼손 혐의로 불구속 기소하는 한편 강영수 국장은 불기소 처분으로 종결짓는다. ‘여적’ 칼럼은
내란선동으로, ‘정부와 여당의 지리멸렬상’이란 기사(1959년 1월 11일자)는 이기붕과 스코필드 박사의
명예를 훼손한 혐의로 기소되었다.
자유당정권 치하의 최대 언론탄압사건으로 꼽히는 여적필화사건은 1959년 4월 30일 당시 가장 격렬한
야당지였던 `경향신문`에 대한 폐간명령으로 이어졌다. 폐간이유는 1월 11일자 사설 ‘정부와 여당의
지리멸렬상’이 허위보도이며, 2월 5일자 ‘여적’란의 기사가 폭동을 선동했으며, 2월 16일 홍천 모사단의
유류부정사건 기사가 허위보도이고, 4월 3일자 간첩관련 기사는 공범들의 도주를 방조했으며, 4월 15일
이승만대통령의 기자회견 기사를 왜곡, 허위 보도함으로써 미군정법령 88호를 위반했다는 것이었다.
폐간 결정 직후 경향신문 편집부의 침통한 모습
그러나 실제적인 이유는 `경향신문`이 1956년 정-부통령선거, 장면부통령 저격사건, 보안법파동 등을
보도하면서 노골적인 대정부 비판기사를 게재해온 데다, 경향신문이 카톨릭재단으로 민주당의 장면
부통령을 적극 후원했기 때문이었다. 폐간이라는 보복조치에 앞서 서울시경은 단평 `여적`의 필자
주요한과 발행인 한창우를 내란선동혐의로 입건했다. 정부의 이러한 탄압에 맞서 경향신문은 행정소송을
제기하는 등 끈질긴 법정투쟁을 벌인 결과, 폐간된지 361일 만인 1960년 4월 27일자 조간부터 복간됐다.
그러나 1946년 창간 이래 반독재 언론의 대명사였던 경향신문은 복간의 기쁨이 그리 오래 지속되지는
못했다. 1년간의 투쟁 끝에 복간이 된 경향신문은 이후에도 박정희 정권에 대하여 거침없는 필봉을
휘둘렀다. 경향신문은 1964년 5월 ‘허기진 군상’ 등의 시리즈를 통해 도시 영세민들의 비참한 삶과
정경유착의 실태 등을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이 시리즈 기사는 박정희 대통령을 격노케 했으며 결국
경향신문은 이후 반공법 위반이라는 명목으로 집중 공격을 받았고 편집국장과 기자 등 모두 7명이
구속되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된다.
1964년 6.3 계엄 선포 다음 날 ‘허기진 군상’의 기사를 문제삼아 당시 이준구 사장과 손충무 기자를
구속했다. 이준구 사장은 1965년 5월에도 다시 반공법 혐의로 구속된다. 그의 재판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박정희 대통령은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을 불러 경향신문에 대한 조치를 지시한다.
1964년 6월, 재판을 받고 있는 이준구 사장(오른쪽 앉아 있는 사람)
1965년 9월 경향신문의 채권단인 한일은행 등 3개 시중은행은 유독 경향신문에 대하여서만 채권
전액에 대한 일시 상환을 요구하고 결국 은밀하게 경향신문 사옥과 윤전기에 대한 경매를 신청했다.
그리고 1966년 1월 25일 단독 응찰자인 기아산업 김철호 사장에게 넘기게 되었다. 당시 기아산업이
법정관리 중인 점을 감안하면 그 배경에 박정희 정권이 있었음은 가히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것이었다.
이와 관련하여 서울분실장이었던 백태하는 자신의 책에서 “김철호의 이름만 이용했을 뿐 진짜
주인은 박정희와 그 측근들”이라며 “인수자금도 김형욱이 마련해 박정희에게 바쳤고 인수 뒤
경영은 박정희의 지시에 따라 제헌국회의원이었던 박찬현이 맡았을 뿐 아니라 김철호는 청와대
지시에 따라 (소유권을) 신진자동차 김창원에게 넘겨주었고 계속해서 적당한 수순에 따라
문화방송과 합병해 박정희 소유가 됐다”고 증언한 바 있다. 실제 경향신문은 1969년 김창원
소유로 넘어갔다가 1974년 문화방송과 통합돼 5.16장학회 소유가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