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석제씨의 단편 ‘책’을 읽다가 거기에 나오는 당숙에 관한 이야기를 보고는
오래 전에 작고한 내 당숙의 생각이 났다. 옛날 분이라 소설 속의 당숙처럼 많이 배우지는 못했으나 집안에서의
지켜오는 예절이라던가, 내력을 환히 아시는 분이라 어렵기도 한 분이었다. 촌수로 따지면 7촌으로, 재당숙
(재종숙)이지만, 어려서 절손된 다른 할아버지네로 출계(양자)를 해서 그리된 것이므로 실제로는 5촌 당숙이다.
아버지와는 4촌인 동시에 6촌 형제가 되는 것이다.
이 한 분뿐이었던 당숙은, 내가 20대 중반이었을 때 세상을 떠났다.
지금은 당산 아래에 있는, 그리 넓지도 않은 종산 한 쪽에, 다른 집안 어른들과 함께 고단한 몸을 누이고 있다.
어렸을 때 내 눈에 비친 당숙의 모습은, 집안에 큰 일이 있으면 궂은일 마른일 마다않고 발 벗고 나서서 수범을
보여준 어른이었다. 한 예로 가을에 시제를 지내는 종산에서는 묘소의 주인이 집안의 어떤 분이라는 것부터,
진설하는 제물에 이르끼 까지 일일이 간섭을 하기도 했으며, 일가친척이 상이라도 당하면 그 유구의 염은 당숙이
도맡아하다시피 했다.
집성촌이기도 했던 고향동네에는 선대에서 갈라져 내려와, 일가의 분포는 종가인 상파와 중파,
그리고 계파가 있었다. 우리는 그중의 막내인 계파에 속했는데, 그 계파 중에 고향에 적을 두고 살고 있는 가족은
우리 집 쪽과 당숙 어른 밖에 없었다. 다른 형제가 없어 홀로 대를 이어 오던 당숙이 아버지와 가깝게 지낸 것은
그런 탓도 있고, 아버지의 형님 - 내 큰 아버지들은 당숙과 나이차가 너무 나서, 2살 많은 아버지와 거의 같은
동년배 의식을 느꼈기 때문이기도 한 것 같다.
60년대에 들어오면서, 당숙을 포함한 우리 쪽 계파의 가세가 기울기 시작했다.
후일에 와서 어렴풋이 알게 되었지만, 당시에 큰 아버지들이 다 돌아가시자 사촌 형들은 저마다 나름대로의
생활을 꾸려가는 과정에서 손을 대는 것마다 모두 실패하였다. 또 아버지마저 병을 얻어 투병생활을 하기
시작했으며, 당숙 네도 새로 지은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집을 팔고 협소한 토담집으로 이사를 갔다.
몰락의 결과는 뻔한 것이다.
할아버지 앞으로 되어있던, 집안의 산이 팔려나가고, 문전옥답이 날라 갔으며, 텃밭이 잘라져 나갔다.
그런 와중에서도 당숙은 와병중인 아버지를 자주 뵈러 오시곤 했는데 아버지와 대화를 나누고 있다가도, 구석에서
아무 것도 모르고 마냥 철부지 노릇을 하고 있는 나를 바라볼 때는 눈물이 그렁그렁해 보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당숙은 집안의 몰락이 못내 안타까웠던 것으로 생각된다. 같은 일가붙이라 해도 상파와 중파의 다른 집들은, 행세
하는 것이 우리 계파보다 훨씬 넉넉했기 때문이었다.
당신도 가세가 빈한해졌음에도 불구하고 만날 때마다 사촌 형들은 물론, 의미도 모르는 나에게 집안을
일으켜 세워야 한다는 말을 수없이 했다. 그런 당숙은 당질 중에서도 제일 나이가 어렸던 나를 각별히 귀여워했다.
아버지가 누워계신 우리 집에 올 때마다 무언가 항상 들고 왔는데 어느 핸가는 주머니에서 한 움큼이나 되는 밤을
꺼내 내 작은 두 손위에 놓아주기도 했고, 한 겨울에는 올무에 걸린 산토끼를 들고 오기도 했다.
아버지와 친 형제나 다름없었고, 당신 항렬에는 다 돌아가시고 아버지와 당숙뿐인 것도 작용했을 것이다.
또 당숙의 집안 염려하는 말을, 그렇게 큰 나이차가 안 나는 사촌 형들이나, 당신의 옹골차지 못한 큰 아들(8촌)은
잔소리로 치부하고 백안시했을 것이니 덕분에 철모르는 나에게 쏠렸을 법도 하다. 아버지의 병원 수발 때문에
우리가 고향을 떠나기 전까지 당숙의 발걸음은 늘 우리 집을 떠나지 않았다.
오랜 병석에서 아버지가 눈을 감자, 달려온 당숙은 아버지를 붙들고 통곡을 하며 눈물을 흘렸다.
당신의 손으로 염을 하면서 이것저것 가르쳐주기도 했고, 장례식날 상여 뒤를 따라가는 내가 ,머리를 덮고 있는
베포를 자꾸 벗어내려 하자, 그러는 법이 아니라고 꾸지람을 하기도 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도 고향에
들어가면 때를 막론하고 당고개, 그 토담집에 있는 당숙을 찾아뵙곤 했다. 그때마다 집안 염려며 내 앞을 걱정하는
것은 여전했다.
몇 년 뒤에 내 나이 갓 스물에 어머니마저 세상을 뜨자, 당숙은 그 때도 묵묵히 어머니의 염을 마치고
장례를 치렀다. 그리고 몇 년이 지나도 피지 않았던 당숙의 형편은, 노쇠해져가는 육신을 지치게 했는지 병을 얻어
자리에 눕게 만들었다. 그렇게 아픈 몸이면서도 추석이나 설날에 찾아가면 반갑게 맞이하며 당숙모를 시켜 음식을
차려놓고는 술잔을 채워 주기도 했다.
당숙은 겨울에 세상을 등졌다.
연락을 받고 행낭채도 없는 그 토담집에 갔을 때는, 좁은 마당을 가득 메운 문상객들로 붐볐다.
병풍 앞에 놓인 영정 앞에서는 울지도 못한 채, 뒤뜰로 돌아가 담벼락을 붙들고 울었던 것이 엊그제 같은데 30년이
지났다. 당숙의 집이 있던 당고개에서는 북쪽에 있는 당산 밑 종산이 잘 보인다. 그래서 당숙의 묘소는 당신의 집
에서도 또렷이 보였다. 오며가며 집안의 누군가 묘소를 보고 당신을 기억해주길 바랬는지 모른다.
그러나 세월이 가면서 당숙이 살던 당고개도, 종산 앞에도 건물이 들어차, 옛 모습은 찾아볼 길이 없으며
당신의 묘소는 보이지 않는다. 생전에 집안일을 그렇게 걱정하고, 누군가 장성하여 일으켜 주기를 소망했던 당숙의
바램은 아직도 요원하기만 한데 어느 덧 세월이 흘러, 나도 수많은 당질들이 당숙이라고 부르는 위치에 와 있다.
내 스스로도 앞길을 가늠하지 못하는 주제에, 나 역시 당질들을 볼 때마다 붙잡고 잔소리를 하는 나이가 된 것이다.
그 옛날에 당숙이 우리에게 그랬던 것처럼.
첫댓글 피붙이조차 몰라라 하는 작금의 세태... 당숙어른의 훈훈한 정이 그립군요. 글 잘 읽고 갑니다.
당고개님 이제 알고보니 당고개에 사셔서 닉네임이 당고개였군요. 지난번에 올려주신 술심부름에서도 알수 있었고, 당숙에도 당고개님의 살아오신 내력이 잘 드러나 있네요. 그래서 예전부터 알고 있던 분처럼 친근한 마음이 들어요. 전에는 글에 나타난 그런 당숙같은 분들이 꽤 있었는데, 지금은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는 세태가 되었지요. 좋은 당숙의 추억을 가지고 계신 당고개님 글 잘 읽었습니다.
세월이 변했다해도 집안의 계보를 중히 여기지 않을수 없지요. 우리들의 뿌리인걸요. 당숙님의 글을 읽고 더더욱 그러한 마음을 새겨봅니다.
우리집에서 떠나지 않는 당숙의 발걸음.부모님의 염을 해주셨다니 정말 고마운 분이군요. 요즘은 보기드문 일이지요^ㅎ^
많은걸 생각케하고 공감합니다. 저도 시골에서 일가가 번성한 집성촌에서 살아 때론 북적대는것이 싫기도 했는데, 일가를 이루고 맏며느리로 자식낳아 기르며 사노라니 그래도 역시 집안의 소중함을 알게 됩니다. 잘 읽었습니다. 당고개님!
어린 철부지의 앞날을 걱정하며 그렁그렁 눈물을고 계셨던 당숙님,,주머니에 한줌의 밤을 넣어다 살며시 건네주는 당숙님,,, 뜻데로되지 않는 현실에서의 고뇌가 느껴지는 참 마음 따뜻한 글입니다..그런 당숙님의 영향을 받은 당고개님도 어떤 분이신가가 느껴집니다..늘 건강하시기 바랍니다..